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화야
말라 비틀어진 고목 아래 서 있던 사내의 입이 벌어졋다. 훅, 붉은 액체가 튀어 나와 메마른 낙엽을 흠씬 적셨다.
이제 이십대 중반쯤 됐을까.
주먹을 불끈 틀어쥔 사내의 몰골은 그지없이 참혹하다. 토해낸 피가 목을 타고 흘러 가슴을 흥건히 적시고,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무엇인가가 찢고 나오려는 듯 무섭게 꿈틀댔다.
주화입마.
내공을 지닌 무인이 운기행공을 잘못하거나,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내기를 뽑아냈을 때 나타는 진기의 역류현상이어싸. 무인이 주화입마에 들게 되면, 뼈를 부수고, 근육을 자르는 듯한 분골착근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거나, 아니면 폐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 증상은 무공이 강하 무인일수록 더욱 심해진다.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사내는 상당히 강한 무공을 소유한 자일 테다.
고통으로 인해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지만 사내는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전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느냐?”
사내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사내의 입이 열리자 입 안에 고여 있던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 널 구해내기 위해 흑랑기 일천이백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무상!”
“ 대장은 날 그대로 뒀어야 했습니다.”
“ 내가 가지 않았다면 넌 죽었다.”
“ 좀 더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 적에게 포로로 잡힌 부하를 구하는 건 모든 일에 우선한다. 난 그렇게 믿었고 그 일을 했을 뿐이다.”
“ 일천 명 중에 대장을 포함해 여섯 명만 살아왔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무상 너는 내 명령에 단 한 번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이다.”
“ 그건 첨목장군의 명령이었습니다. 대장은 그의 명령을 제게 전달한 것뿐입니다.”
“ 너를 적진으로 보낸 사람이 천목장군이 아니라 나다, 무상.”
“ 흑랑기의 죽음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 그들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또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난 흑랑기를 데리고 내 부하를 구하러 갈 것이다.”
“ 나는 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대장.”
“ 넌 군왕세자다.”
“ 군왕세자라 해도,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제가 끌어들이고 싶었던 자는 대장을 비롯한 흑랑기가 아니라 첨목장군과 북로장군이었습니다.
“ 적랑에게 죽은 여자였느냐?”
“ 그렇습니다. 대장, 난 그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습니다.”
“............”
“ 이제야 아셨습니까? 전 대장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적진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녀를 만나러 간 겁니다.”
“ 그렇다고 해도 난 너를 구하러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대장은 모든 걸 잃었습니다. 일천에 달하던 흑랑기도, 정천호의 관직도. 어쩌면 효수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 쿡! 역시 당군답군요.”
무상은 픽 웃으며 품속을 더듬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피로 범벅인 목걸이가 들려 나왔다.
“ 부탁이 있습니다.”
“ 그걸 전해주란 말이냐?”
“ 구림세가의 이지약 소저에게 이 목걸이를 전해주면 됩니다.”
“ 이지약?”
“ 제 정혼녑니다.”
“........?”
“ 저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약속해 놓고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으니까요.”
무상은 어눌하게 웃었다.
“ 알아다. 살아서 만나면 전해주도록 하마.”
사내는 초승달 형태의 푸른 보석이 달려 있는 목걸이를 갈무리했다.
“ 직접 만나게 되면 제가 미안하다 하더라고 전해주십시오.”
“ 이 목걸이를 본인에게 전해주란 말이구나, 알았다.”
“ 이제 됐습니다.”
무상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무슨 뜻이냐?”
“ 목을 쳐주지 않으면 제 스스로 온몸을 난자하고 말 겁니다. 대장.”
무상은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데 손가락 마디가 장심을 파고들어가 있었다.
“ 정말 그렇게 해주길 원하느냐?”
“ 이렇게 하면 마음이 좀 편해질 겁니다.”
무상은 오른손을 들어 눈을 사정없이 찔렀다. 곧이어 빠져나온 그의 손가락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둥근 물체가 꽂혀 있었다.
“ 개자식!”
사내는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촤르르!
그러자 그의 팔찌에서 종이처럼 얇은 면도가 풀려나왔다. 면도의 길이는 거의 일 장에 가까웠다.
“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개독새. 개독새 당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 나도 즐거웠다. 주무상, 영원히. 널 기억하마.”
