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2화 (12/232)

제1장 몸 상태가 아주 좋은 날

쿵! 쿵! 쿵! 쿵!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적진을 향해 진격을 하는 것처럼 연우강과 막장은 땅을 다지며 대야벌을 향해 걸어갔다.

“ 저런 미친!”

우담보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라갔다.

이편을 향해 걸어오는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정상이 아니었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하면서 가까스로 잡는 모양새가 술에 취한 게 분명했다.

“ 허허허! 막장이 취선보를 익힌 모양이오, 우 궁주.”

혁세군 또한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띨 수 있는 이유는 철장마도 막장의 소속이 율령궁이기 때문이었다.

“ 철장마도!”

보다못한 혁세군이 버럭 소리쳤다.

“ 이런!”

내공이 잔뜩 실린 목소리가 귓전을 강타하자 막장은 번쩍 정신을 차렸다.

“ 야! 연우강!”

막장은 쫓기듯 연우강을 불렀다.

“ 자식아! 난 인생이 막장이지만 넌 이름부터 막장이잖아. 막장들에게 기대를 하는 놈들이 더 웃긴 거야!”

간-다! 가-라!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죽여! 죽여!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이 자식 완전히 맛이 갔네, 으차!”

막장은 연우강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는 대야벌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무슨 짓인가, 막장!”

막장이 정문 앞에 도착하자 우담보는 역정을 냈다.

“ 이 녀석이 군역에 들어가는 기분이라며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한잔 걸쳤습니다.”

막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 아무튼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들어가게.”

우담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몸을 돌렸다.

수백 명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계속 역정을 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책임 추궁을 하더라도 상황 정리가 우선이었다.

막장과 연우강이 들어가자 대야벌 정문이 육중한 굉음을 남기며 천천히 닫혔다.

“ 내려줘!”

“ 가고 싶은 데를 말해라. 내가 데려다 주마.”

“ 일단 속에 든 걸 먼저 뽑아내고.”

“ 토, 토한다고?”

막장은 질겁한 얼굴로 연우강을 내려주었다.

우엑!

쏴아!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연우강의 입이 쩍 벌어지고, 누런 토사 액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우엑!

쏴아!

“ 우아! 살 거 같네.”

두 번을 연거푸 쏟아낸 연우강은 입술을 스윽 닦았다.

“ 지저분한 새끼!”

막장은 코를 틀어막았다.

술 냄새와 음식 냄새가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영역 표시야, 인마.”

“ 영역 표시?”

“ 짐승은 오줌을 갈겨서 영역 표시를 하잖아!”

“ 넌 오줌을 입으로 싸냐?”

“ 술은 금세 오줌으로 나오않아. 그러니까 그게 그거지.”

연우강은 어슬렁거리며 오른편으로 향했다.

제자를 받는 창구인 천막은 십 장 간격으로 한 개씩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창구 주변에는 먼저 들어와 들어갈 곳을 선택한 잠룡들이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적고 있었다.

연우강은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 신상 명세서라고 보면 된다. 이름, 나이, 가문, 본인의 무공 정도 등을 적는다.”

“ 입대할 때도 가장 먼저 적는 게 그거였는데.”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맨 오른쪽에 자리한 천막 앞에 도착해 있었다. 천막 오른편에는 회색 바탕에 잠룡쟁패와 비슷한 문양을 수놓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제일숙 잠룡숙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 인기가 많은 곳이네.”

연우강은 신상명세서를 열심히 적고 있는 잠룡들을 기웃거렸다. 공연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한 곳에 멈춰 섰다. 제법 심각한 얼굴로 신상명세서를 적고 있는 그녀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운화였다.

“ 새해가 밝았으니 열일곱 살로 써야 하는데.”

