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칠보귀둔필사
어떻게 보면 사는 건 참으로 단순하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은 한순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한 감정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분 좋은 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지도 모른다. 더불어 기분 좋은 일은 산뜻한 아침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담보의 경우엔 더욱 그랬다.
이른 아침 일어나 시원한 냉수를 들이킨 후, 화장실에 앉아서 하루의 계획을 세우곤 했고, 그 시간을 즐겼다.
그랬던 그가 변비에 걸리고 만 것이다.
과도한 업무량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변비에 걸리게 하였던 원인은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우강이 하는 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놈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골머리를 앓기는 했지만 범일승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하였으니 그건 큰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놈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 문제가 있다는 생가을 한 건 며칠 전부터다.
볼일을 볼 때마다 아래쪽에서 오물이 튀어올라 엉덩이를 적시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하인들이 알아서 처리하겠거니 하고 대충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섰다.
예상대로 하인들은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여전히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 마누라의 잔소리가 화살처럼 귓전으로 박혀들기 시작했다. 별 수 없이 하인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화장실은 점점 차 오르고, 마누라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얼마나 못났으면 화장실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하냐는 말에 울컥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제기랄!”
우담보는 욕서을 내뱉었다.
악몽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화장실 건으로 야장으로 갔던 하인은 사람이 없다는 소식만 가지고 왔다.
화장실 푸는 건 전적으로 연우강의 일이고, 분야가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 말은 결국, 화장실 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하인이 아닌 천안원의 원주 음양뇌 유선을 야장 장주 무원에게로 보냈다.
“ 개자식들!”
또다시 욕실이 비어져 나왔다.
야장의 장주는 물론이고 부장주인 창노 등 야장 업무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에 하인들에게 화장실을 푸라고 시켰다.
하지만 장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분뇨를 버리는 장소도 너무 멀었다. 더불어 처음 하는 일이라 가지고 가는 것보다 흘리는 분뇨가 더 많았다.
그 일은 오히려 사건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통에서 흘러나온 분뇨는 율령궁 전부를 역한 냄새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분뇨 냄새가 너무 심해 밥도 먹지 못하고, 심지어 물에서조차 냄새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 화장실 푸는 사람이 나냐고, 왜 날보고 난리를 치는데?”
냄새가 심해지면서 마누라의 잔소리는 더욱 신랄해졌고, 거의 미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무능력하다는 소리를 듣자 폭발했다.
‘ 그럼 당신이 나가서 푸든지. 내가 화장실 푸는 사람이냐‘라고 화살처럼 쏘아대고 말았다. 그랬다가 얼굴에 다섯 줄의 손톱자국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까지 화장실을 정리하지 못하면 집에 들어올 필요 없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 빌어먹을 비는.....”
우담보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장대비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덜컹!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리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총관 유익태가 질겁한 얼굴로 들어왔다.
“ 무슨 일인가?”
“ 버, 범람하고 있습니다. 궁주님!”
“ 무슨 소린가, 황하에 홍수라도 났단 말인가?”
우담보는 깜짝 놀라 물었다.
대야벌 서쪽에 황하가 남으로 흐르긴 하지만 워낙 상류 쪽이라 웬만해서는 범람하지 않는다. 그런데 강이 범람하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화, 황하가 아니고 화장실이 넘치고 있습니다.”
“ 억!”
갑자기 뒷골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기어코 우려하던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 푸, 푸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푸는 속도보다 더 빨리 들어차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이 지쳐서 더 이상은.....”
“ 허!”
우담보는 차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살다 살다 화장실이 범람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전에도 야장이 파업을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주로 생필품 종류라서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 됐다.
그러나 이번 화장실 사건은 율령궁 전체를 마비시켜 버리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 범 궁주께서 오셨습니다.”
“ 모셔라!”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담보는 얼른 표정을 고쳤다.
“ 무슨 일인데 율령궁이 발칵 뒤집힌 겁니까, 그리고 이 냄새는 도대체 뭡니까?”
범일승이 들어오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 연우강 그놈 때문이외다.”
“ 죽은 놈 때문이란 말입니까?”
“ 그렇소이다. 그러니까....”
우담보는 율령궁이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 그럼 그 얼굴은?”
범일승은 우담보와 유익태를 번갈아 보았다.
