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0화 (10/232)

제10장 일천이백 흑랑기의 꿈.

처참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했다.

연우강 앞에 앉아 있는 담대무궁과 윤허는 물론이고, 그들의 수행원들까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단아하던 담대무궁과 윤허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진 채고, 입에서는 거친 숨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간 경험이 벌써 세 번.

핏발선 눈으로 탁자 위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자살 놀이가 가져다 준 결과였다.

“ 첫 번째 걸린 사람은 죽을 확률이 사 할, 살아날 확률은 육 할이다. 두 번째 걸린 사람은 죽을 확률이 사 할 사 푼이고, 마지막은 오 할로 늘어나다. 지금부터는 자살 놀이가 아니고 생사결이라고 부른다.”

이번에도 역시 십뢰는 연우강을 겨냥했다.

“ 왜 항상 네가 먼저지?”

담대무궁은 핏발선 눈으로 연우강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 십뢰를 돌린 사람은 윤허다. 따지고 싶으면 그에게 따져라.”

연우강은 술잔에 주정을 따르며 말했다.

처참한 두 사람과 달리 연우강은 말짱했다. 그는 땀을 흘리지도 않고, 손을 떨지도 않았다.

“ 난 네놈을 믿지 못하겠다. 연우강.”

담대무궁은 재차 소리를 질렀다.

“ 그럼 네놈이 먼저 해, 새끼야!”

보고 있던 윤허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담대무궁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선 비수보다 더 날카로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검을 뽑을 듯한 기세였다. 온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중압감이 이성마저도 잡아먹어 버린 탓이었다.

“ 죽고 싶은거냐, 윤허.”

담대무궁은 윤허를 노려보며 받아쳤다.

“ 우린 내기 중이다. 담대무궁. 윤허. 싸움은 내기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담대무궁, 어떻게 하겠느냐? 먼저 하고 싶으면 십뢰를 들고 아니면 내 앞으로 밀어라.”

“ .......”

담대무궁은 십뢰를 노려보았다.

네 개의 십뢰.

사 할이라고 하였지만 열 개의 구멍 중 네 개는 곧바로 죽음과 직결돼 있다.

‘ 모, 못 해. 나, 난 할 수 없어.’

“ 머, 먼저 해라.”

담대무궁은 십뢰를 거칠게 밀었다.

“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완벽한 내기가 바로 생사결이야. 그 어떤 조건도 생사결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있다면 오직 한 가지. 운빨이야.”

연우강은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덜덜덜!

연우강이 자연스럽게 십뢰를 입 안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며 담대무궁은 부들부들 떨었다.

놈은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한순간에 생사가 결정되는 지금 상황에서 저렇듯 웃을 수가 없을 테다.

철컥!

“ 개자식!”

또다시 십뢰가 발사되지 않자, 담대무궁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더럽게 운이 좋은 놈이 아닐 수 없었다.

“ 업둥이는 원래 운빨을 타고 태어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나.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는 그런 천운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태어나자마자 부잣집으로 들어가는 운은 아무나 타고나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운빨은 계속되고 있다. 바로 이 순간까지.”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십뢰를 빙글 돌렸다.

휙! 휙! 휙휙휙!

“ 조건은 같다. 돌아가는 십뢰가 멈추기 전에 일어나면 된다. 여기서 포기한다고 해도 너희들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 형님.]

등천사노의 둘째 추명검노 목운서가 노중산을 불렀다.

그의 시선은 담대무궁의 하체로 향해 있었다.

극심하게 떨고 있는 그의 다리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 번째 판을 시작할 때부터 흘러내린 액체였다.

담대무궁을 계속 방치하게 되면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알았네.]

노중산 또한 담대무궁이 오줌을 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를 막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 커억!”

노중산은 피를 토해내며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 혀, 형님!”

그를 지켜보고 있던 목운서가 질겁한 얼굴로 노중산을 안아들었다.

“ 무슨 일이오, 검노?”

십뢰를 노려보고 있던 담대무궁이 깜짝 놀라 물었다.

“ 주, 주화입마 조짐이 보입니다. 지금 상태로 두면 위험합니다.”

“ 그가 왜?”

“ 조금 전부터 이상했습니다. 아마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모양입니다. 공자님이 도와주셔야겠습니다.”