연우강은 마치 잘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 야! 자식아,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막장은 질겁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연우강이 남궁운화를 본 건 그녀의 수혈을 짚었을 때다. 자고 있는 그녀의 몸을 더듬은 것 말고는 인연이 전혀 없다. 그런데 녀석은 느닷없이 나이가 잘못됐다며 끼어들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앗!”

남궁운화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 연 공자?”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 얼레?’

막장은 황당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당신이 내 나이를 어떻게 아느냐고 하든지, 아니면 언제 봤느냐는 식으로 나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궁운화는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활짝 미소를 지은 것이었다.

남궁운화가 가지고 있는 잠룡쟁패가 허일구를 통해 전해진 사실을 모르는 막장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 그런 건 정확하게 적지 않으면 나중에 꼬투리 잡힙니다. 소저.”

“ 생일이 십이월 달이라서 열일곱 살이라고 하기엔 좀 그래서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어? 십이월 달에 태어났어요?”

“ 연 공자도?”

“ 난 그믐날입니다.”

“ 저도 그런데요?”

남궁운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그럼 우리 둘은 같은 날 태어난 거네요. 어쩐지 운화 소저의 성격이 좋더라 했네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 와! 정말 그렇네요.”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이곳으로 들어온 다른 잠룡들을 보며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남궁운화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 그래도 열일곱 살로 적으세요. 나이가 어리다고 하면 실력도 안되는 것들이 공연히 깔보곤 한답니다.”

“ 그럴까요?”

“ 경험자니까 내 말 들으세요.”

“ 알았어요. 그렇게 할 게요. 그런데 여기 잠룡숙으로 들어올 거예요?”

“ 일단 돌아볼 생각입니다.”

“ 그렇군요.”

남궁운화는 실망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가 되세요. 그리고 대야벌에서 나갔을 때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그런 가주가 돼야 합니다.”

“ 아, 알았어요.”

“ 나중에 성공해서 크게 한 턱 낸다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갈 수 있는데.”

“ 그 말은 전에도 했는데?”

숲에서 그가 잠룡쟁패를 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 뭐라고요?”

“ 아, 아니에요. 열심히 할 거라고요.”

그때 복면을 하고 나타난 사람이 자신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 남궁운화는 얼른 말을 바꿨다.

“ 삼 년 동안 지켜볼 겁니다. 소저. 만일 게으름을 피우거나 포기하면 볼기짝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려줄 겁니다.”

“ 걱정 마세요.”

“ 바로 그겁니다. 소저. 지금처럼 주먹을 불끈 쥐면 무서울 게 없습니다. 알았죠?”

남궁운화를 향해 주먹을 불끈 틀어쥐어 보인 연우강은 몸을 돌렸다.

‘ 고마워요, 연 공자.’

남궁운화는 잠룡들 사이로 걸어가는 연우강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서기로 결심을 했다. 최고가 되지 못하면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발을 들여놓자마자 이곳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잊었던 것이다.

그녀는 다시 신상명세서를 꾹꾹 눌러썼다.

“ 처음 만난 것 아니었어?”

막장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처음?”

“ 그래, 인마. 넌 남궁운화를 망탕산에서 처음 봤잖아.”

“ 그랬어?”

“ 전에 본 적이 있어?”

“ 공식적으로는 첫 만남이 맞네.”

“ 그런데 그게 가능해?”

“ 뭐가?”

“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행동하는 게 가능하냐고.”

“ 같은 날 태어났다고 했잖아.”

“ 그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 궁합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 궁합이 맞아?”

“ 아무래도 난 취향이 그쪽인가 봐.”

연우강은 키들키들 웃었다.

“ 그쪽?”

“ 왜 어린애를 밝히는 족속들 있잖아.”

“......!”

“ 나도 내가 나쁜 놈이라는 거 잘 아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마, 인마.”

“ 혹시 너 나이는 알고 있냐?”

“ 나? 해가 바뀌었으니까 스물둘이잖아. 막장 넌 서른여섯 살이고.”

