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막장, 건지다.
막장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기연을 잔뜩 기대했다.
굳이 연우강의 말이 아니더라도 막장 또한 대야벌에서 기연의 장소라고는 화장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려 천오백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곳이긴 하지만, 대야벌 곳곳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않는 그런 장소가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처녀지는 화장실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열심히 펐다.
하지만 시체는 고사하고, 누군가 떨어뜨린 물건조차 건지지 못했다. 막장이 실망한 건 당연했다.
실망하다 보니 능률이 떨어지고, 일의 속도도 늦어졌다. 저녁 무렵이면 끝날 일이 밤늦게까지 이어진 이유도 사실 실망감 때문이었다.
결국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마치려는 순간, 기다린 그걸 발견했다.
처음엔 뛸 듯이 기뻐했다.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고 둥둥 떠 있었지만, 시체가 아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주변을 슬쩍 살핀 다음 지금껏 퍼 담았던 분뇨를 다시 쏟아 넣고, 허공섭물로 시체를 들어올려 관 안으로 집어넣었다. 막장이 상상의 날개를 편 건 딱 그때까지였다.
패천림은 다른 곳과는 달리 오직 패도를 추구하는 집단이고, 그곳을 턴 도둑이 화장실에서 죽었다면 상당히 큰 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뚜껑을 닫으려고 하는데 귓전으로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만일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면 화장실에서 나온 시체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숨소리가 들려온 곳은 다름 아닌 분관 안쪽이었다. 시체라 생각하고 분관으로 넣었던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시 화장실로 던져 넣고 자리를 떠야 할지 한순간 갈등했다. 공연한 일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곳이 패천림의 심처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결국 분관ㅇ르 지고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더 놀라운 일은 숙소로 돌아오고 난 후였다.
“ 여자다!”
막장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도둑이 여자라고?”
“ 응! 빈손이고.”
“ 처녀?”
“ 그건 나도 모르지. 몸매를 보면 아직 어린 것 같기도 하고.....”
“ 봤어?”
연우강은 막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 뭘?”
“ 알몸을 봤냐고 묻잖아.”
“ 솥 안에 넣으려면 옷을 벗겨야 하잖아.”
“ 그럼 다 본 거네?”
“ 그런 걸 불가항력이라고 부른다.”
“ 괜찮았어?”
“ 뭐가?”
“ 몸매가 괜찮았냐고.”
“ 몸매가 괜찮은지 내가 어떻게 아냐? 다만 얼굴은 갸름하게 예쁘고, 군살은 하나도 없고, 키도 크고, 가슴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엉덩이는......”
“ 마음에 든 모양이네?”
“ 마음에 들었다고?”
“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렇게 자세히 볼 이유가 없잖아.”
“ 뭘 자세히 봐, 자식아. 옷을 벗기다 보니까 저절로 보였던 거지.”
막장은 버럭 소리쳤다.
“ 지금 삶고 있다고 했냐?”
“ 몸에 밴 냄새를 빼려면 삶는 수밖에 없잖아.”
“ 어디 보자.......”
연우강은 어슬렁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 뭘 보려고?”
막장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 난 척 보면 처년지 아닌지 알 수 있거든.”
“ 그러니까 그녀를 보겠다고?”
“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잖아.”
연우강은 부엌문을 열었다.
“........!”
안쪽 가마솥을 살펴보던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막장을 돌아보았다.
“ 왜?”
“ 너 지금 고기 삶냐?”
“ 살아 있다고 했잖아, 임마.”
“ 솥뚜껑은 고기를 삶을 때만 닫는 거잖아.”
연우강이 황당해하는 이유가 바로 굳게 닫힌 솥뚜껑 때문이었다.
“ 난 목욕할 때 솥뚜껑을 닫고 하는데?”
“ 정말?”
“ 그래야 땀이 쫘악 빠지잖아. 흑철마신을 연성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
“ 하지만 솥 안에 있는 여자는 흑철마신하고는 상관없잖아. 기절을 했다면 내공을 끌어올리지도 못할 테니까, 아마 지금쯤 먹기 좋게 익었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김도 나오네.”
“ 이런!”
막장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정신을 차리면 알아서 나오겠거니 했는데, 아직 솥뚜껑이 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마솥 앞으로 간 그는 솥뚜껑을 잡아당겼다.
