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검지곡의 석상들
거대 조직일수록 업무는 분업화되기 마련이고, 설사 신분이 높다고 해서 직속부하가 아닌 자에게 막무가내로 명령을 하달할 수 없다. 모든 업무는 공문, 즉 문서로 이루어지고, 결과 또한 문서를 통해 통보된다.
문서는 조직이 굴러가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서들은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어지는 그런 업무에 한해서 이용되고, 사사로운 일은 책임자 간의 대화로 처리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루 일당으로 두 냥을 지불하는 화장실 푸는 일 또한 사사로운 일 중의 하나로 여겼고, 지금껏 공문 없이 대화로 처리했다. 아니 굳이 대화를 할 필요도 없었다.
때가 되면 야장에서 알아서 처리를 해 주었고 보내온 청구서에 따라 결재만 했다.
그런데.....
“ 정식 공문으로 처리를 해주시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연우강과 마주한 두 사람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기껏 화장실 푸는 일이 아닌가.
그런 일을 공문으로 처리한 예는 대야벌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범일승이었다.
“ 조, 종이 값이 얼마인지나 아느냐?”
그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공문을 받는 사람은 전부 종이 값을 알아야 하는 거요?”
“ 공문은 중요한 일이 아니면 보내지 않는 건 상식이다.”
“ 큰일 낼 양반이군.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고 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연우강은 황당하다는 듯 범일승을 보았다.
“ 그건.....”
물론 의식주는 인간 생활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그 기본은 당연하게 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녀석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 앞으로는 정문 문서로 처리해 주시오.”
범일승이 망설이자 연우강은 단호하게 말했다.
“ 원하는 게 뭐냐?”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하였던가.
결국 급한 상황에 처한 우담보가 먼저 손을 들었다.
“ 원하는 것 없소이다. 궁주. 난 다만 화장실 푸는 비용이 인상됐다는 말을 일괄적으로 알리고 싶을 뿐이외다.”
“ 인상?”
“ 두 냥을 받고 있지만 화장실 푸는 일은 사흘 일하면 하루를 쉬어야 할 정도로 중노동이오. 거기에다 냄새는 또 어떻소. 아무리 빡빡 문질러 씻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단 말이오. 직업 중에서 최악의 직업이 바로 화장실 푸는 거란 말이외다.”
“ 그래서 어느 정도나 인상하겠단 말이냐?”
우담보는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걸 보면 한두 푼이 아닐 것 같았다.
“ 그래서 간단하게 설문조사를 해보았소이다.”
“ 설문조사는 또 뭐냐?”
“ 하루에 백 냥을 줄 테니까 화장실 푸는 일을 하겠느냐는 조사를 해봤소.”
“ 그랬더니?”
“ 하겠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소.”
“ 어떤 자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한 명도 없었단 말이냐?”
우담보는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백 냥.
다섯 냥이면 일반 양민이 볼 때 백 냥이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엄청난 금액을 거절할 리가 없을 터였다.
“ 무인을 상대로 했소이다.”
“ 대상을 잘못 정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
우담보의 얼굴에 어린 조소가 더욱 진해졌다.
“ 대상은 제대로 정했소이다. 궁주.”
“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무인들은 그런 더러운 일은 하지 않는다. 연우강.”
“ 하지만 무인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소이다.”
“ 무슨 소리냐?”
“ 오물을 가득 채우면 이백 근 이상 나가고, 그것들을 가져다 버리는 분뇨 집하장은 가장 가까운 곳이 삼십 리고 먼 곳은 백 리요. 일반 양민이 그 일을 한다면 하루에 몇 번이나 할 것 같소?”
“ 배, 백 리나 된다고?”
우담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설마 그렇게 먼 곳까지 나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해보시오. 율령궁 화장실은 너무 많이 처먹어서 토하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기회도 좋잖소. 장비는 싸게 임대해 드리리다.”
“ 이, 임대라고?”