우담보의 얼굴엔 손톱자국이 길게 나 있었고, 유익태는 눈두덩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따.
“ 화장실이 넘치면 가장 먼저 마누라가 폭발한다는 사실을 나도 처음 알았소.”
“ 쿡!”
범일승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 웃을 일이 아니오. 범 궁주. 범 궁주도 내 입장이 돼 보시오. 아주 죽을 맛이외다.”
“ 사실 나도 그 때문에 왔소이다.”
범일승은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 그 때문이라면.......”
“ 화장실을 그대로 두면 곧 넘칠 것 같다고 천상천에서 연락이 왔소이다. 야장에 연통을 넣었더니 담당자가 없다는 대답만 왔소이다. 그래서 일꾼을 구했는데, 율령궁은 더 급하게 됐소이다 그려.”
“ 십림 쪽에서 일하는 자들을 데려다 쓰면 되잖소.”
율령궁에서야 방심하다가 느닷없이 당한 꼴이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천상천은 다른 자들을 데려다 쓰면 그만이다.
“ 전부 휴가 갔소이다.”
“ 휴, 휴가란 말입니까?”
“ 그렇소. 휴가비도 일 인당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주면서 한 달 동안 푹 쉬었다가 오라고 했답니다.”
“ 오십냥이나 주었단 말이오?”
문득 모릿속으로 연우강이 그렸다는 부적이 스치고 지나갔다. 똥지게가 전부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녀석이 그린 부적 한 장이면 휴가비를 주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고 들었소.”
“ 미치겠군.”
우담보는 멍한 얼굴로 범일승을 보았다.
만일 지금 상태가 계속되고, 벌주가 있는 천상천의 화장실 마저 범람한다면......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 아무래도 그놈이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우 궁주 생까은 어떻소?”
“ 연우강을 말하는 거요?”
“ 그렇소. 화장실에 대한 귄리권을 그놈에게 일임했다고 들었소이다. 즉 지금은 그놈이 아니면 오물을 퍼 나를 자가 야장엔 없단 말이외다.”
“ 그래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 아니오.”
우담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큰 일이라면 공개적으로 야장의 장주인 무원에게 책임 추궁을 하겠지만, 공론화 시키면 오히려 자신만 우습게 되고 만다. 마누라 말처럼 얼마나 칠칠치 못하게 행동했으면 똥지게들이 화장실을 퍼주지 않았겠느냐며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별호는 군자무림행이 아닌가.
“ 접니다. 궁주님.”
“ 무슨 일인가?”
천살원의 원주 이청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우담보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연우강이 살아왔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
“ .........?”
우담보아 범일승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 들었소?”
“ 나도 들었소이다. 우 궁주.”
“ 다, 다시 말해보게, 이 원주.”
“ 천옥에서 올라온 보곱니다. 풍곡으로 떨어졌던 연우강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기어올라 왔답니다.”
“ 분명 살아있다고 하던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 당장 데려오게!”
“ 무슨.....!”
“ 지금 당장 석방시키고 녀석을 데려오게.”
우담보는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 알겠습니다. 궁주님.”
이청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비로소 우담보의 얼굴이 펴졌다.
“ 어떻게 생각하시오?”
화장실 범람 사건으로 인해 피해가 없었던 범일승의 얼굴은 우담보와 달리 사뭇 심각했다.
“ 풍곡에서 살아온 걸 말하는 겁니까?”
“ 그렇소. 우 궁주도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에 풍곡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소.”
“ 어땠소?”
우담보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예전 율령궁의 궁주가 됐을 때 풍곡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벌주의 허락을 받아 들어갔지만 무성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발을 돌렸다.
풍곡 전역에 깔린 살기가 너무 강해 더는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 무단 침입을 하면 신분에 상관없이 무조건 죽인다는 말을 확인하고 올라왔소.”
“ 구사일생이라고 한 걸 보면 나무 같은 거에 걸려서 목숨을 부지했을 거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우담보는 피식 웃었다.
대야벌 백대 고수 중의 한 명인 그가 바로 나온 것은 풍곡에 깔린 살기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공연히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피한 것일 테다.
“ 일단 놈을 데려오면 자연스레 내공을 확인해 주시오. 우궁주.”
그래도 여전히 미심쩍은 듯 범일승은 부탁을 했다.
