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1화 (11/232)

제 11장 개독새.

“ 휴우!”

남궁운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살인을 했고, 창궁대 대원 열 명을 잃었다. 하지만 망탕산에서 뽑았던 검은 여전히 검집에 넣지 못하고 있다. 원단은 닷새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잠룡쟁패를 얻지 못한 탓이다.

“ 가주님!”

노노태세가 안타까운 얼굴로 남궁운화를 불렀다.

“ 여기까지가 한계인가봐, 노노.”

남궁운화는 검으로 시선을 주었다.

창궁검.

남궁세가의 가주지검으로 팔황정벌에 나섰던 할아버지가 지니고 계셨던 검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검만 다른 사람들의 손을 통해 전해졌다.

이젠 창궁검을 놓아야 할 때가 된 듯했다.

“ 우린 어디로 가지?”

“ 남궁세가로......”

노노태세가 말끝을 흐렸다.

“ 거기엔 내 자리가 없다는 건 노노도 알잖아.”

혈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남궁세가는 엄연한 무림세가고 권력을 쥔 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권력의 정점에서 떨어지는 순간 숙청당할 수밖에 없고, 죽임을 당하진 않겠지만 권력을 쥔 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살아야 한다.

남궁세가의 심처에서 연금 상태로 살다가 그들이 골라준 사내에게 시집을 가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무공에 대한 자질이 없다면 키우게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질이 보이면 그들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가주님, 접니다.”

그때 밖에서 창궁대 대주 남궁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세요.”

남궁운화는 구석진 탁자로 자리를 옮겨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남궁수인은 노인과 함께 들어왔다.

“ 오셨어요?”

남궁운화의 얼굴에 쓸쩍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남궁수인을 따라온 노인은 지난 십 년 동안 신세를 졌던 공공수 허일구였다.

“ 쯧! 우리 가주님 얼굴이 반쪽이 됐네.”

허일구는 혀를 찼다.

한 달 전에 보았을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던 남궁운화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은 거의 초죽음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좋은 소식이 아니라면 그냥 갈. 지금 너와 노닥거릴 형편이 아니다.”

노노태세가 톡 쏘아붙였다.

“ 내가 언제 나쁜 소식을 가져온 적 있었냐? 달리 넌 내게 큰절을 수백 번 해야 한다. 우리 가주님이 대야벌에서 나올 때까지 내 수발, 아니 수청을 들어야 한다.”

허일구는 헤죽 웃으며 남궁운화 건너편에 앉았다.

“ 죽고 싶으면 무슨 말을 못할까?”

노노태세는 허리춤에 있는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며 으르렁댔다.

“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허일구는 허리춤에 걸고 있던 자루를 들어 올려 노노태세 앞에 대고 흔들었다.

“ 뭐냐 그건?”

안에서 쇳소리가 들려오자 노노태세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허일구와 그녀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머리가 채 여ㅁ루기 전에 헤어지기는 했지만 서로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었다.

허일구가 남궁세가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준 이유가 바로 어린 시절 인연 때문이었다.

“ 달리 너와 나의 꿈!”

허일구는 자루를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쏟아냈다.

“ 헉!”

“ 억?”

남궁운화와 노노태세는 물론이고 허일구를 안내해 왔던 남궁수인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눈을 의심해야 할 광경이었다.

자루에서 나온 그것들은 지금껏 강호 무림에 홍역을 앓게 하였던 잠룡쟁패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우수수 떨어져 내린 게 아닌가.

“ 이거, 지, 진짜냐?”

노노태세는 여전히 경악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물었다.

“ 확인해 보면 알잖아!”

허일구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말했다.

“ 어디!”

노노태세, 남궁운화, 남궁수인은 경쟁이라도 하듯 잠룡쟁패를 집어들었다.

“ 세상에.”

노려보듯 잠룡쟁패를 살피던 노노태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룡쟁패 후면에 음각이 돼 있는 천우라는 글귀, 그 글귀가 바로 잠룡쟁패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단서였던 것이다.

