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8화 (8/232)

제8장 잠룡쟁패 내기

겨울이 깊어갈수록 율령궁의 천안원은 더욱 바빠진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잠룡쟁패를 얻기 위한 잠룡대전이 더욱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천안원이고, 수천 명의 밀정이 중원 각처에서 소식을 보내오지만, 잠룡쟁패의 주인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 빨라 밀정들이 보내준 정보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생기곤 한다.

더구나 올해는 다섯 배나 많은 잠룡쟁패가 풀린 상황. 그것들의 위치를 전부 추적하기엔, 인원은 물론이고 시간도 부족했다.

“ 휴우!”

음양노 유선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룡쟁패가 움직이는 속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다. 십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한 달 정도 남은 시점이 되면 잠룡쟁패의 마지막 소유자들이 결정되곤 했는데 올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이번이 마지막 보고였으면 좋겠네. 어떻게 됐느냐?”

“ 정리 끝났습니다. 원주님.”

오른편 구석 탁자에서 뭔가를 정리하고 있던 자가 종이 뭉치를 가져와 유선 앞으로 내밀었다.

종이 뭉치를 받아든 유선은 첫 장을 넘겼다.

잠룡대전 중간 결과.

잠룡대전을 통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신진.

1. 등천대룡 담대무궁

나이 : 28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범천담대세가

특이사항: 부친이 대야벌의 벌주.

2. 구룡대군 윤허

나이 : 25

무공정도: 상

지원 세력: 무궐과 구중련.

특이사항: 구파일방중 화산파 출신.

3. 소명공주 이지약

나이: 23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황궐과 금황련

특이사항: 응천부의 주인인 남경왕의 며느리이자 구림세가의 무남독녀

4. 무영사룡 율한척

나이: 26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무궐과 녹사련.

특이사항: 사도 무림 출신.

5. 전마 사유성.

나이 : 25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무궐과 군마련

6. 빙마후 수여설

나이: 28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북해빙궁.

특이사항: 북해빙궁 수뇌 중 일 인.

7. 만화은영 몽요

나이: 알려지지 않음.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동영, 은밀막부

특이사항: 없음.

8. 다라밀영 아라파

나이 : 30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서장, 포달랍궁.

특이사항: 천축 출신이면서 포달랍궁의 지원을 받고 있음.

9. 섬전십삼검 남궁철상

나이 : 25

무공정도: 상

지원세력: 남궁세가

특이사항: 원로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차기 가주가 확실시 됨.

10. 연우강.

나이: 21

무공정도: 없음.

지원세력: 철장마도 막장

특이사항: 막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

“ 끄응!”

마지막 10번을 쳐다보던 유선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연우강에 대한 사항을 그대로 보고하면 역정을 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보고서의 생명은 정확도.

지우라는 명령을 받기 전에는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해야 할 터였다.

유선은 다음 장을 넘겼다.

잠룡대전의 특징.

첫째, 역대 어느 대전보다 혼탁하고 많은 사건이 일어남. 현재까지 사망자 수는 대략 이천 명. 선진으로 보고한 자들은 단지 드러난 자들일 뿐 앞으로 어떤 자가 나올 줄은 상상할 수 없음.

둘째, 잠룡쟁패가 사라지는 사건이 속출하고 있음.

내용은 별첨으로 추가.

결론

몇 명이 들어올지 모르지만 이번에 들어오는 자들은 역대 최강의 전력이라고 사료됨.

무공 정도를 상이라고만 표시를 하였으나 드러난 무공만 가지고 한 판단임. 숨겨진 무공을 드러낸다면 상상하기 힘듦.

그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향후 일백 년 대야벌의 역사가 결정될 것임. 더불어 그들의 교육이 끝나는 대로 오 년 후에는 대야벌 백대 고수는 물론이고 십대 고수의 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고 봄.

“ 가히 태풍급이군.”

보고서를 읽고 난 유선은 얼굴을 찌푸렸다.

벌주의 아들부터 시작해서 응천부의 며느리까지. 앞장에 언급된 인물들만 해도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자들이다. 단지 드러난 자들만 그럴 터인데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는 자들까지 합치면, 보고서에 언급된 것처럼 역대 최강의 신진들이 전부 대야벌로 몰려오는 셈이 된다.

거대한 뭔가가 천천히 대야벌을 향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일단 보고는 해야겠지.”