“ 알았소. 그렇게 하리다. 그보다 연씨 상단과의 일은 어떻게 됐소?”
“ 연금석의 동생들과 약속을 잡아놨는데... 어떡했으면 좋겠소?”
연우강이 살아온 마당에 굳이 그들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 혹여 이번처럼 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타가 있어야 하니까, 그 일은 계속 추진하는 게 나을 것 같소.”
“ 나도 그럴 생각이었오. 우 궁주.”
모처럼 마음의 여유를 찾은 우담보는 시비를 불러 차를 내오게 하였다. 곧 마누라 등쌀과 율령궁을 가득 채웠던 냄새에서 해방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차를 마시는 우담보의 얼굴은 한껏 밝아져 있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있는 그 시각.
율령궁을 떠난 이청문은 연우강의 출소 수속을 밟는 중이었다.
“ 지금까지 놈을 심문해서 알아낸 사실입니다.”
천옥장 잔혹검 유일천은 깨알같은 글이 씌어진 첩지를 이청문에게 내밀었다.
“ 심문?”
이청문은 의아한 얼굴로 유일천을 보았다.
두 궁주가 포기하고 석방시켜 오라고 한 녀석이 연우강이다. 그런데 유일천이 당당하게 심문 기록이라며 첩지를 주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심문이 아니고 진술 기록입니다.”
이청문이 빤히 쳐다보자 유일천은 얼른 정정했다.
“ 그렇군.”
이청문은 첩지로 시선을 주었다.
“ 낭떠러지 틈새에 고문실 통나무가 걸렸고, 그 통나무 때문에 목숨을 건졌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원주님. 통나무가 박힌 아래쪽에 선반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곳으로 떨어져 목숨을 부지했답니다.”
“ 그렇다고 해도 올라오는 건 쉽지가 않았을 텐데.”
“ 놈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손괭이와 낫으로 절벽을 찍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 그렇군. 그에겐 손괭이와 낫이 있었지.”
이청문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 데려왔습니다.”
공터 아래쪽에서 감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청문은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타고 연우강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궤짝을 걸머진 채였다.
“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참인데, 어쩐 일이오?”
연우강은 짐짓 능청을 떨었다.
“ 자리를 잡아간다고?”
“ 원래 감옥의 생리란 게 그렇소. 한바탕 사고를 크게 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최소한 부방장 자리는 확보하게 되는 거요.”
“ 부방장이 됐단 말이냐?”
“ 혈악 그자가 방장 자리를 준다고 했는데, 어차피 머잖아 나갈 몸이라 부방장에 앉겠다고 했소.”
“ 그랬군. 석방이다.”
이청문은 짤막하게 말했다.
“ 알았으니까, 가 보쇼.”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 무슨 짓이냐?”
“ 감투를 쓴 지 하루도 안 됐소이다. 지금부터 권력의 맛이 어떤 건지 좀 즐기다가 나갈 테니까 그만 가보라는 거요. 원주.”
“ 우담보 궁주께서 널 찾는다.”
“ 난 율령궁의 부하도 아니고, 그 양반이 오란다고 가는 사람이 아니외다.”
연우강은 손을 휘젓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 네 이놈!”
보다 못한 유일천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말조심해, 새꺄!”
“ 정녕 죽고 싶단 말이냐?”
유일천은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다댔다.
“ 내가 확보한 검이 열 자루다. 유일천. 일잔풍 그놈이 어떻게 해서 검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번 따져볼래?”
“ 이익!”
유일천의 얼굴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연우강의 말처럼 검이 반입된 사실은 물론이고 그 검으로 인해 도살에 가까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벌에서 알게 되면 징계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검을 주라고 지시한 사람은 범일승 궁주의 측근이다. 하지만 조직 사회에서 상관이 시켰따고 말하면 징계를 먹는 것보다 더 큰 불이익을 당한다. 검이 반입된 사건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자신이 져야 할 터였다.
유일천은 이청문의 눈치를 살폈다.
“ 끌고 갈 수도 있다. 연우강.”
“ 에이! 설마 죄인도 아닌데 그렇게 하려고.”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 날 너무 자극하지 마라, 연우강.”
