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평소라면 쉬이 들어올 수 없는 하남이 분명하나, 무림맹이 어수선하다는 것이 사실인지 쉽게 침입할 수 있었다.
목표라 할 수 있는 백리지연을 포착하는 것까지도 쉬웠다.
그러나 바로 습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하필이면 주가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한 달.
인내심이야말로 지금의 우자혁을 만들어 준 최고의 무기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아무리 천무황성에 성주라 하여도 주가장을 상대로 힘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이게 웬걸?
백리지연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우르르 몰려나온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전율이 이는 천마존 사마강이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무황이 있었다.
백리지연이 무황의 제자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니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긴 하나,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울화를 참는 것이 힘들 정도다.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 늙지도 않는 것인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 또한 상당한 수준에 올랐는지, 여전히 일말의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자혁은 인상을 쓰며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수하들은 당장이라도 공격할 수 있는 태세로 준비 중에 있었고, 돌연 사마강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습격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성립되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거라.
그러나 우자혁은 단호히 움직임을 막았다.
백리지연 혼자였다면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충분히 손을 썼을 것이다.
강하다고는 하지만 현 무림맹주인 진명이 오기 전, 확실히 그녀의 목을 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무황이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자칫하다간 무황과 백리지연, 그리고 진명을 비롯한 무림맹 고수들과 한판 어울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하남을 벗어나는 길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보며, 우자혁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기세를 가다듬었다.
자연스레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 * *
하남을 벗어나 대로를 타고 사천으로 향하기 시작한 신유강은, 힐끗힐끗 시선을 돌려 백리지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두려워해 마땅한 사마강은 이미 존재하지 않음이 분명한데, 백리지연은 지금까지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는 듯하다.
“무슨 일이 있소?”
툭 하고 묻는 질문에 백리지연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지금 신유강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 있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마강과 무황이 아는 사이라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과거 그는 마교의 부교주인 마중천을 반죽음이 될 때까지 두들겨 패지 않았던가.
아니,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제야 백리지연은 말문을 텄다.
약 한 시진 동안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듣기 위함이다.
때문인지, 주먹을 굳게 쥐고 있는 그녀는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사람 같았다.
“뭐든 말해 보시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대답해 드리겠소.”
“……화산……. 화산을 무너트린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파일방의 화산이 무너졌다.
그것을 모르는 이들은 현시점에서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덕분에 무림맹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 흉수라 불리는 천무황성을 향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다.
허나, 맹 내에서도 상당히 직위가 있는 이들은 그것이 천무황성의 짓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함정을 파 놓았는지는 모르나 정확히, 너무 뚜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백리지연은 앙칼지게 이를 악물었다. 만약 타당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당장에 칼을 뽑아 들고 신유강을 베어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소혜는 입을 쩍 벌렸다.
화산이 무너졌다는 소리는 그녀 또한 들었다. 그러나 그 흉수가 신유강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네가 화산을 무너트렸어?”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그 늙은이다. 애당초 그 당시에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으니까.”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계속해서 드는 의문에 백리지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았던 신유강의 상태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얼굴은 흉측하게 변해 있었고, 힘줄과 단전이 무너진 탓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알고 싶네요. 비록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화산에는 제 동문들이 있었어요.”
“그런 것은 내가 아니라 사마강 그 늙은이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오. 그리고 애초에 먼저 손을 댄 것은 우리 쪽이 아니라 화산이오.”
“…….”
“생각을 해 보시오, 검후. 사마강이 눈앞에 있는데 검을 휘둘렀소. 그 콧대 높은 늙은이가 가만히 있을 줄 아오?”
신유강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어이없이 웃었다. 상대는 확실히 천마존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이 화산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라는 것이겠지.
허나, 죽는 자존심이라면 세워서 무엇할까.
사람이란 살아야 자존심을 지킬 수 있으며, 그래야 복수도 할 수 있다. 정파의 기둥 중 한 곳으로서 천마존에게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하나, 기실 그들의 행동은 썩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화산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소만, 썩은 계란으로 던질 곳을 잘못 짚은 것이오. 애석하지만…….”
신유강은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힐끗 백리지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당장이라도 신유강을 향해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말을 고르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어이없는 말이 들려와 울화가 치민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입장에선 응당 당연한 반응이다.
“나를 향해 검을 뻗을 힘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다른 곳에 써 줬으면 하오만?”
주변은 대로.
그러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날이 저물 시간임이 분명하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필경 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신유강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서며 주위를 둘러봤다.
슥슥.
그리고 어느새 하나둘씩 청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 그리고 형형하게 눈빛을 빛내며, 마치 신유강을 압박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다.
“힉!”
당소혜는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저도 모르게 신유강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녀에게 있어선 무림은 정말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신유강은 슬그머니 당소혜를 감싸며 주변을 둘러봤다.
