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남궁운화
- 잠룡쟁패를 숨기는 법.
첫째, 사타구니나 가슴은 적이 가장 먼저 뒤지는 곳이므로 무조건 피해라. 네가 고통을 견딜 자신이 있다면 피부를 떠내고, 그 안에 넣어 가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다.
둘째, 잠룡쟁패와 따로 가라.
심부름꾼 또는 표국을 이용해서 잠룡쟁패를 보내고, 너는 뒤따라 가든지 먼저 가서 기다려라. 그때는 반드시 네게 잠룡쟁패가 있다는 것처럼 보이도록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셋째.........
.........
아홉째, 남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숨겨라. 더불어 너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알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 잠룡쟁패를 얻는 법’이라는 책이 들어 있는 보자기를 남궁운화는 꼭 틀어쥐었다. 남궁세가의 꿈이, 아니 자신의 꿈이 그 책 안에 들어 있었다.
“ 반드시 그것들을 찾아내서 남궁세가를 다시 최고의 가문으로 만들겠습니다. 아버지.”
남궁세가의 재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이다.
남궁세가의 몰락은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만 해도 남궁세가는 무림 최강의 가문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할아버지 창궁무제 남궁우문은 대야벌 삼궐의 한 곳인 무궐의 궐주였으니 그러한 평가는 당연했다.
하지만 영광의 시절은 삼 년을 넘기지 못했다.
남궁세가 최강 조직이었던 천뢰단과 함께 팔황정벌에 나섰던 할아버지는 중원으로 귀환하지 못했던 다른 이들처럼 전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남궁세가 최강 무인을 잃은 남궁세가는 급격히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나마 전대 궐주의 가문이라며 무궐에서도 여러모로 배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배려는 이삼 년을 넘기지 못했고, 권력을 잃은 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남궁세가 또한 대야벌을 떠나야 했다.
문제는, 대야벌을 떠나는 와중에 중요한 비급을 챙기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아니 그 당시에는 그런 비급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야 옳다.
할아버지를 최강 무인의 반열에 올려 주었던 창궁대연신공과 작은 아버지와 천뢰단이 익힌 천뢰제왕신공.
그 두 권의 비급이 대야벌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알려주셨다.
물론 두 비급의 진본은 남궁세가에 있다.
하지만 창궁대연신공과 천뢰제왕신공은 삼백 년 전에 창안된 무공이고 몹시 난해하다.
지난 세월 동안 그 비급들을 완벽하게 해석해 낸 사람은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유일하다.
그분들이 해석한 해설서가 바로 대야벌 두 비고 어딘가에 보관대 있다는 것이었다.
“ 난 그것들을 찾아 남궁세가를 다시 세우고 말 겁니다. 아버지.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줄 겁니다.”
“ 접니다. 가주님.”
어둠 속을 노려보고 있을 때 앞에서 조용한 움직임과 함께 경장 차림의 노파가 다가왔다. 노노태세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남궁운화의 유모였다.
“ 어때?”
노노태세가 다가오자 남궁운화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 심상치가 않습니다. 가주님. 아무래도 길을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
노노태세는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후회막급이었다.
지금 남궁운화를 비롯한 남궁세가 무인들이 있는 이곳 망탕산은 북쪽의 탕산과 남쪽의 망산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그녀가 망탕산을 통해 대야벌로 가려고 한 이유는 길이 은밀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나라를 세웠던 유방의 고사가 한 몫 했다.
유방은 이곳 망탕산에 있을 때만 해도 산적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가 훗날 한나라를 세워 한 고조가 됐다. 자신 또한 그런 유방을 닮고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곤란에 빠지고 만 듯했다.
챙! 채챙! 챙챙!
“ 크악!”
“ 아악!”
어둠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자 남궁운화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휙! 휘휙!
바로 그때 앞쪽에서 다섯 명이 이편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 가주님, 피하셔야겠습니다.”
남궁운화의 육촌으로 창궁대 대주 창룡검 남궁수인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한바탕 접전을 치른 남궁수인의 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적은 얼마나 돼죠?”
“ 나타난 자들은 문제가 아닌데, 소란이 일어나면 다른 적을 불러들이게 될 것 같습니다.”
“ 저기다. 저기에 잠룡쟁패가 있다!”
