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출현, 백옥수!
추소백은 만리투안을 펼쳐 군행철 일행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 갔다. 그가 군행철 일행에게 생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건 한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풍곡 아래로 떨어진 시체는 정확하게 오십두 구였다.
옥사장 유일천에게 확인을 했기 때문에 그 숫자는 틀리지 않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는 연우강이다. 가장 먼저 연우강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무공을 모른다고 알려졌으니 설사 사고를 친다고 해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추소백이 연우강을 의심했던 건 바로 그 점이었다.
범죄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조건을 가진 자, 지금껏 경험에 의하면 그런 자들이 대부분 범인이었다.
문제는 연우강이 무공을 익혔는지 여부를 여러 사람이 확인했다는 데에 있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추소백이 할 수 있는 일은 은밀하게조사를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 오늘이면 밝혀지겠지.”
흔적은 계곡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추소백은 복면을 꺼내 쓴 다음 흔적을 더듬어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 응?”
계곡 끝에 멈춰 선 추소백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절벽 바로 아래쪽에서 이편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는 추혼사수가 아니라 연우강이었다. 추소백이 연우강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옷에 발라져 있는 야명주 가루 때문이었다.
‘ 녀석들은 다른 곳으로 갔나?’
추소백은 의아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며 절벽 근처로 다가갔다. 군행철 일행이 자리에 없다고 해도 연우강이 있으니 굳이 문제가 될 상황은 아니었다.
“ 험!”
연우강과 일 장 거리를 둔 그는 낮게 기침을 했다.
“ 어?”
연우강은 깜짝 놀란 듯한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너 혼자더냐?”
“ 추혼사수를 찾는 거라면 제대로 온 거 맞는데.”
“ 추혼사수.....”
복면 안쪽의 추소백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연우강을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누구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더불어 연우강 앞에서도 얼굴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만일 그들이 연우강을 쫓았다면 복면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우강이 추혼사수를 알고 있다면, 결론은 한가지 밖에 없다.
추소백은 조금 전 연우강이 앉아 있던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 네 생각이 맞을 거야. 추소백. 추혼사수는 얼음덩어리로 변해서 땅속에 묻혔어.”
연우강은 흙더미를 발로 꾹꾹 눌러 밟으며 말했다.
“ ......!”
추소백은 경악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자신의 이름마저 알고 있다면 놈은 추혼사수를 없애기 전,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까지 했다는 말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녀석이 무공을 익히기 시작한 건 이제 일 년.
그것도 내공심법을 통한 무공이 아니라 신법인 칠보귀둔필사만 익혔고, 외공인 흑철마신은 최근에 시작했다. 그런 자가 추혼사수를 제압하고 고문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 난 조용히 살고 싶어. 추소백. 무공을 익혀서 천하제일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어. 난 그저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돈만 있으면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나를 왜 자꾸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느냔 말이야, 자식아!”
파앗!
연우강의 신형이 빗살처럼 공간을 갈랐다.
“ 어림없다, 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신까지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추소백은 곧바로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음과 동사에 연우강을 향해 찔러넣었다. 검에 미친 자라는 별호답게 그의 검술은 대단했다.
부지불식간에 뽑은 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검 끝에 투명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검을 다루는 자들이 꿈에도 얻기를 원하는 검강이었다.
차앙!
“ 헛!”
추소백은 화들짝 놀랐다. 녀석은 적수공권이고 자신의 검에는 검강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맑은 쇳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더불어 검면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스며 들어와 몸 내부를 휘감고 돌아다녔다.
추소백은 급하게 뒤로 물러나 내기를 끌어올려 차가운 기운을 몰아냈다.
그러고는 검을 가슴 앞으로 세웠다.
“ 풍마를 죽인 사람이 너였더냐?”
추소백은 검에 내공을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 풍마가 누구지?”
연우강은 추소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풍곡으로 들어오지 않았단 말이냐?”
“ 그럼 그 일 때문에 날 쫓아다닌 거야?”
“ 세상을 속이고 있었구나.”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조금 전 검강이 실린 검을 막아내기에 혹시 녀석이 풍마를 없앤 범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녀석이었다.
“ 자식들. 지네들 능력이 부족해서 알아보지 못하면 상대방을 사기꾼으로 몰고, 지네들 능력으로 막지 못하면 전부 사공이야. 하여간 너희들은 남 탓하는 덴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야.”
