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중원 무림 역사상 처음으로 정도의 손에 천마비급이 넘어가는 순간이니만큼, 그야말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마음은 진소소보다 백리지연이 더 하다.
아마도 이것으로 백리세가는 지금보다 더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두 여인의 눈동자가 낡아 빠진 비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듯, 허름하기 짝이 없는 겉면을 바라봤고, 희미하긴 하지만 천마신공이라는 글씨가 확연하게 보였다.
“너, 넘겨 본다?”
“네, 네!”
진소소와 백리지연은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키며 비급의 첫 장을 손에 쥐었다.
천 년 전 나타난 인물, 그리고 천하제일인이며 고금제일이라 불리는 천마의 비급이 천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
“…….”
천마신공(天魔神功)이라 하오.
웅장한 필체, 그러나 어딘가 낯설지 않은 그것을 바라보며 진소소는 할 말을 잃었다.
반대로 백리지연은 말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다음 장을 넘겨 보았는데, 보이는 것은 거리에서 흔히 파는 무당의 태극권의 형이 보일 뿐이다.
“이,이게 뭐야?”
진소소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과연, 이래서 신유강이 나서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천마비급을 가지고 나왔으니만큼, 비동에는 아무것도 없다.
괜한 힘을 빼고 싶지도 않으니 나서지 않은 것이다.
진소소는 혀를 내둘렀다.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작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며 겪은 고생들이 물밑들이 쏟아져 왔다.
“이게 천마신공이라고?”
반면 백리지연은 재빠르게 장을 넘기며 어이없이 웃었다. 써 있는 것은 틀림없이 천마신공이라 써 있었는데, 비급을 아무리 읽어 봐도 시장에서 사는 태극권과 소림의 잡학들만이 가득하다.
백리지연은 기가 찬 표정으로 마지막 장을 넘겼다.
이곳에 있던 것은 가지고 있어 봐야 그대들에겐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아, 이것을 보는 연자에게 딱 알맞는 무공을 적어 놓았소.
무공명은 천마신공이라 지었소.
부디 익혀 대성하여 천하를 주름잡길 바라오.
“풉!”
진소소는 이것을 썼을 신유강의 표정을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언젠가는 누가 이곳을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명백하게 엿을 먹이기 위한 장난질을 한 것이겠지.
참으로 신유강다운 짓이다.
“아아…… 대체 뭐야?”
정작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백리지연만이 머리가 복잡한 듯 힘없이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 * *
주변은 활활 타오른다.
수없이 많은 시체들을 집어삼키고 있었으며, 불을 지른 장본인이라 생각되는 인물은 머지않은 곳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죽은 사람이 보였다.
흡혈광마의 시신이다.
또한 천무황성의 무인들이다.
아마도 이 불길을 보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올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신유강은 한숨을 삼켰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나쁜 일이었던가?
흡혈광마의 숨통을 끊는 그 순간 보았던 그 눈빛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해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호야의 나이는 고작해야 열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그 아이를 보았을 때 어땠나?
싹싹하기 그지없으며, 천진난만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러한 아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저리 변했을까.
애초에 그들이 살고 있던 곳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힘든 삶이긴 하겠지만, 백호영준과 함께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유강이 보기엔 오히려 그때가 나아 보였다.
“백호영준이나 네놈이나 참으로 기구하구나.”
씁쓸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호야의 시신을 바라봤다. 타인의 내공을 흡수한 탓인지 그 시체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지만, 기이하게도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신유강은 작게 한숨을 토했다.
“그건 그렇고 찾았을까?”
진소소와 백리지연이 향한 곳은 틀림없이 천마비동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그것을 찾아보았을 때에는 기겁하며 놀랐을 것이다.
곁에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심히 유감이다.
신유강은 주섬주섬 품에서 한 권의 비급을 꺼냈다. 낡아 빠진 비급은 만질 때마다 부서져 그 형태를 잃어 가고 있었다.
하긴 천 년이나 된 오래된 책이니만큼 이게 당연하다.
신유강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불길 속에 던졌다.
잠시 잠깐 화마에 닿은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그토록 애원하며 찾아 헤매던 천마신공의 비급이 허망할 정도로 쉽게 타올랐다.
“이것으로 당신과의 약속은 끝이오.”
신유강은 이곳에 있지 않은 사마강을 떠올리며 말했다. 흑영과 흑호를 살려 준 값은 충분히 치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마강이 쉽게 장원에서 나갈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속이 후련한 것은 사실이다.
저벅저벅 불길을 빠져나와 진소소가 있는 곳을 향해 걷는다.
흡혈광마의 죽음, 천마신공의 파기.
모든 일을 끝마친 신유강의 표정은 후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한 가지,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미루고 미뤄 왔던 일이다.
신유강은 그 어떤 때보다 좋은 표정으로 한 걸음을 내딛더니, 순식간에 주변에 풍경이 뒤바뀌며 어두운 동굴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마비동.
갑작스런 신유강의 등장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백리지연이다.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그곳에서 아무런 기척도, 혹은 어떠한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돌연 신유강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까, 깜짝이야…….”
