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막장 똥지게 지다
“ 그래서?”
연우강은 멀뚱한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이미 비급에 씌어진 글자체를 보고 천년 이상 된 골동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연우강에게 천오백 년 됐다는 막장의 말이 와닿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막장의 모습이 더 우스꽝스러웠다.
미치도록 흥분해 있는데 상대방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오히려 자신이 광대가 된 느낌을 받는다.
지금 막장이 그랬다.
“ 너 혹시 혈경, 흑경, 백경이 뭔지를 모르는 거냐?”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야?”
“ 이 세권을 합쳐 천마삼경이라고 부르는데도?”
막장이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세 권의 비급이 혈경, 흑경, 백경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마의 조종이라 불리는 천마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천마.
전설과 신비 그리고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인지, 이름이 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는 천오백 년 전에 활동했다는 사실도 비급에 쓰여진 서체로 판단했을 뿐 확실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남긴 모든 무공들이 현 시대에도 천하제일로 평가받고 잇다는 것이다.
“ 천마삼경?”
“ 그래, 인마. 이건 엄청난 보물이라고.”
막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우강이 선물이라며 준 비급이 천마삼경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그럼 돈 좀 나갈까?”
“ 이걸 팔려고?”
“ 그걸 뜯어먹으면서 익힐 건 아니잖아. 무공을 다 익힌다 해도 비급은 그대로 남고, 네 말처럼 보물이라면 한밑천 챙길 수 있을 것 같은데.”
“ 한밑천 챙기기도 전에 이렇게 된다.”
막장은 손으로 제 목을 스윽 그었다.
“ 비급을 팔았다고 죽여?”
“ 천마의 비급을 얻은 자는 무조건 대야벌에 신고를 해야 한다. 안 그랬다간 강호 공적으로 간주되고 추살령이 발동한다.”
“ 왜?”
“ 사악한 마공이기 때문이다.”
“ 사악한 마공?”
“ 지금껏 발견된 천마의 무공 중에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익히는 무공은 별로 없었다.”
“ 정상적인 경로라면 뭘 말하는 거지?”
“ 인륜이나 천륜을 어겨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대부분이었다. 동정녀의 순음지기를 뽑아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시체의 시기를 뽑아내야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있는 가 하면 심지어는 선천지기를 얻는다며 뱃속의 태아를 꺼내 기운을 흡수하는 무공도 있다. 더불어 그러한 무공의 말로는 대부분 인성이 마비된다.”
“ 그 무공들이 강해?”
“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 천마는 그렇게 사악한 무공만 남긴 거냐?”
“ 그건 아냐, 천마의 무공은 신공, 마공, 사공은 물론이고 검, 도, 장, 권, 신, 환 등, 전 분야에 걸쳐 고루 발견되고 있다.”
“ 그것들이 전부 천하제일 무공이라고?”
“ 응.”
“ 넌 한 사람이 그 모든 무공을 창안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야?”
“ 천마를 조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는 십전전능체를 타고났다고 하더라.”
“ 미친놈.”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 넌 무공을 몰라서 그래. 인마. 무공의 끝을 보게 되면 모든 게 한가지로 귀일돼.”
“ 만류귀종?”
“ 맞아. 그걸 만류귀종이라고 하는데 그 상태가 되면 정, 사, 마가 따로 없어.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거야.”
“ 그러니까 천마는 만류귀종의 경지에 올라서 모든 무공을 창안했다는 거냐? 그것도 사공이나 마공 위주로?”
“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익히는 무공으로는 끝을 보았으니까. 이번엔 특이한 방법으로 익히는 무공에 주력한 셈이지”
“ 특이한 방법이라는 게 사악한 흡정술 종류고.”
“ 그렇다고 들었다.”
“ 어떤 놈이 정립한 이론인지 몰라도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었네.”
“ 그럴싸하다고?”
“ 응! 사람이란 게 원래 그렇거든. 모든 걸 성취하고 나면 그 다음엔 무력감이 찾아오게 돼. 진수성찬을 보아도 입맛이 없고, 방안 가득 쌓인 금은보화를 보아도 탐욕이 생기지 않아. 한마디로 모든 일에 흥비를 잃게 되는데 그 상태를 일컬어 만족공황증이라고 해.”
“ 만족 공황증?”