“ 난 지금.....”

담대무궁은 탁자 위의 십뢰와 노중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중산은 간질이 온 것처럼 무섭게 떨고 있었다.

“ 형님은 공자님이 어린 시절부터 견마지로를 다했던 분입니다. 상황이 중한 걸 알지만 ..... 구해주십시오. 공자님.”

목운서는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 아, 알겠네. 미안하게 됐다. 연우강. 이번엔 내가 패한 걸로 하겠다.”

담대무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형님을 옮기도록 하세.”

목운서는 노중산을 안고 아래층으로 몸을 날렸다.

“ 이거 가져가라.”

막 몸을 날려가려는 담대무궁을 향해 연우강은 잠룡쟁패 하나를 던졌다.

“ 뭐냐?”

“ 생사결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주는 개평이다.”

“ 고맙군.”

담대무궁은 이를 부드득 갈며 몸을 날렸다.

“ 씨팔! 그런데 이걸 다 이더에 쓰나.”

연우강은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잠룡쟁패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네. 연 형.”

“ 윤형은 지금 부하들을 엄청 원망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아니요?”

“ 원망?”

“ 방금 저 늙은 놈은 연극을 해서 주인을 구해내지 않았소. 하지만 윤 형 부하들은 윤 형이 죽든지 말든지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철산, 저 친구 말이 맞아?”

윤허는 뒤에 서 있는 자들 중 가운데 있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를 향해 물었다.

“ 그렇지 않아도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말할 참이었습니다. 형님. 담대무궁이나 형님은 저분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딱 고양이 앞에 쥐 골입니다.”

“ 무공은 내가 더 강해, 철산.”

“ 다음엔 무공으로 싸우는 게 더 낫겠습니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윤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런 씨팔!”

그는 재빨리 철탑이라고 하였던 덩치 사내를 끌어당겨 이지약의 시야를 차단했다.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 이름이 뭐요?”

연우강은 철탑 사내를 보며 물었다.

“ 거철산입니다. 대협. 별호는 철탑입니다.”

“ 이건 거 대협거요. 뒤에 숨은 오줌싸게에게 주는 게 아니고 당신에게 주는 거요.”

연우강은 잠룡쟁패 하나를 거철산에게 던졌다.

“ 이건....”

잠룡쟁패를 받은 거철산은 머리를 긁적였다.

“ 이 형님이 목숨 걸고 얻은 거니까 받아, 인마.”

거철산 뒤에 있던 윤허가 머리로 거철산의 이마를 쿵 박으며 소리쳤다.

“ 감사합니다. 연 대협.”

거철산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씨팔, 꼭 신이 된 기분이네.”

“ 신?”

거철산 뒤에 숨어 있던 윤허가 고개를 내밀고 연우강을 보았다.

“ 쉿덩어리 하나 주니까, 나보다 훨씬 강한 저 친구가 황송한 듯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소. 이 정도면 신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 대야벌의 벌주는 십 년에 한 번씩 신이 되는 기분을 만끽한다는 말인가?”

“ 어쩌면.”

“ 하하하! 연 형 자네 말은 아주 재미있어. 아무튼 대야벌에 들어가면 반드시 무공을 익히도록 하게. 담대무궁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삼 년 동안 얌전히 기다리겠네.”

“ 그 뒤에 날 죽이겠다는 뜻인가?”

“ 물론이네. 연 형. 난 빚지고는 절대 못 사는 사람이거든.”

“ 그 전에 도망치면 되겠네.”

“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네. 연 형. 가자, 철산.”

“ 알겠습니다. 형님.”

거철산을 비롯한 윤허를 따라온 자들은 아래층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 막장, 가서 목욕물 좀 받아줘.”

“ 목욕물?”

멍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장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나도 쌌어. 인마.”

“ 쌌다고?”

막장은 연우강의 아랫도리로 시선을 내렸다.

“ 프! 하하하!”

팽팽했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던 연우강의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오줌을 지린 것이었다.

“ 그 짓을 하고 나면 전부 오줌을 지리게 돼 있어. 목욕물 받아줄 거야 말 거야?”

“ 아, 알았다. 당장 목욕물하고 옷 준비하마, 주인장!”

