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31화 (31/232)

제9장. 제자를 키우시오.

지난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우담보와 적환규 그리고 유명계가 주인공이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우강이 침묵은 금이라고 했지만, 금을 얻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알고 싶었다.

결국 막장은 일을 나가는 길에 묻고 말았다.

“ 설명해 주라.”

“ 뭘?”

“ 그 세명이 왜 연우강 네 손바닥 위에서 노는 손오공들이 됐는지 그게 알고 싶다.”

“ 알면 다치는데?”

“ 나 지금 패왕수라천경을 연성하고 있다.”

“ 벌써 배를 맞춘 거야?”

“ 배를 맞춘다는 건 무슨 소리냐?”

막장은 뜨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 패왕수라천경은 패천림 지존 무공이잖아. 그런 걸 아무런 사이도 아닌 남자에게 준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준다고 하더라. 됐냐?”

“ 덮쳐.”

“ 뭐라고?”

“ 합방하라고, 인마.”

“ 합방?”

“ 넌 이제 서른일곱 살이다. 막장. 삼 년만 있으면 불혹이라 부르는 사십이라고.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장가들란 말이다.”

“ 두 소저가 몇 살인지 알아?”

“ 스물넷 아냐?”

“ 그럼 나하고 나이 차이는?”

“ 삼십칠에서 이십사를 빼면 열세 살이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 나이가 차이가 몇 살이었는지 알아?”

계산을 마친 연우강은 막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 몇 살인데?”

“ 스무 살 차이였다.”

“ 연금석 그분하고 이숙경 그분의 나이가 그렇게 차이가 많았어?”

“ 그분들 말고 친부모님을 말하는 거다.”

“ 친부모? 넌.....”

막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껏 녀석과 적지않은 세월을 함께했다. 하지만 녀석이 친부모 이야기를 꺼낸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친부모조차 모르는 업둥이라고 하였다.

“ 업둥이라고 했지 친부모를 모른다고 한 적은 없다.”

“ 부모님을 안다고?”

“ 내가 태어난 날이 어머니 제삿날이야.”

“ 그러면 널 낳고 하루 있다고 돌아가셨다는 말?”

“ 그런 셈이지. 여하튼 아버진 어머니보다 스무 살이 많았어.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똑똑한 자식을 낳았고.”

“ 스무 살이나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려면 보통 사내가 엄청난 신분이어야 하는데, 네 아버지도 한갈가하신 분이냐?”

“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 아버지 인생이 아니라 네 인생이 걸린 일이다.”

“ 그, 그러니까 열세 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 먹여 살릴 자신 없어?”

“ 열심히 하면 먹고 사는 거야, 뭐.”

“ 그건 어때?”

연우강이 막장의 아랫도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 이거 뭐?”

“ 이것 말이야, 자식아. 이놈은 부부생활을 하는데 문제없냐고.”

연우강은 막장의 아랫도리를 톡 치며 소리쳤다.

“ 자식아! 내가 내시냐?”

“ 그럼 완벽하네 뭐. 너도 벌고 형수씨도 벌고 있으니까 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문제는....”

연우강은 막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 왜?”

“ 너... 여자 생각을 하긴 하냐?”

“ 어떤 생각을 말하는 건데?”

“ 왜 그런 것 있잖아. 여자 알몸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본다든가 하는 것 말야.”

“ 사실 나도 그게 걱정이야.”

“ 왜?”

“ 머릿속에 무공밖에 없어. 두 소저를 떠오렬 보려고 해도 금세 무공 구결이 두 소저의 얼굴을 지워버려.”

“ 그럼 알몸을 떠올려 봐. 전에 다 봤잖아.”

“ 그래도 마찬가지야.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고 어느새 무공 구결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 그거 병이다, 막장.”

“ 정말 병일까?”

“ 나랑 같이 보약 먹자.”

“ 보약?”

“ 응! 아무래도 넌 몸이 아니라 정신이 허한 것 같다. 일단 여의전에 가서 진맥을 받아보고 처방을 받도록 하자.”

“ 약 먹으면 좋아질까?”