“ 내가 지은 병명이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 그 만족공황증이 심해지면 결국 앵속이라든가 도박 또는 변태적인 욕망을 통해 치료를 하곤 하거든”
“ 천마도 그 만족공황증을 치료하기 위해 사공이나 마공을 창안했다는 거냐?”
“ 그랬다면 내가 그럴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겠지.”
“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연우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듯 하다가도 멀어지자 막장은 버럭 소리쳤다.“
“ 천마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 .....?”
막장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천마에 대한 전설은 무려 천오백 년 동안 내려왔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 그렇게 놀랄 것 없어. 난 드러난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을 한 것뿐이니까.”
“ 드러난 사실?”
“ 천마가 모든 무공에 통달했다는 사실이 거짓이라는 거야.”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건 만류귀종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 그건 선후가 바뀌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냐?”
“ 선후가 바뀌었다고?”
“ 만류귀종을 넘어선 자, 즉 심검을 넘어선 무인이 그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펼치는 무공이 신공이 될 수도 있고, 마공이나 사공이 될 수도 있어. 그 사실엔 너도 동의하지?”
“ 그, 그래. 신의 경지에 오른 자에게는 이미 정, 사, 마란 의미가 없다고 했으니까.”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지만 네가 들고 있는 그것들은 이론서야, 막장. 그 비급에 나온 이론대로 해야만 흑마수, 백옥수, 혈잔수를 펼칠 수 있다는 거야.”
“ 너, 이걸 읽을 줄 아는 거야?”
막장은 깜짝 놀랐다.
비급에 씌어진 글은 고대에 쓰인 서체라 자신은 완전하게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 일단 하던 이야기부터 마무리 짓자.”
“ 아, 알았어. 계속해 봐.”
연우강이 비급에 씌어진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사실에 막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흑마수는 우리가 지닌 진기 중 어둠의 기운, 즉 사악한 기운을 바탕으로 펼치는 무공이고, 백옥수는 음의 기운이 바탕이 돼야 펼칠 수 있어. 즉 여자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는 거지. 그리고 혈잔수는 극양의 기운으로 펼치는 무공이란 말이야. 그 세 무공을 펼치는 방법을 비급에 나온 것처럼 세세하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내공을 연성하는 방법부터 알아야 해. 네가 천마라면 어떻게 하겠냐?”
“ 말년에 심심해면 적을 수도 있잖아.”
“ 심심해서 자서전을 남기는 심정으로 적는다고 해도 이런 세세한 것까지 남길 이유가 없어. 쉬운 예로, 나중에 내가 대야벌에서 팔아먹었던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고 해보자고. 저 선반엔 수백 종의 물건들이 있는데, 어디서 어떻게 얼마에 구해서 얼마를 받고 누구에게 팔았는지 그걸 다 기록할 이유는 없는 거야. 저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정확하게 기록할 건 단 한가지. 내 손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최하 천 냥이나 나가는 부적뿐이라는 거야. 나머진 그런 물건들을 팔았다면서 이름만 남기면 돼.”
“ 천마의 무공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만 해도 수십 종이 넘는다. 그 비급엔 한결같이 천마라는 이름이 언급돼 있었고.”
“ 천마가 단체 이름이라면 가능하잖아.”
“ 발견된 비급의 서체도 전부 같았다고 했다.”
“ 지금부터 내가 증명해 줄 테니까 넌 그 비급을 날 주고 저기 탁자에 앉아.”
“ 탁자에 앉아야만 증명이 되는 거냐?”
막장은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 너 그 비급에 나온 글들 읽을 수 있어?”
“ 진 나라 때 글을 내가 어떻게 읽겠냐?”
“ 그럼 비급을 줘봐야 그림의 떡이잖아, 인마. 그러니까 저쪽에 가서 받아 쓸 준비나 하란 말이다.”
“ 아, 알았다.”
비급의 내용을 구술해 준다는 말에, 조금 전 서체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도 잊고 막장은 헤벌쭉 웃으며 연우강이 가리킨 곳으로 가 앉았다. 탁자에는 이미 지필묵이 준비돼 있었다.
“ 먼저 흑경부터 부를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흑경은 어둠의 기운을 이용해서 익히는 무공이야. 함부로 익히려 들다간 주화입마에 들기 쉬우니까 암기만 하고 익힐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 아, 알았어.”
무공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하지 못할 말이 연우강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흑경의 내용을 받아 적을 생각에 막장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강은 천천히 흑경의 내용을 구술했다.