“ .......!”
막장은 의아한 얼굴로 솥뚜껑을 보았다. 번쩍 들어올려져야 할 솥뚜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막장은 연우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솥 안에서 허공섭물을 이용하여 솥뚜껑을 잡고 있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래?”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석탄을 아궁이 안으로 던져 넣었다.
[ 무슨 짓이야. 임마!]
“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냥 푹 삶아서 다시 똥통에 던져 버리지 뭐.”
‘ 헉! 저런 나쁜 자식.’
두연화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연우강이 부엌문을 열 때였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아버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패천림의 최 심처인 패력전으로 잠입했다.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림주인 철전패왕 백독수와 계모가 침상에서 뒹굴고 있었다. 비로소 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이해가 갔다.
바로 계모의 부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둘을 노려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아버지의 무공이자 패천림의 최고 무공인 패왕수라천경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자신만 아는 비밀장소로 들어가 패왕수라천경을 가지고 나오려는 순간 놈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비밀 통로를 이용해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패천림 전역에 경계가 강화되는 바람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화장실이었다.
패왕수라천경을 화장실 근처에 숨기고 난 다음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어 귀식대법을 펼쳤다.
두연화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리곤 정신을 차린 곳이 바로 여기였다.
처음엔 적에게 잡힌 줄 알았다.
그런데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어보니 지금 있는 이곳은 패천림이 아니었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내공을 끌어올리자 갇혀 있는 곳의 구조가 조금씩 드러났다.
뚜껑이 달린 나무 욕조 안이었다. 식초 냄새가 진동하고 물이 점차 뜨거워지는 걸 보면 아래쪽에서 불을 지펴 물을 데우면서 목욕을 하는 특이한 구조가 분명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상태가 알몸이라는 사실이었다.
밖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사내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솥뚜껑을 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솥뚜껑을 붙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불길을 키우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지금도 물은 엄청나게 뜨겁고, 식초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는 지경이다. 만일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더라면 젊은 목소리의 사내 말처럼 진작 몸이 익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누굴까?”
또다시 밖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런데 계속 불을 지필 거냐?”
“ 그 안에 있는 도둑 때문에 앞으로 시달리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럴 바엔 차라이 없애버리는 게 낫지.”
“ 그냥 율령궁에 넘겨버리면 안 될까?”
“ 그 여자가 패천림에서 뭔가를 훔쳤는데 몸에서 나오지 않고, 그 도둑 또한 모른다고 하면 누굴 가장 먼저 의심할 것 같냐?”
“ 그게 나라고?”
“ 당연히 막장 너지. 그래서 살아 있는 도둑은 함부로 구하는 게 아냐.”
‘ 막장?’
두연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철장마도 막장이 똥지게를 진다는 소문을 들었던 탓이었다. 결국 자신을 구한 사람은 그였고, 지금 있는 곳은 야장이란 의미였다.
“ 그렇다고 해도 없애는 건 좀 그렇다.”
“ 어쩔 수 없어. 패천림의 심처까지 들어간 걸 보면 패천림 내부를 잘 아는 여자일 거야. 만일 그 여자가 여기서 나간 다음에 패천림에 잡혔다고 해봐. 그 여자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막장 네 핑계를 댈 수밖에 없잖아. 더구나 넌 지금 근신 중이고, 지금 상황에서 다른 죄를 지으면 이젠 천옥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 그래도 산 사람인데.”
“ 누가 너보고 죽이래?”
“ 그럼?”
“ 넌 그 솥뚜껑만 잡고 있어. 불은 내가 지필 테니까.”
“ 삶아 죽이자고?”
“ 네가 건져오지 않았으면 화장실에서 죽었을 거잖아. 최소한 솥 안의 물은 깨끗하니까 똥물 속보다는 훨씬 낫지 뭐.”
‘ 저, 정말로 삶아버릴지도 몰라.’
두연화는 안에 있으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 사, 살려주세요.”
두연화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 네가 누군데?”
“ 두... 아니 화연두!”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두연화는 얼른 둘러댔다.
“ 막장, 솥뚜껑 꽉 잡아. 삼매진화도 일으키고.”
두연화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우강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아궁이에 석탄을 던져 넣으며 소리를 질렀다.
