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은 무현이 잘못한 것이다. 때문인지 남은 구파의 제자, 명문가의 후기지수들이 무현의 눈치를 보면서도 소곤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현은 시뻘겋게 얼굴을 붉혔다.
청룡대를 맡은 것은 그의 실수다.
무림맹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업적이 필요하다. 때문에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유명한 청룡대주를 맡았고, 이번 우자혁 사건 또한 다른 이들보다 열심히 조사를 했다.
공을 손에 넣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 공은 전혀 다른 이에게 돌아갔고, 사건을 무마시키기 위해 사마외도로 몰아넣으려 했더니, 대원들이 반발을 하는 것이다.
무현은 시선을 돌려 대원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훑어봤다. 어찌나 살벌한지 웅성거리던 이들이 찔끔하며 입을 꾹 닫았다.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난 이만 가겠소.”
그때 신유강이 가차 없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 무현과 말싸움을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북으로 가야 하는 이 시점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신유강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팡!
바람을 격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오며, 엄청난 기세가 쏟아져 오는 것을 느꼈다. 신유강은 인상을 쓰며 재빠르게 등을 돌려 손을 움직였다.
펑!
기운과 기운이 맞닿자, 무현의 권기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소리는 우람차기 짝이 없으나, 신유강은 그 자리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되려 권기를 날렸던 무현이 주르륵 뒤로 밀려 나아갔다.
모든 이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파의 청룡대주라는 자가, 등을 돌린 이를 향해 한 수를 펼쳐 낸 것이다. 이것은 나려타곤을 시전하는 것보다 더욱 창피한 일이다.
더더욱 먼저 공격을 해놓고 밀려났다?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다.
신유강은 놀라워하는 자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이를 갈고 있는 무현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손을 썼으니 사과는 하지 않겠소. 헌데 보기엔 소림승 같아 보이는데, 요즘 소림은 사람 뒤통수 노리라 가르치나 보오? 하하하!”
무현의 낯빛이 시뻘겋게 붉어졌다.
대부분 신유강의 말에 동조라도 하는 것인지, 곳곳에서 숨을 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까지 붉어졌다.
“그럼 다음부터 소림승들을 만나면 뒤통수부터 조심해야겠소. 하하, 다음에 또 보도록 합시다.”
여유로운 인사를 하며 또 다시 등을 돌리자, 무현은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당장이라도 일장을 펴 붙고 싶었으나, 더 이상 소림의 위명을 더럽힐 수는 없다.
“기다리시오!”
“무슨 일이지?”
발길을 멈추게 하는 무현의 말에 신유강은 삐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늘게 뜬 눈빛은 마치 무현을 위협하기라도 하려는 듯 매섭기 그지없다.
신유강의 눈빛을 본 청룡대원들이 하나같이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무림맹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자라고 있는 이들이니 만큼 수준 높은 고수들과도 면식이 많지만, 상대를 향한 명백한 살기가 이토록 짙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초운과 옥진, 그리고 윤환마저 파르르 몸을 떨 정도다.
“조금 전 일을 사죄하겠소. 허나, 소림에 대해 막말을 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오.”
신유강은 후우- 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십 년 후 무림맹이 어떻게 돌아갈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놈이 맹주직에 앉아 있으니 만큼 좋은 꼴을 면치는 못하리라.
괜스레 제갈백헌에게 험하게 대한 것이 미안해졌다.
“나보다 저자를 쫓는 것이 우선이지 않았나?”
당장이라도 덤벼들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무현에게서 눈을 돌려 슬쩍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고 있었던 우자혁이, 어느새 일어나 부리나케 내빼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어찌나 빨리 도망치는지 벌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이익! 쪼, 쫓아!”
갑작스런 상황에 눈에 불을 켠 무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청룡대원들을 다그쳤다. 무현은 한 차례 신유강을 바라보며 이를 갈더니, 극성의 내공을 끌어 올려 경공을 전개해 달려나갔다.
그러나 신유강이 볼 때에는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우자혁을 잡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우자혁의 경공은 무현이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후우, 진짜 골 때리는 사람일세.”
작게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돌렸다.
무현의 뒤를 따라 청룡대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탓에 자연스레 홀로 남았을 것이라 생각을 했던 신유강은, 멍 하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 마냥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눈을 치켜뜨고 있는 그녀는, 신유강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신유강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은 얼굴이다.
물론 어디서 만났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기에 의아한 마음이 들기는 했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등을 돌려 걸었다.
“자, 잠깐만요!”
들려오는 소리에 신유강은 또 다시 길을 멈추고 눈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하북으로 가야 하는 이 상황에서, 계속해서 그의 발목을 붙잡는 무림맹 인물들 탓에 기분이 좋지 않은지 미간이 찌푸려져 있다.
“뭐지?”
그러나 대놓고 한 소리 하지 않는 것은 결코 눈앞에 있는 이 소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신유강은 그렇게 혼자서 변명하고는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을 했다.