“ 그럼 스물둘에서 열일곱을 빼면 얼마지?”

“ 다섯.”

“ 너하고 남궁운화하고 나이 차이다.”

“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자식아!”

“ 둘 다 애란 말이다. 새꺄!”

막장은 연우강의 뒤통수를 툭 쳤다.

“ 그런가? 난 내가 훨씬 많이 먹은 줄 알았네.”

“ 마음에 들어?”

“ 누가?”

“ 누구긴 인마, 개 말하는 거지.”

“ 난 황금백수가 꿈이라고 했잖아, 자식아.”

“ 황금백수는 혼인을 하면 안 되는 거냐?”

“ 당연히 안 되지. 마누라라는 존재가 내 옆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황금백수의 꿈은 물 건너가는 거야.”

“ 그런 녀석이 꼬리는 왜 치는데?”

“ 내가 꼬리를 쳤다고?”

“ 내가 보기엔 꼬리를 치는 것 같더라. 그것도 아주 열심히.”

“ 그건 꼬리를 치는 게 아니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거라고 하는 거야, 자식아.”

“ 용기를 북돋워줬다고?”

“ 잔뜩 주눅이 들어서 벌벌 떨고 있는데, 그냥 지나갈 수가 없잖아. 우리 때문에 마음고생도 심하게 한 앤데.”

“ 척 보면 여자가 어떤 심리상태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도 황금백수의 능력이냐?”

“ 아니, 그건 훈련 교관의 능력.”

“ 훈련 교관도 했냐?”

“ 백호소가 되기 위해서는 교관 노릇을 한 번은 해야 해. 육 개월 동안 교관 노릇을 하면, 신병이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된다.”

“ 개 상태가 어땠는데?”

“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마음속에 병이 든 경우라 할 수 있어. 그런 애들은 대부분 중간에 낙오를 하고 말아. 마지막엔 탈영을 시도하다가 죽거나, 탈영에 성공한다고 해도 사막에서 자학하다가 혼자 죽게 되지.”

“ 지금은 괜찮은 거냠?”

“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으면 없던 힘도 솟아나거든.”

“ 자식.”

막장은 빙그레 웃었다.

녀석을 보고 있으면 이제 스물두 살이란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다. 인생 경험이 풍부한 배건 노장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좀 더 일찍 무공을 익힐 기회를 잡았더라면 녀석은 최고의 무인이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아쉽기 그지없었다.

“ 재는 누구지?”

연우강은 두 번째 천막인 등룡숙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푸른 무복을 걸친 사내가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거였다.

“ 저놈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 섬전십삼검 남궁철상이라는 자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막장의 말을 잘랐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막장 왼편에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노인이 누런 이를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과연 노인을 가만히 쳐다보던 연우강은 다시 남궁철상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몰락한 가문을 뜯어먹지 못해 안달하는 노친네들이 차기 가주로 앉히고 싶어한다는 녀석?”

“ 그렇다.”

‘ 이놈 봐라?’

대답을 하는 무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보통 사람은 모르는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통성명을 하든지 아니면 상대의 신분에 관심을 가진다. 그런데 녀석은 얼굴을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상관이 부하에게 보고를 받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 그럼 등룡숙에서 주시할 놈은 담대무궁과 남궁철상이라고 보면 되겠고. 구룡숙에는..... 윤허라는 녀석이 있네. 윤허는 출신이 어디지?”

이번에도 역시 연우강은 다른 천막을 향해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 화산파 출신이다.”

“ 그럼 거철산은?”

“ 권으로 유명한 진천권가 출신이다.”

“ 형님 동생 하던데 형제 아니었어?”

“ 둘은 의형제를 맺었다.”

“ 어쩐지 생긴 게 다르다 했지. 그건 그렇고 여긴 무룡숙이네. 무룡숙에도 주목할 만한 자가 있어?”

“ 만화은영 몽요라는 계집아이가 있다.” “ 어디 출신이지?”

