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26화 (26/232)

제4장 일천 보 일천 검, 일천파류혼

막장은 며칠 전 이승걸의 장례식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이승걸이 사고무친이라고는 하지만, 약을 지어준 것 말고는 연우강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 그런 연우강에게 상주를 맡긴 무원의 처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덤에서 있었던 일은 더더욱 이상했다.

연우강은 잠룡으로 선택돼 들어온 제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껏 수많은 잠룡들이 대야벌로 들어왔고, 삼 년 연공을 마쳤지만, 본인 스스로 걸어나간 잠룡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성공을 위해 잠룡대전을 거치면서 이곳까지 왔는데, 미치지 않고는 대야벌을 나갈 이유가 없다.

설사 사정이 있어 나가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대야벌 수뇌 중에 연줄을 만들어 놓고 나가곤 한다.

하지만 연우강은 달랐다.

그는 삼 년 연공이 끝나면 무조건 나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가 십지십룡에 뽑히지 않는 이상 나가겠다고 하면 막을 근거도 없다. 아니 설사 십지십룡에 뽑힌다고 해도 그가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보내줘야 한다.

그런데 무원은 야장의 전주들에게 연우강을 정식으로 소개시켰다. 연우강은 아직 파악을 못한 듯 보였지만 무원의 그 행동은 곧 연우강을 야장의 후계자로 삼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 대야벌에서 가장 신비한 단체가 있다면 야장이다. 대야벌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야벌과는 무관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대야벌 인구가 십만이라고 하는 건 상주하는 인원만 헤아렸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무인ㅇ르 비롯한 일하는 자들은 혼자 들어와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의 가족까지 합친다면 대야벌의 실제 인구는 오십 만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꾼을 거느린 단체.

그 일꾼들 속에 어떤 자들이 있는지는 장주인 무원조차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막장 또한 야장에 칠전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전주들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다.

야장에서 외부로 드러난 자는 장주인 무원. 안정전의 전주인 창노, 그리고 총관 역할을 하고 있는 향노뿐이다.

뭔가 있는 듯하면서도 뒤집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곳, 그래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 그곳이 바로 야장이었다.

“ 하긴 대야벌 자체가 신빈데....”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오늘 일을 해야 하는 곳은 패천림이었다.

“ 그나저나 시체는 언제쯤 나오는 거야.”

막장은 투덜대며 도구를 챙겼다.

지게를 지고 막 대문을 나서는데, 연우강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역시 지게를 진 채였다.

“ 넌 일이 없잖아.”

막장은 내심 안도했다.

그 날 무덤에서 무원이 했던 말.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법과 바꿨다는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은 연우강이 복용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승걸의 죽음은 연우강 때문이라고 해도 될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연우강도 잘 알고 있다.

워낙 내심이 얼굴로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녀석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다.

“ 오늘 승부를 낼 참이다.”

“ 무슨 승부?”

“ 절벽과 승부지 무슨 승부겠냐?”

“ 절벽을 어떻게 하려고?”

절벽과 승부를 벌인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전에 네가 그랬잖아. 진식을 없애는 방법에는 진식보다 훨씬 강한 힘이 있으면 된다고.”

“ 흑철마신을 완성....”

막장은 말끝을 흐렸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흑철마신을 완성했을 리도 없지만, 설사 완성을 했다 하더라도 외공인 흑철마신으로 진식을 어떻게 해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내가 천재가 아닌 이상 어떻게 흑철마신을 완성할 수 있겠냐. 최소한 육개월 이상은 연공을 해야 간신히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더라.”

“ 천재가 아니면 육 개월 안에 익혀낼 수 없다. 연우강.”

“ 묵령철골액이 있잖아. 자식아.”

“ 참! 묵령철골액은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하는 거냐?”

실은 흑철마신을 익히려고 했기에 궁금했다.

“ 연공을 하지 않으면 몸이 굳는다.”

“ 어떤 연공을 해야 하는데?”

“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절벽에 돌진하기, 돌바닥에 구르기,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가기, 빙정보다 더 차가운 물에 들어가기, 육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한계를 극복해야만 금강신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던데?”

“ 그, 그걸 다 할 거냐?”

막장은 질린 듯한 얼굴로 물었다.

“ 딱히 할 일도 없잖아. 그리고 그 영감에게 쬐금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는 아니고 이만큼.”