이청문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 공연히 몸에 힘 주지 마시오. 원주. 지금 울화통이 터진 사람은 원주가 아니고 나요. 지금 난 이번 사건을 정식으로 천상천에 재소할 작정이오. 내가 죄를 지어 천옥으로 들어간 것까지는 좋다 이거요. 문제는 일잔풍 그놈이 날 능욕하려고 했다는 거요. 그러다가 능욕이 실패하자 이번엔 날 죽이려 했다는 것 아니겠소. 그 일로 인해 죄수 오십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고, 난 낭떠러지로 떨어졌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소. 이번 사건이 밝혀지면 누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 으음!”
이청무는 신음을 뱉었다.
녀석의 말처럼 연우강을 천옥으로 집어넣은 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죄수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데 있다.
그 사건이 밝혀지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사람은 율령궁 궁주가 될 테고, 범일승 궁주 또한 무사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니 오히려 무기를 반입한 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 부탁하겠네. 가세.”
결국 이청문은 간곡히 청했다.
그는 율령궁 산하 무인도 아니고, 석방됐으니 이젠 죄수도 아니다. 율령궁 궁주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 정말로 부착하는 거요?”
“ 그렇네.”
“ 좋소.”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다시 계단 위로 올라왔다.
유일천은 의아한 얼굴로 건물을 나서는 이청문을 보았다. 물론 연우강의 말이 옳다고는 하지만 그가 저렇듯 공손하게 나갈 이유가 없었다. 여차하면 연우강을 제거하여 살인멸구를 해버리면 될 것 아닌가.
“ 당신은 그러니까 평생 천옥장밖에 못하는 거야.”
묻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해준 연우강은 씨익 웃으며 유일천을 지나쳐갔다.
밖으로 나온 연우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 이 정도 비면 벌써 토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온 거요?”
“ 토한다는 건 무슨 소린가?”
이청문은 되물었다.
“ 우리 똥지게들은 화장실이 벌컥벌컥 진국을 쏟아내는 걸 토했다고 하오.”
“ 그럼 이번 일도.....”
“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오물이 얼마나 찼는지 확인하려고 구멍을 열었는데, 그만 닫는 걸 깜빡하고 말았소.”
“ 율령궁 화장실이 전부 넘쳤네.”
“ 전부 열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아! 맞다. 고랑을 막고 나서 구멍을 막았다고 생각했구나.”
“ 고랑은 또 뭔가?”
“ 작업을 해봤으면 알겠지만, 퍼 올릴 때 보면 외부로 흘린 국물이 꽤 되잖소. 그것들이 다시 안으로 들러들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 파는 고랑을 말하는 거요.”
“ 그, 그러니까 그 고랑은 보이지 않도록 가리고, 화장실을 막는 뚜껑은 활짝 열어두었단 말인가?”
이청문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화장실을 넘치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난 준비성이 투철한 사람이오. 원주. 미리 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체질이외다. 천옥인가 하는 곳에 처넣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율령궁의 화장실은 깔끔하게 정리가 됐을 테고, 원주를 비롯한 율령궁 소속 무인들은 산뜻한 기분으로 아침을 시작했을 거요.”
“ 끄응!”
이청문은 또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할 말이 없다.
작업 준비를 해놓았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다만 녀석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두를 밖에.
“ 혹시 이런 말 아시오?”
“ 무슨 말 말이냐?”
“ 남아일언 중천금. 일구이언은 개새끼란 말 말이오.”
“ 그, 그건.....”
이청문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방금 연우강이 한 말은 그를 천옥으로 등려보내면서 둘이 나눴던 대화다. 제발 천옥에서 나와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면 어떻나 요구라도 전부 들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전 천옥에서 나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한 것이다.
“ 치사하게 부하가 되라는 둥 그런 말을 하지 않겠소.”
연우강은 음흉하게 웃었다.
“ 그럼?”
“ 우선 날 승천곡까지 데려다주시오.”
“ 경공으로 말이냐?”
“ 난 비를 웬수로 여기는 놈이라서 말이오.”
“ 아, 알았다.”
이청문은 연우강의 손목을 잡았ㄷ. 그는 순간적으로 내공을 주입하여 연우강의 몸 속을 살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의 진기가 연우강의 내부를 훑는 시간은 충분했다.
“ 지금부터 달리겠네.”
이청문은 연우강의 손을 움켜쥐고는 지면을 찼다.
파앗!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빗속을 갈랐다.