남궁수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 대주, 보름 후에 개봉 상국사에서 만나세.]
노노태세는 남궁운화의 허리를 낚아채 자리를 뜨면서 전음을 보냈다.
[ 알겠습니다. 노노.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 너희들도 가주님을 따라가라.”
남궁수인은 따라온 네 명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창궁대 최고 실력자들인 창궁사수였다.
“ 알겠습니다. 대주님.”
고개를 숙인 네 명은 노노태세가 날아간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놈들을 막아!”
남궁수인은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 어때, 피를 보니까 피가 끓지?”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
조금 전, 외침이 들려왔던 곳에서 소곤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지금 일을 꾸민 당사자인 막장과 연우강이었다.
“ 잠룡쟁패를 몸에 지니고 있는 지는 확인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 사람이 너다.”
“ 알았어. 자식아, 업혀라.”
막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등을 내밀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무공 좀 익히는 건데.”
연우강은 천연덕스럽게 말하고는 막장의 등에 업혔다.
‘ 헉!’
연우강을 업었던 막장은 급하게 헛바람을 삼켰다. 녀석을 업자마자 다리가 휘청댔던 것이다.
“ 왜 그래?”
“ 아, 아니다. 열심히 무공을 익히면 십 년 뒤엔 이류 무사는 될 수 있을 거다.”
막장은 얼른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비로소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 뭘 처먹었기에 이렇게 무거워?’
막장은 내심 투덜대며 몸을 날렸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 진동이 너무 심해, 인마. 그 풀잎 위로 달린다는 초상빈가 하는 경공은 뒀다가 국 끓여먹을 참이냐?”
“ 개자식.”
막장은 욕설을 뱉어내며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풀잎을 밟으며 쭉쭉 나아갔다.
“ 진동도 없고, 소음도 거의 없고, 초상비가 최고네. 내 애마도 이럼 좋은데.”
“ 애마?”
“ 설리총 네 마리가 끄는 마차.”
마치 나무들이 덮쳐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빨랐지만 막장의 몸에서는 어떤 파공성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일 각여를 그렇게 달려가자 앞서가던 노노태세 일행이 시야에 잡혔다.
“ 저들이 좀 더 속도를 내게 해. 막장.”
“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막장은 나아가던 방향과 반대로 몸을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익! 막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휘파람 소리가 밤하늘을 타고 퍼져나갔다.
“ 빌어먹을 놈들!”
노노태세는 더욱 속도를 냈다.
“ 내려 줘. 노노.”
“ 안 됩니다. 가주님. 가주님은 진력을 보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남궁운화를 안고 가는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이 잘못되면 혼자서라도 대야벌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 날 안고 있으면 노노도 얼마 버티지 못해. 내가 대야벌로 가기 위해서는 노노는 물론이고 창궁사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 하지만....”
“ 노노!”
“ 알겠습니다. 가주님.”
남궁운화가 엄하게 부르자 그제야 노노태세는 포기한 듯 내려주었다.
남궁운화를 내려놓자 일행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나뭇가지에 옷이 찢겨나가고, 얼굴에 생채기가 났지만 여섯 명은 나아가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휘이익!
상당히 강자가 따라붙은 듯 휘파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행은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남궁운화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절벽이 나타나면서 계곡의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 어쩌면 숨을 만한 곳이 나타날 수도.’
그녀는 내심 중얼거리며 좌우를 살폈다.
무작정 이렇게 도망칠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뒤따르는 자들을 따돌려야만 좀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달린 지 한 시진이 지나자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흘끔 고개를 돌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 창궁사수의 입술 사이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노노태세의 입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제발......’
전면으로 시선을 주었던 남궁운화의 눈이 반짝 빛났다. 계곡이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꺽인 지형이 나타난 것이었다.
“ 노노 저 모퉁이를 지나쳐간 다음에 곧바로 위로 올라가.”
“ 쉴 시간이 없습니다. 가주님.”
“ 쉬지 않으면 망탕산을 나가기도 전에 우리가 당하고 말아. 몸을 추스르는 게 먼저야.”
“ 끄응!”
노노태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남궁운화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남궁운화나 자신보다는 오히려 뒤따르는 창궁사수가 더 급했다. 녀석들의 숨소리로 짐작컨대 지금 상황에서 내공을 더 뽑아내면 주화입마에 들 것만 같았다.
