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잠능폐혈대법
“ 뭘 이렇게 싸주시는지.”
연우강은 말 안장 양쪽에 잔뜩 매달린 자루를 풀어 내리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투덜대는 말투와는 달리 그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걸렸다.
“ 좋은 분들입니다.”
염자생이 거들고 나섰다.
“ 맞아, 내겐 과분한 분들이지. 내 목을 달라고 해도 기꺼이 드릴 거야.”
“ 자식의 목을 내놓으라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 그게 문제야. 귀노. 뭔가를 바라기라도 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분들은 내게 원하는 게 없어. 오히려 이렇게 싸주시기만 하잖아. 그래서 더욱 죄송해.”
“ 장주님은 이미 충분하게 하셨습니다. 군 생활을 오 년 동안 했고, 지금은.....”
“ 난 금릉 연씨 세가의 장남이야. 내가 장남이 아니었다면 우진 그 녀석이 전쟁터로 나갔을 거야.”
“ 두 분은 나이 차이가.....”
염자생은 말을 꿀꺽 삼켰다. 연우강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 나이 차이가 팔 개월밖에 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녀석은 날 형이라고 부르고 난 동생이라고 불러.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야.”
“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장주님.”
그때 우삼이 하인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왔다.
“ 음식이니까 상하지 않도록 잘 보관해 줘.”
“ 알겠습니다. 장주님.”
우삼이 음식 자루를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연우강이 내실로 향했다.
“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연우강을 따르던 염자생이 물었다.
“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지.”
“ 전부 만나보실 참입니까?”
“ 만남보다 헤어짐을 잘해야 친분이 오래 유지되는 거잖아. 그 친구들 신분에 맞는 선물을 준비해줘. 그리고 지도도 하나 구해오고.”
“ 지도는 왜......?”
“ 대야벌이 산서성에 있다며. 난 남경하고 여기 외에는 가 본 곳이 없어.”
“ 관도만 따라가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야벌까지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 내가 어린애야?”
“ 혹시 잠룡쟁패가 정확하게 뭔지 모르시는 거 아닙니까?”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물었다.
“ 잘만 하면 벌준가 하는 자식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 끄응! 정말 모르시는군요.”
“ 내가 뭘 모른다고?”
연우강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 잠룡쟁패가 지금은 장주님의 수중에 있지만, 대야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장주님의 소유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연우강은 품속에 있던 잠룡쟁패를 꺼내 들었다.
“ 그래서 잠룡패가 아니고 잠룡쟁패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 쟁 자가 싸울 쟁 자라 이거지?”
“ 그렇습니다.”
“ 그런데 정말로 이걸 놓고 싸우기도 해?”
연우강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사십 년 전엔 저도 잠룡쟁패를 잠시나마 소유한 적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 정파 놈들에게 습격을 당해서 빼앗겼습니다. 그때 얻은 흉터가 이겁니다.”
염자생은 목에 나 있는 흉터를 가리켰다.
“ 한 치만 틀어졌으면 바로 동맥이네?”
“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틀지 않았더라면 그날 죽었을 겁니다.”
“ 그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거야?”
“ 그렇습니다.”
“ 그놈은 성공했을까?”
“ 누구 말입니까?”
“ 귀노 목에 칼침 놓은 놈.”
“ 그건 모르겠습니다.”
“ 아마 다른 놈에게 목숨을 잃었을 거야.”
“ 그랬을 겁니다.”
“ 그래도 나 혼자 갈 거야. 나가서 약속 잡고 지도나 구해 와.”
“ 장주님!”
“ 무공을 배우지 못했을 때도 난 사막에서 일 년 이상 살아 남았어. 사막에 비하면 중원은 놀이터야.”
“ 무공을 회복하고 가실 겁니까?”
“ 그럴 순 없지. 웬만한 고수는 내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챌 테니까. 지금처럼 숨길 거야.”
“ 대야벌에 도착하기 전에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 잠능폐혈대법이 있잖아.”
연우강이 지금껏 무공을 익힌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잠능폐혈대법 때문이다.