연우강은 엄지와 집게손가락 끝을 거의 맞붙여 보였다.

“ 그래서 흑철마신을 완성하겠단 말이냐?”

“ 내가 막장이라고 하지만 어쩌다 한 번 정도는 인간의 도리를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

“ 막장은 나야, 인마. 그건 그렇고, 절벽과 승부를 낸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냐?”

“ 화약.”

“ 화, 화약이라고?”

막장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화약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군에 한하고, 일반인은 광산 외에는 불가능하다. 만일 화약을 사용하다가 발각되면 중벌에 처해진다.

이곳 대야벌도 예외는 아니다.

황실과 연관이 있는 황궐이 있고 금황련이 있으니 화약을 터트리면 금세 황실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럼 그 후의 일은 뻔하다.

“ 그래, 인마.”

“ 자식아, 그러다가 정말로 이렇게 되는 수가 있어.”

막장은 제 손으로 목을 스윽 그었다.

“ 황실에서 날 잡아간다고?”

“ 그래, 만일 네가 화약을 터뜨린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대야벌에서도 감당할 수 없어.”

“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해?”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 황실에서 네 신병을 요구하진 않겠지만 처벌은 원할 거라고.”

“ 내가 노리는 게 바로 그거야. 대야벌과의 관계가 있으니까 황실에서는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아. 하지만 나를 처벌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는 할 거야. 물론 애댜벌도 황실과 유지하고 있는 원만한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날 처벌하겠지. 하지만......‘

“ 하지만........?”

“ 지들이 날 어쩔 거냐고, 자식아.”

“ 뭘 어째, 인마. 천옥도.... 이런 씨팔!”

막장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대야벌에서 녀석을 죽이지 않고 처벌하는 방법은 아예 없었다.

내공이 강하다면 천옥 죄수들처럼 금제를 하겠지만, 기껏 삼십 년 내공을 가진 녀석에게 금제를 가한다고 해서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그렇다고 천옥을 집어넣으면 당장 방장 자리를 꿰차고 호의호식할 터인데 그것도 할 수 없고, 유일한 방법은 잠룡의 지위를 박탈하고 내쫓는 것이다. 대야벌에서 내쫓는다면 다른 잠룡들은 사색이 되겠지만 녀석은 춤을 덩실덩실 추며 떠날 것이다.

그야말로 녀석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 완전 범죄란 별 것 아냐. 상대방이 알고 있으면서도 범죄 사실을 밝힐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완전 범죄라는 거야.”

“ 정말 하겠다는 말이냐?”

“ 난 개독새다. 막장. 지금껏 날 건드리고 살아난 놈은 단 한 명도 없다.”

“ 네 상대는 사람이 아니고 절벽이야. 인마!”

막장은 버럭 소리쳤다.

“ 절벽도 마찬가지야. 자식아. 그건 그거고, 넌 앞으로 생사림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와.”

“ 생사림이라면, 혹시 너...”

문득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비법을 생사림에 넘겼다는 무원의 말이 떠올랐다.

“ 난 복수 가튼 건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라.”

“ 그럼 생사림에 대한 정보가 왜 필요한데?”

“ 너 때문이야, 자식아.”

“ 나?”

막장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렀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지. 복수를 하려고 한다면 이해나 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니.

“ 너 흑백혈경 익히기 싫어?”

“ 생사림에 대해 속속들이 알면 그 세 가지 무공을 익힐 수 있다는 거냐?”

“ 그곳에 있는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하면 넌 최소 이 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 있고, 세 무공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하나로 합친 흑마백옥혈잔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다.”

“ 그 세가지가 하나로 합쳐진단 말이냐?”

“ 내가 그랬잖아. 그건 한 사람의 무공이라고.”

“ 그럼, 위, 위력은?”

이미 혈잔수를 익히고 있는데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오 성에 달한 혈잔수가 평생을 익혔던 철살장보다 훨씬 더 강했다.

이론상으로 연환 공격은 첫 공격의 두 배의 위력을 낸다고 알려져 있으니 연우강이 말한 흑마백옥혈잔을 완벽하게 펼치면 혈잔수 위력의 여덟 배가 나온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론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엄청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 생사림을 털자는 게 나 때문이라고?”