[모퉁이를 돌면 곧바로 위로 올라가라.]
뒤따르고 있는 창룡사수에게 전음을 보내 노노태세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곧바로 오른편 절벽으로 솟구쳐 올랐다. 다행스럽게도 계곡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지 삼 장 가량 올라가자 조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공터 안쪽에는 짐승의 얼굴로 보이는 작은 동굴도 있었다.
휙!
노노태세에 이어 공터로 올라온 남궁운화는 내려서자마자 위쪽을 살폈다. 위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상황이 급하면 그곳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을 듯했다.
“ 저곳에서 쉬십시오. 가주님.”
노노태세는 동굴을 가리켰다. 절벽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꽤나 매서워서 얼굴이 얼얼할 정도였다.
“ 알았어.”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 절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 제가 감시하겠습니다.”
맨 나중에 올라온 창궁사수의 대형 우창준이 계곡 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엎드렸다.
휘이익!
또다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자 일행은 긴장한 얼굴로 왼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노노태세는 고개를 갸웃했다.
휘파람 소리에 어린 내공으로 보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우리가 너무 예민하게......”
“ 옵니다. 가주님.”
마음을 풀려는 순간 우창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몇 명이지?”
“ 한 명입니다. 그런데.......”
“ 한 명이라고?”
노노태세는 엉금엉금 기어서 우창준 곁으로 다가갔다.
“ 응?”
노노태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계곡을 따라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달려오고 있었는데, 한번 움직일 때 이동 거리가 삼 장에 불과했다. 저 정도 경공이면 지금껏 달려온 것까지 감안한다면 크게 위협이 될 만한 자는 아니었다.
“ 노노님.”
우창준 또한 그러한 사실을 간파하고는 노노태세를 보았다.
“ 잠시만 기다려라. 일행이 있을지도 모른다.”
노노태세는 사내를 주시했다. 이편을 향해 달려오던 사내는 동굴 아래쪽까지 와서는 속도를 늦췄다.
‘ 그냥 가라. 그냥 가면 너도 살고 우리도 산다.’
노노태세는 내심 중얼거렸다.
“ 누구냐?”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헛되이 끝나고 말았다.
“ 헉!”
느닷없이 아래쪽에서 고함이 들려오자 잔뜩 긴장해 있던 우창준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내고 만 것이다.
“ 젠장 없애!”
우창준은 아래쪽을 향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휙! 휘휙!
이어 창궁사수 세 명이 아래로 몸을 날리고, 동굴 입구에는 남궁운화와 노노태세만 남았다.
“ 하하하! 잠룡쟁패가 여기 숨어 있었구나.”
“ 죽어라!”
우창준은 곧바로 검과 함께 몸을 날려갔다.
창! 창창!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창궁사수 일행은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다지 강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금세 드러났다. 사내는 연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 노노, 빨리 끝내.”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가주님. 다른 일행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노노태세는 덩치 사내의 뒤편을 주시했다. 그러나 한참동안 기다렸지만 다른 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 혼자인 모양입니다. 가주님.”
“ 커억!”
“ 강자야, 노노. 빨리 가서 돕지 않으면 창궁사수가 당할지도 몰라.”
창룡사수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남궁운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 알겠습니다.”
휙!
적이 한 명밖에 없는데 굳이 몸을 사릴 이유가 없었다. 노노태세는 내공을 끌어올리며 아래쪽으로 몸을 날렸다.
노노태세가 아래로 내려가자 남궁운화는 가장자리로 엉금엉금 기어가 엎드린 채로 싸움을 지켜보았다.
노노태세가 가세하면서 덩치 사내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 휴우!”
남궁운화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다행..... 헉!”
뒤통수로 차가운 기운이 다가들자 남궁운화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녀는 엎드린 채 개구리처럼 뛰어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이미 뒷목의 수혈로 파고드는 암경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 누......”
그녀는 엎드린 채 나른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궁운화의 머리가 바닥에 푹 처박히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조용히 그녀 곁으로 내려섰다. 그는 잠능폐혈대법을 풀어 무공을 회복한 연우강이었다.
“ 잠룡쟁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남궁운화를 안쪽으로 끌어당겨 몸을 뒤집은 연우강은 그녀 곁에 쪼그려 앉았다.