잠능폐혈대법은 혈도는 물론이고 무인이 되면 자연발생적으로 흘러나오는 기운마저도 숨겨주어,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특이한 무공이었다.
“ 잠능폐혈대법을 시전하면 하루 동안 무공을 펼치지 못합니다. 장주님.”
“ 며칠 전까지 그렇지만 지금은 아냐.”
“ 완벽하게 익혔단 말입니까?”
“ 마음먹은 순간에 무공을 펼칠 수 있어.”
연우강은 염자생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염자생은 연우강의 맥문을 쥐고 진기를 주입했다.
“ 지금은 막혀 있군요.”
막힘 없이 흘러가던 진기가 갑자기 속도가 느려졌다.
연우강의 혈도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처럼 막혀 있다는 의미였다.
“ 지금은 어때?”
“ 억!”
염자생은 신음을 내뱉었다.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던 진기가 거침없이 흘러가고 있었따.
“ 이번엔?”
“ 그렇군요.”
다시 진기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자 염자생은 연우강의 손을 놓았다. 사실 잠능폐혈대법을 연우강에게 전수해준 사람은 자신이다. 대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잠능폐혈대법은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살수들의 무공이다.
원래 살수라는 자들은 자신보다 강한 무인을 상대하곤 한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바로 옆까지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한 무인은 미약한 살기도 금세 감지하고, 육감이 극한으로 발달하면 잠을 자면서도 적의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런 무인들이 유일하게 경계를 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바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들이다.
물론 무공이 강해지면 무공을 익히지 않는 양민처럼 보이게 되는 반박귀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반박귀진은 환골탈태를 거친 자만 얻을 수 있는 지고한 경지가 아닌가.
살수 주제에 그런 경지를 얻는다는 것은 지난할 뿐 아니라, 설사 그 경지에 오른다고 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기운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아니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자가 살수 짓을 할 이유가 없게 된다.
극고한 경지에 이른 살수가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한 탓에 살수들은 일반 양민처럼 적에게 접근하여 암살의 순간에만 무인으로 변하는 그런 무공을 절실하게 원했다.
그 무공을 완성한 자가 바로 칠백 년 전 살수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일살 천류흔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천류흔의 무공은 삼류 수준이라고 하였다. 그런 그가 살수의 제왕이란 칭호를 얻게 된 이유가 바로 잠능폐혈대법이었던 것이다.
“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잠룡쟁패 쟁탈전은 잠룡대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합니다.”
“ 잔소리 그만하고 나가서 약속이나 잡아. 대금전장에 들려서 이자에 대해서도 말을 해 놓고.”
“ 참! 수결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문득 연씨 세가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접객식에서 연금석은 연우강에게 수결이 안 되는 놈이라며 혀를 찼던 것이다.
“ 먹물공황증 때문이야.”
“ 먹물공황증이라면......?”
“ 그런 게 있어. 나갔다 와.”
“ 알겠습니다.”
염자생은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칠 일 후.
등에 거무튀튀한 궤짝 하나를 걸머진 연우강은 피곤한 얼굴로 화야장을 나섰다. 지난 칠일 동안 송별회를 하느라 하루도 쉬지 않고 술을 퍼부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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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한쪽 벽면에는 명패 오백 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명패 앞에서는 문사 차림의 인물 오십여 명이 바쁘게 오가며 명패 아래 쪽에 붙어 있던 무언가를 떼어내고, 새로운 것을 붙이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끼이익!
일 장 높이에 달하는 커다란 문이 열리며 세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 어서 오십시오. 궁주님.”
그러자 안쪽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대야벌 특수 조직인 조양궁, 잠룡궁, 율령궁 궁주들이었던 것이다.
“ 수고가 많네, 어떤가?”
세 사람 중 가운데 있는 자가 명폐가 걸린 벽면에 눈을 맞추며 물었다.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이자는 대야벌의 감찰과 정보를 담당하는 율령궁의 궁주로 군자무림행이라는 특이한 별호를 가진 우담보였다.
“ 먼 곳에 있는 자들부터 먼저 출발했습니다. 궁주님. 여기 붉은 천이 달려 있는 자들이 출발한 자들입니다.”