“ 건방진 놈. 날 풍마와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추소백은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리며 가슴 앞에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앞으로 내민 그의 검 끝이 작은 원을 그려대기 시작하였고, 검 끝이 그려낸 원은 연우강을 향해 밀려갔다.
“ 철검광자란 별호는, 허언이 아니란 말인가?”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양손을 번갈아 쳐냈다.
백옥수를 극한으로 끌어올리지 않아서인지 그의 양손은 약간 희게 보일 뿐 그다지 위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백옥수는 강했다.
창! 창창창! 창창!
그의 양손이 움직일 때마다 맑은 쇳소리가 흘러나오며 추소백이 검 끝으로 만들어낸 둥근 고리가 소멸됐다.
“ 차앗!”
별것 아닌 것처럼 자신의 공세를 막아내자 자존심이 상한 듯 추소백의 기합이 커졌다. 그는 전 내력을 검에 실어 세 개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삼환살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추소백의 절기였다.
삼환살은 강기를 분리해 쏘아내는 탄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그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무공이다. 검기와 강기의 중간 형태이긴 하지만 그 위력은 강기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다. 세 개의 고리는 빠른 속도로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상단 중단 하단을 각각 노리고 있는 그것들은 마치 세 자루의 검이 동시에 짓쳐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파앗!
연우강의 신형이 허공이 솟구쳐 올랐다.
“ 기다렸다, 놈!”
연우강이 허공으로 솟구치자마자 추소백 또한 검과 하나가 돼 몸을 날렸다. 사실 삼환살은 연우강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하려는 허초에 불과했고, 실제 그의 공격은 이변이었다. 신검합일이 돼 나아가는 추소백의 검 끝에서 투명한 기운이 한 자 가량 솟아 나왔다.
한 자 길이의 검강.
추소백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빛살처럼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가는 추소백의 눈에 차가운 광채가 어렸다. 추소백은 연우가이 아무리 강해도 삼 갑자의 공력은 지니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삼 갑자의 공력을 지니지 못하면 허공답보의 신법을 펼칠 수가 없고, 허공으로 올라가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기껏 할 수 있는 건 허리를 젖히거나 몸을 트는 게 전부인데, 그럴 경우에 대한 대비도 이미 해두었다.
허리를 뒤로 젖히거나 앞으로 숙이면 찔러가던 검의 방향을 바꿔 내리그으면 되고, 몸을 모로 틀면 횡으로 그어버리면 끝난다.
그게 아니라면 놈의 심장으로 철검 끝이 파고들어 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 쿡!”
추소백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흑철마신을 믿고 모험을 하려는 듯 몸을 숙이거나 젖히지도 않고 모로 틀지도 않았다.
“ 흑철마신 정도....”
추소백은 검을 힘껏 밀어넣었다.
검은 생각보다 쉽게 들어갔다. 그러나 추소백의 검은 연우강의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그의 검은 연우강 앞에서 방향을 틀어 허공을 찌르고 만 것이었다.
턱!
추소백 또한 허공답보 신법을 펼치지 못한 상태라 허공에서 나아가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연우강에게 철썩 달라붙었다.
추소백은 멍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놈의 심장을 향해 찔러가던 검이 방향을 틀 수가 있는디
놈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호신강기를 익힌 것도 아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 전에 그놈에게도 있던데, 너도 둥근 패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연우강의 왼손이 추소백의 가슴을 빠르게 더듬었다.
“ 너도 있네.”
가슴 아래쪽에서 둥근 패가 잡히자 옷과 함께 그대로 뜯어냈다. 바로 그 순간 추소백은 검을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물론이고 오른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번쩍!
문득 번개처럼 뭔가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 서, 설마 마라천.....”
퍼억!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연우강의 오른손이 추소백의 심장을 쳐냈다.
“ 커억!”
추소백은 피를 토해내며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쩌엉!
“ 배, 백옥수란 말이냐?”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도 잊고 추소백은 고함을 내질렀다. 조금 전 보았던 새하얀 소수, 그리고 급격하게 얼어 가는 그의 몸. 그것은 소수마공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백옥수였다. 천마삼경에 실린 무공.
“ 어떻게......?”
죽어 가는 와중이지만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백옥수는 극한의 빙공이고 호신강기를 파괴하는 무공이지만 여자만 익힐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무공을 연우강이 시전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백옥수를 익힐 수 있는 자들은 두 부류가 있어. 여자는 무조건 익힐 수 있고, 남자도 익힐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건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하면 돼. 대야벌 부인들 중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추소백의 몸이 추락하지 않도록 잡으면서 무성패를 확인했다.
