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7화 (7/232)

제7장 전장의 철칙

‘ 잠룡쟁패를 지닌 자가 곧 대야벌의 제자다!’

‘ 잠룡쟁패를 지니는 순간 과거는 사라진다.’

정, 사, 마, 선인, 악인을 가리지 않고 혈안이 돼 잠룡쟁패를 얻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대야벌의 제자라는 말은 성공을, 과거는 사라진다는 말은 곧 면죄부를 뜻한다. 한때 강호 공적이었던 자도 잠룡쟁패를 쥐고 대야벌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대야벌의 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신분이 된다.

한때 강호 공적이었던 자가 개심을 하여 선한 인물이 됐는지 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대야벌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는 강호 공적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분 세척기.

악인들이 잠룡쟁패를 그렇게 부르며 혈안이 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추백낙은 그들과 달랐다.

젊은 날의 별호였던 색도광랑을 버리고 이제는 설산정응이라는 별호로 살고 있는 그는 잠룡쟁패를 얻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했다.

먼저 그가 한 일은 대설산 근처에 가문을 세우는 것이었다. 설산추가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짓고 주변 마을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세력을 확대하다 보니 산적과 부딪치는 것은 당연했고, 그들을 없애는 와중에 설산정응이란 그럴듯한 별호도 얻었다.

아주 재미있는 일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 바뀐 건 별호뿐이었는데 누구도 날 의심하지 않더란 거지.”

추백낙은 빙그레 웃었다.

가문을 세우기 위해 산적을 토벌했을 뿐 마을 사람들을 위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산적을 토벌하는 와중에도 시간이 나면 취미생활을 즐겼다. 취미생활의 결과인 간살 시체가 곳곳에 생겨났지만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다 만난 자들이 대설산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얻고 있던 설산팔검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명성만 날리고 있었을 뿐 설산팔검은 가진 게 없었다. 그들에게 설산추가로 들어와 함께 할 의향이 있는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합류했다.

설산팔검까지 들어오자 설산추가는 욱일승천했다.

그리고 가문으로 내려온 시눕ㄴ 세척기, 잠룡쟁패.

물론 수양아들인 추일룡에게 내려진 것이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신분을 약속하는 징표였다.

“ 앞으로 너 같은 촌 계집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계집의 순음지기를 취할 것이다. 그럼 난 점점 강해질 테고 설산정응이 아니라 무림정응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세상은 그런 거였다. 그럴싸한 신분으로 포장만 잘하면 어떤 짓을 해도 용서가 되는 그런 곳이었단 말이다.”

힘차게 엉덩이를 움직이는 추백낙 아래쪽엔 이제 갓 열다섯 살쯤 됐을 법한 산골 소녀가 깔려 있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듯 소녀의 머리는 추백낙이 움직일 때마다 힘없이 흔들렸다.

“ 흐흐흐! 이제 이 추백낙의 시대가 올 거다. 무공을 익힌 계집들의 순음지기를 흡수하면 난....”

절정에 달한 듯 추백낙의 동체가 뻣뻣하게 굳었다.

더불어 아래쪽에 있던 소녀의 얼굴에서 급격하게 생기가 빠져나갔다. 추백낙은 지그시 눈을 감고 순음지기가 밀려들어오면서 주는 쾌락을 음미했다.

그가 순음지기를 지닌 처녀를 간살해야만 하는 채화흡정공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쾌락 때문이다. 순음지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쾌락은 배가 되고, 그 어떤 쾌락보다 강렬하여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 약하군.”

추백낙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중얼거렸다.

절정을 맛보긴 했지만 약간의 찜찜함이 남았다. 그건 계집의 순음지기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 아직 계집들은 많으니까.”

“ 저 자식 대설산에서 목에 힘깨나 준다고 하지 않았냐?”

“ 헉!”

옷을 추스르던 추백낙의 손이 우뚝 멈췄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화전민 마을에서 이백여 장 떨어진 계곡이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왔던 마을 계집을 납치하여 은밀하게 이곳으로 왔다.

누군가 있을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 기록에 의하면 설산정응은 대설산 주변에서 존경받은 사람이라고 돼 있는 것 말고는 나도 모른다.”