보고를 하는 자는 율령궁의 산하 조직 중 정보를 맡아 처리하는 천안원 원주 음양뇌 유선이었다. 유선은 명패 아래쪽에 붙어 있는 붉은 천들을 가리켰다.
“ 강호 반응은 어떤가?”
“ 각처에서 무인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조만간 잠룡쟁패를 추고 혈풍이 몰아칠 것 같습니다.”
“ 단 하나도 놓치면 안 되네. 잠룡쟁패를 받은 오백 명은 물론이고, 잠룡쟁패의 새로운 주인과, 이동 방향까지 완벽하게 보고서로 작성돼야 한다는 걸 명심하게.”
“ 명심하고 있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고개를 숙였다.
잠룡쟁패로 인해 벌어지는 잠룡대전은 강호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기연을 얻기 위한 투쟁의 장이지만, 대야벌은 전력을 점검하는 시험의 장이다.
이곳 율령궁뿐만 아니라 대야벌 산하 삼궐칠련십림의 모든 조직은 강호에서 벌어지고 있는 잠룡대전을 주시하고 있고, 잠룡대전이 끝나면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의 정확도에 따라 각 조직을 맡고 있는 수뇌들의 능력이 검증되는데, 그 검증의 기본이 되는 자료가 바로 이곳 율령궁에서 작성되는 보고서인 것이다.
“ 연우강이란 놈은 어디에 있는가?”
조양궁의 궁주 범일승이 명패를 보며 물었다.
조금 전부터 연우강이란 이름을 찾아보았지만 명패가 너무 많아 눈에 띄지 않았다.
“ 금릉 연씨 세가의 장자를 말하는 거라면 이쪽입니다.”
유선은 왼편 구석을 가리켰다.
“ 놈은 아직 출발하지 않는 건가?”
“ 아닙니다. 저쪽은 무림과는 상관없는 자들을 모아둔 거라서......”
“ 무슨 소린가?”
유선이 말끝을 흐리자 듣고 있던 우담보가 버럭 소리쳤다.
“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일뿐 정보는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 이번 잠룡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자들이 그들이네, 유 원주.”
“ 무슨.......?” 유선은 의아한 얼굴로 우담보를 보았다.
문득 요즘 대야벌에 돌고 있는 소문이 떠올랐다.
수뇌들 사이에 은밀히 돌고 있는, 대야벌에서 상단을 결성한다는 소문이었다. 궐로 할지 아니면 련으로 할지 직위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돌고 있는 걸 보면 그체적인 계획이 세워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부의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십 년 전 했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런데 궁주로부터 역정을 듣게 된 것이다.
“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부하들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조금 전 연우강의 이름이 나올 때부터 자료를 뒤지고 있던 자들이 붉은 천에 무엇인가를 적더니 연우강의 이름이 적힌 명패 아래쪽에 붙였다.
“ 지금 안휘성 황산에 있는 걸로 나왔습니다.”
“ 황산?”
우담보는 의아한 얼굴로 유선을 보았다.
금릉 연씨 세가에서 이곳 대야벌로 오기 위해서는 안휘성이 아니라 하남성이 있는 북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더구나 황산은 안휘성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곳이 아니던가.
“ 싸움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황산으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궁주님.”
“ 그럴 수도 있겠군. 놈을 호위하는 자는?”
이번엔 범일승이 유선을 향해 물었다.
“ 다른 자들과는 달리 연우강은 혼자 움직이고 있습니다.”
“ 혼자란 말인가?”
모를 말이다. 분명 놈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었다. 그런 놈이 잠룡쟁패를 지닌 채 혼자 움직인다는 것은 날아오는 칼날 앞에 목을 들이미는 꼴이다.
물론 만용에 가까울 정도로 무모한 놈이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움직일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재미있는 녀석이군요.”
명패를 유심히 훑어보고 있던 노인이 빙그레 웃었다. 학창의를 입고, 도관을 쓰고 있는 이자는 제자를 길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잠룡궁의 궁주 천기만리통 혁세군이었다.
“ 무슨 말이오, 혁 궁주?”