무성패는 구십구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 무성 구십구 호인 모양이지?”
오른손에 내력을 주입하여 무성패를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추소백의 몸은 급격하게 얼음덩어리로 변해갔다.
“ 무서운....”
입이 얼어붙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추소백의 눈이 감기는 순간 그의 전신에 허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 그리고 천마삼경 상의 무공이 나타나면 대야벌이 뒤숭숭해지고, 그럼 호위 대금이 오를 수밖에 없거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분뇨 집하장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날려가는 연우강 뒤에는 얼음덩어리로 변한 추소백의 시체가 허공에 뜬 채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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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삼경이 나타났다!’
‘ 구중련 제팔영주 철검광자 추소백이 천마삼경 상의 무공인 백옥수에 당해 얼음덩어리로 부서졌다!’
이른 새벽,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대야벌 전역을 강타했다. 무려 일갑자 만에 나타난 천마의 무공은 천상천 벌주 처소에 불이 켜지게 하였고, 율령궁의 궁주 우담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천상천으로 몸을 날려야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자마자 율령궁 산하 모든 사자들에게 여타 임무를 중단하고 천마삼경에 대한 조사를 사직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율령궁은 율령궁대로, 직접적인 피해자인 구중련은 구중련대로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범인 색출에 나섰고, 흉흉한 기운이 대야벌 전역에 감돌았다.
질겁한 자들은 비단 대야벌 수뇌들뿐만이 아니었다.
덜컹!
저녁 무렵, 일을 끝내고 온 막장은 지하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뛰어들어갔다.
“ 연우강!”
막장은 들어서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 웬 호들갑이냐?”
돈 계산을 하고 있던 연우강은 막장을 보았다.
“ 소, 소문 들었냐?”
얼마나 놀랐는지 막장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무슨 소문?”
“ 배, 백옥수가 나타났다는 소문 말이다.”
막장은 뛰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연우강으로부터 천마삼경의 비급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백옥수란 무공이 나타나는 바람에 대야벌 전역에 비상이 걸렸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대충 마무리를 짓고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 네가 그런 거야?”
연우강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 무, 무슨 소리야, 자식아. 난.....”
막장은 재빨리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 익히지도 못했는데 누굴 죽여, 인마.”
“ 그런데 왜 똥마려운 강아지 꼴인데?”
“ 그, 그건, 자식아.”
“ 필사했던 건 없앴나?”
“ 전부 암기하고 태워버렸다.”
“ 그럼 됐잖아.”
“ 진본은 네게 있잖아.”
“ 내게도 일부밖에 없어.”
“ 일부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 무공하고 상관없는 부분이 뒤쪽에 기록돼 있거든. 그것들 하고, 흑경과 혈경의 중요 부분을 떼어냈지.”
“ 그럼 완전한 건 백경뿐이라는 거냐?”
“ 흑경하고 혈경은 막장 네가 익혔는데 그것까지 줄 수는 없잖아. 그래서 두 권은 아예 병신을 만들어서 줘 버렸다.”
“ 누굴 줬는데?”
“ 일단 앉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강은 화덕 위에 올려두었던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물을 따랐다.
막장은 초조한 얼굴로 연우강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이건 궁금해서 그런 건데 대답 좀 해줄래?”
“ 뭔데?”
“ 만일 막장 너에게 엄청난 비급이 우연히 굴러들어 왔어. 그런데 그 비급은 상부에서 익히는 걸 금지시킨 무공이고, 혹시라도 익히게 되면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목이 잘리게 돼. 그럴 경우엔 넌 어떻게 할래?”
“ 그걸 몰래 익힐지 말지 그걸 묻는 거냐?”
“ 응! 그 엄청난 비급이 천마삼경이라고 가정해 봐.”
“ 당연히 익히지 인마. 비밀로 하면 되는데...... 너?”
막장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문득 얼마 전에 녀석에게 전해주었던 생사림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고, 조금만 신경 쓰면 녀석도 알 만한 것들밖에 없었다.
“ 쉿! 침묵은 금이야. 막장. 똥지게는 똥만 열심히 푸면 돼. 다른 건 신경 쓰지 마.”
연우강은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부르르!
막장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전에 연우강이 십뢰를 가지고 담대무궁과 윤허를 상대로 생사결을 벌이던 광경이 느닷없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녀석은 생사림을 상대로 생사결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 가지는 여전히 머릿속에 남았다.
누가 백옥수를 펼쳤냐 하는 것이엇다.