우담보의 입이 쩍 벌어졌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범일승 또한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만일 녀석이 강짜를 부리기 시작하면 조양궁 또한 율령궁과 같은 처지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수십 개의 창고가 있고, 창고마다 물건이 가득 쌓여 있는 조양궁은 더욱 심각해진다.
“ 그래 얼마를 원하느냐?”
범일승의 얼굴엔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 오십 냥은 받아야 하오.”
“ 오, 오십냥이란 말이냐?”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오십 냥이란 말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긴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백 냥의 보수를 두고 설문조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인지라 놀라긴 했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만일 그 말을 듣지 않고 오십 냥이란 말을 들었더라면 펄쩍 뛰었을 것이다.
“ 조금 전 우 궁주께서 직접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그것처럼 천한 일은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할 사람이 없을 거라고 우 궁주 본인 입으로 말하였소이다. 오십 냥이면 거의 자원봉사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연우강은 우담보와 범일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하루에 하나씩만 푼다고 해도 한 달이면 서른 곳이고, 천오백 냥인데, 그걸 자원봉사라고?”
“ 원래 우리처럼 천한 일을 하는 놈들은 일이 주는 기쁨보다는 돈에서 얻는 기쁨이 훨씬 큰 법입니다. 돈이 곧 행복이고 보람이라는 말이지요.”
‘ 저놈의 주둥이를 콱!’
우담보는 저도 모르게 살기를 일으켰다.
전에 취조를 할 때도 그랬지만 말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화장실 하나 푸는 데 오십 냥을 다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화장실 푸는 비용은 예산 항목에도 없어 청구조차 불가능하다.
“ 오십 냥은 너무 비싸다. 스무 냥으로 하자.”
사실 스무 냥도 엄청나게 비싼 금액이었다.
하지만 일게 모르게 백 냥에서부터 시작된 흥정이라 우담보는 저도 모르게 스무 냥이라고 해버린 것이었다.
“ 제 요구를 들어준다면 사십 냥까지는 양보할 의향이 있습니다.”
“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서른 냥으로 끝내자. 더 이상 말장난 계속하면 천상천에 보고를 올리겠다.”
결국 우담보는 천상천을 들고 나왔다.
“ 천상천에 보고하면 아주 좋아하겠소이다. 그려. 똥통이 넘치고 있는데 야장 놈이 퍼주지 않는다고 할 참입니까? 그럼 벌주가 뭐라고 할지는 생각해 보셨소?”
“ 연우강!”
우담보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아! 알았소이다. 나도 더럽게 싸는 걸로 더는 말하고 싶지 않소이다. 요구 사항은 별 것 아니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눈감아 달라는 거요.”
“ 하고 있는 일?”
“ 부적 장사지 뭐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강은 한편에 준비해 두었던 지필묵을 가져와 탁자 위에 놓았다.
“ .......!”
우담보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전에도 말했지만 서로 좋은 일입니다, 궁주. 상승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 심적 안정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들었소이다. 그들은 부적을 통해서 심적 안정을 얻고, 난 돈을 벌고 서로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이런 일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더구나 그 일이 밝혀지면 잠룡들이 받을 타격도 생각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나쁘게만 보지 말고 긍정적인 사고, 즉 열린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그럼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
연우강은 지필묵을 범일승 앞으로 내밀었다.
“ 뭐냐?”
범일승은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공문 발송은 조양궁에서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별도의 공문은 필요 없고, 전체 서신을 보낼 때 지금 사항을 넣어 주셨으면 합니다. 굳이 큰 글씨로 써넣을 필요는 없고, 맨 마지막이나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깨알같이 써서 내려보내 주십시오. 물론 지금 작성하는 계약서는 크고 잘 보이도록 써주시고요.”
“ 어떻게 써주면 되느냐?”
“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소이다. 안정숙 정화 작업 비용이 두 냥에서 서른 냥으로 올랐다는 말과, 초과 근로 시에는 두 배, 특수 근로 때는 네 배를 지급한다고 써주면 됩니다.”
“ 초과 근로는 뭐고 특수 근로는 또 뭐냐?”
