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4화 (4/232)

제4장 난 인생 막장을 경험한 놈이야.

‘ 흑철마신을 자네에게 완전하게 넘기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은데 들어주겠는가?’

‘ 말씀하십시오.’

‘ 놈을 순한 양으로 만들어주게.’

‘ 녀석을 털끝 하나 건들지 말고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그래서 부탁하는 것 아닌가. 놈은 무공이 없는 상태니까 머리를 약간만 쓰면 말 잘 듣는 개로 만들 수 있을 거네.’

‘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 놈에게 모욕을 당했네. 그러니까.....’

“ 쿡!”

막장은 피식 웃었다.

범 궁주가 병적으로 싫어하는 자들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부류다. 그런 그 앞에서 기억하기 싫어도 저절로 기억되는 특이한 체형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놓고 욕을 했다니. 연씨 상단의 장남이 아니었다면 녀석은 그 자리에서 머리가 터져 죽었을 것이다.

범 궁주가 체면 불구하고 부탁을 한 이유가 십분 이해가 갔다.

“ 걱정 마시오, 범 궁주. 사람을 개로 만드는 건 내 전문이오.”

막장은 어깨를 활짝 펴고는 대문을 힘차게 두들겼다.

쿵쿵쿵! 쿵쿵쿵!

“ 누구십니까?”

“ 대야벌에서 나왔소.”

“ 어이쿠!”

놀람에 찬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활짝 열렸다.

“ 어서 오십시오. 대인.”

“ 난 대야벌 율령궁 산하 천살원 집행사자 철장마도 막장이오.”

“ 가주님께 연통을 넣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문을 열어준 사내는 조심스럽게 막장을 안내했다.

“ 정말이냐?”

연금석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 그렇습니다. 가주님. 지금 접객실로 모셨습니다.”

“ 맙소사.”

연금석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둘째 연우진을 보았다.

“ 형님 말이 맞네요.”

아버지의 시선을 받은 연우진은 빙그레 웃었다.

형님이 돌아온 건 보름 전이다.

궤짝을 둘러메고 들어온 형님은 잠룡쟁패를 빼앗겼다고 했다. 그러고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배고프다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님이 집으로 돌아온 내막을 알게 된 건 그날 저녁이었다. 아버지의 성황에 못 이겨 잠룡쟁패를 빼앗기게 된 경위를 털어놓았는데,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던지.

하지만 그보다 더 황당한 말은 다음 말이었다.

대야벌에서 모시러 올 테니까 맘 편히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때만 해도 형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내심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이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정말로 대야벌에서 사람이 나온 것이다.

“ 형님 말은 곧 진리다. 녀석아.”

“ 맞습니다. 형님 말이 진립니다.”

안에서 연우강이 걸어나오자 연우진은 맞장구를 쳤다.

“ 그런데 바로 떠나실 겁니까?”

연우진은 연우강의 등에 매달린 거무튀튀한 궤짝을 보며 물었다.

“ 어떤 놈인지 몰라도 날 데리러 온 놈은 잔뜩 기분이 상해 있을 것 아니냐. 이럴 땐 그저 군말 없이 따라나서는 게 좋다. 그리고.....”

“ 내게 할 말이 있는 게냐?”

연우강의 시선을 받은 연금석이 물었다.

“ 각 지부를 꼬치 끼우듯 끼울 수 있습니까?”

“ 무슨 말이냐?”

“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연씨 상단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아버지.”

“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거 아니냐.”

“ 절 데리러 온 걸 보고도 아직 파악 못하신 겁니까?”

“ 널 데리러 온 건 설마 그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연금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하신 분이 아버지십니다. 친절이 지나치면 그 의도를 의심해 봐야 한다고 하셨고요. 상단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절 데리러 올 이유가 없습니다.”

“ 생각해 둔 거라도 있느냐?”

“ 사람을 믿지 말고 돈을 믿으십시오.”