다른 곳은 똑같이 만들 수 있는 데 천우라는 글귀만큼은 모조할 수가 없다. 바로 대야벌의 벌주인 천우 담대만승이 내공으로 새긴 글이기 때문이다.

그의 내공인 무적뇌화결은 쇳덩어리에조차 그을린 자국을 남기는데 그건 누구도 흉내를 낼 수가 없다. 그런데 허일구가 내놓은 잠룡쟁패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전부가 진품이라는 말이었다.

“ 며, 몇 개냐?”

“ 열일곱 개.”

“ 여, 열일곱 개라고?”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개나 된다는 말을 듣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 어떻게 구했죠?”

남궁운화 또한 노노태세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허일구의 대답을 기다렸다.

“ 내가 얻은 건 아니고, 팔아달라고 부탁을 받은 건데.....”

“ 팔아달라고 했다고요?”

더욱 황당한 말이었다.

잠룡쟁패는 모든 무림인들의 꿈이다.

서른 살 이하의 젊은이는 대야벌로 들어가 무공을 익히고자 하고, 그 젊은이들의 부모는 그 자식을 발판 삼아 이름난 가문을 세우고자 한다.

즉 잠룡쟁패가 여러 개 있으면 많은 자식을 대야벌로 들여보낼 수 있고, 더 많은 강자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잠룡쟁패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대야벌에서 내려준 잠룡쟁패를 지니고 대야벌까지 가는 것만 해도 버거운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열일곱 개나 되는 잠룡쟁패를 얻은 자는 전부 팔아달라고 했단다.

“ 원래는 스무 개였는데 세 개밖에 팔지 못했다.”

“ ......!”

세 사람은 모두 말을 잃었다.

세 개를 팔고 남은 게 열일곱 개라고 하는데 무슨 할 말을 할 것인가. 세 사람은 멍한 눈으로 허일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 누구죠?”

남궁운화가 입을 열었다.

“ 지금은 말하기 곤란하다. 그보다는 이것들을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선 이건 우리 가주님 거.”

허일구는 잠룡쟁패 하나를 남궁운화 앞으로 밀었다.

“ 팔 사람이 없어요?”

“ 찾아보면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느냐. 자칫 잘못하면 내가 이렇게 될 수도 있고.”

허일구는 제 목을 스윽 그었다.

“ 그렇군요. 이걸 팔아달라고 한 사람은 얼마를 원하죠?”

“ 백만 냥은 받은 적이 있다.”

“ 백만이면 너무 많아요.”

“ 세 개를 팔았다고 했냐?”

듣고 있던 노노태세가 물었다.

“ 삼백만 냥 중 녀석의 몫이 백오십 만 냥이다.”

“ 녀석?”

“ 나보다 어리니까 녀석이지.”

“ 망통 네 몫까지 전부 그 녀석에게 줘버려라.”

망통은 허일구의 어린 시절 별명이었다.

“ 무슨 소리야?”

“ 대니 이걸 전부 우리가 갖자.”

“ 우리?”

허일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 넌 대야벌에 넣고 싶은 제자 없냐?”

“ 있기야 있지. 하지만......”

허일구는 말끝을 흐렸다. 대야벌의 백대 고수인 막장을 뭉개버린 녀석이 연우강이다. 지금 당장은 녀석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들통이 나면 감당할 수 있을지는 걱정이 앞섰다. 막장을 뭉개놓고도 친구가 된 놈이 아닌가.

“ 정 안 되면 못 팔았다고 해. 그리고 나중에 잘 되면 그때 은혜를 갚으면 되잖아.”

“ 은혜를 갚아?”

“ 돈을 원하면 돈을 주고, 무공을 원하면 무공을 주면 된다. 망통.”

“ 들키면 녀석이 돌멩이로 내 머리를 깨버릴 텐데.”

허일구는 여전히 망설였다.

[ 가주님이 나오실 때까지 네 녀석 시중을 들겠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노노태세의 전음이 들려왔다.

“ ........!”

깜짝 놀란 허일구는 노노태세를 빤히 쳐다보았다.

[ 잠자리 시중도 들라면 그렇게 해주겠다.]