“ 하루 다섯 시진이 근로 시간이고, 삼 일에 하루는 휴일이외다. 결국 다섯 시진을 넘어서는 일은 시간외 근무가 되는 거고, 휴일에는 쉬어야 하는데 일을 하게 되니까, 특수하게 일을 한다고 해서 특수 근로라고 하오.”
“ 그럼 밤에 하는 건 야간 근로냐?”
“ 맞소. 범 궁주. 밤에 일을 하게 도면 초과 근로 수당에 야간 근로 수당이 합쳐져서 세 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까지 받으면 날 나쁜 놈이라고 할 것 같아서 빼주는 거요. 하지만 문서엔 기록해 주시오.”
“ 넌 나쁜 놈 맞다. 연우강.”
범일승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다가 글을 적어 내려갔다. 연우강이 말한 대로 써 내려간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수결을 했다.
“ 우 궁주도 해주시오.”
“ 화장실 일은 조양궁 업무다.”
“ 계약서를 쓸 때 공증인의 수결은 기본이외다.”
“ 넌 천벌을 받을 거다. 나쁜 자식아.”
우담보는 연우강을 노려보다가 수결을 했다.
“ 참! 율령궁에서 훔쳐간 내 물건들은 언제 돌려주실 겁니까?”
“ 훔쳐간 물건?”
“ 전에 취조실에서 내게 보여줬던 물건들 말입니다.”
“ 그걸 달란 말이냐?”
“ 구입한 셈치고 돈으로 주면 더욱 좋습니다. 그 부적은 천 냥입니다만.”
“ 알았다. 돌려주마.”
“ 그리고 속옷은 원래 자리로 가져다 줘야 할 겁니다.”
“ 다른 것들은 네게 달라고 하면서 속옷만 제자리에 가져다 두라는 건 무슨 말이냐?”
“ 혹시 코로시테야루가 무슨 말인지 아시오?”
“ 동영어로 죽여버린다는 뜻이다.”
한때 동영어를 겉핥기 식으로 배운 적이 있는 우담보가 대답했다.
“ 그 속옷 주인이 그렇게 말했소. 지금도 열심히 찾으러 다니는 것 같았소이다.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은 것처럼 말을 하던데... 나야 입을 꽉 닫고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 나가면 율령궁이 뒤집어지는 사태가 생길지 몰라 미리 정보를 주는 거요.”
“ 알았다. 사흘 안에 처리하도록 하마. 그보다 일은 언제부터 할 거냐?”
“ 오늘은 이미 늦었고, 내일부터 하겠소.”
“ 초과 근로를 해라.”
“ 초과 근로를 언급한 것은 공식적으로 금액이 그렇다는 거지 반드시 초과 근로를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외다. 자칫 잘못하면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게 초과 근로와 특별 근로외다. 정말로 급한 일이 있을 때,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거기다 손님의 요구가 있을 때만 하는 게 초과 근로와 특수 근로요.”
“ 율령궁은 지금 비상 시국이다. 오늘밤부터 당장 시작해라.”
“ 이런 경우엔 선불이외다. 궁주.”
“ 작업 준비 끝나면 결제를 해주겠다.”
우담보는 연우강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알겠소이다. 당장 작업준비를 해서 달려가겠소이다.”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우담보와 범일승은 바로 연우강의 거처를 떠났다.
“ 죽을 맛을 거다. 우담보. 화를 내면 속 좁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고, 천상천에 보고를 하면 웃기는 놈이라고 할 것 같고, 그런 걸 두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다고 하는 거다. 한 번만 날 더 건드리면 그땐 바다를 만들어버릴 거다. 개자식아. 똥물로 가득 찬 바다를.”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작업할 때 입는 옷을 꺼내 걸쳤다. 그러고는 지하실로 내려가 분관과 지게 그리고 오물을 푸는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 일 나가는 거예요?”
대문으로 향하는 데 불쑥 몽요가 얼굴을 드러냈다.
“ 참!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잘 왔습니다.”
