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4화 (14/232)

제3장 각자의 일을 하면 되는 게다

- 분관을 지는 일을 비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면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이미 악취로 가득 들어차고 말 것이다.

더불어 분관 지는 일을 하게 되면 재미있는 일도 겪게 된다.

- 재미 있는 일?

- 신처럼 보였던 무인들이나, 화용월태 또는 경국지색이라 추앙 받는 미녀들도 결국엔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 그들도 먹고 싸는 족속이란 소리야?

- 그렇다. 연우강.

- 그건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 알고 있는 것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건 다르다. 그들도 나와 같은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너도 정천호였으니까 사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늙은 영감이 무슨 힘은.....”

연우강은 달걀로 얼굴을 문지르며 투덜댔다.

하오밀문 비슷한 역할을 하는 야장이라고 해도 대야벌에 소속돼 있는 단체라 무공을 익혔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

설사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별 것 아닐 거라고 여겼다. 그러다가 몇 대 얻어터지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부터는 나름 신중하게 대응했지만 창노의 상대는 아니었다.

결국 먼지가 풀풀 나도록 맞고 나서 개구리 뻗듯 쭉 뻗었다. 창노가 놀랍게도 대야벌 백대 고수의 말석이라는 막장보다 더 강한 자였다.

“ 대야벌은.....”

그때 귓전으로 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인간은 지겹지도 않나.”

연우강은 따분한 얼굴로 전면 단상을 보았다.

여태 들은 건 천기만리통 혁세군이라는 이름과 대야벌의 발전 과정을 설명해주겠다는 말까지다. 그 뒤로는 혁세군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밤새 얼었던 얼음이 녹으며 얼음 덩어리가 떠다니고 있는 듯 호수 곳곳이 광채로 반짝였다.

문득 간밤에 보았던 지도가 떠올랐다.

원 제국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하여, 대몽제국 오대 대칸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인 쿠빌라이 칸이 원호라는 이름이 적힌 비를 내려 그때부터 원호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지금 들어와 있는 곳은 원호 근처에 세워진 건물이다. 금일 일정은 잠룡으로 들어온 자들이면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하는 필수 과정이었다.

- 분뇨 푸는 작업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라. 부귀빈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람이면 누구나 화장실을 이용한다. 그곳은 가장 편안한 장소이자 휴식처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살수들이 가장 애용하는 장소 또한 화장실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기연을 얻을 수도 있다.

- 기연?

- 어떤 인간은 화장실에서 무공 구결을 읊기도 하고, 그러다가 기분이 좋으면 일하는 녀석에게 한 수 가르쳐주기도 하거든.

- 미친 놈.

- 또 맞고 싶은 게냐?

- 됐어, 인간아. 당신 앞으로 내게 대우받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게 좋아.

“ 결국 똥을 푸는 수밖에 없겠네. 처음도 아닌데,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이내 피식 웃었다.

군대 막 들어갔을 때도 분뇨를 푼 적이 있다.

몇 개월 하지 않아 후임이 들어와 넘겨주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이 처음도 아닌 셈이다.

‘ 그대로 그때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연우강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 저런 죽일.....’

활짝 웃는 연우강과는 달리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단상 위에서 잠룡들을 내려다보며 강의를 하고 있는 혁세군이었다.

혁세군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오백 명이 내 말이 집중하고 있으면 최고의 강의다. 한 놈 정도는....... 한 놈 정도는.....’

연신 숨을 내쉬어 보지만 그의 이마에는 힘줄이 불뚝 돋아 있었다. 오백 명이 집중하고, 단 한 명만 딴 짓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명 때문에 강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

결국 낮게 호통을 치며 오른손 중지를 오므렸다가 폈다.

스윽!

그의 손에서 쏘아진 암경이 왼편 후미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잠룡들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이미 암경을 파악할 정도의 고수들이기 때문이었다.

‘ 이거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순간 연우강은 갈등했다.

간밤에 차오에게 맞은 곳은 얼굴뿐만이 아니다. 몸 또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 아픈 건 싫은....’

