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넌 육백 개를 맡아야 한다.
세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얼굴이 훼손된 두 명은 무원과 창노였고,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한 명은 야장의 대소사를 살피는 향노라는 자였다.
“ 거참!”
무원은 허탈한 얼굴로 찻잔을 노려보았다.
철장마도 막장의 성격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안다.
공사가 분명하고, 무공을 제외하곤 녀석이 관심을 두는 건 없다. 그런 녀석이 나이를 떠나 친구로 삼을 정도면 연우강 또한 상당한 녀석이라고 봐야 한다. 아니 대단한 녀석이란 사실은 여러 방면에서 이미 증명이 됐다.
문제는 녀석의 몸이다.
인간의 혈도는 태어날 때에는 활짝 열려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만 남기고 전부 막힌다. 그래서 무림 세가나 거대 문파는 태어나자마자 혈도가 막히지 않는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그 조치가 바로 벌모세수다.
벌모세수를 하게 되면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상의 신체를 가졌다고 할 수 있고, 그 상황에서 개정대법으로 내공을 주입하면 그야말로 최고의 무인이 탄생한다.
이번에 들어온 잠룡들 중 잠룡대전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자들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녀석은 아니었다. 맥문을 쥐고 혈도를 살폈는데, 일반 양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방법이 없겠는가?”
무원은 답답한 얼굴로 창노를 보았다.
“ 완전히 맹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
창노가 찻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 막장이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
“ 그 녀석이 지고 있던 궤 무게가 백오십 근이나 나간다고 하더군요.”
“ 백오십 근이라고?”
“ 그렇습니다. 형님. 그걸 등에 지고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행동했답니다.”
“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구먼. 그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녔다면 우리가 그동안 준비했던 건 쓸모없게 되지 않았는가.”
“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백오십 근이나 되는 궤를 무리 없이 지고 다닐 정도면 근육은 이미 최고조로 발달해 있다고 봐야 합니다.”
“ 녀석은 무공을 익히지 않겠다고 단언했네.”
처소로 안내해 주면서 무공을 익혀보겠냐고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대번에 거절했다.
이번엔 나이가 찼다고 해도 삼 년 동안 노력만 하면 충분히 고수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녀석은 무공을 익히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하였다.
“ 대야벌에서 상단의 자제들에게 잠룡쟁패를 내린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네.”
“ 대야벌의 의도를 알아차릴 정도의 머리라면, 우리 무공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 자넨 모든 걸 긍정적으로 보는군.”
“ 클클클! 그 바람에 이곳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향 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창노는 오른편에 앉아 있는 향노를 보며 물었다.
“ 그 녀석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형님.”
“ 지병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지병 때문에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면 만사 도로아미타불입니다.”
“ 나는 그 지병을 이용할 참이네.”
“ 지병을 이용한다는 건 무슨 소린가?”
듣고 있던 무원이 물었다.
“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매일 약을 먹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약을 이용하자는 거지요.”
“ 약을 이용한다고?”
“ 우선, 막힌 혈도를 뚫어야 할 것 아닙니까?”
“ 약으로 혈도를 뚫는단 말인가?”
“ 이 약사 능력과, 삼 년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거면, 삼 년 안에 생사현관을 제외한 혈도를 몽땅 뚫어 놓을 수 있습니다.”
“ 그럼 당장 병명부터 알아봐야겟군. 난 그 돌팔이 녀석에게 다녀올 테니까 자네들은 그 녀석에게 가보게.”
그 말을 끝으로 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알겠습니다. 형님.”
거처를 나선 무원은 곧바로 여의전으로 향했다.
여의전은 야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다경 정도를 걸어 약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허름한 건물로 들어갔다.
“ 나다, 돌팔이.”
무원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 지하에 있다.”
무원은 오른편 구석에 나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아래쪽으로 계단이 나 있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갈수록 약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희미하게 야명주가 밝혀진 석실 안쪽에서 구부정한 노인이 커다란 솥 안에 연신 뭔가를 던져 넣고 있었다.
