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그런 것도 알아맞힐 줄 아오?”
“하하, 눈치 백 단이란 말을 자주 듣기는 하지.”
“좋소, 툭 까놓고 말합시다. 내 이름은 신유강이라 하오. 내 연인이 될 여인을 지키기 위해 왔소이다. 됐소?”
남자는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여인이라면 조금 전 그 아이를 말하는 것인가? 지금 눈앞에 있는 신유강이라는 남자는 적게 잡아도 스물은 넘어 보이는데, 이제 막 기연고서점으로 들어간 여아는 열 살도 넘어 보이지 않았다.
“농담하나?”
“난 진심이오.”
“하하, 정말 죽어 봐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나를 죽일 수나 있소?”
“혹시, 오만방자하단 말을 자주 듣지 않나?”
“가끔 듣소.”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아생전 이러한 대꾸를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누구도 그의 앞에서 저리 당당하게 굴지 못했다.
그것이 설령 천 년 전 인물이었던 천마나 현선자라 하여도 말이다.
“내 영역에서는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다만……. 그 방자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뜯어고쳐 주어야겠군.”
“하하, 농담도 잘하시는구려.”
신유강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상대는 틀림없이 강하다.
그러한 느낌이 확연하게 든다. 사마강과 비교한다 해도 결코 꿀리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더욱이 그와 마주하면서부터 난리를 치기 시작한 회귀신공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마치 사마강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다.
두려움에 몸부림치던 그때와 말이다.
“마지막으로 묻지. 네놈 누구냐?”
“거참, 아까부터 같은 질문만 하시는구려. 그럼 댁은 누구요?”
쾅!
남자는 말없이 발을 움직였다.
고작해야 땅을 박차는 그 행동에,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그 주위로 땅이 갈라졌다.
우자혁의 신법은 이형환위의 경지였으나, 이 남자는 그 경지마저 초월한 것이었다.
신유강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퍽!
“크악!”
순식간에 휘둘러진 주먹은 신유강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그 격렬한 힘 탓인지 신유강은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휘청대는 신형을 간신히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신유강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네놈은 누구이고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느냐?”
남자의 목소리는 더욱더 차갑게 변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 또한 신유강의 온몸을 옥죄일 만큼 어마어마하다. 천하의 사마강이라 하여도 이 남자만큼은 되지 않을 것이라 신유강은 판단했다.
누가 봐도 물러서야 할 상황임이 분명하나, 신유강은 굳게 주먹을 쥐었다.
남자는 확연하게 기연고서점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진소소가 향한 곳은 자연스럽게 석무자가 있는 곳이라는 말이 된다.
“퉤! 내 보기에 당신은 이 기연고서점의 주인은 아닌 듯한데, 당신이야말로 이곳을 어찌 알았소?”
“호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건 어찌 알지?”
“내 알기론 기연고서점의 주인은 석무자요.”
신유강의 말에 남자는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내 관심이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고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려 작게 휘둘렀다.
부웅-!
그 순간, 마치 폭풍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어마어마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곧 그것들이 수많은 바람의 칼날이 되어 신유강을 향해 쏟아졌다.
서거걱!
“끄아악!”
“이상한 놈이로군. 네놈이 그걸 또 어떻게 아느냐?”
어이없음이 가득한 표정이다.
석무자가 고서점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런데 신유강은 확실하게 그 이름을 내뱉으며 단언했다.
확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 전 한 수는 그 어떠한 인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고문에 가까운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준다. 죽지는 않을 테니, 사람의 입을 열기에는 가장 좋은 한 수라 할 수 있었다.
“호오…….”
남자는 곧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던 탓에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바람 너머의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잘려 나간 피부가 본래대로 돌아오는 신유강의 모습을 보고 있듯이 말이다.
한동안 그것을 응시하고 있던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몰아치던 바람들이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라앉은 바람 너머도, 피에 절어 넝마가 된 옷을 간신히 걸친 신유강이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네놈…… 현선자와 무슨 관계지?”
돌연 들려오는 말에 신유강은 표정을 굳혔다. 바람에 휘말리기도 했고, 회귀신공의 치유력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그럼 단순한 찔러 보기인가?
신유강은 고개를 저었다.
저 남자, 틀림없이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진전을 이었소.”
“오호, 그놈의 진전을 잇기 위해서는 고서점에 들어 갈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럼 네놈은 고서점의 인연자인가?”
“……그렇소.”
“이상하군? 나는 누군가 삼 층의 문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말이지.”
남자는 아미를 찌푸렸다.
신유강이 석무자의 손님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신유강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삼 층의 문을 연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밖에 알지 못했다.
현 마교의 교주, 천마존 사마강이다.
그럼 석무자가 받았다는 말이 되는데, 지금까지 그는 그러한 사실을 듣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실수로 장부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인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석무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
“흥미가 없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으나, 굳이 아까운 시간을 버리면서까지 네놈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느냐? 나는 네놈이 누구인지 모르겠고…….”