그림이 나온 부분은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그리게 하면서 세 권의 비급을 전부 구술하자 반시진이 훌쩍 지났다.
“ 이것들은 필요 없겠지?”
연우강은 각 비급의 뒷부분을 보여주었다.
“ 그건 뭔데?”
“ 무공하곤 상관없는 것들이야.”
“ 무공하고 상관 없으면 불러줄 필요 없어.”
“ 그럼 끝났네. 이제 네가 쓴 세권을 서로 비교해 봐라.”
“ 비교?”
“ 필체가 전부 같지 않냐?”
“ 당연히 내가 썼으니까 같을 수밖에 없....정말로 천마가 단체를 지칭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막장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천마가 신이 아닌 이상 그 많은 무공을 전부 익히는 건 불가능해.”
“ 하지만 비급에 나온 천마라는 이름은 설명할 길ㄹ이 없잖아.”
“ 보관 장소가 천마비고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 천마비고?”
“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야. 어떤 단체가 있고, 그들의 무공을 보관하는 장소가 천마비고라면, 비급 필사본에는 천마라는 명칭을 일괄적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거야.”
“ 만일 네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일부러 천마를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거냐?”
“ 그래야 나쁜 놈으로 만들기가 쉽잖아.”
“ 나쁜 놈?”
“ 예를 들어 천마가 전부 백 명으로 이루어진 단체라고 하면 그들 전부를 사악한 마인들이라고 하기엔 명분이 부족하잖아. 하지만 천마를 한 명이라고 하고, 사악한 마공만 자구 드러나게 하면 천마는 자동적으로 마인으로 변하게 되지.”
“ 누가 그랬다는 거지?”
“ 천마의 적이겠지.”
“ 천마의 적이 누군데?”
“ 천 오백 년 전 사람들인데 내가 어떻게 알겠냐. 다만 천마의 무공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자들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거지.”
“ 천마의 무공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자들이라면 대야벌이잖아.”
“ 굳이 천마의 적이 아니더라도 ㄷ야벌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 어떤 면에서?”
“ 사악한 무공도 있지만 천마의 무공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너무 강하잖아.”
“ 강자는 대야벌에서만 나와야 한다는 거냐?”
“ 그런 것도 없지 않겠지만 강한 무공이 나타나면 강호에 혈겁이 일어나고, 혈겁의 끝에는 항상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곤 했거든.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면 대야벌 입장에서는 골치 아파지고.”
“ 아! 그러니까 일이 커지긴 전에 미리 없애버린다는 거냐?”
“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거지.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혈잔수 말고도 함부로 익히면 안 된다.”
“ 익히지도 못할 거면서 불러주는 건 또 뭐야?”
“ 그건 전부 한 사람 무공이거든?”
“ 한 사람 무공이라고?”
“ 응.”
“ 한 사람이 못 익힌다고 하지 않았나?”
“ 네가 익히면 안 된다고 했지 한 사람이 익히면 안 된다고 한 적은 없다.”
“ 그럼 이 세가지 무공을 동시에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 두 부류는 동시에 익힐 수 있어.” 무(魂靈舞)
“ 어떤 부륜데.”
“ 음양인하고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
“ 음양인이라면 아래쪽은 남자고 위쪽은 여자인 이상한 애들?”
“ 그렇지, 그들은 음양을 동시에 가졋고, 음과 양이 교차하는 시기엔 마성이 폭발하니까 세 가지를 전부 익힐 조건을 갖추고 있는 거지. 아마 무림사에서 그런 자를 찾아내면 그 비급이 천마가 남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사실이 밝혀지게 될 거다.”
“ 그건 그렇고, 그것들이 필사본이라면 진본도 있을까?”
“ 진본?”
“ 무인은 자신의 능력 중에서 삼 푼은 반드시 숨기는 자들이거든. 네 말처럼 세 비급이 필사본이라면 본인의 마지막 무공은 기술하지 않았을 거야.”
“ 진본엔 이것보다 더 강한 무공이 남겨져 있다는 말?”
“ 그럴 가능성이 높지.”
“ 굳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본 타령을 해봐야 무공이 늘지도 않을 텐데, 우선은 그거나 익히는 게 낫지 않을까?”
“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다. 그보다 내가 잘 곳은 어디냐?”
“ 잔다는 건 무슨 소리냐?”
연우강은 모른 척 말을 받았다.