너무 놀라 나온 말에 백리지연은 숨을 삼켰다. 그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신유강이 백리지연을 바라보았는데, 어찌나 무감각한 표정이었던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 것이다.
신유강은 후우- 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진소소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찢겨진 옷깃을 바라보니 한없이 마음이 아프다. 호야의 짓이란 것을 모르지 않으니만큼, 더욱더 그러하다.
만약 과거 호야를 잡아 진작 죽였다면, 진소소가 이러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김질 한다.
“뭐, 뭐예요.”
진소소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신유강을 향해 물었다.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아비인 진명과도 같은 무감각스런 표정이 꺼림칙함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유강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그녀를 불안하기 짝이 없다.
마치 그녀의 곁을 떠나려던 석무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몸은 괜찮나?”
“……괜찮아요.”
신유강을 향한 퉁명스러운 말투, 그러나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아마도 지금까지 신유강에게 한 짓이 있으니만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두려운 듯하다.
그러나 신유강은 한숨을 내쉬며 한 걸음 다가섰다.
어느새 진소소의 앞에 선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소소.”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나와 혼인을 해 주었으면 해.”
나지막한 말이 비동 전체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第六章 삼자대면(三者對面)
신유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붉혔다.
백리지연이 있는 그 상황에서 진소소에게 혼인해 달라 했던 말과 행동, 그 표정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본인이 본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지만, 나름 무게를 잡은 신유강 딴에는 그것이 훤히 생각난다.
“나 참, 뭐가 그리 창피해? 당연한 일을 가지곤.”
어느새 신유강의 방 안에서 당과를 씹어 먹고 있던 흑호가 콧방귀를 내뿜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신유강과 진소소 사이를 모르는 이가 없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혼인하는 것은 당연시 여기고 있었기에, 딱히 이상하다 느끼지 않은 것이다.
물론 천하의 검후를 옆에 두고 그런 말을 하였으니만큼, 창피하다는 점에는 어느 정도 인정하는 흑호다.
“대주가 말이다. 혼례 날은 보름 뒤로 잡았다. 하북진가와 팽가에도 알렸으니 놈들도 눈에 불을 켤 거다. 각오 단단히 해 둬.”
흑호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렸다.
현재 전 무림이 아주 똥통에 빠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마비급을 찾기 위해 나선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것이 고작해야 삼류 쓰레기 무공들을 나열한 것이었으니 좋아할 이가 누가 있겠는가?
무림맹은 망연자실했고, 마교는 퇴군했다.
가장 사상자가 크다 할 수 있는 사도련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으며, 천무황성 또한 바득바득 이를 갈며 물러서고 있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비급 때문에 엿을 먹을 대로 먹은 팽가와 진가에게, 혼례를 치른다 서신을 보냈으니 아주 미쳐 자빠질 거다.
특히 진소소를 얻어 하북진가를 어떻게 해서든 넘어 보려 하는 팽가의 입장에선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우습지 않은가.
흑호는 벌써부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신유강의 성격상 틀림없이 진가는 물론이고 팽가와도 부딪힐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 과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진가 쪽에선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인데, 속은 그렇지 않다. 알다시피 지금은 많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그곳은 부인의 힘이 조금 있잖아? 틀림없이 노리고 들어올걸?”
침상을 뒹굴고 있었던 신유강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례를 치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아직 정리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원의 경계를 조금 강화하는 편이 좋겠다. 특히 소소의 거처를 중심으로.”
“그러지 않아도 대주의 거처를 옮겼다. 청랑도 그 근처이고, 애초에 이 장원에 침입해서 살아나갈 놈이 있을 거라 보냐?”
“천마존은?”
“마존님께선 무슨 일이신지 요즘 보이시지 않는다. 마교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건지, 나야 모르지.”
흑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천마존이 이곳에 있을 때만 해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는데, 그가 없으니 이제야 좀 살 만한 모양이다. 물론 약간 꺼림칙한 것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천마존의 생각을 그가 짐작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도우겸 그놈은, 조금만 다듬으면 충분히 쓸 만할 것 같더군. 내가 좀 데리고 있을 예정이다. 불만은?”
“없다.”
“좋아. 그럼 네놈은 이곳으로 가 보거라.”
흑호는 주섬주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신유강을 향해 던졌다.
한 장의 서신은 내공이 실려 있기 때문인지 종이 같지 않은 속도로 매섭게 날아갔다.
여유롭게 그것을 잡은 신유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이건?”
“초대장 같은 거다. 뭐, 초대장이라기보다는 하북진가에서 네놈과 할 말이 있다는 거겠지.”
흑호 또한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한다.
혼례를 치른다는 서신을 보낸 뒤 얼마 있지 않아 날아든 것이었기에, 사실상 그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단순히 술 한잔하자고 오라는 것은 아닐 거다. 보아하니 무림맹 주요 인사들이 전부 몰린다는데…… 우스운 것은 말이다.”
갑자기 말을 끊는 흑호를 바라보며 신유강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