연우강은 곁눈질로 앞을 보았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는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몽요였다.

‘ 너도 한번 당해봐라, 노인네.’

“ 어! 저건?”

마치 뭔가를 본 것처럼 달걀을 들고 있던 손을 뻗어 창 밖을 가리킨 채 혁세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엉덩이를 일으켜 세웠다. 상체는 숙이고 엉덩이를 일으켜 세우가 계란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은 몽요의 머리 위쪽에 올려진 상황이 됐다.

바로 그 순간, 혁세군이 쏘았던 지풍이 연우강의 몸을 강타했다. 일이 공교롭게 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연우강이 일부러 그랬는지 혁세군의 지풍이 강타한 곳은 몸을 마빗키는 마혈이었다.

“ 억?”

파삭!

나직한 비명과 함께 연우강의 손에 들린 달걀이 깨지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연우강의 상체는 몽요를 덮치고 말았다.

“ 어머?”

몽요는 깜짝 놀라며 엉덩이를 일으켜 세웠다.

바로 그때 두 번째 공교로움이 생겼다.

달걀로 범벅인 연우강의 손이 몽요의 가슴을 와락 틀어쥐고 만 것이다. 제압당한 마혈로 인해 온 몸이 마비되는 와중에 연우강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를 잡으려 했고, 그 대상이 바로 몽요의 가슴이 돼버린 상황이었다.

“ 앗!”

“ 헉!”

“ 허!”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던 이들의 입에서 놀람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당사자인 몽요만큼은 아니었다.

몽요는 멍한 눈으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달걀로 범벅인 연우강의 손은 가슴을 틀어쥔 채고, 그의 얼굴은 어깨에 걸쳐져 있다.

하지만 몽요는 노련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얼굴은 왜 그렇게 된 거죠?”

그녀는 멍이 든 연우강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 분뇨를 퍼야 한답니다.”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 분뇨?”

“ 대야벌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등에 똥지게를 지고 있어야 한답니다.”

“ 그러니까 앞으로 삼 년 동안 화장실을 퍼야 한다는 말이가요?”

“ 죽어도 못한다고 대들었다가 죽도로 맞고 개구리처럼 뻗었습니다.”

“ 다른 곳으로 가지 그랬어요?”

몽요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라고 하지만 그는 지금 여자 가슴을 틀어쥔 상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쩔 줄 몰라하며 사과하기 바쁘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지금 상황을 즐기는 듯, 천연덕스럽게 딴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 무공을 배우면 큰일 나거든요. 그나저나 날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 사람 죽이는 게 싫어서 안정숙을 택한 건가요?”

몽요는 말으 하면서 가슴을 흘끔 쳐다보았다.

“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오 년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요.”

“ 난 십 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했어요. 내가 지그모다 훨씬 강해지려고 하는 이유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살인을 피하고 싶어서예요.‘

“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 글쎄요... 그런데 이건 일부런 그런 건 아니겠죠?”

몽요는 다시 연우강의 손을 보았다.

“ 흐흐! 일부러 그럴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손을 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몽요.”

연우강은 애써 손을 움직거려 보았다.

“ 어?”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손가락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며 탄력적인 가슴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 역시 일부러 그런 게 맞는 거 같네요. 연 공자.”

몽요는 눈을 흘기며 연우강의 손을 떼어냈다.

“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시간이 멈춰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럼 이 손은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 있을 것 아닙니까. 아마 며칠 동안은 손을 씻지 못할 것 같습니다.”

“ 호호호! 연 공자는 경험이 많은 분 같네요. 이제 그만 얼굴을 들어도 될 것 같은데요?”

몽요는 낮게 웃으며 연우강을 보았다.

마혈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은 여전히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 귀가 예빠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요.”

“ 사람들이 우릴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연 공자. 머리를 떼지 않으면 잠룡궁 궁주께서 폭발해버릴지도 몰라요.”