사내는 면도를 번쩍 들어올렸다.
빰빠라빠 빰빠빠! 빰빠라빠 빰빠빠!
“ 씨팔! 저놈의 양귀비 여물 씹는 소리는....”
연우강은 눈을 번쩍 뜨며 욕설을 지껄였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인시 말일 테다. 군을 떠난 지 이 년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인시 말만 되면 어김없이 기상나팔 소리가 귓전을 후벼판다.
연우강은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에취!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심하게 재채기를 해댔다. 베개에 밴 지분 냄새 때문이다.
“그만 좀 괴롭혀라. 자식아. 네가 꿈에 나타나면 난 하루종일 재수가 없단 말이다!”
연우강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벌거벗은 동체가 드러났다. 갸름한 얼굴과는 달리 상반신은 준마처럼 탄탄했다.
“ 내가 그녀를 만나기 싫어서 찾아가지 않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놈들이 아무도 없어 전해주지 못한 거라고!”
연우강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그의 목에는 초승달 형태의 푸른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 한 번만 더 나타나면 지옥까지 쫓아가서 밟아버릴 거야. 자식아.”
윽박지르듯 소리친 연우강은 지분 냄새가 짙게 밴 이불을 둘둘 말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불을 한편 구석으로 던져놓고 목욕을 한 뒤 경장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툭!
몇 걸음을 옮기다가 발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 아직도 돌이네.”
연우강은 날아가는 돌멩이를 쳐다보다가 후원으로 향했다. 잠시 뒤 커다란 나무들에 둘러싸인 작은 공터 앞에서 발을 멈췄다. 아침 운동을 하는 장소였다.
공터 중앙으로 걸어가 몸을 풀었다.
손목, 팔꿈치, 어깨, 목 수능로 관절을 푼 뒤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손을 뻗어냈다.
그런데 그의 동작은 특이했다. 무공을 펼치는 거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하고, 간단하게 몸을 푸는 동작이라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신중하다.
마치 화공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모든 동작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처럼 움직이던 동작이 어느 순간부터 하염없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느린지, 팔을 앞으로 뻗어내는 동작만 반 각을 잡아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작은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왼손을 움직일 때도 다르지 않았다.
손에 이어 발이 움직이고, 굼벵이가 기어가듯 느릿하게 동작을 연결하며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 완벽하군.”
나무 사이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경이로운 눈으로 연우강을 쳐다보는 자는, 이곳 화야장의 총관 귀노 염자생이었다.
귀노는 문득 연우강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타클라마칸 사막.
쫓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라 먹을 건 물론이고 물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적 때문이 아니라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가는 중이었다.
아마 석양이 막 떨어질 때였을 것이다. 모래 언덕에 누워 석양을 보고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노래였다.
폭풍은 날아오르고, 폭풍비(暴風飛)
달빛은 잔인하기 그지없다. 월광잔(月光殘)
미친 늑대는 바람처럼 내달리고, 광랑풍(狂狼風)
검은 해골은 해맑게 웃는다. 묵지소(墨之笑)
난무하는 허상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데, 환환난(幻幻亂)
지옥의 입구는 탄식하며 활짝 문을 열었다. 지옥탄(地獄嘆)
죽음의 꽃은 쉬지 않고 피어나고, 사우화(死雨花)
열여덟 유령은 미친 듯이 춤추네. 혼령무(魂靈舞)
번쩍! 한줄기 뇌전이 허공을 가르니, 뇌력섬(雷力閃)
잘려나간 혼은 그저 망연할 뿐이네. 절혼망(切魂亡)
아! 빌어먹을 사망비비(死亡秘秘)여.
나는 너를 저주하노라.
나직한 노랫가락과 함께 허공을 가득 채웠던 검은 물체들. 그것들은 전부 연우강의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 인간의 몸에서 그렇듯 많은 무기가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보다 그 무기들의 가공함에 숨이 멎고 말았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이백여 명이 거의 동시에 그 자리에 쓰러진 것이었다. 그때 보았던 움지임이 바로 지금 그가 취하고 있는 동작들이다.
그의 무공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때 그가 보여주었던 동작에는 알 수 없는 어색함이 묻어 나왔다.