[ 이번 일에 목숨을 건 거냐?]

허일구도 전음으로 물었다.

[ 난 열다섯 살 때 남궁세가로 들어갔다. 혼인도 못 했고, 자식도 없다. 운화는 내 딸이나 다름없다.]

[ 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상관없어. 망통.]

[ 미친 것. 내가 쫓아다닐 때는 그렇게 뿌리치듯 도망치더니만 죽을 때가 다 되니까 자식을 갖고 싶은 거냐?]

허일구는 측은한 얼굴로 노노태세를 보았다.

젊은 시절 그녀가 남궁세가의 유모로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그녀가 받아주었다면 혼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노태세는 친구 이상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 네가 뭐라고 욕을 해도 할말 없다.]

노노태세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좋아, 그렇게 하자. 난 다섯 개만 있으면 돼.”

허일구는 잠룡쟁패 다섯 개를 집어들었다.

“ 팔아달라고 맡긴 분에게는 어떻게 말하시려고요?”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대야벌로 들여보낼 사람이나 뽑아라. 지금 무공이 강한 녀석보다는 심성이 착한 자 위주로 뽑아야 한다.”

“ 강해진다고 해도 배신하지 않을 그런 사람을 뽑으라는 거죠.”

“ 대야벌 무공을 배우게 되면 지금보다는 몇 배 강해질 것 아니냐.”

“ 뽑을 수 있겠어요?”

남궁운화는 남궁수인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 최대한 뽑아보겠습니다.”

“ 다른 대원들에게도 알리지 말고 개인적으로 줘서 보내세요. 제게도 보고할 필요 없고요.”

남궁운화는 잠룡쟁패를 남궁수인에게 내밀었다.

“ 나도 바쁘게 움직여야겠네. 다음에 보자꾸나!”

자리에서 일어난 허일구는 창문을 열고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 혼자만 알고 있을게요. 할아버지.]

창가로 달려간 남궁운화는 멀어지는 허일구에게 전음을 보냈다.

[ 넌 꼭 뭔가 필요할 때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 앞으론 계속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

[ 에라, 이 나쁜 것아. 연우강 그놈이다.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

[ 알았어요. 할아버지.]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노노태세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노노태세를 잘 돌봐 달라고 했어.”

“ 잘 돌봐 달라고요?”

“ 세가로 돌아갈 거야?”

“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가주님.”

“ 그럼 내 말 들어. 노노. 창궁대 대원을 기르는 장소는 세가보다는 하오밀문 같은 곳이 훨씬 나아.”

“ 인물은?”

“ 그것도 일구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무공에 자질이 있는 자들을 골라 창궁대 무공을 전수시켜 줘.”

“ 전 창궁대 대원들의 무공을 모릅니다.”

“ 그건 수인 숙부가 알아서 해줄 거야.”

“ 저도 가주님께서 나오실 때까지는 노노 님과 함께 하오밀문에 머물겠습니다.”

남궁수인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 수인 숙부는 지금부터 대야벌로 들어갈 대원을 고르세요. 대야벌 안에 들어가서는 알게 되더라도 들어가기 전에는 서로 모르게 처리하도록 하세요.”

“ 알겠습니다. 가주님.”

남궁수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남궁수인의 어깨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버렸던 꿈을 다시 찾은 자의 모습이었다.

“ 잘됐습니다. 가주님.”

“ 이게 노노 덕분이야.”

“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가주님이 복이 많으셔서 그렇지요.”

“ 아냐, 노노가 일구 할아버지와 친하지 않았더라면 우린 이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야. 우리 남궁세가는 항상 노노에게 신세만 지는 것 같아. 지금은 장담하지 못하지만 만알 내가 남궁세가의 전권을 쥐게 되면 그때부터는 정말 잘할게. 아니 잘할게요. 할머니.”

남궁운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노태세를 향해 절을 올렸다.

“ 가, 가주님.”

노노태세는 질겁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붙들었다.

“ 남궁세가의 가주가 아니었다면 전 벌써 할머니라고 불렀을 거예요. 하지만....”