귓전을 간질이는 연우강의 숨결에 몽요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 그래야 다음엔 저를 부르지 않을 것 아닙니까. 저도 교관 생활을 해봐서 아는데, 저 같은 놈은 오지 않는 게 훨씬 도움이 되거든요.”

연우강은 눈빛으로 단상을 가리켰다.

몽요은 혁세군을 돌아다보았다. 예상대로 혁세군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 연우강 자넨 앞으로 이곳에 올 필요가 없네. 안정숙에서 열심히 똥이나 푸도록 하게.”

“ 그거 보십시오. 제 말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저 자식은 나 같은 놈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 들어요. 연 공자.”

“ 설마요. 십오 장이나 되는데 우리가 다정스럽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 그건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잖아요.”

“ 이 안에 있는 사람은 연 공자의 말을 전부 들을 수 있어요. 조금 전에 궁주께서 분뇨 푸는 일이나 하라고 한 것도 우리 둘이 속삭였던 내용 중의 하나잖아요.”

“ 연우강! 넌 다음 시간부터 들어오지 마! 그리고 일 각 동안 휴식이네.”

몽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혁세군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 자유는 쟁취하는 겁니다. 몽요.”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몽요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 훗!”

몽요는 어이없는 얼굴로 웃었다.

“ 버린 옷은 나중에 최고급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옷은 전부 상부에서 지급해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 속옷 말입니다. 보통 훈련받는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옷의 재질은 최악이거든요. 겉옷이야 같은 걸 입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속옷은 최고급으로 입어줘야지요.”

“ 그런 옷을 구할 수 있어요?”

“ 걱정 마십시오. 제가 확실하게 공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정말로 분뇨를 풀 건가요?”

그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게 바로 안정숙 제자의 훈련복입니다. 이 소저.”

몸을 돌린 연우강은 겉옷을 들춰 보여주었다. 그러자 황금빛 광채가 일렁이는 옷이 드러났다.

“ 금색은 황제의 옷에만 사용할 수 있어요. 연 공자.”

“ 이건 금색이 아니라 똥색입니다. 이 소저. 누런 천에다 밤에도 잘 보이라고 야광 물질을 붙인 겁니다.”

“ 밤에도 작업을 하는 거예요?”

“ 밤낮 없이 싸대는 인간들 때문에, 저도 밤낮 없이 퍼 대어야 할 판입니다.”

“ 그럼 삼 년 동안 그 일을 하는 거예요?”

“ 안 하면 이렇게 됩니다. 이 소저.”

연우강은 형편없이 망가진 얼굴을 가리켰다.

“ 그러게 다른 곳으로 가시지.”

“ 흐흐흐! 아닙니다. 이 소저. 안정숙이 딱 제 체질입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가 따르는 곳이 안정숙입니다.”

“ 대가?”

“ 돈이지 뭐겠습니까?”

“ 돈을 벌어요?”

“ 그것도 아주 많이 법니다.”

“ 어떻게요?”

“ 그건 비밀입니다. 어이쿠! 다시 지겨운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전 그만.”

연우강은 너스레를 떨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외상약 있는 데 줘요?]

그때 귓전으로 남궁운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 어이쿠, 이거 잘못하다간 여자들 때문에 제 명에 살기 힘들지도 모르겠네.’

연우강은 내심 중얼거리며 필요 없다는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 그러게 안정숙으로 왜 들어가요. 차라리 내가 있는 곳으로 왔으면 더 좋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남궁운화의 전음을 뒤로 하고 연우강은 걸음을 서둘렀다.

원호에서 야장의 처소까지는 한 시진 거리였다.

“ 왜, 벌써 오느냐?”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강은 걸음을 멈추고 무원을 보았다.

“ 대야벌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알고 싶은 잠룡은 단 한놈도 없을 거라는 쪽에 제가 가진 전 재산을 걸겠습니다.”

“ 도망쳤단 말이냐?”

“ 천기만리통인가 똥통인가 하는 작자가 앞으로는 올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그렇게 말했느냐?”

“ 게거품을 문 채 그렇게 말했습니다.”

“ 그럼 네가 똥 푼다는 말도 했겠구나.”

