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15화 (15/232)

제4장 천옥

무원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율령궁의 궁주 우담보 앞에 앉았다.

“ 내가 무슨 죄를 진 거요?”

소환장을 받을 때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사진을 따라 들어온 곳은 손님을 맞이하는 빈청이 아니라 죄인을 취조하는 취조실이었다.

“ 이걸 보시오. 장주.”

우담조는 천법원에서 그동안 증거물로 획득한 것들을 탁자 위로 올려놓았다.

“ 뭐요, 이건?”

무원은 여전히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 속옷은 백 냥, 금창약은 스무 냥, 청심환은 서른 냥에 팔리고 있소이다.”

“ 어떤 미친 놈이 그런 값에 그걸 산단 말이오?”

“ 그럼 이건 어떻소? 최하 천 냥이라고 하던데?”

우담보는 부적을 내밀며 무원의 표정을 살폈다.

야장이 관여돼 있지 않으면 연우강이 이러한 것들을 팔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억!”

무원은 질겁한 얼굴로 우담보가 내려놓은 종이를 보았다.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자 우담보는 빙그레 웃었다.

“ 상부의 지원이 없다고 해도 이번 건은 야장이 실수한 거요. 장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걸 천 냥이나 받고 팔아먹은 건 너무했소이다.”

“ 정말로 이게 천 냥이나 나간단 말이오?”

무원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다름 아닌 감밤에 연우강이 글 쓰는 연습을 한다며 심혈을 기울여 쓰고 있던 그것이었다.

“ 이걸 판매한 장본인이 그러면 곤란합니다. 장주. 난 이것들을 가지고 벌주께 보고를 할 참입니다.”

“ 우강이 그놈 짓이구려.”

“ 야장하고는 관련이 없단 말이오?”

“ 그렇소. 궁주. 난 녀석이 이런 것들을 팔고 있는지도 몰랐소.”

“ 청심환이나 금창약은 몰라도 이런 부적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오.”

우담보는 다시 부적을 보았다.

붉은 색으로 그려진 부적은 척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였다.

“ 우강이 그놈이 그린 거요. 아니 그놈이 쓴 거요.”

“ 무슨 소리요?”

“ 혹시 우강이 그놈이 쓴 신상명세서를 보았소?”

“ 신상명세서?”

우담보는 이사진을 보았다.

“ 원본은 우리가 보관하고 있습니다.”

“ 가져오게.”

“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사진은 서류가 보관돼 있는 장을 열어 잠시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왔다.

“ 여기....”

신상명세서를 내미는 이사진은 말끝을 흐렸다.

신상명세서를 부적 크기로 자르고, 검은색 글씨를 붉은색으로 바꾸면 부적 한 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상명세서를 받아든 우담보는 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무원을 보았다.

“ 허허허! 글을 못 쓴다고 구박을 많이 했는데, 그게 돈이 될 줄은 나도 몰랐소이다그려.”

“ 야장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

“ 나도 지금 안 사실이오!

“ 그렇다고 해도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소이다.”

“ 내가 녀석에게 주의를 주도록 하겠소이다.”

“ 한 두 푼도 아니고 월 거래량이 무려 오만 냥이나 되오. 이번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소이다.”

“ 우리 야장은 개개인의 생활까지 간섭하진 않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우리 야장을 걸고 넘어지지 마시오.”

“ 그놈은 안정숙의 제자요.”

“그럼 대야벌의 율법에 따라 제명시키면 되잖소.”

문득 오리발을 준비해 가라고 하였던 우강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은 이미 지금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상황을 예측하고 있다면 빠져나갈 구멍도 마련해 두었을 테고, 굳이 우담보에게 약하게 나갈 이유가 없었다.

“ 당연히... 끄응!”

우담보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막장을 내보내서 호위를 해온 놈이 연우강이다. 그런 녀석을 제명시켜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더더욱 없었다.

“ 이 원주.”

“ 잠룡의 신분을 감안한다고 해도 최소한 일 년은 금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 잠룡을 금옥에 가둔단 말이오?”

이번엔 무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강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다.

보약과 함께 복용시켰던 영약 기운이 단전에 자리잡고 있을 시기인데 감옥으로 들어간다면 그동안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터였다.

“ 이 원주는 지금 당장 연우강을 체포해 와라.”

“ 존명!”

“ 궁주!”