이내 고개를 저은 유선은 보고서를 챙겨들고 일어났다.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며 세 궁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보고서는?”

우담보는 앉자마자 물었다.

“ 방금 나왔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밀었다.

잠룡대전 결과라고 적힌 보고서를 받아든 우담보는 천천히 훑어내려 갔다.

“ 쿡!”

첫 장의 맨 마지막 부분을 읽던 우담보가 피식 웃었다.

“ 왜 그러시오, 우 궁주?”

우담보를 지켜보던 범일승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이걸 보시오.”

우담보는 보고서 아래쪽을 가리켰다.

“ 쿡!”

“ 허!”

보고서를 쳐다보던 범일승과 혁세군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철장마도 막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는 대목 때문이었다.

“ 막장 그 녀석이 미친 모양이구먼.”

이내 웃음을 지운 범일승이 짜증스런 얼굴로 말했다.

“ 막장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요. 범 궁주.”

“ 흑철마신을 공연히 줬다는 생각이 드오. 우 궁주.”

“ 허허허! 범궁주가 가지고 있어 봐야 필요도 없는데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서 빛을 보면 더 좋은 일 아닙니까. 유 원주, 연우강이란 녀석에 대한 건은 지우게.”

앞장을 범일승에게 넘겨준 우담보는 뒷장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궁주님.”

“ 이건 무슨 뜻인가?”

뒷장을 읽어내려 가던 우담보가 한 곳을 가리켰다.

“ 어떤 내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잠룡쟁패가 사라지는 사건이 생겨나고 있다는 이 대목 말이네.”

“ 보고서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대야벌로 오는 잠룡쟁패의 숫자가 들어들고 있습니다.”

“ 줄어든다는 건....?”

우담보는 혁세군을 보았다.

“ 누군가 잠룡쟁패를 수집하고 있다는 뜻이오. 우 궁주.”

“ 들어오기도 전에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말이군.”

“ 그렇소. 잠룡쟁패를 얻어 자신과 관계 있는 자들에게 주려는 심산이오.”

“ 가장 많이 모은 자가 누군가?”

“ 앞장에 적힌 순서대로입니다. 등천대룡이 가장 많이 가져갔는데 확인 가능한 숫자만 스무 갭니다.”

“ 연우강 그놈도 모으고 있단 말인가?”

범일승이 깜짝 놀라 물었다.

“ 지금까지 연우강의 손에, 정확하게는 집행사자 막장의 손에 들어간 잠룡쟁패는 여덟 갭니다.”

“ 그놈이 정말로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네.”

범일승은 어처구니 없는 얼굴로 우담보를 보았다.

“ 이름이 막장인데 뭘 바라시오.”

우담보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연우강을 데리고 오라고 보내 놓았더니 잠룡대전에 참석하여 강호를 휘젓고 있단다. 범일승 앞이라 차마 웃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금 웃음보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 궁주님, 손님이 왔습니다.”

“ 손님?”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담보는 의아한 얼굴로 출입문을 보았다.

“ 나요, 우 궁주.”

괄괄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일행의 얼굴이 일제히 찌푸러졌다. 산발한 노인이 들어서면서 시궁창 냄새 같은 지독한 냄새가 확 끼쳐왔던 것이다.

산발 노인은 들어오자마자 잠룡쟁패를 받은 자들의 명패가 걸린 벽면으로 가서는 안쪽부터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을 하고 있던 이들은 코를 감싸쥐며 자리를 피했다.

“ 끄응!”

[ 왜 그러시오, 혁궁주.]

혁세군이 신음을 내뱉자 우담보가 전음으로 물었다.

[ 야장도 제자를 뽑겠다고 보고서를 몇 번 올렸는데 안 된다고 퇴짜를 놨소이다.]

[ 잠룡 중에서 제자를 뽑겠다고 했다는 말인가?]

[ 그렇소이다.]

혁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 큭!”

우담보는 픽 웃었다.

“ 하도 대답이 없어서 내가 직접 왔소. 이렇게 많은 놈들을 뽑으면서 우리 야장에 한 놈도 줄 수 없다는 게 말이 되오?”

명패를 둘러보고 있던 산발 노인이 혁세군을 돌아다보며 히죽댔다.

“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고, 잠룡 스스로 결정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무 장주.”

