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신유강은 슬쩍 시선을 돌려 백리지연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콧대가 높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는데, 아무래도 무림맹 내에서도 상당히 직위가 있는 인물 같아 보였다.
그러니 저런 말을 당당히 하는 것이다.
하기야 백리세가의 여식이니 오죽할까.
신유강은 울컥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천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진소소에게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신유강은 지체 없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그녀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저벅저벅 걸어가자 뒤에서 투덜투덜거리는 백리지연의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한 귀로 흘렸다.
신유강은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회귀신공의 힘을 이용한다면 언제든 사천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기에, 지금은 잠시 이 거리를 돌아보고자 했다.
십 년이 넘게 떠나 있었던 하남 거리.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는 어린 신유강을 거지 굴 대장이 주워 키웠고, 살기 위해 동냥질을 하며 뒷주머니를 챙겼다.
그 어린 나이에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덕택이다.
신유강은 진소소와 함께 하북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은 채 거리를 걸었다. 어렸을 적 갔던 골목은 물론이며, 곳곳에는 과거의 채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그가 도착한 곳은 거지 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골목이었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으로, 무언가를 숨기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동냥한 돈을 이곳에 숨겼었다.
사천으로 도망쳤을 때 그것을 들고 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많이 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긴 몇 년을 모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신유강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그 옆에는 자그마한 돌들이 널브러져 있다. 딱 보아도 이상한 느낌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모양새다.
신유강은 어린 시절이 생각나 조심스레 그곳을 향해 다가섰다. 작은 돌멩이를 하나 쥐어 들고 흙을 파내자, 안에서 꽤나 두터운 천이 나왔다.
이것은 부모에게 버림을 당했을 당시, 신유강을 감싸고 있던 천이다. 거지소굴에서 그를 길러 주었던 여인이 고이 간직하고 있다 죽기 전에 돌려받았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
신유강은 불현듯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게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천은 꽤나 오래전에 잃어 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언제부터인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동안 천을 찾기 위해 이 근방 거리를 이 잡듯 뒤져 보았으나,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신유강은 조심스레 천을 펼쳤다.
구리 문 조금과 은자 한 냥이 보였다.
신유강은 끄응 하며 신음을 삼켰다.
아마도 거지들 중, 혹은 다른 누군가가 신유강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듯하다. 살짝 어이가 없었던 것인지 신유강은 자그마한 미소를 짓더니, 천을 빼내고는 돈만 다시 묻어 놓았다.
어쨌든 이 천의 주인은 다름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다.
“돈은 가져가지 않았으니 괜찮겠지.”
누가 이런 곳에 묻어 놓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돈이 사라지지 않았으니 딱히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돈을 묻는 장소를 바꿀 테지만 말이다.
“화려하군.”
신유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가며 오랜만에 천을 살폈다. 오래된 탓인지 상당히 낡아빠지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좋은 비단이라는 것을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또한 색이 화사하다.
무언가 문장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워낙 흐릿하여 정확히 어떠한 문양인지 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유강은 금세 흥미를 잃고 그것을 품 안에 넣으며 다시금 걸음을 놀렸다. 가 볼 만한 곳은 대부분 둘러보기는 하였으나, 가장 마음에 남은 장소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 하남에서 어린 신유강이 지냈던 장소다.
하남 땅 어귀 쪽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다리가 있다. 주위에는 온통 홍등가가 가득한 데다, 무림맹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이 구역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오문이다.
곳곳에서 주먹 좀 쓴다는 이들이 지나다녔다.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데다, 길거리에 나와 있는 여인들 대부분이 제대로 옷을 걸치지 않고 헐벗고 있다.
그 홍등가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다리가 있다.
꽤나 길어 보이는 그 다리 아래에는 커다란 움막이 지어져 있었고,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의 어린아이들이 가득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곳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거지 아이 중 하나가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신유강은 느긋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살았을 당시, 참으로 못 볼 꼴을 다 보고 지냈었다. 다리 위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세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들은 물론이고, 헐벗은 여인들의 교태 섞인 웃음이 항상 들렸었다.
누군가 칼에 맞아 죽는 일은 흔히 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시체가 나뒹굴었다. 거지 아이들이 배를 곯아 죽은 적 또한 있지만, 대부분 이 근방을 관리하는 하오문도들끼리 영역 전쟁을 벌인 탓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도 있었다.
술을 마시기는 했으나 돈이 없어 갚지 못하고 하오문도들에게 맞아 죽은 이들, 기녀에게 수작을 걸다 죽은 이들.
참으로 다양한 시체들이 가득했다.
신유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여러 명의 어린아이들이 몰려 있었고, 그런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약관이 넘어 보이는 한 청년이었다.
