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2화 (22/232)

제11장 기연은 동굴이나 절벽에만 있는 게 아니더라

우담보가 그 사건을 알게 된 건 저녁 무렵이었다.

연우강이 밤새도록 화장실을 퍼준 덕분에 마누라에게 시달리지도 않았고, 전날 뜻하지 않게 먹었던 분뇨 냄새도 이젠 어느 정도 가셔, 심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저녁을 맞았다. 다만 하루 종일 밥을 굶은 탓에 심하게 허기가 졌다.

이제는 뭔가를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서성이고 있는데 정보를 담당하는 천안원 원주 음양뇌 유선이 사색이 돼 뛰어들어왔다.

“ 또 연우강 그놈이 사고라도 친 건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잔뜩 일그러져 있는 유선의 얼굴을 보자 연우강이란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 주, 죽었습니다.”

“ 연우강 그놈이 죽었다는 말인가?”

“ 아, 아닙니다. 궁주님. 물건을 원위치 시키기 위해 갔던 밀정이 잠룡의 처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 잠룡의 처소에서 죽임을 당했다니 무슨 소린가?”

“ 오늘 아침에 저네 가져왔던 속옷을 원위치 시켜놓으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 그런데?”

“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세가....”

유선은 말끝을 흐렸다.

“ 계속하게 원주.”

“ 궤짝 안에서 뭔가를 꺼내는 모습으로 죽었는데, 그의 손에는 속옷이 들려 있었답니다.”

“ 그러니까 속옷을 원래 위치로 넣는 순간에 공격을 받은 거란 말인가? 그 상태로 몸이 굳어 속옷은 계속 손에 쥐고 있는 채고.”

“ 그렇습니다. 궁주님. 그런데 잠룡들이 그를 파렴치한 변태 도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 허허!”

우담보는 허탈하게 웃었다.

보통 임무 수행 중에 부하가 죽으면 그의 가족들에게 포상을 하고, 장례도 후하게 지낸다. 그런데 이번 일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아니 천안원 소속 무인이라고 밝힐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 잠룡의 훈련 시간 아니었나?”

“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 잠룡이 몸이 아파 교육을 나가지 않았다고?”

“ 그렇습니다.”

“ 쉬고 있었으면 침상에 누워 있었을 거 아닌가.”

“ 저도 그게 이상합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면 장상보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 그럼?”

“ 그 동영 계집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기다리고 있었단..... 헉!”

우담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 나야 입을 꽉 닫고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 나가면 율령궁이 뒤집어지는 사태가 생길지 몰라서 미리 정보를 주는 거요.

- 알았다. 사흘 안에 처리하도록 하마, 그보다 일은 언제부터 할 거냐?

바로 놈이었다.

“ 연우가아앙!”

우담보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울부짖었다.

내공이 잔뜩 담긴 그의 외침은 천무비고 근처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연우강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 그러게 자식아, 조용히 사는 사람을 왜 건드려. 난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양보다 훨씬 순한 사람이야.”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분뇨를 퍼 담았다.

그의 작업량은 상상을 초월했다.

작업을 나간 지 나흘 만에 수뇌들이 기거하는 곳의 화장실은 깨끗하게 처리했고, 지금은 중간 수뇌들, 즉 열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을 푸는 중이다.

개당 가격이 책정돼 있기 때문에 하나가 끝났다고 하여 굳이 쉴 이유가 없었다. 더불어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석상의 발 모양을 그릴 생각에 연우강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일에 매진했다. 어느새 화장실은 바닥을 보이는 중이었다.

“ 저건 또 뭐야?”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화장실 바닥에 기다란 물체 하나가 떡 하니 누워 있었는데 다름 아닌 시체였다.

“ 쯧! 죽을 곳이 없어서 똥간에서....”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주변을 살폈다. 시체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라천력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사사건건 간섭을 하던 총관 유악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체를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둥실!

썩어 흐물흐물해진 시체는 둥실 떠올라 분관 안으로 갔다.

“ 이젠 정말 관이 됐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지게를 걸머졌다.

“ 간다! 간다! 에이, 씨부랄!”

연우강은 낮게 소리치며 걸음을 옮겼다.

율령궁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천천히 움직이던 그가, 으슥한 길로 들어서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무인이 보면 그다지 빠르다고 생각지 않을 정도였지만, 일반 양민에 비하면 엄청나게 빨랐다.