범일승의 시선이 혁세군에게로 향했다.
“ 잠룡쟁패를 줄 때 그동안 대야벌에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준다고 하였소?”
혁세군이 물었다.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소이다.”
범일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군요. 녀석은 우리의 예상을 뒤엎는 방향으로 움직일 공산이 크오, 범 궁주.”
“ 어떻게 말이오?”
“ 아직은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소이다. 다만 내 예상이 맞다면 우린 녀석을 모시고 와야 할 거요.”
“ 모시고 와야 한단 말이오?”
범일승은 황당한 얼굴로 혁세군의 말을 곱씹었다.
매 십 년마다 잠룡쟁패를 내렸지만 단 한 번도 대야벌에서 잠룡쟁패의 주인을 데려온 적은 없었다.
심지어 황실에 잠룡쟁패를 전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지닌 자라고 해도 잠룡대전을 치르며 스스로 이곳까지 와서 제자로 등록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찮은 상단의 자식놈을, 그것도 무공조차 없는 놈을 모시고 와야 할지도 모르다니, 혁세군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일단 어떻게 움직일지 두고 보면 알겠지요.”
“ 궁금하오, 혁 궁주.”
“ 허허허! 미리 말했다가 내 예상이 틀리면 나만 창피하지 않겠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일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그만 나갑시다.”
혁세군은 껄껄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십 년 만에 벌어지는 잠룡대전은 강호 무림을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 성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불리는 잠룡쟁패는 얻는 자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기회도 더 없이 좋았다.
십 년 전만 해도 강호에 풀린 잠룡쟁패는 백 개에 불과했는데 이번에는 그 다섯 배인 오백 개의 잠룡쟁패가 풀렸다고 하였다. 삼십 세 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나이에 대해 신경 쓰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무인들은 혈안이 돼 잠룡쟁패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잠룡쟁패를 발견했다고 해서 무작정 달려들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최초 잠룡쟁패를 가진 자들 또한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대응방안을 모색하곤 한다.
수많은 무인을 호위로 거느린 채 대야벌로 향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잠룡쟁패는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따로 가는 자들도 있다.
그렇듯 잠룡쟁패를 받은 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대야벌로 향하는 탓에 잠룡쟁패를 탈취하기 위한 자들 또한 온갖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 첫째, 잠룡쟁패가 풀렸다는 소문이 나면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잠룡쟁패를 받은 대상을 알아내라.
- 둘째, 그들 중 탈취 가능한 자를 선택하라.
- 셋째, 실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선택은 언제나 다수로 하라.
- 넷째, 공략은 가장 약한 자부터 시작해라.
공터를 내려다보고 있는 운화는 그동안 숙지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그녀가 최초 잠룡쟁패를 받든 자를 알아내기 위해 협조자로 택한 곳은 하오밀문이다.
지난 십 년 동안 꾸준히 친분을 유지하며 공을 들인 탓에 하오밀문은 소문보다 더 빠르게 잠룡쟁패를 가진 자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오백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 중에 다섯 명을 선택했는데, 지금 공터에 있는 자가 가장 약했다.
금릉 연씨 세가 장자, 연우강.
운화는 지난 열흘 동안 연우강을 감시했다.
황산에 들어서자마자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껏 지켜본 이유는 연우강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였던 하오밀문의 정보 때문이다.
운화는 품속을 더듬어 책을 꺼냈다.
‘ 잠룡쟁패를 얻는 방법’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처음 노노가 이 책을 구해왔을 때 피식 웃었다. 누군가 돈을 벌기 위해 쓴 잡서 정도로 생각한 탓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잠룡쟁패를 얻었던 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통해 성공한 무인들의 성공담까지 실려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방법들이 적혀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대야벌까지 가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지난 십 일 동안 참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책 때문이기도 했다. 운화는 벌써 수백 번도 더 읽어 너덜너덜해진 책장을 넘겼다.
‘ 혼자 가는 자는 잠룡쟁패를 따로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자로부터 잠룡쟁패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도 인간인 이상 잠룡쟁패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려 할 테고 누군가를 만날 것이다. 그때를 노려 잠룡쟁패의 주인과, 만나러 오는 자를 동시에 생포하여 입을 열게 만들어야 한다. 입을 열게 만드는 방법은........