“ 일단, 알아 와. 만일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그 새끼도 죽여, 나, 간다.”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 죽이라고......?”

막장은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이 말하는 것은 여의선천신단을 얻기 위한 단순한 도둑질 차원이 아니었다. 생사림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를 무조건 죽이라는 뜻은 도둑질만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니 여의선천신단이 생사림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둑질을 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 아무래도 저 자식 때문에 내 명대로 살긴 글렀군.”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아니, 나도 속물이 다 된 건가?”

그는 쓰게 웃었다.

말을 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좀 더 강력하게 말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의선천신단, 흑마백옥혈잔.

그 두가지 때문이었ㄷ.

“ 휴! 녀석 말처럼 이름이 막장인데.....”

막장은 한숨을 내쉬며 길을 나섰다.

*******

연우강은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에도 일천독행신을 펼치며 석상 군을 지나쳐 왔다. 하지만 여전히 절벽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 넌 오늘 죽는다. 빌어먹을 놈들아.”

연우강은 절벽을 노려보다가 분관을 내려 뚜껑을 열었다. 분관 안에는 어른 머리 크게 정도로 포장된 화약이 도화선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가 금보산으로 구입한 화약은 전부 사십 뭉치였다.

“ 이 정도로 되려나 모르겠네.”

절벽이 워낙 넓어 화약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단 설치부터 하고.”

연우강은 준비해 온 낫과 손괭이를 들고 절벽을 올랐다. 일 장 높이에 멈춘 채 먼저 낫으로 바위를 정방형으로 잘라낸 다음 주먹으로 가볍게 밀어 쳤다.

그러자 낫으로 잘라낸 정방형의 바위가 떨어져 나왔다. 잘라낸 조각을 왼편 겨드랑이에 낀 그는 움푹 들어간 자리를 향해 다시 오른손을 밀어 넣었다.

푸스스스!

주먹에 뻗어나간 암경이 안쪽을 가루로 만들고 깊은 구멍이 뚫렸다.

“ 엄청나네!”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뻥 뚫린 구멍을 보았다.

방금 그가 펼친 무공은 천마삼경의 혈경에 있는 혈잔수였다. 극양의 기운을 쏘아낸다는 혈잔수의 위력은 가공하기 그지없었다.

“ 나쁘진 않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구멍 안쪽의 돌가루를 파내고는 왼편 옆구리에 끼고 있던 정방형의 돌을 다시 끼워 맞췄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다시 작업을 했다.

그가 이렇듯 손괭이와 낫을 이용해 자리를 옮기는 이유는, 설사 누가 본다고 해도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 장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화약을 넣고, 도화선을 연결하는 일은 워낙 섬세한 작업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점심 전에 시작한 일을 마무리짓고 나자 해거름 녘이 되어 있었다.

연우강은 마지막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뭉치의 화약 중 중앙에 있는 화약에 도화선을 연결하여 아래로 내려뜨리면 그걸로 작업은 끝이 난다.

“ 네놈들이 방법을 주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는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선반처럼 튀어나온 부분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연우강은 석상 군으로 시선을 주었다.

서쪽 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해는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 붉은 광채를 사방으로 뿌려놓는다.

그것들을 보자 문득 사막의 석양이 떠올랐다. 이곳과는 달리 사막의 석양은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다.

홍옥처럼 붉은 광채를 내는 날이 있는가 하면 비취처럼 푸른빛을 내기도 한다. 푸른빛을 띠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초라해지곤 한다.

천옥에 있는 수천월의 말처럼 타클라마칸은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는 장소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인 곳. 그곳에서 승자는 명나라 군도 사막 부족도 아니었다.

타클라마칸.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던 사막이 바로 승자였다. 그걸 깨닫는 데 오 년이 걸렸다.

“ 그만 끝내자 자식들....”

찌르르!

어쩌면 석양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석상들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편두통처럼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왔다.

“ 헉!”

연우강은 신음을 내뱉었다.

느닷없이 석상들이 들고 있는 검으로부터 광채가 솟구치며 살아 숨쉬는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 빌어먹을 것들이 날 놀린다 이거지?”

결국엔 화약에 의존하는 자신을 석상들이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웃지 마, 새끼들아!”

연우강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제는 녀석들이 웃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묘하게 한 번 그렇게 생각하자 석상들이 정말로 비웃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며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 개자식들!”

