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잠룡쟁패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고 하여 고고함을 가릴 수는 없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절제된 자태로 차를 마시고 있는 여인의 몸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흘렀다. 그것은 추상같다는 말로 표현하곤 하는 위엄이었다.
“ 연우강입니다.”
안으로 들어선 연우강은 목례를 했다.
“ 생각보다 젊군요.”
이지약의 눈에 잠시 놀란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의아했다. 무려 일 년 동안 그에 대한 조사를 했다. 북로정군에서 가장 악명 높을 뿐만 아니라 개독새라는 그의 별명은 지금도 북로정군의 전설로 남아 있다.
일천의 흑랑기 선두에는 항상 검은 옷을 걸친 그가 있었고,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무적의 천호였다.
사막의 용권풍보다 거칠고, 굶주린 야수가 울고 갈 정도로 잔인하다는 그가 이렇듯 젊다는 것도 놀랍지만, 순진하게 보이는 얼굴은 더욱 놀라웠다.
빼어난 미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목구비가 절묘한 조화를 이뤄 시선을 잡아끌었다. 충분히 매력적인 외모였다.
“ 이제 스물한 살입니다.”
“ 군 생활을 오 년 했다고 들었어요.”
이지약은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명나라 법제상에 군역을 나가는 최소 나이는 열여섯 살이다. 지금 나이가 스물한 살이고 이 년 전에 떠났으니 열다섯 살에 군에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행정 착오로 말미암아 열다섯 살짜리 군역을 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놀라운 점은 연우강이 제대하기 전에 부하 천여 명을 거느린 정천호였다는 사실이다. 최하급인 군호로 들어간 자가 사년 만에 정오품의 정천호가 됐다면 초고속 진급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와 같은 속도였다면 그는 서른 전에 장군이 됐을 것이다.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금릉 연씨의 재력이면 도지휘사 정도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공주님.”
“ 자신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부대가 흑랑기라고 하더군요. 내가 개독새라는 단서를 가지고 연씨 세가까지 오는 데 일 년 걸렸어요. 연 공자.”
“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절 찾아오셨습니까?”
불편한 자리를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 싶어 연우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사실을 알고 싶어서 왔어요.”
“ 어떤 사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요.”
“ 소문대로입니다. 공주님. 전 적에게 포로로 잡혔고 흑랑기 이인자였던 녀석은 흑랑을 이끌고 저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것뿐입니다.”
“ 그분이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 알고 있었습니다.”
“ 어느 정도였죠?”
“ 무상의 수준을 알아차릴 정도로 무공이 해박하지 않습니다.”
“ 정말인가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전신을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그의 몸에서는 무공을 익힌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정천호가 되기 위해서는 타고난 능력 외에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떨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녀의 눈에서는 싸늘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사랑하는 정인의 유품을 대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공연히 목걸이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야 주는 이유가 뭐죠?”
이지약은 목걸이를 지그시 말아 쥐며 말을 이었다.
“ 무상을 잊고 새 출발을 했다면 전해주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 그랬군요.”
이지약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출입문 앞에 멈춰 잠시 호흡을 고른 이지약은 연우강을 향해 돌아섰다.
“ 그가 남긴 말은 없었나요?”
“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연우강은 담담하게 이지약의 시선을 받으며 대답했다.
“ 연 공자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잘하는군요.”
“ 전, 거짓말 못 합니다. 공주님.”
연우강은 뜨끔했다.
“ 그분은 미안하다고 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 그, 그건...”
연우강은 할 말을 잃었다. 이렇듯 정확하게 무상이 남긴 말을 짚어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 하여튼 성실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연 공자, 그런데.”
“ 말씀하십시오.”
“ 개독새가 무슨 뜻이죠?”
“ 별 뜻 없습니다. 그냥 개 같은 놈이라는 뜻입니다.”
“ 그랬군요. 참! 난 이지약이에요. 앞으로 공자를 찾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지약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좋지 않아.”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상을 구하기 위해 출병을 감행했던 그날처럼 알 수 없는 뭔가가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듯 했다.
“ 기웃거리지 말고 들어와.”
“ 흐흐흐! 굉장한 아입니다. 장주님.”
느물거리는 웃음과 함께 염자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뭐가?”