“ 천살원에서 쫓겨났다.”
“ 쫓겨나?”
“ 네 녀석과 잠룡대전에 참여한 벌이란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야장에서 근신하라고 하더라.”
“ 휴가를 준 모양이네. 이 근처에 네 채가 더 있으니까 그것도 중 아무거나 골라잡아.”
“ 알았다.”
막장은 필사본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계속 여기 있을 거냐?”
“ 난 이놈들을 익혀야지.”
연우강은 바닥에 그려놓은 발자국 그림을 가리켰다.
“ 정말로 그 신법을 익히면 무덤을 찾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 천오백 년 만에 찾아낸 유일한 단서잖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하지. 특별히 할 일도 없고.”
“ 맞아 똥 푸는 거 말곤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곳이지.”
막장은 한동안 바닥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 참!”
막 계단을 올라가려던 막장은 연우강을 돌아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던 탓이다.
“ 왜?”
“ 그 비급 어디서 구한 거냐?”
“ 화장실 바닥.”
연우강은 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
“ 왜?”
막장에게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자 연우강은 돌아섰다.
“ 천우산이나 천좌산의 이름 모를 동굴이 아니고 화장실 바닥에서 이걸 얻었다고?”
“ 천우산이나 천좌산에 동굴이 있다고 해도, 일천파류혼인가 하는 무공을 찾는다며 샅샅이 훑었을 텐데 그런 곳에서 보물이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하잖아.”
“ 그, 그렇긴 한데....”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과거 검지곡에서 석사을 연구할 때 천우산을 헤메고 다녔다. 연우강의 말처럼 천우산이나 천좌산에서 뭔가 나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대야벌에서 가장 오래된 건ㅁㄹ이 어디일 것 같냐?”
“ 천상천이지.”
“ 천상천을 지을 때 함께 짓는 건물은?”
“ 그 건물이 화장실이라고?”
“ 집을 짓게 되면 가장 먼저 만드는 게 화장실이야. 일을 하면서도 볼일은 반드시 봐야 하거든. 더불어 화장실은 한번 지으면 웬만해서는 위치를 바꾸기 힘들어. 물론 겉모습을 뜯어내고 새로 지을 순 있지만 분뇨가 쌓이는 곳은 거의 손을 대지 않지. 그래서 화장실 바닥은 보물 창고라고 하는 거다. 막장.”
“ 보물 창고?”
“ 대야벌은 물론이고 화장실의 역사는 천오백 년이고, 도둑이 일 년에 한 명씩만 들어도 천오백 명 아니냐. 그 천오백명 중 일 할만 화장실에 빠져 죽었다고 해도, 백오십 명이라고, 그 백오십 명이......”
“ 그, 그러니까 화장실에 숨었다가 빠져죽은 도둑의 몸에서 천마삼경이 나왔단 말이냐?”
막장은 연우강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 대야벌까지 들어올 정도의 도둑이면 일반 가정집에 있는 그런 금붙이 같은 걸 훔칠 리는 없을 테고, 그놈들이 뭘 노리고 대야벌에 들어왔을까?”
“ 무, 무공이라고?”
막장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 꼭 무공이라는 게 아니고, 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도둑이라고 해도 대야벌에서 훔칠만한 것은 무공이나 영약밖에 없을 것 같거든. 네 생각은 어때?”
“ 그런 것들밖에 없지.”
막장의 고개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 그러니까 화장실 바닥은 보물 창고 맞잖아.”
“ 그렇네.”
막장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다.
대야벌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벌주가 기거하는 천상천이나 여타 다른 건물이 아니라 바로 화장실이었다.
더불어 바로 도망치지 못한 도둑들이 가장 애용하는 장소가 화장실이란 말에도 일리가 있다.
“ 하지만 화장실은 일 년이나 이 년에 한 번 정도는 푸잖아.”
“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거든?”
“ 그런데?”
“ 이번에 금액을 인상했다는 말 들었어?”
“ 아니?”
“ 하나 푸는데 두 냥 받다가 서른 냥으로 인상을 했어.”
“ 서른 냥을 받는다고? 하루에 하나씩 푼다고 하지 않았나?”
“ 급하게 작업할 때는 두 개도 푸고 그래.”
“ 그럼 예순 냥이네.”