“ 무슨 얘기죠?”
“ 속옷 도둑놈이 몽요이 속옷을 사흘 안에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을 겁니다.”
“ 그걸 나보고 입으라고요?”
“ 이놈 저놈 손때 탔는데 어떻게 입습니까? 내가 그것보다 더 멋지고 편한 걸로 드릴 테니까 버리십시오.”
“ 그럼 그걸 내게 말해주는 이유는 뭐죠?”
“ 코로시테야루!”
연우강은 전에 몽요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 죽이라고요?”
“ 동영에서는 도둑놈을 용서해주는 풍습이 있습니까?”
“ 그건 아니지만 살인을 저지르면 난 여기서 쫓겨나요.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연 공자도 알잖아요.”
“ 속옷을 본래 자리로 집어넣고 있을 때 없애면 되잖습니까?”
“ 집어 넣을 때라고요?”
“ 속옷을 꺼낼 때나 집어넣을 땐 동작이 같죠!”
“ 그럼?”
“ 그놈은 여자 속옷을 훔치는 변태가 되는 겁니다. 아주 죄질이 더러운 놈이죠. 그런 놈은 죽는다고 해도 공론화를 시킬 수도 없을뿐더러 몽요를 처벌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잃어버린 잠룡들은 한두 명이 아닙니다. 몽요는 도둑을 잡는 공을 세우게 되는 거고, 어쩌면 상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 당신?”
몽요는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이다.
그는 속옷을 훔쳐갔던 도둑이 율령궁 무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복수는 꿈도 꾸지 않을 텐데, 그는 자신을 감옥으로 집어넣은 그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것도 남의 칼을 빌려 죽이는 차도살인으로.
“ 대신 이번 달은 가마솥 온천을 무료로 개방해 드리겠습니다.”
“ 호호호! 좋아요. 연 공자.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몽요는 활짝 웃었다.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 너무 멋있다! 옷도 멋있고, 지게도 멋있고, 똥통도... 너무 멋있어.”
멀어지는 연우강을 쳐다보는 몽요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
“ 그게 무슨 소린가?”
이청문의 보고를 받던 우담보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냄새 때문에 골이 지끈지끈해 죽을 지경인데, 이건 무슨 황당한 말이란 말인가.
“ 죄송합니다. 궁주님. 제가 그 친구와 내기를 하는 바람에.....”
이청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자신이 있었다고 해도 내기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 허허!”
우담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공도 없는 똥지게에게 안팎으로 당하고 만 셈이다.
“ 뭘 고민하고 그러시오. 우 궁주!”
빙그레 웃고 있던 범일승이 우담보를 보고 말했다.
“ 똥지게가 대야벌 백대 고수 중 한 명인 막장을 하인으로 부리겠다데 웃고 넘길 일이란 말이오?”
“ 막장은 대야벌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잠룡대전에 참석하는 죄를 졌소이다. 우 궁주.”
“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지 않았소.”
“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소.”
“ 어쩌란 말이오?”
“ 본인 입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지만 다른 무인들과의 형평성을 생각해서라도 죄를 물어야 하오이다. 근신 처분 정도가 적당할 것 같소이다.”
“ 근신이라면......”“ 그놈 말처럼 야장으로 파견을 보내는 겁니다. 그럼 이청문 원주의 체면도 세워주고 근신 처분도 내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오.”
“ 누가 그걸 몰라서 그렇습니까? 자꾸만 그놈에게 끌려가는 것 같아서 그런 게지요.”
“ 예민하게 반응하면 우리가 지는 겁니다. 우 궁주.”
“ 끄응!”
우담보는 얼굴을 찌푸렸다.
대범하게 대하려고 해도 자꾸만 짜증이 나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 더욱 답답한 건 뭔지 아시오? 놈이 하는 일이 막장이라 뭔가 불이익을 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범 궁주.”
우담보가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이었다.