“ 얼굴은 천하절색, 몸매는 고금제일, 무공도 이겁니다.”
염자생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면사를 쓰고 있었어, 귀노.”
“ 흐흐흐! 제가 항주 제일 미녀들을 데려온 것만 해도 수백번입니다. 걷는 모습만 봐도 견적이 바로 나옵니다.”
“ 왜 나는 그렇게 안 되는 거지?”
“ 장주님은 대부분 술에 절은 상태에서 기녀들을 대하니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그런가? 그건 그렇고 무공이 그렇게 강해?”
“ 최소 저와 동급입니다.”
“ 그럼 귀노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는 말?”
연우강은 깜짝 놀라 눈까지 커졌다.
“ 두 분이 나눈 이야기를 제가 듣지 못했습니다.”
“ 그녀가 목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강기막을 쳤다는 거야?”
“ 그렇습니다. 장주님.”
“ 끄응! 갈수록 복잡해지네.”
“ 장주님은 복잡한 걸 간단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분이지 않습니까?”
“ 이번엔 좀 다른 것 같아. 그건 그렇고. 혈도부대라고 알아?”
“ 혈도부대요?”
“ 그래.”
“ 사막에서 장주님 손에 뒈진 그놈들이 혈도부대였습니다. 몰랐습니까?”
“ 그 새끼들 유명해?”
“ 허!”
염자생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백여 명이나 되는 자들을 몰살시켰으면서 그들의 정체도 몰랐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바보 같은 얼굴 하지 말고 말을 해, 귀노.”
“ 팔황새의 일파인 새외귀막의 최정예가 혈도부댑니다. 그들 천 명이면 웬만한 문파 하나 정도는 풀뿌리도 남기지 않고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 사기치지 마, 인간아. 산적 수준밖에 안 되는 놈들을 두고 문파는 무슨....”
“ 방금 말한 것처럼 혈도부대는 전부 천 명입니다. 장주님. 그들이 전부 왔다면 장주님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 다 왔는데?”
“ ....?”
염자생은 눈을 끔뻑였다.
“ 귀노를 만났던 날 없앴던 이백 명이 마지막이었어. 그 전에 이미 수백 명을 없애고.”
“ 저, 정말로 혈도부대를 전부 몰살시켰단 말입니까?”
염자생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 사막은 내 구역이야, 귀노.”
“ 그들은 평생 사막에서 살았습니다.”
“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어부라 부르고, 폭풍을 수십 번 겪어야 비로소 뱃놈이 되는거야. 바닷가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해서 전부 뱃놈이라고 부르진 않아.”
“ 그러니까 강한 무공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이겼다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다는 거야, 그만 일어나자고.”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그거 아십니까?”
연우강이 사막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염자생은 화제를 돌렸다.
“ 뭘?”
“ 소명공주 그분이 나가면서 이름을 말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 그게 어쨌다고?”
“ 장주님 머릿속에 각인된 첫 번째 여자 이름이 바로 이지약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 내 머리 속에 여자 이름이 없어?”
“ 생각나는 이름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 이숙경.”
연우강은 바로 말했다.
“ 혹시 어머님 이름 아닙니까?”
“ 맞다. 그건 어머니 이름이지, 잠시만 기다려 봐. 또 떠오르는 이름이 있을 거야.”
연우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염자생의 말처럼 더는 떠오르는 여자 이름이 없었다. 얼마 전 도망친 유라가 있기는 하지만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계집이 이름을 제대로 말했을 리가 없을 테다.
“ 없네.”
“ 거 보십시오. 장주님. 원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고, 장주님은 밤마다 여자에 묻혀 살지만 이름 하나 기억하는 여자가 없지 않습니까?”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그분하고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 그녀는 응천부의 며느리야, 귀노.”
“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아닙니까?”
“ 그녀가 자꾸 찾아오면 나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다섯 놈과 첨목장군까지 전부 죽어. 이지약은 좋은 인연보다는 악연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은 아주 위험한 여자야.”
“ 무슨 소립니까?”
염자생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인연 어쩌고 했던 말은 장난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연우강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지약의 출현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 그렇게만 알고 있어.”
“ 곤란할 것 같으면 아예 지워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 그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정말 심각한 일인 모양이....”