그가 바로 여의전 전주인 이승걸이었다.
“ 아직도 포기 못 한 거냐?”
무원은 코를 킁킁거리며 말을 이었다.
“ 특이한 놈을 제자로 받았더구나.”
이승걸은 손을 탁탁 털며 무원 곁으로 걸어갔다.
“ 특이한 정도가 아니라 괴물이다.”
“ 괴물?”
“ 잠룡쟁패를 두 번 받은 최초의 잠룡이고, 대야벌 무사의 호위를 받아 들어온 최초의 잠룡이고, 잠룡쟁패를 팔아먹은 최초의 잠룡이고, 만취가 돼서 대야벌로 들어온 최초의 잠룡이라고 해서 사초라고 부른다.”
“ 정말 괴물 맞네.”
이승걸은 피식 웃었다.
천 년을 훌쩍 넘긴 대야벌의 역사 중 과연 그런 잠룡이 있을까 할 정도로 진기한 기록들이었다.
“ 여기 왔다 갔다고 들었다.”
“ 약을 지어달라고 하더구나.”
“ 중한 병이냐?”
“ 응! 아주 중한 병에 걸렸더구나.”
“ 무공을 익힐 수는 있는 거냐?”
무원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 글쎄, 약만 계속 공급해주면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지.”
“ 평생 약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고?”
“ 이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었다니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건 보통 독한 놈이 아니곤 절대 할 수 없는 거거든.”
“ 중병인 모양이구나.”
무원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백오십 근에 달하는 궤짝을 메고 다닌다기에 병 또한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중병이라니.
맥이 탁 풀렸다.
“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무원은 의아한 얼굴로 이승걸을 보았다.
“ 약 병이거든.”
“ 약 병은 또 뭐냐?”
“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지가 금세 죽고 말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놈들을 말해.”
“ 그러니가 그 녀석은 아무런 병도 없는데, 습관적으로 약을 먹는단 말이냐?”
“ 전에 약사가 처방해주었다는 처방전을 보니까 정력제도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더라.”
“ 저, 정력제까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녀석의 병에 대해 걱정을 했다. 그런데 약을 먹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그런 병에 걸렸단다. 즉 몸이 지극히 정상이란 소리다.
“ 괴물이면서도 웃긴 녀석이다.”
“ 클클클! 킬킬킬!”
무원은 혼자 키들키들 웃었다.
“ 좋냐?”
“ 그래 녀석아. 지금 좋아 미치겠다.”
“ 더 좋은 게 있는 데 말해줄까?”
“ 뭔데?”
“ 생사림에서 풍천영수하고 만년지극화령실을 입수했다고 하더구나.”
“ 그거 좋은 거냐?”
“ 풍천영수는 수만 년 동안 바람의 기운을 먹고 자란 바위가 흘리는 석수다. 공청석유에 버금가는 효능을 가지 영약이다.”
“ 그럼 만년지극화령실은?”
“ 만년지극화령실은 용암이 흐르는 곳에서 자라는 나무고 그곳에서 열리는 한 알의 붉은 열매를 말해, 효능은 굳이 설명할 필욘 없겠지?”
“ 그것들만 있으면 얼굴을 원래대로 되살릴 수 있다는 말이냐?”
“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퍼져 있는 독 기운도 태워버릴 수가 있다.”
“ 나와 창 아우 둘 다?”
“ 물론이다. 너희 둘 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 과거로 돌아가면?”
“ 바로 잡아야지?”
“ 바로잡으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거냐?”
“ .....!”
이승걸은 무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원의 말이 맞다. 설사 얼굴을 찾고 몸을 완전하게 회복한다고 해도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과거는, 역사의 한 장에 남아 있을 뿐이다.
“ 여의신천선단과 천마삼경을 분실하는 순간 우린 실패했다. 승걸. 최근엔 어쩌면 나의 등장조차도 누군가의 각본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천마삼경을 익힌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 그래서 사는 게 재미있다는 거 아니냐.”
무원은 빙그레 웃었다.
“ 그동안 단서라도 찾아낸 거냐?”