막장은 아래층을 내려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 어이그, 질척거려. 스물한 살이나 처먹어서는 오줌을 싸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연우강은 어기적거리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 연 공자, 십뢰 작동하는 거 맞나요?”

계단으로 내려가는 연우강의 뒷모습을 보며 이지약이 물었다.

“ 류사은 그 녀석은 날 좋아했으니까, 아마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 그런데 왜 오줌을 지린 거죠?”

“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 겁니다. 녀석들이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순간 패하는 사람은 제가 되니까요.”

“ 그럼 그냐 쌌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공주님.”

곧 연우강의 모습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 환노 생각은 어때요?”

이지약은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십뢰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 클! 그 녀석은 사기를 쳤습니다. 공주님.”

그녀 뒤쪽 탁자 근처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희미한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나타났다. 물결처럼 흐느적거리는 그것은 놀랍게도 사람이었다.

만일 무인이 지금 광경을 보았다면 경악하고 말았을 것이다.

천마환환신공.

천오백 년 전 마도의 절대자였던 천마가 남긴 무공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천마환환신공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 갑자 전, 대야벌에서였다.

잠룡쟁패를 받고 대야벌로 들어간 독고철웅이란 사내가 천무비고에서 우연히 익힌 무공이 천마의 무공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야벌은 발칵 뒤집혔다.

대야벌 벌주는 천마환환신공을 당장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공을 회수하라는 명령은 단순히 비급을 거둬들이라는 명령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무공을 익힌 자의 머리까지 회수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라는 척살 명령인 것이다.

졸지에 공적으로 몰릴 위기에 처한 독고철응은 그 길로 대야벌에서 도망을 쳤다.

독고철웅을 잡기 위한 추격전은 삼 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대야벌은 독고철응을 잡는 대신 그에게 유령신마존이라는 별호를 부여하는 걸로 추격전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가 구림세가의 무인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 왜 그렇게 생각하죠?”

“ 무공을 익히게 되면 심력이 일반인보다 몇 배 강해집니다. 더구나 담대무궁과 윤허는 이 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지닌 초극 고수였습니다. 그런 자들이 견디지 못한 것을 연우강이 견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 그는 사막에서 오 년 동안 군 생활을 했어요. 더구나 그가 있던 부대는 흑랑기였고요. 흑랑기 대원들은 인간이 아니라 이리라고 불렸어요.”

“ 그렇다고 해도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주님.”

“ 혹시 검 가진 것 있어요?”

이지약은 독고철응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 시험해 보실 참입니까?”

“ 그게 가장 정확하잖아요.”

“ 여기 있습니다.”

독고철응은 허리춤에 있던 비수를 꺼내 내밀었다.

“ 이건 유령마비잖아요.”

“ 사기가 확실한데 그보다 더한 물건인들 어떻습니까?”

“ 그럼 우리도 내기 할래요?”

“ 무슨 내기 말입니까?”

“ 천마환환신공!”

“ 억! 그걸 익히면 공주님도 강호 공적으로 몰리게 됩니다. 그건 재고해 주십시오.”

독고철응은 질겁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무공은 전부 전수해 주었다. 하지만 천마환환신공은 차마 전수해 줄 수가 없었다.

“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 그렇다고 해도 내기는....”

“ 이게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그러면서도 연우강이라는 사람을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사기라고 몰고 있는 거죠.”

“ 좋습니다. 공주님. 천마환환신공을 걸겠습니다.”

결국 독고철응은 승복을 했다.

“ 그럼 시작할 게요.”

이지약은 싱긋 웃으며 유령마비 면에 십뢰 입구를 대고 단추를 눌렀다.

철컥!

“ 보십시오. 그건 가짭...”

푸아악!

독고철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십뢰 끝에서 푸른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왔다.

“ 세상에....”

이지약은 질겁한 눈으로 유령마비를 보았다.

유령마비는 곤오신철로 만들어 웬만한 충격으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 유령마비의 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지약은 고개를 돌려 독고철응을 보았다.

“ 그놈 완전히 돌아버린 녀석입니다. 공주님. 미친놈이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독고철응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 혹시 마라천력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요?”

“ 처음 듣습니다.”