염자생은 입을 닫았다.
연우진이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탓이었다.
“ 형님.”
“ 갔냐?”
연우강은 얼른 복잡한 얼굴을 지웠다.
“ 아버님 회갑연에 참석하고 떠나시겠답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나눴습니까?”
“ 진아.”
연우강은 동생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다정스럽게 불렀다.
“ 알면 다친다는 말. 하고 싶은 거죠?”
연우진은 피식 웃었다.
“ 그래 자식아.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가 소문나면 나는 물론이고 연씨 가문까지 위험해져. 그러니까...”
“ 모른 척하겠습니다. 형님.”
“ 그래야 한다. 나와 그녀가 만났다는 사실도 비밀에 부치고.”
“ 알겠습니다.”
“ 영감은 어디 있냐?”
“ 손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 이 밤중에 만나는 걸 보면 중요한 손님인가 보지?”
“ 대야벌의 조양궁 궁주가 직접 왔습니다”
“ 조양궁의 궁주면 대야벌의 총관?”
“ 십만 명의 입을 책임지는 책임자더러 총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형님밖에 없을 겁니다.”
연우진은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어쨌든 총관이 하는 일을 하면 총관이지 궁주는 무슨. 그런데 기름칠은 계속하고 있는 거냐?”
“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기본으로 백만 냥 보내고, 특별한 날이 있을 땐 추가로 보냅니다.”
“ 납품은?”
“ 납품하는 물건은 최상품입니다. 꼬투리 잡힐 일은 없습니다.”
“ 상납도 꼬박꼬박하고, 물건도 하자가 없는데, 왜 왔대?”
“ 납품 단가를 낮춰달라고 요구를 하기 위해 왔을 겁니다.”
“ 정신 없는 놈들이네. 지들에게만 납품하는 것도 아니고, 군에도 들어가는 물건의 납품 단가를 낮춰달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십만 명의 입을 책임진다는 놈 맞아?”
“ 납품 단가를 낮추는 대신 상납금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군요.”
“ 상납금은 지한테 떨어지는 게 없다는 거야?”
“ 그런 셈이죠. 살림을 하는 데 백만 냥을 절약하게 되면 지금처럼 상당한 여유가 생기게 되니까요. 비자금을 아주 수월하게 만들 수 있죠.”
“ 그럼 거절한다고 해도 계속 귀찮게 하겠네.”
“ 그럴 것 같습니다.”
“ 이렇게 해버리면?”
연우강은 손으로 목을 스윽 그으며 염자생을 보았다.
“ 대야벌에 가보셨습니까?”
“ 대아별이 곧 무림이라는 말만 귀가 따갑게 들었을 뿐이야.”
연우강은 고개를 저었다.
말은 많이 들었고, 연씨 세가 또한 기부금이란 명목으로 매년 백만 냥이란 막대한 금액을 보내고 있지만 정확하게 어느 수준인지는 알지 못했다.
“ 대야벌은 무인들 수만 오만 명인데, 조양궁 궁주인 만박귀자 범일승은 대야벌 백대 고수에 들어가는 고수입니다.”
“ 불가능하다는 말이야?”
“ 불가능하다는 것보다는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 불가능하다는 말이네. 그럼 죽이는 건 글렀고, 잘 달래서 보내는 수밖에 없겠군.”
“ 납품 단가는 낮출 수 없다고 못을 박아두었습니다. 대신 물건을 조금 더 넣어 주기로 했습니다.”
“ 그건 잘했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릉전 대문을 밀었다.
“ 허허허! 궁주님. 저희 가문을 이렇게 신경 써주실 필요 없습니다. 두 놈이 전부 무치라 오히려 대야벌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 이것 보시게. 연 대인. 그건 내가 주는 게 아니고 그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기부를 해준 자네들의 성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벌주께서 내리신 거네. 거절하면 벌주께서 노여워하실지도 모르네.”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정원 건너편에서 아버지와 처음 듣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 와 있다는 조양궁 궁주 범일승인 모양이었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는 눈빛으로 연우진을 보았다.
“ 저도 모르겠습니다. 형님.”
“ 알겠습니다. 궁주님. 그럼.”
