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신유강은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더욱 걸음을 움직였다. 어느새 쥐죽은 듯 조용한 거리를 지나자, 거대하기 짝이 없는 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수련생들의 기합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던 것과는 다르게, 무관 또한 쥐죽은 듯 조용하기 짝이 없다. 주위 경비는 평소보다 세 배 이상은 되는 듯하였고, 하남 무림맹에서 지원을 나온 이들이 살벌한 눈초리를 빛내고 있었다.
그만큼 현 무림맹의 입장이 말이 아닌 것이다.
“누구시오!”
무관 정문 앞에 서자 무사 하나가 신유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평소 이곳을 지키던 무인은 아닌지 날카로운 기세로 당장이라도 신유강을 향해 검을 뽑을 기세가 역력하다.
권룡 신유강에 대한 소문은 전 중원에 울리고 있으나, 직접적인 면식이 없으니만큼 경계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신유강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유강이라 하오. 하북진가 진명 대협의 부름을 받고 찾아왔소이다.”
품에서 꺼내 보여 준 것은 다름 아닌 진명이 보낸 초대장이다.
문지기는 잠시 경계의 눈빛을 보냈지만, 권룡이라는 말과 초대장의 적인 진명의 직인을 보았는지,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오. 당신이 밟고 있는 길을 따라 안으로 계속 들어가시기만 하시오. 만약 다른 곳으로 갔다간 간자로 오인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할 것이오.”
남자의 말이 들려오자 곁에 있던 사내가 조심스레 정문을 열었다. 권룡이라는 현 중원 태풍의 눈과도 같은 이를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문지기는 아닌 듯하다.
신유강은 힐끗 그들을 살펴보다 안으로 들어섰다.
진명이 있는 곳은 무관 가장 안쪽에 있는 후원이다. 안내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러한 곳에 인력을 쓰는 것보다, 지금은 조금 더 이 무관의 경계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보였다.
후원으로 향하는 신유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내쉬었다.
수련생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침울한 표정이다. 검후를 쫓아간 동료들이 다 죽어 나갔으니 불안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상황 또한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천하의 무림맹이 중소문파는 물론 낭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희생자가 난 데다,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서는 전혀 믿어 주지 않는다.
때문에 더욱 곤혹스럽다.
중소문파는 그렇다 친다지만 마교와 천무황성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태로 전락해 버린 만큼, 어린 후기지수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 느낌이다.
신유강은 시선을 바로잡고, 더욱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은 곳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후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경계는 다른 곳보다 많이 심하다 할 만큼 철통이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하북진가의 인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곧 무림맹주를 은퇴할 무현과 청허, 그리고 검후 백리지연은 물론, 하북팽가의 인원마저 몰려 있으니만큼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 기가 죽을 만한 무인들의 모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봐, 권룡이다. 진짜로 권룡이 왔어.”
“저 자가 아가씨의……?”
신유강이 모습을 드러내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유명하고 유명하지 않고를 떠나서, 진소소의 일이 끼어들어 있으니만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신유강은 내심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으나, 이내 신색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정자(亭子) 안에는 낯익은 이들이 보이고 있었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진명은 신유강을 바라봤고, 그 옆에는 한때 보았던 추란이라는 그의 부인도 있다.
진자명과 그의 형제들로 추정되는 진후, 진헌원.
그 앞에는 하북팽가의 팽자웅과 그 아들인 팽호언.
가장 상석에는 무현과 백리지연, 그리고 청허가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당초운을 비롯한 팔대세가의 몇몇 인물들이 이 자리가 불편한지 안색을 굳히며 앉아 있었다.
이미 술자리가 시작되었는지 아직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잔이 오가고 있는 것이다.
신유강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유강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무림 동도 선배들에게 포권을 취하자,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무현은 그리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 왔네, 앉게.”
앉으라 말하나 신유강이 앉을 만한 곳은 없다. 대부분 구파와 세가 인물들이니만큼, 쉽게 자리를 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당초운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하하, 자 이리로 오게.”
너스레를 떨며 자리를 권하자, 신유강 또한 웃음을 지으며 권해 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며 하북진가의 눈치를 살폈다.
권룡과 진소소의 관계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네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것을…….”
당초운은 몹시 안타깝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진소소가 하북진가의 여식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소소와 신유강, 그리고 하북진가의 일이었으며, 당소혜와 신유강의 일이 아니다.
당초운의 입장에선 둘 사이 또한 심상치 않다 여기고 있으니만큼, 이리 대하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듯하다.
더욱이 진명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호호, 소문 자자한 권룡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때 까랑까랑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초운이 따라 준 술잔을 매만지고 있었던 신유강이 슬쩍 시선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자, 조금 전까지 진명의 옆자리를 꿰고 있던 추란이 보였다.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기 위함인지 얼굴에는 꽃이 피어 있었으나, 신유강이 보기에는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허명일 뿐입니다.”