이번엔 약간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냐?”

추백낙은 날카로운 눈으로 어둠 속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 저 아이는 죽은 거냐?”

“ 흡정대법에 당했으니까 죽었을 거다.”

“ 조금만 빨리 올 걸 그랬네. 그럼 저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 개자식들!”

옷을 다 입은 추백낙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아직은 설산정응이란 별호를 잃을 때가 아니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설산정응으로 살기 위해서는 간살 장면을 목격한 놈들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할 터였다.

“ 저 자식에게는 없겠지?”

“ 지금껏 정체를 숨기고 산 걸 보면 음험한 놈이니까 다른 방법으로 옮기고 있을 거다.”

“ 그래도 죽이진 마.”

연우강은 막장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알았다.”

쐐액!

막장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암경이 밀려들어 왔다.

막장은 오른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 미친 놈!”

추백낙은 비릿한 조소를 물었다.

방금 날린 검은 푸른 알갱이들은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사용하는 청사라고 불리는 암기다.

독이 잔뜩 발라져 있는 그것은 닿기만 해도 죽음에 이른다고 하여 촉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청사로 위기를 벗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 그럴까?”

막장은 차갑게 웃었다.

일순 내민 그의 손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검게 변한 손이 둥글게 원을 그리자, 푸른색 암기가 전부 그의 손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 헉!”

추백낙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놈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 간 청사가 가루가 돼 바닥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 감당하기 힘든.....”

추백낙은 나아가던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뒤편으로 몸을 튕겼다.

퍼억!

그러나 채 몸을 빼기도 전에 둔탁한 소리가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막장의 별호 앞에 철장이 들어가게 하였던 철살장이었다.

“ 커억!”

순음지기를 꾸준히 흡수하여 내공을 증진시켰다고 하지만 상대는 대야벌의 백대 고수.

추백낙은 단 일수에 피를 토하고 나가떨어졌다.

“ 저 자식 대설산에서는 제법 한가락한다고 하지 않았냐?”

연우강은 어이없는 얼굴로 막장을 보며 물었다.

“ 저놈이 약한 게 아니라 내가 강한 거다. 백대 고수란 말이 공연히 있는 게 아니야, 자식아.”

“ 백대고수는 무슨, 내가 보기엔 허수아비하고 맞장 뜨면 딱 어울리는 수준이드만.”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추백낙 앞으로 걸어갔다.

“ 무공도 없는 놈이, 보는 눈만 높아서는. 심문은 네가 할거냐?”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우강을 따라갔다.

“ 공범은 일을 나눠 하는 거야.”

연우강은 궤짝을 내려놓고는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따. 그것은 땅을 팔 때 사용하는 괭이였다.

“ 도대체 그건 뭐냐?”

막장은 연우강의 손에 들린 괭이를 멀뚱히 보았다.

앞쪽은 분명 괭이인데, 괭이 등에는 창두처럼 뾰족한 날이 달려 있었다. 그동안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농사지을 때는 쓰는 괭이잖아.”

“ 괭이는 자루가 나무로 돼 있고, 자루 크기도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건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 특별한 건 아냐. 군에서 작전 나갈 때 쓰는 건데 그냥 손괭이라고 불렀어. 부러지면 안 되니까 전부 쇠로 만든 거고.”

연우강은 손괭이를 가볍게 휘두르며 말했다.

“ 때로는무기로도 사용하고?”

막장은 손괭이의 날을 자세히 살폈다.

많이 무뎌진 듯 보였지만 전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작전을 나갈 때 박도하고 손괭이의 날은 확실하게 세워야 해.”

연우강은 손괭이 날을 슬슬 쓰다듬으며 추백낙 앞으로 다가갔다.

“ 누, 누구요?”

추백낙은 겁먹은 얼굴로 말을 뱉었다.

어떻게 맞았는지 내공이 끌어올려지지 않을뿐더러 몸도 움직일 수가 없다.

“ 네 수중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넌 불기만 해.”

“ 뭐, 뭘 말이오?”

“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연우강은 추백낙을 내려다보며 손괭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 무, 무슨.....”

퍼억!