일곱 걸음을 걷고, 강하게 바닥을 찍어 지기를 끌어들여 이용하는 방법은 이청문이 본 그대로 칠보귀둔필사의 신법이 맞았다. 하지만 무원 또한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고, 연우강도 신법에 관심을 두지 않아 이름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분관의 무게 중심에 따라 발을 옮기다 보니 저절로 터득하게 됐을 뿐이었다.

승천곡을 지나 천우산으로 들어선 그는 검지곡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동안 이곳을 오가면서 몇 개의 석상을 더 확인해 본 결과, 오른편에 있는 석상은 완전하게 바르다고 할 수 없지만, 정상인의 걸음이라고 부를 정도는 됐고, 왼편에 서 있는 석상은 전부가 반대였다.

즉 상체를 제거하고 발만 놓고 본다면 석상들은 오른편으로 갔다가 왼편으로 돌아오는 형태였다. 만약 한 석상이 한 걸음씩 뗀다면 정확하게 천보가 되는 것이다.

연우강은 오른편 첫 번째 석상부터 발 모양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지금껏 백 개를 그렸다.

백한 번째 석상 앞으로 간 그는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흙을 파헤친 다음 석상의 두 발이 위치한 모양을 꼼꼼하게 그렸다.

그렇게 열다섯 개를 그린 뒤 종이를 둘둘 말아 품속으로 집어넣고는 몸을 날렸다.

똥지게들이 드나드는 문 또한 쪽문이고 이미 작업 사실을 알렸기 때문에 제지당할 일도 없었다.

쪽문을 나서자마자 잠능폐혈대법을 해제하여 내공을 끌어올린 그는 빠르게 숲을 내달렸다. 그림을 그리느라 허비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삼십 리를 내달리지 분뇨 집하장에 도착했다. 분뇨 집하장 주변은 전부가 밭이었다. 집하장으로 모인 분뇨는 대부분 밭의 거름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분관 뚜껑을 열고 분뇨를 쏟아낸 다음 근처 냇가로 갔다. 그동안 내린 비로 인해 개울물은 상당히 불어나 있었다.

역시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시체를 꺼내 한편에 놓아두고는 분관을 던져 넣어 내부를 씻었다. 그런 다음 이번엔 시체를 들어올려 물 속으로 밀어넣었다.

“ 당신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전 같았으면 뭍어주는 건 어림도 없었다고.”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시체를 조절하여 분뇨를 씨어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옷을 걸치고 있는 상황에서 몸을 씻어준다는 건 무리였다.

다시 시체를 꺼내어 걸치고 있는 옷에 정신을 집중했다. 옷 또한 대부분 삭아 버린 듯 그다지 힘을 쓰지도 않았음에도 쉽게 떨어져 나갔다.

툭!

불룩한 물체 하나가 시체의 가슴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 좋은 일을 하니까 역시 복을 받네.”

연우강은 씩 웃었다.

화장실에 빠져 죽은 자의 정체가 비로소 이해가 됐다. 첫날 창노 영감은 화장실을 주로 애용하는 자들 중에는 살수나 도둑이 포함돼 있다고 하였다.

불룩한 물체를 가슴에 넣고 있었다는 것은 곧 도둑이란 말이 된다. 더불어 돈일 가능성이 높았다.

연우강은 불룩한 물체로 시선을 주어 끌어당겼다.

“ 열려라!”

공연히 기분이 좋아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불룩한 물체 한쪽이 열리고 같은 형태의 물체가 안에서 나왔다. 하지만 겉을 싸고 있던 것과는 달리 그놈은 약간 거무튀튀한 색을 띠고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작은 포대였다.

처음부터 화장실로 뛰어들 생각을 한 듯, 작은 포대 입구는 바느질을 한 상태로 밀봉을 해두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뜯어내자 또 다른 자루가 나왔고, 그 후루도 두 개의 입구를 더 뜯어내고서야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책자 세 권과 주먹 크기 정도 되는 작은 옥함이었다.

“ 이게 뭘까나?”

연우강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상대를 도둑으로 단정지었고, 도둑을 건져 온 곳은 천무비고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화장실이다.

