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이미 백 합이 넘게 손을 섞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불리해져 가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게 제 능력을 훔쳐봤다? 그런 겁니까?”
“허허허,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사마강이 자세를 잡자 신유강은 숨을 골랐다.
이윽고 그 역시 자세를 잡으며 날카로운 눈매를 빛냈다.
그리고 순간, 슥- 하며 그 어떠한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신유강의 몸이 완벽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혹여 다시금 빈틈을 노리려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사마강은 껄껄 웃음을 지으며 무관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놈이, 나와 술래잡기라도 하자는 것이냐?”
귀공을 이용해 모습을 감춘 신유강은 어느새 난전이 벌이지고 있는 무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퍽퍽퍽!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별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손을 썼으나, 다행히 신유강을 향해 달려든 것은 마교의 무인들이었다.
“권룡이다! 신 대협이 오셨다!”
등장과 동시에 마교 고수 셋을 쓰러트리는 그 모습에 정파인들은 더욱 기가 살아난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신유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그는 상당히 먼 거리로 회공을 시전했다. 때문에 못해도 객잔이 있는 부근까지는 갔어야 함이 옳은데, 어떤 기이한 기운이 방해하며 그것을 막아 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괜찮은가요?”
백리지연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이미 한 차례 얼굴을 보았던 황염과 매서운 공방을 벌이고 있는 도중인 듯하다.
그러나 낭패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황염과는 달리 백리지연에게는 상당한 여유가 있어 보였다.
“괜찮지 않소.”
너덜너덜하기 짝이 없는 신유강의 모습에 백리지연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누구와 싸웠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상당한 고수임을 짐작케 했기 때문이다.
“이년! 어디서 한눈을 파는 것이냐!”
그때 여유로움을 보이는 백리지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황염이 더욱 거친 기세로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 긴장을 풀고 있던 백리지연은 신음을 흘리며 두 발자국 물러섰다.
기세가 갑작스레 바뀌었기에 순간의 대처가 늦은 것이다.
그러나 검후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재빠르게 자세를 가다듬은 백리지연은, 더욱 날카롭게 검을 휘두르는 황염의 공격을 빠르게 막아 내기 시작했다.
신유강은 그것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그때, 장내에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퍽! 퍽! 퍽!
연이어 들리는 소리는 둔탁하기 짝이 없다.
진명이 머물고 있던 후원 쪽에서부터, 신유강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자는 눈앞에 보이는 쓰레기들을 치우는 것처럼 쉽사리 손을 움직였다.
무림맹 무사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진다.
그 어떤 손짓, 발짓도 해 보지 못한 채, 단순히 손을 내젓는 행동만으로 무수히 많은 무림맹 무사들의 명줄을 끊어 놓는 것은 가히, 무신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이다.
신유강의 표정이 구겨짐과 동시에 누군가 그자의 이름을 외쳤다.
“처…… 처, 천마존……”
“사마강…….”
“흐, 흐이익! 커컥!”
난전을 벌이고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재빨리 돌아갔다. 절대자의 등장에 사람들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표정을 굳히며 겁을 집어먹는다.
유유히 걷고 있는 사마강은 어떤 기세조차 흘리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절대자의 위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천마존?”
“……들었던 모습과 같군. 분명하네.”
무현과 청허, 그리고 곁에 있는 진명은, 무림맹 무사들을 보호하며 싸우다, 사마강의 등장에 그곳을 흘겨보았다.
과연 범상치 않은 기세다.
무현은 숨을 고르며 침을 삼켰다.
정도무림의 기둥이라 불리는 소림에서 무수히 많은 고수들을 보아 왔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저자만큼은 아니었다.
확연하게 느껴진다.
강하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놈!”
그러나 말아 쥔 주먹을 펴지는 않는다. 무림인으로서의 긍지이며, 정도무림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마강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멈춰서게, 무현!”
뒤늦게 청허가 소리쳐 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소림의 경공을 밟으며 나아가는 무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용을 보는 듯 웅장하기 짝이 없다.
극성의 내공과 선천지기마저 끌어 올린 힘을 주먹에 담아, 단숨에 천마존 사마강을 죽이려 하는 일격이다.
그러나 사마강은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듯 입을 연다.
“개는 개답게 땅을 기어라.”
쿠쿵!
그것은 단어 그대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바짝 다가온 무현의 주먹을 슬쩍 몸을 비튼 것만으로 피해 낸 사마강은, 파리를 쳐 내듯 가볍게 무현의 머리를 두들겼다.
그리고 그 순간, 퍼걱! 하는 거친 소리가 들리며, 무현의 머리는 여지없이 터져 나가 온 사방으로 날아갔다.
일순 정적이 일어났다.
천하의 칠제.
일곱 절대고수 중 한 명이며 무림맹주인 무현이 고작해야 한 수에 처참하게 죽어 나갔으니,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청허는 몸을 떨었다.
친우의 복수?