“ 보증을 서게 만들라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전 지부를 다섯 개나 열 개로 묶어 상호보증을 서게 하세요. 어느 한 곳이 배신을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파산하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 자칫 잘못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다.”

“ 거래처를 다변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능하면 군납에 치중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 말하거라.”

“ 저 녀석을 지켜야 합니다. 아버지.”

연우강은 연우진을 턱으로 가리켰다.

“ 우진이까지 노릴 걸로 보느냐?”

“ 최악의 경우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그럼 저도 무공을 익혀야 하는 겁니까?”

연우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래서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책자를 던져 주었다.

“ 흑풍마라천력?”

연우진은 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제 입으로는 천하제일인이었다고 하더라만, 천오백 년 전에 활동했던 사람이라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사막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게 그놈 때문이니까 완전히 뻥은 아닌 모양이다. 그걸 익힌 다음 영약을 구해 복용해라. 그럼 네 가족 정도는 보호할 수 있을 거다.”

“ 무, 무공을 익혔습니까?”

연우진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 맨 뒤에는 잠능폐혈대법이라는 신기한 무공이 있다. 그걸 습득하면 누구도 네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연우강은 대답 대신 설명을 이어나갔다.

“ 형님!”

“ 무인도 마찬가지지만 장사꾼은 더욱 자신을 숨겨야 한다. 진아. 물론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앞으론 더욱 숨겨라. 네가 열 개를 가지고 있다면 일곱 개를 숨기고 세 개만 드러내라. 그럼 넌 상단 제국을 세울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건 암기하고 태워라.”

“ 알겠습니다. 형님.”

연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젠 줄 건 다 주었으니까..... 가보겠습니다. 아버지.”

“ 이젠 ... 오지 않을 생각이냐?”

연금석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풀지 않으며 물었다.

“ 시절이 하수상하면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몰려들기 마련입니다. 아버지. 친자식도 아닌 저 때문에 연씨 세가에 분란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연우강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 넌,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다!”

연금석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연우강을 쳐다보는 연금석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자신 또한 동생들이 파벌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공연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것 같아서 두고 보고만 있는데, 그 일로 인해 우강을 떠나보내게 된 것이다.

녀석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저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제 아버지는 연 금 자, 석 자 되시는 분이고 어머니는 이 숙 자 경 자 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를 향해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 연우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우강아! 우강....”

“ 놔둬라.”

막 문을 향해 달려가려는 연금석의 발을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 아버지?”

“ 녀석이 우릴 버린 건 아니지 않느냐? 언젠가는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 들으셨습니까?”

“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날 보러 왔더구나.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식을 안고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 알겠습니다. 아버지.”

연금석은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 우선 상단부터 다시 정비해라.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끄덕없을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 알겠습니다. 아버지. 철옹성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연금석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

보통 잠룡쟁패를 받게 되면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른다. 설사 무공이 없는 자라 해도 자질이 받쳐준다면 얼마든지 고수로 거듭날 수 있는 곳이 대야벌이기 때문이다.

기회의 장, 꿈의 대지.

모든 무인들이 대야벌을 그렇게 여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달랐다.

‘ 성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잠룡쟁패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시큰둥하다.

“ 이름이 뭐요?”

연우강은 사내를 보았다.

거대하다는 말 대신 달리 표현할 말이 있을까. 거의 팔 척에 육박하는 키와 등에 메고 있는 거대한 도는 참으로 어울렸다. 더불어 사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고수, 사내를 대한 첫 느낌은 그랬다.

“ 알 필요 없다. 가자.”

막장은 몸을 돌렸다.

“ 당신 기분이 더러운 건 이해하겠는데, 동행을 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잖아?”

“ 당신?”

막장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 상대의 이름을 모를 때 흔히 사용하는 호칭 중 한 가지가 당신이야.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구나.”

막장은 연우강 앞으로 새카맣게 변한 오른손을 내밀었다. 먹물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는 손은 그의 성명절기 중 하나인 철살장을 펼치기 전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 지금 나 겁주는 거냐?”

연우강의 말투가 대번에 반말로 바뀌었다.