청의인들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오히려 점점 더 침착해져 가는 느낌이다.
마치 전혀 위협을 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청의인들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자가 있었다.
과거보다 상당히 늙은 느낌, 그러나 그 인상이 변한 것은 아니다.
흉흉하게 살기를 뿜어 대고 있는 그는 백리지연이 아닌 신유강을 바라보며 매섭게 기파를 쏘아 대고 있었다.
심즉살(心卽殺).
마음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경지다.
천마존이나 되야 가능한 경지이긴 하지만 지금 우자혁은 마치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인 것처럼, 신유강을 죽이겠다는 일념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살기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찌릿거리며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당소혜는 새끼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몸을 떨며 당장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으려 하고 있었다. 신유강을 향해 뿜어낸 살기라고는 하지만, 그 뒤에 있는 그녀 또한 자연스레 범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유강은 검미를 좁히며 슬그머니 당소혜를 백리지연이 있는 쪽을 향해 밀어냈다.
“우리 강아지 좀 잘 지켜 주었으면 하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지만, 그것을 농으로 듣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다만 백리지연만이 약간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당소혜를 살포시 부축할 뿐이다.
“무언가 문제가 있소?”
“저기…… 그러니까…….”
백리지연은 당황스럽다.
천무황성에 이들임을 확연히 보여 주는 면면들.
더욱이 저 앞에 있는 것은 성주인 우자혁이 분명하다. 당장 검을 들고 저들을 견제해야 함이 마땅하나, 그녀는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저기…… 금제가…….”
“금제?”
“처, 천마존이 제게 금제를 가했어요. 덕분에 내공을 전혀 쓰지 못하는…….”
신유강은 검미를 찌푸렸다.
늙은 양반께서 치매가 온 것인지, 자신이 한 일조차 해결하지 않고 물러나 버렸다.
더욱이 흑영과 흑호, 그리고 청랑마저 데리고 갔으니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신유강은 어느 정도까지 무공을 쓸 수 있는지 확인해 보지 않은 상태다.
회천공은 물론 회귀신공을 사용할 수 없으니 선선운현무를 펼쳐야 함이 마땅하다.
그것으로 이길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지. 혹여 내가 죽거든 사천에 있는 내 장원 안에 묻어 주시오.”
농담 같지 않은 말에 백리지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무황이라면, 이 정도 싸움은 쉬이 이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로군. 서로 유언들은 다 남기셨나? 무황.”
그때 우자혁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
또한 무황이라는 말이 들리자, 천무황성의 무인들이 눈을 부릅뜨며 신유강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이는 확실히 사천에서 유명한 권무존이 아니던가?
헌데 무황이라?
“사람 착각하셨소 늙은 양반. 나는 신유강이라 하오.”
“하하, 그 얼굴, 그 목소리……. 내가 한시라도 잊을 것 같던가?”
“본래 늙은이들은 치매라는 것이 온다던데……. 아마도 그런 종류 중 하나일지도 모르오. 나는 당신을 모르오, 우자혁.”
틀림없이 천무황성의 성주, 그것도 그의 이름을 내뱉은 것으로 보아 무황 본인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아떼는 것이 참으로 우스운 상황이다.
우자혁은 피식 웃으며 슬쩍 수하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힘으로는 결코 이기지 못할 상대임이 분명하지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그가 얼마만큼 힘을 키웠는지 알게 해 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오늘 이곳에서 뼈를 묻거라.”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말에 신유강은 아미를 찌푸리며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그의 뒤편에서 한 자루의 비수가 목을 노리며 그어졌고, 어김없이 허공을 갈랐다.
‘감각은 완벽히 살아났다.’
신유강은 힐끗힐끗 눈을 굴리며 하나하나 이들을 확인했다. 기척은 물론 움직임까지 눈에 선할 정도로 확연하게 잡혀 왔다.
회귀신공을 잃었을 때보다 더욱 말이다.
‘그렇다면…… 회천공은 어떠한가?’
빠르게 다가오는 두 청의인들은 절정을 넘은 고수라 하더라도 쉬이 그 움직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유강은 빠르게 휘둘러진 검을 보며, 미리 읽었다는 듯 몸을 놀려 피해 냈다.
사삭!
검은 어김없이 허공을 갈랐다. 신유강의 몸은 어느새 그들과 밀착될 정도로 바짝 붙어 있었다.
우웅!
손을 뻗어 기운을 담았다.
단전에 있는 내공이 빠른 속도로 몰려들며 현선자가 품었던 회천공을 그대로 재현해 내려 하고 있다.
허나 도중부터 마치 기혈이 들끓는 느낌이 들며, 몰려든 기운들이 날뛰기 시작하자 신유강은 눈썹을 찌푸리며 훌쩍 물러섰다.
청의인들에게 있어선 운이 좋았다.
‘회천공은 안 된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