“ 안 나으면 나을 때까지 주구장창 먹어주면 돼. 약에 대해선 내가 도사니까 내게 맡겨. 난 원호로 갈 건데 넌 어디지?”

“ 아직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잖아.”

“ 무슨 질문?”

“ 네 손바닥 위에 있는 손오공 세 마리에 대해서 물었잖아, 자식아.”

“ 아, 그 이야기 하다가 샛길로 빠졌구나. 별 것 아냐.”

“ 이야기 해 봐라.”

“ 여의선천신단은 선천지기에 가까운 신단이고, 생사림에서는 얼마 전 그 신단을 연단했다는 건 너도 알지?”

“ 그걸 연단해 내지 못했다면 이승걸을 죽일 이유가 없었겠지.”

“ 약사 영감이 살해됐다는 사실은 율령궁 궁주 우담보뿐만 아니라 삼궐칠련십림의 수뇌들 대부분은 알고 있다고 보는 데, 네 생각은?”

“ 그 생각엔 나도 동의한다. 여의선천신단이 이번 일과 관계 있는 거냐?”

“ 내가 전에 그랬잖아.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하면 백옥수까지도 익힐 수 있다고.”

“ 그럼?”

“ 유명계는 그가 여의선천신단을 복용했든 하지 않았든 일단 백옥수를 무리 없이 익힐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자가 되는 거야. 물론 남자니까 여자처럼 대성은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 즉 백옥수에 당한다고 해도 상대에 따라서 도망칠 여력이 충분하다는 말이야.”

“ 조,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 여기서 중요한 게 그 도망칠 여력이 있는 자란 말이거든. 철검광자 그놈은 대야벌 서열 팔십오 위의 강자이면서도 추적의 달인이잖아. 그런 그가 천마삼경의 백경 무공인 백옥수에 죽임을 당한 거야. 문제는 추소백이 자신이 뭔가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거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은밀하게 추적하고 있는 게 뭐였을까?”

“ 그게 천마삼경이었다고?”

“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 약사 영감이 죽고 난 다음에 구중련의 적환규가 은밀하게 유명계를 만난 적이 있어, 왜 만났을 거라 생각해?”

“ 여의선천신단을 만드는 비법을 알고 싶어서?”

“ 구중련은 구파일방이 모여 만든 단체고, 구파일방은 선천기공을 많이 보유한 단체잖아. 더불어 선천기공은 일반 무공보다 훨씬 강하고.”

“ 일리가 있네.”

“ 그런데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다 말이야. 사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법을 줄 리가 없잖아.”

“ 그렇지.”

“ 결국 감정이 틀어질 수밖에 없을 테고 적환규는 기회다 싶어서 복수를 하려고 할 거라고. 추소백의 죽음은 그에게 복수할 기회를 제공한 거야.”

“ 허!”

막장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 하지만 그에겐 비급이... 어떻게 한 거냐?”

문득 며칠 전 비급을 전부 줘버렸다는 말이 떠올랐다.

“ 우리 똥지게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용했지. 림주 정도 되면 화장실은 식구들만 이용하잖아.”

“ 그럼 화장실에 던져놓았다는 말?”

“ 내가 처음 발견했을 때와 똑같이 해서 그놈이 사용하는 화장실에 던져 놓았어. 그럼 분뇨 작업을 하는 도중에 떠오른 것처럼 보일 테고, 놈은 횡재를 했다면 희희낙락할 거라고.”

“ 만일 그나 나처럼 태우거나 숨겨버리면?” “ 그래야 일이 제대로 풀려, 막장. 그놈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비급을 내놓고 자수를 해버리면 재미없어진다고.”

“ 무슨 소리냐?”

“ 이것 때문이지.”

연우강은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흔들었다.

“ 그걸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 생사림 림주 그놈은 죽어도 그런 일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 거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할 거란 말이야. 어쩌면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너도 생각해 봐라. 비급을 얻긴 했지만 그건 천오백 년 전에 씌어진 글이라 해독이 쉽지 않잖아. 그렇다고 천마삼경을 아무에게 내보이면서 해독해 오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마 혼자 끙끙 앓으면서 고어를 공부해 가며 해독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하면 얼마나 억울하겠냐?”