하지만 막장은 묻지 않았다. 지금은 백옥수를 누가 펼쳤느냐는 논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 이번에 주역은 내가 아냐, 막장. 난 자리만 깔아줬을 뿐이야. 이번 일은 주인공은 군자무림행 우담보, 생사림의 림주 마수귀의 유명계, 그리고 구중련의 련주 철혈매화검 적환규 세 사람이야. 그들이 생사결을 벌이게 돼. 방금도 말했지만 우린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
우담보는 미칠 지경이었다.
추소백이 죽은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하지만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 단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황공망 조일백과 황룡대협 고우불 사건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추소백에 대한 것마저 지지부진하자 벌주를 뵐 낯이 없었다.
당연 원주들을 닦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 도대체 수사를 하는 건가 마는 건가? 추소백이 죽은 지 열흘이나 지났단 말이네.”
군자무림행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우담보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자 각 원주들은 자라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잔뜩 움츠린 채로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말이 없었다.
“ 유선, 말해 보게.”
결국 보다못한 우담보가 천안원 언주 음양뇌 유선을 지목했다.
“ 모든 정보력을 동원하여 여자 고수를 조사했습니다. 궁주님. 하지만 대야벌 서열 팔십오 위에 올라 있는 추소백을 해할 만한 무인은 없었습니다.”
그가 조사 대상을 여자 무인으로 한정한 이유는 백옥수를 익힐 수 있는 무인은 여자들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 허허!”
“ 혁 궁주께서 오셨습니다. 궁주님.”
그때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잠시 쉬세.”
우담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섰다. 손님을 접대하는 접견실에는 혁세군과 범일승이 앉아 있었다.
“ 어쩐 일이시오?”
기분이 언짢은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듯 우담보의 입에서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허허! 우리 군자무림행께서 심기가 몹시 불편한 것 같소이다. 그려.”
혁세군은 웃으며 시비가 따라놓은 차를 마셨다.
“ 끄응! 혁 궁주도 내 기분 돼 보시오. 요즘 사는 게 사는 것 같지도 않소이다.”
“ 내가 정보를 하나 주러 왔소이다.”
“ 좋은 정보라도 있소?”
다른 때 같았으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판이었다. 우담보는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혁세군을 보았다.
“ 우연히 알게 됐는데, 남자도 백옥수를 익힐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오.”
“ 무슨 소리요?”
우담보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까지는 여자 고수만 용의선상에 두었고, 추소백 또한 상당한 고수였던 터라 범위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자 무인까지 용의선상에 둔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운신의 폭이 커질 터였다.
“ 선천지기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운 아니오.”
“ 그러니까 선천지기를 익힌 무인이라면?”
“ 십이 성 대성은 힘들겠지만 백옥수를 익힐 수는 있소이다. ”
“ 빌어먹을! 다음에 봅시다.”
우담보는 욕설을 뱉어내며 회의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 선천지기, 선천지기를 익히고 있는 무인을 전부 뽑아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우담보는 원주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알겠습니다.”
원주들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갔다.
우담보가 결과를 받은 건 그로부터 하루 뒤였다.
하지만 이번 조사 역시 허탕에 가까웠다. 선천지기를 연마한 고수들의 명단을 뽑아오긴 했지만 대야벌 내에서 활동하는 고수는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었다.
“ 또 헛물만 켠 건가?”
우담보는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선천지기를 익힌 무인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희박하긴 하지만 대신 그런 무인이 있기만 하면 바로 범인으로 지목할 수가 있다.
그런데 대야벌에는 단 한 명도 없다니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저기......”
“ 할 말이라도 있는가?”
천법원 원주 이사진이 말끝을 흐리자 우담보는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자칫 잘못하다간 모함했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조심스럽습니다. 궁주님.”
“ 이 원주, 우린 지금 찬밥 더운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네. 자칫 잘못하면 나를 비롯한 자네들 전부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가?”
우담보는 답답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 내공심법이 아니라도 선천지기를 연성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궁주님.”
“ 그게 뭔가?”
“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하여 내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선천지기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알고 있습니다.”
“ 여봐라!”
멍한 눈으로 이사진을 쳐다보던 우담보가 밖을 햐해 버럭 소리쳤다.
“ 부르셨습니까?”
“ 지금부터 비밀 회의를 할 것이다.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도록 하라!”
“ 존명!”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안으로 들어왔던 자는 부동자세를 취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 우담보의 집무실 주변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 여의선천신단을 보유하고 있는 자는 누군가?”
