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부정할 생각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하죠. 이십 년 전 돌연 사라진 무황이 사천에 있는 권룡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말이죠. 아마 사람들이 엄청 좋아할 거예요. 특히…….”
“특히?”
“아직도 당신에게 이를 갈고 있는 우자혁이라면 더더욱.”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우자혁이라면 현 천무황성의 성주, 과거 소성주였을 때와는 사뭇 다른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데다 칠제와 비견될 정도의 고수다. 만약 신유강이 무황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처참하고 처절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이래도 계속해서 부정할 생각이신가요, 사부?”
싱긋 웃음을 짓는 백리지연을 신유강이 가만히 바라봤다.
과거에 비해 꽤 늙기는 했으나 여전히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고 있는 여인은 쉽게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부라니,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친 적이 있던가?”
“역시.”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다름 아닌 신유강이다.
백리지연이 결코 허언을 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탓이다. 만약 계속해서 속이려 했다면 신유강에 대한 정보가 천무황성에 흘러 들어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먼저 묻도록 하죠. 그날 왜 사라졌죠? 저를 내버려 두고?”
“내 갈 길을 간 것이지. 우리가 함께하기로 한 것은 하북까지였다.”
틀리지 않은 말에 백리지연은 입을 다물었다.
몇 달 동안 함께하기는 했다지만, 기본적으로 두 사람은 하북 여정을 했던 것뿐이다. 그 뒤로 누가 어디를 가든, 혹은 무슨 일이 겪든 전혀 상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도 없이 사라진 건가요? 그것도 하북진가의 여식을 데리고.”
“조금 다르군. 나는 혼자 나왔다. 하북진가의 여식이 사라졌는지도 몰랐으니, 괜한 오해는 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군.”
“웃기지 말아요. 혼자 나왔다는 사람이 그 어린아이를 데리고 지금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더욱이 혼례를 치를 사이라죠?”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신유강을 쏘아보고 있는 눈동자가 매섭기 짝이 없다. 사람을 눈빛만으로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그녀이니만큼 참으로 살벌하다.
“그녀와 나는 칠 년 전에 다시 만난 사이고, 소소는 내가 무황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이야기인지라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설령 신유강이 무황이든 아니든 진소소는 아마도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것이 회귀신공이 가진 힘 때문이란 사실 또한 인지할 것이다.
때문에 신유강은 백리지연에게 그 어떠한 죄의식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너 역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
“협박인가요?”
신유강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자 백리지연 또한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는다.
상대는 무황.
그녀가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쉬이 맞설 수 있는 적수가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식은땀마저 흘렀다.
칠제라는 별호를 얻은 뒤로 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지. 나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 과거의 나를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다.”
기억을 지우는 일 따위 신유강에게 있어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되돌리지 못하니 그녀가 살아온 세월의 태반을 지워야 한다는 것이 걸리지만, 적어도 더 이상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해보겠다는 건가요? 검후인 저와?”
“불과 한 달 전이라면 상황은 틀림없이 달라졌을 거다. 나는 너와 호각, 혹은 이기지 못했을 테지.”
뜻하지 않은 말이 들려오자 백리지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그 소리는 불과 한 달 전 만해도 그녀보다 신유강이 약했다는 소리와 같지 않은가.
백리지연은 갑작스런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웃었다.
과거로 회귀하여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단순히 그 남자를 따라다기만 한 것이 아니다. 회귀신공은 물론 회천공의 모든 것을 터득하였기에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스르릉-!
“사부와 제자 간의 싸움은 항상 있는 일이지요.”
“그 결과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게 될 거다.”
“적을 만들려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적을 만든다는 말에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렸다.
“적을 만든다고? 내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러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신유강은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표정으로 백리지연을 바라봤다.
살아생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적이라 판단한 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힘으로 부쉈다.
죽이지 않은 이들도, 죽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이 적으로 돌아선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신유강. 약관이 지난 나이로 사천에서 알려진 거부 중 한 명. 사천당가와 긴밀한 관계. 또한 대운상단은 물론 제갈세가, 하북진가, 소림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 하오문의 홍화루주가 사라진 것 역시 당신의 짓이라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죠.”
이곳으로 오기 직전까지 개방은 물론 하오문에게까지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여, 그녀는 신유강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또 모았다.
천하십대상단 중 한 곳인 대운상단이 무너진 것에도 신유강이 관련되어 있고, 흡혈광마 사건은 물론 계속해서 중원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는 모두 신유강이 얽혀 있는 것이다.
“진자명을 포함해 지난번 객잔에서 만났던 소림의 백승, 그리고 흡혈광마……. 이만큼 적이 있다는 건 가는 곳마다 적을 만들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않나요?”