“ 오늘 저녁이면 대야벌 전역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겁니다.”

“ 클클클! 아주 잘했다.”

무원은 빙그레 웃었다.

연우강이야 고리타분한 교육에 참석하기 싫어 사고를 쳤겠지만 야장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다.

당분간은 연우강에 관심을 갖는 자들이 없을 테고,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 그럼 쉬거라.”

“ 관리권을 전부 내게 넘겨주십시오.”

“ 무슨 소리냐?”

몸을 돌리려던 무원은 연우강을 보았다.

“ 삼 년 동안 그 지겨운 일을 하려면, 일에 대한 자부심이 필숩니다.”

“ 자부심과 관리권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다는 거냐?”

“ 그렇습니다.”

“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느냐?”

“ 그 자부심의 원천이 바로 이겁니다.”

연우강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내밀었다.

“ 도, 돈이란 말이냐?”

무원은 황당한 얼굴로 말을 뱉었다.

“ 아무리 비천한 직업이라고 해도 주머니가 두둑하면 가슴을 활짝 펴고 다니는 반면,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그런 직업이라고 해도 버는 돈이 적으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르신, 돈은 곧 자부심입니다.”

“ 그러니까 돈 관리를 네가 하겠단 말이렷다.”

“ 한 곳에 한 냥씩은 분명히 상납을 하겠습니다.”

“ 한 냥을 상납하겠다면 그게 그거 아니냐?”

“ 자부심.”

“ 거참!”

무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돈이 생기면 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르신.”

“ 조건이 있다.”

“ 말씀하십시오.”

“ 분관에 분뇨를 가득 채우면 이백 근이 된다. 더불어 작업장에서 분뇨를 비우는 곳까지의 거리는 가까운 곳이 삼십 리고 먼 곳은 백리까지 된다. 네가 백리를 반 시진 안에 주파하는 날 관리권을 넘겨주겠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마솥도 필요합니다.”

“ 가마솥은 왜?”

“ 일이 일이다 보니 몸에 냄새가 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가마솥과 석회 그리고 욕조를 만들 때 사용하는 나무가 필요합니다.”

“ 가마솥을 개조해서 욕조라도 만들 셈이냐?”

“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 그것도 조치하도록 하마, 쉬거라.”

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다.

“ 백 리라........”

집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생각에 잠겼다. 혈도를 닫고 막는 기능만 할 수 있었던 잠능폐혈대법은 점점 더 발전하여 혈도를 통하는 구멍의 크기까지 조절이 가능했다. 지금 상태보다 혈도를 조금 더 열어주면 백 리를 주파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다.

“ 아냐, 일단 숨기기로 했으니까 이대로 가는 게 나아. 돈 몇 푼에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연우강은 혈도를 열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매일 아침 먹는 보약 때문이었다.

무려 이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약을 먹은 그는 혀끝을 적시는 맛으로도 다른 약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금세 파악해 냈다.

그런데 이번에 복용하는 약은 여느 때와 달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몸에 나타나는 효과가 달랐다. 약간은 청아한 맛을 풍기는 그것이 주는 효과는 과거 사망마제의 무공을 얻었을 때 동굴에서 먹었던 그것과 비슷했다.

운기행공을 하자 더욱 분명해졌다.

사지로 퍼져나가는 그것은 다름 아닌 영약 성분이었던 것이다. 무원 일행이 보약 안에 영약을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굳이 잠능폐혈대법으로 조절할 필요도 없이 분관을 지고 달릴 때마다 혈도가 조금씩 열렸다. 아니 영약 기운이 너무 강해, 잠능폐혈대법을 이용해서 혈도를 어느 정도까지는 막아야 할 정도다.

그로부터 삼 개월.

연우강은 무원으로부터 대야벌 모든 화장실의 관리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관리권을 넘겨줄 때만 해도 무원은 연우강이 활짝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보통 작업량은 하루 한 곳 정도고, 그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돈은 두 냥이다.

그마저도 한 냥은 야장에 상납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연우강이 벌어들이는 돈은 한 냥에 불과하다.