알면서도 묻는 말이었다.
이승걸이 죽었다고 했을 때 이미 생사림에서 여의선천신단 제조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었다.
하지만 이승걸의 죽음에 대해 야장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모른 척 넘어갔다.
“ 생사림입니다. 궁주님.”
림주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이사진은 생사림이라고만 대답했다.
“ 이승걸이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비법을 넘긴 이유는?”
“ 무원과 창노의 얼굴을 고쳐주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 이승걸이 먼저 생사림에 접근한 건가?”
“ 아닙니다.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을 얻은 사실을 이승걸에게 알린 쪽은 생사림입니다.”
“ 그럼 생사림에서는 여의선천신단이 꼭 필요한 이유가 있었단 말이 되는가?”
“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의선천신단은 이승걸이 만든 제조비법을 따라한다고 해도 성공확률은 이할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 그럼 그 이 할의 가능성을 위해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을 썼단 말이 되는구먼.”
“ 그렇습니다.”
“ 실패확률이 팔 할이나 되는데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을 썼다는 건, 여의선천신단이 반드시 제조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건가?”
우담보의 시선이 이번엔 유선에게로 향했다.
“ 이 할의 가능성에 보물 두 가지를 걸 정도면 그 전에 이미 천마삼경을 얻은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 그럼 추소백을 죽인 건?”
우담보는 다시 물었다.
“ 추소백은 추적의 달인입니다. 아마도 뭔가 낌새를 맡고 추적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 천마삼경은 세 가지 무공이 있네. 유 원주. 설사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하여 백옥수를 익혔다고 해도 세 무공 중 가장 성취가 낮을 수밖에 없네.”
“ 하지만 여자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고 알려져 있고,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추소백이 발견된 곳은 구중련 내부입니다. 즉 그가 구중련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은 불완전한 백옥수에 당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설처럼 완벽한 백옥수에 당했다면 그는 구중련의 담을 넘기도 전에 얼음 조각으로 부서졌을 것입니다.”
탁!
우담보는 활짝 웃으며 탁자를 내리쳤다.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머릿속이 환해졌다. 하지만 무턱대고 생사림 림주를 소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이 원주.”
우담보는 이사진을 보았다.
“ 하명하십시오. 궁주님.”
“ 최고의 정예를 뽑아 생사림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게.”
“ 바로 소환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그는 만오천 명의 부하를 거느린 생사림의 림주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당하는 수도 있네.”
“ 그럼?”
“ 우선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어야 하네.”
“ 그러다가 그가 천마삼경을 없애버리면......” “ 천마삼경은 함부로 없애지 못하네. 왜냐하면, 천마삼경은 단순한 무공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네.”
“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단 말입니까?”
“ 그렇다네. 하지만 각 벌의 수뇌 정도 되는 자들은 알고 있을 거네.”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 ......!”
유선을 비롯한 세 원주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궁주가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비밀이란 의미인 탓이었다.
“ 나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됐네. 벌주께 비밀을 지키겠다고 맹세를 했네. 서운하더라도 참게. 아무튼 그 이유 때문에라도 비급은 절대 없앨 수 없으니까 비급을 없앨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버리게. 가능하면 그를 초조하게 만들어서 먼저 손을 들고 나오도록 하게.”
“ 알겠습니다. 궁주님.”
세 사람은 우렁차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마삼경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선은 천마삼경을 회수하는 게 더 중요했다.
“ 이번 사건을 해결하면 황공망 조일백과 황룡대협 고우불의 죽음에 대한 사건도 저절로 해결될 거네.”
“ 그라고 보십니까?”
유선은 우담보를 보며 물었다.
“ 설사 그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 알겠습니다. 궁주님. 그럼.”
밖으로 나가는 세 사람의 얼굴은 한껏 밝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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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돈을 보았을 때 그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고, 거기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주운 돈이 많다면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술 한잔 사주면 그걸로 끝난다.
시장통에서 돈을 주워도 그럴 터인데 하물며 자기 집 화장실에서 보물을 주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구에게 말할 필요도 없이 그건 주운 사람 소유다.
“ 그 날 난 용꼬리를 잡는 꿈을 꾸었어.”
노인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코가 매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응취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자는 생사림의 림주 마수귀의 유명계였다. 유명계는 세 권의 비급을 주운 사실을 우연이 아니라 하늘이 복을 내린 거라고 확신했다.
용꼬리를 잡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나서 기분 좋게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을 보자 문득 전날의 일이 떠올랐다.