“ 정녕?”

막장은 오른손을 스윽 내밀었다.

“ 아서라, 자식아.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죽일 게 아니면 무기를 뽑지 말라고 했다. 개 폼 잡고 싶으면 그 똥자루 대머리 새끼 앞에서나 잡아.”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말문이 막히는 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찬가지다.

지금 막장의 경우가 그랬다.

비록 말석이긴 하지만 그는 대야벌 백대 고수 중 한 명이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자들로 매긴 평가이긴 하여도 대야벌의 백 대 고수면 중원 서열 백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공도 없는 놈에게 ‘자식아’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는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쳐다볼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 가장 무식한 새끼들이 어떤 놈인 줄 알아? 좆도 아닌 것들이 계급장만 믿고 까부는 새끼들이야, 자식아.”

우드득!

막장이 주먹을 틀어쥐자, 뼈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푹!

그의 발이 바닥이 뚫고 들어갔다.

“ 후흡! 푸우! 후흡! 푸우! 후흡! 푸우!”

막장은 연거푸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아니 놈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것만 같았다.

‘ 자네가 녀석을 데리러 갔다고 소문을 낼 거네. 만일 녀석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우리 율령궁이 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게.’

문득 우담보 궁주의 말이 떠올랐다.

군자무림행이라는 별호만 놓고 보면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그의 성격은 대야벌에서 가장 까다롭고, 책임 유무를 따질 때는 완벽주의에 가깝다.

더불어 그의 눈 밖에 나면 무공의 강약에 상관없이 대야벌에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 흐흡! 별 거지 같은 일을 맡아서는.”

막장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연우강을 따라나섰다.

둘은 말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연우강은 태평이었다. 두 시진 동안 걷고 잠시 쉬고, 두 시진 동안 걷고 잠시 쉬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밤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뭔가를 꺼내 슬쩍 훑어보는 걸 빼면 낮에 하는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네.”

하늘을 올려다본 연우강은 등에 지고 있던 궤짝을 내려놓고는 안쪽에서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건 농사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괭이와 낫이었다.

일부러 작게 만든 듯, 보통 괭이와는 달리 그가 꺼내놓은 괭이는 자루가 한 자밖에 되지 않았다.

“ ......!”

막장은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지만 주변은 온통 마른 억새풀로 가득했다. 억새풀 사이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며들어 체온을 뚝 떨어뜨려 놓았다.

막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퍽! 퍽! 퍽!

“ 응?”

막장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이 느닷없이 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한 거였다.

‘ 미쳐버린 모양이구나.’

막장은 내심 중얼거리며 연우강을 지켜보았다.

한 자 깊이로 길게 땅을 판 녀석은, 이번에는 낫을 가지고 주변의 억새풀을 자르고 있다. 잘라낸 억새풀을 한아름 들고와 파두었던 구덩이에 넣고는 발로 지근지근 밟아 눌렀다. 억새풀이 바닥에 착 달라붙자, 다시 억새풀을 잘라와 그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렇게 세 번에 걸쳐 억새풀을 다진 그는 꺼내 놓았던 포대기를 깔고는 그 위로 다시 억새풀을 얹었다.

“ 오랜만에 하려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연장을 정리하여 궤짝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육포를 꺼내 조금씩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꼬르르!

막장은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는 슬쩍 연우강을 보았다.

다행히 녀석은 뱃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 사내자식이 깨작대기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은 한 줌도 되지 않는 육포를 조금씩 찢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먹는 모습 또한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씹을 건더기도 없는 육포를 입 안에 넣고는 천천히 오물거리는데, 마치 소가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입이면 끝날 것 같은 육포를 무려 일 다경에 걸쳐 먹은 녀석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잠룡쟁패를 궤짝 위에 올려놓고는 조금 전 만들어 두었던 구덩이로 갔다.

“ 허!”