“ 전대 패천림주 딸인 두연화에요.”
“ 두보관의 딸?”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그래요.”
“ 두보관의 딸이 거긴 왜 들어간 거지?”
“ 전 열일곱 살 때 무공을 익히기 위해 사월림으로 들어갔어요.”
“ 아버지가 패천림의 림준데 사월림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믿으라고?”
“ 패천림의 무공은 대부분 패도적인 무공이 많아 여자인 제겐 맞지 않아요. 그리고 전 패천림의 무공보다는 사월림의 은신술에 더 관심이 많았고요.”
“ 승천비고나 천무비고에 보면 은신술에 대한 비급이 꽤 있을 텐데?”
“ 은신술은 비급만 가지고 배우기엔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서 기초를 배우기 위해 들어갔는데......”
“ 무공을 배우던 중에 아버지가 천옥에 수감됐단 말?”
“ 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패권 웅천 숙부께서 찾아와서는 당분간 몸을 숨기고 있으라고 했어요.”
“ 가능해?”
연우강은 막장을 쳐다보았다.
한 조직의 수뇌 딸이 다른 조직으로 들어가 신분을 숨긴 채 무공을 익힌다는 것 자체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 대야벌에는 무인만 해도 오만 명이다. 몇 가지 조건이 따르겠지만 신분을 숨기려고 마음을 먹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 그래도 림주의 딸은 얼굴이 이미 알려졌을 텐데?”
“ 환영축골공을 익히고 있어요.”
이번 대답은 솥 안에서 나왔다.
“ 그러니까 환영축골공인가 하는 걸로 얼굴을 바꾸고 사월림으로 들어갔단 거야?”
“ 그래요.”
“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았어?”
“ 저도 그게 이상해요. 아버진 그때 순순히 허락했을 뿐 아니라 힘들다고 신분을 밝힐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 그랬군.”
문득 전에 풍곡으로 떨어질 때 두보관이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일부러 천옥으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즉 패천림의 림주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다는말이 된다.
조직의 생리상 새 림주는 전 림주의 그림자를 지우는 작업을 할 테고, 두보관의 측근은 물론이고, 가족도 위험해질 수 있다. 두작군은 그의 딸의 안전을 위해 그녀가 사월림으로 가는 걸 묵인한 것이었다.
“ 만일 여기서 내보내주면 어떻게 할 거지?”
“ 그건......”
두연화는 할 말이 없었다.
사월림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기초만 익히고 나오려고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천옥으로 수감됐다는 말을 듣고는 사건을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무공이 사월림 최고 무공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월광은잠비였다.
하지만 일반 제자에게 그런 극고한 무공을 가르쳐줄 리가 없었다. 결국 환영축골공을 이용하여 월광은잠비를 훔쳐냈다. 물론 비급을 모사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에 가져다 두었지만 자칫 월광은잠비를 익힌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 아직 물이 덜 뜨거운 모양이지?”
“ 사월림의 최고 무공 중의 하나인 월광은잠비를 훔쳐 배웠어요.”
연우강은 막장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사월림은 사룻 단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월광은잠비는 은신술로서는 최고 무공 중의 하나다.”
“ 일반 제자가 그 무공을 익힌 사실이 들통나면 이거란 말?”
연우강은 손으로 목을 스윽 그어 보였다.
“ 비급은 승천비고나 천무비고에서만 취할 수 있다. 그 두 곳도 역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지고 나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 승천비고나 천무비고에 있는 무공은 어느 정도지?”
“ 승천비고는 칠백 년 됐고, 천무비고는 천 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다.”
“ 어떤 무공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는 말이냐?”
“ 검지곡 이후 기연의 장소로 가장 각광받는 곳이 바로 승천비고와 천무비고다.”
“ 잠룡들에게도 개방돼?”
“ 승천무고의 일층과 이층은 지금도 이용할 수 있고, 일 년 육 개월이 지나면 천무비고 삼사층과 승천비고를 이용할 수 있다.”
“ 넓어?”
“ 정확하게 몇 권의 무공 비급이 소장돼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 각 무공별로 분류는 돼 있겠지?”
“ 각 서고에 따라 검법, 도법 등으로 분류는 돼 있다.”
“ 잠룡들은 시간이 한정돼 잇으니까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무공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겠네?”