그런데 이제야 어색하게 느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로 동중정과 정중동의 조화가 부족했던 탓이다. 동중정은 외부는 거칠게 움직이는 반면 내부는 조용한 상태를 말하고, 정중동은 겉은 고요한 반면 내부는 무섭게 움직이는 상태를 말한다.
즉 동중정이 바람이라면 정중동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무인들은 조화지경에 올랐다고 한다.
지금 연우강의 경지가 그랬다.
“ 후우!”
“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연우강이 날숨을 쉬며 자세를 바로 하자 염자생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 듯, 빠르게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편으로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 여기 있습니다. 장주님.”
연우강 앞에 선 염자생은 뚜껑이 덮인 대접을 내밀었다.
“ 정확하네.”
연우강은 대접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탕약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연우강은 약을 단숨에 비웠다.
“ 너무 써, 귀노.”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을 닦았다.
“ 황 약사가 이번엔 상당히 쓸 거라고 했습니다. 감초를 좀 더 많이 넣으라고 할까요?”
“ 감초를 넣으면 약효가 반감되지 않을까?”
“ 장주님께서 단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아는 황 약사가 이번 약을 쓰게 지은 걸 보면...”
“ 약효가 반감된다는 말이네?”
“ 그렇습니다. 장주님. 어떻게 할까요?”
“ 약효도 없는 걸 굳이 아침 공복에 먹을 필요가 없잖아. 그대로 둬.”
“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귀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하얀 천을 꺼내 내밀었다.
“ 뭐지?”
“ 어젯밤 장주님과 잤던 기녀가 마차에서 내릴 때 준 겁니다. 장주님께 전해주라고 하면서요.”
“ 또 이름이 적힌 거야?”
“ 이름은 없고 꽃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 목욕물 데울 때 불쏘시개로 써. 그리고 그 계집이 내린 곳이 어디지?”
“ 화양루입니다.”
“ 당분간 화양루는 일정에서 제외시켜.”
“ 알겠습니다. 장주님. 그런데.....”
“ 왜?”
“ 지난 일 년 동안 장주님은 혼자 주무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 난 이제 스물한 살이야.”
“ 그건 저도 압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왜 극구 기녀들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는지 하는 겁니다.”
연우강이 마차에 여자를 태워오기 시작한 것은 이곳 항주에 정착하고 육 개월이 지난 후였다.
실은 처음 여자를 데려왔을 때 깜짝 놀랐다. 마차에서 내리는 여자는 경국지색이란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미녀였던 것이다. 약간은 도발적인 미모를 간직한 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다음날이었다.
이른 아침 그녀를 데려다 준 곳은 천향루였다. 천향루는 색향이라고 불리는 항주에서도 손꼽히는 기루 중의 한 곳이라다. 고급 기루가 대부분 그렇지만 천향루의 기녀들도 웃음과 기예만 팔 뿐 결코 몸은 팔지 않는다. 간혹 손님을 따라나서는 때가 있는데 그건 돈 때문이 아니라 손님이 마음에 들었을 경우에 한한다.
‘ 유화라고 전해주세요.’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처럼 이른 아침 기녀를 데려다주는 일이 잦아지면서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연우강의 본명을 묻는 기녀가 있는가 하면, 유화처럼 제 이름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기녀, 심지어 제 속곳에 이름을 적어 연우강에게 전해달라는 기녀마저도 있었다.
한결같은 기녀들의 행동이 의아해 연우강에게 물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어느 날 시장통에서 놀라운 소문을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불언명.
상대방의 이름을 묻지 않아, 불문명.
‘ 네 마리 설리총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 화야불이는 색향 항주의 최고 한량이자, 기녀들의 우상이다.’
그 화야불이가 바로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연우강이 머누는 장원 또한 화야장이 됐다.
염자생은 대답을 기다리는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아니 대답보다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입이 벌어질 정도로 미남은 아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기녀들의 우상이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이름을 알게 되면 인사를 해야 하고, 인사를 하다보면 친해지게 되잖아.”
“ 친해지는 게 싫습니까?”
“ 친해지는 게 싫은 게 아니고 식상해지는 게 싫어서 그래. 이름을 모르면 다음에 만날 때 처음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
“ 단지 그 때문입니까?”
황당한 말에 염자생은 조금 멍해졌다.