그렇다면 도둑의 품속에서 나온 물건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십중팔구 무공 비급이 분명할 터였다. 더구나 도둑이 목숨 걸고 훔쳐낸 거라면 상당히 귀중한 것이 틀림없을 테다.

그런데 연우강은 비급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함을 먼저 집어든 것이다.

“ 금강석이나 칠채보주 같은 것들이 들었으면 내 당신을 다시 태어나는 게 싫을 정도로 멋지게 장례를 치러주겠소.”

연우강은 시체를 향해 중얼거리며 옥함을 열었다.

딸칵!

“ .......!”

연우강의 눈에 실망스런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안에는 밤톨 크기의 환약 한 알이 들어 있을 뿐 금강석이나 칠채보주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 너 미친 거지?”

연우강은 시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일 옥함 안에 있는 약이 영약이라면 머리를 맑게 해주는 청아한 향이라든가, 매일 먹는 탕약 냄새 정도는 나야 하는데 환약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연우강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시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죽은 시체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 혹시 이 안에.......”

겉포장만 다섯 번을 한 걸 보면 도둑은 상당히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고, 그런 자라면 뭔가를 숨기기 위해 환약 형태를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연우강은 망설임 없이 환약을 입에 넣고 부쉈다.

“ 제길.”

딱딱한 것이 걸리지 않자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으면 맛이라도 좋아야 하건만, 밀가루 뭉치를 ㅆ비은 것처럼 밋밋했다.

“ 어?”

막 뱉어내려 하던 연우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밀가루 뭉치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침과 함께 섞이면서 녹아들더니 입 안 가득 청아한 향기가 들어찼다.

연우강은 재빨리 코를 막았다.

“ 이건 보, 보, 보약?”

연우강은 입 안의 것들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냇가로 가서는 왼손으로 물을 떠 입 안에 넣고 좌우로 흔들었다. 입천장이나 혀에 묻은 약 기운까지 말끔하게 삼키기 위해서였다.

입 안의 청아한 향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그제야 쥐고 있던 코를 놓았다.

“냄새도 약인데 버리면 안 되지.”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본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제는 보약과 함께 나온 책을 볼 차례였다.

세 권의 책은 각각 붉은색, 검은색, 백색, 세 가지 색으로 돼 있었다.

“ 혈경, 흑경, 백경이라고 하면 딱 좋겠네.”

안의 내용은 읽어보지도 않고 연우강은 색깔만으로 즉석에서 이름을 지었다. 책 세권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검은색 책을 고르고 두 권은 내려놓았다.

흑경을 먼저 선택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무기가 대부분 검은색이기 때문이었다.

책 안쪽도 표지처럼 검었다.

“ 와!”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전에 사망마제의 무공을 얻었을 때와 같은 글씨체로 씌어진 글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사실 연우강이 먹물공황증이 생긴 이유가 바로 검은 책에 씌어진 서체 때문이다. 글을 익힐 나이가 되자 연우강은 남경에서 가장 잘 가르친다는 서당으로 들어갔다.

대부분의 서당들이 그렇듯 부잣집 아들들은 훈장의 주 수입원이 될 수밖에 없다. 연우강이 들어갔던 서당 훈장은 최소 십 년은 우려먹을 작정으로 보통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천자문이 아니라 고대 문자인 전세를 먼저 가르쳤다.

사실 전서는 글자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쓰기가 쉽지도 않은, 인장에나 새기면 딱 좋을 서체다.

무려 사 년동안이나 얻어맞아 가면서 전서를 배웠다.

문제는 죽을 둥 살 둥 전서를 익혔지만 처음 썼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배우면서 훈장에게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검은 먹물만 보면 손이 떨리는 이상한 병이 생겨나고 만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다른 글씨체도 배우지 못하자 어설픈 전서는 스스로도 알아먹기 힘든 글이 되고 말았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기 마련.

그 일로 인해 글을 쓰지 못하게 돼버리고 말았지만, 고대 문자에 대해서만큼은 어려움 없이 읽는 수준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그가 천오백 년 전 무인인 사망마제가 남긴 비급을 읽을 수 있었던 이면엔 그런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방금 펼쳐든 검은 책에 씌어진 글자도 맞아가면서 배웠던 전서체였다. 그 말은 곧 최소한 천 년이상 된 골동품이란 뜻이었다.

