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내공은 점차 고갈되고 몸 또한 늘어지기 시작했다. 예민하던 기감이 둔해지니 기습해 오는 이들을 막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다.
천하 칠제 중 일인, 검후의 위명을 얻은 그녀가 설마하니 이런 오지의 산골에서 죽어 나갈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백리지연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래도 전 무림맹주였던 무현보다는 낫다.
손 한 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그보다, 칠 일 동안 이백에 가까운 천무황성의 인물들을 베고 있는 그녀가 백 배, 천 배 이상 나은 것은 당연하다.
백리지연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힐끗 눈알을 굴렸다. 내공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니 한참이나 떨어지는 수준의 인물들이 어느새 뒤에 바짝 쫓아와 있다.
그녀는 매섭게 검기를 뿌렸다.
촤촤좍!
허공에서 몸을 틀며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천무황성 무인들이 눈을 부릅떴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뿌려지는 검기에 전신이 난자되어 자욱한 피를 뿌렸다.
내공이 고갈되고 있는 상태로 보여 방심하고 있던 이들이 바짝 긴장하며 신음을 흘릴 정도로 대단한 기세다.
“물러서지 마라! 상대는 고작 한 명이다. 검후라 해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으니, 조금만 더 버틴다면 저년의 목을 따는 건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검후의 뒤를 쫓는 것은 천무황성 내에서도 상당한 정예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용천대(龍天隊)다.
마교의 정예들과 맞붙는다 해도 절반의 승산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집단이며, 정도 무림맹조차 쉬이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다.
때문에 백리지연은 더욱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진 단순한 물량으로 치고 오던 이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강해지기 시작해선 어느새 용천대마저 나서고 있다.
자칫하다간 우자혁이나 부성주까지 나설 것 같은 상황이다.
때문에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화산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용천대를 막지 못할 정도로 화산에 고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만 포기하시오, 검후!”
“흥! 제 힘이 두려워 다수로 핍박하는 이들께서 재미있는 소리를 하시…… 아악!”
백리지연은 앙칼지게 소리를 치며 더욱 발을 놀렸다. 그러나 순간 내공이 흐트러지며 발이 꼬이더니, 그대로 지면을 향해 뒹굴었다.
“으윽…….”
그나마 버티고 있던 내공이 바닥난 것이다.
백리지연은 앙칼진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천대 무인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칠제의 일인, 무현은 천마에게 일장에 쳐 죽고, 검후는 화산의 품에서 죽는다. 멋지지 않소이까?”
“웃기는 소리…….”
“하하, 보시오, 검후. 검후는 이 화산의 문도가 아니었소이까? 고향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건 무인에게 있어 상당히 드문 일이오. 예까지 도망치시느라 수고하셨소.”
용천대주는 비릿하게 웃으며 발을 움직였다.
퍼억!
“컥!”
내공 없는 몸으로 얻어맞은 백리지연이, 마치 종잇조각처럼 힘없이 날아가 땅을 뒹굴다 바위에 부딪히며 비명을 터트렸다.
“아아악!”
“걱정하지 마시오, 검후. 곧 남은 칠제 모두를 보내 드리겠소.”
천무황성은 검후를 시작으로 칠제들을 모조리 죽일 심산이다. 사천에서 일이 터진 이후 정파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는 바로 지금이, 중원에 천무황성의 깃발을 걸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용천대주는 날카롭기 그지없는 검을 들어 올렸다.
“이 검은 말이오, 특별히 검후의 목을 치기 위해 성주께서 하사하신 보검이오. 나에게 죽는 것이라 생각치 말고, 우리 성주의 손에 가신다 여기시오.”
씩 웃음을 지은 용천대주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칠 듯 기세를 뿌리고 있었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검후를 저승으로 보내는 것으로 정천대전이 벌어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그 첫 축포를 쏘아올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손이라는 사실에, 용천대주는 너무나도 기쁜 듯 입가에 맺힌 미소를 쉬이 지우지 않는다.
바로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흐음, 다 좋은데 말이네……. 노부의 길을 막지 말고 비켜 주는 건 어떠한가?”
“분위기 좋은 뎁쇼?”
예나 지금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흑호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사마강의 매서운 눈빛이 그를 향해 꽂혔다.
순간 기겁한 흑호가 굳게 입을 다물자, 사마강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재차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 웬 놈이냐!”
용천대원들은 갑작스런 이들의 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원은 고작해야 다섯 명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 소녀가 한 명, 그리고 약간 멍청해 보이는 이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축 늘어진 붕대 남자를 업고 있는 자 등, 척 보아도 심상치 않은 이들의 모습에는 평범한 이들이라도 충분히 겁을 집어먹을 것이다.
그러나 용천대원들이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이리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리지연 또한 마찬가지다.
당장이라도 검을 내리쳐 목을 가를 것 같았던 용천대주가 멈칫하자,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저자들은……?’
