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자급자족으로 사람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신유강은 어느 정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돈이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무인이라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사람다운 행색을 하며 떵떵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돈을 틀어막는다면?
신유강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저희가 어디를 가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때 백리지연인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화산에서부터 이곳 하남 어귀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함께 여행 아닌 여행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소림이나 무림맹을 찾아가는 것이라 판단했다. 천마존이 움직였으니 무림을 한바탕 뒤집어엎으려 모인 집단이라 생각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말을 들어 보니 그쪽에는 영 관심이 없는 것 같지 않은가.
“주가장이다.”
그녀의 질문에 답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신유강이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탓에, 백리지연은 아직까지도 그가 신유강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주…… 주가장?”
주가장이라는 말에 백리지연은 얼떨떨한 표정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인 데다가, 거짓이 아닌지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곳을 갈 생각을 하는 겁니까? 진심으로?”
“호오…….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라도 있느냐?”
사마강은 돌연 흥분하는 백리지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그녀가 처음으로 보이는 행동이었으니, 주가장의 대해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왜 가시려는 거죠?”
“의선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이가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몸을 고치기 위해서 말이지.”
백리지연의 말을 되받은 것은 신유강이다.
붕대를 뒤집어쓴 얼굴로 미소를 지었으나 그것을 백리지연이 알 리가 없다. 그저 한 차례 신유강을 쏘아보더니 곧 앙칼진 눈빛으로 사마강을 쳐다봤다.
“설마 그런 것 때문에 천마존께서 직접 이 하남 땅까지 행차하셨다는 말인가요?”
“물론이네.”
“화산을 친 이유는?”
“그들이 먼저 내게 검을 들이댔다네. 살려 줄 이유 따위 없지 않은가?”
백리지연은 앙칼지게 이를 물었다.
살려 줄 이유 따위 없다.
강자의 입에서나 나오는 여유로운 말, 그러나 기실 사마강은 강자이며, 그에게 검을 들이대는 순간 누구라도 죽음을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 나도 자네에게 묻도록 하지. 주가장과는 무슨 관계인가?”
“…….”
백리지연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상대는 천마존, 정파의 적이며 무림맹주를 죽인 원수이고, 그녀의 사문이라 할 수 있는 화산마저 농락한 장본인이다.
그런 이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거 안타깝군……. 나는 자네가 주가장과 연이 있는 것이라 여겼기에 다소 흥미를 가졌다네. 그 연으로 우리가 주가장에서 이놈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지닌 이를 만나게 해 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네.”
사마강은 힐끗 신유강을 바라봤다.
붕대에 가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슬슬 몰아치는 천마신공의 기세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듯하다.
“으윽…….”
그것은 백리지연 또한 마찬가지다.
정면에서 몰아치는 기세는 가히 하늘을 뒤덮은 암운(暗雲)과도 같다.
이것이 죽은 전 무림맹주, 무현이 마주했던 천마존이다. 백리지연은 아찔함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의 골통이 터져 나갈 것이라 예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마강의 말은 전혀 다르다.
“답을 하지 않겠다면……. 그렇군, 먼저 백리세가를 쳐 볼까? 그리고 팔대세가를 하나하나 밟아 준 후, 구파의 이름을 사라지게 만들어 주겠다. 어떠하냐?”
명백한 협박이다.
그러나 단순한 협박이라 치부하기에는 상대가 강해도 너무 강하다. 검후라 불리는 그녀의 내공을 금제해 버린 능력만 보더라도 마교의 힘 따위 사용하지 않고, 충분히 홀로 중원 무림을 발아래 꿇릴 만한 능력의 소유자임은 틀림없다.
백리지연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중원 무림에 일체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마강이 그녀의 말 한 마디로 움직인다면, 백리지연은 아마 큰 충격에 빠질 것이다.
“……주, 주가장은 백리세가와 자그마한 인연이 있어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입니다.”
백리지연은 자신의 초라함을 다시금 되새겼다.
힘 앞에 굴복하지 않은 이가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죽으면 죽었지 결코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사부라 불리는 무황의 앞에서도 당당했으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꿀린 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 사마강은 마치 그녀의 그런 정신마저 가지고 농락하는 느낌이다.
“그렇군. 그럼 네가 있다면 주가장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로구나.”
사마강은 만족한 듯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묵직한 기운이 전신을 억눌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백리지연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라 할 수 있었다.
