소설리스트

회귀신공-127화 (127/200)

# 127

“그 전에 먼저 이름을 들어야겠어요.”

“이름? 그런 걸 들어서 뭐하게?”

“만약 내가 이겼는데 당신이 도망치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이름과 출신을 알려 주세요. 절대 도망치지 못할 테니까요.”

참으로 당돌한 꼬마 아가씨다.

완전히 자신이 이길 거라는 전제하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그녀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주었다.

“사천의 신유강이다.”

“신 공자. 좋아요. 저는 백리지연이라고 해요. 산서 출신이에요.”

백리지연?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긴 하다.

그러나 워낙 세상에는 비슷한 이름을 가진 인간들이 많았고,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도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웃었다.

“그래, 백리…… 으음, 소저? 내려가도록 하지.”

워낙 나이 차이가 있는 탓에 소저라 부르는 것이 껄끄럽다는 감정이 확연하게 보이는 표정이다. 그러나 이름을 들었는데 여전히 꼬맹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 신유강은 떨떠름한 얼굴로 소저란 호칭을 써 준 것이다.

못마땅한 신유강의 감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 탓인지 백리지연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나이 차이가 상당한 신유강에게 소저라는 말을 들으니 괜스레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마, 말도 안 돼…….”

신유강은 입을 쩍 벌렸다.

반대로 백리지연의 입가에는 도도하고 화사한 미소가 맺혔다.

다섯 시진, 산에서 마을까지 내려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산길을 잘 탈 줄 모르는 백리지연과는 다르게, 신유강은 익숙하게 산을 타고 내려왔다.

물론 중간 중간 헤매지만 않았더라면 더욱 일찍 내려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신유강이 보고 있는 마을 풍경은 평소 알고 있던 사천 성도의 모습이 아니다. 멀리서 언뜻 보았을 때부터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은 백리지연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기어코 이곳이 어디냐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하남이지 어디긴 어디겠소?”

대답이 들려왔을 때 신유강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정말로 하남이란 말인가.

사천에서 하남까지의 거리는 상당하다.

물론 신강까지 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최소 한 달은 이동을 해야 한다. 그런 곳을 고작해야 몇 시진 만에 도착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하하…….’

회귀신공의 힘을 이용한다면 못할 것이 없다.

과거 하남에서 살았으니 만큼, 그 당시로 회귀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귀신공의 힘은 직접 가 본 곳에 한한다.

그럼 그 산을 가 본 적 있던가?

신유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가 본 적 없는 곳이다.

“호호, 거 봐요. 제가 이겼죠?”

백리지연은 정말이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남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내기로 금 열 냥을 걸기는 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산에서 헤맸으니, 하남을 벗어났다는 결과 또한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참으로 다행이다.

백리지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돼요. 여긴 정말로 하남이라니까요?”

“사, 사기야!”

“신 공자, 내 말 듣고 있기는 해요?”

신유강은 공황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진소소와 함께 하북으로 가야 하는 날에, 하필이면 하남이라니? 더욱이 조금 전부터 귀(歸)의 힘을 이용해 사천으로 움직여 보려 하였지만, 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웬걸?

더 이상 회귀신공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것은 결코 있을 리 없는 일이다. 산속에서 분명히 기운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럼 이 상황은?

“하하하…….”

신유강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차라리 웃음만 나왔다.

도대체 왜 자신은 하남에 있는가? 그리고 왜 귀공(歸功)의 힘이 움직이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술을 먹기는 했던 걸까?

신유강은 멍한 기억을 다시금 더듬었다.

‘술, 술, 술…….’

오늘 아침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진소소의 재촉에 아침 일찍 일어나 하북으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옷과 필요한 짐들을 꾸깃꾸깃 대충 집어넣다가 진소소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거기까지는 기억이 난다.

‘음…….’

그 뒤, 툇마루에서 느긋하게 당과를 먹으며 진소소의 자태와 당소혜를 관찰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었다.

사마강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더더욱 즐거웠을 것이다.

그 뒤는?

장원을 나와서…….

기억이 없다.

“허?”

“왜 그러세요?”

“왜 기억이 없지?”

“네?”

농담이 아니다.

술을 진탕이 될 정도로 마신 탓에 기억이 없는 게 아니다. 뚜렷하기 그지없는 아침의 일을 떠올렸으니 확실하다.

몸에서는 술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좀 전부터 수상쩍었으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기억을 잃었다는 말인가.

신유강은 이 어이없고 황당한 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뭔가, 기억을 잃기 직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도 같다. 단순한 느낌이 아닌 확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직감이다.

그런데 생각이 나지 않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로 치매? 아니면 회귀신공의 부작용?

온갖 기이한 생각이 다 든다.

“신 공자!”

“무, 무슨 일이지?”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렸다.

무슨 놈의 꼬맹이 목소리가 이렇게 커?

잘못하다간 귀청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제가 이겼잖아요?”

백리지연이 돈을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그것이 어찌나 우스워 보이던지 신유강이 쯧쯧 혀를 찼다.

이 꼬마 아가씨,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군.

“백리 소저?”

“네.”

“산속에서 내가 소저를 데리고 내려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소저는 늑대 밥이 되었을지도 모르오.”