막장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녀석은 조금 전 열심히 만들어 놓은 구덩이 안으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벌판에서 잠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

바닥에 세겹으로 풀을 깔고, 그 위에 이불을 덮고 다시 풀을 덮은 다음 녀석의 몸이 들어가는 곳은 바닥에 깐 풀과 얇은 이불 사이다. 이불 위쪽에 덮인 풀은 체온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가히 완벽한 잠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더 황당한 일은 다음이었다.

드르렁!

휘이익!

막장은 저도 모르고 팔을 쓸었다.

갑자기 허기와 함께 추위가 밀려왔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풀만 눈 안 가득 밀려들어 왔다. 점심, 저녁을 굶고 물 한 모금 먹지 않은 채 녀석을 따라왔는데 이젠 벌판에서 잠을 자게 생긴 것이다.

‘ 그나저나 저 새낀?’

추위와 허기도 문제지만 녀석은 더욱 황당하다.

녀석을 호위하여 대야벌로 간다고 소문을 냈으니 지금쯤 잠룡쟁패를 노리는 자들이 나타날 때도 됐다.

어떻게 보면 처음 잠룡쟁패를 빼앗겼을 때보다 더욱 위험한 상황이다. 그런데 녀석은 그런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다.

배짱 하나만큼은 최고인 녀석이었다.

“ 빌어먹을! 난 날밤을 까야겠네.”

주변을 둘러보던 막장은 움푹 들어간 곳을 찾아 몸을 뉘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따뜻하게 데웠지만 허기는 참기가 힘들었다.

“ 저 속에 육포가... 아서라.”

이내 고개를 저은 그는 하늘로 시선을 주었다.

“ 비참한 밤이 되겠네.”

대야벌 백대 무인에 속한 막장의 비참한 밤은 그날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도, 또 다음날도 그는 계속 풍잔노속을 했다.

물론 중간에 마른 음식을 구해놓아 밥은 굶지 않았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추위는 무공으로 막아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 서른다섯 살의 젊음이 아니었다면 몸이 망가져도 몇 번은 망가졌을 것이다.

“ 안 진다, 놈! 절대 네놈에게는 안 진다.”

막장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팔다리를 풀었다.

밤새 찬 곳에 누워 있었던 탓일까. 내기를 돌려 몸의 각 부분에 활력을 주었지만 여전히 욱신거렸다.

그는 곁눈질로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의 하루는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다.

아침 인시 말에 기상을 해 몸을 풀면서 약을 먹고, 되새김질을 하고 길을 떠난다. 반드시 두 시진마다 한 번씩 휴식을 취하고, 두 번 휴식을 취할 때마다 육포를 조금씩 먹는다. 밤이 오면 전날과 같은 방법으로 땅을 파서 풀을 채우고 잠을 자는, 마치 군에서 훈련받는 자를 연상시켰다.

“ 가만, 군.......”

막장은 우뚝 동작을 멈췄다.

녀석이 오 년 동안 군 생활을 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 빌어먹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았네.”

막장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녀석이 지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지쳐서 쓰러질 때 즈음하여 녀석에게 세상이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녀석은 행군과 야영에 있어서는 무공을 익힌 자신보다 더 전문가였다.

“ 오늘은 객잔에서 자야겠다.”

“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연우강은 약을 마시며 툭 쏘아붙였다.

“ 계속 가겠단 말이냐?”

“ 너처럼 경공을 펼치는 놈은 금세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걸어가야 하니까.”

“ 야! 새꺄! 난 나이가 서른다섯이야!”

“ 서른다섯 처먹은 게 자랑이다.”

대접을 궤짝 안에 넣은 연우강은 늘 그랬듯 육포를 꺼내 공을 들여 찢었다.

“ 오냐, 쌍노무 새끼. 오늘 개 값 물어주고 만다.”

막장은 씩씩거리며 연우강을 향해 걸어갔다.

가능하면 탈 없이 데려오라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무공을 익혔다는 놈이 적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면서, 대야벌 고수 자존심 좋아하네. 개 값은 필요없으니까 저기 개들이나 잡아, 자식아.”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턱으로 막장 뒤를 가리켰다.