“ 그럼 불교 오력의 하나인 염력에 대해서는 들어봤어요?”

“ 들어는 봤지만 믿진 않습니다.”

“ 그 염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상태를 마라천력이라 부르고 그런 능력을 타고난 남자를 마라천력인이라고 불러요. 하늘의 힘을 받은 악마라는 의미죠.”

“ 그가 마라천력인이란 말입니까?”

“ 재미있는 게 불교 오력의 하나라고 명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염력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나면 악마로 간주했다는 거예요.”

“ 제거한다는 말입니까?”

“ 마라천력인의 능력과 내공이 합쳐진다면 하늘도 감당하기 힘든 가공할 무인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어요.”

“ 그런 자가 있습니까?”

“ 내가 알기로는 두 명 있어요.”

“ ........?”

독고철응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 한 사람은 천오백 년 전 활동했던 사망마제라는 사람이에요. 그의 무공인 흑풍마라천력은 바로 염력과 내공이 합쳐진 무공이라고 해요. 그리고 한 사람은 이십 오 년 전에 나타났어요.”

“ 유명한 사람입니까?”

“ 그래요. 환노.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 누굽니까?”

“ 그건 지금 이야기하기는 곤란해요.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염력, 즉 마라천력은 유전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 그럼 그가 업둥이란 건?”

“ 권력을 가진 집이나, 돈이 많은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설사 마라천력인이라고 해도 죽임을 당할 일은 거의 없잖아요.”

“ 정말 그를 마라천력인이라고 확신하시는군요.”

“ 그럴지도 모른다는 뜻이에요. 어찌됐든 오늘 우리는 무공이 없는 자가 이 갑자기 넘는 공력을 지닌 초극 고수 두 명을 상대로 이기는 광경을 목격했잖아요.”

이지약은 모호한 눈으로 독고철응을 보았다.

“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그는 죽게 될 겁니다.”

“ 삼 년은 짧은 세월이 아니에요. 어쩌면 담대무궁이나 윤허는 그를 영원히 이기지 못할 수도 있어요.”

“ 그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합니다. 공주님.”

독고철응은 확신하듯 말했다.

“ 두고보면 알겠죠. 그건 그렇고 연 공자는 이걸 어떻게 처리할 셈인지 모르겠네요.”

“ 사실 저도 고민입니다. 공주님.”

계단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지약은 고개를 돌렸다. 목욕을 마친 연우강이 위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 그리고 전 마라천력인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 그런가요? 그나저나 전부 마흔한 개나 되네요.”

이지약은 잠룡쟁패로 화제를 돌렸다.

“ 시간이 충분하면 문제가 아닌데...”

“ 시간이 충분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죠?”

“ 장사꾼 집안에서 큰 녀석의 머릿속을 까뒤집어봐야 뻔한 것 아닙니까?”

“ 팔 속셈이었군요.”

“ 이런 기회가 흔하게 오는 건 아니니까요.”

연우강은 잠룡쟁패를 담대무궁이 두고 간 자루 안으로 집어넣었다.

“ 연씨 세가에서 독립할 작정인가요?”

완곡하게 물었지만 실은 그곳을 떠날 거냐는 물음이었다.

“ 왜 그런 것 있잖습니까? 그분들은 전과 다름없이 대해주고 친아들인 우진 녀석보다 더 위해 주는데, 이상하게 부담스러운 경우 말입니다.”

“ 자격지심이군요.”

“ 그런 모양입니다. 자꾸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요.”

“ 무상도 이 놀이를 했나요?

이지약은 십뢰를 들어 올렸다.

“ 무상은 왜 흑랑기에 들어왔는지 의아할 정도로 매사에 열정적이었습니다.”

“ 자살 놀이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 자살 놀이는 미친놈들만 합니다.”

“ 원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자살할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아요. 연 공자.”

“ 그렇습니다. 흑랑기에 들어와 삶을 허비할 필요가 없는 녀석이었습니다.”

“ 아니에요. 그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 이유?”

“ 그건 나보다 연 공자가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 무슨 말인지....."

연우강은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내심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무상이 흑랑기에 있었던 이유, 그건 적진에 있었던 여자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그런데 이지약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흑랑기는 자주 출병을 했나요?”