“허명이라뇨? 현 무림을 진동시키는 한 분인데…… 낮추는 것이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호호호.”
신유강은 말없이 웃었다.
단순한 말이기는 하나 뼈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로 본다면 진자명과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이미 백대고수 반열에 들어 훗날 천하를 굽어볼 일인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심사가 뒤틀릴 만도 하다.
더욱이 진소소의 낭군이라 하니 더욱 말이다.
“과찬이십니다.”
“한데, 우리 소소와 긴밀한 사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추란은 본격적으로 진소소를 까기 위함인지, 신유강이 나타난 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때문인지 신유강의 표정이 좋지 않게 구겨졌고, 곁에있는 당초운이나 백리지연 또한 안색을 굳히며 추란의 의도를 살피듯 시선을 돌렸다.
“곧 혼례를 치를 예정입니다.”
“혼례라니!?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몸이거늘, 누구 마음대로 혼례를 치른단 말이냐.”
혼례라는 말에 발끈한 것은 다름 아닌 팽자웅이다.
그는 진명이 이 자리에 신유강을 부른 이유를 알고 있다. 하북진가의 생태를 익히 알고 있으니만큼, 아마도 원하는 것이 있으면 힘으로라도 얻어 보라는 뜻일 터다.
때문에 목소리에 거침이 없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물론, 무현과 청허, 백리지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기를 넘실넘실 흘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쩔 수 없이 맺은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소는 팽가와의 혼인을 생각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똑 부러지는 한마디에 팽자웅의 안색이 구겨졌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추란의 얼굴에 더욱 화사하게 꽃이 핀 것은 바로 그때다.
“하지만 신 대협, 가문끼리 결정한 일에 대해 본인의 의사는 필요하지 않지요. 본래 여인이란 그런 존재이기도 하고요.”
말인즉, 가문끼리 결정한 일에 대해 더 이상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다. 더욱이 여인이라는 존재를 고작해야 혼인으로 팔아먹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기에 백리지연은 불쾌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 모인 이유는 악산의 일 때문이에요. 세가의 일은 세가끼리 모여 있을 때 하시는 게 좋을 듯하다 여기는데, 진 가주는 어찌 생각하시나요?”
결국 참다못한 백리지연이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술을 마시고 있는 진명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자칫하다간 신유강과 팽가, 그리고 추란을 섬기는 이들이 칼을 뽑아 들 것 같았기에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검후의 말이 맞네. 자네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도, 그것을 이 자리에서 해결하려 하는 건 옳지 않네.”
청허마저 나서며 검후를 거들자, 사람들이 대부분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는, 악산의 일을 처리하기 위한 회합 같은 것이다.
힘 있는 이들을 모아 다시 한 번 친목을 다지고, 향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대처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한데 뜻하지 않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곳곳에서 불쾌한 시선들이 역력하다. 그러나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진가와 팽가의 힘이 그 어떤 세가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반면 구파의 인물들은 상당히 흥미로운 시선이다.
구파의 인물들에게 있어 팔대세가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는 이 상황은 상당한 흥미는 물론,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뭐 어때서 그런가. 다 같은 무림 동도들인데, 지금 할 수 있는 말을 굳이 아까운 시간을 들여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네만…….”
무현은 힐끗 신유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두 차례나 호의를 거절했던 신유강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그가 곤란해야 일이 벌어진다면, 굳이 그것을 막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미 칠십을 넘어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 무현이다.
신유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현을 한 차례 바라보다, 시선을 진명에게 주었다.
“좋지 않은 말이 오감이 분명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갑작스런 신유강의 말에 진명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반대로 추란은 불안한 시선을 보내며 아미를 찌푸렸다.
혹시 둘 사이에 이미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진명은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꾸미는 인간이 아니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부딪혔지, 누군가를 이용해 계략을 꾸미지 않으니만큼, 곧 신색을 바로잡으며 신유강을 향해 물었다.
“호호,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궁금하네요. 물어도 될까요?”
“딱히 어떠한 말이 오가는 건 아닙니다. 단순히 소소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걸 그만해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장난이라?”
추란은 눈살을 좁혔다.
확실히 진소소와 함께 살았으니만큼, 세가 내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면 이십 년 전, 그 이야기도 흘러 나갔을까?
그 당시의 일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남해검문은 멸문하여 사라졌고, 진소소를 납치한 이들은 야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으니, 알고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추란 그녀와 세 아들, 그리고 좌호법 정도이다.
때문에 지금까지 안심하고 있었는데, 때아닌 진소소가 등장과 함께 과거의 일이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추란은 불길한 마음을 품에 안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