“ 그 소린 지겹도록 들었소. 그래도 혁 궁주가 마음만 먹으면 한두 명 정도는 뺄 수 있지 않소.”

“ 아 글쎄 그게 안 된다고 하지 않소. 조직을 거느린 분이 왜 그러시오?”

“ 정말 그렇게 나올 거요?”

“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들어보겠소?”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듯하자 우담보가 중재에 나섰다.

“ 말하시오. 우 궁주.”

야장 장주 무원은 우담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야장 장주께서 제자를 직접 받는 것. 어떻소?”

“ 무슨 소리요?”

“ 잠룡들이 도착하면 잠룡쟁패를 확인하고 난 다음에 제자를 모집하는 절차가 있지 않소. 그때 야장도 창구를 하나 개설하란 말이외다.”

“ 야장 창구로 오면 받고, 오지 않으면 못 받는단 말이군.”

“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소.”

“ 공평이라......”

무원은 다시 명패가 걸린 벽면을 쳐다보았다.

“ 혁 궁주는 어떻게 할 거요?”

몸을 돌린 무원은 혁세군을 보며 물었다.

“ 난 그렇게 할 수 없소. 무 장주.”

“ 좋소. 우 궁주. 창구를 개설하도록 하겠소. 창구 이름은 안정숙으로 하겠소.”

혁세군이 반대의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무원은 우담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맨 끝자리요.”

“ 알겠소.”

무원은 누런 이가 드러나게 활짝 웃고는 밖으로 나갔다.

“ 무슨 짓이오, 우 궁주?”

“ 하하하! 안정숙도 나쁘지 않는데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시오. 야장이 파업을 하게 되면 힘든 사람은 우리요. 혁 궁주. 적당히 구슬려 끌고 가야지요. 그리고 미친놈이 아닌 이상 야장으로 갈 잠룡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그건 그렇고....”

우담보는 유선을 보았다.

“ 말씀하십시오, 궁주님.”

“ 막장은 지금 어디 있는가?”

“ 우리가 예상하는 경료대로 움직였다면 낙양에 있을 겁니다.”

“ 또 다른 잠룡은?”

“ 등천대룡 담대무궁도 낙양에 도착해 있습니다.”

“ 그에게 연우강에 대해 알려주게.”

“ 잠룡쟁패에 대해서도 알려주란 말입니까?”

“ 그렇게. 더불어 벌주께서 반드시 벌로 데려 오라고 했다는 말도 전하고.”

“ 알겠습니다. 궁주님.”

“ 무슨 뜻이오?”

잠룡궁의 궁주 혁세군이 우담보를 향해 물었다.

잠룡쟁패를 놓고 벌이는 잠룡대전은 철저하게 대야벌과는 무관하게 이뤄져야 하고 지금껏 그래왔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 난 단지 그가 등천대룡이라는 별호와 어울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오. 혁 궁주. 그동안 고생했는데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오.”

“ 그러다 잘못되면?”

“ 우리 기억 속에서 담대무궁이라는 이름을 지워야지요.”

“ 혹시 그를 우리 야궐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거요?”

듣고 있던 범일승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 벌주를 배출한 가문 출신 아니오. 첫째가 아닌 셋째에게 잠룡쟁패를 주었다면 그만큼 똑똑하다는 의미일 테고, 우리 야궐의 후계자 후보로 낙점해도 될 정도로 좋은 조건이오.”

“ 그 부분에 있어선 나도 동감이오. 하지만 무공도 없는 놈을 상대로 시험을 한다는 게 영 걸려서 그렇소.”

“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두고 봅시다. 난 벌주께 보고하러 가야겠소.”

우담보는 유선에게 눈길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새로운 보고서 작성이 끝났을 겁니다. 궁주님.”

“ 세 부를 더 만들어서 혁 궁주와 범 궁주님께도 한 부씩 드리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잠시 후.

세 사람은 보고서를 한 부씩 들고 밖으로 나왔다.

“ 이따가 술시에 술이나 한잔 합시다.”

먼저 우담보가 자리를 떴다.

“ 눈이 올 것 같습니다 그려.”

하늘을 올려다보던 혁세군의 얼굴이 어랜처럼 들떠 있었다.

“ 그렇군요.”