“ 난 율령궁의 궁주외다. 율령궁의 궁주는 벌 내에서 일어난 범죄는 물론이고 불법 행위까지도 철저하게 다스려야 하오. 귀하의 제자인 연우강은 힘겹게 연무를 하고 있는 잠룡들을 상대로 상행위를 했소이다. 그건 아주 비열한 짓이외다.”

“ 비, 비열한 짓이란 말이오?”

“ 그렇소이다. 아주 죄질이 무거운 아주 악질적인 짓이란 말이외다. 손님 나가신다.”

차갑게 말한 우담보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건 그만 나가달라는 축객령이었다.

“ 허허!”

무원은 헛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 뭔가 알아챘다는 말인가?’

무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너무 서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백 명이나 되는 잠룡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제자를 요구했는데 그 일이 의심의 빌미를 제공한 듯했다.

‘ 정 안되면 구결을 직접 전하는 수밖에.’

무원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는 무언을 우담보는 차가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 야장은 야장으로 남는 게 좋소. 장주. 욕심이 과하면.... 킁킁!”

우담보는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무원이 나가면서 열었던 문을 통해 냄새가 스며들어 온 모양이다.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 좀 씻고 다닐 일이지.”

무원이 남기고 간 냄새라고 생각한 듯 우담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자리를 옮긴 안쪽에서도 여전히 구린내는 사라지지 않았다.

“ 화장실을 풀 때가.... 가만 그 일을 할 놈도? 에잉!”

우담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녀석을 떠올리자 대야벌로 들어오던 날이 생각이 나 공연히 짜증이 났다. 술이 취해 토를 해대는 광경은 벌주께 보고가 올라가 책망을 들었다.

그날 벌주 앞에서 삼 년 안에 놈을 말을 잘 듣는 개로 만들어 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 기회를 잡기는 했는데 버릇을 잡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 협박이 통할 놈도 아니고.... 빌어먹을!”

“ 험!”

느닷없이 들려온 헛기침 소리에 우담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이런,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어서 오시오. 범 궁주.”

우담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요?”

“ 고민은 무슨.....”

“ 이거 섭섭합니다. 우 궁주, 조금 전 무원이 다녀갔다는 걸 알고 왔는데, 우리가 그런 사이였습니까?”

범일승은 탁자 위에 놓인 물건으로 시선을 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 하하하!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해야 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 비밀유지가 필수란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범 궁주. 알려지면 대야벌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서.”

“ 그럼 가겠습니다”

“ 아이고,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일단 앉으시오.”

우담보는 범일승의 팔을 끌어 앉혔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해주었다.

“ 허허! 정말 그랬단 말입니까?”

범일승은 반신반의 하는 얼굴로 물었다.

“ 그렇소이다. 범궁주.”

“ 그래서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 지금 고민 중입니다. 놈은 전쟁터에서 오 년을 굴러먹었던 놈이라 웬만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놈 아닙니까?”

“ 그건 그렇소이다. 야장의 창노에게 얻어터지면서도 기절할 때까지 달려들었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보통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소.”

“ 생각해 둔 곳이라도 있소?”

“ 천옥은 돼야 놈의 기를 죽일 수 있을 거요.”

범일승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 금옥은 너무 가볍겠지요?”

우담보는 스스로에게 묻듯 말을 뱉었다.

대야벌에는 금옥, 천옥, 지옥이라고 부르는 세 곳의 감옥이 있다. 금옥은 경범들을 가두는 곳이고, 천옥은 죄질이 무거운 중범들을. 그리고 지옥은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게 격리시키는 감옥이다.

무원에게는 금옥에 넣을 거라고 했지만 그 정도로 놈의 기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 마음 같아서는 지옥에 처넣고 싶소이다. 우 궁주.”

“ 허허허! 그곳으로 넣으면 안 되지요. 일단 천옥으로 넣도록 합시다.”

우담보는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우담보와 범일승은 지하 취조실에서 연우강을 마주하고 앉았다.

“ 네 죄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우담보는 연우강의 등에 있는 검은 궤짝에 시선을 주었다.

“ 이 양반이 올래 걸릴지도 모른다고 해서 짐을 챙겨 나왔을 뿐이오.”

연우강은 오른편에 서 있는 자를 가리켰다.

그는 율령궁에서 집행을 담당하는 천살원의 원주 이청문으로 쇄혼권이란 별호로 더 유명한 자였다.

“ 앉거라.”