“ 남궁세가의 가주는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전 비천한 유모에 불과합니다. 가주님.”

“ 아니에요. 노노는 유모가 아니라 언니였고, 어머니였고, 아버지였고, 할머니였어요. 난 노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요. 그러니 제발 절을 하게 해줘요. 아버지도 허락하실 거예요, 노노.”

남궁운화는 눈물을 글썽이며 노노태세를 보았다.

“ 그럴 순.....”

[ 이 멍청한 것아! 운화는 너마저 떠날까 봐 겁이 나서 그런거잖아. 그러니까 절을 받고 따뜻하게 안아 줘. 최고가 돼서 나오라는 덕담도 해주고.]

떠난 줄 알았던 허일구의 목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오자 노노태세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 알았습니다. 가주님.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가주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건 허락해 주십시오.”

노노태세는 물러나 자리에 앉았다.

“ 알았어요. 할머니.”

남궁운화는 활짝 미소 띤 얼굴로 절을 올렸다. 노노태세 또한 앉아서 절을 받지 못하고 맞절을 했다.

“ 최고가 돼서 나오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가주님.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는 무인이 돼 나오겠다고 말입니다.”

“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창궁무제 할아버지보다 더 강해져서 나올 테니까요.”

남궁운화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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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대 단체에서 개최하는 행사가 열리면 가장 먼저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그 다음엔 숙박업소와 주루가 들어선다. 대부분이 가건물 형태를 띠고 있지만 원단이 가까워지면 그나마도 방을 구할 수 없어, 숙박료나 술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곤 했다.

하늘 아래 벌판이란 이름의 천하평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야벌로 들어가는 어귀에 들어선 천하평에는 한 달 전부터 수백 개의 천막이 세워지고, 벌판 곳곳에는 좌판을 놓고 장사를 하는 자들로 가득했다.

어떻게 보면 손님보다 장사꾼들이 더 많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이른 새벽, 묵고 있는 손님들의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일어난 장사꾼들이 바쁘게 움직여 다녔다.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는 이가 있었다.

천 장 높이에 달하는 관제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막장과 연우강이었다.

거칠게 불어닥치는 바람에 두 사람의 옷은 찢어질 듯 펄럭였다.

“ 내가 눈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냐?”

연우강은 부들부들 떨며 막장을 노려보았다.

주변은 눈이 얼어붙어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 무서워?”

막장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십뢰를 주둥이에 처넣고도 웃으면서 단추를 눌렀던 녀석이 잔뜩 겁을 먹은 걸 보니 생경했다.

“ 그럼 자식아, 떨어지면 바로 죽음인 곳에서 무섭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냐?”

“ 넌 너를 사람이라고 생각은 하고 사냐?”

“ 그럼 내가 짐승이냐?”

“ 넌 사람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워.”

“ 어떤 면에서?”

“ 여러 면에서 그래.”

막장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자신도 연우강을 이곳으로 데려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십뢰로 생사결을 벌이고, 백오십 근에 달하는 궤짝을 메고 다니는 사실을 몰랐다면 아무리 친해졌다고 해도 여길 오지 않았을 것이다.

“ 어떤 면?”

“ 내 사부는 무공을 가르쳐주기 전에 날 이곳으로 데려왔다.”

막장은 화제를 돌렸다.

“ 사부가 누군데?”

“ 나고 그분의 정체는 몰라. 대야벌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어.”

“ 이곳으로 데려와서 그렇게 생각한 거냐?”

“ 대야벌 사람이 아니라면 날 이곳에 데리고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게 해준 말도 그렇고.”

“ 무슨 말을?”

“ 저곳을 보라고 하더구나.”

막장은 턱짓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 거기에 뭐가 있다고....”

막장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주었던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녀석이 가리킨 곳은 산이다.

그런데 그 산들이 글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아침해가 떠오르면서 산 그림자가 형성한 것은 하늘 천자였다.

“ 하늘을 볼 수 있는 봉우리라고 해서 이곳을 견천봉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구나.”

“ 신기하네.”

“ 거 천 자 위쪽에 건물이 있는데 보여?”