“ 하하하! 회갑 축하하네. 가주.”
반말에 가까운 범일승의 어투에 열이 뻗은 연우강이 염자생을 홱 돌아보았다.
“ 귀노, 저 새끼... 몇 살 처먹었어?”
“ 쉰넷으로 알고 있습니다.”
“ 썅노무 새끼.”
턱!
막 앞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는 연우강을 연우진이 붙잡았다.
“ 우린 장사꾼입니다. 형님.”
“ 간 쓸개 빼놓고 살아야 한다는 거냐?”
“ 빼놓고 사는 게 아니라, 장사꾼은 간 쓸개 없이 태어나는 존재들입니다. 갑시다.”
연우진은 연우강의 팔을 꽉 붙들고 안쪽으로 향했다.
곧 세 사람은 안에서 걸어나오고 있는 만박귀자 범일승과 조우했다.
“ 이야기 끝나셨습니까?”
연우진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나갔다 오는 모양이구나. 네 옆에 있는 이 친구는......?”
“ 제 형님입니다. 궁주님.”
“ 오! 네가 그 연우강인 모양이구나. 반갑구나. 난 대야벌 조양궁 궁주 범일승이다.”
웃음 반 비웃음 반의 묘한 표정을 지으며 범일승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나를 아쇼?”
연우강은 범일승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받아쳤다.
조양궁의 궁주라는 거창한 직책과는 달리, 범일승은 오 척 단구의 대머리 중년이었다.
도발적인 연우강의 말투에 범일승의 눈초리가 꿈틀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 네가 연금석의 아들이라면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 거 이상하구려.”
“ 뭐가 이상하단 말이냐?”
“ 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당신을 만난 기억이 없단 말이오. 당신은 기억하기 싫어도 저절로 기억되는 특이한 체형인데, 어떻게 생각하쇼?”
“ 연씨의 재물이 네 머리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범일승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오 척 단구에 대머리인 그는 특이한 체형이란 말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런데 무림 세가도 아니고 장사꾼 집안 자식놈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이다.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오. 영감. 대야벌 무력이 머리 털도 없는 그 머리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요.”
“ 내기할 테냐?”
범일승은 허리춤에서 자신의 무기인 마판을 꺼내들었다. 그가 마판을 꺼낸 이유는 연우강 뒤편에 서 있는 자 때문이다. 연우강이 거친 말을 쏟아내는 순간 뒤에 있는 사내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 얼마든지. 하지만 한 가지는 명심해야 할거야. 당신이 이 자리에서 날 죽이면, 당신은 더 이상 조양궁의 궁주 노릇을 하지 못해. 난 당신이 대야벌에서 쫓겨나는 쪽에 내 재산 전부를 걸겠어.”
“ 프! 하하하!”
연우강을 쏘아보던 범일승은 웃음을 터뜨렸다.
놈의 말이 맞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공을 펼치면 놈의 머리통을 잘라내는 건 일도 아닐 테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연씨 상단에서 물건납품을 중단하면, 새로운 거래처를 구하기 전까지는 최소한 서너달은 고생해야 한다. 아니 그것보다는 기부금으로 들어오는 백만 냥이 끊어지는 게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무공도 모르는 놈을 죽였다는 비난과 함께,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될 테고 조양궁 궁주 자리를 내놔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개미를 밟아 죽인 대가치고는 너무 큰 걸 잃게 되는 셈이다.
“ 네 아비는 너를 무치라고 하더니 제법 기개가 있구나. 대야벌에서 다시 보기를 바라겠다.”
쿠웅!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다는 듯 범일승은 발을 굴러 바닥에 깔린 돌을 가루로 만들어 놓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니미럴! 차라리 말뚝을 박아버리는 건데. 제대하고 나니까 별 거지 같은 새끼들이 다..... 에이, 씨팔! 다시 군대로 돌아가든지 해야지. 원.”
연우강은 차가운 목소리로 씨부렁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 형님!”
멍한 눈으로 지켜보던 연우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연우강을 불렀다.
“ 멍청한 놈!”
연우강은 나무라는 눈빛으로 연우진을 보았다.
“ 저는 성질이 없어서 참는 게 아닙니다. 형님. 그자를 자극하면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 진아!”
