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씁쓸하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진소소는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두 발로 땅에 섰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무리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당소혜의 입을 조심스레 틀어막으며, 되었다는 듯 그녀의 등을 떠밀어 냈다. 더 이상 아무런 말조차 하지 말라는 듯, 또한 자신을 가엾이 여기지 말라는 듯.
그녀는 힘찬 웃음을 짓는다.
당소혜는 신유강과 진소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고, 그것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마저 깨달았다.
때문에 더욱 진소소를 데려가고 싶었던 당소혜였지만, 지금은 그 어떠한 것도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결코 가만히 있지만은 않으리라.
“……나중에 상황을 보러 올게요.”
당소혜는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몸을 날렸다. 타오르는 장원을 뒤로한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였으나, 곧 사람들이 이 장원을 향해 몰리고 있는 것을 보며 한시름 놓은 표정이다.
“이제 되었나요?”
진소소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애초에 당소혜를 따라 사천당가로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신유강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
그가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아마도 남아 있으라는 뜻일 터다.
“객잔이 불타고 장원마저 타 버렸다. 너와 네가 알고 있던 신유강과의 끈을 끊긴 것이라는 소리지.”
“…….”
피식 웃음을 머금은 신유강은 등을 돌려 천천히 장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던 만큼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울컥울컥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나름 상쾌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주위 풍경이 삽시간에 뒤바뀌며 완벽하게 전소(全燒)되어 버린 객잔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지금의 신유강에게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그 또한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빛으로, 천천히 눈을 감고 회귀신공의 힘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을 때. 황금빛 광망이 눈동자에 머금어져 있었으며, 보이는 풍경은 타 버린 객잔이 아닌 멀쩡한 객잔의 모습이었다.
과거를 본다.
지금 그는 과거를 보고 있다.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고, 그 눈빛은 천천히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객잔이 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다시금 몸을 움직인 이들이 장원으로 향하는 모습, 장원이 타오르고 다시금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마저 눈에 새긴 신유강은 피식 웃음을 머금고 등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가 본래의 색을 되찾는다.
“겁 없는 놈들이로군.”
슥-!
다시 한 번 일보를 내딛자 주위에 풍경이 또다시 뒤바꼈다.
보이는 것은 어느 작은 객잔의 모습, 그곳에는 수많은 낭인들이 술판을 벌이며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푸하하하!”
“상쾌하군!”
신유강이 나타났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지 웃음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객잔과 장원을 태워 먹고 곤혹스러워 할 신유강을 떠올리니, 기분이 들떠 술이 들어가는 것이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정적을 깨부순 것은 다름 아닌 신유강이다.
“좋더냐?”
작은 목소리.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시선을 돌린 낭인들은 표정을 굳히며 쥐고 있는 술잔을 떨어트렸다.
들키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나 쉬이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내지 못하는 것은, 슬쩍 미소를 짓고 있는 신유강의 얼굴이 너무나도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이거 신…… 대협 아니십니까. 이곳엔 무슨 일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을 느낀 객잔 주인은 조심스레 말하며 신유강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신유강은 대답 없이 낭인들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더니, 탁자 위에 놓인 술 한 병을 쥐어 들고 입을 열었다.
“도망가거라. 이 술이 전부 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 순간이, 네놈들의 제삿날이 될 것이니…….”
“무슨……!”
낭인 중 한 명이 너무 놀라 화를 내려는 그때, 신유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술병을 입에 댄 채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낭인들이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인지하고 있는 데다, 지금 신유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완벽한 범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낀 것이다.
“으아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창밖으로 몸을 날리는 이들은 물론, 술을 마시고 있는 신유강을 향해 검을 뻗는 이들 또한 있다.
그러나 뻗어진 검은 어느새 도로 돌아가 있었다. 명백한 타의로 빈손을 움직였던 그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술을 다 마시지 않았으니 살려 준다는 것이다.
허나,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술병을 잡고 있던 손이 슬쩍 떨어지는가 싶더니, 아직 술이 남아 있던 술병이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순간, 쾅! 하는 거친 소리가 들리며 한 낭인의 머리통이 그대로 바닥에 틀어박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술병이 깨어져 나갔다.
신유강이 웃었다.
“깨어져 버렸군. 그리고 네놈들의 목숨 또한…….”
객잔 안에 한가득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펑펑!
창문이 터져 나가고 벽이 무너지며 가지런히 놓인 탁자와 온갖 잡기들이 부서져 나갔다. 사방으로 피가 낭자하며 괴성이 끊이지 않는다.
객잔 주인은 그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 * *
“우…… 움직인다!”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신유강은 더없이 기쁜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얼굴은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으나 그 기쁨을 감추지는 못하는 듯싶다.
목소리는 크게 들떠 있었으며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지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던 것인지 은하련이 고운 미소를 살포시 지어 보였다.