“이 자식들! 고작해야 구리 몇 문으로 네놈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청년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척 보기에도 동냥하는 아이들이 얼마 벌어 오지 못한 탓에 대장 놈이 화가 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러한 일이 종종 있었다.
신유강은 돈을 벌지만 그중 일 할은 감춰 놓았다.
다른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신유강보다 수입이 적었으니 하루에 한 번씩 기합을 받는 건 예삿일이었다.
신유강은 다리 위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을 흥미 깊게 지켜보았다.
대장 거지는 어린 거지들에게 이리저리 욕설을 섞어 가며 호통을 치더니, 이윽고 한 아이를 가리켰다.
신유강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아이는 좀 전에 길에서 만난, 신유강을 쏙 빼닮은 바로 그 거지였다.
신유강이 괜스레 정이 가려는 어린 거지를 쳐다본 바로 그때, 대장 거지가 지금까지보다 두 배는 더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리고 신유강 네놈! 분명 오늘 은자를 받은 것으로 아는데 그거 어디다 빼돌렸냐!”
신유강의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第二章 이십 년 전(二十年前)
하남 인근에 있는 객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신유강은, 떨리는 손으로 술을 마시며 인상을 썼다. 독하디 독한 화주(火酒)가 목을 넘어가니, 마치 타들어 갈 듯 화끈거렸다.
“이십…… 년 전이라?”
신유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하남이다.
그리고 세월로 따지자면 본디 있던 시간에서 약 이십 년 전으로 되돌아 온 꼴이 된다.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진소소와 함께 하북행을 준비하고 있었던 신유강에게는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비슷한 충격이었다.
쪼르르-
비어진 술잔을 채우며 헛웃음을 지었다.
신유강은 사천을 향해 귀공(歸功)을 발휘했으나, 사천으로 가지는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도대체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왜 이십 년 전으로 온 것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신유강이라…….”
거지 굴에서 보았던 그 꼬마는 틀림없이 어린 시절의 자신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다. 과거 돈을 숨겨 놓았던 곳이 같은 데다, 그 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신유강이 과거에 겪은 것이랑 똑같았다.
그럼에도 확신을 할 수 없었기에, 어린 거지들에게 어린 신유강에게 대해 물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신유강이 알고 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또 다시 회귀신공의 힘이 폭주를 한 것인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신유강은 전자에 힘을 실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신유강은 힐끗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환하기 짝이 없는 대낮, 그 거리에는 거지패들과 몰려다니며 동냥질을 하고 있는 어린 신유강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꾹꾹 쥐어 잡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고 있다.
사실 저 시기의 신유강은 말을 하지 못했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어린 신유강을 길러 주었던 여인이 죽으면서 그 충격으로 말을 잃은 것이다.
물론 말을 한다 해도 나이가 어린 만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긴 힘들 테지만, 어쨌든 일종의 실어증에 걸린 것은 확실했다.
신유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무언가 느낌이 묘하다.
신유강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신유강이 말을 잃고 동냥을 다니던 시절은 갓 세 살 정도였다. 그렇다면 현재 진소소의 나이는 약 다섯 살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리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진소소가 하북진가를 나간 것은 다섯 살 무렵이다. 어느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신유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자 위에 은자 한 냥을 내려놓고 객잔을 빠져나가 조금 걷자, 뒤에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힐끗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어린 신유강이 쪼르르 따라와 바지 자락을 꾹꾹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마도 어제 은자 한 냥을 받았으니, 오늘 또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는 듯했다.
신유강은 내심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려도 돈을 버는 것에 악착같다는 것 하나는 다를 바가 없다.
주섬주섬 품에 남아 있는 은자들을 털어 냈다.
대략 스무 냥 가까운 돈이다.
어린아이의 손에 쥐어 주기는 상당히 많은 양이다.
그러고 보니 딱 이 무렵, 거리를 지나가는 한 남자에게 대량의 은자를 받은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설마 그것이 본인이었을 줄이야.
“이게 내가 가진 돈의 전부다.”
전부라 해 봐야 스무 냥밖에 되지 않는다. 품 안에 전표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현 시점에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신유강은 신이 나서 은자를 품에 집어넣었다.
어른 신유강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어린 신유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회귀신공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너는 분명히 크게 될 놈이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하남을 떠나 사천으로 오거라…….”
거기까지 말을 한 신유강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거지 굴을 빠져나간 뒤 왜 하필 사천으로 갔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이 근방에서 가까운 산서나 호북, 섬서 땅도 있을 텐데 말이다.
“아…….”
어린 신유강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이내 화들짝 놀란다. 하긴 의원들조차 고개를 저었던 병이, 갑작스레 나았으니 당연히 놀랄 만도 하다.
어린 신유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또르르 눈을 굴렸다. 상당히 많은 양의 돈을 받은 데다, 목소리마저 갑자기 나오다니.
물론 그렇다고 금방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