이지약은 화제를 돌렸다.

“ ... 병영보다는 사막에서 자는 날이 더 많습니다.”

“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죠? 이 자살 놀이 말고요.”

“ 녀석들을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전갈을 잡는다며 사막을 헤매고 다니는 녀석도 있고, 녹주를 찾아다니며 지도를 그리는 녀석도 있습니다.”

“ 무상은 지도를 그렸겠군요.”

“ 잘 아시네요. 녀석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더 알고 싶은 게 있습니까?”

“ 나머진 나중에 물을게요. 그거 스무 개 정도는 내가 사줄 수 있어요.”

“ 하나에 백만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 백만은 너무 많아요. 십만으로 해요.”

“ 원단이 가까워질수록 값이 오릅니다.”

“ 원래 가지고 있던 여덟 개만 있다면 백만을 받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은 개수가 너무 많아요. 개수가 많으면 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죠.”

“ 오십만은 어떻습니까?”

“ 십만 이상은 불가능해요.”

“ 삼십만.”

“ 이십만으로 하죠. 연 공자. 그리고 돈은 일시불로는 불가능해요.”

“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 일 년에 오십만 씩 드릴게요.”

“ 그럼 팔년이네요.”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 사백만 냥을 현찰로 준비할 수 있는 집안은 무림에 없어요. 연공자, 사실 오십만 냥을 따로 준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 끄응! 좋습니다.”

마지못해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약의 말처럼 앞으로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공공수 허일구가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해도 그 안에 마흔 개를 판다는 건 사실상 무리다. 자칫 잘못해서 소문이라도 나면 팔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손님이 있을 때 하나라도 파는 게 나을 듯했다.

“ 계약서 써드릴까요?”

“ 막장, 종이하고 먹. 붓.”

“ 아, 알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과 이지약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막장이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잖아 지필묵을 가지고 올라왔다.

“ 저쪽으로 가시죠.”

“ 이곳에서 하는 게.....”

“ 오줌으로 영역을 표시하는 건 짐승이나 하는 짓입니다. 사람은 지가 싼 곳은 가급적이면 가지 않아요.”

“ 호호호! 알았어요. 연 공자.”

이지약은 웃으며 연우강이 가리킨 자리로 가 앉았다.

“ 어떻게 쓰면 돼죠?”

“ 매년 오십만 냥씩 팔 년 동안 연우강에게 지불한다고 쓰고, 만일 지불하지 못했을 경우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한다고 써주시면 됩니다.”

“ 상응하는 대가가 어떤 걸로 하죠?”

“ 보통은 부동산으로 합니다. 이를테면 집이나 토지죠.”

“ 집이나 토지는 아직 아버지 소윤데 어떡하죠?”

“ 그럴 땐 머리로 대신 하는데, 공주님이라 그렇게 할 수도 없고....”

“ 그럼 제 머리로 하죠.”

이지약은 글을 써내려 갔다.

“ 예술이네.”

이지약이 쓰는 글을 쳐다보는 연우강의 얼굴엔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 수결은 여기에 할 게요.”

이지약은 아래쪽에 제 이름으로 수결을 했다.

“ 묘아?”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이지약을 보았다.

“ 아빠가 날 부르는 애칭이에요. 이름보다는 이게 더 확실할 것 같아서요. 연공자는 없나요?”

“ 전 해아였습니다. 탐욕스러운 돼지새끼란 뜻입니다.”

“ 호호호! 그럼 여기에 해아라고 쓰세요.”

이지약은 붓을 내밀었다.

“ 그냥 손바닥으로 수결을 대신하겠습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젓고는 손바닥에 먹물을 잔뜩 묻혀 이지약의 애칭 옆에 푹 찍었다.

“ 수결을 특이하게 하는군요.”

“ 공증인도 있어야 합니다. 공주님.”

“ 공증인은 막대협하고, 환노가 하면 되겠네.”

“ 환노?”

“ 나다, 이 독한 놈아!”

허공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독고철응이 연우강을 노려보며 인상을 북 긁었다.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십뢰가 정말로 작동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 재미있는 재주를 가진 영감이네. 잔말 말고 기어 나와서 수결이나 하쇼."