그러한 것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칠제가 천마존의 밑이라 불리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어찌 제대로 된 승부조차 할 수 없단 말인가.
단순히 밑이 아니다.
하늘과 땅 차이다.
모든 이들이 몸을 경직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움직인 마교인들의 도륙이 시작되었다.
“끄아아악!”
“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들리며 볏짚처럼 사람이 썰려 나갔다. 백리지연은 물론이며 무림에서 이름 있는 고수들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응전에 나서기는 했지만, 무림맹주가 고작 한 수에 죽어 버린 것 때문인지 사기가 영 말이 아니다.
이대로 가다간 정도무림이 무너질 것이다.
마교천하가 도래한다.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마교인들은 검에 더욱 힘을 주었고, 무림맹 무인들은 이를 갈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멀리 못 갔구나.”
“생각보다 찾아오시는 게 느립니다.”
“껄껄, 늙으니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말이다.”
사마강은 대수롭지 않게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신유강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친손자를 대하는 것처럼 상냥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반대로 신유강은 곤혹스럽다.
“꼭 이러셔야 했습니까?”
“이 노부 또한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
“사정?”
“곧 네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 어서 자세를 잡거라. 이 자리에서 뼈를 묻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신유강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늙은이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다. 그 말인즉, 진심으로 신유강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보여 보거라. 회천공을…….”
신유강은 히죽 웃음을 지으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수많은 바람이 머금어지며, 부드러운 기세가 한가득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본 사마강은 인상을 썼다.
“선선운현무로는 나를 막을 수 없음을 모르느냐?”
“해 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해 보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천공을 드러낼 만큼 신유강은 어리석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쓰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스윽-!
어느새 신유강의 몸이 다시금 사라졌다. 그러나 사마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또 그것이더냐?”
경공이 아닌 완벽하게 그 기척을 감추는 수법,
때문에 사마강조차 그것을 확실히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신유강의 행동은 읽기가 너무 쉽다.
재빠르게 뒤를 돌아본 사마강은, 슬쩍 발을 놀리며 땅을 걷어찼다. 그러자 마치 땅 전체가 갈아엎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힘이 지면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한데, 기척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느껴졌다.
흠칫 몸을 떤 사마강이 눈알을 굴려 그곳을 바라봤다.
쾅!
동시에 매서운 주먹이 꽂히며, 그 파동에 세 발자국 이상 물러서야 했다.
지이익!
지면을 끌고 멈춰 선 사마강의 입가에 핏물이 비쳤다. 조금 전 그 공격이 천마존이라 불리는 그에게조차 통하는 일격이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바라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무림맹 쪽 사람들은 물론, 마교인들조차 말이다.
특히 마교인들의 동요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인즉,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사마강에게 일격을 먹인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있군. 연속으로 움직일 수도 있단 말이지?”
히죽 웃음을 머금은 사마강은 다친 상처 따위야 어찌 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마치 호승심에 불타는 무인처럼 보였으나, 그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쾅쾅!
지면이 터지자 주위에 있는 전각들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공방을 주고받던, 무림맹이든 마교인들이든, 그 여파에 휘말릴까 두려워 어느새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멈춘 채 훌쩍 물러서 있다.
하늘이 울부짖고 바람 찢어지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땅이 무너지고 무관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크게 흔들리니, 곳곳에서 건물이 무너지며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사람마저 그 힘 때문에 서 있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방은 멈추지 않는다.
“이게…… 사람의 무공이란 말인가.”
진명은 떨리는 입을 간신히 연다.
그의 아비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칠제 모두가 덤벼도 천마존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말을.
그러나 단순히 같은 무인으로서 그를 존경하여 한 말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보니 그러한 것이 아니다.
무현을 일격에 죽이는 한 수.
그리고 지금 펼쳐지는 압도적인 힘.
“무신이…… 강림했다.”
누군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무의 무를 넘어 신의 경지를 바라보는 이들의 싸움.
그야말로 천재지변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아니, 이것은 천재지변이다.
지진이 스스로 일어난 듯하고, 돌풍이 몰아치며 천둥 번개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주먹과 주먹이 교차할 때마다 파생되는 힘에 땅이 파이고, 담장이 날아가는 등, 주변을 피폐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권룡이, 저 정도였을 줄이야.”
“대, 단하군…… 지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마교 쪽 인물들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또다시 백 합을 넘어가는 공방이 오가고 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신유강은 이를 갈았다.
‘늙은이가 힘도 좋아.’
수차례 부딪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치는 기색이 없다.
신유강은 회귀신공의 힘이 있으니만큼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사마강은 다르다.
내공이 무한도 아닐진대, 어디선가 끊임없이 퍼다 쓰고 있는 기분이다.
‘내공?’
거기까지 생각한 신유강은 번뜩 고개를 들어 사마강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해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
회귀신공으로 되돌아간 내공을 빠르게 회수하여 다시금 내뱉으니, 애초에 내공이 마르지 않는다 느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