휙!

결국 연우강은 절벽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 절벽을 부수고 너희들도 없애버릴 참이었어, 자식들아!”

연우강은 일천독행신을 펼치며 석상 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똥지게를 벗은 상태가 되자 그의 양팔은 일천독행신의 기운에 따라 저절로 움직였다.

오른편에 있는 석상을 향해 오른손을 쳐내려고 하는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석상이 들고 있는 검이 엄청난 기세를 머금고 연우강을 공격해 왔다.

“ 억!”

연우강의 신형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 이건.....”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수백, 아니 수천 번도 더 오갔던 곳이다. 그런데 석상의 검이 움직인 것이다. 헛것을 보았다고 하기엔 그 기운이 너무 강했다.

“ 설마?”

연우강은 여전히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다시 일천독행신을 펼치며 석상을 향해 나아갔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상이 들고 있는 검은 무서운 기세로 밀고 들어왔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검을 피할 방법이 마땅히 없다는 것이었다.

“ 맙소사!”

연우강은 넋을 잃었다.

천오백 년의 비밀. 그 오랜 세월 동안 누구도 풀지 못했던 석상의 비밀이 비로소 풀린 것이다.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석상이 취하고 있는 자세가 아니라 바로 일천독행신이었다.

정신을 차린 연우강은 이번엔 일천독행신이 아닌 칠보귀둔필사를 펼치며 석상 사이로 뛰어들어 보았다.

“ 역시.”

예상대로 석상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결국 석상은 일천독행신의 신법을 펼치고 뛰어들었을 때만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쉽게 말하면 석상은 일천독행신에만 반응하는 검진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 일단 주는 거니까 받아야겠지.”

이승걸의 죽음 때문에 심경의 변화가 약간 생겼는지도 몰랐다. 이전 같았으면 시큰둥했을 터인데 이번엔 기꺼운 마음으로 기연을 받아들였다.

아니 그보다는 경쟁심의 발로라는 게 더 옳았다.

일천파류혼을 남긴 대무천자 패는 묘하게도 사망마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무인이었다.

사망마제 가랍하는 본인을 천하제일이라고 하였지만 대무천자 패의 일천파류혼은 대야벌 최고 무공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천파류혼을 익혀 누가 더 강한 무인이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파앗!

연우강의 신형이 석상 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단전이 활짝 열리며 흑풍이 무서운 기세로 뛰쳐나왔다.

그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그가 석상 군 사이로 진입하자 곧바로 진득한 살기가 쏘아져 나왔다.

연우강은 일천독행신을 펼칠 때 나타나는 내기의 움직에 따라 오른손을 쳐냈다.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검진을 구축한 석상이 쏟아내는 기운을 막아내는 동작이 곧 일천파류혼의 초식이었다.

더불어 그 초식을 펼칠 때 내기의 움직임은 지금껏 익혀왔던 일천독행신의 진기 흐름과 일치했다.

일천독행신 자체가 신법임과 동시에 검법이었다.

석상들이 펼치는 검진은 신법을 통해 익힌 초식을 완벽하게 다듬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즉 석상들이 곧 사부였다. 검진의 공격을 막아내며 연우강은 전방으로 질주해 나갔다.

“ 엄청난 검법이네.”

연우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천파류혼은 무공 명처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신법과 함께 이어지는 검법이었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도 엄청난 위력을 동반한 검법. 가히 최고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검법임이 분명했다.

약간은 어설픈 동작을 펼치며 한 번을 나아간 그는 석상들이 들고 있는 검을 살피며 다시 원위치로 걸음을 옮겼다. 일천파류혼을 한 번 펼치고 나자 비로소 석상들이 들고 있는 검이 새롭게 다가왔다.

파앗!

두 번째 일천독행신이 펼쳐지고 그의 신형이 석상 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두 번째 펼치는 일천파류혼은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치 느린 가락에 맞추 춤을 추는 것처럼 연우강은 오른손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휘어지고, 꺾어지고, 휘감고, 뻗어내고, 감아들이고, 발의 움직임에 따라 팔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기운을 막아냈다.

한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도무지 멈추질 못하는 고질병은 다시 도졌다. 그는 쉬지 않고 석상 사이를 오가며 일천파류혼을 익혔다.