보통 잠룡들 같으면 대야벌 퇴소를 시킨다거나, 잠룡들에게 허락된 무고인 승천비고의 출입을 금한다거나 해서 제재를 가하겠지만 놈은 지금까지 승천비고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겁을 주기 위해 천옥에 처넣었더니 그곳에서 부방장이 돼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청문이 애원해서야 간신히 끌고 나왔다고 하였다.
도무지 불이익을 줄 방법이 없었다.
“ 한 가지는 있소이다.”
“ 뭐가 있따는 말이오?”
“ 똥지게들은 화장실을 풀 때 절반만 푼다고 들었소이다.”
“ 일하는 방식까지 간섭을 하는 건 놈의 말처럼 아주 치사한 짓이오. 범 궁주.”
“ 가격을 올린 사람은 놈이외다. 우린 가격을 올려준 대신 일에 대해 약간의 간섭을 할 수 있고요.”
“ 제기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하는 생각에 공연히 짜증이 밀려왔다.
“ 놈은 두 배로 일을 해야 하오. 우 궁주가 말하기 곤란하다면 내가 말하고 오겠소.”
“ 그렇게 합시다.”
결국 우담보는 치사한 짓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화를 풀 길이 없을 것 같았다.
“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담보는 이청문을 향해 물었다.
“ 화화전 작업을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화화전은 궁주인 우담보와 그의 가족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 갑시다.”
우담보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몸을 날려 안채인 화화전에 들어섰다.
정원을 가로지른 그들은 곧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연우강이 작업을 하는 곳은 화장실 뒤편이었다. 그는 등을 보인 채 끝에 바가지가 달린 기다란 막대기로 분뇨를 퍼담고 있었다.
“ 응?”
우담보와 범일승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분뇨를 퍼담고 있는 연우강의 동작 때문이었다. 보통 무엇인가를 퍼서 담게 되면 동작이 끊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연우강의 동작은 분뇨를 푸기 위해 바가지를 담그는 것부터 시작해서 떠올리는 동작 그리고 관처럼 생기 통 안에 넣는 동작까지 단 한 번의 멈춤도 없었따.
우담보는 대야벌 십대 고수 중 한 명이고 범일승 또한 백대 고수에 끼어 있는 초극의 고수들.
연우강의 동작에 어려 있는 무공의 기운을 읽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힘이 장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ㅜ공을 익히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우담보는 고개를 돌려 이청문을 보았다.
천옥에서 연우강을 데리고 나올 때 경공을 펼쳐서 왔다는 말을 들었던 탓이다.
[ 그의 단전엔 반 갑자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내기가 축적돼 있었습니다.]
이청문은 전음으로 말했다.
[ 정말인가?]
우담보는 확인하듯 물었다.
[ 그렇습니다. 하지만 혈도는 대부분 막혀 있었습니다. 환골탈태를 하지 않는 이상 막힌 혈도를 뚫는 건 불가능합니다.]
[ 환골탈태를 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뻥 뚫린 혈도네. 원주.]
우담보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환골탈태.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상의 신체를 만들어준다는 환골탈태는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라선 자들이 갑자기 영약이나 엄청난 진기를 전이 받았을 때 일어나곤 하는데, 그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아울러 환골탈태 전에 반드시 생사현관을 타통하는 과정도 거치게 돼 있다.
혈도가 거의 막힌 상태에서 환골탈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연우강의 단전에 있는 삼십 년 내공은 무병장수를 줄 뿐 다른 역할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보약에 불과했다.
[ 다리 혈도는 대부분 열려 있었습니다.]
이청문은 연우강이 칠보귀둔사와 비슷한 무공을 펼쳤다는 사실을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설사 칠보귀둔사를 익혔다고 해도 나머지 혈도가 대부분 막혀 있는 상태라면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 그건 나도 짐작하고 있었네.]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강 곁으로 걸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연우강이 고개를 돌렸다.
“ 가능하면 똥지게 옆으로 오지 않는 게 좋소이다. 궁주. 자칫 잘못하면 국물이 튈 수도 있으니까요.”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걱정하지 말거라. 그보다 일에 대해 할 말이 있다.”