연우강은 동생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 말씀하십시오!”
“ 내가 북로정군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 어떻게 했는지 말해 줬냐?”
“ 들은 적 없습니다.”
“ 그럼 지금 말해주마. 너도 알겠지만 내가 잘생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당히 매력있는 얼굴 아니냐.”
“ 그렇다고들 하죠.”
“ 얼굴이 되고 몸매가 되면 파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이치잖냐.”
“ 파리가 꼬인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날 덮치려는 놈들이 있었단 말이야.”
“ 덮쳐요?”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여자가 없는 곳에서는 남자도 훌륭한 대안이 된단다.”
“ 그, 그래서요?”
“ 처음엔 나도 고민을 많이 했다. 한 번 주고 나면 편하게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거든.”
“ 뭐, 뭘 준다는 거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연우진은 더듬거렸다.
“ 바로 여기, 이 자식아!”
연우강은 동생의 항문을 푹 찔렀다.
“ 억! 형님!”
연우진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 그런데 말이다. 그곳에 류사은이라는 녀석이 있었어. 아주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었는데, 거의 매일 밤 이놈 저놈에게 대주고 있었던 거야. 더 지랄 같은 건 뭐였냐 하면, 우리 막사뿐만 아니라 다른 막사까지 원정을 다니더란 거야.”
“ 그, 그래서요?”
“ 그래선 안 되겠다 싶더라고, 잘못하면 나도 류사은 꼴이 될 것 같았단 말이지. 그래서 개기기 시작했어.”
“ 개겨요?”
“ 거절했단 말이지.”
“ 그러고도 무사했습니까?”
“ 매일 매일 죽지 않을 정도로 맞았다. 수청을 들지 않으면 날 죽이겠다고 하더라.”
“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 내가 먼저 시작했다.
“ 뭐, 뭘 시작했단 말입니까, 혹시 수청을....”
“ 그날 밤 열다섯 명이 목에 박도가 꽂힌 채 죽었다.”
“ 혀, 형님.”
연우진은 해쓱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아직 안 끝났어. 네가 북로정진 도지휘사라면 열다섯 명을 죽인 죄인을 어떻게 처리했겠느냐?”
“ 효수를 했을 것입니다.”
“ 적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이라면?”
“ 전시 상황이라면 목을 치는 건 더욱 쉽습니다.”
“ 죄인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양민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놈은 금릉 연씨 세가의 큰아들이었단 말이야. 그놈이 죽으면 금릉 연씨 세가에서는 그동안 뇌물을 꾸준히 먹였던 자를 통해 조사를 의뢰할 테고, 그렇게 되면 열다섯 명이 죽은 사건이 드러나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 사건이 파헤쳐지면 부대 지휘관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이 되는 거고, 자칫 잘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경우도 생겨.”
“ 그럼.”
“ 자신에게 오점이 남지 않도록 처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죽은 놈들을 전부 전사처리하고, 살인자는 가장 전사자가 많이 나오는 부대로 발령을 내버리는 거야. 도지휘사도 좋고 죄인도 좋은. 서로가 득을 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어.”
“ 형님에게 득이 됐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 뒈진 놈들은 전부 전사처리 됐고, 나와 류사은은 흑랑기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흑랑기에는 이미 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더구나. 그날부터 나와 류사은은 나보다 먼저 들어온 녀석들이 가져다주는 밥을 막사에 앉아서 받아 먹었다.”
“ 범일승 그자도 그런 식으로 다뤄야 한다는 말입니까?”
“ 나처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놈은 사자 옆에서 알랑거리는 여우에 불과해. 여우를 굳이 사자로 대접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 알았습니다. 형님.”
“ 그래.”
연우강은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쓸고는 손을 풀었다.
“ 왔느냐?”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건물 앞에는 넉넉하게 살이 찐 노인이 굳은 얼굴로 연우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금릉 연씨 세가의 가주이자 금목이라 불리는 연금석이었다. 연금석의 얼굴이 이렇듯 굳어 있는 이유는 두 아들이 나눈 대화 때문이다.
“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아버지를 향해 걸어갔다.
“ 정말로 그랬느냐?”