범일승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자주 보는 곳이 이곳인데 올해는 유달리 눈이 적었다. 아마도 조만간 첫눈을 보게 될 것 같았다.

“ 첫눈을 보며 소원을 빌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

“ 허허허! 아직도 그 말을 믿습니까?”

범일승은 가볍게 웃어 넘겼다.

“ 믿고 있소이다. 문제는 더는 빌 소원이 없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 그렇군요. 우린 이미 정점에 서 버렸으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니미럴!”

창 밖에 눈을 맞추고 있던 연우강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 웬수진 놈이라도 들어오고 있는 거냐?”

음식을 먹다 말고 막장은 창 밖을 보았다.

두 사람이 들어온 곳은 낙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고급 객잔으로 안락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객잔이 대부분 그렇듯 이곳 안락 객잔 또한 간판만 객잔으로 달았을 뿐 기루도 겸하고 있었다.

삼층에서는 벌써 질펀한 술판이 벌어진 듯 풍악소리와 함께 기녀들의 교소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 눈이 오잖아.”

“ 웬수가 눈이냐?”

“ 직선 거리로 백오십 장이나 되는 연무장에 쌓인 눈을 치우다 보면 웬수가 되지 않을 수가 없어.”

“ 군에서는 눈이 오면 다 치우냐?”

“ 응.”

“ 왜 치우는데?”

“ 그냥 치워. 눈이 와도 치우고, 비가 와도 치우고. 심지어 눈이 오고 있는 와중에도 치우고.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빗물을 퍼내. 여하튼 하늘에서 뭔가가 내리면 무조건 나가서 치우는 게 군이야.”

“ 정천호가 돼서도 치웠냐?”

막장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 그때는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서 입으로 치웠어.”

“ 입으로?”

“ 명령을 내린다는 말이야.”

“ 그건 좀 낫네. 그런데 눈을 치우는 이유는 생각해 봤냐?”

“ 오 년 동안 겨울만 되면 생각하곤 했지.”

“ 결론은?”

“ 지금도 그 이유에 대해 생각 중이야.”

“ 아직도 결론을 못 내린 거구나.”

“ 한 가지는 확실해.”

“ 뭐가?”

“ 나 위로는 전부 개새끼들이라는 거.”

“ 개 새끼들은 눈을 좋아하잖아.”

“ 개 새끼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건 발이 시려서 그런 거지 눈을 좋아해서 그런 게 아냐.”

“ 개새끼들은 신발을 신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한잔해라.”

막장은 술잔을 내밀었다.

“ 위로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마실래?”

연우강은 술잔을 받으며 눈을 찡긋했다.

“ 어떻게 마시는 게 본격적으로 마시는 건데?”

“ 기녀를 옆에 끼고, 가슴을 더듬어가면서 마시는 거지. 그러다가 눈이 맞으면 침상으로 가는 거고.”

“ 그렇게 마시려면 얼마나 줘야 하지?”

“ 글쎄다. 여기 수준이면 하룻밤에 술값만 서른 냥 정도는 줘야 할 것 같은데.”

“ 서, 서른 냥이라고?”

“ 적어서?”

“ 내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이 스무 냥이다.”

“ 딱 내 집 하인 수준이네.”

“ 하인에게도 스무 냥을 줘?”

“ 개들은 하루 종일 일하잖아.”

“ 그럼 난?”

“ 넌 날이면 날마다 도나 만지작저리면서 놀잖아. 인마. 노는 놈에게는 밥도 과한 거야.”

“ 그럼 넌?”

“ 돈만 많은 쓰레기 중의 하나지.”

대답은 계단이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막장과 연우강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움직일 때마다 번쩍거리는 은색 무복을 걸친 사내가 부하들인 듯한 노인 네 명과 함께 서 있었다.

“ 네가 입고 있는 옷은 최하 이십 냥은 나가고, 허리에 차고 있는 요대 가격은 삼십 냥 정도 나가겠구나. 그럼 넌 뭐라고 불러야 하지?”

잠시 사내를 쳐다보던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 황제가 용포를 걸쳤다고 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넌 자격이 있고 난 없단 말?”

“ 그렇다.”

“ 이유를 들어볼까?”

연우강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 난 범천담대세가의 셋째 아들이고 넌 업동이니까.”

“ 그래도 이름은 연우강이다.”

“ 업둥이에겐 성을 물려줘도 재산은 주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느냐?”