흑마수.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무공 이름이 적혀 있고, 아래쪽으로는 무공을 펼치는 방법과 자세가 기술돼 있었다.

“ 지금쯤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연우강은 책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 와, 왔다!”

연우강은 보고 있던 책을 던져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옷을 훌훌 벗어 책 위로 내던지고 발가벗은 채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 와우! 이거 초특급 대어네.”

다급히 가부좌를 하며 단전을 열어 흑풍을 끌어냈다. 그가 대어라고 말하는 것은 다름아닌 조금 전 복용한 영약 기운이었다.

“ 우욱!”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초특급 정도가 아니었다. 몸속으로 유입된 영약 기운은 흑풍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엄청난 기세로 전신을 장악해 들어갔다. 이 정도면 지금의 흑풍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연우강이 옷을 벗고 물로 뛰어든 이유는 과거 경험 때문이다. 흑풍을 얻고 나서 몸을 살펴보니 입고 있던 옷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아예 옷을 벗고 시작하기로 한 거였다.

“ 자! 한번 붙어볼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단전을 개방했다.

단전이 활짝 열리자 밀리는 듯했던 흑풍이 힘을 얻어 무서운 기세로 새로 들어온 기운을 제압해 나갔다.

연우강은 흑풍의 움직임을 가만히 관조했다.

흑풍은 굳이 유도할 필요가 없는 기운이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약한 놈은 잡아먹고, 강한 놈이 있으면 싸움을 하여 굴복시킨다.

다만 흑풍이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동반하는 고통만 견디면 되는 것이다.

쿵! 쿵쿵! 쿵쿵! 쿠웅!

콰앙! 콰콰쾅!

몸 속에서 둔탁한 소성이 들려올 때마다 몸은 지진을 만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연우강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 막장이나 줄걸.’

공연히 복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흑풍에게 맡기면 웬만한 기운은 힘들이지 않고 흡수해버리기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환약의 기운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휘이익!

내부에서 일어난 싸움이 외부에까지 미친 듯 거칠게 흘러가던 냇물이 천천히 연우강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 난 모르니까 흑풍 네놈이 알아서 해.’

연우강은 아예 모든 기운을 풀어버렸다.

퍽! 퍽퍽퍽! 퍽퍽!

휘리릭!

몸 내부에서는 뭔가가 터져 나가고, 외부에서는 물이 도는 속도가 빨라졌다. 빠르게 돌던 냇물은 위에서 내려오는 물까지 빨아들여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갔다. 마치 연우강의 내부에 있는 흑풍이 새로 들어온 기운을 흡수하여 세력을 넓혀가는 것 같았다.

연우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용돌이는 점점 거칠고 빨라졌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벗어놓은 옷과 책을 덮쳐버릴 정도로 위태위태했다.

만일 소용돌이가 책을 덮친다면 연우강이 골동품이라고 하였던 희대의 기서는 물속에 잠기고 말 터였다.

어쩌면 연우강도 지금 상황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는 지도 몰랐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지금은 외부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흑풍에 의해 제압당해 가던 영약 기운이 갑자기 새로운 힘을 얻어 흑풍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거였다.

‘ 저건 내 건데?’

연우강은 질겁했다.

영약 기운에게 힘을 공급하고 있는 놈은 자신의 단전이었다.

선천지기.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오는 기운으로 인간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명을 다하고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곧 선천지기가 다했다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더불어 그 선천지기는 웬만해서는 내공으로 사용할 수가 없다. 자칫 잘못 사용하면 내공으로 전부 소모시켜 수명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천지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위력은 후천적으로 수련이나 영약을 통해 얻은 내공에 비해 엄청나다. 가장 쉬운 예가 바로 주화입마를 겪을 때 모습을 드러내 결국엔 자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미지의 힘.

그 힘이 바로 선천지기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무인들은 선천지기를 이용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또 발전시켜 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후천적으로 얻은 내공을 선천지기화 한다는 것이 옳다. 신공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무공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었다.

더불어 연우강이 익힌 흑풍마라천력의 흑풍도 바로 선천지기를 이용하는 내공심법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연우강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서 얻은 환약이 이렇듯 엄청난 것인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이 정도면 가히 광세기연이라고 불러도 전혀 부족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는 급하게 마라천력을 발동했다.