더 이상 놀랄 힘도 없었다. 대아벌에 해준 일은 별로 없다고 하지만 대야벌 백대 고수인 자신은 한 달에 스무 냥을 받는다. 그런데 녀석은 그 세배를 하루에 벌어들이고 있었다. 아니 그건 녀석이 버는 돈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하다. 지하창고에 있는 물건 값만 해도 수십 만 냥은 족히 될 터였다.
문득 녀석이 침을 뱉을 때마다 금 덩어리가 떨어진다는 전설의 황금 두꺼비로 보였다.
“ 최소한 그 정도는 받아야 하는 거야 임마.”
“ 조, 좋아. 그 정도를 받는다 치고, 화장실에서 어떻게 시체가 나왔다는 거냐?”
“ 맞다. 그 이야기를 ㅎ고 있었지. 지금까지 우리 야장은 화장실을 바닥까지 긁어서 푼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었어. 언제나 절반 정도만 작업을 하고 끝내곤 했거든. 그런데 군자무림행인가 하는 빌어먹을 작자가 화장실 푸는 값을 인상하겠다고 하니까 바닥이 보일 때까지 박박 긁어 달라는 거야.”
“ 그럼 바닥까지 푸다 보니까 보물이 나왔다고?”
“ 보물이 아니라 시체가 나온 거지. 그 비급은 시체이 품속에서 나왔고.”
“ 제기랄! 그거 말 된다.”
막장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말 되는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기연의 조건으로 완벽했다.
“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으면 그만 가봐.”
연우강은 손을 휘 저었다.
“ 아, 알았다. 그런데 언제 나갈 거냐?”
“ 주문이 들어오면 나가야지.”
“ 주문?”
“ 일하는 방식을 바꿨어. 전엔 일이 있든 없든 일정에 맞춰서 작업을 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 잡것들이 편안하게 싸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모르더라고.”
“ 그래서?”
“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인마. 싸다가 불편하면 연락을 해올 거 아냐. 그럼 그때 나가서 일을 해주면 되잖아.”
“ 그러다가 정식으로 항의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 누가 항의를 하는데?”
“ 누구겠냐. 싸는 놈들이 항의를 하지.”
“ 내가 하는 짓이 아니꼽고 더러우면 지들이 직접 하면 되는 거야. 항의 들어올 일 없으니까 걱정 붙들어매셔. 그보다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 아, 아니다. 이따가 보자.”
막장은 서둘러 올라갔다.
지금은 화장실 기연보다 품속에 있는 혈경이 더 급했다.
“ 후임은 구했으니까 이제 조수만 구하면 완벽한 사업체가 되는데.”
막장을 쳐다보던 연우강은 씨익 웃었다.
“ 그나저나 이놈을 어떡한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던 것도 잠시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바닥에 그려진 일천 보.
막장에게는 이걸 익히겠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익혀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 시작한 거니까 끝장은 봐야겠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첫발을 디뎠다. 우선은 발 모양에 익숙해지기 위해 속도를 내지 않은 채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매일 아침 몸을 풀면서 느리게 펼치는 무공을 연마해 왔던 터라, 천천히 걷는다고 해서 익히지 못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일천독행신이 맞는 것 같은데.’
느릿하게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전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그 말은 곧 단전의 진기를 자극하는 놈은 바로 신법이란 소리다. 일반적인 신법이라면 펼친다고 해서 진기가 알아서 움직이지는 않을 테고, 신법 자체가 운기행공 역할을 하는 최강의 신법이 분명하다.
“ 공짜를 마다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지.”
결심을 굳힌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단전을 활짝 개방하여 진기의 움직임을 살폈다.
거칠게 움직이지 않고 느리게 무공을 펼쳐 얻게 되는 장점은 진기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진기의 움직임을 알게 되면 무공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고, 새롭게 시작하는 무공이라 할지라도 빠른 시간에 익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느림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우강은 진기의 흐름을 살피며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천 보나 되는 걸음을 전부 기억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일천독신행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보다는 신법을 펼치면서 석상 사이를 달려갔을 때, 그 끝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무덤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을 잊고 신법에 몰두했다.
“ 거참!”
막장은 지하실을 흘끔거렸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런데 첫날 본 이후로 연우강과 말조차 나누지 못했다.