“ 암중의 누군가도 얻지 못했다.”
“ 그렇게 결론 내린 이유는?”
“ 숭걸, 네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법을 알아냈다면 넌 다른 녀석들처럼 진작에 제거되었을 거다.”
“ 그렇군.”
이숭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세월 함께 꿈을 꾸었던 친구들은 병이나, 또는 비무로 또는 주화입마 등의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둘씩 세상을 등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 줘라.”
“ 뭘 말이냐?”
“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비법.”
“ 나도 죽으란 말이냐?”
“ 제조비법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은 이 할에 불과하다고 했던 사람은 너다.”
“ 하지만 성공하는 순간 나도 제거되겠지.”
“ 대신 우린 우리의 뜻을 이어갈 괴물을 남기게 된다.”
“ 설사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을 얻는다고 해도 녀석을 초극고수로 만들 수 없다.”
“ 우린 기초만 잡아주면 된다. 나머진 녀석이 알아서 한다.”
“ 녀석이 천재라도 된다는 거냐?”
“ 그건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난 녀석의 감각을 믿는다.”
“ 어떤 감각?”
“ 흑랑기를 대막의 전설로 만들었던 놈의 감각을 말하는 거다.”
“ 흑랑기?”
“ 흑랑기는 전부 일천이백 명으로 구성되는데, 대장을 정천호, 조장들을 백호소라 불렀을 뿐 이름도 계급도 없다. 그들의 대장이 연우강이었다.”
“ 녀석이 정천호였냐?”
“ 열다섯 살에 군호로 입대했다가 열여덟 살에 정천호가 됐다.”
“ 사, 삼 년 만에 정천호가 됐다는 말이냐?”
“ 정확하게는 삼 년 육 개월 만이다.”
“ 초고속 승진이네.”
“ 난 그 능력에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다.”
“ 더는 기다릴 형편이 아니라는 말이냐?”
“ 그건 모른다. 하지만 뭔가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하다.”
“ 만일 영약을 얻으면 어떻게 먹일 참이냐? 어쩌면 난 지금도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다행해 녀석이 매일 약을 먹고 있지 않느냐. 그 약을 이용하는 거다.”
“ 본인도 모르게 한다고?”
“ 당연히 그래야지. 그걸 아는 사람은 우리면 족하다.”
“ 그렇게 하려면 녀석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 보국천위장군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 남경왕의 아들인 주무상에게 보국천위장군의 시호가 내린 것으로 알고 있다.”
“ 주무상도 흑랑기 출신이다.”
“ 주무상과 연우강의 관계는?”
“ 주무상이 연우강의 부하였다.”
“ 그럼 주무상이 구했다는 사람이 연우강이란 말이냐?”
“ 그 반대야. 적진에 포로로 잡힌 사람은 연우강이 아니라 주무상이었다. 흑랑기 대원 전부를 이끌고 주무상을 구하러 간 사람은 연우강이었고, 그런데 연우강은 흑랑기 전원과 바꾼 주무상의 목을 쳤다.”
“ 그게 무슨 소리냐?”
“ 상관이 부하 목을 치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다.”
“ 설마 주무상이 배신을 했다는 거냐?” “ 원래는 그랬지. 하지만 소문은 주무상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 주무상을 영웅으로 만든 사람이 연우강이란 말이냐?”
“ 그 소문이 시작된 곳이 남경이었다. 남경은 금릉 연씨 세가가 있는 곳이고.”
“ 웃기는 놈이네.”
“ 웃기는 놈이 아니라 연우강은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 일천 명의 부하와 한 명을 바꾼 그놈이 최고의 지휘관이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자식아.”
“ 난 그렇게 하지 못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숭걸, 만일 그 당시 내가 연우강처럼 했더라면 우린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 무슨 소리냐?”
“ 전쟁을 치르게 되면 많은 부하들이 죽는다. 어떤 부하는 적과 교전 중에 죽고, 또 어떤 부하는 적에게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한다. 겉보기엔 같은 죽음인 것 같지만 두 죽음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 어떤 차이가 있다는 말이냐?”