“ 정말로 전쟁이, 아니 벌내쟁투가 벌어지겠구나.”

“ 벌내쟁투는 또 뭐냐?”

“ 대야벌에 속한 세력끼리의 전쟁을 말한다.”

“ 그런 것도 있냐?”

“ 왜 벌내쟁투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삼십 년 전에 낭인림이 다른 세력의 공격으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멸문했다고 들었다.”

“ 낭인림이면 전대 벌주인 장만보 벌주를 배출한 곳이잖아.”

“ 그렇지.”

“ 대야벌은 여러모로 재미있는 곳이네. 아무튼 유명계 그 놈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 수밖에 없어. 자수라는 것도 때가 있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하고 싶어도 못 하거든. 결국 그놈은 식솔을 데리고 대야벌에서 나가겠다고 협박을 할 거라고, 그때 이걸 슬쩍 생사림 림주가 혼자만 가는 장소에 흘려놓는 거야. 그럼 바로....”

연우강은 양피지로 자신의 목을 스윽 그었다.

“ ......!”

막장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생사림의 림주 유명계는 빠져나갈 구멍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설사 빠져나간다 해도 연우강이 갖다 놓겠다고 하였던 낱장, 그건 완벽한 증거가 돼 유명계의 목을 칠 것이다.

또다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추소백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린 백옥수다. 과연 그에게 백옥수를 펼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 너 혹시.....”

“ 침묵은 금이라는 말 명심해, 막장, 나, 간다.”

연우강은 손을 들며 휘적휘적 남쪽으로 걸어갔다.

“ 만일......”

문득 조금 전 연우강이 말했던 그의 친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부인을 얻고, 그 부인은 죽음 직전에 금릉 연씨 세가로 몸을 피했다.

결국 연씨 세가에서는 업둥이를 주은 게 아니라 연우강의 어머니로부터 연우강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연우강의 친부와 연씨 세가의 가주 연금석은 과거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백옥수를 펼친 사람이 연우강이었다면.

아니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더라도 연우강이 아니면 백옥수를 펼칠 사람이 없다.

“ 하지만 녀석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으로 뒤섞였다.

많은 무인들이 녀석의 몸을 확인했고,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녀석이 무공을 익힌 상태라면...

“ 젠장, 나도 모르겠다.”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터로 향했다.

‘ 추소백의 후임은 아닌 것 같은데.’

원호로 향하는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두 번째 꼬리가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추소백을 죽이고 난 며칠 후였다. 따르는 행색을 보면 추소백 일행과는 조금 달랐다. 추적의 달인이라고 하였던 추소백보다 더 신중하고 더 은밀했다.

그런 자들이라면 살수 부류밖에 없다.

‘ 누군가가 내 머리를 원한다는 말인데..... 놈이 움직일 때까지 두고 보는 수밖에.’

어느새 널따란 호수가 눈에 잡혀 들었다.

원호 주변에 세워진 정자에는 잠룡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잠룡들 또한 이번에 벌어진 백옥수 사건으로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는 듯했다.

“ 공포 분위기가 조성돼야 가격이 올라가니까.”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 저기, 연 공자.”

숲이 우거지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가고 있는데 오른편 숲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남궁 소저?”

연우강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궁운화는 울창한 나무 사이에 앉아 있었다. 연우강은 분관을 내려놓고 그녀 곁으로 갔다.

“ 추운데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는 남궁운화 곁으로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남궁운화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전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 선물 안에 들어 있던 책자....”

차마 비급이란 말을 하지 못하고 책자라고 애둘러 말했다.

그걸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겉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던 책자 안쪽에는 창궁대연신공에 대한 주해는 물론이고 남궁세가에 없는 초식까지 적혀 있었다. 다른 책자에 있던 천뢰제왕신공도 마찬가지였다.

주해를 비롯하여 새로운 초식이 적혀 있었다.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자신이 그런 엄청난 기연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주이면서도 가주 대접을 한 번도 받지 못하고 자라야 했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에게 창궁대연신공이 들어온 것이다.