돌아가는 대로 두게 되면 간신히 제압해 두었던 흑풍이 다시 날뛸 것 같아서였다. 마라천력이 발동되자 위축됐던 흑풍의 기세가 살아나며 영약 기운을 제압해나기가 시작했다.

휘리릭!

내부에서 강하게 발산된 힘이 외부로 유출되며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졌다. 급기야 그 힘을 견디지 못한 소용돌이가 연우강을 태운 채 서서히 솟구쳐 올랐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용돌이 위에 앉아 있는 연우강의 모습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소용돌이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강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흑풍과 마라천력을 합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 작업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쉽게 말하면 새로운 힘을 받아들인 흑풍을 다시 마라천력으로 제압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있었다.

얄궂은 운명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몰랐다.

무공을 익히지 않기 위해 안정숙을 택했던 그는 결국 화장실에서 광세기연을 얻고 말았다.

문제는 아직 그 기연이 다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침수 직전에 살아난 세 권의 비급과 그의 옷 속에 들어 있는 그림들. 그것들이 연우강을 어디로 인도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수천 년 세월 동안 쉬지 않고 불어와 절벽을 깎아내고 모난 돌을 둥글게 만든 바람은 오늘도 여전히 무성을 후려치고 있었다.

바람과 어둠과 천장에 뚫린 틈새로 스미는 별빛만 남은 무성 안으로 환영처럼 사람이 나타났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백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는 곧바로 무성 안으로 들어갔다. 무성 지리에 익숙한 듯 칠흑 같은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거칠 것 없이 계속 나아갔다.

대전을 가로질러 가던 사내는 다시 계단으로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탁!

그의 손가락에서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내부가 환하게 밝혀졌다. 사내는 삼매진화를 이용하여 벽면에 부착된 초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초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내 불을 붙인 걸 보면 내부 또한 익숙한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실내는 좁은 공간이 아니었다. 거의 대전을 방불케 하는 넓은 대전엔 카다랗게 원형을 그리며 탁자들이 배치돼 있고 그 탁자들 바깥쪽으로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 이십 삼 년 만인가?”

묵직한 저음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내는 한참동안 탁자를 응시하더니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암경이 주변을 휩쓸자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탁자와 의자가 반짝 윤기를 뿌렸다.

사내는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었다. 그러자 복면처럼 새하얀 옷이 나타났다.

그의 손목엔 무성 문양과 함께 이 자가 붉은 수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장포를 어깨에 걸친 사내는, 역시 이 자가 새겨진 탁자를 찾아가 앉았다.

“ 늦었소이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역시 복면을 쓴 자가 나타났다. 들어오면서 장포를 벗은 듯 사내는 백의를 걸친 채였다. 그의 오른쪽 손목에는 삼 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자에 이어 복면인 여덞 명이 더 들어오고, 더는 없었다. 그들의 손목에도 한결같이 숫자가 수놓아져 있었는데 사부터 십일까지였다.

“ 그때처럼 우리가 전부인 모양이외다.”

맨 먼저 들어왔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 백인 무영의 시대는 이미 끝났소. 이호, 이젠 우리만의 시대를 열어야만 하오.”

두 번째로 들어온 삼호가 말을 받았다.

“ 백호가 죽임을 당했소. 여러분.”

일행은 흠칫 놀란 얼굴로 이호를 보았다.

“ 원래 백호는 나와 동향이오.”

“ 어디서 죽었단 말이오?”

이호가 물었다.

“ 바로 이곳 무성에서 죽었소.”

“ 그가 여기에 있었단 말이오?”

“ 그렇소. 이호. 그는 이곳에서 풍천마인을 연성하고 있었소.”

“ 풍천마인이란 말이오?”

“ 그렇소. 몇 달만 지나면 작업이 끝나는데 백호를 비롯한 풍천마인이 전부 당하고 말았소. 더불어 수감돼 있던 죄수 스물세 명이 탈옥을 했소.”

“ 그럼 그들이 백호를 죽였단 말이오?”

“ 신주제일검 욱일승은 사십 년 전 대야벌 제일 고수였고 묘강독존 갈인효나 북해어옹 수천월 또한 십대 고수의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강한 자들이오. 그리고 삼십 년 전에 투옥됐던 자들 또한 하나같이 강자가 아닌 자들이 없소. 이호, 그들 모두가 무공을 회복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오. 문제는 따로 있소.”