연우강의 시선이 무룡숙을 향했다.

한참을 더듬어보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무공을 익힌 무인답지 않게 약간 통통해 보이는 소녀가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서른 살 이하만 들어올 수 있는 걸로 아는데요.”

둘의 시선이 얽히자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 내 나이가 서른이 넘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몽요는 기이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특이한 사내다.

이곳에 들어와 있는 잠룡들은 대부분 한 지역에서는 유지라고 할 수 있는 대단한 가문 출신들이다.

더불어 무공 또한 이미 일류를 넘어선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데 저자는 마치 자기 집에 들어온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한다.

문득 그가 잠룡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 키가 작은 반면에 약간 넉넉한 체형인 사람은 대부분 동안이죠. 하지만 나이를 속일 수 없는 게 하나 있습니다.”

“ 그게 뭐죠?”

몽요는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 눈입니다, 몽요.”

“ 내 눈이 어떻다는 거죠?”

“ 수만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호수의 수면을 보는 것처럼 깊고 그윽합니다. 깊은 고뇌가 없는 사람은 그런 눈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깊은 고뇌는 인생의 경험에서 나오지요.”

“ 호호호! 하지만 당신 눈도 만만치 않은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죠?”

“ 제 눈은 많은 살인 경험 때문입니다.”

“ 살인을 많이 해봤나요?”

“ 몽요보다 몇 배 더 했을 겁니다.”

“ 내가 살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죠?”

“ 그윽한 눈 속에 일렁이는 차가운 기운 때문입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살인 경험이 아주 많죠. 아마 전쟁터에서 얻은 경험일 겁니다.”

“ 당신도 군인이었나요?”

“ 그렇습니다. 몽요.”

“ 동영은 생활이 곧 전쟁이에요, 연 공자.”

“ 동영이면 바다 건너에 있는 섬나라?”

“ 그래요, 중원 주변에 있는 나라 중 전쟁이 가장 많은 곳이에요.”

“ 동영 여자는 남편에게 매우 헌신적이라 신부감으로는 최고라고 하던데, 몽요도 그 말에 동의하십니까?”

“ 그건 맞아요. 동영 여자들은 남편에게만큼은 아주 순종적이에요.”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몽요,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절 찾아주십시오.”

“ 호호호! 알았어요, 연 공자.”

몽요는 소리내어 웃었다.

“ 그럼.”

연우강은 목례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 여자 후리는 재주 하난 타고났구나.”

무원은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듯 격의 없이 다가가는 사람은 녀석이 처음이었다.

“ 인간 관계란 먼저 벽을 쌓지 않는다면, 대화 정도는 쉽게 나눌 수 있어.”

“ 하지만 장수하고 싶으면 몽요는 넘보지 말아라 이눔아.”

“ 강하다는 말?”

“ 몽요의 만화은신사형은 천마의 천마환환신공과 쌍벽을 이루는 은신술이다.그녀의 표적이 되는 자는 무조건 죽는다.”

“ 그래도 최고의 신부감이라는 데는 영감도 동의할걸?”

“ 클클클! 그렇다. 이놈아. 할 수만 있다면 동영 여자에게 장가를 가라.”

“ 나중에 시간 나면 동영에 한 번 가봐야겠네. 그 다음은.......”

“ 백색 바탕에 달을 수놓은 저 깃발은 월영숙을 나타낸다. 월영숙에서 눈여겨봐야 할 잠룡은 빙마후 수여설이다. 빙마후 수여설은 북해빙궁 출신으로 궁주만 익힌다고 알려진 빙하빙백강을 극성으로 익히고 있다.”

“ 그럼 궁주야?”

“ 궁주는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다.”

“ 저 여자인 모양이지?”

연우강은 월영숙 깃발 옆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여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조금 전 만났던 몽요와는 달리 수여설은 상당히 키가 컸다. 더불어 색목국 여자들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 가서 물어보려무나.”