연우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청문에게 손을 맡긴 이유는 내공 상태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풍곡에서 살아 나왔으니 우담보와 범일승은 의심을 할 테고, 알게 모르게 확인을 하려 할 게 분명하다.
그들의 의심을 떨치는 방법은 여러 사람에게 직접 확인시켜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청문 또한 그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에 해당했다.
“ 이 대협, 이왕이면 초상비 경공이 어떻습니까?”
원주에서 대협으로 호칭을 바꾸며 연우강은 넌지시 요구했다.
“ 아, 알았네.”
이청문은 바로 초상비 경공으로 바꿨다.
“ 역시 경공 일절은 초상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동은 아예 없고, 소음만 없으면 최곤데...”
이청문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나아가는 속도가 워낙 빨라, 빗방울이 사정없이 연우강의 얼굴을 때렸다.
“ 이 대협.”
“ 말하게.”
“ 초상비 경공을 대하니까 갑자기 요구 조건이 생각났소.”
“ 뭘 요구하고 싶은가?”
“ 막장!”
“ 무슨 소린가?”
“ 앞으로 바빠질 것 같아서 그렇소.”
“ 그, 그러니까 일꾼으로 막장을 달란 말인가?”
이청문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대야벌 백대 고수 중의 한 명을 일꾼으로 부릴 수는 없지 않겠소. 하지만 이 대협도 날 조사하면서 알았겠지만 내가 돈을 꽤 벌잖소. 그 돈을 지킬 일꾼이 필요하다는 거요.”
“ 그럼 막장을 경비로 쓰겠단 말인가?”
“ 제일 간단한 방법은 이 대협을 내 부하로 만들면 되는데, 이 대협은 천살원 원주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차선을 택한 거요.”
“ 그렇다고 하지만 자르는 건 내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니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 완전히 달라는 게 아니오. 막장을 야장으로 파견만 내주면 되오. 그것도 안 되겠소?”
연우강은 이청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 그건 본인이 결정할 일이네.”
“ 그럼 막장에게 내가 말한 대로 말하시오. 연우강에게 가고 안 가고는 너의 자유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이오. 이 대협은 파견 명령서를 녀석에게 건네주는 것까지만 해주시오.”
“ ..... 그것만 해주면 내기는 없었던 걸로 하는 건가?”
“ 물론이요. 이 대협, 장사꾼에게 신용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거요.”
“ 알겠네. 그렇게 해주겠네.”
할 수 없었다. 불가능한 요구일 테지만 연우강이 부하가 되라고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막장에게 파견 명령서를 건네주는 것만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터였다.
“ 녀석이 기분 나빠 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불렀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오.”
“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 그만 내려주시오.”
“ 무슨 소린가, 율령궁은 아직 멀었는데.”
“ 이것 보쇼. 이 꼴을 해가지고 손님을 만나란 말이오? 손님을 만날 때는 최소한 사람 모습을 하고 만나야 한다는 게 이 연우강의 신조요.”
“ 그럼?”
이청문은 속도를 늦춰 연우강의 팔을 놓았다.
“ 천옥에서도 말했지만 난 우 궁주의 부하가 아니오. 그 사람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소. 날 만나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하시오.”
연우강은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내가 부탁해도 안 되겠는가?”
이청문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 이 대협, 한번 정천호는 영원한 정천호란 말을 아시오?”
“ ......!”
이청문은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내가 비록 군을 떠났고, 대야벌로 기어 들어와 있지만, 아직 군대 물이 덜 빠졌는지 좇도 아닌 새끼들이 오라 가라 하는 꼴은 못 보오. 똥물을 처먹고 싶으면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하시오.”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은 남쪽으로 내달렸다.
“ 젠장!”
이청문은 바닥을 툭 찼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잘못된 구석이 있어야 반론을 제기할 터인데, 녀석의 말은 구구절절 옳다.
할 말이 없었다.
“ 무공도 없는 녀석에게 이렇게 당해보긴 또 처음이네.”
이청문은 씁쓸한 얼굴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았다.
“ 응?”
문득 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달려가고 있는 연우강의 움직임은 상당히 특이했다. 몇 걸음을 걷다가 바닥을 강하게 찍으며 방향을 바꾸고 있다.
“ 하나, 둘, 셋...... 일곱. 설마......”
이청문은 깜짝 놀랐다.