“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이오?”

“ 일단 이걸 먼저 보시오.”

이호는 뒤편으로 손을 저었다.

그의 손에서 암경이 흘러나가고 뒤편에서 검은 물체 세 개가 둥실 떠올라 중앙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발가벗겨진 시체들이었다.

일행은 일제히 시체를 주시했다. 시체는 심하게 훼손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 맨 오른편에 있는 시체는 백호고, 그 옆에 있는 둘은 백호가 연성했던 풍천마인이오.”

“ 사인을 찾아냈다는 거요?”

“ 암기였소.”

“ 암기?”

일행은 깜짝 놀란 얼굴로 이호를 보았다.

“ 백호의 손을 보시오.”

이호가 야효의 손을 주시하자 위로 들어올려졌다.

“ 뭔가 뚫고 들어갔군요.”

삼호는 침음성을 발했다. 손바닥을 뚫고 들어갔다는 것은 곧 방어를 하는 도중에 당했다는 말이 된다. 공격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를 하다가 당했다면 상대의 공격이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었다.

대야벌 백인 고수도 아니고 백호는 백인 무영 중의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다.

“ 그렇소. 삼호. 암기는 백호의 손을 뚫고 들어간 다음에 다시 심장을 뚫었소. 그리고 다시 빠져나갔소.”

“ 통과해 간 게 아니고 빠져나갔단 말이오?”

“ 그렇소. 이호.”

“ 확실하오?”

“ 겉은 비슷하게 보일지 몰라도 몸 안쪽은 빠져나간 것과 다시 되돌아온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오.”

“ 그럼 저 둘은?”

삼호는 야효 곁에 있는 풍천마인 시체 두 구를 가리켰다.

“ 그것들 역시 암기에 당했는데, 암기가 되돌아온 흔적은 남아 있지 않소.”

“ 그럼 백호를 죽인 암기는 줄 같은 게 달려 있다고 봐야겠군요?”

듣고 있던 사호가 물었다.

“ 봐야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하오. 사호, 만일 그게 아니라면.....”

사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삼호가 대신했다.

“ 그건 지나친 억측이오, 삼호.”

“ 억측이 아니오. 사호.”

“ 무슨 말이오, 이호?”

“ 나는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소.”

“ 저, 정말 그가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요?”

사호는 경악한 눈으로 이호를 보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에 있던 이들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 그는 분명히 내 손에 죽었소. 사호.”

“ 그럼 방금 그건 무슨 말이오?”

“ 사제갈주생사마란 고사를 아시오?”

“ 그건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의미 아니오.”

“ 그렇소. 사호. 우린 그를 이용해서 다시 백인 무영을 하나로 뭉치는 거외다.”

“ 가능하리라 보시오?”

사호는 미심쩍은 눈으로 이호를 보며 물었다.

“ 우린 이십삼 년 전에 이미 같은 배를 탔소. 지금은 잠시 내렸을 뿐이오. 그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들은 우리들 곁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소이다.”

“ 그걸 어떻게 알린단 말이오?”

“ 저들의 시체와 ...... 그리고 오십이호와 칠십호의 죽음이오. 그들 역시 암기에 죽임을 당하게 될 거요.”

“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의 대역이 있어야 하오. 이호.”

“ 그건 그들이 알아서 찾게 될 테니까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소.”

“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이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구려.”

듣고 있던 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삼호. 우린 묵사 때문에 와해됐지만 묵사 때문에 다시 뭉치게 될 것이오.”

“ 그럼 이곳엔 누군가가 있어야겠구려.”

“ 내가 관리를 하겠소. 삼호. 여긴 걱정하지 마시오.”

“ 그럼 무성기는 계속 걸어둘 참이오?”

“ 그래야 그들도 볼 것 아니오.”

“ 알겠소이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소.”

먼저 삼호가 자리를 뜨자 나머지도 이호를 향해 포권을 취한 다음 하나둘 자리를 떴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자 이호는 지풍을 날려 촛불을 껐다.

“ 큭큭큭!”

어둠 속에서 흡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 끄응!”