“ 맞다. 막장, 우린 천산...”

“ 어응!”

멀리서 들려온 소리에 막장은 짐승이 포효하듯 돌아서 전면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세 명의 노인 앞에 도달한 막장은 도를 뽑음과 동시에 도끼질하듯 내리찍었다.

번쩍!

막장의 도에서 푸른 광채가 폭발하듯 터졌다.

그의 성명 절기인 철혈전궁도법의 삼 초인 멸절이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후드득!

대야벌 백대 고수의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단 한 번의 칼질에 불과했을 뿐인데 세 명의 노인은 이름조차 밝히지 못하고 육편이 돼 흩뿌려졌다.

“ 감히 천산삼마 같은 조무래기들이........”

그제야 분이 풀린 듯 막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만일 누군가가 막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천산삼마.

천산 일대에서 최강의 무위를 자랑한다는 세 명은 중원까지 그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강자들이다.

대야벌로 들어가면 당장 백대 고수 안에 낄 거라며 큰소리를 치고 다녀도 누구 하나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만큼 강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백대 고수 말석이라는 철장마도 막장의 일도를 막아내지 못하고 육편으로 흩어지고 만 것이다.

대야벌. 정말 놀라운 단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주변엔 그 사실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 다만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연우강만 있을 뿐인데, 그는 천산삼마가 어떤 자들인지 알지 못했다.

“ 그치들 강해?”

으스대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막장을 보며 연우강이 물었다.

“ 천산삼마는 천산 일대의 패자다.”

“ 재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데 세 명 없앴다고 되게 뻐기네. 그보다 이름이 막장?”

“ 철장마도 막장이다. 대야벌 백대 고수 중 말석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녀석에게 정체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소개를 했다.

“ 꼴찌라면서 그렇게 목에 힘을 주고 싶어? 그러다 모가지 부러지겠다. 자식아.”

“ ... 도저히 안 되겠다.”

막장은 도를 그 자리에 꽂아두고 연우강 앞으로 걸어갔다.

“ 무공도 익히지 못한 양민을 치려고?”

“ 나도 계급장 전부 떼겠다.”

“ 무공을 쓰지 않겠다는 말?”

“ 무공이 아니고 내공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촌놈.”

“ 내가 군에서 오 년을 굴러먹었다는 사실을 지금쯤은 알아차렸을 텐데?”

“ 군에서 배운 허접한 실력으로 날 상대해 보겠다는 말이냐. 마음껏 실력 발휘해 보거라.”

“ 그럴 순 없지. 어차피 너도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공평하게 하자.”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장 앞에 섰다.

연우강도 작은 키가 아닌데, 막장과는 거의 머리 하나 차이가 났다.

“ 어떻게 하잔 말이냐?”

“ 셋까지 세고 난 다음 동시에 오른 주먹을 날리는 거야. 그때부터 시작하는 거지.”

“ 군에서는 그렇게 하냐?”

“ 그래, 첫 방을 견디는 놈에게 유리한 아주 공평한 방법이야.”

“ 좋다. 그렇게 하자.”

한순간의 호기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선공을 양보하려고 했던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좋다. 그런 지금부터 같이 세도록 하자. 하나.”

연우강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수를 셌다.

막장도 다르지 않았다.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라 일반인에 비하면 훨씬 강한 상태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얼굴에 힘을 잔뜩 주며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 두울!”

휙!

둘이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연우강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아래쪽에서 솟구치는 그의 주먹은 얼마나 빠른지 바람 소리가 날 정도였다.

“ 비, 비겁한.........!”

깜짝 놀라 막장의 입에 벌어졌다.

바로 그 순간 연우강의 주먹이 막장의 턱에 꽂혔다.

퍼억!

“ 커억!”

막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마치 돌에 강타당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중심을 잡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섬뜩한 기운이 명치를 향해 밀려왔다.

그는 급하게 양손을 내려 명치를 방어했다.

퍼억!

“ 크윽!”

