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그의 결심이 느껴졌기 때문인가.
신유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수식을 취하자, 주변에 흐르는 바람이 오로지 그를 향해 몰리기 시작하는 듯하다.
참으로 기이한 형상에 팽호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스치는 바람이 섬뜩하다.
단순히 하는 말이 아닌, 마치 바람이 공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섬뜩함을 안겨 주고 있었기에 손에 쥐고 있는 도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곧 자세를 바로잡고 순식간에 신유강을 향해 거리를 좁혔다.
부웅-!
날카로우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여지없이 들려왔다. 하북팽가의 도법이 맹렬히 휘둘러지며 사방팔방 도망칠 장소조차 없이 신유강의 전신을 빽빽하게 노렸다.
텅!
그러나 승부는 그야말로 한순간.
넘실넘실 검기가 머금어진 도날이 여지없이 신유강의 손에 잡혔다. 몰렸던 내기가 손에 닿는 것과 동시에 역류를 시작하며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잡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쥐어져 있다.
“좋은 승부였소.”
끼리리릭!
도날이 비틀리기 시작하며 그 여파가 팽호언의 손까지 전해 들고 있었다.
너무 놀라 손을 뗄 수조차 없었다. 그저 더욱 강하게 내력을 끌어 올리며, 어떻게 해서든 도를 회수하려 안간힘을 쓸 따름이다.
하나 아무리 좋은 명도라 한들, 회귀신공의 힘이 머물러 있는 순간, 그것은 이미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드득-!
신유강이 약간의 힘을 더 주자 명도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도날은 여지없이 꺾였으며, 곧 그 힘은 팽호언에게까지 머물렀다.
콰당-!
허공에서 십여 바퀴를 돈 팽호언의 몸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은 이미 뒤집혀 있었으며, 옷은 물론이며 살갗까지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처참한 몰골이다.
“호언아!”
팽자웅은 너무 놀라 경공을 사용해 쓰러진 팽호언에게 다가갔다. 눈이 뒤집힌 데다 몰골이 아닌지라, 혹여 죽은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한 시선이 역력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숨이 붙어 있었던 탓에, 팽자웅은 다급하게 품에서 단약을 꺼내어 조심스레 먹여 주었다.
하북팽가 대대로 내려오는 단약인지라 그 효능은 상당하다. 시퍼렇게 죽어 가던 팽호언의 안색이 얼마 있지 않아 천천히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팽자웅은 쓰러진 아들을 비무장 밑에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신유강을 쏘아봤다.
“이놈! 고작해야 친선비무와 같은 것이거늘, 어찌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단 말이냐!”
“과하지 않게 힘을 썼습니다. 물러나지 않았던 것은 팽 소협의 의지이지 제 탓이 아닙니다.”
신유강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을 만큼 대단한 힘을 준 것은 아니다. 필시 도를 놓고 물러섰다면, 어떠한 피해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욱이 지금 이곳에서 벌이고 있는 것은 친선비무 따위가 아니다.
신유강은 슬쩍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많은 사람들이 투지를 불태운다.
대부분 신유강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안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다. 때문에 신유강은 그들을 시선을 받으며 도발적으로 웃음을 짓는다.
“소림의 백승이라 하오! 신 대협에게 한 수 가르침을 청하겠소!”
터벅터벅 걸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소림의 후기지수 백승이다.
비무장 위로 올라 선 백승은 숨을 골랐다.
눈앞에 있는 이는 천하백대고수라 불리는 권룡 신유강. 조금 전 한 수만 보아도 백승이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적다.
그러나 이름 없는 팽호언과 백승은 엄연히 다르다.
무림맹에서 문서만 파고 있는 그와, 소림의 기대주인 백승은, 십 년 뒤를 보아도 상하 관계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물론 백승이 팽호언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의외로군. 요즘 소림사는 혼인도 하오?”
“그러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소. 나는 단순히 신 대협에게 한 수 배우고 싶어 오른 것뿐이니 말이오.”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보를 내디뎠다. 이미 백승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었다는 듯,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신유강 또한 말없이 자세를 잡은 것이다.
“오시오.”
“미천한 실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소!”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백승이다. 소림의 뛰어난 보법을 이용한 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절묘하기 짝이 없다.
팡-!
순간의 권력이 바람을 치고 신유강을 향해 쇄도했다.
그 소리만 들어도 백승의 무공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신유강은 그것을 여유롭게 피하며 보법을 밟았다. 가슴을 향해 날아오던 백승의 힘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고, 뒤이어 얼굴 쪽을 향해 무언가가 매섭게 날아들어왔다.
팡팡팡-!
연이은 발길질이 날아들어왔다.
소림의 무예 중 상승 중 상승이라 불리는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槌)! 그 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에 힘이 담겨 있고, 소림이 가지고 있는 무예의 무거움마저 실려 있었다.
그러나 백승의 각법은 여지없이 허공을 갈랐다.
틀림없는 연환계였으며, 몸을 뺄 여유조차 주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신유강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퍼걱!
정확히 백승의 골을 타격한 주먹은 단순한 주먹질로 보였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었다.