더불어 비급에 실린 초식들은 실종되셨다는 할아버지가 아니면 절대로 적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우강을 기다린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 그건 천무비고에서 적어온 겁니다. 남궁 소저.”

“ 정말이에요?”

그녀는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 그렇습니다. 야장에 창노라는 영감이 있는데 그 영감이 숨어들어 가서 적어 온 겁니다. 그런데 다 익혔습니까?”

“ 무슨 수로 그걸 다 익혀요. 이제 간신히 암기를 끝냈는데.”

“ 그래가지고 남궁세가를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연우강은 엄한 얼굴로 나무랐다.

물론 지난 일 년 동안 남궁운하는 몰라보게 변했다.

몸매는 더욱 성숙해지고 풍기는 기운 또한 천양지차로 달라졌지만, 어린애처럼 보이는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다.

“ 여,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 내공은 어느 정돕니까?”

“ 일 갑자 정도는 되는데 실제 이용할 수 있는 건 사십 년 정도에요.”

그동안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하지만 무공에 자질이 없는지 늘어나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어 혼자 속을 끓이고 있는데, 연우강에게마저 꾸지람을 듣자 눈물이 핑 돌았다.

“ 남궁철상은 어느 정도인지 압니까?”

“ 일 갑자 반은 넘는 걸로 알고 있어요.”

“ 그랬군요.”

‘ 빌어먹을 영감탱이, 뻘짓 할 시간이 있으면 손녀딸이나 돌볼 것이지.’

만일 눈앞에 창노가 있었다면 제대로 한 방 먹였을 것이다.

“ 난 무공에 자질이 없나봐요.”

“ 조급해서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급하게 익히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차분하게 생각하세요. 남궁 소저는 이제 열여덟 살입니다. 열여덟 살에 남궁 소저만큼 강자는 이곳 대야벌은 물론이고 중원에 없습니다. 이건 내 전 재산을 걸고 내기해도 좋습니다.”

“ 정말 그럴까요?”

침울했던 남궁운화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 이걸 하나 가지고 있으면 더욱 힘이 날 겁니다.”

“ 뭐죠?”

“ 내가 열다섯 살 때 군에 갔다는 말을 했던가요?”

“ 연 공자가 직접 말한 적은 없고, 듣기만 했어요.”

“ 그때부터 가지고 다니던 부적입니다. 아마 부적이 없었더라면 난 사막에서 죽었을 겁니다.”

“ 전에 샀던 것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부적을 받아든 남궁운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 이천 냥이면 거저 드리는 겁니다.”

“ 이게 이천 냥이라고요?”

남궁운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저번에 산 천 냥짜리 부적도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그 두 배인 이천 냥이란다. 아니 군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행운의 부적이라고 하기에 공짜로 주는 줄 알았다.

“ 이런 것들은 반드시 돈을 주고 사야 효험이 있습니다. 공짜로 얻게 되면 효험이 날아가 버린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남궁소저가 비급 두 권을 얻은 건 전에 샀던 부적의 덕을 본 겁니다.”

“ 그렇긴 한데... 연 공자도 알겠지만 저는 돈이 없잖아요.”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외상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연우강은 품속에서 장부를 꺼내 보여 주었다.

“ 철저하시네요.”

남궁운화는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이 연우강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공사는 분명하게 구분하고,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양보란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호위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 호위요?”

“ 암살대전이 벌써 시작됐습니다. 남궁 소저.”

“ 하지만 난......”

교육생들 중에서 별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고, 더구나 함께 들어온 대원들이 있으니까 이차 잠룡대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 남궁철상이, 아니 남궁세가 있는 노친네들이 청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습니까?”

“ 그들이 그런 짓까지 할 거라고 보세요?”

“ 권력은 피도 눈물도 혈육도 없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요.”

“ 그렇군요. 어떤 무인들이 있죠?”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검탄의 경지에 오른 자들입니다.”

“ 검탄의 경지에 오른 자들이 호위무사를 한다는 걸 믿으란 말이에요?”

“ 떽!”

연우강은 남궁운화를 쳐다보며 버럭 소리쳤다.

“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남궁운화는 움찔했다.

“ 내가 지금까지 속인 적 있습니까?”