“ 클클클, 내가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독고철응은 모습을 드러내어 계약서에 수결을 했다.

그가 수결을 하는 사이에 이지약은 같은 형식으로 한 장을 더 작성하였다.

“ 이젠 계약 당사자의 얼굴을 봐야겠죠?”

“ 그건 당연한 겁니다. 공주님. 상대방의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돈을 받겠다고 하면 미친놈 소릴 듣습니다.”

“ 고, 공주님.”

독고철응이 깜짝 놀란 얼굴로 이지약을 보았다.

이지약은 주무상과 정혼을 한 이후 단 한 번도 면사를 멋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느닷없이 면사를 벗겠다고 하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연 공자 말 들었잖아요. 환노, 계약의 기본은 신뢰인데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대야벌로 들어가면 면사를 떼고 생활해야 해요.”

이지약은 웃으며 면사를 뗐다.

“ 흑장미!”

이지약의 얼굴을 보자마자 연우강은 대뜸 말했다.

“ 무슨 뜻이죠?”

“ 도도한 듯 고고하고, 고고한 듯 화려하고, 화려한 듯 청초하고, 청초한 듯 강인하고, 강인한 듯 부드럽고, 부드러운 듯 차갑고, 차가운 듯 순박하고, 순박한 듯 요염하고, 요염한 듯 지적이고, 지적인 듯...”

“ 계속하세요.”

“ 극미!”

“ 극찬이네요.”

엷게 미소 띤 얼굴로 이지약은 면사를 다시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우강은 윤허가 놓고 간 자루에 잠룡쟁패 스무개를 담아 독고철응에게 건넸다.

“ 참! 연 공자는 꿈이 뭐죠?”

“ 황금백수입니다.”

“ 황금백수라면?”

“ 백수계의 최고수를 말합니다.”

“ 백수계?”

“ 개백수, 백수, 황금백수를 일컬어 백수계라고 합니다.”

“ 훗! 어떻게 다르죠?”

“ 개백수는 돈도 없고 얼굴도 황인 놈을 일컫는데, 불러주는 친구가 없어 항상 구들장을 파고 사는 놈을 말합니다. 개백수의 주요 취미는 상상입니다.”

“ 상상?”

이지약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좋은 술을 마시며 미녀를 안고 뒹구는 환상을 꿈꾼다는 겁니다.”

“ 일리가 있네요. 그럼 백수는?”

이지약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 백수는 돈은 없지만 얼굴이 되는 놈을 말합니다. 불러주는 친구가 많아 항상 바쁘긴 한데, 이 치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백수의 주요 특징인 술병을 앓고 있습니다.”

“ 술병을 앓는다는 건 무슨 뜻이죠?”

“ 술만 얻어마시기 때문에 술병이 생기는 겁니다.”

“ 훗! 다음은요?”

“ 마지막으로 황금백수는 돈도 있고 얼굴도 되는 놈을 말합니다. 밤낮 없이 항상 바쁘고 혼자 자는 날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문 놈입니다. 황금백수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자기 관리입니다.”

“ 철저한 자기관리라는 건?”

“ 주색잡기에 푹 절어 살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이 필수거든요.”

“ 그러니까 한마디로 놀고 먹는 걸 꿈꾼다는 건가요?”

“ 우리 흑랑기 일천이백 명의 소원이었습니다. 지휘관은 대원들의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있고요.”

“ 호호호! 그 소원 부디 이루길 바라겠어요. 개독새.”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던 이지약은 몸을 돌렸다.

곧 그녀와 독고철응이 떠나고 실내에는 막장과 연우강만 남았다.

“ 이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자리에 앉은 막장은 마시다 남은 주정을 따르며 연우강을 불렀다.

“ 심각한 이야기 같으면 꺼내지 마라. 굳이 네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난 지금 무지 심각하니까.”

연우강은 막장 건너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 잠룡쟁패는 신성한 물건이다. 사고 파는 물건이 아냐.”

“ 그럼 마흔 개나 되는 잠룡쟁패를 어쩔 건데? 쓰레기더미 속으로 던져 버릴까?”

“ 하지만......”