“ 그렇지. 여러 가지를 잡다하게 익힌다고 해서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도 아니니까.”
“ 사업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데 잘 됐다.”
“ 사업확장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 확장이라고 하기 보다는 분야를 넓힌다고 보면 돼.”
“ 나중에 말해 주겠다는 말이지?”
“ 잘 아네. 그나저나 저 여잔 어떻게 할래?”
연우강은 다시 솥으로 시선을 주었다. 여전히 처치 곤란한 여자가 바로 두연화였다.
“ 제발 꺼내주세요.”
두연화는 울먹였다.
물은 점점 뜨거워지고, 내공도 바닥나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반 시진만 지나면 정말로 삶은 고기가 돼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울먹이는 듯한 두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막장이 잘라 말했다.
“ 어떻게 처리할 건데?”
“ 아무튼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모른 척 해라.”
“ 우강아!”
바로 그때 밖에서 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남들은 늙으면 귀가 어두워진다는데.”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원이 허겁지겁 달려온 것은 묵사 때문일 터였다.
“ 생각 잘해.”
연우강은 솥을 흘끔 쳐다보고는 부엌을 나갔다.
“ 어쩐 일이시오?”
대문 앞에 무원과 창노가 서 있었다.
“ 잠깐 이야기 좀 하자.”
“ 묵사 때문에 그러는 거요?”
연우강은 처소로 향하며 응대했다.
“ 검지곡에서 묵사가 발견됐다고 하던데 맞느냐?”
“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난 거요?”
집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지하로 내려가 찻주전자를 가지고 올라왔다.
“ 너를 포함해서 우담보와 범일승 궁주 세 사람이 발견했다고 들었다.”
“ 원래는 내가 발견한 건데 그냥 줘버렸소.”
“ 그냥 줘버렸다고?”
무원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묵사라도 나왔으니까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놈이 나오지 않았다면 전 지금 천옥으로 들어가 있을 겁니다.”
“ 석상을 전부 깨트린 사람이 너라는 거냐?”
“ 흑철마신을 연마하고 있는데 석상 자식들이 비웃지 않겠소. 그래서 홧김에..”
“ 석상을 향해 돌진했는데, 그 안에서 묵사가 나왔다고?”
“ 그렇소.”
“ 묵사가 뭔지 아느냐?”
“ 우담보하고 똥자루가 묵사를 보고 파르르 떨던데, 혹시 대무천자 패의 무기요?”
“ 대무천자 패의 무기인 것 맞다. 하지만 대무천자는 물려받았을 뿐 묵사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었다.”
“ 무슨 말입니까?”
“ 혹시 파천육기라고 들어본 적이 있느냐?”
“ 처음 듣는 말이오.”
“ 묵사, 혈루, 백령, 청로, 환백, 광인을 묶어 하늘을 깨트리는 무기라고 하여 파천육기라고 불렀다.”
“ 굉장한 무기였나 보군요.”
“ 파천육기는 영세오천에 속했던 무인 중 가장 강했던 여섯 명의 무기를 일컫는 말이자 별호였다.”
“ 영세오천은 또 뭡니까?”
“ 대야벌이 세워진 천오백 년 전까지 중원 및 새외에서 가장 강했던 문파로, 지천, 상천, 밀천, 흑천, 황천을 말한다. 그 다섯 하늘 중 황천의 후예가 오늘날 팔황새다.”
“ 그들이 서로 싸운 모양이군요?”
“ 그렇다. 처음엔 각각 싸우다가 점차 힘을 합치기 시작하였는데, 상천, 밀천, 흑천이 한 세력을 이루었고, 지천과 황천이 한 세력을 이루었다. 힘을 결집한 그들은 장장 오백 년에 걸쳐서 치열하게 싸웠지.”
“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 두 세력의 힘은 백중지세였고, 결국엔 양패수강하고 말았다.”
“ 그럼 대야벌은 어떻게 세워진 겁니까?”
“ 처절한 전쟁을 수백 년 동안 치록 나면 그 다음 수순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 보통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고 약속을 하죠. 가능하면 협의체를 만들기도 하고요.”