백리지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떨었다.
정말이지 두려운 자다.
“너무 크게 신경 쓰지 마라. 단순히 주가장에서 나를 치료할 수 있나 없나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인지, 신유강의 목소리는 자못 부드러웠다. 애초에 그에게는 정사의 개념이 따로 없어서, 백리지연이 지금 어떠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태어나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들 중, 지금 이 상황이 그녀에게 있어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하남 주가장의 역사는 무림과 함께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세월이 깊이가 대단하다. 고작해야 장원에 불과한 곳이, 무림맹과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곳인 것만 보아도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해주는 일면이다.
정문을 지키고 서 있는 무사들의 눈빛은 매섭다. 폐쇄적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굳게 닫혀 있는 문은 쉬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단하군.”
신유강은 그것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어린 시절 이 근방을 돌아다닌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주가장을 이리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늘어진 담벼락과 굳게 닫힌 정문.
한 걸음, 한 걸음.
그곳과 가까이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기이한 기운이 느껴지며 왠지 모를 상쾌함이 들었다.
“멈춰 서게!”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신유강은 돌연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사마강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주가장에 용무가 있는 것인가?”
“허허, 물론이네. 이곳에 상당한 소질을 지닌 의원이 있다기에 손자를 고칠 수 있나 싶어 찾아왔다네.”
사마강의 말에 문지기들은 힐끗 신유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눈빛은 꽤나 날카로웠다.
“이곳은 의원이 아니오.”
“허허, 물론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저쪽에 있는 백리세가의 아이가 이곳이라면 분명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여 찾아온 것이네. 잠시라도 좋으니 의원을 만나게 해 줄 수는 없는가?”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마강의 말에 문지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런 약속조차 잡혀 있지 않은 외부인을 안으로 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백리세가의 소개가 있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더욱이 그들이 보기에도 신유강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단순한 꾀병으로 주가장을 치기 위해 온 이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문지기들은 긴장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세가의 소개라……. 증명할 수 있으시오?”
검후 백리지연을 모를 리 없건만, 저리 말하는 것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마강이 슬그머니 백리지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레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품속에 있던 옥패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이것은 오래전 주가장에서 나온 옥패입니다. 백리세가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틀림없는 진품이고, 제가 백리세가의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백리지연은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고분고분 사마강의 말을 따라 주고는 있었지만, 기실 그녀 또한 주가장을 찾는 것은 처음인지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다.
연이 있어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주가장 내부 행사에 참가한 적도 없었고, 그들과 따로 면식이 있는 것 또한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기다리시오. 기별을 하고 오겠으니.”
문지기의 말에 사마강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백리지연의 말이 거짓이거나, 혹은 기별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면, 응당 정문을 부수고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그에게 힘을 아낄 수 있는 좋은 상황이다.
“자, 그럼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놈을 내려놓고, 흑영과 흑호는 사천에 대한 정보를 좀 모아 오너라. 물론 이놈도 같이 말이다.”
지금까지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도우겸은 드디어 천마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입가에 환한 웃음이 맺혔다.
성격이 성격인지라 툭툭 싸가지 없는 말이 튀어나오니만큼, 천마존 앞에서 말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명!”
흑영이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도우겸의 뒷덜미를 잡아끌자, 어느새 청랑과 흑호마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신유강의 상태가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사마강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사마강과 함께 있는 신유강을 그 누가 있어 건들 수 있단 말인가.
지금은 그저 사마강의 명령을 이행하며 신유강에게 벌어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머릿속에 정리해 놓는 것이 우선이다.
“제 역할은 이제 끝인가요? 그러면 어서 금제를 풀고 저를 놓아 주세요.”
백리지연은 지금 당장이라도 무림맹으로 돌아가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손을 쓸 수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무사들을 모아 놓아야 했다.
언제 사마강의 기분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강은 백리지연을 쉬이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이놈의 일이 해결될까지 함께 다니자꾸나. 그리고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하지 않으냐?”
“…….”
백리지연은 말없이 사마강을 응시했다.
내공에 금제를 가하지 않더라도, 사마강의 능력이라면 백리지연이 무슨 수작을 부리더라도 충분히 막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제를 가한 것은, 혹시나 그녀가 신유강에게 어떠한 짓을 벌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백리지연 또한 알고 있었기에, 웃으며 고개를 젓는 사마강에게 그 어떠한 말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