“ 난 말이다. 그것보다는 오늘 만났던 고수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담대무궁이나 윤허도 너보다 더 강자였고, 소명공주 또한 너보다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들뿐이라면 말도 않는다. 소명공주를 호위하고 있던 그 영담은 담대무궁은 물론이고 윤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넌 대야벌 백대 고수라는 틀에서 나오지 못하면 절대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없어.”

“ 개자식.”

“ 그리고 물건이란 생각하기 나름이다. 위패를 예를 들어보자고. 사당에 모셔진 위패는 후손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다. 하지만 후손이 아닌 자들에게는 나뭇조각보다 못해. 불쏘시개로 쓰자니 찜찜하고 그렇다고 마땅히 쓸 데도 없고, 잠룡쟁패도 마찬가지야. 성공을 원하는 자나 대야벌은 그걸 대단한 물건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겐 쇳덩어리에 불과해.”

“ 이건 어떻게 할 거냐?”

막장은 탁자 위에 있는 자루를 턱으로 가리켰다.

“ 마저 팔아야지.”

“ 팔아?”

“ 그만 나오시오, 영감.”

“ 나가도 되는 거냐?”

“ 나오지 않으면 막장에게 죽게 될지도 모르오.”

스윽!

연우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문이 열리고 왜소한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지금껏 연우강을 따라다녔던 공공수 허일구였다.

“ 스무 갠데 가능하겠소.”

“ 너무 많네.”

허일구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모를까 이제 보름 남짓 남았다. 손님을 잡고 물건을 넘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 일단 하는 데까지 하고, 남은 놈은 녹여서 검을 만들든지 알아서 하시오.”

“ 알았다. 최대한 팔아보도록 하마.”

고개를 끄덕인 허일구는 자루를 집어들었다.

그는 막장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들어왔던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 그들은 다시 온다.”

허일구의 모습이 사라지자 막장이 입을 열었다.

“ 누구?”

“ 담대무궁과 윤허.”

“ 못 올걸.”

“ 윤허는 몰라도 담대무궁은 반드시 온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존심이 짓밟힌 경우니까.”

“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연우강은 의외라는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 대야벌에서 살게 되면 저절로 터득한다.”

“ 하지만 그 녀석도 못 와.”

“ 확신하냐?”

“ 응! 자살 놀이를 처음 하고 나면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거든.”

“ 아까는 삶의 활력소가 된다고 했잖냐.”

“ 그건 전문가들 이야기고. 초짜는 공황상태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 밤마다 악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거야.”

“ 그 정도로 심각한 거냐?”

“ 한번 할래?”

연우강은 십뢰를 들어 올렸다.

“ 미친 놈.”

막장은 피식 웃으며 진저리를 쳤다.

“ 그보다. 대야벌에 황궐이라는 단체가 있는 이유가 뭐지?”

연우강은 궤짝 안으로 십뢰를 집어 넣으며 물었다.

이지약을 만나고 나자 문득 황궐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 갑자기 웬 관심?”

“ 원래 백수는 미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하는 족속이거든.”

“ 그 여자를 피해 대야벌로 가는 것 아니었냐?”

“ 그랬지.”

“ 그런데도 궁금해?”

“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잖아. 일단 알아야 도망을 치든지 하지.”

“ 그런 말도 아냐?”

“ 서당 출입만 십 년이다. 인마.”

“ 먹물 공황증이라며.”

“ 먹물에 대해서만 그렇다는 거야.”

“ 난 문자공황증이다.”

“ 문자 공황증이면 책 읽는 걸 병적으로 싫어한다는 뜻?”

“ 황궐이 대야벌에 있는 이유를 모른다는 뜻이다.”

“ 대야벌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그런 것부터 배우는 거 아냐?”

“ 누군가는 말을 해줬겠지. 아니면 책자를 주었든지.”

“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네?”

“ 문자공황증은 필요한 책이 아니면 보지 못한다.”

“ 그만 들어가서 자는 게 낫겠다.”

막장을 빤히 쳐다보던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야벌에 보면 여의전 의전이 있다.”

“ 여의전이면, 치료를 해주는 곳이라는 뜻이네 이름이 너무 빤하군.”

“ 잠룡쟁패를 가진 자는 공짜다.”

“ 거기 가서 약을 타먹으라고?”

“ 여의전의 약사는 내가 아는 의원들 중 최고다.”