혈잔수를 대충 수습한 다음 연우강을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연우강은 신법에 몰두해 있었다. 신중한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하고 있는 그를 보자 차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연우강이 처음으로 무공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무공 익히는 게 싫어 안정숙을 택한 녀석이 아니었던가? 물론 지금 익히는 신법도 대무천자 패의 무덤을 찾겠다는 허황한 욕심에서 비롯됐지만 계기가 어떻게 됐든 녀석이 무공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저러한 관심이 커지면 결국엔 무공을 익힐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막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 그나저나 오늘도 주문은 한 건도 없나.”
막장은 길게 목을 빼 밖을 보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화장실 바닥에 남아 있을 시체밖에 없었다. 연우강이 준 천마삼경이 엄청난 비급이고, 혈경에 들어 있는 혈잔수는 자신의 무공인 철살장에 비하면 몇 배 강한 무공이지만, 완벽하게 익힌다고 해도 타인들 앞에서 펼치는 건 불가능하다.
일 갑자 전에 천마환환식공 때문에 강호 공적이 된 독고철웅의 예를 보더라도 천마의 무공은 철저히 숨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인인 이상 강한 무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더더욱 없었다.
“ 칠살장에 섞는 수밖에.”
“ 아니면 네가 그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들켰다고 해도 찍소리 못하게 강해지면 되지.”
계단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막장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 끝났냐?”
“ 좁은 공간에서 하는 건 어느 정도 마무리 됐어.”
“ 차 한잔 줄까?”
“ 차도 마셔야 하고 약도 복용해야 해. 지금 하늘이 노래지고 있어.”
“ 네 집 천장은 원래 노란 똥색이다. 연우강.”
“ 저건 똥색이 아니고 황금색이라 부르는 거야. 자식아. 줄 거야, 말거야?”
“ 알았다.”
막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잠시 후 찻잔을 연우강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잔마수였다.
“ 계단 올라오면서 한 말.”
“ 강자존의 세계가 무림이라며. 너보다 강한 놈이 위에 없다면 막장 네가 뭘 익혀도 찍소리 못하잖아.”
“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자식.”
그래도 기분은 좋은 듯 막장은 헤벌쭉 웃었다.
“ 꿈 같은 소리가 아냐. 자식아. 그놈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네가 그들보다 못할 게 뭐냐?”
“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 뭔 소리래?”
“ 태어나자마자 벌모세수를 받고 개정대법을 거친 자들이야. 그래서 그렇게 강해진 거고.”
“ 그런 거냐?”
“ 응!”
“ 그럼 네 자질이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거네, 뭐.”
“ 자질?”
“ 그래, 자식아. 그들보다 십 년을 늦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고 있잖아. 그리고 그들은 너보다 나이가 최소한 열 살 이상 많잖아. 그런 자들에 비하면 넌 거의 천재라고 할 수 있다.”
“ 그것도 훈련 교관 입장에서 용기를 북돋워 주는 말이냐?”
“ 응!”
“ 눈물나게 고맙다, 자식아.”
막장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약은 항상 저 궤짝 안에 두고, 인시 말에서 묘시 말 사이에 복용하는데, 가급적이면 인시 말에 맞췄으면 좋겠어.”
“ 나보고 매일 아침 약을 달여달라고?”
막장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럼 아침에 뭐 할 건데?”
“ 아무리 그래도 자식아....”
“ 딱히 할 일도 없는데 그거라도 해서 시간을 보내면 좋지 뭘 그래. 사람 사는 정이라는 게 뭐겠냐. 어려울 때 조금씩 돕고 사는 거지.”
“ 여기서 정은 왜 나오는데?”
“ 말이 그렇다는 거야. 인마. 하기 싫음 관두고.”
“ 조, 좋다. 그럼 그건 내가 해줄 테니까 일도 나랑 가이 하자.”
“ 무슨 일?”
“ 네가 하는 일이지 무슨 일이겠냐? 너 나가고 나면 난 하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데 그 짓은 죽어도 못하겠다.”
“ 넌 대야벌 백대 고수 중 한명이잖아.”
“ 백대 고수 중 딱 백위, 꼴등이지.”
“ 남들이 비웃을 텐데, 감당할 자신 있어?”
“ 금릉 연씨세가 장남도 하는 일인데 내가 못 할 건 또 뭐냐?”
“ 좋다. 까짓것 동업하자. 우선 약부터!”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턱으로 궤짝을 가리켰다.
“ 알았다. 당장 달여주마.”
막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궤짝을 열고 약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 약탕기는 부엌에 있다!”
연우강은 밖을 향해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