명치에서 극렬한 통증이 밀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면 상체가 앞으로 숙여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막장은 명치를 감싸안고 허리를 숙였다.

몸에 꽉 조인 옷을 입고 있는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옷을 당겨 올리는 것도 상당한 기술이 요구된다. 얼굴은 완전하게 가릴 정도가 돼야 하고 소매는 팔 상박까지만 벗겨졌을 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지금 막장의 상황이 딱 그랬다.

뒤집힌 옷이 얼굴을 감싸 앞을 볼 수가 없었고, 양팔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여전히 오락가락한 정신이었다.

“ 넌 이름이 막장이지만 난 인생 막장을 경험한 놈이야. 자식아.”

연우강은 막장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누르며 무릎을 차올렸다.

퍼억!

“ 커억!”

꺾였던 막장의 상체가 공처럼 튀어올랐다. 막장은 중심을 잡기 위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파앗!

바로 그 순간, 연우강의 몸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둥실 떠올랐다. 그의 오른 다리가 번쩍 들여 올려지고 공기를 가르며 막장의 왼편 관자놀이에 작렬했다.

“크악!”

막장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막장은 저도 모르게 내기를 끌어올렸다. 번쩍 정신을 차리고 양팔에 힘을 주었다.

찌익!

옷이 찢겨나가며 비로소 시야가 틔었다.

“ 먼저 비겁한 짓을 한 놈은 너다, 막장.”

휘익!

강한 바람소리가 들려오자 막장은 시선을 돌렸다.

“ 그, 그건?”

막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얼굴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돌이었다.

내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피할 여유가 없었다.

“ 씨, 씨팔 놈 그건 모난 돌!”

뾰족한 돌이 관자놀이 쪽으로 다가오자 막장은 눈을 질끈 감으며 오른손을 무작정 휘둘렀다.

퍼억!

퍽!

먼저 연우강이 쥐고 있던 돌이 막장의 관자놀이에 꽂히고,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른 막장의 주먹은 연우강의 턱을 강타했다.

“ 씨팔!”

“ 니미럴!”

팔 척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가 천천히 넘어갔다.

쿠웅!

그리고 그 위로 연우강의 동체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휘이익!

포개 쓰러져 있는 두 사람 위로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 끌끌끌! 재미있는 놈들이네.”

오른편 숲에서 왜소한 노인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걸어나왔다. 연우강의 궤짝을 오 장 앞둔 노인은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연우강 아래쪽에 쓰러져 있는 막장을 향해 던졌다.

턱!

“ 완전히 갔군.”

작은 돌멩이가 손을 때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노인은 싱긋 웃었다.

“ 독한 놈에게 걸리니까 철장마도도 별 수 없네.”

노인은 연우강을 보며 헤죽 웃었다.

놀라운 녀석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녀석은 지난 며칠 막장의 진을 빼 놓았다. 아무리 강한 무공을 지녔다고 해도 엄동설한에 밖에서 잠을 자게 되면 몸이 굳기 마련이다. 그런 상태를 만들어놓고, 연우강은 싸움을 걸었따. 물론 내공이 없이 순수한 힘으로만 싸우자고 했다. 그 상태만 해도 승리가 확실한 터인데 연우강은 기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녀석의 마지막 공격.

“ 독한 놈!”

노인이 독한 놈이라고 한 이유는 그 당시 막장의 상태 때문이다. 막장은 강한 것 한 방이면 바로 기절할 정도로 심하게 충격을 받은 상황이다.

그냥 주먹만 써도 될 상황임에도 녀석은 돌멩이를 주워 막장의 관자놀이에 박아버렸다. 그것도 뾰족하게 모가 나 있는 걸로.

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만일 막장이 아닌 자신이었다면 마지막 돌멩이 공격에 머리통이 부서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난 이것만 있으면 되니까.”

노인은 궤짝 위에 있는 잠룡쟁패를 집어들었다.

“ 진품이네.”

“ 얼마 받기로 했지?”

그때 두 덩치가 쓰러져 있는 곳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억!”