“ 교전 중에 죽은 부하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포로로 잡혀 죽은 부하는 지휘관을 원망하면서 죽는다.”
“ 포로를 구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출정을 감해해야 한다는 말이냐?”
“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라면 반드시......”
“ 난 이해할 수 없다.”
“ 적을 향해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그 알량한 애국심이 아니야. 자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살아만 남는다면 반드시 구해준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그들은 적진을 향해, 또는 화살비가 내리는 곳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거다. 그 신념이 무너지면 부하들은 더 이상 지휘관을 따르지 않는다.”
“ 그 녀석이 그런 마음으로 출정을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 맞아. 녀석은 나완 정반대로 했어. 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은 내가 버렸던 그 소를 위해 목을 걸었어. 그래서 난 녀석에게 기대를 거는 거야.”
“ 하지만 녀석과 넌 모든 것을 잃었다는 점에선 같다.”
“ 겉으로 보기엔 같은 결과지. 하지만 흑랑기 대원들은 녀석을 결코 원망하지 않는다는 게 달라.”
“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 아냐, 숭걸. 그들은 전부 웃으며 죽어갔을 거야. 왜냐면 자신들이 포로로 잡혔을 경우에도 연우강은 똑같이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건 극한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어. 그리고 그런 임무는 보통 자원자만을 데려가게 돼 있어.”
“ 죽을 줄 알면서도 흑랑기 대원들이 전부 따라갔단 말이냐?”
“ 그래서 녀석이 대단하다는 거다. 인간 말종이라고 불리는 흑랑기 대원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따르는 자라면, 운명은 녀석을 가만두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녀석은 운명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 정말로 기대를 많이 하는 모양이구나.”
“ 난 녀석에게 내 마지막 남은 생을 걸고 도박을 해볼 참이다.”
“ 알았다. 녀석이 먹는 보약 안에 영약을 넣도록 하마.”
이숭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나저나 창 아우가 고생이나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 왜?”
“ 내가 이곳으로 오는 동안 그 녀석을 만나러 갔어.”
“ 내가 보기엔 착해 보이던데, 괴팍해?”
“ 정천호 때 기질이 아직 남아 있는지 반말 신공이 극성에 이르렀어. 예의범절을 깎듯이 챙기는 창 아우가 그 녀석의 성질을 견뎌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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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창노가 안으로 들어서면서 들은 소리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집안 곳곳은 번쩍번쩍 윤이 났다. 자칫 잘못하면 미끄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 청소는 낮에 하고 우선 이야기 좀 하자꾸나.”
“ 그럼 이쪽으로 앉으싮오.”
연우강은 깨끗하게 닦아 놓은 의자를 가리켰다.
“ 먼저 이걸 받아라.”
창노는 둘둘 말린 양피지를 내밀었다.
“ 뭡니까?”
“ 매일매일 확인해야 하니까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면 된다.”
“ 지도군요.”
양피지를 펼친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창노를 보았다. 지도는 작지 않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네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대야벌 지도다.”
“ 이 지도 한 장만 있으면 대야벌에서 가지 못할 곳이 없겠군요.”
네 장으로 이루어진 지도는, 지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자라 할지라도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상세하게 제작돼 있었다.
연우강은 지도 표면 전체에 찍혀 있는 붉은 점을 가리켰다.
“ 그런데 이것들은 뭡니까?”
“ 총 천사백삼십 개의 점이 찍혀 있고, 그 중 네가 맡아야 할 곳은 육백육십 개다.”
“ 작업장입니까?”
“ 그렇다.”
“ 주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 먼저 지도에 대해 설명해주겠다. 막장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대야벌은 하늘 천 자 형태를 이루며 건물이 지어져 있다.”
“ 그건 들었습니다. 현재 우리 위치는 지도에서 어디쯤입니까?”
연우강은 지도를 살폈다.