문득 과거에 보았던 무림사 한 구절이 떠올랐다.
칠보귀둔필사.
일곱 걸음을 걷게 되면 그는 귀신으로 변하고, 도망치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
천 년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제의 무공이다. 사제의 무공이 지금껏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칠보귀둔필사라는 특이한 보법 때문이었다. 일곱 걸음째 강하게 바닥을 찍어 지기를 몸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그는 천하제일로 변했다고 한다.
연우강의 특이한 움직임이 칠보귀둔필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 그렇다고 해도.”
이청문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연우강의 손을 잡으면서 진기를 그의 내부로 밀어넣었다. 그의 단전에는 반 갑자에 미치지 못하는 내공이 축적돼 있었다. 물론 구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반 갑자의 공력을 축적한 것은 엄청난 일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반 갑자의 공력을 연우강은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연우강의 혈도 중 완전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리 쪽의 혈도뿐이었다. 환골탈태를 하여 혈도를 완벽하게 열지 않는 이상 그가 지닌 반 갑자의 내공은 지금처럼 경공이나 보법을 펼치는 용도 이상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설사 그의 단전에 일갑자나 이 갑자의 내공이 축적된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무공이 있어도 그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 일찍부터 입문했더라면....”
문득 연우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빌어먹을.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린 이청문은 몸을 돌렸다.
궁주께 보고를 해야 하고, 막장 문제 또한 처리를 해야 한다. 더불어 화장실마다 파 두었다는 골아도 찾아내 막아야 할 터였다.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연우강은 궤짝을 방안으로 넣어 놓고는 밖으로 나와 옷을 훌훌 벗었다.
“ 아이고, 시원하다.”
연우강은 쏟아지는 비에 몸을 맡기며 양손을 활짝 들어 올렸다.
“ 훗!”
“ 얼레?”
느닷없이 나직한 웃음이 들려오자 연우강은 깜짝 놀라 허공을 응시했다.
“ 누구요?”
“ 나지 누구겠어요?”
비를 뚫고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만 드러내놓고 있는 그녀는 몽요였다.
“ 지금 교육 시간 아닙니까?”
연우강은 몽요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원래는 야외 훈련 시간인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자습시간으로 변경됐어요.”
“ 자습?”
“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 말이에요.”
“ 자습 시간이라면서 이렇게 나다녀도 되는 겁니까?”
“ 덕분에 좋은 구경하고 있잖아요.”
“ 좋은 구경?”
“ 거기.”
몽요는 턱으로 연우강의 하체를 가리켰다.
“ 저번에 봤잖아요.”
“ 그땐 슬쩍 봐서 자세히 못 봤잖아요.”
“ 나 혼자만 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내새끼는 다 달고 있는데 무슨 구경거리라고 그러십니까?”
“ 우리 동영에는 다도가 아주 발달해 있어서, 집지마다 다기 한 벌 이상씩은 있어요. 하지만 그 다기들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 눈여겨볼 만한 것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 무슨 뜻이죠?”
“ 명품은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 며, 명품이라고요?”
연우강은 황당해 눈을 끔벅였다.
“ 호호호! 원래 명품 다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가진 다기가 명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아요.”
“ 이거 갑자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요?”
“ 자부심을 가져도 되요. 연 공자.”
“ 하하하! 어디가 됐든 잘생겼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그보다 손님이 올지도 모릅니다. 몽요.”
“ 손님이라고요?”
“ 몽요 속옷을 훔쳐간 놈들입니다.”
“ 누구죠?”
속옷을 훔쳐갔다는 말에 몽요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나왔다.
“ 율령궁의 첩자가 훔쳐갔더군요. 앞으로는 관리 잘하십시오.”
“ 코로시테야루!”
“ 무슨 뜻이죠?”
“ 죽인다는 뜻이에요, 연 공자.”
“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몽요가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 훗! 연공자나 조심하세요.”
싸늘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몽요의 얼굴이 조금씩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 목욕물은 내가 데워 두었으니까 씻기만 하면 돼요. 안에 녹차 잎도 넣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몽요의 기척이 사라졌다.
“ 엄청난 은신술이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몽요의 은신술은 이지약과 환노라고 불렸던 자의 환술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둘이 싸움을 한다면 아주 멋진 승부가 연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조수가 반드시 있어야겠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마솥을 보며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가마솥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