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하북진가의 막내이긴 하나 정실의 태생인 진소소는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다. 무공에 대한 재능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테지만, 그것을 견제하고 있는 둘째 부인이 문제인 것이다.
진소소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자마자 죽은 탓에, 현재 하북진가의 실세는 둘째 부인이었다. 무사나 가솔들도 대부분 그녀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었다.
때문에 누구도 진소소에게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진소소에게 잘해 주다 세가를 쫓겨난 무인들의 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섰으니 말이다.
때문에 하북진가의 무사들에게 있어 진소소라는 존재는, 불쌍하여 보듬어 주고 싶긴 하나, 반대로 결코 다가서서는 안 되는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무사들이 자기들 딴에는 소리를 낮춰 대화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소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곳곳에서 보내져 오는 동정 섞인 목소리와 눈빛에, 진소소는 표정을 굳히고 조심스레 발을 놀렸다.
이 하북진가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한정되어 있다. 딱히 못가는 곳이라 할 수는 없으나,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꺼려하는 사람들 탓에 웬만해선 별채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바보들.”
진소소는 작게 중얼거리며 별채로 향했다. 정실 태생인 그녀가 별채에서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는 하지만, 다른 이들과 마주하지 않고 혼자 지내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작은 다리를 움직여 그녀가 어느덧 별채에 도착했다.
이미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긴 하지만, 진소소가 머물고 있는 별채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 아침 별채 청소를 할 때를 제외하면 이곳엔 어떤 이들도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소소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 박대(薄待)를 받는다면 응당 눈물이라도 보여야 함이 마땅하나, 이미 이 상황에 익숙해진 것인지 진소소의 얼굴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알아서 지내라지.”
툴툴거리던 진소소는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살폈다. 당연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인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훌러덩훌러덩 거칠 것 없이 궁장을 벗는다.
곧 움직이기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질끈 머리까지 동여매고는, 남몰래 숨겨 두었던 전낭을 꺼내 쥐어 들곤 방을 나섰다.
누군가 말리러 오는 것을 기대했다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여전히 별채에는 사람이 들어온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진소소는 살짝 낙담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이윽고 결심을 다잡은 그녀는 별채 담벼락을 따라 외진 구석으로 향했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담들이긴 하나, 보수를 하지 않은 구석 쪽은 허름하다. 또한 들개들이 오가고 있던 것인지, 어린 진소소라면 충분히 들어갈 만한 작은 공간이 보였다.
이 너머는 하북진가의 야산이다.
그리고 그 산을 내려간다면 하북의 성도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니, 진소소는 가끔씩 기분전환을 할 때마다 이곳으로 진가를 빠져나갔다.
물론 다른 이들이 이 사실을 알 리는 없다.
“으으…… 계속 좁아지는걸?”
어린 나이이니 만큼 성장이 빠르다.
본래 들개들이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넓이라, 점점 커져 가는 진소소에게 있어 그 구멍이 좁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머지않아 이곳으로 드나들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스레 우울해졌다.
“하아…….”
진소소는 작게 한숨을 쉬며 힘겹게 구멍을 빠져나왔다. 입고 있던 경장은 흙이 묻어 상당히 더러워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작은 두 손으로 툭툭 털어 냈다.
얼굴에 묻은 흙은 대충 손으로 슥슥 문질렀는데, 그 꼴은 누가 봐도 명문세가의 여식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걸리지 않은 것이지만.
진소소는 밖으로 나왔다는 것에 만족한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성도를 향해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신유강은 자신의 소문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었다. 하북까지 오는 보름 동안, 객잔에 들어갈 때마다 소리를 높여 떠들어 대는 호사가들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던 탓이다.
‘하, 무황이라…….’
무엇 때문에 그러한 별호가 붙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작 백대고수 두 명을 꺽은 것치고는 상당히 휘황찬란한 이름이다.
아마도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과장이 된 듯하다. 하늘을 두둥실 떠 있다던가, 구름을 타고 노니는 선인이라던가.
주먹질과 발길질 한 번에 천지를 부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마저 퍼졌기에, 신유강은 어디 가서도 자신이 그 본인이라는 말을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하게 되었다.
골치가 아픈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신유강은 슬쩍 눈알을 굴려 옆을 바라봤다.
하남에서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하북행을 한 백리지연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한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사부! 이건 어때요? 맛있어 보이잖아요?”
해맑게 들려오는 말에 신유강은 신음을 삼켰다.
지난번 우자혁과 무현과의 싸움이 끝난 직후부터, 그녀가 신유강을 부르는 호칭은 사부였다.
그녀의 목적이 고강한 무인을 찾아 가르침을 받는 것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신유강은 백리지연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내린 적도 없었으며, 당연히 사부라 불릴 만한 이유 또한 없다.