“호호호, 농담도 잘하시네요. 이래봬도 늑대 정도는 잡을 수 있어요.”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건지, 백리지연은 허리춤의 검갑을 집어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몰골과는 다르게, 척 보기에도 상당한 명검임을 증명하듯 화려하기 짝이 없는 검갑이다.

“그럼 호랑이 먹이가 되었을지도 몰랐을 거요.”

“…….”

결코 돈을 주고 싶지 않아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자면, 신유강이 백리지연의 생명에 은인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에 가깝다. 며칠 동안 산을 헤맨 어린 소녀를 마을에 데려다 놓지 않았는가.

이 얼마나 대협과도 같은 행동인가.

금 열 냥을 주는 것이 아닌, 오히려 받아야 정상이다.

신유강은 히죽히죽 웃음을 지었다.

“후우…….”

백리지연은 그런 신유강의 얼굴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것은 나지막한 한숨 소리였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신유강을 바라본 백리지연의 눈빛은, 마치 쓰레기보다 못한 이를 보는 것 같이 가라앉아 있었다.

신유강은 가슴 한구석이 뜨끔하였으나 표정은 당당했다.

“남아일언?”

“그게 어쨌다는 거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인 데다 얄밉기까지 하다.

백리지연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여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신유강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결국 잡아떼는 놈이 이긴다.

신유강은 지금 그 억지를 현실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아직 꽃다운 나이 방년 십육 세 어린 소녀인 백리지연. 그녀는 신유강 덕분에 세상의 어두운 면을 알게 되었다.

그때, 누군가 신유강의 바지 자락을 꾹꾹 잡아 늘렸다.

슬쩍 몸을 돌려 고개를 내리자, 이제 갓 세 살이나 되었을 법한 어린 아이가 코를 질질 흘리며 자그마한 동냥 그릇을 당차게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신유강은 그 아이를 바라봤다.

그 아이 또한 신유강을 바라봤다.

백리지연은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신유강과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경악성을 터트릴 만한 말을 내뱉었다.

“혹시 신 공자의 아들이에요? 똑 닮았네요.”

그 우습지도 않은 말에 콧방귀를 뀌며, 신유강은 다시 한 번 어린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척 봐도 열 살도 넘지 않은 듯한 작은 아이는, 그 뚜렷한 이목구비가 어딜 보나 신유강을 닮았다.

놀랍게도 백리지연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

신유강은 가끔 생각했었다.

회귀신공이라는 힘으로 만 이천 번이 넘는 회귀를 겪으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만약 지금 이 상태로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 다른 나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지랄…….”

이내 콧방귀를 뀌며 품에서 은자 한 냥을 꺼내, 자신을 쏙 빼닮은 어린아이의 동냥그릇을 채워 주었다. 신유강과 닮은 아이는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찬그릇에 있는 은자를 냉큼 집어 품에 넣었다.

이윽고 그 작은 몸으로 다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어디론가 쪼르르 사라졌다.

“정말로 아들 아니에요? 완전 똑같던데?”

“세상에는 자기와 닮은 사람이 둘셋 정도는 있다고 하더군.”

“헤에, 누가 그런 소리를?”

백리지연은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괜히 오싹해졌는지 불쾌감이 감도는 표정이었다.

“그냥 들은 이야기.”

진소소가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굳이 백리지연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대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유강의 행동에, 백리지연은 고까운 눈빛을 보냈다.

“뭐 좋아요. 어쨌든 산을 내려오게 해 줘서 고마워요, 신 공자. 뭐라도 대접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왠지 제가 손해보는 것 같아 그만둘래요.”

“예의라고는 쥐뿔도 없는 꼬마 아가씨로군.”

내기를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신유강의 표정과 말투다. 더욱이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백리지연을 쏘아보고 있기까지 했다.

백리지연은 어이가 없었다.

산에서 데리고 내려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기는 하나, 남자가 자기가 한 말조차 지키지 않고 당당하게 잡아떼는 것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상황, 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은 신유강이 아닌 백리지연 쪽이다.

“흥, 뭐라고 해도 좋아요. 만약 저에게 보답을 받고 싶다면 찾아와 보세요.”

“응? 마치 찾아도 만나지 못할 거라는 말투로군.”

“호호, 물론이죠. 신 공자 같은 사람이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호오,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신유강은 눈빛을 빛냈다.

백리지연이 도발하는 것이 뻔히 보이기는 하지만, 저 당돌한 꼬마 아가씨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듯한 눈치다.

“하남 무림맹, 저는 그곳에 있어요. 만약 당신이 무림맹에서 저를 만날 수 있다면, 금 열 냥은 물론이고 제가 당신에게 한 턱 거하게 내도록 하죠. 호호호!”

백리지연은 한껏 자신 있는 말투로 이야기하곤 웃었다.

하남 무림맹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는 발을 들일 수 없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구파의 한 축이며 백리세가의 여식인 그녀는, 무림맹에서도 상당히 격이 높은 특실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군. 하지만 굳이 찾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는데. 지나가다 만난다면 또 모를까.”

“헤에- 하긴 돈이 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천하의 무림맹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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