달이 뜨고, 지고, 태양이 솟고, 태양이 졌다.

어느덧 빠르게 나아가던 움직임이 느려지고, 마치 아침에 몸풀기를 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손을 저으며 나아가고 있었다.

쩌억! 쩌억!

워낙 몰두하고 있었던 탓인지, 석상으로부터 기묘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오른손을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퍼억! 퍽! 퍽퍽퍽!

마지막 석상을 지나치는 순간, 뒤편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연우강은 몸을 돌렸다.

“ 일천파류혼이 검진의 중추였나 보네.”

연우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검진의 중추를 파괴하면 진식을 와해할 수 있다고 하였던 막장의 말이 떠올랐다.

석상의 검을 막아내기 위해 쏘아냈던 아명들이 결국엔 석상을 부수는 매개체가 된 모양이었다.

“ 우담보가 지랄하......”

우담보의 얼굴을 떠올리던 연우강은 걸음이 빨라졌다. 무너진 석상이 있던 자리에서 뭔가를 발견한 탓이었다. 잠시 후 그는 석상들이 서 있던 중간 지점에 와 섰다.

“ 이것들이 왜 여기에?”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산산이 부서진 석상 발이 있던 부분에 막대기처럼 생긴 것들 여섯 개가 우뚝 서 있었다.

그것들은 다름 아닌 네 자루의 검과 도 두 자루였다. 이번에도 그가 먼저 잡은 무기는 검집은 물론이고, 손잡이까지 전부 검은 색으로 돼 있는 검이었다.

“ 만년오금철로 만든 거네.”

문득 친숙한 느낌이 들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묵사.

검집 표면에 씌어진 글.

전에 풍곡에서 싸웠던 노인으로부터 묵사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묵사라는 이름을 지닌 검을 얻게 된 것이다.

이내 고개를 저은 그는 두 번째 검을 집어들었다.

붉은 색 검으로, 검집 표면에는 혈루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 번째 검에는 백령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처럼 하얀색이고, 네 번째 푸른색 검에는 청로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자루의 도에는 환백과 광인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 이것들은 비급인 모양이네.”

양피지로 엮어진 비급은 전부 다섯 권이었다.

묵사를 제외한 나머지 무기로 펼치는 무공들이 적힌 비급인 듯했다.

“ 그럼 이놈은 대무천자 패의 무기가 되는 건가?”

한동안 묵사를 주시하던 연우강은 시선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뜻하지 않게 무공을 얻고 무기를 얻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천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석상을 전부 부숴놓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 그 자식은 건수 잡았다고 방방 뛸 텐데.”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삼백 년 전부터 버려져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이 됐다고 하지만 석상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아무리 이런저런 변명을 해본들, 벌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될 것이고 쉽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 이번 사건을 무마하려면 하나는 내놓아야겠네. 우선은 버틸 때까지 버텨 보다가 정 안 되면 주지 뭐.”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부서진 돌로 시선을 주며 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주변에 널린 돌들이 몽땅 떠오르더니 하나씩 땅속으로 박혀들기 시작했다.

비교적 편편한 부분이 위쪽으로 나오게 하여 땅속으로 박아넣자 그가 하려는 일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는 깨진 석상들의 잔해를 이용해서 길을 만들고 있었다.

우담보가 검지곡 소식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부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일단 부하에게 절대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우담보는 즉각 범일승에게 연락을 하였고, 두 사람은 만사를 제쳐두고 검지곡으로 향했다.

비록 버려졌다고 하지만 검지곡의 석상은 대야벌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더불어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검지곡을 역사적 성지로 조성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 몽땅 파괴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 이럴 수가!”

검지곡에 발을 디딘 우담보는 넋을 잃었다.

설마 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검지곡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남아 있기는 했다. 지금껏 검지곡을 지켜왔던 석상들은 전부 벽돌이 되어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석상이 끝나는 지점에서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사내가 눈에 띄었다.

그는 다름 아닌 똥지게 연우강이었다.

“ 네, 네, 네 이노옴!”

역사에 대한 인식은 우담보보다는 범일승이 더 깊었다. 이곳을 성지로 조성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던 사람도 그였던 터라 석상들이 파괴된 것에 대해 우담보보다 더욱 분노했다. 범일승은 고함을 내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이건 완전히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네.”