“ 일은 똥지게 고유 권한이오. 궁주도 업무에 대해서 누가 간섭하면 좋겠소?”
“ 전처럼 두 냥이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론 한 곳에 최소 서른 냥을 지불하기로 했으니까 약간의 간섭에 대해서는 너도 이의 없을 거라고 본다.”
“ 말하시오.”
연우강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 바닥에 보이도록 퍼주었으면 좋겠다.”
“ 바, 바닥이란 말이오?”
연우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바닥까지 푸려면 지금까지 했던 일을 두 배로 해야 한다. 그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ㄷ.
“ 박박 긁어야 한다. 내 요구조건은 그것뿐이다.”
우담보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도렬 범일승을 보았다.
바닥까지 긁어달라는 말을 하는 게 어려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술술 흘러나왔다.
[ 놈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니까 십 년 묵은 체증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소.]
범일승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활짝 웃었다.
“ 니미럴!”
연우강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오자 우담보와 범일승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콰앙!
곧이어 분관 뚜껑을 닫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연우강이 너무 거칠게 뚜껑을 닫았는지, 넘칠 듯이 채워져 있던 부뇨가 물방울처럼 퍼지며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연우강은 그것들 중 한 방울에 시선을 맞췄다.
“ 하하하....!”
비로소 복수를 했다는 듯, 우담보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연우강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더불어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활짝 웃어주고 싶었다.
그는 연우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아니 이런 우연의 일치가 없었다.
“ 저저.....!”
우담보를 지켜보고 있던 이청문이 질겁한 얼굴로 급하게 내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의 내력이 우담보 얼굴 근처에 채 닫기도 전에 손톱 크기의 검은 덩어리는 쥐가 제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담보 입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철버덕! 하고 물방울 터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귓전을 할퀴는 듯했다.
“ 으으으!”
우담보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떨어지는 똥물을 향해 정통으로 입을 가져다 댄 꼴이 됐으니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다. 더불어 입 안으로 떨어진 그것은 입천장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말았다. 숨을 쉬면 냄새가 곧바로 목을 타고 넘어갈 테고 침을 뱉자니 입 안에 들어온 그것을 몽땅 맛을 봐야 한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우담보는 바랐다.
‘ 맞다, 귀식대법이라면.’
우담보는 내심 소리쳤다.
신체의 모든 기능을 죽이고, 숨조차 쉬지 않는 무공을 무인이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고, 자신 또한 그렇다.
이청문 또한 조금 전 상황을 보았으니, 귀식대법을 펼치면 안으로 옮겨 입 안을 씻어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수밖에 없었다.
우담보는 이청문을 보며 내기를 끌어올렸다.
턱!
이보다 공교로울 수가 없었다.
막 내기를 끌어올려 귀식대법을 펼치려는 순간, 쇠막대기가 그의 단전을 툭 건드렸다. 그것은 연우강이 분관을 질 때 사용하는 지게 팔이었다.
“ 흐읍........!”
미약한 통증이었지만 무인의 최대 급소라고 할 수 있는 단전을 맞자 우담보는 저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았다.
“ 커억! 우엑!”
우담조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바로 토를 했다.
“ 구, 궁주님!”
이청문은 우담보를 향해 다가갔다.
이청문의 얼굴엔 안타까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사이에 연우강은 분관 가장자리에 나 있는 구멍에 고리를 끼웠다. 몸을 번쩍 일으켜 세운 그는 후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 쯧,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제가 싼 똥을 처먹은 개는 봤어도 사람은 또 처음이네.”
“ 저, 저 저 개자식을 죽여! 저 개새끼를 묻어버리라고!”
우담보는 밖으로 나가는 연우강을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청문은 물론이고 범일승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연우강이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는 신경질적으로 분관 뚜껑을 닫았고 그 여력으로 인해 분뇨가 튀어올랐을 뿐이다.