화장실 하나 푸는데 삼십 냥을 지불해야 한다는 총관의 보고를 받고 역정을 냈었다.
하지만 이미 공문으로 내려왔다는 말과 함께 이번부터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완전하게 작업을 시키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결제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천한 야장 놈들이라는 욕도 잊지 않았다.
그 일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일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그걸 보는 순간 꿈이 떠올랐어.”
분뇨 푸는 작업을 하는 도중에 떠오른 듯 두툼한 뭔가가 떠 있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가 간밤에 꾸었던 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장실에서 발견한 그것이 용꿈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자 지체 없이 허공섭물로 끌어당겼다.
용꿈은 정확했다.
끌어올린 그것은 물이 새들어가지 않도록 방수 처리가 돼 있었고, 입구는 초로 밀봉시켜 둔 것이었다.
상의를 벗어 그놈을 싼 다음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 훗!”
유명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다섯 겹으로 싸여진 그것 안에서 세권의 비급이 나왔다. 흑경, 백경, 혈경으로 불리는 천마삼경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연성이 금지된 무공?
발견하면 반드시 벌에 신고해야 할 무공?
그건 단체에 소속돼 있지도 않고, 금지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 강호에 해악이 될 소지가 있는 약자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자신은 만오천 명을 거느린 생사림의 림주고 대야벌 서열 십오 위에 오른 강자다. 누가 감히 자신에게 천마삼경에 나온 무공을 익혔다고 시비를 걸 것인가?
걱정보다는 오히려 천마삼경을 완벽하게 익히고 나면 대야벌 십대 고수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천에서 지위도 훨씬 높아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소한 이익에 불과할 뿐이다.
천마삼경의 진정한 가치는 무공이 아니라 세권의 비급 어딘가 들어 있다는 장보도에 있다.
마인들의 무덤. 정확하게는 지천 마인들의 무덤인 마총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장보도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을 노려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엄청난 행운을 벌이나 천에 내줄 수는 없었다. 전서체를 해독할 해설서를 은밀하게 구하여 곧바로 해독에 들어갔다.
그 소식을 듣게 된 건 해독에 들어간 지 오일 째 되던 날이었었다. 흑경의 앞부분 몇 장의 해석이 끝났는데 느닷없이 백옥수가 출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백옥수에 당한 자는 구중련 제팔영주 철검광자 추소백이라고 하였다. 더불어 며칠 후 추소백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는 추혼사수의 실종 소식도 들어왔다.
백옥수가 나타났다는 말에 처음엔 놀랐지만 이내 웃고 말았다. 백옥수가 들어 있는 백경이 자신에게 있는데 그 무공이 나타날 리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빙공을 백옥수로 착각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보름 후,
생사림 곳곳에서 감시의 눈길이 감지됐다.
당혹스러웠다.
천마삼경을 얻은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감시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 적환규 네놈의 농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문득 여의선천신단의 제조에 성공했을 때가 떠올랐다. 구중련 련주인 철혈매화검 적환규가 은밀하게 찾아와 제조비법을 알려주면 후사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구파일방이 모여 구성된 구중련의 무공은 선천지기를 바탕으로 펼치는 무공이 상당수가 있지만 연성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많은 영약을 개발하여, 소림은 대환단, 무당은 태청단, 화산파는 자소단, 개방은 용신단 등을 제조해냈지만 선천지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 여의선천신단은 꿈의 성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일 여의선천신단이 이론상으로만 연단 가능한 신단이 아니었다면 이승걸의 처지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이론상의 신단을 연단해 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 나요, 림주.]
문득 그때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유명계는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 걱정 마시오. 주변엔 아무도 없소.]
[ 어쩐 일이시오?]
유명계는 전음으로 물었다.
[ 대야벌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천주께서 알아보고 오라고 하였소.]
[ 별일 아니오. 구중련의 련주 적환규가 여의선천신단 일로 인해 날 압박하려고 꾸민 일이오.]
[ 그게 다요?]
[ 그렇소.]
[ 알았소. 그렇게 보고하도록 하겠소.]
[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급적이면 당분간 이곳 출입을 금해줬으면 좋겠소.]
[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오. 그럼 다음에 봅시다.]
허공에서 전음을 보내왔던 자의 기척이 실내에서 사라졌다. 유명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창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 난 누가 뭐래도 결백하다. 결백한 이상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초조해할 이유도 없다. 난 마수귀의 유명계고 천마삼경의 주인이다.”
주먹을 불끈 틀어쥔 유명계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흘러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