“ 저 여자는 마음의 벽을 너무 높게 쌓고 있어서 안 돼. 영감. 그런 상태를 일컬어 대화공황증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친해지기 전에는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는 증상을 보여. 잘 못 말 걸었다간 최하가 중상이고 심하면 저승 행이야.”

“ 그것도 보이는 거냐?”

“ 당연히 보이지. 그런데 여자가 몇 명이나 되지?”

“ 이번에 들어온 잠룡들 중 여자는 백 명이다.”

“ 조금 적네. 최소한 이백 명은 돼야 하는데, 저기 날개 달린 용이 있는 깃발은 어디지?”

연우강은 자색 깃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 비룡숙이다. 비룡숙에서 주목할 녀석은 다라밀영 이라파다. 천축 출신인데, 서장 포달랍궁에서 무공을 배웠다.”

“ 저기 금색 가사를 입고 있는 중놈?”

“ 그렇다.”

“ 중이면 염불이나 열심히 읊을 일이지 무공은 무슨.....”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이라파라고 하였던 중을 보았다. 그 역시 지금껏 보았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안정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 소림사 중놈들이 득실대는 곳이 대야벌이다. 서장 중이 왔다고 욕할 것 없다. 이놈아.”

“ 하긴 중놈도 먹고 싸니까. 저기 흑색 깃발은 흑룡숙인 모양이네?”

“ 흑룡숙에는 무영사룡 율한천을 주시해야 한다. 녹림에서 심혈을 다해 키운 자다.”

“ 역시 강하겠지?”

“ 지금껏 말했던 자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 그럼 강하단 말이네. 저긴 은룡숙?”

연우강은 은색 깃발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 그렇다. 은룡숙에서 주의할 인물은?”

“ 소명공주 이지약이지.”

“ 그녀를 아느냐?” “ 잘 안다고 하기보다는 고객이야?”

“ 고객?”

“ 잠룡쟁패를 스무 개나 사주었으니까 소중한 고객이지. 앞으로도 고객이 될 가능성이 높고.”

“ 잠룡쟁패를 팔았다고?”

무원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만일 영감이 잠룡쟁패 사십 개를 손에 넣었다면 어떻게 할 건데, 파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 있어?”

“ 그거야.....”

무원은 말끝을 흐렸다.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어떤 단체에 속해 있다면 사형제들에게나 줄 테지만 녀석은 연씨 상단 출신이고 이곳도 원해서 온 것이 아니다. 잠룡쟁패가 많다고 해도 마땅히 써먹을 곳이 없는 건 당연했다.

“ 먹는 거라면 모를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게 잠룡쟁패잖아. 더불어 그믐날이 지나는 순간 똥값으로 변하고.”

“ 대야벌 일천오백 년 역사 중에 잠룡쟁패를 판 놈은 네가 처음이라는 건 아느냐?”

“ 나는 잠룡쟁패를 판 게 아니고 꿈을 판 거야. 영감. 꿈을 판 대가로 약간의 돈을 받았을 뿐이고.”

“ 꿈?”

“ 저들의 꿈을 꿀 수 있는 이유가 잠룡쟁패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난 꿈을 판 셈이지.”

연우강은 이지약이 있는 곳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 여전하네요.”

이지약은 미소로 연우강을 맞았다.

“ 어떻습니까?”

연우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 긴장된다고 하면 남궁세가의 가주에게 한 것처럼 지켜보겠다고 하실 건가요? 제대로 하지 않으면 볼기짝에 멍이 들도록 때려주고?”

“ 그걸 들었어요?”

연우강은 잠룡숙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잠룡숙이 있는 곳에서 이곳까지는 거의 칠십 장 가량 된다.

“ 귀를 열고 있었다니 저절로 들리던데요.”

“ 귀가 엄청나게 밝네요.”