우담보는 턱으로 탁자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 여긴 죄인을 취조하는 취조실 같은데... 제법 분위기가 괜찮군요.”

연우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우담보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주변엔 수갑, 족쇄, 피묻은 쇠사슬, 물이 가득 들어 있는 물통 등 갖가지 고문 도구가 널려 있었다.

“ 그런데 무슨 죄로 날 끌고 온 거요?”

연우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네 죄는 이거다.”

우담보는 낮에 무원에게 보여주었던 것들을 탁자 위로 올렸다.

“ 뭐요 그건?”

“ 네가 그동안 잠룡들에게 팔아먹었던 건데, 모른단 말이냐?”

우담보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 판 물건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을 한단 말이오. 그리고 난 최고급이 아니면 거래를 하지 않소이다.”

“ .....!”

우담보와 범일승은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이렇듯, 노골적으로 시인을 할 줄 몰랐던 탓이다.

설사 본인이 했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부정을 하거나 뭔가 오해가 있었다고 발뺌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녀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인을 해 버린다.

일순 맥이 탁 풀렸다. 그렇다고 취조실까지 끌고 왔는데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 시인을 하는 걸 보니 고문은 필요 없겠구나. 이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아느냐?”

우담보는 버럭 소리쳤다.

“ 미풍 양속을 심하게 해치거나, 국법으로 금한 물건 외에는 모든 물건을 팔고 있다고 알 고 있는데, 혹시 대야벌에서는 이런 물건을 팔면 안 된다는 율법이라도 있소?”

“ 잠룡은 교육생이다. 교육생은 어떤 물건을 사고 팔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넌 열 배, 스무 배씩 폭리를 취했다. 그건 아주 비열한 짓이다.”

“ 이해할 수가 없군요. 상거래는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 법칙을 따르게 되오. 설사 공급이 있다 해도 수요가 없거나, 수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이 없으면 상거래는 절대 성립될 수가 없소이다. 난 그들에게 물건을 살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사겠다고 했소. 난 조금 비싸다고 했고,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소. 그건 완벽하게 거래 행위가 성립된 거란 말이오. 나 같으면 말이오, 물건을 팔아먹은 날 닦달할 게 아니라 잠룡들에게 거지발싸개 같은 물건을 공급해 준 자를 문책하겠소.”

“ 무슨 소리냐?”

“ 잠룡들은 각 가문에서 최고로 키워진 자들이오. 그런 자들에게 발라도 낫지 않는 금창약을 주고, 최하급 속옷을 준다면, 그들이 사용할 거라고 생각하셨소?”

“ 그 또한 교육의 일환이다. 놈!”

듣고 있던 범일승이 버럭 소리쳤다.

잠룡들에게 물건을 공급해 준 곳이 바로 그가 궁주로 있는 조양궁이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애들이 아니오. 똥자루 영감. 이미 대가리가 여물대로 여문 놈들에게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을 공급해 준다고 뭔가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정말 바보요.”

“ 이런 쳐죽일 놈이!”

“ 참으시오. 범 궁주. 심문은 내가 알아서 하겠소.”

우담보가 범일승을 말렸다.

“ 좋다, 연우강. 물건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할 거냐?”

우담보는 주머니에서 부적이라고 했던 것을 꺼내 탁 튕겼다. 그러자 그의 손을 떠난 부적은 휙 날아가 연우강 앞 탁자로 박혀들었다.

“ 이건 또 뭐요?”

“ 네가 그렸다는 걸, 아니 썼다는 걸 알고 있다. 괴발개발 쓴 글을 일천 냥이나 받아먹었더구나. 그건 명백한 사기죄에 해당한다, 연우강.”

“ 혹시 왕희지이 난정집서는 가격이 얼마인지 아시오?”

“ 여기서 왕희지가 왜 나오느냐?”

“ 일단 들어보시오. 왕희지 서법 중 가장 유명하다는 난정집서는 전부가 모조품이오. 실제는 당 태종이 제 무덤 속으로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란 말이오. 그런데 그 모조품조차도 가격을 정할 수가 없소. 과연 모조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 네가 왕희지라도 된단 말이냐?”

대답이 궁하면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담보는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 내가 왕희지란 말이 아니고, 잠룡들에게 이 부적은 왕희지의 난정집서보다 더 소중한 거란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난정집서와 이 부적을 놓고 어느 걸 고를 거냐고 물어보시오. 그럼 백이면 백 이 부적을 택할 거요. 이건 내기해도 좋소.”