“ 글쎄,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연우강은 눈을 가늘게 모았다. 시선을 집중하자 비로소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거대한 건물이었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막장을 보았다.

“ 천상천이라 불리는 대야벌 벌주의 처소다.”

“ 자연이 만들어낸 하늘 천 자 위에 건물을 세웠다는 말이네?”

“ 그렇지. 초대 벌주인 대무천자 패께서도 이곳에 올라 자연이 만들어낸 천자를 본 거지.”

“ ..... 혹시 다른 건물들도 천 자에 맞춰 세워졌냐?”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응, 맨 위쪽의 획엔 야궐, 황궐, 무궐이 있고, 두 번째 획에는 왼쪽부터 묵야련, 철무련, 구중련, 금황련, 풍운련, 군마련, 녹사련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쪽 인 변의 왼쪽 획에는 사자, 생사, 만마, 패천, 만독림이 있고 오른쪽 변에는 사해, 천추, 낭인, 봉황, 사월림이 있다.”

“ 하늘이 있고 그 아래 황산을 비롯한 정, 사, 마가 총망라 돼 있으니 이곳에 곧 천하란 말이네?”

“ 그렇다. 연우강. 저곳은 무림이 아니라 천하다!”

막장은 벅찬 얼굴로 소리쳤다.

“ 그래서?”

“ 넌 지금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연우강.”

“ 어쩌라고?”

“ ..... 아무런 느낌이 없어?”

“ 추워서 미쳐버릴 것 같다.”

“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든가, 호연지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지 않는다고? 천하를 발아래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막장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 응!”

“ 간단해서 좋다!”

막장은 어이없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이곳에 올라온 것은 이십 년 전이다. 이제 열 살밖에 안 된 녀석이 잠룡쟁패를 얻어 대야벌 제자가 되겠다며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대야벌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곳이 아니었다. 대야벌 정문을 보며 분루를 삼키고 있는데 그분을 만났다. 그분을 따라서 올라온 곳이 바로 여기였고, 아침에 자연이 만든 경이로운 광경을 보았다.

그때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북받쳐 오르는 웅심 때문에 추위마저도 잊었다.

그때가 생각나 녀석을 이곳으로 데려왔다.

기본적인 체력은 이미 돼 있고, 전장에서 오 년을 굴러먹었다고 했으니 칼 쓰는 법 또한 수준급일 테다.

녀석에게 부족한 것은 내공 한 가지밖에 없다.

사실 무공을 익히는 게 어떠냐고 권유를 하려다가 그만 두고 말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 마디 말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런데 녀석은 아무런 느낌도 없단다. 아니 춥단다.

“ 저곳 어딘가에 초대 벌주님의 무공인 일천파류혼과 일천독행신이 있다. 그 무공을 얻는 자는 천하제일인이 된다고 하더구나.”

“ 대야벌의 역사가 얼마나 됐지?”

“ 이천년이란 사람도 있고, 천오백 년이란 사람도 있다.”

“ 그럼 그 동안 대무천잔가 하는 그 사람의 무공을 익혀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 익혀낸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찾아내질 못했다.”

“ 이천 년 동안 찾아내지 못했으면 없는 거야. 그건 만들어진 전설일 뿐이야. 속임수 말이야.”

“ 속임수?”

“ 그런 전설을 하나 정도 간직해야만 사람들이 꼬이거든. 시장통 약장수를 보면 알잖아. 그치가 들고 있는 건 보통 꽃뱀이나 구렁이 종류야. 하지만 장사치들은 그걸 음양교룡사 또한 혈목홍사라는 영물이라고 우기지. 사람들은 그 영물을 보기 위해 모여들고.”

“ 초대 벌주의 전설도 그렇다고?”

“ 아니면 이천 년 동안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잖아.”

“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정말 무공을 익힐 생각은 없는 거냐?”