“ 크아아악!”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순전히 추백낙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무릎 뼈가 으스러지며 몸이 훌쩍 뛰어올랐다.

“ 너무 고깝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원래 만 땅에서 그 짓을 열심히 하면 무릎이 까져야 하잖아. 그런데 넌 아직 무릎이 까지지 않았단 말이지.”

연우강은 다시 손괭이를 들어 올렸다.

“ 호, 혹시 잠.....”

퍼억!

“ 크아아악!”

이번에도 역시 추백낙은 펄쩍 뛰며 비명을 내질렀다.

“ 누구를 통해 보냈는지 말해라. 설산정응.”

연우강은 다시 손괭이를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 사, 살려주십시오. 전부 말할 테니까 살려주십시오. 대협.”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양민이나 무인이나 다르지 않았다. 채화흡정대법으로 인해 어린 소녀를 간살하고 쾌락에 몸을 떨었던 추백낙은 단 두 방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다.

“ 어떤 놈에게 보냈는지 그것만 말하면 된다. 추백낙.”

연우강은 다시 손괭이를 들어올렸다. 이번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추백낙의 어깨였다.

“ 뭐하고 있어?”

연우강은 멍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막장을 향해 소리쳤다.

“ 네가 알아서 다 하고 있잖아.”

“ 이 자식 부하들이 올라올 시간 됐잖아. 실전 경험 쌓는 건 그만 둘 거냐?”

막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내가 이런 짓을 즐기는 변태 같아?”

“ 내가 보기엔 즐기는 것 같다.”

막장은 계곡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이거 가져가.”

연우강은 궤짝 안에서 검은 천을 꺼내 막장에게 던졌다.

“ 뭐냐?”

“ 복면.”

“ 얼굴을 가리라고?”

“ 그럼 철장마도 막장이라고 광고할 일 있어?”

“ 수염으로 숨겼잖아.”

“ 이젠 본격적으로 무공을 사용하게 될 텐데 조심해야지.”

“ 알았다.”

막장은 복면을 푹 뒤집어썼다.

“ 처, 철장마도란 말이냐?”

추백낙은 박살난 무릎에서 오는 고통을 잊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철장마도 막장.

설마 대야벌 백대 고수의 한 명인 그가 이곳에 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넌 지금 막장 저놈 걱정할 처지가 아니잖아.”

문득 생각난 듯 연우강은 들어올리고 있던 손괭이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 크아악!”

괭이 뒤쪽에 달린 창두처럼 생긴 뾰족한 날이 추백낙의 심장으로 파고들어 갔다.

“ 가주님!”

“ 아버지!”

“ 가주님!”

계곡 입구로부터 추백낙을 부르는 외침이 들려오며 백여 명이 안쪽으로 몸을 날려왔다.

“ 후욱!”

막장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안쪽으로 달려오는 자들의 선두에 선 여덟 명은 설산팔검이라 불리는 제법 유명한 자들이고, 그들을 따르는 일백 명은 설산추가의 정예인 설산검대다.

“ 나쁘진 않군.‘

솜털이 곧추서는 듯하며 알 수 없는 흥분이 온몸을 적셔왔다. 막장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기분을 언제 느껴보았던가.

지금은 상관이 된 율령궁의 궁주 군자무림행 우담보 궁주와 비무 때 지금과 같은 기분을 맛봤다. 물론 그때는 흥분이 아니라 한없이 강해 보였던 우담보 궁주의 무공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솜털이 곤두섰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 무슨 뜸을 그렇게 들여, 인마. 구경꾼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해야 할 거 아냐!”

“ 알았다. 자식아!”

뒤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막장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방으로 달려갔다.

“ 우! 하하하! 나랑 한판 붙자 자식들아!”

달려가는 막장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 미친놈이네!”

설산팔검의 대형인 천수비검 유형목은 계곡 안쪽을 살폈다. 추백낙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 저건?”

유형목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달려오는 자 뒤편에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한 탓이었다. 발가 벗겨져 있는 여자와 가주 추백낙이었다.

“ 저 음적놈이 가주를 해하였다. 죽여라!”

설산정응 추백낙을 정인군자로 여기고 있는 유형목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있던 일곱 명이 막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유형목을 제외한 설산팔검 칠 인이었다.