“ 그렇다고 해도 이 부적을 판 행위는 사기죄에 해당한다. 놈!”

“ 난 오히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그들을 도와줬소이다. 벌을 받을 게 아니라 오히려 상을 받아야 하오. 그리고 그놈들은 천 냥 정도는 우습게 써도 상관없을 정도로 부자들이오.”

“ 이놈을 당장 처넣게.”

결국 논리에서 밀린 우담보는 대기하고 있는 쇄혼권 이청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 가자!”

이청문은 연우강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 가급적이면 잠룡들에게 그 부적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궁주.”

“ .....!”

우담보는 연우강을 노려보았다.

“ 날 위해서 그런 게 아니고 잠룡들을 위해서 그런 거요. 내게서 부적을 사간 잠룡들은 그 부적에 대단한 신력이 깃들어 있을 걸로 생각하고 있다오. 그런데 똥지게 녀석이 그렸다는 걸 알아보시오. 그럼 어떻게 되겠소. 아마 정신적인 충격에 주화입마에 들게 될지도 모르오.”

“ 상관없다. 놈!”

“ 담대무궁에도 한 장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궁주.”

“ 거짓말 마라!”

“ 그는 내 고객 명단에 없소이다. 하지만 담대무궁에게 잘 보이려는 자가 사서 건네준 걸로 알고 있소. 특별히 신통력이 강한 걸로 구해달라고 해서, 오천 냥짜리로 구해줬소.”

“ 구, 구해줬다고?”

“ 힘들게 썼다는 뜻이오. 갑시다. 이 대협.”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이청문을 툭 쳤다.

“ 따, 따라와라.”

퍼뜩 정신을 차린 이청문이 앞장섰다.

곧이어 둘은 밖으로 나갔다. 형량이 결정되기 전에 잠시 쉬는 임시 처소로 가는 길이었다.

“ 미치겠군.”

두 사람이 나가자 우담보는 범일승을 보았다.

“ 놈의 말이 맞소. 우 궁주. 그 사실을 밝히게 되면 부적을 샀던 잠룡들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될 거요. 특히 담대무궁이 받을 충격은.....”

저번 잠룡쟁패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담대무궁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대야벌 벌주의 아들이자 중원 최고 가문의 자식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아이가 아닌가.

연우강의 말처럼 주화입마에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 그렇다고 덮어두면 그놈은 앞으로도 제가 쓴 글을 부적이라고 팔아먹을 겁니다. 그 꼴을 계속 지켜보자는 말입니까? 앞으로도 이 년이 넘게 남았습니다. 범 궁주.”

우담보는 답답한 듯 소리쳤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권력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진다.

죄수들이 모여 있는 천옥 또한 다르지 않았다.

두보관이 일잔풍은 지난 오 년 동안 암투를 벌여왔다. 두보관이 승자가 돼 방장이 되고, 일잔풍은 부방장이 됐지만,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 일잔풍이 세 규합을 끝냈다고 들었소.”

“ 허허! 그건 또 어떻게 아셨소?”

“ 지옥에 관심을 두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더이다.”

“ 하지만 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살인을 허락해야 하오. 두보관이 죽으면 자칫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되오이다.”

“ 병사로 처리하는 건 어떻소?”

“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우담보는 말끝을 흐렸다.

“ 그래서 내가 사악을 만난다고 한 거요. 이번 일은 내가 우 궁주에게 부탁을 해서 허락을 받은 걸로 하겠소. 그럼 율령궁의 권위가 손상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 최소한 오른손은 망가뜨려 놓으라고 하겠소. 더불어 죽이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할 참이오.”

“ 그 일은 궁주가 알아서 처리해 주시오. 그런데.....”

“ 왜 그러시오?”

“ 혹시 냄새가 나지 않소?”

여전히 냄새가 가시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물었다.

“ 냄새라면....”

“ 화장실 냄새를 말하는 거요.”

“ 그러고 보니 조금씩 나는 것도 같소이다. 방금 그놈이 들어왔다가 나가서 그런 모양이오.”

코를 킁킁대던 범일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우담보는 말끝을 흐렸다.

마치 화장실을 보고 뒤를 닦지 않는 것처럼 공연히 찜찜했다. 그때만 해도 우담보는 그 찜찜함이 현실로 드러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울러 그 일로 인해 신경쇠야에 걸리게 될줄도.

************

검지곡, 승천곡, 풍지림.