연금석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 군에서 제대한 놈들의 말 중 열에 아홉은 뻥입니다. 아버지. 제 부하였던 녀석의 이야긴데 우진 저 녀석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약간 각색을 했습니다.”
“ 그랬구나. 들어가자.”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던 연금석은 몸을 돌렸다.
“ 어서 오너라.”
“ 신수가 훤해졌구나.”
접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이 웃는 얼굴로 연우강을 맞았다. 그들은 연은석과 연동석으로 연우강의 작은 아버지들이었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부.”
“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뵀느냐?”
“ 아버지를 보고 들어갈 참입니다.”
“ 들어갈 필요 없다. 우진이 너는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오너라.”
“ 알겠습니다. 아버지.”
조금 전 범일승과 나눴던 이야기 때문이란 것을 직감한 연우진은 빠르게 안채로 걸어들어 갔다.
잠시 후,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이 연우진의 부축을 받고 접객실로 들어왔다. 그는 금릉 연씨 상단의 반석을 닦은 전목 연운상이었다.
“ 저 왔습니다. 할아버지.”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큰절을 올렸다.
“ 혼자 온 거냐?”
절을 하는 연우강을 보며 연운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 제가 왔다 간 지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두 달 만에 여자를 구한다는 건 무립니다.”
연우강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 내가 죽기 전에 네 자식을 안겨주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다는 걸 잊지 마라.”
“ 걱정 마십시오. 할아버지. 최소한 열 명은 안겨드리겠습니다.”
“ 허허허! 그래, 그래야 내 손자지.”
넉살 좋은 연우강의 말에 연운상은 흐뭇한 얼굴로 자리로 가 앉았다.
“ 전 나가 있겠습니다. 장주님.”
“ 아냐, 귀노도 식구니까 앉아.”
연우강은 나가려는 염자생을 잡아끌어 의자에 앉혔다.
“ 장주님.”
“ 처음도 아닌데 앉게, 염 공.”
연운상은 염자생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이거 참!”
염자생은 어색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 무슨 일인데 나를 불러낸 게냐?”
차를 준비하는 연우진을 쳐다보던 연운상이 아들을 돌아다보며 물었.
“ 이것 때문입니다.”
연금석은 탁자 위에 둥근 패를 올려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패로 향했다.
“ 잠룡쟁패!”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염자생이었다.
염자생은 놀란 눈으로 탁자 위에 놓인 패를 보았다. 구름사이로 용꼬리만 드러나 있는 그림이 새겨진 그것은 대야벌에서 십 년에 한 번씩 무림에 내놓는 잠룡쟁패가 분명했다.
“ 잠룡쟁패가 뭐지?”
연우강은 염자생을 보며 물었다.
“ 모르십니까?”
“ 중요한 거야?”
“ 성공의 문으로 들어가는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성공의 문?”
“ 실력을 인정받으면 대야벌 벌주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설사 벌주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도, 잠룡쟁패의 주인은 대야벌 요직에 기용됩니다.”
“ 쉽게 말하면 등용패네?”
“ 그렇습니다. 장주님.”
“ 그 똥자루 새끼가 독을 던져주고 갔네.”
“ 무슨 말씀이십니까?”
염자생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잠룡쟁패만 있으면 대야벌이 보유하고 있는 최강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고 인연이 닿는다면 익히는 것도 가능하다. 자신 또한 젊었을 때 잠룡쟁패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그때 잠룡쟁패를 얻었다면 혈잔마수가 아닌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엄청난 기연 덩어리를 두고 독이라고 말하는 연우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우리가 장사꾼이니까 그래, 귀노.”
“ 장사꾼은 대야벌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까?”
“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나처럼 착한 사람, 귀노처럼 나쁜놈, 잘난 놈, 못난 놈, 있는 놈, 없는 놈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지.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공급해 주는 자들이 장사꾼이야. 그런 장사꾼이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시작하면 더는 장사꾼이라고 할 수가 없어.”
“ 대야벌과 적이 되는 곳에는 물건을 팔 수 없다는 뜻이군요.”
“ 그렇지. 더불어 대야벌이 망하면 장사꾼도 같이 망하게 되는 거고.”
“ 그렇군요.”
염자생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연우강은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 매년 백만 냥씩 기부하는 우리 가문에 감사의 표지로 잠룡쟁패를 내려 주었다고 하더구나.”