“ 그들도 그랬다. 영세오천의 수뇌들은 한 자리에 모여 더는 전쟁을 하지 말자고 협정을 맺는다. 그 협정의 결과가 무성이었다. 각 세력에서 이십 명씩 뽑아 총 백 명으로 세운 단체였고, 그들 백 명을 무영이라고 불렀다. 파천육기를 지닌 자들 또한 전부 무성의 무영이 됐고.”
“ 그럼 그들이 대야벌을 세운 겁니까?”
“ 아니다. 처음엔 무성은 묵사의 주인이었던 마제 가립하를 중심으로 잘 돌아갔다.”
“ 가, 가립하라고요?”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사망마제 가립하. 설마 그 이름을 무원으로부터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그가 무성 일 대 묵사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의외였다.
가립하가 남긴 글에는 풍곡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무성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씌어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일 대 묵사였다니!
만년오금철로 만들어진 묵사를 보았을 때 사망궤와 같은 재질이라,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 가립하를 아느냐?”
연우강이 생각 외로 놀란 표정을 짓자 무원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우연히 사막에서 천하제일인이었다는 전설을 들은 적이 있소.”
“ 그랬구나. 아무튼 그는 대야벌이란 무림 단체를 창설하자는 말이 오가는 와중에 묵사를 남기고 떠났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무성 일 대 성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사람이 됐고.”
“ 그가 왜 떠났죠?”
“ 그건 이 시 속에 들어 있다.”
묵사의 혼은 홀로 외롭고,
붉은 옷의 그녀는 눈물을 흘리네.
백령의 서슬은 한없이 차가운데,
슬픈 이슬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구나.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미치지 않을 것을.
무원은 파천육기를 나타내는 시를 나직이 읊었다.
“ 치정 관계를 표현한 시 같네요?”
“ 그렇다. 묵사, 청로, 광인은 남자였고, 혈루, 백령, 환백은 여자였다. 혈루와 백령은 묵사를, 청로는 백령을 환백은 창로를, 광인은 환백을 사랑했다.”
“ 그럼 묵사는?”
“ 그는 무인이 아닌 여자를 사랑했다고 하더구나. 비극은 거기서 시작됐다.”
“ 비극이라면?”
“ 묵사가 사랑했던 여자가 사고로 죽고 말았다고 하더구나.”
“ 묵사는 혈루나 백령을 의심했겠군요.”
“ 그런 셈이다. 결국 묵사는 검을 두고 무성을 떠나게 되고, 혈루를 비롯한 나머지도 무림을 등지게 된다. 그 묵사를 이어받은 사람이 대무천자 패였다. 사실 대무천자 패는 상천 출신이면서 무성의 이인자였던 청로의 사제였다. 청로가 떠나자 그는 무성을 장악했고 그동안 추진 중이었던 대야벌을 세우게 된다.”
“ 벌주의 처소인 천상천은 곧 상천을 의미하는 거였군요.”
“ 그렇다.”
“ 그럼 일천독행신이나 일천파류혼은 그의 무공이 맞다는 말입니까?”
“ 정확하게는 영세오천 중 상천의 무공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럼 석상 안에 묵사를 집어넣은 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 그건 누구도 모르지.”
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 이건 내 생각인데, 대야벌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답은 창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연우강의 시선이 창노를 향했다.
“ 무슨 말이오?”
“ 만일 네가 어떤 세력에 속해 있는 사람이고 치자. 그런데 어느날 너를 비롯한 동료 몇몇이 힘을 합쳐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어. 그 세력을 기존에 속한 세력보다 더 발전시키고 싶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무성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 북사를 본인이 만든 석상 안에 집어넣었단 말이오?”
“ 파천육기는 그 시대에 몽땅 사라졌다고 알고 있다. 대무천자 패는 묵사뿐만 아니라 파천육기를 몽땅 없애버렸다고 봐야 해. 결과적으로는 대야벌만, 아니 상천만 남은 셈이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정말 묵사밖에 나오지 않은 거냐?”
“ 영감, 사람 의심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네녀석을 믿지 않거든.”
창노는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그건 영감 편할 대로 생각하고, 그보다는 나는 묵사를 없앤다고 무성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지 그게 더 궁금한데.”
“ 묵사가 무성의 지존신물이면 가능하지 않겠느냐?”
“ 지존신물?”
“ 그렇다. 이놈아. 묵사는 무성 무인 백 명의 생사여탈권을 쥔 엄청난 물건이야.”