천우산과 천좌산에 있는 계곡과 숲의 이름이다. 정 중앙의 승천곡을 중심으로 오른편은 천우산, 왼편은 천좌산이라고 하는데, 천우산에는 검지곡이 있고 천좌산에는 풍지림이 있다.

중범을 가두는 천옥은 사시사철 바람이 분다고 하여 풍지림이라 부르는 천좌산 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다.

일잔풍은 중앙 통로를 희미하게 밝히고 있는 유등으로 시선을 주었다.

- 연우강을 완벽히 길들이면 네가 천옥의 방장이 된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낮에 만났던 조양궁 궁주 범일승으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 군 생활을 했다고? 쿡!”

일잔풍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내공은 전혀 없고 군에서 오 년 동안 굴러먹어 뼈마디와 주둥이가 아주 단단하고 하였다.

“ 천옥에 비하면 군은 천국이라는 걸 알게 될 거다. 놈.”

일잔풍은 실눈에서 차가운 광채가 흘러나왔다.

“ 접니다. 형님.”

그때 문 앞에서 검을 그림자가 일렁였다.

십여 명을 데리고 온 이자는 일잔풍의 심복인 야치 오덕성이란 자였다.

“ 어떻게 됐느냐?”

“ 여기.”

활짝 핀 오덕성의 손에는 옥 자물쇠를 여는 열쇠가 들려 있었다.

“ 인원은?”

“ 전부 삼십 명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 좋다. 준비해라.”

“ 무기는 어떻게 할까요?”

“ 연우강이란 놈이 지고 있는 궤짝 안에 작은 괭이와 낫이 들어 있다. 그걸 사용하면 된다.”

“ 자해한 것처럼 꾸미란 말입니까?”

“ 바로 그거다. 그 낫으로 놈의 손목을 잘라내라.”

“ 손목은 바로 잘라내는 겁니까?”

“ 멍청한 것.”

“ 죄송합니다. 방장님.”

오덕성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천옥에 살게 되면 누구나 그렇게 되곤 하지만 특히 일잔풍은 빨리 끝내는 걸 싫어한다. 지칠 때까지 상대를 괴롭히고 가지고 놀다가, 완전하게 망가졌다고 생각이 들면 그때서야 풀어주곤 했던 것이다.

“ 이제 스물두 살이라고 하더구나.”

“ 스물두 살이면 아직 뽀송뽀송하군요.”

“ 난 앙탕부리는 아이는 싫어한다. 덕성.”

“ 확실하게 길을 들여놓도록 하겠습니다.”

오덕성은 자물쇠를 열며 말했다.

“ 혈악은?”

“ 조만간 알아차리고 고문실로 올 겁니다.”

“ 매복은?”

“ 오늘밤 놈은 반드시 죽습니다. 방장님.”

“ 난 고문실에 있겠다.”

“ 다녀오겠습니다. 방장님.”

고개를 꾸벅 숙인 오덕성은 부하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 우리 내기 하겠소?”

이청문이 검은 건물 앞에 멈춰 서자 연우강이 입을 열었다.

“ 무슨 내기 말이냐?”

“ 당신은 한 달 안에 날 찾아와서 애원하게 될 거요.”

“ 제발 함께 나가달라고, 네게 애원을 한단 말이냐?”

이청문은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만일 배짱응로 실력의 고하를 논한다면 대야벌 서열 일위는 분명 녀석이 차지할 거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 내 전재산을 걸겠소.”

“ 방장인 두보관이 누구인지 아느냐?”

“ 내가 알 필요가 있소?”

“ 혈악 두보관은 일천 명의 무인으로 구성된 패천림의 전대 림주였다. 그리고 부방장인 사악 일잔풍은 사월림에서도 오 위 안에 드는 초 강자였다.”

“ 옛날엔 나도 정천호였소. 원주.”

“ 과거는 의미가 없단 말이냐?”

“ 당연히 그렇지 않겠소.”

“ 두보관은 몰라도 사악 일진풍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내기를 할 거요. 말 거요?”

“ 만일 네 말처럼 내가 이곳으로 찾아와서 애원을 하게 되면 네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주겠다.”

이청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남아일언?”

“ 중천금.”

“ 일구이언?”

“ 이부지자!”

“ 아니오, 원주. 이부지지가 아니고 견부지자요. 즉 개새끼란 말이오. 됐소?”

“ 됐다.”