“ 순수한 의도란 말입니까?”
“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다.”
“ 몸 주고 뺨맞은 년 꼴이네.”
“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이번에 연금석이 물었다.
“ 그걸 왜 제게 물으십니까?”
“ 넌 금릉 연씨 세가의 장남이다.”
“ 그래서 오 년 동안 군대에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 그 대가로 넌 삼십만 냥을 받아갔다.”
“ 제가 군대에 간 덕분에 아버진 파산 직전에 있던 연씨 상단을 구했습니다. 저보다는 아버지가 훨씬 남는 장사를 하셨습니다.”
“ 그래서 못 가겠다는 말이냐?”
“ 저 녀석을 보내십시오.”
연우강은 턱으로 연우진을 가리켰다.
“ 우진이는 한 집안의 가장이다.”
“ 이제 막 군대에서 먹던 개밥 냄새가 빠지고, 향긋한 요리 냄새가 몸에 배기 시작했습니다. 전 못 갑니다.”
“ 그럼 내가 가야겠구나.”
연금석은 탁자 위에 놓인 잠룡쟁패를 집어들었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래 사시려면 운동은 필숩니다. 아버지. 가셔서 열심히 운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 그만 어머님 뵈러 가야겠습니다.”
연우진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십만냥 주마.”
막 걸음을 옮기려는 연우강의 등에 연금석의 목소리가 꽂혔다.
“ 일 년에 이자로 들어오는 돈만 육만 냥입니다. 하인들 월급도 최하 이십 냥씩 주고 있습니다. 일어나, 귀노!”
“ 이십만 냥 주마.”
“ 어머니가 어디 계시더라.”
“ 사, 삼십만냥!”
“ 운동 좀 하시라니까요. 젊은 놈들하고 함께 운동을 하다 보면 마음도 젊어지고 훨씬 오래 사실 수 있다니까 그러네요.”
“ 조, 좋다. 마지막이다. 오십 만 냥 주마.”
“ 그건 구미가 좀 땡기네.”
“ 현찰이다.”
“ 좋습니다. 아버지.”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대신 무공은 절대 배우지 않는 조건이다.”
“ 무공을 배워서 어디에 쓰게요.”
“ 조직에 들어가지도 말고.”
“ 전 건달이 아닙니다. 아버지. 조직에 들어갈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서당 다닐 때처럼 중간에 뛰쳐나오는 것도 안 된다.”
“ 그들이 자르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 재질이 없어 잘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사고를 쳐서 잘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뜻이다.”
“ 그럼 그만 두겠습니다.”
“ 알아서 해라.”
연금석은 득의만면한 얼굴로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 욘석아, 넌 내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에 불과해. 돈 얻으러 와 놓고 어디서 큰소리를 쳐.’
“ 제길! 알았습니다. 조신하게 버티다가 제대하겠습니다. 됐습니까?”
“ 어떡하다 돈을 날린 거냐?”
“ 헉!”
연금석의 입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자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 일하던 계집이 제 인장을 훔쳐 몽땅 털어갔습니다.”
“ 그래서 수결.... 아니구나 넌 수결이 안 되는 녀석이지.”
연금석은 피식 웃으며 잠룡쟁패를 던졌다.
“ 돈은 언제 주실 겁니까?”
“ 대금전장으로 입금시켜 놓으마. 이자는 어떻게 할 테냐?”
“ 그건 귀노가 알아서 할 겁니다. 대야벌에는 언제까지 가면 됩니까?”
“ 원단까지만 도착하면 된다고 하더구나.”
“ 아직 시간은 충분하군요.”
“ 엄마가 기다리니까 가 보거라.”
“ 알겠습니다. 그럼.”
연우강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연우강의 기척이 사라지자 연금석은 비로소 염자생을 보며 물었다.
“ 전장에서 묻혔던 피 냄새를 씻어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 난 몹쓸 놈이 되고 말았군요.”
연금석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그런데 어쩌다가 장주님이 군에 가게 됐습니까?”
지금껏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연씨 세가 재력 정도면 군역이 나온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빼낼 수 있었다. 그런 집안에서 장남을 군에 보낸다는 사실이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그 당지 연우강은 군역에 나갈 나이도 아닌 열다섯 살이 아니었던가.