“ 속인 적은 없지만, 검탄강기를 구사하는 무인들이 호위 무사를 한다는 게 선뜻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죠.”

남궁운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검탄강기를 구사하는 무인은 검을 다루는 남궁세가에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 검의 최고봉이라는 이기어검술 바로 아래 단계가 검탄강기 아니었던가.

그녀로서는 당연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세 명에 삼십만 냥입니다.”

“ 삼십만 냥은 너무 비싸요. 연 공자.”

“ 비싼 게 아닙니다, 남궁 소저.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밀착 호위를 해줌은 물론이고, 때로는 검술 사부 역할도 해줄 수 있습니다. 삼궐칠련십림의 무인들 중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자들이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삼십만 냥은 공짜나 다름 없습니다.”

연우강은 공짜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 정말로 검술 사부 노릇도 해줘요?”

귀가 확 트이는 말이었다. 물론 교관들이 강의를 하긴 하지만 일 년의 기초 과정이 끝났으니 지금부터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좋은 건 없을 터였다.

“ 물론 약간의 추가 비용이 들어가야 하겠지만, 그 정도 무인을 호위로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봐야겠죠.”

“ 추가 비용은 어느 정도나....”

“ 이십만은 생각해야 할 겁니다.”

“ 그럼 총 오십 만 냥이네요.”

“ 하시겠습니까?”

“ 그것도 외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 장부에 기입하고, 수결을 해주면 됩니다.”

연우강은 장부를 내밀었다.

“ 붓도 있어야 하고 먹도....”

“ 그 정도는 기본으로 준비해 다녀야죠.”

연우강은 분관을 열고 안에서 먹이 든 자기 병과 붓을 꺼내 내밀었다.

“ 나도 할 수 있어요?”

불쑥 허공이 열리더니 몽요의 얼굴이 나타났다.

조금 전 연우강의 외침을 듣고 이곳으로 왔다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었다.

“ 물론입니다. 몽요. 잠룡 열 명까지는 호위가 가능합니다.”

“ 손님을 몰아다 주면 좀 더 싸게 할 수 있나요?”

“ 그건 안 됩니다. 몽요. 지금 내가 제시한 가격은 삼궐칠련십림에서 제시하는 금액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이하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 근데, 믿을 수 있어요?”

“ 날 말입니까, 아니면 호위를 말하는 겁니까?”

“ 연 공자는 절대저으로 신뢰를 하지만 호위들은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겠는데요?”

“ 그럼 계약을 파기해 드림은 물론이고 두 배로 보상해 드립니다.”

“ 두 배라고요?”

“ 물론입니다. 몽요.”

“ 이지약 소저도 할까요?”

오직 이지약만을 경쟁자로 생각하는 듯 몽요의 머릿속엔 조금 전 함께 있었던 이지약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난 계약할 거예요, 몽요.”

왼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지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연우강의 목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 나도 계약하죠.”

이지약에 이어 약간은 싸늘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나타났다.

“ 어?”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푸른 눈에 이국적인 미녀는 다름아닌 북해빙궁 출신의 빙마후 수여설이었던 것이다.

“ 나도 하겠소.”

“ 나도 하겠소.”

“ 나도.....”

곧이어 다섯 명이 수여설의 뒤를 이었다.

그들은 신검세가의 장자 유성비검 신도영, 섬서 마가의 낙일사검 마장웅, 만룡전가의 사자신권 사후린, 광동차가의 표풍마권 차남승, 만금종리가의 환비도 종리웅이었다.

신도영을 비롯한 다섯 명은 실력이 빼어난 자들이 아니었다. 아니 최하위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들이라, 해칠만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굳이 호위가 필요 없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십만 냥을 들여 호위를 고용하겠다고 한 것은 사부 역할을 해줄 수도 있다는 연우강의 말 때문이었다.

사실 다섯 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호위를 자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 허! 벌써 아홉 명을 채웠네.”

연우강은 분관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이들을 보았다.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내고 남궁운화의 계약서 작성이 끝나기도 전에 모집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원래는 열 명을 채우려고 했지만 남궁운화, 이지약, 수여설은 네 명씩은 붙여야 할 것 같았다.