“ 당신, 괜찮은 사람이오. 이 원주.”

연우강은 이청문을 보며 활짝 웃었다.

“ 허허허!”

어이가 없어 이청문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건물 출입문을 힘껏 두들겼다.

쿵쿵!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주님.”

곧바로 문이 열리고 천옥의 옥사장인 잔혹검 유일천이 나왔다.

“ 죄수네.”

“ 당부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유일천은 말을 하면서 연우강을 힐끔힐끔 살폈다. 원주가 직접 죄수를 데리고 온 경우는 상당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 연우강에 대해 듣지 못했는가?”

“ 들었습니다.”

“ 그럼 난 할 말이 없네. 옥주. 수고하게.”

“ 차라도 한 잔하시고.....”

“ 약속 잊지 마시오. 원주.”

연우강은 몸을 돌리는 이청문을 향해 해죽 웃으며 말을 던졌다.

“ 기억하고 있겠다.”

이청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멀어졌다.

“ 들어가자.”

이청문의 모습이 사라지자 유일천을 따라나왔던 자들이 우악스럽게 연우강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 두 번째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건물 사이에 복도를 만들고, 벽에는 유등 하나만 걸어 음침한 분위기를 조성해놓은 것이 과거 군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들어갔던 감옥과 흡사했다.

“ 뭐가 두 번째란 말이냐?”

유일천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옥주가 된지 십여 년이 됐고, 많은 죄수를 보았지만 들어가는 첫날 저렇듯 태연한 놈은 처음이었다.

“ 이런 분위기를 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어서 그렇소. 그런데 지금과 같은 경우엔 보통 신고식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 넌 특별히 감수들의 신고식은 하지 않기로 했다.”

“ 위에서 내려온 지시오?”

“ 그건 알 것 없다.”

“ 그런 모양이군. 저 정도엔 계단이 있어야 그림이 되는데? 역시!”

연우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에서 그랬던 것처럼 복도 끝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 저곳으로 내려가면 된다.”

복도 끝에 닿자 유일천은 아래를 가리켰다.

“ 원래 감방까지 안내를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연우강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건물 벽으로 막혀 있고, 전면 건물 사이로 일 장 폭의 통로가 나 있다.

“ 그냥 내려가면 된다.”

“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군.”

연우강은 픽 웃으며 잠능패혈대법을 풀었다.

그러자 숨어 있는 자들의 기척이 감지됐다. 대략 삼십여 정도가 계단 좌우 측에 숨어 있었다.

‘ 옥준가 하는 놈 때문에라도 기절을 해주는 수밖에 없겠네.’

바로 뒤쪽에서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터인데 무공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내려가라!”

“ 알았소.”

옥주의 말이 들려오자 연우강은 아래로 내려갔다.

공터가 가까워질수록 계단 안쪽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다. 물론 그 숨소리는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는 상태라면 듣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다.

범죄를 저질러 내공이 금제됐다고는 하지만 과거 무인의 습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선 연우강은 공터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그의 뒤편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 한 사내가 몽둥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 아프게 때리면 나중에 죽을 줄 알아!”

몽둥이를 들어 올렸던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 잘못 들었겠지.’

사내는 쥐고 있던 몽둥이를 불끈 틀어쥐고는 연우강의 뒷목을 향해 사정없이 후려쳤다.

“ 개새끼!”

연우강은 욕설을 내뱉으로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 특이한 놈이네.”

연우강을 후려쳤던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동안 숱하게 몽둥이질을 해댔지만 쓰러질 때 비명이 아닌 욕을 뱉은 놈은 처음이었다.

“ 가자.”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오덕성이 나오며 죄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 알았습니다.”

두 명의 죄수가 궤짝 메는 줄을 잡았다. 궤짝은 따로 들고 갈 셈이었다.

“ ......?”

줄을 벗겨내고 궤짝을 들어올리려 하던 두 죄수는 뜨악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궤짝이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 왜 그러느냐?”

“ 궤짝이 좀 무거워서 그렇습니다.”

“ 그 녀석은 아무렇지 않게 지녔던 궤짝을 무겁다고 한다면 너희들을 내 심복으로 삼는 건에 대해선 생각을 좀 해봐야겠구나.”

“ 아, 아닙니다. 별로 무겁지 않습니다.”

화들짝 놀란 죄수 두 명은 힘차게 궤짝을 들어올렸다.

곧 죄수들은 연우강을 부축하여 통로로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