천 자를 따라간 듯한 인상을 주는 대야벌에는 전부 네 개의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대얍벌의 입구인 남천문 바로 안쪽에 원호, 사람 인변의 바깥쪽 오른편에는 한호 왼편에는 당호가 그리고 천상천 우측엔 진호라는 이름이 각각 씌여 있었다.
“ 호수는 나라 이름이군요?”
“ 대야벌의 도움을 받아 개국한 왕조들이다.”
“ 대야벌이 없었다면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지 못했을 거란 뜻입니까?”
“ 그렇다고 들었다.”
“ 그럼 야장은?”
“ 사람인 변의 안쪽 위다. 하늘 천의 중앙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 그럼 잠룡들이 훈련을 받는 곳은 어딥니까?”
“ 맨 아래쪽에 있는 원호 주변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앞으로 네가 가야 할 곳은 야장 북쪽이다.”
“ 야장 북쪽이라면 어딜 말하는 겁니까?”
“ 칠련과 십림 사이에 있는 제일 무고인 승천비고부터 시작해 벌주 처소인 천상천까지가 네 담당이다. 참고로 대야벌에는 두 개의 무고가 있다. 지도에도 표시를 해 두었지만 방금 말한 승천비고와 하늘 천 자 첫 번째 획과 두 번째 획 사이에는 천무비고가 있다.”
“ 들어가라는 겁니까 들어가지 말라는 겁니까?”
“ 가급적이면 접근하지 말라는 말이다. 허락 없이 들어가면 시체가 돼서 나오는 곳이다.”
“ 그럼 천무비고 옆으로 나 있는 이 길은 뭡니까?”
“ 천무비고를 중심으로 우측 산을 천우산, 좌측 산을 천좌산이라 부르고, 천좌산과 천우산에 나 있는 그 길은 우리 작업로다.”
“ 여기 붉은색 점과 연결된 줄은 전부 작업로라는 말이군요.”
“ 그렇지. 가급적 그 길만 따라 다니면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게다.”
“ 좋습니다. 이젠 무슨 일을 하는지 그걸 알려주십시오.”
쿠웅!
그때 마당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도착한 모양이구나. 일단 나가자.”
창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창노를 따라 마당으로 나온 연우강은 눈앞의 광경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검은 색 관 두 개가 물지게와 함께 나란히 놓여 있었다.
“ 혹시 시체를 옮기는 일을 하는 겁니까?”
딱히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 저걸 관이라고 생각하느냐?”
“ 그럼 아닙니까?”
“ 관은 관인데 시체를 넣는 관이 아니라 거름을 넣는 분관이다.”
“ 영감, 지금 난 아주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거든? 제발 부탁인데 내 예상이 틀렸다고 해줘.”
연우강의 말투가 대번에 반말로 바뀌었다.
“ 아마, 맞을 거다.”
창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 그럼 넌 앞으로 삼 년간 똥 푸는 일을 하게 된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대야벌에는 천사백삼십 개의 화장실이 있고, 그 중 네가 퍼야 할 곳은 육백육십 개다. 한 곳을 풀 때마다 두 냥을 받는다. 한 냥은 인부 몫이고 나머지 한 냥은 야장의 수입금으로 잡힌다.”
“ 그러니까 나보고 똥을 푸라 이거지? 일천이백 명의 부하를 거느렸던 정천호 개백수인 나보고?”
“ 네가 신상명세서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결정 난 거다. 그리고 그 일이 아니면 이제 갓 입소한 잠룡이 무슨 수로 대야벌 전역을 훑고 다니겠느냐? 자유를 얻기 위해 지불하는 사소한 대가라고 생각하거라.”
“ 난 이 씨부랄 놈의 대야벌을 폭파시켜도 책임 추궁을 당하지 않는 정천호였다고. 정천호가 뭔지 몰라?”
“ 황태자도 잠룡이 돼 이곳으로 들어오면 똥을 퍼야 한다. 잠룡이란 명패를 달고 대야벌로 들어오는 순간 과거의 신분은 잊혀진다. 오직 잠룡만 남을 뿐이다.”
“ 에라! 이 사기꾼들아!”
연우강은 욕설을 뱉어내며 창노를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