막장은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 생각이 없는 게 아니고, 익히면 귀찮아지잖아. 사부라는 작자가 생기고, 사부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면 그 조직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악연을 맺게 될 테고, 악연을 맺으면 사람을 죽여야 하고, 주이다 보면 계속 죽이고, 계속 죽이다 보면 재마가 들리게 되고, 재미가 들리면 또 죽이게 되잖아. 무공을 익히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내 의사완 상관없이 끌려가는 그런 인간관계가 싫은 거야.”

“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 어쩔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인연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춥다. 그만 가자.”

“ 그랬구나.”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녀석이 천에 달하는 부하를 전부 잃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누구나 녀석처럼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강을 업은 막장은 산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한 시진 정도 쉬지 않고 달린 두 사람은 천하평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었다.

“ 안 들어가냐?”

아침을 먹고 난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룡쟁패를 받은 자들은 오백 명에 불과한데 벌판엔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 있다. 마치 군역 들어가는 자들이 모이는 장소 앞 전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오늘이 들어가는 날인 모양이지?”

“ 그런 모양이다.”

“ 그럼 우린 산에서 새해를 맞은 거네.”

막장이 헤벌쭉 웃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아무리 막장 인생이라도 그렇지 새해를 산에서 보내는 놈들이 어딨냐? 한해를 마무리하는 날에는 그저....”

“ 새해는 기루에서 기녀들 엉덩이 주물럭거리며 맞는 게 정석이란 말이죠?”

“ 그렇습니다. 공주님!”

연우강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아닌 이지약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보았을 때와는 달리 면사를 벗은 채였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서 싱그러운 내음이 풍겨오는 듯했다.

연우강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 이젠 공주가 아니에요. 연 공자.”

“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죠?”

“ 이 소저나 묘아 중 마음에 드는 걸로 부르세요.”

“ 이 소저가 나을 것 같네요.”

“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들어갈 곳은 정했나요?”

“ 들어갈 곳은 또 뭡니까?”

“ 모르세요?”

“ 저야 신의 부름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 신의 부름이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잠룡쟁패를 받은 잠룡들은 열 곳 중 한 곳을 고를 수 있어요.”

“ 아홉 곳 아닌가요?”

막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한 곳이 더 추가돼 열 곳이 됐다고 하네요.”

“ 추가돼요?”

“ 막장, 넌 좀 빠져라 자식아. 넌 하나만 알면 되지만 난 열 곳을 전부 알아야 하잖아.”

“ 무공은 싫다는 놈이 관심은.”

“ 호호호, 그래도 궁금한가 보죠. 뭐. 원래 잠룡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잠룡숙, 등룡숙, 구룡숙, 무룡숙, 월영숙, 비룡숙, 흑룡숙, 은룡숙, 지룡숙의 아홉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안정숙이란 곳이 추가됐다고 하네요.”

“ 이름만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찾기 힘들겠군요.”

“ 그래요, 연 공자. 안정숙만 빼면 다 고만고만한 가봐요.”

“ 안정숙은 다르단 말입니까?”

“ 이곳 소문이 안정숙만 빼고 들어가면 된다고 해요.”

“ 이 소저는 정한 모양이네요?”

“ 난 은룡숙으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뿌우! 뿌우! 뿌우!

바로 그때 대야벌 성문 위에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 완전히 똑같네.”

“ 뭐가 똑같다는 거죠?”

“ 군역 훈련소로 입소할 때랑 같다는 말입니다. 그때도 저렇게 나팔을 불었거든요.”

“ 그땐 기분이 어땠어요?”

“ 심장이 둥둥 뛰고 아랫배가 싸해지면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더군요. 아마 그때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 지금 내 심정이 그런데.”

“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활짝 펴면 금세 익숙해집니다. 이 소저.”

“ 지금 연공자는 어때요?”

이지약은 연우강의 말처럼 심호흡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 기분 더럽습니다.”

“ 더러워요?”

“ 그동안 사막 쪽을 보고는 오줌도 싸지 않았거든요.”

“ 그런데 군역을 또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예요?”

“ 그렇습니다.”

“ 호호호! 하긴 군역을 또 가라면 자살하겠다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럴 만도 하네요. 들어가는 것 같은데 가죠.”