“ 쩝! 하필이면.....”
연우강은 입맛을 다셨다.
여자 몸을 뒤져야 한다는 사실이 약간 께름칙했다. 더구나 남궁운화는 어린 소녀가 아닌가.
공연히 망설여졌다.
“ 돈은, 부처님도 웃게 만든다고 했으니까.”
이내 결심을 굳힌 듯 남궁운화의 상의로 손을 가져갔다.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내자 속에 받쳐 입는 옷이 드러났다. 그 옷은 머리에서 눌러쓰는 형태로 만들어져 벗기는 것도 반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옷 아래쪽을 잡은 채 남궁운화의 상체를 약간 들어 위로 벗겨냈다.
받쳐입는 옷을 비롯한 가슴 가리개가 목 아래까지 올라가고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 독특하네.”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막장이 받아온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열여섯 살이라고 돼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가슴은 지금껏 보았던 어떤 기녀의 가슴보다 풍만했다.
문득 전에 잠룡쟁패를 주었던 복면 소녀가 떠올랐다.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 있었던 그녀도 남궁운화만큼이나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 요즘 애들은 다 발육이 좋은 건가?”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녀의 가슴은 불가사의였다.
“ 가슴이 커서 잠룡쟁패를 숨기기는 딱 좋겠구먼.”
연우강은 가슴 좌우를 꼼꼼히 살폈다.
혹시 피부와 비슷한 무언가를 이용해 붙여 놓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팔을 들어 겨드랑이까지 살폈지만 남궁운화의 가슴 근처에는 잠룡쟁패가 없었다.
연우강은 실망한 얼굴로 옷을 여며주었다.
“ 가슴에 숨겨 두었으면 굳이 아래쪽까지 확인할 필요가 없잖아. 아가씨.”
이번엔 바지를 내렸다.
“ 이 년 전이었다면 난 아마 미친 짐승이 되고 말았을 거야.”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나신이 나타나자 연우강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풍만한 가슴뿐만이 아니라 하체 또한 완벽에 가까웠다. 지금 상태에서 키만 조금 더 자란다면 무공보다는 미모로 더 이름을 날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래쪽에도 잠룡쟁패는 없었다.
보통 중요한 물건을 숨길 때면 은밀한 부분에 전대처럼 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원래 모습 그대로였을 뿐만 아니라 허벅지에도 차고 있지도 않았다.
“ 남은 곳은 엉덩이와 등인데......”
연우강은 양손을 떠받치듯 그녀를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남궁운화의 몸이 그 자리에서 빙글 돌아 엎드린 모습이 됐다.
엉덩이 쪽도 깨끗했다. 옷 속으로 손을 밀어넣어 등까지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남궁운화의 옷을 여며 처음 자세 그대로 해 놓았다.
“ 백만 냥이 날아간......”
자리를 옮기려던 연우강의 시선이 남궁운화 오른편에 놓여 있는 보자기로 향했다.
“ 저런 곳에 두진 않겠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연우강은 보자기를 풀었다.
“ 잠룡쟁패를 얻는 법? 쿡! 저자가 누군지 몰라도 돈 좀 만졌겠네.”
어이없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이런 책이 팔리고 있을 줄ㄹ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더구나 상당히 오랫동안 보아왔는지 책장은 새카만 손때로 얼룩져 있었다.
손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 어떤 내용이 적혀 있나 볼까?”
연우강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남궁운화의 몸을 훑고도 찾아내지 못했던 돈 덩어리가 책 안에 있었다. 잠룡쟁패의 두께 맞춰 안쪽을 잘라내고 그곳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 내게 책이 있었다면 아가씨는 성공했을 텐데.”
연우강은 안타까운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지니고 있을 정도면 ‘잠룡쟁패를 얻는 법’이란 책은 대박난 책이 분명할 테고, 잠룡쟁패를 원하는 자들 대부분은 읽어 숙지하고 있거나, 남궁운화처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책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을 테다. 기발한 방법이긴 했지만 상대를 잘못 선택한 듯했다.
“ 고마워, 아가씨.”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위쪽으로 기어올라갔다.
잠시 후, 절벽 위에 도착했다.
궤짝을 걸머진 연우강은 막장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일 다경 정도 걸었을까.