연우강은 피식 웃었다.

달려오는 기세로 보건데 말로 어떻게 해볼 상황이 아니었다.

연우강은 옆에 두었던 묵사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범일승을 향해 내던졌다.

“ 오냐! 이놈! 이 검으로 네놈의 목을 쳐주겠다.”

범일승은 검을 잡아채자마자 곧바로 뽑아들고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범 궁주!”

우담보는 깜짝 놀라 고함을 내질렀다.

범일승의 기세를 보건데 정말로 목을 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범일승은 우담보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묵사를 번쩍 치켜 들고 있었다.

내공마저 끌어올린 모양이었다. 범일승이 쥐고 있는 검 끝에서 투명한 광채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검강이었다.

“ 내가 벌주 앞에서 자결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만큼은.....”

“ 그 검 묵사야, 똥자루.”

우뚝!

연우강을 향해 나아가던 검이 우뚝 멈춰섰다.

“ 뭐, 뭐라고 했느냐?”

범일승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었다.

“ 선부 맞은 똥자루처럼 날뛰지 말고 검집을 봐.”

연우강의 말에 범일승은 왼손에 쥐고 있던 검집으로 시선을 주었다.

“ 무, 묵사?”

범일승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 저, 정말 묵사란 말이오?”

뒤따라온 우담보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범일승이 들고 있는 검을 보았다.

묵사의 혼은 홀로 외롭고,

붉은 옷의 그녀는 눈물을 흘리네.

백령의 서슬은 한없이 차가운데,

슬픈 이슬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구나.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미치지 않을 것을.

묵사, 혈루, 백령, 청로, 환백, 광인.

대야벌에 존재하는 수많은 전설 중 일천파류혼과 더불어 수위를 차지하는 전설.

네 자루의 검과 두 자루의 도를 합쳐 파천육기라고 하였고 그 파천육기 중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무기가 바로 묵사였다. 더불어 대야벌을 세운 대무천자 패의 무기라는 말도 있었다.

“ 그, 그렇소. 우 궁주. 이 검은 묵사요. 파천육기의 그 묵사란 말이오.”

범일승은 얼이 빠졌다.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신비에 묻혀 있었던 전설 중의 하나. 그 묵사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 우연히 넘어진 석상이 있었소. 넘어진 석상 발치에서 그 놈이 나왔소.”

“ 그럼 나머지 석상을 부순 건 비급을 찾겠다는 욕심에서 그랬단 말이냐?”

“ 검이 있다면 비급도 당연히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소.”

“ 없었단 말이냐?”

“ 비급이 나왔다면 그걸 똥자루 영감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을 거요.”

연우강은 턱으로 묵사를 가리켰다.

“ 보여줘?”

굳이 보여주었다고 말을 하는 건 물건의 소유가 연우강이라는 의미인 탓이었다.

“ 보물은 주은 사람이 임자라고 알고 있소이다, 똥자루 영감.”

“ 그래서 이걸 달라는 말이냐?”

“ 그걸 내가 가지면 뭐하겠소.”

“ 하면?”

“ 저 지경을 만들어 놓을 걸 이해해 달라는 거지요. 그리고....”

“ 그리고?”

“ 앞으로는 내 분관을 수색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을 해주면 난 묵사를 보지 못한 걸로 하겠소.”

“ 보지 못했다는 건 무슨 뜻이냐?”

“ 이곳에서 묵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두 분이라는 뜻이오. 난 나중에 이곳에 도착한 걸로 하는 거요.”

“ 묵사를 건네주겠단 말이냐?”

“ 물론이오. 똥자루 영감. 난 검에는 관심 없소.”

연우강의 말에 범일승은 우담보를 보았다.

천오백 년 만에 처음으로 발견된 대무천자 패에 대한 단서. 설사 비급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신물인 묵사가 발견된 사실만으로도 대야벌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물론 발견한 자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특전이 주어질 게 분명했다.

“ 일단 묵사 건에 대해서는 벌주께 보고를 하도록 합시다.”

우담보 또한 묵사의 발견자에게 주어질 특전이 욕심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묵사의 발견은 사안이 너무 컸다. 속인다고 해서 속일 수도 없을뿐더러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오히려 곤란을 겪게 된다. 차라리 연우강이 발견했다고 보고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 난 내 이름이 언급되는 건 죽어도 싫소. 두 분. 만일 벌주가 날 오라 가라 한다면, 아버지께 불효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날로 대야벌을 나가버릴 거요.”