노인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재빨리 막장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 넌?”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장 위에 엎어져 있던 연우강이란 놈이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세모꼴 눈에 주먹코, 오른쪽이 약간 긴 염소 수염, 키는 오 척 다섯 치, 오른손 손등에 있는 칼자국은 도둑질을 하다가 들켜서 생긴 것 같고, 그 정도면 막장 이놈이 충분히 알아차릴 것도 같은데, 영감 생각은 어때?”

“ .....!”

노인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의 말대로다. 방금 그 특징을 말하면 자신이 공공수 허일구란 사실을 막장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 얼마 받기로 했냐고 물었잖아.”

“ 배, 백만.”

“ 그 절반은 날 줘.”

“ 다, 달라고?”

“ 그 물건은 내 소유고. 판매처를 찾아낸 사람은 당신이니까 절반씩 나누는 게 도리잖아.”

“ 그러니까 가져가도 좋단 말이냐?”

“ 그것도 어차피 대야벌로 들어갈 텐데 뭐가 걱정이야.”

“ 클클클!”

허일구는 키들키들 웃었다.

잠룡쟁패를 팔아 한 밑천 잡으려는 놈이 자신 말고 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녀석은 독할 뿐만 아니라 괴짜였다.

“ 이 자식이 정신을 차릴 것 같은데 빨리 결정해, 영감.”

“ 끄응!”

연우강의 말처럼 막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 아, 알았다. 절반으로 나두로고 하마.”

허일구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막장이 정신을 차리면 조금 전 천산삼마처럼 일격에 죽임을 당하고 말 터였다.

“ 좋아, 영감.”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피가 덕지덕지 묻은 돌멩이를 다시 집어들었다.

막장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던 돌멩이였다.

“ 지, 지금...”

허일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멩이를 들어올린 녀석은 조금 전 후려쳤던 곳을 향해 또 다시 꽂아 넣은 것이었다.

퍼억!

막 정신을 차려가던 막장은 다시 기절하고 말았다.

“ 다시 기절한 것 같으니까 이야기 계속 하자고.”

“ 좋다. 돈은 어떻게 전달해 주면 되느냐?”

“ 대금전장에 내 이름으로 입금시켜 주면 돼. 내 이름은 알고 있지?”

“ 조, 좋다. 연우강. 그렇게 하겠다.”

“ 세모꼴 눈에 주먹코, 오른쪽이 약간 긴 염소 수염, 키는 오 척 다섯 치, 오른손 손등에 있는 칼자국!”

“ 알았어 자식아. 반드시 오십 만 냥을 입금시켜 놓을 테니까 너나 약속 어기지 마.”

“ 노인장, 우리 동업하는 게 어때?”

“ 동업?”

막 걸음을 옮기려던 허일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지금은 백만 냥이지만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비싸질 거잖아.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럴 때 한밑천 잡지 않으면 언제 잡아.”

“ 이걸 구할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냐?”

허일구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그걸 고객에게 넘겨준 다음에 은밀하게 날 따라다녀. 그럼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단 막장에게 들키지 않아야 해. 당신이 막장에게 맞아 죽어도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니까.”

“ 허! 좋다. 밑져야 본전이까. 그럶 다음에 보자.”

피식 미소를 흘린 허일구는 조금 전에 나왔던 숲으로 몸을 날려갔다.

“ 그 가슴 큰 아가씨도 오십 만 냥을 주면 좋겠는데.”

문득 잠룡쟁패를 가져갔던 소녀가 떠올랐다.

그녀도 방금 그 노인네처럼 오십만 냥을 준다면 아버지가 준 돈까지 합치면 전부 백오십 만냥이 되고, 그 정도면 아쉬운 대로 만족스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집도 좀 큰 걸로 바꾸고, 애마도 최고급으로 바꾸면. 완벽한 황금백수네......”

무슨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 연우강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끄응!”

“ 어이구! 이 자식 체력도 좋네.”

막장이 깨어나는 듯하자 연우강은 그의 등 위로 풀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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