[나다.]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들고 있던 잠룡쟁패를 전음이 들려왔던 곳으로 던졌다.
[ 잠룡쟁패를 훔친 그녀가 누구인지 아느냐?]
“ 내가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어?”
연우강은 모른 척 했다.
[ 잠룡쟁패는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의 가문의 꿈이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자결할지도 모른다.]
“ 예쁘게 생겼던데 그럼 안 되지. 그런데 노인장은 그녀를 잘 아는 것 같은데, 맞아?”
[ 십 년 동안 그 집안 일을 해줬다.]
전에 연우강의 위치를 남궁운화에게 가르쳐준 가람이 자신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번엔 연우강에 당해 잠룡쟁패를 다시 빼앗기고 만 것이다.
공연히 마음이 착잡했다.
“ 그럼 보통 인연이 아니겠네?”
[ 솔직히 그렇다. 그동안 도움도 많이 받고 해서 가급적이면 그녀를 돕고 싶다.]
“ 그럼 도로 그 아가씨에게 팔아.”
[ 파, 팔라고?]
“ 대야벌이 가까워질수록 잠룡쟁패의 값은 올라간다고 했잖아. 안면이 있다니까, 가격을 후려쳐서 이백만 냥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아.”
[ 이, 이백만 냥이라고? 그럼 가문이 거덜날 수도 있어, 자식아.]
“ 얻은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어야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야. 영감. 훌륭한 가문에, 예쁜 얼굴에, 덮치고 싶을 정도로 멋진 몸매에, 엄청난 재산, 거기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까지 ... 그건 너무 불공평한 거야. 그리고 영감도 남 걱정할 주제는 아니잖아.”
[ 내가 그녀에게 말을 해버릴 수도 있다.]
“ 나도 노인장의 정체에 대해 알아봤어. 공공수 허일구. 하오밀문의 문주인 동시에 공공문의 문주라고 하던데?”
“ 으음!”
숲 속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와. 막장에게 들키면 바로 죽음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아악!”
남궁운화가 있던 자리에서 비명과 함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그의 신형은 이내 숲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지독한 놈!’
허일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노노!”
남궁운화는 울먹이는 얼굴로 노노태세를 불렀다.
“ 제 불찰입니다. 가주님!”
노노태세는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대단한 놈들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래쪽에서 싸우고 있으면 남궁운화는 당연히 엎드려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바람까지 제법 세차게 불고 있어 기척을 숨기기엔 더없이 좋은 요건이다. 그런 상황에서 남궁운화의 수혈을 짚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터였다.
“ 가주님이 무사하신 걸로 됐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일 잠룡쟁패와 더불어 남궁운화까지 납치됐다면 설사 자결을 한다고 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 그, 그게....”
남궁운화는 더듬거렸다.
아무리 무딘 여자라고 하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모를 리가 없었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였지만 몸 곳곳에 타인의 손길이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아래쪽 은밀한 곳까지도 그러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궁운화가 더듬더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은 노노태세도 알고 있었다.
“ 너무 쉽게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주님. 아직 잠룡쟁패에 대한 정보가 몇 개 더 있으니까, 포기할 때는 아닙니다.”
그녀는 남궁운화를 달래려 화제를 돌렸다.
“ 알았어. 노노.”
남궁운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노 말이 맞다. 누가 몸을 더듬었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잠룡쟁패를 얻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스르릉!
그녀는 검을 뽑았다.
푸른 단면을 가진 그 검은 남궁세가의 가주임을 나타내는 창궁검이었다.
“ 잠룡쟁패를 얻어 대야벌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검을 검집에 넣지 않을 거야. 노노.”
남궁운화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 그렇고 말고요. 그래야 합니다. 가주님!”
노노태세는 감격한 눈으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어린 시절에 가주 직위를 물려받은 그녀는 온실의 화초처럼 키워졌다. 대부분의 일은 원로들이 알아서 처리했고, 그녀는 원로들이 내린 결정에 직인만 찍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원로들의 의견을 거부하고 나섰던 것이 바로 이번 일이다. 잠룡대전에 참여하여 대야벌로 가겠다는 그녀를 원로들은 극구 말렸다. 어린 가주가 위험하다는 핑계를 달았지만 실상은 섬전십삼검 남궁철상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자, 그들은 못이긴 척 청년들로 이루어진 창궁대를 지원해 주었다.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올 거라고 여긴 듯했다. 그런데 남궁운화가 드디어 알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소녀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가주로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가주는 이번 잠룡대전을 통해 잠룡쟁패보다 더 큰 걸 얻고 있는 셈이었다.