더욱이 사부라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와 비슷한 스승이라는 말은 한때 백호영준이 쓰던 말이 아니던가? 때문에 신유강은 더욱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밥 한 끼 먹자고 하남에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 텐데? 목적은 천검제라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신유강의 말에 백리지연은 당과를 씹어 먹으며 웃었다. 물론 천검제가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대단할 것 같은 고수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애초의 목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아무래도 좋잖아요. 천검제이니 뭐니 해도 설마 무황만큼 하겠어요?”
“하, 듣기 좋은 말 고맙기 짝이 없군.”
“더욱이! 삼백 년 전의 절대고수 선무제의 후인이라니! 사부, 도대체 나이가 몇이에요? 한 이백 살 정도 돼요?”
“왜 내가 나이가 많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야…… 선무제는 삼백 년 전 인물이니까 그렇죠. 그리고 사부는 그분의 후인, 당연히 반로환동을 한 전설적인 인물 아니겠어요?”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백리지연을 보며 신유강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본인 마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사람을 늙은이 취급하는 것이 영 걸렸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물론이에요. 비밀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상하네요. 우자혁은 몰라도 무현 대주는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왜 입을 다물고 있을까요?”
“그거야…….”
신유강은 이미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을 하고 있었다.
선무제는 그야말로 정파의 영웅 중 영웅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는 이다.
그런 후인을 상대로 마교인이라 몰아세운 데다 비참하게 깨지기까지 했으니, 그의 입장에선 두 번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더욱이 지금도 무황이니 뭐니 하며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고 있는데, 거기에 선무제의 후인이라는 말까지 돈다면 소림은 물론이고 구파의 위치까지 크게 흔들릴 것은 자명하다.
무현은 필시 소림에 이 일을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문이 퍼지지 않는 것은, 소림에서 일부러 입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신유강은 명문정파라는 이들이 하는 짓이 마교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하북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글쎄, 단순히 구경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만…….”
신유강이 하북으로 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진소소다.
집을 나와 떠도는 그녀를 안전하게 석무자의 곁으로 갈 때까지 호위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설마하니 진소소가 말했던 무황이라는 자가, 본인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신유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십 년 전이나 이십 년 후나, 그의 곁에는 진소소라는 이름이 꼭 붙어 있다. 마치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 사부. 저 아이 좀 보세요. 엄청 귀엽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때 백리지연이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자, 저잣거리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노점 앞에, 추레한 경장을 입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가 보였다.
그 어린 소녀는 양손 한가득 꼬치를 들고, 즐겁다는 듯 우물우물 씹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멍하니 넋을 잃을 정도였다.
또한 꼬치를 먹는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이니, 사람들은 너도나도 군침을 흘리며 꼬치를 사려 하고 있었다.
“엄청 귀엽죠? 아, 저런 딸 하나 가지고 싶네요.”
백리지연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황송하다는 표정이다. 팔대세가의 일인으로 태어나 온갖 명문가의 어린아이들을 만나 본 적이 있지만, 저처럼 귀여운 아이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작지만 틀림없다.
한눈에 봐도 진소소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귀엽잖아?’
신유강이 어린 진소소를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뻔했는데, 작은 진소소 또한 못지않게 가슴에 와 닿았다.
“눈빛이 이상해요, 사부.”
백리지연은 신유강을 게슴츠레 쳐다봤다.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백리지연 또한 무릇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시선들을 받아 보았고, 지금도 그 화사한 외모 덕분에 모든 후기지수에게 떠받들어지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강의 눈빛은 뭐랄까…….
조금 많이 외설적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저런 아이를 상대로 내가 성욕이라도 일으킨다는 말이냐?”
“정말로 눈이 외설적이었어요. 설마 사부는 어린아이가 취향은 아니시겠죠?”
“농담도 잘하는군. 그저 아는 사람과 많이 닮아서 놀랐을 뿐이다.”
“호오…….”
백리지연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우습지도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신유강의 나이는 정확히 가늠할 수 없으나 적어도 백은 넘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어린아이에게 욕정을 품는다면, 나이를 헛먹었다 해야 정상이리라.
더욱이 그의 옆에는 백리지연이라는 중원의 꽃이 있지 않은가.
백리지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꼬치를 먹고 있는 진소소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섰다. 순간 어린 진소소가 갑작스레 다가온 백리지연 때문인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저기 꼬마야, 그거 맛있니?”
“…물론이에요.”
“호호, 그래? 그럼 나도 하나 먹어 볼까?”
진소소는 서슴없이 다가온 백리지연이 꺼림칙하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생판 모르는 인물이 다가와 거리낌 없이 친근감을 표시하니, 누구든 경계부터 할 것이다.
남아 있는 두 개의 꼬치를 허겁지겁 입안에 집어넣고서 진소소가 빠르게 등을 돌렸다. 아마도 백리지연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진소소는 자신의 소매가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백리지연이 웃고 있었다.
“언니의 이름은 백리지연이라고 해.”
“……중원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