사흘에 하루를 쉬는 관계로 한 달 동안 연우강이 벌어들이는 돈은 스무 냥. 잠룡쟁패를 팔아먹은 놈에게 스무 냥은 돈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금액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무원이 그 웃음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관리권을 넘겨준 육개월 후였다.

*********

율령궁의 감찰 업무 대상은 대야벌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워낙 강한 권력을 지닌 곳이라 허드렛일을 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대야벌에서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청탁이 들어곤 하기 때문이다.

“ 정황이라.....”

율령궁의 궁주 군자무림행 우담보는 얼굴을 찌푸렸다. 감찰조직인 천법원에서 최근 올라온 보고서 때문이다. 한참 교육을 받고 있는 잠룡들 사이에서 은밀한 거래의 흔적을 포착했다는 보고서였다.

천법원에서는 그 증거로 여자 속옷을 제시했다.

천법원에서 내민 속옷은 잠룡들에게 지급한 속옷이 아니었을 뿐더러 일반 양민이 입는 속옷은 더더욱 아니었다. 최하 닷 냥 이상 나가는 그 속옷은 북경에 상주하는 관리이거나, 지방 상류층이나 돼야 겨우 구경이라도 할 수 있는 최고급이었다.

여자 속옷 하나 때문에 사건을 확대할 수도 없어 은밀하게 내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았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원주인 이사진으로부터 최종 결과가 나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지금 보고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접니다. 궁주님.”

“ 들어오게!”

밖으로부터 이사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담보는 자세를 바로했다. 곧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안광을 지닌 중년인이 들어왔다. 만개의 율법을 외우고 있다고 해서 만법이란 별호를 지닌 천법원의 원주 이사진이었다.

“ 심각한가 보군.”

“ 그렇습니다. 궁주님. 월 거래량이 오만 냥입니다.”

“ 오만 냥이나 된단 말인가?”

우담보는 깜짝 놀랐다.

오만 냥이면 중소 문파를 꾸려갈 수 있는 엄청난 금이었던 것이다.

“ 지금까지 파악된 것만 그렇습니다.”

“ 도대체 누군가?”

“ 연우강입니다.”

“ 하, 하인이 아니고 연우강이란 말인가?”

속옷 같은 것을 거래하려면 대야벌 밖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들은 하인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잠룡 중의 한 명인 연우강이 범인이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분뇨를 버리는 곳은 전부 외부에 있습니다. 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대야벌 외부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물건을 구해 잠룡들에게 판매를 해온 모양입니다.”

“ 잠룡이라고 해봐야 오백 명이네, 사진, 일 인 당 백냥씩을 써야 오만냥인데 그게 가능한가?”

“ 열 배 이상 폭리를 취하고 있습니다. 전에 증거물로 올렸던 그 속옷은 시중에 가면 열 냥입니다. 하지만 놈은 그걸 백냥씩 받고 있었습니다.”

“ 그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그걸 백 냥이나 받고 판단 말인가?”

“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 냥이면 살 수 있는 금창약은 스무냥, 두 냥이면 살 수 있는 청심환은 서른 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적은 최하 천 냥이 이상 팔리고 있었습니다.”

“ 무슨 부적인데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 이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고수가 될 수 있게 해준답니다.”

“ 미치겠군. 증거는 확보했는가?”

“ 증거는 물론이고 증인까지 확보해 두었습니다.”

“ 소문나서 좋을 게 없으니까 일단은 비밀로 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 그리고 내일 야장 장주에게 소환장을 보내게.”

“ 존명!”

이사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무원이 소환장을 받은 건 그날 밤 연우강의 처소였다.

무원은 율령궁의 궁주 우담보의 직인이 찍힌 출두 명령서를 가져온 사내를 보았다.

“ 뭔가 이게?”

“ 전 소환장을 전달하는 전달사자일 뿐입니다. 나머진 궁주님께 직접 물으십시오. 그럼.”

사내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 뭡니까?”