“ 상급 기녀는 오백 명도 안 돼. 귀노, 하지만 난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해.”
“ 세월이 흐르면 기녀들도 바뀝니다.”
“ 그럼 신선함이 배가돼서 더욱 좋잖아.”
“ ..... 들어가시지요.”
염자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곧바로 차를 준비했다.
“ 이번엔 은침백호 최상품을 구했습니다.”
염자생은 연우강 앞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연우강은 맑은 찻물을 들여다보았다.
“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지?”
“ 오시에서 미시 사이에 우포정사 장자인 양석선과 점심 약속이 있고, 신시부터는 좌포정사 장자 우적인이 개최하는 연회가 잡혀 있습니다.”
“ 저녁엔 일정이 없어?”
“ 오후엔 남경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 남경? 얼마 전에 다녀왔잖아?”
“ 그땐 증조부님 제사였습니다.”
“ 이번에도 제사?”
“ 칠 일 후면 대장주님 생신입니다.”
“ 생신? 나이 먹는 게 뭐가 좋다고 생일 잔치는 꼬박꼬박 챙기는지.”
“ 초, 총관님.”
불만스런 얼굴로 찻잔을 들어 올리는데 위층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의 침실을 청소하던 우삼이었다.
“ 무슨 일이냐?”
“ 그, 그게....”
염자생의 물음에 우삼은 연우강의 눈치를 살폈다.
“ 허허!”
“ 유라가 도망쳤습니다.”
염자생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자 우삼은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 도망을 쳐?”
“ 그, 그렇습니다. 총관 어르신.”
“ 일하던 계집이 나간 걸 가지고 웬 호들갑이야.”
차를 마시던 연우강은 우삼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 그게 아닙니다. 장주님.”
“ 그게 아니라면?”
“ 장주님 침실에있던 금 장식이 몽땅 없어졌습니다.”
“ 물건을 훔쳐갔다고?”
연우강의 시선이 염자생을 향했다. 그 눈빛은,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물건을 훔쳐 도망쳤느냐는 힐난의 의미가 다분했다.
“ 매월 스무 냥씩 줬습니다. 장주님.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백 냥이나 모였다며 자랑을 했고요.”
“ 돈도 충분하게 있는 얘가 왜 그걸 훔쳐갔지?”
“ 혹시.....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장주님.”
얼굴이 흠칫 굳어진 염자생이 급하게 밖으로 낙ㅆ다.
“ 장주님 대금전장에 다녀오겠습니다.”
잠시 후, 염자생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의 기척이 금세 사라졌다.
“ 대금전장엔 왜 가는 거지?”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 저도 잘....”
“ 기다려보면 알겠지. 나가서 일 봐.”
“ 그럼.”
우삼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거참!”
찻잔을 들어올리는 연우강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문득 간잠 꿈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녀석을 만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곤 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피해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공연히 서늘해져 팔을 슬슬 쓸었다.
그로부터 염자생이 돌아온 건 한 시진 후였다.
“ 죽을죄를 졌습니다. 장주님.”
염자생은 들어오자마자 풀죽은 얼굴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바로 목을 잘라줄까?”
말하는 연우강의 얼굴엔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 몽땅 사라졌습니다.”
“ 뭐가? 돈이?”
“ 그렇습니다. 장주님. 유라 그 계집이 장주님의 인장으로 돈을 찾아 날랐습니다.”
“ 유라가 대금전장을 알아?”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금전장은 대부업 위주로 영업을 하는 곳으로 항주 일대에서 가장 큰 전장이다. 연우강 또한 그곳에 삼십만 냥의 돈을 맡기고, 그 돈에서 나온 이자로 생활하고 있었다.
“ 제가 시장통에 있는 지점에서 돈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 유라는 시장을 본다면 따라간 모양이네?”
“ 바쁠 때는 간혹 시장 가는 유라를 시켜 돈을 찾았습니다.”
“ 장가를 가고 싶었던 거야?”
연우강은 염자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화야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면 데리고 왔을 때, 하녀로 일할 계집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둔 이유는 대문 앞에서 쓰러져 죽어 가고 있었다는 염자생의 말 때문이었다.
그랬던 계집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 제 나이 육십입니다. 장주님.”
“ 내 인장을 맡길 정도면 그래야 하는 거 아냐?”