남자는 신유강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리고 그 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마다 신유강은 전신에 오싹함을 느꼈다.
“내 장부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침입자’라는 말이 되는 셈이지. 그럼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겠느냐?”
남자는 슬쩍 왼손을 들어 올렸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섬뜩할 만큼 전신을 억눌렀다.
신유강은 신음을 삼켰다.
이 남자,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치 천지(天地)가 저 남자의 편인 것만 같았다. 시간을 역행하는 능력도, 불사적인 치유의 능력조차 저 남자 앞에서는 무력(無力)하다.
신유강은 남자가 손을 쓰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나는 이십 년 뒤 고서점의 손님이오.”
신유강의 전신을 산산조각 내려 했던 남자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마치 이십 년 후 미래에서 지금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왔다는 듯한 말이 아닌가.
“그건 또 무슨 개소리지? 나를 놀리려 했다간 뼈조차 추리지 못할 것이다.”
남자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신유강은 각오를 다진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남자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돌아가기는커녕 이 자리에서 참혹하게 살해될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의 살기는 그것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회귀신공을 익히고 나서 지금까지, 사마강을 제외하면 누구도 적수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율초언에게 한 번 당한 뒤 신강 여행을 하면서, 다시금 사천까지 몇 달이 넘는 여행을 하면서 상당히 많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 모든 자신감을 깨부쉈다.
회천공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여 거짓을 입에 담지 못했다.
신유강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第九章 이십 년 후(二十年後)
백리지연은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날 객잔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소소는 물론이고, 신유강과 함께 도란도란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마 당시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녀는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거라 믿는다. 신유강은 틀림없이 그 작은 여아를 지키기 위해 사라졌을 것이고, 그녀 따위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백리지연은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나이는 서른일곱이 다 되었지만 그 외모는 전혀 죽지 않아서, 참으로 고운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화나네?”
슬쩍 삐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방을 홀로 왔다 갔다 하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때서? 왜 도망을 간 거지? 이해가 안 되네.”
당시 신유강과 진소소가 사라지고 난 뒤 얼마나 그들을 애타게 찾아다녔던가. 이 년 동안 그 흔적을 쫓기 위해 중원 곳곳을 뒤졌으며 세외까지 나갔다.
그러나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 마냥 찾을 수가 없었다. 무황이란 별호를 얻은 만큼 대단한 수위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니 어디선가 소문이 날 법도 한데 전혀 아니었다.
백리지연은 지그시 미간을 눌렀다.
“왜? 왜?”
나이를 무색케 하는 상큼한 표정으로 의문을 토해 내지만, 도무지 의문은 풀리지 않아서 고운 아미가 펴지지 않는다.
“잡히기만 해 봐라, 아주!”
이십 년이나 흘렀으니 별다른 일이 없다면 둘 사이는 크게 진척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영 못마땅하긴 하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백리지연은 괜스레 씩씩거리며 애꿎은 탁자를 걷어찼다.
콰당-!
일 할의 내력조차 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탁자는 힘없이 다리가 부서져 와르르 무너졌다. 칠제라는 무명인 허언은 아닌 것이다.
“바람이나 쐬러 갈까?”
가만히 부서진 탁자를 바라보던 그녀는 치우는 것이 귀찮았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문을 나섰다.
* * *
“하악!”
신유강은 번뜩 눈을 떴다.
지끈지끈거리는 골을 부여잡으며 눈알을 굴렸다. 익숙하지만 낯선 골목이 보였다. 주위에는 사람 따위 보이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인적이 드문 곳이리라.
“으윽…….”
비틀비틀거리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점차 호흡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지자, 그제야 표정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골목?”
만약 실패하였다면 그가 있어야 할 곳은 골목이 아닌, 생판 사람조차 찾아오지 않는 장백산 깊숙한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주위는 골목.
그리고 찬찬히 살피자 상당히 낯이 익다.
신유강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다급하게 발을 움직여 골목을 빠져나갔다. 미로와도 같은 골목을 쉬이 빠져나가는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던 이곳에 대한 기억 덕택일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골목 끝이 보이고, 골목 자체를 벗어났다.
순간 주위가 달라 보인다.
머지않은 곳에 신유강의 장원이 보였으며, 익숙한 사람들이 익숙한 가게에서 음식과 온갖 용품들을 팔고 있었다.
“하하하…… 정말로 됐어…….”
무슨 끔찍한 기억이라도 겪었던 것일까.
신유강은 찔끔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겨워했다.
이십 년 전에서 지금으로, 그 간격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회귀신공과 회천공을 완벽하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
즉,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은, 완성되지도 않았던 회천공을 무리하게 끌어올려 기혈이 뒤틀린 것이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