낯익은 이들이 보였다.
신유강의 장원에서 일을 하는 흑영과 흑호라는 자들, 또 어린 소녀는 분명 진소소의 옆을 떠나지 않았던 청랑이다.
게다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한 도우겸마저 있었는데, 그는 전신에 걸쳐 둘둘 붕대를 말고 있는 사내를 업은 채 연신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그렇게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돌연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저자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사천에서 일이 떠오르자 온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정신적으로 상당한 압박감을 받은 듯, 동공마저 풀리는 기분이다.
“처…… 천마존…….”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다주었다. 상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탓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던 용천대원들은 돌처럼 굳어 입을 여는 것은 물론,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처, 천마존…… 이라고?”
용천대주는 숨이 넘어갈 듯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야말로 죽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교인들에게 경외의 대상이기는 하나 다른 무인들에게 있어 천마존이라는 이름은 저승사자, 아니, 저승을 다스리는 지옥귀(地獄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호오, 사천에서 보았던 그 계집이로군. 화산에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인가?”
사마강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유유자적(悠悠自適)한 모습이다. 눈앞에 있는 백리지연은 그와 적대적 관계에 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러한 것을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아니, 애초부터 안중에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사마강에게 있어 백리지연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같을 테니.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흐음……. 대답을 해 줄 의리는 없다고 본다네. 그런데…… 우리가 갈 길이 바쁜데 자네들은 언제까지 막고 있을 심산인가?”
사마강은 여유로움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용천대를 바라봤다.
기실 그들이 있는 곳은 길이라 할 수 없는 산 속이다.
화산파로 올라가기 위해 만든 길이 아니니만큼 애초에 길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용천대의 인물들 수가 워낙 많았던 탓에, 확실히 사마강이 걷는 길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용천대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주를 바라봤다.
천마존이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부터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그가 진짜 천마존인지 아닌지 확인할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다.
눈앞에 있는 이는 천마존, 본인이다.
“비키지 않을 심산인가 자네들은? 아니면 시체가 되어야 비킬 겐가?”
파스스!
사마강이 한 걸음을 내딛자 주위에 생생하게 피어 있던 풀과 나무들이 순식간에 썩어 가기 시작했다. 주위는 마치 죽은 땅을 보는 듯하였고, 땅은 검게 물들어 흉측하기 짝이 없다.
용천대원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저 검은 기운에 몸이 닿기라도 한다면 결코 살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 실례했소이다…….”
용천대주는 자존심을 구기며 조심스레 옆으로 물러섰다. 천무황성의 일인이자 중원 내에서도 내로라하던 고수로 불리는 그가 물러나는 모습은, 어디 가서 쉬이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끄응……. 이들은 누군데 이곳에서 이 난리입니까?”
사마강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던 그때,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던 신유강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애초에 신유강이 용천대를 알 리 없으니만큼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다.
“그렇군, 네놈은 모르는 것이냐? 용천대라는 녀석들이다. 천무황성의 상급 고수들이지.”
천무황성이라는 말에 신유강은 검미를 찌푸렸다. 과거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인지만, 붕대 탓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는 이들은 없다.
“천무황성이라면 분명 그 우자혁, 그놈이 있는 곳이지요?”
“호오……. 만난 적이 있느냐?”
“예전에 말입니다……. 잠깐 붙은 적이 있지요.”
지금 이곳에 이십 년 전 과거의 일을 알고 있는 이는 백리지연밖에 없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은 온통 사마강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인지 신유강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반대로 용천대의 인물들이나 다른 이들은 신유강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우자혁과 맞붙고 살아난 이들이 없으니 용천대 딴에는 신유강의 정체가 궁금했고, 청랑이나 흑영의 입장에서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사마강만이 무언가 짐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놈이 보기에 어떻더냐?”
“재능 면에서 대단한 놈이었지요. 확실히 저보다 우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거기까지 말을 하던 신유강은 용천대 인물들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봐야 일격에 뻗어 버려서, 무슨 무공을 쓰는지조차 모르고 있지만 말입니다.”
“네가 일격에 뻗었다는 소리냐? 아니면 우자혁인가 뭔가 하는 놈이 당했다는 소리냐?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이 자식아.”
흑호는 신유강이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삐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확실히 신유강의 말투는 누가 일격에 뻗었는지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자혁 그놈 말입니다. 애초에 제가 누구에게 진 적이 있습니까?”
“하긴 그렇지.”
단언하는 신유강의 말에 흑호는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누구에게 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만큼, 지금 신유강의 상태와 상황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반면, 내색하지 않았으나 흑영이나 흑호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사마강과 비등한 수준에 오른 것은 둘째치고, 현재 사천에 또 다른 신유강이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그때 성주에 대한 모독을 참을 수 없었던 용천대주가 신유강을 보며 소리쳤다.
“이보시오! 누구신지는 모르나 우리 성주에 대한 모함은 쉬이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