“ 그 아이가 장주님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 날?”
“ 그렇습니다. 장주님. 무공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 제자로 키울 생각이었던 모양이네.”
“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 난 아이였습니다. 그 재질에 눈이 멀어서.....”
염자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대문 앞에 쓰러져 죽어가던 유라를 구한 건 사막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서였다. 그때 연우강이 물과 음식을 주지 않았더라면 별 수 없이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유라를 그냥 보낼 수 없게 했다.
결국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연우강에게 인사를 시키고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 쯧쯧, 혈잔마수라는 별호가 아깝다. 인간아.”
연우강은 혀를 찼다.
혈잔마수 염자생.
한때 그는 울던 아이마저도 울음을 그친다는 공포의 대명사였다.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도 없이 살아왔던 그가 제자를 기르려고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그만큼 유라라는 계집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 할 말 없습니다, 장주님. 그렇게 배신하고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장주님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 그럴 줄 알았으면 얼굴이나 자세히 봐둘 걸 그랬어.”
“ 얼굴도 모르십니까?”
“ 상당히 미인이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
“ 장주님이 그동안 데려왔던 기녀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미녑니다.”
“ 사랑한 거 맞네.”
“ 장주님!”
염자생은 버럭 소리쳤다.
“ 됐어. 그만 잊어버려.”
“ 찾아낼 겁니다.”
염자생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연우강의 말처럼 자신은 과거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친다는 혈잔마수였다. 연우강을 만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 아니 스스로 악인이라 여기며 살았다. 그랬던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걸 구해주고, 무공까지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배신을 당하고 만 것이다.
“ 잔말 말고 떠날 준비나 해.”
“ 오늘 약속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돌아올 때까지 일정은 전부 취소시켜.”
“ 알겠습니다. 선물은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 선물?”
“ 작년엔 취옥배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 작년엔 안 갔어?”
“ 그렇습니다. 장주님.”
“ 돈은 있어?”
“ 작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준비할 여력은 됩니다.”
“ 돈 얻으러 가는 놈이 선물을 가져가면 욕해. 올핸 건너뛰자고.”
“ 말을 타고 가시겠습니까?”
“ 그래야지.”
“ 준비하겠습니다.”
“ 약은 꼭 챙겨!”
“ 일 년 육 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드셨습니다. 장주님.”
“ 그래도 챙겨.”
“ 알겠습니다.”
염자생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 제기랄! 일 년 이자만 해도 육만 냥인데.”
염자생이 나가자 연우강은 비로소 욕설을 내뱉었다.
일반 양민 한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닷 냥 정도니, 육만 냥이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그 금액이 몽땅 날아갔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아니 그보다는 아버지께 돈을 부탁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못마땅했다.
“ 살수 짓이나 한 번 할까..... 아서라, 그만큼 사람을 죽였으면 됐다.”
이내 고개를 저은 연우강은 위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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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 북경으로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을 명나라 수도로 여기는 자들이 꽤 있는 것은 남겨인들의 문화적 우월감에 기인한다. 삼국시대 명장 중의 한 명이었던 손권이 건업이라 칭하여 도읍으로 삼은 이후 송, 제, 양, 진 나라를 비롯한 남왕조들의 도읍이 된 남경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중원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선을 돌리기가 무섭게 수천 년 역사와 조우할 수 있는 건축물들은 곧 남경인들의 자존심이었다.
남경인들이 사람을 대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남경 출신이 아닌 자에 대해서는 아무리 성공을 했다고 해도 배척하고, 그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원을 바꿀 인물은 남경이 아니면 나올 수 없다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타 지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존경하는 두 사람이 있다. 남경의 두 귀인이란 의미로 남경이귀라 부르며 존경해 마지않는 그들은, 응천부의 주인인 남경왕 주진무와 금릉 연씨 세가의 가주인 금목 연금석이다.
사실 남경인들이 남경왕 주진무를 남경의 귀인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남경인들의 주진무에 대한 인식은 황제의 형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던 주진무가 느닷없이 남경귀인이 된 이면에는 그의 치적보다는 장자인 주무상의 덕을 봤다고 하는 게 옳다.
이 년 전 남경 전역을 비통에 잠기게 하였던 소문 한 가지가 있었다.