우담보가 웃지만 않았더라도 분뇨 덩어리가 제 입으로 들어가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개가 주인이 던져준 음식을 받아먹는 것처럼 그는 떨어지는 덩어리를 향해 입을 벌린 꼴이 돼버린 거였다.
“ 우엑!”
계속해서 토악질을 해대는 우담보를 보며 범일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완패.
연우강을 놀려주려고 나왔다가 오히려 험한 꼴만 당하고 만 것이다.
“ 앞으론 우리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놈을 상종하지 않는 게 낫겠소. 우 궁주. 놈은 호환 마마 같은 놈이오.”
범일승은 측은한 얼굴로 우담보를 위로했다.
“ 어어!”
우담보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우 궁주를 안게, 원주.”
“ 알겠습니다. 범 궁주님.”
이청문은 얼른 우담보를 안았다. 그러고는 율령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재수 없는 놈. 똥물과 함께 콱 넘어져 버려라. 퉤!”
범일승은 연우강이 나간 후문을 보며 침을 뱉었다.
“ 아이고!”
범일승의 바람이 통했을까.
빠르게 달려가던 연우강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왼발을 들어올린 채 폴짝폴짝 뛰었다. 칠 보째 강하게 찍었던 왼발을 차올리면서 튀어나온 돌부리를 걷어찬 모양이었다. 간혹 튀어나온 돌이 있어 지금과 같은 경우를 당하긴 했지만 이번엔 심하게 아팠다.
“ 이런 제기랄!”
연우강은 지게를 내려놓고 신발을 벗어 발톱을 살폈다. 다행히 발톱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 이것 보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하층민인 똥지게의 발을 거는 건 무슨 경우요?”
마치 누가 있는 것처럼 연우강은 왼편을 보며 삿대질을 해댔다. 그런데 그가 삿대질을 해대는 곳에는 뭔가 있기는 있었다. 일 장 높이에 달하는 그것은 검을 들고 있는 석상이었다.
지금 연우강이 가고 있는 곳은 하늘 천 자의 첫째 획과 둘째 획 사이, 즉 두 이 변의 오른편에 위치한 천우산의 검지곡이었다.
이곳을 검지곡이라 부르는 이유는 도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나란히 서 있는 석상들 때문이다.
폭이 일 장 정도 되는 길 좌우측에 나란히 세운 것처럼 보이는 석상들은 앞뒤 간격도 일 장이었는데, 전부가 검을 쥐고 있다. 검을 쥔 자세 또한 일천 개의 석상이 전부 달랐다. 더불어 눈, 코, 입을 구분할 수 없는 얼굴과 몽둥이 수준으로 변한 검은 석상들이 이곳에 서 있었던 세월을 가늠케 해주었다.
처음 이 석상을 보았을 때 무원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대야벌이 세워진 것보다 오십 년 늦게 세워졌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무슨 이유로 세웠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문득 막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야벌 초대 벌주가 남겼다는 일천파류흔과 일천독신행.
혹시 그 두 가지 무공을 석상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무원은 피식 웃었다.
-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검지곡에서 일생을 마감한 사람이 수 천 명은 될 거다.
무원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무공에 관심이 없는 자신도 석상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무공을 익히는 무인들이라면 오죽할까 싶었다. 무원의 말처럼 이곳에 죽치고 앉아 석상의 자세를 연구했을 것이다.
- 석상의 자세를 연구하며서 본인의 무공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고수들도 상당수다. 비밀을 지니고 있든 없든 검지곡의 석상은 무공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곳에서 참오했던 자들이 남긴 비급들이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에 고스란히 남았고, 그것들은 대야벌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됐다.
무인들이 더 이상 이곳을 찾지 않게 된 이유는, 삼백 년 전 벌주였던 삼뇌천자 나추옹 때부터였다.
검지곡에서 삼 년 동안 석상을 연구했던 그는 ‘단순한 석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일 뿐이다.’라고 선언했다.