“당신…… 무공을 익히고 있었어요?”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소녀의 물음에 의아함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낯이 익다고는 하지만 누구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녀가 아는 척을 하고 있으니, 짐짓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순간 소녀의 눈빛이 앙칼지게 변했다.
“설마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니죠?”
“아?”
기본적으로 신유강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하물며 금 열 냥을 빚진 상대라면 더더욱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신유강이 의미 없이 신음을 내뱉으며 시선을 피하자, 소녀는 더더욱 가라앉은 눈동자를 빛내며 신유강을 몰아세웠다.
“저 백리지연이에요. 정말로 기억을 못하는 건가요?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건가요?”
백리지연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올라갔다.
명문 팔대세가의 일인이자, 화산의 속가제자라는 신분, 더욱이 실력이 떨어지기는 하나 그 화사한 외모 때문에 중원의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 해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언제나 예외가 있다고는 하지만, 신유강과 백리지연은 산속에서 다섯 시진 넘게 함께 있었으며, 또한 내기를 한 사이가 아니던가?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보고 있을 그 무렵, 그제야 백리지연의 대해 기억을 해낸 듯이 신유강은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아, 그렇군. 얼굴이 달라져서 전혀 알아보지 못했어.”
“어, 얼굴이 달라져요?”
“때 묻은 얼굴이었잖아. 우리 만났을 때 말이다.”
산속을 심하게 헤맨 탓에 제대로 씻지 못했던 백리지연의 얼굴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얼굴이었다.
물론 그 아름다운 웃음은 여전하다 할 수 있으나, 지난번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깔끔한 얼굴은 진소소 못지않을 만큼 화사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렇다고 기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 청초하기 짝이 없으며, 진소소와 버금가는 외모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만, 실제 신유강이 있는 이십 년 뒤에는 아줌마라 해도 그리 흉은 아닐 나이일 터이니 말이다.
신유강은 속으로 세월이란 것을 한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진소소도 그런 아줌마가 되겠지?
그러나 그녀는 수준 높은 무인인지라, 나이를 먹어도 내공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신유강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떠올랐다.
백리지연. 이십 년 후의 세상에서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바로 칠제 중의 일인이었다.
이 소녀가 이십 년 뒤 칠제의 명예를 얻는단 말인가?
세상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 네 동료들이지?”
“아…….”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백리지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주위에 있던 청룡대원들은 어느새 우자혁과 무현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신유강과 백리지연뿐이었고, 그녀의 실력으로는 지금 따라간다 한들 그들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아아, 또 혼나겠네.”
백리지연은 무림맹으로 돌아가 무현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산속에서 며칠을 헤매다 내려온 탓에 무현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은 그녀다. 소림승인 데다 계율원주를 지냈던 인간이니 만큼, 참으로 가차 없이 벌을 줬다.
덕분에 백리지연은 무현에게 수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해야 했다. 무현에게 있어 얼굴이 아름답다거나 혹은 여인이라는 것은 전혀 신경을 쓸 만한 조건이 아닌 모양이었다.
백리지연은 툴툴거리며 아미를 찌푸렸다.
“어서 쫓지 않아도 되나?”
“후우,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이러나저러나 혼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보다 신 공자, 왜 이름을 숨겼어요? 정말로 마교의 간자라도 되나요?”
신유강은 그제야 백리지연에게 본명을 알려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한 말이었기에, 지금에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백리지연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되돌리는 것이었는데, 슬쩍 손을 뻗으려 했던 신유강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기억을 지운다라……?’
거기까지 생각하던 신유강이 돌연 신음을 흘렸다.
지금 그는 장원을 나선 뒤의 기억이 전혀 없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기억을 지워 버린 것 마냥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사마강 정도?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천마신공의 능력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기억만 도려낸다는 것은 회귀신공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니, 아니다. 그보다 뭐였지? 나는 갈 길이 바쁜데,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갔으면 한다만?”
“왜 이름을 숨겼는지 물었잖아요, 공자?”
백리지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분히 수상한 이야기다. 마교의 간자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었기에, 백리지연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럼 나도 묻지. 조금 전 그 소림 땡중이 있을 때 말하지 않고, 왜 둘이 있을 때 묻는 거지? 그때 말했다면 네 동료들이 나를 잡으러 눈에 불을 켰을 텐데 말이지. 너는 마교의 간자를 밝혀낸 업적을 쌓는 거고.”
타당하기 짝이 없는 말에 백리지연은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무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은 상당히 의외라 할 수 있었고, 이름을 숨긴 것은 누가 봐도 수상쩍었다. 하지만 그녀가 산속에서 보았던 신유강은 마교도 같은 기세가 일체 없었다.
더욱이 조금 전 무현이 보여 준 행동은 오히려 정파의 이름을 더럽히는 인간들이나 할 법한 일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신유강을 감싼 것이다.
“흐음, 잘 모르겠네요.”
“굳이 말하자면 얼떨결에 튀어나온 거다. 소강이라는 이름은 어려서부터 써 왔던 이름이거든.”
“이름이 두 개예요?”
웃기지도 않은 말이기는 했지만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신유강이라는 이름을 지우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