“ 그러니까 무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묵사를 없애버렸단 말이오?”
“ 그렇지. 일천독행신이나 일천파류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보물이지. 넌 손안에 들어온 보물을 발로 차버린 거야. 녀석아.”
“ 영감은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혹시 그 아래로 먹었어?”
연우강은 창노의 엉덩어로 시선을 주며 비아냥댔다.
“ 이놈이?”
창노의 눈초리가 사납게 치켜 올랐다.
“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냐, 영감. 내가 묵사란 놈을 뽑아들고, ‘무영들아 모여!’ 그러면 무영들이 ‘기다렸어요, 지존님!’ 하면서 모일 거라고 보는 거야? 아마 모이는 속도보다 내 목이 잘리는 속도가 더 빠를 걸.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 ......!”
창노는 할 말이 없었다.
권력을 쥔 벌주나 삼궐 또는 각 림의 림주라면 몰라도 연우강은 똥지게에 불과하다. 설사 그가 묵사를 지니고 있다 해도 무영들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아니 녀석의 말처럼 목이 잘려 시체로 나뒹굴게 될 터였다.
“ 옷은 자기 몸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건 나보다 영감이 더 잘 알면서 왜 그래?”
“ 끄응!”
창노는 머쓱한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녀석에게 정통으로 한 방 맞은 꼴이었다.
“ 그보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연우강은 무원을 보며 말했다.
“ 어떤 사람 말이냐?”
“ 정원사, 요리사, 점포를 봐줄 점원까지 최소한 세 사람은 있어야 합니다.”
“ 원하는 조건이라도 있느냐?”
“ 여자는 무조건 안 되고, 나이는 어르신 수준이면 좋겠습니다.”
“ 특별히 나이 든 사람을 구하는 이유라도 있느냐?”
“ 욕조에서 목욕을 즐기는 처자도 있는데 젊은 친구를 데려다 놓으면 손님을 잃게 되지 않겠습니까?”
“ 알았다. 나이 먹은 사람으로 세 사람을 구해보도록 하마. 그건 그렇고, 몸은 어떠냐?”
“ 또 있습니다.”
“ 뭐가 있단 말이냐?”
“ 승천비고와 천무비고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 정보?”
문득 무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 그가 연우강을 찾아온 것은 묵사 건도 있었지만 그동안 익힌 흑철마신의 경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흑천마신은 단순히 외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흑철마신을 익히기 위해서는 절벽에 몸을 부딪치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등 여러 방법으로 몸에 충격을 줘야 하는데, 그 충격이 주는 과정이, 때려서 혈도를 타통시켜 주는 타혈법과 유사한 효과를 낸다. 흑철마신을 완성하게 되면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연우강의 혈도는 구 할 이상 뚫리게 된다.
그 상태가 돼야 비로소 상승무공을 익힐 기초가 잡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녀석이 두 비고의 정보를 원한 것이다. 녀석이 말한 정보란 다름 아닌 강한 무공을 일컫는 것일 터였다.
“ 승천비고에 강한 무공이 있기는 하지만 야장에서 보유하고 있는 무공도 만만치 않다.”
무원은 넌지시 떠보았다.
“ 난 흑철마신 외에는 익히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르신. 사실 흑철마신을 익히는 것도 모험에 가깝습니다. 만일 그로 인해 연씨 세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전 견딜 수 없을 겁니다.”
“ 연씨 세가를 지키지 못하면 그땐 어떻게 할 테냐?”
“ 그땐.....”
연우강은 무원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부르르!
무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무공으로 단련된 몸이고,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하지만 저런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는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 그 일에 관련된 놈은 어른, 아이 가리지 않을 겁니다. 씨를 말려버릴 겁니다.”
“ 무슨 힘으로 그들을 없앤단 말이냐?”
듣고 있던 창노가 물었다.
그 역시 무원과 다르지 않았다. 방금 연우강이 보여준 눈빛. 그것은 강한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흉내낼 수 있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 무공이 만능이라는 생각은 버리시오. 영감. 황실의 힘은 영감이 생각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강하오.”
“ 황실의 힘을 이용할 참이더냐?”