연우강의 처소를 쳐다보는 막장의 얼굴엔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일 년이 다되어 가는 일로 인해 근신 처분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물론 처음 몇 달은 상부에서 책임을 물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폐관을 핑계로 숨었다.

다행히 문제없이 넘어간 듯 원주인 이청문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 치사한 자식들. 열 달하고도 한 달이 더 지났다. 그 정도 시간이면 없던 자식도 태어나는 시간이라고. 그런데 이제와서 근신처분을 내려? 그것도 좋은 곳으로 보내줄 수도 있었잖아. 하필이면.....”

막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어디 지부라도 보내주었으면 좋으련만 야장 파견이 근신 처분의 내용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대야벌 백대 고수, 천살원 삼대 고수, 집행사자, 철장마도 막장, 그러한 간판을 가지고 있는 놈이 야장을 찾아가서 파견 나왔다며 차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사람은 연우강뿐이라 녀석을 찾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 이, 있냐?”

막장은 담 너머로 고개를 디밀고 소리쳤다.

“ 누구?”

안쪽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막장은 활짝 웃었다. 혹시 녀석이 일을 나갔으면 어쩌나 하고 일부러 늦게 찾아왔는데 다행히 집안에 있었다.

“ 나 막장이다.”

“ 들어와!”

어떻게 왔냐고 묻지도 않고 들어오란 말이 먼저 들려오자 막장은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어딨냐?”

“ 안으로 들어오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어. 그곳으로 오면 돼.”

“ 지하?”

막장은 의아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

연우강의 말처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었다. 막장은 짐을 내려놓고 지하실로 향했다. 전에 창고로 사용하던 곳인 듯 지하실은 기로 세로 폭이 십여 장이나 되는 상당히 넓은 곳이었다.

불을 환하게 켠 채로 연우강은 뭔가를 바닥에 그리고 있었다.

“ 뭐 하는.....”

연우강 곁으로 다가가며 뭔가 물으려던 막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면 한편을 몽땅 채우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었다. 서책을 보관하는 책장 형태의 그것에는 별의별 물건이 다 있었다.

“ 정말로 장사를 하는 거냐?”

물건을 살피던 막장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 장사는 푼돈 만지는 애들이나 하는 말이고 월에 천 냥이 넘어가는 수익을 올리는 건 사업, 만 단위가 넘어가는 건 기업이라고 하는 거야.”

“ 그럼 넌?”

“ 기업이지.”

“ 기, 기업이라고?”

“ 그럼. 인마. 부적 하나에 최하 천 냥이나 하는데 월 만 냥은 우습지.”

“ 잠룡들이 전부 산다고 해도 오백 장이면 끝나는 거 아니냐?”

“ 이런 멍청한 자식. 부적처럼 큰 돈을 주는 걸 질기고 오래 쓰도록 만드는 놈이 어딨냐?”

“ 그럼?”

“ 그런 건 말이다. 자기 아랫도리보다 더 소중하게 다룬다고 해도 반 년 정도만 가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 에라, 이 도둑놈아!”

막장은 어이없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우담보 궁주가 녀석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녀석의 행태를 보니 경기가 아니라 기절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 여하튼 네 녀석은 불가사의다. 그건 그렇고 지금 하고 있는 건 뭐냐?”

연우강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종이를 꺼내 확인을 해가며 그리는 그것은 전부가 발자국이었다.

“ 진식을 뚫을 보법!”

“ 보법이면 보법이지 진식을 뚫을 보법은 또 뭐냐?”

“ 검지곡에 있는 석상 본 적 있어?”

“ 소싯적에 일 년 정도 그곳에 머문 적이 있다.”

“ 그 석상들의 발 모양이야.”

“ 발이 있었나?”

막장은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석상에 발이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 날이면 날마다 석상들이 들고 있는 검만 봤을 테니까 발이 있어도 보지 못했겠지 뭐.”

“ 그랬나?”

막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 그건 아니고 발은 땅속에 묻혀 있었다. 내가 우연히 발견해낸 거고.”

“ 어쩐지. 그런데 진식을 뚫는 보법이란 건 무슨 말이냐?”

그제야 막장은 흥미로운 얼굴로 연우강이 그리는 발자국을 보았다.

“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석상을 그냥 만들었으리가 엇ㅂ다고 생각하거든?”

“ 내가 보기엔 그냥 만든 것 같은데?”