“…….”
“또한 알고 계시죠? 당신이 무황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를 갈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우자혁은 물론이고 마교의 부교주 마중천, 무림맹주 무현까지. 전 무림의 태반을 적으로 돌린 사람은 아마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백리지연은 기가 찬 표정으로 말했다.
마교처럼 힘 있는 문파도 아닌, 일개 개인이 이 정도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 놓고 아직까지 멀쩡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물론 그건 무황이기에 가능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게 내가 만들었다는 건가?”
“그래요, 혈기왕성(血氣旺盛)한 어린아이가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러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려 놓고도 정작 본인만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죠. 안 그래요?”
싱긋 웃음을 지으며 정곡을 찌른다.
물론 신유강 또한 생각이 있어서 그리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백리지연의 눈에는 철없는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까지.
백리지연은 지금 천하칠제의 자리에 올라와 있다.
신유강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응당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부딪혔다면 틀림없이 목숨을 잃었을 터.
거기서 끝이 나는가?
사람들은 새로운 칠제가 탄생했다며 말할 것이지만 세력이 있고, 자신들보다 강한 세력이 탄생하는 것을 원치않는 자들이 호시탐탐 신유강을 노릴 것이다.
결국 신유강은 전 무림의 공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해서?”
“조금은 깨달았으면 하네요. 그리고 어린 제자를 때리는 건 스승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기습에 대비하려는 것인지 기운을 끌어 올리고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사부니 스승이니 말하긴 하지만, 결국 이 두 사람은 엄연한 타인이기 때문이다.
백리지연은 다시 한 번 웃음을 머금었다.
“철 좀 드세요 사부님.”
“내가 철이 없다?”
“글쎄요. 호호, 하지만 제가 보기엔 그래요. 아,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은 아니니 괜한 소리를 한 셈이군요?”
“…….”
신유강이 대답 없이 응시하자 백리지연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또르르 시선을 돌렸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모습이지만 반로환동을 한 고수라 여기고 있었던 탓에, 어찌 보면 손윗사람을 가르치려 한 것과도 다름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기분이 언짢아 보이시는데…… 다음에 다시 올까요?”
그러나 백리지연은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다.
은근히 신유강의 속을 긁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축객령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당당하기 짝이 없다.
마치 신유강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 괜찮으니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싶군.”
“내가 권룡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에요. 현재 악산에서 천마비동을 찾기 위해 정도의 전 무림인들이 모여 있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물론.”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요. 천무황성과 마교의 세력이 워낙 드센 탓에 쉽게 나아갈 수 없는 입장이지요.”
신유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해서?”
“고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시점인지라, 무림맹주께서 직접 권룡을 악산으로 부르셨어요.”
무림맹주의 부름이라는 말을 강조하기는 하나 신유강의 성격상, 그러한 것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림맹주가 직접 초대한 학관에 입관부터 했을 터였다.
“무림맹주…… 제정신인가?”
“물론 제정신이죠.”
무현과 신유강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의를 해 왔다는 것은 상당히 뜻밖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미 신유강의 성격을 꿰뚫어 보고 있었으니, 만약 신유강과 무현이 다시 만난다면 지난번보다 더욱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싫다면?”
“사실 제 입장에선 당신이 오든 말든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요. 다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달라질지도 모르죠.”
“뭐지?”
“흡혈광마. 그가 악산에 있어요.”
흡혈광마라는 말에 신유강의 눈빛이 매섭게 타올랐다.
이미 사천이든 어디든 권룡과 흡혈광마의 사이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때문에 백리지연도 신유강이 반드시 움직일 것이라 판단했다.
“사실인가?”
“물론.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에 제 이름을 걸도록 하죠.”
단언하는 말투에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第三章 악산(樂山)
백리지연이 떠난 직후, 신유강은 악산을 향해 떠날 간단한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비급이 목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흡혈광마가 목적인 것 같은 느낌이 확연하게 들고 있었다.
묵묵히 방에서 짐을 싸고 있는 신유강을 진소소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가 틀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신유강의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그녀는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풀어진 모습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방 안에 신유강만이 묵묵히 짐을 싸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진소소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강, 혹시 검후와 아는 사이인가요?”
갑작스런 질문에 짐을 싸고 있던 신유강의 손이 멈췄다.
이윽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바라봤는데, 그 어떠한 대답도 해 줄 마음이 없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진소소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미를 찌푸렸다.
“딱히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린 그녀는, 거북한 이곳을 당장이라도 나가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 때문인가?
신유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어.”
“오래전?”
“그래. 상당히 오래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