“ 음적은내가 아니라 추백낙이었다. 이놈들아!”

막장은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철살장이 펼쳐지자 그의 전면은 온통 검은 손그림자로 들어찼다.

“ 조심해라!”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려가려던 유형목이 질겁하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검은 손 그림자에서 거력을 감지한 탓이었다.

퍽! 퍽퍽!

“ 크악!”

“ 아악!”

“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막장을 향해 몸을 날렸던 세 명이 튕겨지듯 나가떨어졌다. 함몰된 그들의 가슴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저럴수가?”

유형목은 경악한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장력에 상당한 힘이 내포돼 있다는 사실은 조금 전 감지했다. 하지만 일곱 동생들 또한 자타가 인정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맨 앞에 있던 둘째와 넷째 여섯째가 한꺼번에 당하고 만 것이다.

“하하하! 덤벼라. 놈들!”

막장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양손을 뿌려댔다.

“ 설산 검대는 놈을 막아라!”

바로 그때 뒤편에서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부하들을 독려하는 그는 추백낙의 수양아들이자 잠룡쟁패의 주인이기도 한 낙일설산검 추일룡이었다.

“ 와아!”

“ 놈을 없애라!”

설산대검 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막장을 향해 달려갔다.

“ 숙부, 놈을 맡아주십시오. 전 저 뒤에 있는 놈을 잡겠습니다.”

추일룡은 유형목을 향해 소리쳤다.

추일룡 또한 머리가 나쁜 자가 아니었다. 그는 장내를 훑어보는 순간 뒤편에 앉아 있는 연우강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유형목을 향해 소리친 이유는 안쪽으로 들어가 연우강을 잡겠다는 것보다는 막장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 이런 젠장.”

막장은 움찔했다.

잔뜩 흥분하여 연우강이 무공을 익히지 못한 양민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였다.

“ 그랬구나.”

추일룡의 눈이 악독하게 빛났다.

설산팔검 중 세 명을 일 초에 없애 버린 놈의 약점은 바로 뒤편에 앉아 있는 젊은 녀석이었다.

[ 유 숙부, 놈을 맡아주십시오. 전 기회를 봐서 저 뒤에 앉아 있는 놈을 잡겠습니다.]

추일룡은 유형목에게 전음을 보냈다.

[ 알았다.]

“ 동생들, 놈을 막아라!”

유형목은 막장을 향해 날아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 죽여라!”

“ 놈을 없애라!”

설산팔검의 남은 네 명을 비롯한 설산검대 대원들은 분개한 얼굴로 소리치며 막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적인 우세를 믿고 취한 행동이었다.

“ 난 저 녀석에게 기회를 줘야겠네.”

막장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궤짝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슬쩍 슬쩍 이동하는 그를 보면 겁먹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연우강을 지켜보던 추일룡이 막장의 시선을 피하며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 아악!”

“ 으악!”

“ 크아악!”

그러한 와중에도 설산검대 대원들의 비명이 쉬지 않고 터져나왔다.

[ 숙부님. 좀 더 거칠게 공격해 주십시오.]

추일룡은 굳은 얼굴로 유형목에게 전음을 보냈다.

[ 시작해라. 일룡아. 놈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어야 승산이 있다.]

[ 알았습니다. 숙부.]

유형목의 전음에서 다급함을 느낀 추일룡은 황급히 몸을 날렸다.

“ 죽이겠다, 놈!”

십여 장 남겨둔 지점까지 몸을 날려가자 추일룡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멈춰라!”

막장은 당황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크악!”

“ 아악!”

“ 으아악!”

그의 철살장이 작렬할 때마다 설산검대 대원들은 피 떡이 돼 쓰러졌다. 하지만 적은 수는 생각보다 많았고, 뒤편에 있는 연우강 때문에 그의 손속은 금세 흐트러졌다.

스악!

허리 어림에서 뜨끔한 느낌이 왔다.

“ 개자식들!”

막장의 입에서 거친 포효가 흘러나왔다.

그는 달려드는 적의 목을 꺾으며 설산검대 대원이 들고 있던 검을 잡아챘다.