“ 연 공자도 무공을 익히게 되면 나처럼 될 수 있을 거예요.”

“ 그건 별로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이 소저.”

“ 왜죠?”

“ 온 세상 사람들이 남의 말을 훔쳐듣는 무공....”

“ 천리지청술이에요.”

“ 그 천리지청술을 익히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세상은 절간처럼 변하고 말 겁니다.”

“ 전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눌 거란 말인가요?”

“ 싸울 때만 큰 소리를 내지 않을까요?”

“ 훗! 그렇군요. 그럼 조용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더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연 공자는 어디로 들어갈 생각이죠?”

“ 삼 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 그런 곳이 있을까요?”

“ 지금 찾고 있습니다.”

“ 무공은 익히고 싶지 않으세요?”

“ 무공을 시작하기엔 제 나이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 그렇긴 하지만.....”

“ 제게 어울리는 걸 찾아봐야지요. 그럼 열심히 하세요.”

“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막 몸을 돌리려는 연우강을 향해 이지약이 말했다.

“ 감사합니다. 이 소저.”

연우강은 환한 미소를 보내고는 몸을 돌렸다.

곧 그는 무원과 막장 앞에 와 섰다.

“ 그녀의 꿈은 뭔지 아느냐?”

무원이 물었다.

“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짐작이 가는데 이지약 소저의 꿈은 모르겠어. 혹시 영감은 알아?”

“ 네가 나보다 더 친한 것 같은데 직접 물어보고 내게도 가르쳐주려무나.”

“ 혹시라도 알게 되면 전해줄게. 지룡숙에서 주의할 자는 누구지?”

연우강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지룡숙으로 시선을 주었다. 지룡숙 천막 옆에는 초록색 바탕에 숲 속에서 노닐고 있는 용이 수놓아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 전마 사유성이란 자다. 마도 무림에서 심혈을 기울인 자다.”

“ 그럼 지금까지 실력이 드러난 자만 아홉 명이란 말?”

“ 그렇다.”

“ 어느 정도 수준이지?”

“ 일파의 문주급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 일파의 문주급 이상이란다, 막장.”

“ 왜 날 보는데?”

막장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 긴장되지 않아?”

“ 내가 잠룡이냐? 긴장될 일이 어디 있냐?”

“ 최하 아홉 년놈은 삼 년 후 너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데 긴장되지 않는다고? 비단 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몇 번 처먹더니 여기에도 바람이 든 거냐?”

연우강은 막장의 가슴을 푹 찔렀다.

“ 나, 나 때문이라고?”

막장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무인들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기에 녀석도 드디어 무공을 익힐 마음이 생긴 걸로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녀석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내심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야장의 장주 무원에게 질문을 던졌던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였다니.

“ 그동안에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잖아. 돈이야 말만 하면 언제든지 줄 수가 있지만, 막장 넌 돈보다 무공을 더 좋아하는 성격이잖아. 그래서 앞으로 네 경쟁자가 될 자들에 대한 정보를 약간 준 것뿐이야. 여하튼 이곳까지 오는데 심심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웠다.”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간혹 찾아오마.”

막장은 연우강의 손을 굳게 잡았다.

“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나에 대한 소문은 꾸준히 듣게 될거야.”

“ 아무튼 열심히 해라.”

막장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찾아간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잠룡들이 훈련을 받는 기간에는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다.

마음은 있어도 앞으로 삼 년 동안은 녀석을 볼 수 없을 터였다.

그때만 해도 막장은 일 년이 채 지나기 전에 연우강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녀석과 지긋지긋한 동행이 다시 시작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무튼 막장은 아쉬운 얼굴을 한 채 멀어졌다.

“ 어디로 간다...”

막장이 떠나자 연우강은 지나쳐왔던 아홉 개의 숙을 하나씩 훑었다. 이미 제자 등록이 끝난 듯, 몇몇 곳은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저긴 안 가냐?”