“ 나에 대해 제법 많이 아는 것 같은데, 막장 당신, 저치 알아?”

“ 범천담대세가라면 대야벌 벌주의 가문이다.”

막장은 곤혹스런 얼굴로 담대무궁을 보았다.

사실 막장도 담대무궁은 처음 본다.

하지만 지난 무공이나 호위로 따르는 자들은 보면 범천담대세가를 사칭할 그런 자는 결코 아니었다. 아니 대야벌 벌주의 가문을 사칭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자가 강호에 있을 리가 없을 것이었다.

“ 지 애비가 벌주면, 아들 새끼가 저렇게 싸가기 없어도 용서가 되는 거야?”

“ 갈! 건방진 놈. 감히 뉘 앞이라고!”

담대무궁 오른편에 있던 노인이 폭갈을 내지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담대무궁을 호위하고 있는 등천사노의 일노인 혈잔마노 노중산이었다.

“ 저 새낀 평생 종 노릇이나 해 처먹고 살겠네. 인마, 아무리 상전이라도 잘못하면 한 살이라도 더 처먹은 네가 말려야 하는 거잖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 이런 죽일 놈이!”

노중산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폭사돼 나왔다.

“ 노인장, 이 친구는 내 손님이야. 눈에 힘 풀라고.”

보고 있던 막장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나직이 말했다.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주변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자들이 슬금슬금 아래층으로 도망을 쳤다.

곧이어 이층엔 연우강과 담대무궁 일행만 남았다.

“ 이분은 대야벌의 벌주이신 천우 담대만승 그분의 가문인 범언담대세가의 삼공자이시다.”

노중산이 살기를 거두지 않으며 소리쳤다.

“ 내가 모시는 분은 담대만승이란 분이지 범천담대세가도 아니고 그곳의 삼공자는 더더욱 아냐. 노인장. 한마디만 더 지껄이면 주둥일 찢어버리겠어.”

막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주둥일 찢는 것보다 대가리를 쪼개서 뇌가 썩었는지 확인해보는 게 더 좋은 방법이야.”

“ 이런 쳐죽일 놈이!”

급기야 노중산도 허리춤에 있는 핏빛 무기를 잡아갔다. 두 자루로 이루어진 그것은 그의 독문병기인 혈겸이었다.

“ 프, 하하하!”

느닷없이 담대무궁이 크게 웃었다.

막장은 의아한 얼굴로 담대무궁을 바라보았다. 더 놀랄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 반갑네. 연 소협. 잠시 주변을 정리할 겸 해서 큰 소리를 냈다네. 정식으로 날 소개하겠네. 난 범천담대세가의 삼공인 담대무궁이네. 가문에서 붙여준 별호는 등천대룡이라네.”

담대무궁은 연우강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막장은 눈을 끔뻑였다.

일부러 도발을 해올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포권을 취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자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 놀랄 필요 없어. 원래 가진 자들은 늘 저렇게 하는 거니까.”

“ 어떻게 한다는 거지?”

막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먼저 미친 척하며 상대의 약점을 만 천하에 공개하는 거야. 그런 다음에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게 되면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거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 그런 가진 놈은 대범한 사람이 되고 약점이 만천하에 공개된 사람은 앞으로 무시를 당하며 살게 되는 거지. 남을 깔아 뭉개는 아주 고전적인 수법인데 아주 잘 먹혀.”

“ 그건 아주 비열한 짓인데.”

“ 맞아. 아주 비열한 짓이야.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놈은 그게 비열한 짓인지를 모른다는 거야. 난 그게 더 슬퍼.”

“ 그래서 대가리를 열어보라고 한 거냐?”

“ 그런 셈이지.”

“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 일단 인사를 받았으니까 답례는 해야지.”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업둥이 연우강이다. 꼬라지를 보니까 날 알고 찾아온 것 같은데 용건이 뭐지?”

“ 일노!”

연우강의 말에 따라 시시각각 얼굴색이 변하던 담대무궁은 약간 찌푸린 얼굴로 노중산을 불렀다.

“ 알겠습니다. 삼공자.”

고개를 꾸벅 숙인 노중산이 연우강이 있는 탁자로 다가가서는 자루 하나를 올려놓았다.

철컹!

자루가 탁자 위에 놓여지자 안쪽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 돈은 아니고 뭐지?”