“ 먼저 가십시오. 전 천천히 신청하렵니다.”

“ 왜죠?”

“ 가급ㅈ거이면 담대무궁이나 윤허 같은 놈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 그렇군요. 그럼 나중에 봐요. 연 공자.”

이지약은 활짝 웃으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가자!”

이지약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자 연우강은 걸음을 옮겼다.

“ 나중에 신청한다고 하지 않았나?”

“ 술 한 잔 걸치러 가자는 거다. 자식아.”

“ 술?”

“ 군역을 두 번째 가는 놈은 절대 맨 정신으론 못 들어간다.”

연우강은 어기적거리며 벌판 가장자리에 있는 노천 술집으로 향했다.

“ 알아서 해라. 잠룡은 너지 내가 아니니까.”

막장은 피식 웃으며 연우강을 따라나섰다.

노천 술집에 들어선 두 사람은 산서성 최고 명주라는 분주 열 병을 주문하고는 들이붓기 시작했다.

주인인 오육사는 질겁했다.

분주는 주정이 최소 육 할이다. 즉 술의 반 이상이 주정으로 돼 있어 불 속으로 부으면 오히려 불길을 키운다. 그런 분주를 두 사람은 물 마시듯 마시고 있었다.

워낙 비싼 술이라 돈을 벌어 좋기는 하지만 내심 두 사람이 걱정됐다.

“ 다음에 도전하시면 분명 대야벌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오육사는 위로하듯 말했다.

잠룡대전이 끝나면 대야벌 앞에서 저렇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는 연우강이 잠룡쟁패를 얻지 못해 실망한 사람으로 보았다.

“ 열 병 더줘.”

“ 그걸 다 마시면 죽을....”

“ 줘, 새꺄!”

“ 아, 알았습니다. 손님. 이게 마지막입니다.”

오육사는 분주 열 병을 두 사람 앞으로 내려놓았다.

“ 한 방에 끝장 보는 거다. 막장.”

“ 좋다. 이 인생 막장 자식아.”

두 사람은 분주를 한 병씩 들고 나발을 불었다. 그렇게 한 병을 비운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다음 병을 잡았다.

“ 주정을 첨거던 놈이 이런 걸로 간에 기별이나 오겠냐?”

막장은 병을 내려놓는 순간을 틈타 물었다.

“ 지옥에 발을 들여놓으면 어떤 걸 먹어도 취하지 않는다는 거 몰라?”

“ 그럼 지금은 취했다는 말?”

“ 삼 년 동안 술을 못 마신다고 하지 않았나?”

“ 그건 다른 놈들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넌 계속 마실 거잖아.”

“ 공식적으로 마시는 건 이게 마지막이잖아.”

“ 공식적으로?”

“ 그래, 공식적으로 마시는 마지막 술이니까 죽기 직전까지 마시고 가는 거야.”

두 사람은 헤죽대며 남은 술을 몽땅 비웠다.

“ 그러다 잘릴지도 모른다.”

“ 자를 놈을 호위까지 해서 모셔왔겠냐?”

“ 그렇네. 건배.”

막장은 마지막 병을 번쩍 들어올렸다.

“ 좋다. 건배하자,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연우강은 술병을 높이 쳐들어 건배를 한 후 병 주둥이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 더 없냐?”

술이 떨어지자 연우강은 오육사를 향해 소리쳤다.

“ 마, 마지막 술이었습니다. 공자.”

“ 이젠 술집 주인까지도 날 무시하네, 여기 있다.”

연우강은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던져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 같이 가, 임마.”

벌떡 일어난 막장이 천막 밖으로 나갔다.

곧 두 사람은 어깨동무를 한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 손님, 그쪽은 대야벌.....”

잘못 가고 있다고 말을 해주려던 오육사는 그만두었다. 말을 해준다고 들을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반 시진 후면 풀죽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 치도곤이나 당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래도 공연히 불쌍한 마음이 들어 멀어지는 연우강과 막장의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 다 들어왔느냐?”

잠룡궁의 궁주인 천기만리통 혁세군은 부하들이 있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한 명만 들어오면 끝이오, 혁 궁주.”