무원은 마지막 남은 안정숙을 가리켰다.

“ 저긴 아무도 없잖아. 아무도 없다는 것은 별 볼일 없다는 뜻이고 별 볼일 없는 곳은 굳이 가볼 필요가 없지.”

“ 그래도 이왕 돌아봤는데 저기도 가보는 건 어떠냐?”

“ 안정숙이 뭐하는 곳인데?”

“ 무공을 익히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안정숙이다.”

“ 돈?”

‘ 누가 장사꾼 집안 출신이 아니랄까 봐.’

무원은 피식 웃었다.

“ 안정숙은 야장에서 개설한 곳이다.”

“ 야장은 강호 무림의 하오밀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하던데, 맞아?”

“ 어딜 감히 하오밀문과 야장을 비교하느냐? 하오밀문은 강호 무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야장은 대야벌을 쥐락펴락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정말?”

무원의 말이 조금 의심스러웠다.

“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가 보겠느냐?”

“ 그런데.....”

“ 궁금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물어라.”

“ 영감은 누구야?”

“ .......?”

무원은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잠룡숙이 있는 곳에서 이곳까지는 백 장 거리다.

그 거리를 오면서 녀석은 질문을 했고, 자신은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런데..

“ 모르는 거냐,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거냐?”

무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 난 추측을 싫어하거든.”

“ 짐작은 하는데 확실하게 알고 싶다는 거냐?”

“ 응.”

“ 일단 가자.”

무원은 연우강의 팔을 잡아 끌고 안정숙 창구로 향했다. 안정숙 천막 안에는 무원과 비슷한 행색의 노인 한 명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창 아우, 우리도 드디어 제자를 받게 됐네.”

천막 안으로 들어간 무원은 탁자를 쿵 치며 소리쳤다.

졸고 있던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번쩍!

노인의 눈에서 푸른 광채가 번뜩했다.

그것은 환골탈태를 겪은 무인들이 상대를 쏘아보거나 운기행공을 마친 다음 눈을 떴을 때 한순간에 나타나는 광채로 옥안이라고 부르는 경지였다.

워낙 찰나지간 나타났다가 사라진 탓에 연우강은 푸른 색 옥안을 보지 못했다.

다만 노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에 움찔 했을 뿐이다.

“ 난 창노다.”

“ 난 아직 결정하지 않았으니까 헛물켜지 마.”

“ 넌 우릴 선택할 수밖에 없다, 연우강.”

창노라고 하였던 노인은 연우강을 쏘아보며 말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다른 곳은 무공을 가르치지만 안정숙에서는 무공의 기초를 잡아준다. 무공이 없는 너에게딱 어울리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난 무공엔 흥미가 없는데, 어떡하지?”

“ 안정숙으로 들어오면 대야벌 전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고?”

“ 물론이다. 연우강. 설사 금역이라고 해도 안정숙 제자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 흥미가 조금 당기려고 하네.”

연우강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술, 계집, 돈을 좋아하면서도, 타인의 간섭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아주 독립적인 가치관을 지닌 넌 딱 안정숙 체질이다.”

창노는 독립적인 가치관이란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 그거 칭찬이야?”

“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 그럼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하지만 난 손바닥에 못박이는 짓은 못해.”

“ 우린 장갑을 끼고 무공을 익힌다.”

“ 인시 말에서 묘시 말까지는 전적으로 나를 위한 시간이야. 그 시간엔 누구도 간섭을 해서도 안 돼.”

“ 끝나는 시간은 장담할 수 없지만 시작은 진시부터다.”

“ 혼자 살고 싶어.”

“ 다섯 채의 저택이 준비돼 있다.”

“ 지하실도 있어야 해.”

“ 무공은 익히지 않는다면서 굳이 지하실이 있어야 하는 거냐?”

“ 여하튼 지하실이 있었으면 좋겠어.”