“ 그 사람 말고 아는 약사가 있기는 하냐?”

“ 아무튼 이 약사보다 더 뛰어난 약사는 없다.”

“ 알았다. 약도 떨어져 가니까 들어가면 바로 가보도록 할 게. 그만 들어가 자자.”

연우강은 남은 술을 홀짝 비우고는 궤짝을 들고 일어났다.

“ 도대체 그 궤짝은 뭐로 만든거냐?”

가로 세 자, 세로 한 자 반, 깊이가 한 자 반 정도인 궤짝은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뭔가 있는 것 같은 특이한 물건이다. 손괭이나 약 탕기를 넣고 다니기엔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만년오금철로 만들어진 건데, 왜?”

“ 만녀오금철이면 만년한철과 비슷한 거냐?”

“ 같은 건데 만년한철은 흰색인 반면 만년오금철은 검은색이야.”

“ 그, 그럼 그게 전부 만년오금철이라고?”

막장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만년오금철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만년한철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최강의 무기를 만드는 쇠.

천하에 명검이나 명도니 하는 것들은 대부분 만년한철로 만들어졌고,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싸다.

더불어 자신의 도인 철혈전궁도가 만년한철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괭이나 낫 등 일상용품을 넣고 다니는 궤짝이 만년한철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만년오금철로 만들어졌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죽은 사람이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맞을 거야. 그런데 왜?”

“ 만년오금철이라면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야, 인마. 가격도 어마어마하고, 신병이기를 만들 수도 있잖아.”

“ 내가 신병이기를 만들어서 뭐하게.”

“ 그건....”

말문이 막혔다.

녀석의 말이 맞다. 무인도 아닌 녀석에게 신병이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였다.

“ 맞다. 그걸 팔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

“ 이걸 팔아서 돈을 벌라고?”

“ 그래 인마. 굳이 잠룡쟁패를 얻어서 돈 벌 생각하지 말고 그걸 팔면 훨씬 많은 돈을 벌게 될 거다.”

“ 그건 돈 버는 게 아냐.”

“ 아니라고?”

“ 어려운 용어로 재화의 이동이라고 해. 그게 무슨 말이야면 이쪽 주머니에 있던 돈을 이쪽으로 옮기는 거밖에 안 된다는 거야. 다른 주머니에 넣는다고 돈이 불어나는 건 아니잖아.”

“ 그렇게 되는 거냐?”

“ 그렇지. 그리고 이건 내게 돈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 그 역할이 뭔데?”

“ 들어보면 알아.”

연우강은 턱으로 궤짝을 가리켰다.

“ 들어보면?”

막장은 연우강 앞으로 걸어가 양쪽에 매어져 있는 끈을 잡았다.

“ .....?”

생각 없이 들어 올리려던 막장의 얼굴이 흠칫 변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궤짝이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아! 만년한철이 일반 쇠보다 훨씬 무겁.....”

막장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궤짝은 단순히 무거운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덩치가 있고, 오육십 근 정도는 공깃돌 들듯 들어올린다. 그런데 궤짝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최소한 그 이상이란 소리다.

“ 백오십 근(90kg)정도 나갈꺼야.”

“ 배, 백오십 근이라고?”

막장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문득 지금껏 녀석의 행동이 머릿속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녀석은 이걸 등에 지고 평소와 다름 없이 행동했다. 직진을 해야 한다며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도 했고, 심지어 백여 장 높이의 절벽도 탔다.

“ 건강하게 살려면 어쩔 수가 없다.”

“ 이, 이것도 병과 관련이 있는 거냐?”

막장은 측은한 얼굴로 물었다.

연우강이 백오십 근이나 나가는 엄청난 짐을 매고 다니는 이유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약처럼 병 때문이라고 단정지어버렸다.

“ 병이라고?”

“ 병 때문이 아냐?”

“ 너 대단한 녀석이다. 이리 줘, 임마.”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궤짝을 둘러멨다.

“ 병이 있는 게 아냐?”

“ 됐어, 인마. 나 졸리니까 가서 잠이나 자자.”

연우강은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상하네. 병도 안 걸린 놈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을 처먹으면..... 그것도 병이잖아.”

막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연우강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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