“ 놈이 흔들린다. 더욱 거세게 몰아쳐라!”

“ 차앗!”

막장의 손에 들린 검이 맹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것은 철혈전궁도법의 일초인 참절이었다.

“ 크악!”

“ 아악!”

후두득!

잘린 팔다리가 사방으로 날리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 연우강, 피해라! 타아!”

막장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이초인 파절을 펼쳤다.

퍼억!

그러나 검은 그의 내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철혈전궁도법이 지닌 특성 때문이었다.

철혈전궁도법은 무기 안에 내기를 차곡차곡 쌓아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 폭발시키듯 외부로 쏟아내는 무공이다.

완벽한 철궁전궁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내공을 견디는 무기가 필수다. 그런데 그가 빼앗은 무기는 흔한 천강검이었다.

일초인 참절을 펼칠 때 금이 가 있던 검은 이초인 파절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 것이다.

“ 차앗!”

당황한 막장을 향해 설산팔검의 남은 자들이 검과 하나가 돼 날아갔다.

“ 연우강!”

막장은 다시 고함을 내지르며 양팔을 휘둘러 철살장을 펼쳤다.

스악! 스윽!

하지만 연우강 때문에 정신이 분산돼 철살장에 완전한 내력을 싣지 못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그의 허리와 팔이 쩍 갈라지며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개자식들!”

막장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검은 천으로 싸 허리에 걸어두었던 철혈전궁도를 거칠게 뽑아들며 연우강을 향해 내달렸다.

찌익!

천이 찢겨 나가며 철혈전궁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음이 급했다. 이미 자신을 우회해 간 추일룡이 계곡 안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연우강을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 어림없다. 악적!”

설산검대 대원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막장의 전면을 막아섰다.

“ 죽여버리겠다. 개자식!”

막장은 짐승처럼 포효하며 철혈전궁도를 번쩍 치켜들었다.

번쩍!

철혈전궁도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곧 앞을 막아선 자들에게로 작렬했다.

“ 크악!”

“ 아악!”

“으아악!”

후드득!

“ 서, 설마 저자는.....”

유혀옥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푸른 광채를 동반한 채 상대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무공. 그것은 대야벌 백대 고수의 한 명인 철장마도 막장의 성명 절기인 철혈전궁도법이었던 것이다.

“ 왜?”

번쩍!

유형목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진득한 살기를 내포하고 있는 푸른 광채가 대신했다.

또다시 비명과 잘려나간 살점과 피가 난무했다.

유형목은 추일룡을 돌아다보았다. 이제 믿을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가 연우강을 인질로 잡아야만 막장의 철혈전궁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 그놈을 잡아와라, 일룡아!”

막 연우강의 앞에 도달한 추일룡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추일룡은 갈등했다. 앞에 있는 놈이 연우강이란 사실을 알았으니 그를 잡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놈을 인질로 잡는다고 해서 막장의 손을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병신 같은 놈.”

추일룡은 조금 전 보았던 추백낙의 시체를 떠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추백낙 옆에 죽어 있던 계집은 의부의 무공이자 자신도 익히고 있는 채화흡정대법에 당한 상태였다. 막장이 설산추가 무인들을 공격한 이유가 바로 의부의 악행 때문이었다.

“ 놈은 절대 나를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턱!

추일룡은 연우강의 뒷덜미를 잡아 채자마자 계곡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연우강으로 막장을 협박하는 것보다 인질로 삼아 도망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 으어엉!”

막장의 포효가 들려오자 추일룡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 너도 흡정대법인가를 익혔나?”

“ ......?”

추일룡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과 연우강밖에 없는 상황이고, 자신은 말을 하지 않았으니 방금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연우강이란 소리다.

“ 흡정대법을 익혔냐고 물었잖아. 인마.”

“ 미친 새끼,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추일룡은 피식 웃으며 몸을 날렸다.

“ 그럼 익혔다는 말이네. 그런데 지금 잠룡쟁패는 가지고 있는 거야?”

“ 내가 널 살려줄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추일룡은 조소 띤 얼굴로 말했다.

“ 난 널 살려줄 생각이 없는데, 어떡하지?”

“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넌 이 자리에서 죽는다. 놈.”