‘ 열흘 동안 아무도 만나러 오지 않는다면 본인이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운화는 내심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잠룡쟁패를 보내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본인이 가져가는, 고도의 금선탈각이라고 책에 나와 있었다.
‘ 어디 아픈가?’
운화의 눈에 동정의 빛이 떠올랐다.
지난 열흘 동안 보았던 익숙한 광경이다.
연우강은 인시 말이 되면 정확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그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궤짝을 열어 약탕기를 꺼내 약을 달이는 일이다. 약이 달여지는 동안 그는 한편에서 한시진 동안 몸을 푼다.
몸을 푸는 동작을 보면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다.
약탕기를 올려놓은 불에 간혹 나뭇가지를 집어넣는 때를 제외하곤 동작에 몰두하는데 마치 하늘에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 돈은 많은 집안이라고 하더니.....’
공연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기분이 우울해졌다.
운화는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 가문을 생각하십시오. 가주님.]
전음이 들려오자 운화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 알았어, 포위해.]
운화는 전음을 보내고 몸을 훌쩍 날려 연우강 앞으로 내려섰다.
약을 짜고 있던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불청객을 보았다. 얼굴을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 여자 도둑?”
볼록 튀어나온 가슴이 눈 안으로 들어오자 연우강은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 살고 싶어요?”
운화는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 살기 싫으면 약을 먹을 이유가 없잖아.”
연우강은 탕약이 담긴 대접을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걸 내놔요.”
“ 캬! 빌어먹을. 왜 이렇게 쓴지 모르겠네. 약이 왜 이렇게 쓴지 알아?”
연우강은 대접을 탈탈 털어 궤짝 안으로 집어넣으며 물었다.
“ 주지 않으면 죽어요.”
“ 뭔지 말을 해야 주지.”
“ 잠룡쟁패지 뭐겠어요.”
“ 잠룡쟁패?”
연우강은 운화를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가슴으로 시선을 주었다.
“ 당장 내놓지 않으면 죽일 거예요.”
운화는 연우강 앞으로 검을 불쑥 내밀었다.
단순한 찌르기 동작에 불과하지만 그녀의 검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절제돼 있었다.
“ 너 변성하고 있는 거지?”
연우강은 섬뜩한 광채를 발하고 있는 검을 내려보며 물었다. 검을 쳐다보던 그의 시선이 다시 자연스럽게 운화의 가슴으로 향했다.
“ 정말!”
운화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은밀하게 따르기 위해 몸에 착 붙는 경장을 걸친 상태라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연우강의 시건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자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 변성한 거 아냐?”
“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 나이를 가르쳐주면 줄게.”
앞으로 나아가던 운화의 검이 우뚝 멈췄다.
- 입을 열려고 하면 일단은 기다려라. 들어본 다음에 처리해도 늦지 않다.
책의 한 구절이 떠올라서였다.
“ 열여섯!”
“ 정말?”
연우강은 깜짝 놀란 눈으로 운화를 보았다.
목소리른 물론이고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스무 살이 채 안 됐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짖궂게 나이를 물었던 이유는 풍만한 가슴 때문이다.
그동안 기녀들을 접하면서 터득한 경험에 의하면 저 정도 가슴을 지니려면 최소한 이십대 후반, 그것도 선천적으로 풍만한 몸매를 타고나야 가능했던 것이다.
“ 그, 그렇다니까요.”
“ 좋아, 그건 믿어줄게. 그런데 잠룡쟁패를 가져가면 지킬 자신은 있는 거야?”
[ 그건 네가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수중에 있으면 목숨을 살려주고, 없으면 죽게 될 것이다.]
“ 괜히 걱정했네.”
귓전으로 늙수그레한 전음이 들려오자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공연히 드잡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일찍 출발했고, 방향도 남쪽이 아닌 황산으로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왔다면 복면녀 일행은 상당한 정보력을 갖췄다고 봐야 할 터였다.