“ 잠룡쟁패 스무 개다.”

“ 와우! 엄청나게 모은 모양이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자루를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쏟았다. 담대무궁의 말처럼 안에서 잠룡쟁패가 쏟아져 나왔다.

“ 성공으로 통하는 길이 스무 개나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리겠네. 이걸 전부 내게 주는 건 아닐 테고...”

“ 너에게 잠룡쟁패 여덟 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 야! 자식아! 그건 막장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인데 그걸 밝히면 어떡해? 막장, 그건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연우강은 막장의 눈치를 살폈다.

“ 정말 여덟 개를 가지고 있는 거냐?”

막장은 죽일 듯한 눈으로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 응!”

연우강은 곧바로 꼬리를 내리며 시인했다. 그러자 막장은 철현전궁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 왜?”

그동안 수백 명을 죽였다. 부상을 당한 회수만 해도 수십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한 번 있다.

놈들의 몸에서 잠룡쟁패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말을 매번 들으면서도 견뎠던 것은 녀석의 상태 때문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을 먹어야 하는 체질.

어떤 병인지도 모르지만 대야벌로 데리고 가면 치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문에 더욱 열심히 싸웠다.

그런데, 녀석에게는 잠룡쟁패가 있었다.

그것도 여덟 개나.

“ 어쩌면 저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말하면 안 될까?”

연우강은 너스레를 떨며 담대무궁을 보았다.

“ 내기 조건은 네가 정해라, 연우강.”

“ 그러니까 내 것 여덟 개와 네가 내려놓은 스무 개를 놓고 내기를 하잔 말이냐?”

“ 그렇다.”

담대무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거절하면?”

“ 그 스무 개를 얻었던 것과 같은 방법을 사용할 거다. 참고로 잠룡쟁패 스무 개는 주제도 모르고 대야벌의 제자가 되겠다고 설치는 쓰레기들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 내기에 응하지 않으면 나도 쓰레기가 되겠네?”

“ 업둥이는 버려진 아이를 말하고, 버리는 물건을 가리켜 우린 쓰레기라 부른다.”

“ 씨팔! 이거 거절하지도 못하게 만드네.”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막장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막장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껏 삼십오 년을 살았지만 저런 눈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얼고 또 얼어 빙정이 돼버린 얼음덩어리를 대하는 듯했다.

“ 넌 어떤 내기를 한다고 해도 저자를 이길 수 없다. 연우강.”

담대무궁은 대야벌 백대 고수라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자였다. 더불어 교묘한 말장난으로 연우강을 도발하는 것을 보면 교활함까지 겸비할 자라고 할 수 있다.

“ 싸우면?”

“ 내가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담대무궁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

“ 동귀어진을 해도?”

“ 동귀어진도 차이가 많이 나지 않을 경우에 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싸우면, 개죽음밖에 없지.”

“ 그게 바로 꼴지의 비애라는 거다. 우물 안 개구리 말이다.”

“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연우강.”

“ 지휘관이 되면 아닌 줄 알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내가 했던가?”

“ 나중에 말해준다고 했다.”

“ 한 가지는 지금 말해줄게. 지휘관은 말이다. 부하들의 기를 죽이면 절대 안 되는 거야. 힘으로 안 되면 깡으로 버티고, 깡으로 안되면 목숨으로 버텨야 해. 그래야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얻어낼 수 있어.”

“ 하겠다는 말이냐?”

“ 물론 해야지. 더구나 스무 개의 잠룡쟁패가 걸려 있잖아.”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잠룡쟁패를 가리켰다.

막장은 또다시 몸을 떨었다.

새파란 광채를 뿌리는 눈동자와 활짝 웃는 입,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두 가지가 녀석의 얼굴에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광경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느새 연우강의 눈빛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 내기 조건을 말해라.”

담대무궁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 그 내기에 나도 끼고 싶은데, 어떻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황색 무복을 걸친 사내가 부하들로 보이는 자들 다섯 명과 함께 날아올라 왔다.

“ 누군가?”

담대무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 구룡대군 윤허라고 하오. 난 열다섯 개의 잠룡쟁패를 가지고 왔소이다.”

사내는 싱긋 웃으며 들고 있던 자루를 탁자 위로 던졌다. 그가 던진 자루 안에서도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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