백승은 얻어맞는 그 순간부터 골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정신을 차리려 해도 계속해서 주위가 아득하게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눈앞에 세상이 돈다.
어찌 된 것인지 알 수조차 없었으며,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이윽고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순간,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신유강의 얼굴이다.
콰당-!
신유강은 쓰러진 백승을 향해 다가가, 그를 안아 들고 연무장 바깥에 내려놨다. 조금 전 쓰러졌던 팽호언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괜찮은 한 수였소.”
조금 전 팽호언에게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르다. 그만큼 백승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과 같다. 만약 회귀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신유강은 죽었다 깨어나도 백승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나를 막아 볼 이가 누구요?”
신유강은 당당히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후기지수들을 바라보며 묻는 그 말 때문에 깜짝 놀랐던 것인지, 후기지수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내리깔았다.
이미 진자명을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애초부터 상대가 될 리가 없다. 더욱이 눈앞에서 백승을 한 수에 꺾었으니, 천하백대고수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
“진자명, 네가 올라올 텐가?”
신유강은 오만하게 진자명과 그 형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울화가 치민 것인지 욱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앞으로 나선 것은 진자명도, 진후, 진헌원도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하북진가의 좌호법을 맡고 있는 진태협이라 하네.”
나이를 젊게 잡아도 오십 줄은 되어 보이는 진태협은, 여느 노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노련한 표정으로 기세 좋게 비무장 위로 올라섰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북진가의 진태협이라 한다면 십대고수의 일인이자 검성이라는 별호로 유명하다. 진명에게 밀린 탓에 십대고수 중 일인자는 될 수 없었지만, 능히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고수인 셈이다.
신유강은 가늘게 눈을 뜨며 추란을 바라봤다.
득의양양한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아마도 이 남자가 추란을 지지하고 있는 이들 중 하나이며, 과거 진소소의 일을 도와주었을 것이라 판단되는 이다.
신유강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삐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입니다. 좌호법께서 나선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으음, 딱히 없네. 다만 이대로 간다면 자네는 하북진가의 사위가 될 것이 분명한데, 고작해야 후기지수를 꺾은 것치고는 너무 비싸지 않은가? 해서 직접 나선 것이네.”
아무런 사심조차 없다는 듯 진태협은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한쪽에서 상황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던 진명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진 모 정도는 꺾어야 우리 가주 또한 만족하지 않겠는가? 허허허.”
단순히 힘을 시험해 본다 말을 하기엔, 그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다. 명백히 신유강을 죽이기 위해 나선 것으로 보였기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신유강을 향했다.
과연 이 승부를 받을 것인가?
천하백대고수라고는 하지만, 아직 말단에 있는 신유강과 십대고수의 일인 진태협의 승부라면, 일반적으로 진태협의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명은 물론이며 신유강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해보겠나?”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힘 조절을 하지 못할 것 같으니, 시신을 거두더라도 개의치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진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신유강의 힘을 파악하고 있으니만큼, 치열한 공방이 오갈 것이라 여긴 것이다. 때문에 누가 죽게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승부다.
“자네는 어찌하겠는가 좌호법.”
“허허허, 이 노부의 목숨이 무에 대수란 말입니까. 취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거라.”
추란과 진태협이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아도 신유강을 죽인 후 그 명분을 내세워야 했는데, 뜻하지 않게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태협은 결코 신유강을 봐줄 생각이 없다.
딱히 추란을 위해서가 아닌, 친손자처럼 키우고 돌본 진자명 때문이다.
“이 노부의 검에는 눈이 없으니 조심하시게나.”
진자명의 말에 신유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여전히 흐르는 바람이 그의 주위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하고 있었다.
이미 백승과의 승부에서 한 차례 보았던 것인지라 진태협은 흥미를 가졌다. 마치 자연과 동화된 것처럼 기이한 감각을 일깨워 주는 무공은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오, 그것이 무엇인가?”
“……선선…… 운현무!”
그 말이 가져온 파급은 컸다.
진태협은 물론이며 추란과 무현, 그리고 청허마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나이가 어린 후기지수들조차 입을 쩍 벌릴 정도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삼백 년 전, 천하제일인 석무자의 무공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 자네가…… 석무자의 전인인가?!”
무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선운현무는 이미 한 번 겪어 보았다. 이십 년 전, 갑자기 나타난 무황이라는 존재에게 당한 수법이기 때문에 쉬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신유강의 대답은 다르다.
“다르오. 나는 무황의 전인이오.”
이에 백리지연이 풉 웃음을 터트렸으나 누구도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연이어 들려온 말에 하나같이 멍한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당당하다.
이러나저러나 무황 본인이기도 하고, 이십 년이 지났으니 전인이라 해도 뭐라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따지고 올라간다면 석무자의 전인 또한 맞는 말이다.
“허허, 그렇군. 자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황은 석무자의 전인이 되는군. 맞는가?”
“그렇소.”
“그래, 그렇군. 선선운현무라…… 그 무공이 세상에 다시 나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과연 자네의 나이로 백대고수에 든 이유를 어느 정도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