신중한 표정으로 뭔가를 적고 있던 연우강이 무원의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물었다.

“ 소환장이다.”

“ 소환장이 뭡니까?”

“ 피의자에게 출두를 명하는 명령서라고 보면 된다.”

“ 피의자라면 범죄 용의자를 말하는 겁니까?”

“ 그렇다. 짚이는 거 없느냐?”

“ 어르신은 사교성이 부족한 게 흠입니다. 평소에 많은 사람을 사귀어 놓으면, 그런 걸 받기 전에 무슨 일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아닙니까?”

“ 난 사람 사귀는 데 오래 걸리는 성격이다.”

“ 진실로 사귀라는 게 아닙니다. 어르신. 사귀는 척 하라는 거죠.”

“ 사귀는 척?”

“ 친한 척 해두면 당장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거든요.”

“ 그건 그렇고 지금 뭐하는 거냐?”

피식 미소를 지은 무원은 탁자로 시선을 주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붉은색 물감으로 뭔가를 정성 들여 쓰고 있었다.

“ 글씨 연습을 하는 겁니다.”

“ 뭐라고 쓰는 거냐?”

“ 상승무공성취간절기원이라고 쓴 건데 알아보기 힘듭니까?”

“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 제 글이 그렇게 형편없습니까?”

“ 너도 못 알아먹는다고 하지 않았냐?”

“ 몸 상태가 좋을 땐 하루 정도는 알아먹는다는 말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 요샌 어떠냐?”

“ 보약은 역시 장복해야 효과를 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 아주 좋다는 말이구나.”

무원은 빙그레 웃었다.

녀석은 보약 속에 내공을 증진시키는 영약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 요즘은 제가 쓴 글을 이틀은 기억합니다.”

“ 좀 더 열심히 하면 삼 일은, 아니 한 달도 기억할 수 있을 거다.”

“ 헛수고하시는 겁니다.”

“ 이 나이가 되도록 살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게 있다.”

“ 그게 뭡니까?”

“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란다.”

“ 모순입니다. 어르신.”

“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왜 약에 꼼수를 부렸느냐는 말이더냐?”

“ 그렇습니다. 무공에 뜻을 두었더라면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 천하의 무공이 전부 대야벌에 있다.”

“ 황실에도 있습니다.”

“ 황실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 제게는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친한 척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친한  척하는 친구들의 장점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든 부탁이 아니면 대부분 들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 황궁무고에 들어갔다가 걸리면 목이 달아난다.”

“ 혹시 첨목 장군 양성일이라고 아십니까?”

“ 북로정군의 장군으로 있다가 황실로 영전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 그 양반과 전 상당히 친한 척하는 사이인데, 첨목장군의 친척 한 사람이 황궁무고의 열쇠를 관리합니다.”

“ 그래서 황궁무고에 들어가는 게 가능하단 말이냐?”

“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겠지만 들어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 나는 내 일을 할 테니 넌 네 일을 해라. 우강.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난 네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참이다.”

“ 개인적인 부탁이 있습니다.”

“ 말해라.”

“ 혈잔마수 염자생을 아십니까?”

“ 삼 년 전에 강호 공적으로 몰려 처단된 걸로 알고 있다.”

“ 염자생과 관련된 자를 찾아주십시오.”

“ 관련된 자라는 건 어떤 의미냐?”

“ 사십 년 전에 염자생은 잠룡쟁패의 주인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정파 무인들의 협공을 받아 잠룡쟁패를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 그 정파 무인을 찾아달라는 거냐?”

“ 가능하다면.”

“ 넌 염자생과 어떤 관계냐?”

“ 사막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 죽었느냐?”

“ 꿈 많은 청년을 악인으로 만들어버린 그놈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 잠룡대전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 하지만 확인사살은 하지 않습니다.”

“ 기대는 하지 말거라.”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던 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갈 때 오리발을 하나 준비해 가십시오.”

“ 오리발?”

“ 그가 물을 때 내밀면 될 겁니다.”

“ 누구 말이냐?”

“ 군자무림행 우담보지 누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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