“ 그건 네 생각이고. 양쪽으로 그렇게 세우는 석상을 호신상이라고 하느데 보통 거대한 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장식할 때 그렇게 해.”

“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석상이 무덤으로 향하는 입구와 연결돼 있다는 거냐?”

“ 내 생각은 그래.”

“ 석상 끝에는 절벽밖에 없잖아.”

“ 내가 주시하는 곳도 바로 그 절벽이야.”

“ 그 절벽에 진식이 설치돼 있다는 거냐?”

“ 지금껏 그 절벽을 확인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걸?”

“ 모든 석상이 갖가지 자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까 절벽에 관심을 갖는다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진식이 설치돼 있다면 누군가 발견하지 않았을까?”

“ 물론 그랬을 수도 있어. 하지만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한 곳이 아니고 여러 곳이라면? 무덤으로 연결된 통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가면 죽는다면?”

“ 설사 뭔가를 발견했다고 해도 무덤을 찾지 못한 자는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안에서 죽었을 거라는 말?”

“ 바로 그거야. 보통 이런 걸 자물쇠 열기라고 하거든. 제대로 된 방법으로, 그것도 한 번에 들어가지 못하면 무덤은 고사하고 저승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야.”

“ 일리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장의 얼굴엔 미심쩍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 명이 천년 이상 석상을 보아왔고, 그곳에서 뭔가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연우강의 말처럼 석상에만 집중해서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연우강보다 못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심지어 뇌가 세 개가 있다는 벌주조차도 고개를 저었던 곳이 검지곡의 석상 아니었던가.

“ 아이고, 이제야 다 그렸네.”

연우강이 길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아?”

“ 전부 일천보니까 그렇지.”

“ 일천보?”

막장의 목소리가 대뜸 커졌다.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가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 너 일천독신행을 생각하는 거지?”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막장을 보았다.

“ 응!”

“ 꿈 깨라. 자식아. 그보다는 저기 너 줄 선물 있으니까 그거나 봐.”

“ 선물?”

막장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 그래 인마. 무공 비급 세권이다.”

“ 어이쿠, 별걸 다 준비했구나.”

막장은 픽 웃으며 연우강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연우강의 말처럼 선반 위에 세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 어디 보자. 얼마나 대단한 서눔ㄹ을 준비했는.....”

책 세 권을 집어들던 막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부랴부랴 안쪽을 들쳐보았다.

“ 여, 연우강!”

급기야 막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연우강을 불렀다.

“ 겉표지에 무공 비급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서 흑경, 백경, 혈경이라고 이름지었다.”

연우강은 첫 번째 발자국으로 발을 내밀며 말했다.

“ 이, 이름을 네가 지었다고?”

“ 응! 색깔별로 돼 있어서 이름짓기는 편하더라.”

연우강은 두 번째 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빠르게 십여 걸음을 걸었다. 약간은 어색했지만 그동안 모르고 익혔던 칠보귀둔필사 때문인 듯 그의 신형은 한순간에 속도를 냈다.

우르릉!

바로 그때 그의 단전에서 진기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 이런?’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잠능폐혈대법으로 혈도를 막아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진기가 소구쳐 오른 것이었다.

“ 이것 참!”

연우강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발자국을 노려보았다.

단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잠능폐혈대법을 뚫고 진기가 솟구쳐 오를 정도면 보통 보법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 이건 정말 일천독행신 아냐?’

문득 조금 전 막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막장을 보았다. 막장은 풍을 맞은 듯 덜덜 떨고 있었다.

‘ 이크! 저 녀석 내가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은데.’

연우강은 찔끔한 얼굴로 막장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막장은 이곳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린 비급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 막장!”

“ 맞아, 연우강!”

“ 뭐가 맞다는 거지?”

“ 네 말이 맞다고.”

“ 그러니까 뭐가 맞냐고 묻잖아, 자식아!”

연우강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 네가 말한 것 흑경, 혈경, 백경이 맞다고 자식아!”

“ 내가 이름을 지었으니까 당연히 맞지! 틀리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새꺄!”

“ 이놈들 원래 이름이 흑경, 혈경, 백경이라고 자식아! 천오백 년 전부터 그렇게 불려왔던 비급이라고!”

막장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2권 끝)

황금백수3권    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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