율령궁의 궁주 우담보가 성벽 위로 날아오르며 말했다.

“ 오백 명이 ㄷ르어왔단 말이오?”

“ 그렇소, 혁 궁주.”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팔아먹었다는 말이 되는군요.”

혁세군은 얼굴을 찌푸렸다.

등천대룡 담대무궁과 구룡군 윤허가 잠룡쟁패를 가지고 내기를 했다가 홀라당 털린 일은 이미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 보고를 받고 얼마 후, 잠룡쟁패가 거래되고 있는 정황이 천안원에 포착된 것이었다.

거래가 된다고 해도 대야벌로만 들어오면 문제가 되지 않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처음 있는 일이라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잠룡쟁패를 팔아먹은 자가 바로 연우강이었다.

“ 그런 것 같소이다.”

“ 혹시 아직 들어오지 않은 한 명이 연우강이오?”

“ 맞소. 그놈하고 막장만 도착하지 않았소.”

“ 조금만 더 기다려보도록 하지요. 안정숙은 어떻소?”

혁세군은 왼편 구석에 위치한 천막으로 시선을 돌렸다.

“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나서 안정숙으로 가는 잠룡은 단 한 명도 없소이다.”

“ 다행이군요.”

혁세군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잠룡들을 관리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잠룡을 배출한 문파나 가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야벌에 후예를 집어넣은 자들이 대부분 상당한 무공을 익히고 나올 거라고 기대를 하고, 십 년 전에는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하지만 올해는 안정숙 때문에 상황이 달라졌다.

혹시라도 잠룡이 실수로 안정숙을 선택하게 되면 그 잠룡은 훌륭한 무인이 아닌 전문 인부가 돼 대야벌을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야벌은 막강한 후원자를 잃게 되고, 그보다 더 큰일은 그로 인해 잃게 될 신뢰다.

그런 까닭에 일부러 안정숙에 대해 소문을 냈는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바라는 바대로 돼 가는 중이다.

그는 다시 벌판으로 시선을 주었다.

배웅을 왔던 사람들이 대부분 떠나고 벌판이 텅 비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장과 연우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 잠룡쟁패를 판 돈을 가지고 뜬 모양이오, 우 궁주.”

혁세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막장이 그럴 친구가 아닌데....”

우담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고 있는 막장은 전형적인 무인으로 돈 몇 푼에 대야벌을 버릴 자가 결코 아니었다.

“ 잠룡쟁패 하나에 백 만냥까지 팔렸다고 하오. 그 정도면 팔자를 바꾸기에 충분한 돈이오. 문 닫아라!”

혁세군은 아래쪽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는 몸을 돌렸다.

“ 거참! ”

여전히 믿어지지가 않는 듯 우담보는 미적미적 몸을 돌렸다.

“ 하하하! 그게 아냐 자식아. 흑랑기 노래는 이렇게 하는 거야.”

막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벌판 너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간-다! 가-라!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긴다!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달린다! 달려라!

미-친 이리가 적진을 달린다.

죽인다!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라!

마셔라! 마셔라!

적군의 피-로 갈증을 식혀라!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특이한 운율이었다.

마치 한 걸음 할 걸음 적을 향해 전진하는 듯한 느낌이 들며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 진군가군!”

혁세군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신음을 흘린 자는 비단 혁세군뿐만이 아니었다.

혁세군이 있는 아래쪽에 성문 앞에서도 신음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이번 일을 위해 금황련에서 파견 나온 용검호란 자였다.

“ 개독새!”

용검호는 벌판으로 시선으로 주며 중얼거렸다.

“ 개독새가 무슨 뜻인가?”

풍광은 의아한 얼굴로 용검호를 보았다.

북로정군 출신인 용검호는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벌판에서 들려오는 운율을 듣고는 돌처럼 굳어버린 것이었다.

“ 개 씨부랄 놈의 독종새끼를 세 자로 줄여 개독새라고 불렀다네.”

“ 누굴?”

“ 개독새를.”                   - 2권에서 계속 -

황금백수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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