“ 이놈이 어디 있더라, 여기 있네. 꼭 성공하길 바랄게.”
연우강은 궤짝을 뒤적여 잠룡쟁패를 꺼내 휙 던졌다.
척!
잠룡쟁패를 받아든 운화는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걸 얻기 위해 십 년 동안 공을 들였다. 이곳에 온 가솔들 또한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검 한 번 휘둘러보지 않고 잠룡쟁패를 손에 넣게 되니 허탈해졌다.
“ 혹시......”
문득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룡쟁패를 다시 보았다.
“ 주판을 무기로 사용하는 난쟁이 똥자루 대머리가 직접 가지고 온 거야. 우리 가문은 극구 사양했는데, 그 난쟁이 똥자루 대머리가 벌주란 자가 내리는 선물이라면서 무조건 받아야 한데. 더불어 잠룡쟁패는 열외 없이 대야벌로 회수돼야 한다고 협박을 하는 통에 가는 중이야.”
“ 좋아요. 믿어요.”
“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할게.”
“ 부탁?”
“ 이 자리에서 날 죽일 생각이 아니면 잠룡쟁패를 탈취했다고 소문을 내주면 좋겠는데.”
“ 그, 그건 불가능해요.”
“ 소문내면서 아가씨의 정체를 밝힐 필요는 없잖아.”
“ 그래도....”
운화는 고개를 돌려 뒤편을 보았다.
[ 해주겠다고 하십시오. 가주님.]
“ 알았어요. 그렇게 해줄게요.”
잠룡쟁패를 너무 쉽게 얻은 탓인지 운화의 목소리가 한껏 밝아졌다.
“ 무공도 없는 자에게 잠룡쟁패를 주어 차도살인을 노렸다는 말을 꼭 넣어야 하는데 가능할까?”
“ 그건 왜죠?”
“ 그래야 아가씨를 다시 만날 수 있거든.”
“ 날 다시 만난다고요?”
운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난 대야벌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래.”
“ 그렇게 소문을 내면 대야벌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예요?”
“ 응!”
“ 잠룡의 신분으로?”
잠룡은 잠룡쟁패의 소유주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 당연히 그렇게 들어가야지.”
“ 어떻게?”
“ 그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내가 말한 대로 해줄 수 있어?”
“ 아, 알았어요. 그 내용을 포함시켜 소문을 내도록 할게요.”
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밀문이 있으니 소문을 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그리고 대야벌에서 성공하면 크게 한턱 낼 거지?”
“ 한턱?”
“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가치가 나갈 건데, 난 공짜로 줬잖아.”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약탕기를 궤짝 안에 집어넣고 짐을 꾸렸다. 그런 연우강을 운화는 멍한 눈으로 보았다.
“ 어, 어딜 가는 거죠?”
“ 그 유명하다는 황산 구경도 대충 했으니까 집에 가야지. 꼭 성공해.”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공터를 벗어났다.
연우강이 떠나자 주변으로부터 복면인들이 걸어나왔다. 그들 역시 잠룡쟁패를 너무 쉽게 얻은 탓인지 맥이 빠진 듯한 모습이다.
“ 노노!”
운화는 맨 앞에 있는 복면 여인에게 잠룡쟁패를 내밀었다.
“ 진품입니다. 가주님.”
잠룡쟁패를 쳐다본 노노가 나직이 말했다.
“ 그 사람에게 괜히 미안해지네.”
운화는 연우강이 떠난 곳을 더듬어 보며 중얼거렸다.
“ 그 녀석 말처럼 성공해서 오늘 빚을 몇 배로 갚아주면 됩니다. 가주님.”
“ 그는 부자야, 노노. 우리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냐.”
“ 연씨 상단의 상속자는 둘째 연우진입니다. 가주님.”
“ 맞아 그렇지. 어쩌면 우리가 도울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네. 일단 가문으로 돌아가.”
운화는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돌아간다.”
노노는 낮게 소리치며 운화를 따라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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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소린가?”
범일승은 깜짝 놀란 얼굴로 혁세군을 보았다.
“ 이거네.”