“ 지하실은 아니지만 지하 창고가 있는 집이 있다. 창고지기가 기거하던 곳이라 다른 곳에 비하면 작다.”

“ 어차피 혼자 살 거니까 상관없어.”

“ 이걸 작성해라.”

창노는 한편에 두었던 종이를 내밀었다.

“ 이름, 나이, 가문도 전부 알면서 작성하긴 뭘 작성해. 영감이 알아서 적어.”

“ 이건 본인이 직접 적어야 하는 거다. 적지 않으면 대야벌의 제자가 될 수 없다.”

“ 니미럴! 난 먹물공황증이 있는데.”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오른편 끝에 있는 붓을 잡았다.

“ 벌써 떤다, 떨어.”

연우강은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틀어쥐었다.

“ 넌 그렇게 글을 쓰느냐?”

창노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이 하는 양을 보았다.

녀석의 오른손은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뭐 해, 종이를 잡아야 글을 쓸 거 아냐?”

“ 네 녀석은 지금 뭐하는 거냐?”

“ 이거 장난 아냐. 영감. 제자를 받고 싶으면 잡으라고, 아니면 바로 나가버릴 테니까.”

“ 알았다, 자식아.”

창노는 피식 웃으며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손끝으로 살짝 눌렀다.

“ 이름부터 적는다 이거지.”

연우강은 신중한 얼굴로 종이 위로 붓을 가져갔다.

“ 씨팔! 오늘은 몸 상태가 아주 최상이네.”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가던 연우강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 지금 글 쓰는 것 맞느냐?”

“ 정신 산만하면 글이 흐트러지니까 말 시키지마.”

연우강은 신중한 얼굴로 글을 적었다.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마지막 한 점을 찍기 위해 심사숙고하는 화공을 보는 듯했다.

“ 이제 이름은 끝났고, 가문은 ‘금릉 연씨 세가’니가, 씨팔 여섯 자나 되네.”

다시 신중한 얼굴을 한 채 나머지 칸을 채웠다.

이름과 가문 나이 그리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쓰는데 무려 일 각을 잡아먹은 후 연우강은 맨 밑에 있는 수결란에 손바닥 장인을 찍어 마무리했다.

“ 역시 몸 상태가 최고였네.”

“ 뭐라고 쓴 거냐?”

창노는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이 작성한 신상명세서를 보았다. 녀석이 쓴 글자의 수는 딱 스무 자다.

한 번 휘갈기면 끝날 것을 일 각에 걸쳐 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녀석의 글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오백 년 전에 쓰였다는 전서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대충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아무튼 글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건 분명했다.

“ 연우강, 스물 둘. 취미칸에는 애마 타고 산책. 특기란에는 주지육림, 무공은 없으니까 무공란은 비워 둔 거야. 뭐가 잘못 됐어?”

“ 그러니까 넌 이걸 읽을 수 있단 말이냐?”

창노는 연우강이 쓴 글을 눈으로 가리켰다.

“ 난 글처럼 보이는데, 영감은 아냐?”

“ 너 일부러 이렇게 그린 거지?”

썼다는 말보다 그렸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글이었다. 아니 설사 그린다고 해도 이렇게 나오진 않을 듯했다.

녀석의 설명을 듣지 않으면 스무 자의 글 중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은 단 한 글자도 없었다.

“ 몸 상태가 최상이라고 했잖아.”

“ 그럼 최상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데?”

“ 한 시진 정도 지나면 나도 무슨 글인지 몰라. 그런데 그건 백 년 후에도 알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나온 작품이니까 영감은 운이 좋은 거라고.”

“ 오 년 만에 처음 쓴 글은 아니고?”

“ 영감님은 점쟁이 하면 딱 좋겠네요. 다들 들어간 것 같은데 우리도 그만 가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 말도 올리기로 한 거냐?”

“ 이젠 한 식구가 됐으니까 어른 대접을 해 드려야 할 거 아닙니까?”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