“ 군납의 조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군납 건을 잡지 못하면 연씨 상단은 파산할 수밖에 없었고요.”
“ 그랬군요.”
염자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 부탁은 무슨. 저보다 훨씬 나은 분인데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대장주님.”
“ 감사합니다. 염 공. 술이나 한잔하시겠습니까?”
“ 좋습니다. 안 그래도 목이 컬컬하던 참이었는데.”
“ 일어나시지요.”
다함께 연회실이 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 올 때가 됐는데.....”
이숙경은 요리대와 밖을 번갈아 보며 초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어머니!”
“ 나 여기 있다.”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숙경은 크게 소리쳤다.
“ 지금 이 시간에 부엌에서 뭐 하세요?”
연우강은 부엌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 부엌에서 할 일이 음식밖에 더 있겠느냐?”
“ 얼레? 음식도 할 줄 아세요?”
안쪽을 쳐다보던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음식 담는 궤짝을 잔뜩 쌓아놓고 어머니는 요리를 하고 계셨다.
“ 넌 어릴 적엔 내가 해준 음식 아니면 손도 대지 않았잖냐. 이리 오너라.”
이숙경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 저 벌써 스물한 살입니다. 어머니.”
연우강은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품에 안겼다.
“ 이것 맛 좀 봐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 야채볶음이다.”
연우강을 안은 채 이숙경은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연우강 입으로 가져갔다.
“ 캬! 냄새 죽인다.”
“ 냄새가 난다고?”
이숙경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아들을 보았다.
“ 네, 어머님.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 넌 냄새나는 고기는 못 먹었잖아?”
이숙경은 고기 냄새를 맡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코를 가까이 대봐도 고기 냄새는 나지 않았다.
“ 고기 냄새 말고 어머니 냄새를 말하는 겁니다.”
연우강은 어머니 허리를 껴안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 예끼, 녀석아. 난 또 고기에서 냄새가 난 줄 알았잖아. 자! 아~ 해!”
“ 그런데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으라고 하신겁니까?”
연우강은 고기를 날름 받아먹으며 우물거렸다. 조리대 옆에는 음식 담는 궤가 다섯 개나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 누가 먹기는, 네가 다 먹어야지.”
“ 절 돼지로 만드실 참입니까?”
“ 그러게 굶지 말고 잘 먹어.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
“ 전보다 살이 더 쪘는데요?”
“ 내가 보기엔 빠졌어.”
아들을 바라보는 이숙경의 얼굴엔 안쓰러움이 줄줄 흘렀다.
“ 당분간 집에 오기 힘들 것 같아요. 어머니.”
“ 또 네가 가는 거냐?”
“ 전 혼자잖아요.”
“ 너?”
이숙경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연우강을 보는 그녀의 눈에서 곧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
“ 아이고, 우리 어머니 또 울겠다. 그런 뜻이 아니고 우진이 녀석은 자식이 있다는 말이에요. 처자식이 있는 녀석한테 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 항상 너만 고생하는구나. 고맙다. 강아.”
“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섭섭해요, 어머니.”
“ 내가 늙어서 망령이 났나 보구나. 여하튼 나서지도 말고, 너무 바보처럼 행동하지도 말고, 뭐든지 적당히 중간만 해라. 무슨 말인지 알겠지?”
“ 아버지께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 그래, 들어가라. 밥 준비해줄 테니까.”
“ 어머니도 드실 거죠?”
“ 그럼 나도 함께 먹어야지. 오늘밤은 나와 함께 자자.”
밥상을 받은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 이것 좀 먹어 봐라. 너무 오랜만이라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다.”
이숙경은 닭고기 한 점을 들어 연우강 입 앞으로 내밀었다.
“ 최고에요. 어머니. 어머니도 드세요.”
“ 그래, 몸조심하고, 절대 나서지도 말고.”
“ 알았어요. 어머니.”
“ 특히 성질 절대 부리지 말아야 한다.”
“ 전 금릉 연씨 세가의 장남입니다. 어머니 절 믿으세요.”
다음날 새벽.
연우강과 염자생은 들어왔던 개구멍을 통해 연씨 세가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