“아직 제대로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얼마 있지 않아 평소대로 생활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를 겁니다.”
“하하하! 의선이라 불린다더니 정말로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붕대 사이로 보이는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그만큼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타인도 아닌 본인에게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은하련은 고운 숨을 내쉬며 살포시 그를 끌어 안았다.
“아…….”
신유강은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하다. 스며드는 과일향이 코를 간질이고, 왠지 모를 포근함마저 든다.
진소소보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안겨 있는 것은 분명한데, 기이하게도 욕정(欲情)이 치솟지도 않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지극히 짧은 순간, 어느새 슬며시 떨어져 나가는 은하련에게 신유강은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다행이네요. 이제 남은 것은 그 얼굴만 고치면 될 텐데…….”
“……아, 가, 가능할 것 같습니까?”
들려오는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신유강은, 그제야 손과 다리보다 얼굴이 더욱 흉측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할 시간이 아니다.
“글쎄요, 영약이 있다면 모를까……. 아,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분명 영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영약을 찾기 위해 사마강은 마교의 서신을 보내 두었고, 청랑과 흑영 등은 산을 샅샅이 뒤지며 혹시 있을지 모를 영약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사실 찾는다는 건 무리다.
“저희 남편에게 부탁해 보는 거에요.”
은하련은 찡긋 한쪽 눈을 감았다 뜨며 수줍게 웃었다.
第五章 둔재제자(鈍才弟子)
신유강은 기본적으로 성격이 더럽다.
물론 아주 어렸을 적이야 수줍고 겁이 많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을 보면 굽신거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대로 또래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에 있어 천부적이며, 마음에 들지 않고 뒤탈이 없을 것이라 판단된다면 주먹부터 나가는 싸가지다.
그 예로 왕윤은 어렸을 적부터 신유강을 괴롭히려 무던히 애를 썼으나, 회귀신공을 익히기 전에도 단 한 차례도 신유강을 이긴 적이 없다.
또한 회귀신공을 익히고 난 뒤,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삐딱한 태세로 나가는 것은 물론, 그 때문에 여기저기 적을 만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신유강에게도 무서운 이들은 있다.
한 명은 천마존이라 불리는 마교의 절대자이며 천하제일인 사마강이다. 제대로 손을 섞어 본 적은 한 번뿐이 없지만, 회귀신공에도 밀리지 않은 것을 익히고 있었던 탓에 한 수 접어 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신유강의 입에선 단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올 것이다.
“히끅!”
신유강은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 인간이 어찌하여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십 년 전, 회귀하였을 당시 만난 이후 십 년간 괴롭힘을 당하여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떠는 인간이다. 더욱이 회귀신공마저 통하지 않은 이였으니만큼, 설령 힘을 잃기 전이라 하더라도 신유강의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신유강을 바라보며 은하련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를 어떻게 뜯어봐도 겁을 먹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은하련은 시선을 돌려 주유선을 바라봤다.
앙칼지기 짝이 없는 눈빛 때문인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신유강을 바라보고 있던 주유선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은하련은, 주유선이 신유강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겠지.
“사부를 보았으면 응당 머리를 조아려야지, 이놈아.”
퍽!
한순간의 일이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이형의 기운이 신유강의 머리를 짓눌렀고, 어느새 그는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은하련이 화를 내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슬쩍 손을 들어 올리는 주유선 때문인지 뾰로통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죄, 죄송합니다.”
신유강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며 사죄했다. 기실 너무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탓에, 인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단순한 실수임이 분명하나 돌아온 것은 참으로 잔혹하다.
신유강은 아픈 머리를 쓰다듬으며 헤픈 웃음을 지었다.
“헤헤헤.”
“아둔한 놈 같으니라고. 나이가 몇인데 어린아이처럼 구는 것이냐?”
이미 회귀신공이라는 힘 때문에 상당히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주유선은, 철없어 보이는 신유강의 행동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옆에서 조심스런 말을 들려왔다.
“당신이나 잘하고 애한테 뭐라 그러지?”
주유선에게는 몇 명이나 아이들이 있다.
대부분 이 장원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고, 또 몇몇은 이미 죽어 백골이 되었지만 어쨌든 주유선과 닮은 성격을 지닌 이는 그리 없다.
주유선의 피보다는 엄마 쪽 피를 짙게 이어받은 탓인지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신유강이란 아이는 주유선의 피를 조금 많이 타고난 아이다.
며칠 동안 간병을 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신유강의 방에 드나들었던 은하련은, 왠지 모르게 이 두 사람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격 면에서는 확실히 주유선이 더욱 심하지만, 신유강 또한 못지않은 듯하다.
얼굴 면은 자세히 뜯어본다면 상당히 같다.
아마도 이곳을 찾아온 사마강이나 다른 이들이 주유선을 본다면 똑 닮았다는 소리를 입에 담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