“ 어디 보자. 잠룡쟁패가 어디 있으려나.”

연우강은 태연히 추일룡의 품속을 뒤졌다.

“ 어이쿠! 여기 얌전하게 모셔두었구나.”

가슴 언저리에서 잠룡쟁패를 찾아낸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 이 자식이!”

추일룡은 왼손으로 가슴속에 들어가 있는 연우강의 손을 잡아챘다.

“ .......?”

추일룡은 황당해 눈만 끔벅였다.

놈의 왼손 손목뼈를 부숴 버릴 요량으로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그런데 놈의 손목뼈를 부순 것은 고사하고, 가슴 안에서 빼내지도 못했다.

“ 혹시....”

추일룡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 맞아, 나도 한 가락해.”

연우강은 씨익 웃으며 오른손을 추일룡의 가슴을 향해 찍었다. 그의 손에는 추백낙을 없앨 때 사용했던 손괭이가 들려 있었다.

푸욱!

손괭이 뒤쪽에 있는 창 형태의 날이 추일룡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커억!”

추일룡의 신형이 뚝 떨어졌다. 추일룡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뒷덜미를 잡아챌 때 확인을 했다. 놈은 분명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가공할 고수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 넌?”

“ 죽기 직전에 얻는 짧은 시간은 지나 세월을 돌아보는 것만으르도 부족해. 굳이 의문을 가지고 떠날 필요는 없잖아.”

연우강은 추일룡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손괭이를 뽑았다.

“ 크윽! 빌어먹을!”

“ 아무 생각 없이 산 놈인 모양이네.”

손도끼를 뽑아내자마자 절명해버리는 추일룡을 보며 연우강은 몸을 일으켰다.

“ 일단 이놈은 숨긴 다음에...”

연우강은 품속에서 남궁운화로부터 얻은 책을 꺼내 잠룡쟁패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품에 넣고, 손괭이를 챙겨 막장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연우강! 연우강!”

막장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그의 온몸은 피로 범벅이었다. 허리에서, 어깨에서, 팔에서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는 무작정 안쪽으로 내달렸다.

“ 연우강?”

“ 사내자식이 웬 호들갑은...”

달려가던 막장의 신형이 우뚝 멈췄다.

안쪽에서 연우강이 터벅터벅 걸어나오고 있었다.

“ 너 괜찮은 거냐?”

“ 난 전장에서 오 년을 굴러먹었던 놈이야. 저따위 놈들에게 당할 것 같았으면 전쟁터에서 진작 죽었다.”

연우강은 손에 쥐고 있던 손괭이를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 그랬구나.”

막장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그건 뭐냐?”

연우강은 막장의 몸을 턱으로 가리켰다.

“ 너 때문에 그랬지 왜 그랬겠냐?”

막장은 인상을 확 긁었다.

“ 내가 살살 봐주면서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라고 했단 말이야?”

“ 자식아 네가 없었으면 난 최선을 다해 놈들을....”

“ 그래서 막장 네가 내게 도움 준 거라도 있었냐?”

연우강은 막장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 도움?”

막장은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 그래 도움. 손톱만큼이라도 도와준 게 있으면 말해 봐.”

“ 하지만 널 구하기 위해....”

“ 그건 날 돕는 게 아니고 널 죽이는 행위다. 막장, 전장에서는 서로 등을 대고 있을 때만 동료를 도울 수 있다. 떨어져 있을 때는 절대 동료를 봐서도 안 되고, 구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곳에서는 자신과 적만 봐야 하는 거다.”

“ 그러다 구할 수 있는 동료가 죽으면?”

“ 구할 수 있는 동료는 없다. 오히려 자기 앞에 있는 적을 한시라도 빨리 없애면 동료를 구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지. 그렇게 했는데도 동료를 구하지 못하면....”

“ 못하면?”

“ 살아서 복수를 해주면 된다. 그게 전장이 철칙이다.” “ 멋지네.”

막장은 헤벌쭉 웃었다.

“ 멋진 게 아냐. 인마. 녀석에겐 잠룡쟁패가 없었다고.”

“ 그럼?”

막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잠룡쟁패가 오백 개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툭 치고는 궤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