정백호 주무상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정백호 주무상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정천호를 구하기 위해 출병을 하였다가, 정천호를 구하고 일천 명의 대원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찌 들으면 전장에서 흔히 일어날 수도 있는 단순한 소문이었다. 하지만 정백호 주무상이란 이름이 들어간다면 단순한 소문이 될 수가 없었다. 주무상이 바로 남경왕 주진무의 장자이기 때문이다.
남경왕의 아들이면 군왕세자란 직위이고, 이품 관직에 해당한다. 성의 행정을 총괄하는 포정사사나 군사를 총괄하는 도지휘사의 관직이 이품인 사실을 감안하면 주무상은 그가 속해 있던 북로정군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장군이 아닌 일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정백호로 근무했다는 사실만 해도 믿어지지 않거늘, 정오품의 정천호를 구하고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그러한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황실에서는 주무상에게 보국천위장군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귀하게 태어나고 자란 자일수록 국가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를 몸소 실천한 의인으로 주무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훌륭한 자식을 기른 남경왕 주진무를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는 건 당연했다.
재물로 천하를 정복하였다는 금릉 연씨 세가의 금목 연금석과 나란히 남경이귀로 불리는 이면에는 그런 사정이 있었다.
아무튼 근자에 남경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최근 들려온 소식 때문이었다.
올해 금목 연금석이 회갑을 맞아 성대한 잔치를 연다는 소식과 함께 일부 주루에서는 하루 종일 술과 안주를 공짜로 대접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
중인들은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연씨 세가에서 들려올 소식을 기다렸다.
“ 끄응! 니미럴. 연씨 세가의 큰아들이면 뭐 하냐? 제 집에 들어갈 때도 개구멍 신센데.”
북쪽 성벽 아래 세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연우강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투덜댔다.
“ 그냥 정문으로 들어오지 그랬습니까? 잡아갈 사람도 없는데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화복을 걸친 청년이 연우강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금릉 연씨 세가의 차기 가주이자 황금공자라 불리는 연우진으로 연우강의 동생이었다.
“ 네가 웬일이냐?”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연우진을 보았다.
“ 마중 나왔습니다.”
“ 넌 거짓말하면 금세 표가 나. 사기치는 게 전공인 놈이 그래 가지고 되겠어?”
“ 무슨 표가 난단 말입니까?”
“ 거짓말을 할 때마다 여기에 주름이 생겨.”
연우강은 연우진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 그건 형님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형님.”
연우진은 싱긋 웃으며 연우강을 끌어당겼다.
“ 자식! 이제 어른이 다 됐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 연화가 벌써 세 살입니다. 형님.”
“ 하하하! 그렇구나. 넌 아이 아버지지. 어때?”
연우강은 연우진의 어끼를 툭 치며 크게 웃었다.
“ 요즘 연화 재로 때문에 일하기가 싫을 정돕니다. 갑시다. 형님.”
연우진은 너스레를 떨며 길을 잡았다.
“ 그렇겠구나. 그런데 말하기 곤란한 거냐?”
한창 손님을 접대하고 있어야 할 녀석이 일부로 마중까지 나와 있었다면 상당히 급한 일이라는 반증이다. 그런데도 말을 하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다. 심각한 일임에 분명했다.
“ 사막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고 싶습니다. 형님.”
“ 사막?”
연우강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 주무상의 죽음 말입니다.”
“ .... 그대로 믿으면 된다.”
“ 그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는 겁니다.”
확인을 해야겠다는 듯 연우진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 맞다. 우진. 내가 겪었던 일이다. 그 일과 관련이 있는 자가 찾아온 거냐?”
“ 그렇습니다.”
“ 누가 왔느냐?”
“ 소명공주님이 찾아왔습니다.”
“ 소명공주라면.....”
“ 남경왕의 며느리입니다. 이름은 이지약이고요.”
“ 정혼자가 죽었으면 파혼을 해야 하는 거 아냐?”
“ 황부 사람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형님. 정혼자가 죽었다고 해서 쉽게 파혼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응천부로 들어가자 남경왕은 며느리로 맞아들이며 소명공주라는 직함을 내렸습니다.”
“ 찾아왔으면 접대해서 보내면 되잖아.”
“ 형님을 만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답니다. 벌써 이틀동안 묵고 있습니다.”
“ 젠장!”
연우강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