천기만리통 혁세군은 첩지 한 장을 범일승에게 내밀었다.
< 금릉 연씨 세가 장자 연우강은 잠룡쟁패를 빼앗기고 가문으로 돌아감. 잠룡쟁패를 빼앗아간 자들의 정체는 파악 불가. 더불어 무공도 없는 자에게 잠룡쟁패를 주어 차도살인을 노렸다는 악의적인 괴담이 돌고 있음.>
“ 차, 차도살인이라고? 그, 그러니까 우리가 잠룡쟁패를 이용해서 연씨 상단의 큰아들을 없애려고 계획을 세웠단 말입니까?”
범일승은 황당한 얼굴로 혁세군을 보았다.
“ 그런 소문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고 하오, 범 궁주.”
“ 그놈을 죽이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라는 걸 강호 무림인 전부가 알고 있소이다. 궁주, 이건 모함이오.”
범일승은 버럭 소리쳤다.
“ 물론 범 궁주 말이 맞소. 하지만.....”
“ 하지만 뭐요?”
“ 어떤 명분으로 그를 죽일 거냐 하는 게 문제 아니오.”
“ 명분이야 만들어내기 나름이지.... 빌어먹을!”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놈에게 준 잠룡쟁패가 바로 놈을 죽일 명분으로 둔갑해 버린 탓이었다. 어떤 핑계를 대든 잠룡쟁패를 이용해서 놈을 죽이려 했다는 의심을 떨치기 힘든 상황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 우리가 실수한 거요, 범 궁주.”
혁세군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일은 대야벌 특수 조직인 삼궁에서 전적으로 주관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하긴 했지만 다섯 배로 늘어난 일감으로 인해 부실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연우강 일도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였다.
“ 무슨 실수를 했단 말이오?”
“ 자칫 잘못하면 우리 대야벌에서 잠룡쟁패를 이용해 강호의 자라나는 싹을 말살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오.”
푹!
범일승의 손가락이 탁자로 파고들어 갔다.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혁세군의 말을 듣고 보니 누군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다면 강호인들은 믿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고 군자무림행 우담보가 들어왔다.
강호에 돌고 있는 소문을 보고하기 위해 벌주를 만나러 상천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 어떻게 됐소?”
범일승은 우담보가 앉기도 전에 물었다.
“ 벌주께서 진노하셨소. 범 궁주.”
“ 그럼?”
“ 당장 무인을 파견해 호위하여 오라고 하였소.”
“ 젠장.”
또다시 범일승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 한시가 급하게 처리하라고 하셨소. 범 궁주. 누굴 보낼지 결정을 해야 하오.”
“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소. 잠룡을 호위해 오라는 임무를 누구에게 준단 말입니까?”
짜증을 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잠룡쟁패를 지닌 잠룡은 대야벌의 제자가 될 자들이다. 손님이라면 모를까 장차 부하가 될지도 모르는 자를 호위해 오라면 기꺼이 나설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더구나 강호에서는 잠룡대전이 한창이니 어중간한 무인을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최소한 백대 고수에 낄 정도의 무력을 가진 자를 보내야 하는데,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나설 리가 만무하다.
“ 철장마도 막장이면 될 것 같소만.”
혁세군이 우담보를 보며 말했다.
철장마도 막장은 율령궁 산하 율법을 집행하는 천살의 소속의 집행사자의 한 명이었다.
“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철장마도는 천살원 삼대 고수 중 한 명이오. 궁주.”
우담보의 얼굴에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막장이 부하라고 하지만 그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잠룡을 호위해 오라는 명령을 차마 내릴 수가 없어서였다.
“ 막장이 흑철마신을 원한다고 들었소이다.”
혁세군의 시선이 이번엔 범일승에게로 향했다.
흑철마신은 범일승이 우연히 얻어 보유하고 있는 비급으로 무림 삼대 외공 중의 하나였다.
“ 나도 흑철마신이 있다면 말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소.”
“ 알았소. 흑철마신을 내놓도록 하겠소. 대신 흑철마신은 내가 직접 전해주도록 하겠소.”
우담보까지 거들고 나서자 범일승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