“ 가, 노노!”
남궁운화는 아래로 훌쩍 몸을 날렸다.
“ 알았습니다. 가주님.”
노노태세는 활기차게 소리치며 남궁운화를 따랐다. 여섯 명이 사라진 주변으로 어스름을 깨며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없더라.”
모닥불을 피운 연우강은 약탕기를 올려놓고는 한편 공터로 자리를 옮겨 몸풀기를 시작했다.
“ 없었다고?”
“ 응! 온몸을 샅샅이 뒤졌는데 없었어.”
“ 정말 샅샅이 뒤진 거냐?”
“ 그래 자식아. 본의 아니게 눈만 호강했다.”
“ 어린애를 두고 호강은 무슨......”
“ 그건 네 말이 맞다. 그런데 솜털도 안 빠진 어린애가 강호에 나올 이유라도 있는 거냐?”
남궁운화의 알몸을 떠올리던 연우강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몸풀기에 집중했다.
“ 그 아이 할아버지가 삼십 년 전에는 무궐의 궐주였다.”
“ 장만본가 하는 촌스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벌주를 하던 그 시절?”
“ 응, 그때 벌주와 함께 팔황정벌에 올랐던 사람인데 돌아오지 않았다.”
“ 그 양반도 실종?”
“ 그런 셈이지. 그 바람에 남궁세가는 대야벌에서 밀려나고 몰락했다.”
“ 남궁세가엔 잠룡쟁패를 주지 않는 거냐?”
“ 자격이 되는데도 주지 않는 곳이 몇 곳 있는데, 남궁세가도 그런 가문들 중 한 곳이다.”
“ 들어오면 복잡해지니까 아예 막아버린다는 뜻이야?”
“ 그런 의미도 있고 그들이 잠룡쟁패를 얻기 위해 나서게 되면 잠룡대전을 좀 더 활성화시킬 수 있으니까.”
“ 그럼 그 큰 아이는 권토중래를 위해 잠룡쟁패를 얻으려고 하는 모양이네?”
“ 뭐가 크다는 거지?”
“ 그런 게 있어.”
“ 자식. 싱겁기는. 여하튼 남궁세가 입장에서는 대야벌로 들어가는 게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거니까.”
“ 그런데 남궁세가 그치들 너무 약한 거 아냐?”
문득 막장과 싸웠던 자들이 떠올랐다.
삼류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하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 남궁세가 노친네들은 섬전십삼검 남궁철상이란 녀석을 밀고 있어서 그럴 거다.”
“ 재미있는 집안이네.”
“ 재미있는 집안이 아니라 정신 빠진 집안이지.”
“ 왜?”
“ 가문은 곧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그 와중에도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들을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막장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 원래 먹이가 부족하면 짐승들은 더 흉포해지기 마련이잖아. 권력의 속성도 그런 거야.”
“ 그런가? 그런데....”
막장은 피식 웃으며 약탕기로 시선을 주었다.
녀석은 지금껏 밥을 굶는 적은 있어도 약은 결코 거르지 않았다. 문득 어떤 지병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어서 그래.”
“ 그, 그 정도로 심각한 병이냐?”
막장은 측은한 얼굴로 물었다.
“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야. 그건 그렇고 다음에 갈 곳은 어디냐?”
“ 한 개는 민권에 있고, 다른 것들은 민권 남쪽 기현 부근에 몰려있다.”
모닥불 앞으로 다가간 막장은 나뭇가지를 꺾어 집어넣으며 말했다.
“ 실전 경험은 효과를 보는 것 같냐?”
“ 그다지.”
“ 아무래도 피가 부족해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부터는 마음껏 쳐죽이자.”
“ 싸우는 건 나잖아. 자식아.”
“ 어찌 됐든 우린 공범이잖아.”
“ 공범?”
막장은 불안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자꾸만 녀석에게 엮여 들어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더불어 이번 일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 힘이 없어서 그런데 그 약좀 짜 줄래?”
연우강은 환하게 웃으며 약탕기를 턱으로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