“ 난 마음만 먹으면 군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금의위로 들어갈 수도 있고, 거세를 하고 동창으로 들어갈 수도 있소이다. 어디가 됐든 들어가기만 하면 십 년 안에 대야벌은 풀뿌리 하나 남기지 않을자신이 있소이다.”
“무인을 우습게 보지 마라, 연우강.”
“ 날 우습게 보지 마시오, 영감.”
“ 첨목장군 양성일을 이용할 참이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자 무원이 끼어들었다.
“ 친한 척 해두면 요긴할 때 써먹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불어 개독새란 별명을 지어준 자들은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었습니다. 저 정도 군인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르신.”
“ 똥지게를 스스럼없이 지는 너라면 가능하겠지.”
녀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자식이 아니라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연우강은 금릉 연씨 세가의 장남이다. 그런 녀석이 인생 막장들의 집합소라는 흑랑기에 들어가 오 년을 근무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똥지게를 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해낸다. 더불어 제 녀석의 말처럼 동창에 들어가야만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면 거세도 기꺼이 할 놈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자는 강한 무공을 지닌 자가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을 함께 죽어도 상관없다는 동귀어진의 삶을 살아가는 자, 그러면서도 살아남는 자, 그런 자가 가장 무섭다. 바로 연우강이 그런 자였다.
“ 그보다 비고의 정보는 왜 원하는 거냐?”
무원은 화제를 돌렸다.
강요해서 될 일도 아니거니와,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터였다. 세상이 녀석을 제 살고 싶은 대로 살게 두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했으면 두고 보면 될 일이다.
“ 잠룡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일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어르신.”
얼굴을 푼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 그 정보를 이용해서 한밑천 잡아보겠다는 말이냐?”
“ 녀석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승천비고나 천무비고에서 얻고 싶은 무공을 정해놓고 왔을 겁니다. 하지만 수만권의 비급을 찾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놈들에게는 시간이 한정돼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는 겁니다.”
“ 나쁜 놈! 그 머리로 무공을 익히면 천하제일이 아니라 고금제일이 되겠구먼.”
무원은 혀를 찼다.
창노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당당함과, 백오십 근에 달하는 궤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고 다니는 강인한 체력, 그리고 소름끼칠 정도로 빠른 머리 회전.
저 정도면 가히 천상 무골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무공에 뜻을 둔다면 최고의 무인으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는데 본인이 극구 싫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 가능하겠습니까?”
“ 그건 불가능하다. 다만 어떤 무공을 원하는지, 그것만 알아온다면 위치를 알려줄 수는 있다.”
“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흑철마신의 완성은 언제쯤 볼 수 있느냐?”
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 협조가 잘 되면 금세 끝날 겁니다.”
“ 무슨 협조 말이냐?”
“ 제가 잠룡들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무공을 알아올 때마다 그 비급이 있는 위치가 즉각적으로 나오는 협조를 말하는 겁니다. 어르신.”
“ 치사한 자식.”
무원은 연우강을 향해 인상을 북 긁고는 몸을 돌렸다. 곧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 심부름은 두연화에게 시키면 될 것 같고, 이제 돈을 버는 것만 남았네.”
연우강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직 목욕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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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 서열 구십 구위에 불과하지만 추소백은 추격술만큼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한다.
무성을 떠났던 그가 다시 풍곡으로 돌아온 것은 얼마 전 발견된 묵사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묵사는 무영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존신물.
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일 때문에 무성에 들렀다가 이번에 살해당한 조일백과 고우불이 무영이란 사실과 더불어 서열 백 위였던 풍마도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암기에 당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삼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죽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게 무림의 불문율이다.
추소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대 묵사 주선엽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는 폐허로 변한 무성을 나와 곧바로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절벽이 보이는 곳에서 바닥에 떨어진 혈흔을 발견했다. 풍천마인들을 비롯한 품아가 죽은 장소가 분명했다.
혈흔을 살피는 그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변했다.
추소백의 비밀 중의 하나인 만리투안이었다. 만리투안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흔적까지 발견해 낼 수 있는 무공이었다.
투명하게 변한 추소백의 눈에 발자국이 잡혔다. 발자국은 무성으로 걸어가는 형태로 찍혀 있었다.
그는 발자국을 되짚어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절벽 아래에서 추소백은 부서진 나무와 시체를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 위에서 떨어졌단 말이네.”
추소백은 절벽 위로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