삼뇌천자란 별호가 말해주듯 그는 엄청난 사람이었다. 아니 무림의 하늘이라는 대야벌에서 무공이 없어 벌주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었다. 무치 벌주라고 더 많이 불리곤 했던 그는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체질인 무혈지맥을 타고났지만 머릿속에는 수천 종의 무공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검지곡의 석상들은 어떤 무공도 지니고 있지 않고, 석상을 연구하느니 차라리 삼류 검법서라도 한 번 더 보는 게 낫다고 했으니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지곡에 움막을 짓고 석상을 연구하던 자들은 통탄을 하며 짐을 쌌다.
무려 천오백 년 동안 대야벌 무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됐던 검지곡의 영광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 후로 검지곡은 누고도 찾지 않는 곳이 됐고, 분뇨를 져 나르는 똥지게들마 오가는 길로 전락했다.
“ 나도 그 양반 의견에 동의해. 하지만 석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어. 왜냐면, 저런 식의 석상 배치는 과거엔 흔하게 있어왔기 때문이야. 바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호신상을 저런 식으로 배치했다는 거지.”
일 장 간격으로 서 있는 오백 개의 석상들.
그 길이만 해도 무려 오백 장에 달한다.
그런 석상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좌우 측에 세웠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결국 어디론가 들어가는 입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연우강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더불어 저런 규모로 석상을 세울 정도면 무덤 안에 넣는 부장품 또한 상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연우강이 석상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이유가 바로 무덤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부장품 때문이었다. 하지만 석상이 끝나는 지점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무덤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저 절벽만 덩그라니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 그나저나 어떤 놈이 잠자는 사자 코털을 건든 거야?”
연우강은 조금 전 발에 걸렸던 돌을 찾아나섰다.
게속해서 낮 작업만 있다면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금 돌부리에 걸린 이유도 비에 젖은 석상이 참 멋져 보인다는 생각에 무심결에 쳐다보다가 바닥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밤 작업을 병행해서 해야 하고, 발에 걸릴 만한 돌은 미리미리 치워버리는 게 나았다.
“ 저기 있네.”
돌을 찾아 나섰던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 서 있는 석상 근처에 약간 튀어나온 돌이 보였다.
“ 비 때문이었구먼.”
이번 폭우에 흙이 약간 쓸려나가 땅속에 박혀 있던 놈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연우강은 돌을 뽑아 석상 뒤편으로 던져버렸다.
“ 응?”
파인 흙을 메우려 하던 연우강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폭우에 흙이 쓸려나간 곳은 또 있었다.
바로 우뚝 서 있는 석상의 발치였다.
발치 부근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석상의 발이었다.
연우강은 고개를 들어 석상을 보았다. 무치 벌주라고 하였던 삼뇌천자의 말처럼 석상은 조잡하기 그지없다.
상체는 비교적 세삼하게 만들어진 반면 하체는 통나무처럼 투박하다. 마치 일 장 높이의 돌기둥에 상체만 조각을 해놓은 듯한 형태다. 물론 전포를 입혀 놓으면 그런 모양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조각을 했던 자가 대충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시선은 동쪽인데 발은 서쪽이라.......”
아무래도 이상했다.
시선이 동쪽이면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상 발끝도 동쪽을 향해야 한다. 그런데 석상의 발 앞 부분은 정 반대쪽,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 잘못 만든건가?”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바로 앞쪽에 있는 석상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 보았던 것과 검을 쥔 자세는 달랐지만 그 석상 역시 쳐다보는 곳은 동쪽이었다.
더 이상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석상의 아래쪽을 파보았다.
“ 이거 봐라?”
잘못 만들었다는 말을 수정해야 할 듯했다.
그 석상 역시 발의 모양이 얼굴과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 무덤으로 들어가는 비밀이 발에 있다는 말?”
연우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발 모양으로 뭔가를 나타내려 했다면 천 여개의 발이 위치한 모양을 전부 알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 남는 게 시간인데 그거나 하고 있지 뭐. 하루에 스무 개씩만 확인하면 아무리 늦어도 두 달이면 끝나겠네.”
연우강은 다시 지게를 지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