“ 거참!”

우담보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녀석이 대야벌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건은 도움이 됐으면 됐지, 손해날 일은 절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나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연우강이 파천육기의 나머지 보물을 비급과 함께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우담보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 정마롤 오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겠다는 말이냐?”

범일승은 확인하듯 물었다.

“ 내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난 묵사를 본 적도, 아니 묵사라는 이름도 듣지 못했소.”

“ 알았다. 묵사 건으로 인해 널 오라 가라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말거라. 혹시 벌주게서 이곳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 당분간은 검지곡 출입도 금하도록 해라.”

범일승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함께 발견했다고 해도 되고, 연우강이 발견을 했는데 묵사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자신과 우담보가 알아냈다고 하는 방법 등 보고서에 이름을 올리는 방법은 만들어내기 나름이다.

굳이 싫다는 녀석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알겠소.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당분간 이곳에 오지 않도록 하겠소.”

연우강은 활짝 웃었다.

“ 갑시다. 범 궁주.”

우담보는 몸을 돌렸다.

“ 수고해라.”

범일승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곧 검지곡을 벗어났다.

“ 하나를 주고 열 개를 얻었고, 똥자루가 가져간 건 껍데기 뿐이니까 난 남는 장사를 한 거네.”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작업에 몰두했다. 일이 끝나자 주변은 어둑해졌다.

“ 절벽 네 녀석은 잠시 보류다.”

연우강은 지게를 지고 몸을 돌렸다.

지금 상황에 절벽까지 무너뜨려 버린다면 그때는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게 될 듯했다.

“ 그나저나 이것들은 얼마나 받으려나......”

연우강은 분관을 보며 해죽 웃었다.

그가 범일승에게 묵사를 건네 이유는 비급이 없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신기라고 부르는 무기들은 무공에 맞춰 제작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면에서 보면 비급이 없는 묵사는 대무천자 패의 신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존재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장사꾼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급 신발은 분명한데 한쪽이 없는 신발과 다르지 않다.

반면에 나머지 무기는 비급과 함께 짝을 이루고 있다.

무기 값만 해도 엄청날 터인데 비급까지 있다면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설사 묵사가 파천육기의 맨 윗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연우강은 기꺼이 내주었을 게 분명했다.

연우강은 기쁜 마음으로 처소로 돌아왔다.

막장은 아직 일을 하는 중인지, 그의 집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막장의 집을 지나친 연우강은 처소로 들어가 분관에서 물건을 꺼내 자루에 넣은 다음 지하실로 내려갔다.

“ 팔 땐 팔더라도 일단은 숨겨야 하니까.”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 바닥보다는 천장에 낫겠지?”

의자 위로 올라서는 구석 천장을 위로 밀었다. 그러자 안쪽 공간이 나타났다. 창고라면 으레 하나씩 있는 비밀 창고였다. 그는 안쪽으로 자루를 밀어 넣은 다음 다시 본래대로 맞췄다.

다른 곳과 같도록 나무판을 조절해 놓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화로 근처로 갔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운 탓인지 화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구석에 쌓아 두었던 석탄을 화로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삼매진화로 불을 지폈다.

“ 똥 푸는 일 말고는 할 일도 없는 놈이 왜 이리 바쁜지 모르겠네.”

석탄에서 불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찻주전자를 화덕 위로 올려두고는 지하실을 나왔다.

“ 일단 목욕부터.”

어깨에 대고 코를 킁킁거리던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몽요가 다녀간 듯 가마솥 안에는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 하루 빨리 조수를 구해야 하는데.”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석탄을 아궁이 안으로 집어넣으며 연우강은 입맛을 다셨다. 일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지금처럼 누군가가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해 주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팔자가 그런걸....”

“ 연우강!”

옷을 벗으려고 하는데 밖에서 막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 나도 건졌다!”

“ 건져? 뭘?”

“ 화장실을 푸다가 건졌다고.”

“ 보물이라도 나온 거냐?”

“ 아니?”

“ 그럼 그냥 묻어주면 되잖아.”

“ 그게..... 묻을 수가 없다.”

“ 왜?”

“ 아직 살아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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