“ 우린 정식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죠?”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던 수여설이 입을 열었다.

“ 그렇습니다. 수 소저. 전 연우강입니다.”

“ 전 수여설이에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북해빙궁 출신이고요. 그동안 연공자가 팔았던 물건은 잘 썼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 부탁이야 제가 드려야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 소저.”

연우강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 계약서 작성해야죠?”

“ 물론입니다. 수 소저. 각자 자기 무공의 특성도 함께 적어주십시오.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익히고 있는 무공과 비슷한 무공을 익힌 호위를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우강은 활짝 웃으며 분관 안에서 종이를 꺼내 각각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종이를 받은 일행은 남궁운화에게 붓과 먹이 든 자기병을 건네 받은 다음 분관 위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 연 공자는 이번 거래로 사배오십만 냥을 벌었네요.”

계약서를 작성하고 외상 장부까지 기입하고 난 몽요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찌 보면 돈에 미친 사람 같기도 했고, 또 달리 보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매번 겪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 호위하시는 분들이 돈을 버는 거죠. 제 몫은 별로 안 됩니다.”

“ 거짓말!”

“ 하하하! 그건 몽요 편할 대로 생각하십시오.”

연우강은 씨익 웃으며 계약서를 분관 안으로 집어넣었다.

“ 그러다가 돈을 못 받으면 어떻게 할 거죠?”

이번에 질문을 한 사람은 수여설이었다.

“ 누가 돈을 못 받는다는 겁니까?”

“ 받아낼 자신은 있어요?”

“ 흐흐흐! 이 연우강의 별명이 개독새입니다. 타클라마칸에서는 말입니다. 개독새가 떴다는 말만 나오면 기어다니는 전걸까지도 도망을 칩니다. 이 개독새의 돈을 떼먹는 방법은 없습니다. 계약서가 있고, 계약자가 고아가 아니면 계약 당사자가 죽어도 돈은 반드시 받아냅니다. 내 재산을 전부 걸고 내기를 해도 좋습니다.”

연우강은 키들키들 웃으며 분관을 걸머졌다.

“ 이왕이면 돈도 배달을 해주는 건 어때요?”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던 수여설이 말했다.

“ 돈 배달이라고요?”

“ 약간의 구전을 먹고 돈을 배달해 주는 것도 괜찮은 장상ㄹ 것 같은데요, 외상값도 받을 수 있고.”

“ 흐흐흐! 그건 안 됩니다. 수 소저.”

“ 왜죠?”

“ 그럼 지금 제가 팔고 있는 물건들까지 몽땅 배달해 달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럼 전 뭘 먹고 삽니까?”

“ 훗!”

수여설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러자 그녀 얼굴이 만개한 장미를 보는 것처럼 화려하게 피어났다.

수여설을 보고 있던 연우강은 깜짝 놀랐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수여설의 얼굴에서 이런 모습을 볼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호위 무사들의 조가 짜지는 대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연우강은 손을 흔들며 일행 곁에서 멀어졌다.

“ 어떤 사람이죠?”

수여설은 몽요를 보며 물었다.

“ 난 금와라고 부르고 있어요.”

“ 침을 뱉을 때마다 금이 툭툭 떨어진다는 전설의 금두꺼비?”

“ 그래요.”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어울리는 별명이네요. 흥미로운 사람이고요.”

“ 흥미?”

몽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수여설을 보았다.

잠룡들 사이에서 부르는 그녀의 별명은 만년 동안 얼어붙은 얼음덩어리라는 의미의 만년빙이다. 그런 그녀가 흥미롭다는 말을 하는 게 여간 생경하지 않았다.

“ 처음 사귀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나도 따뜻한 여자에요.”

“ ......!”

일행은 멍한 눈으로 수여설을 보았다.

사람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라고 하더니 수여설이 그랬다.

“ 그만 가죠.”

스스로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다는 듯 수여설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 여하튼 그 녀석만 만나고 나면 사람들이 다 이상해지는 것 같아.”

몽요는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툭!

“ 뭐냐?”

창노는 연우강이 내려놓은 책자를 보며 물었다.

“ 별것 아뇨. 내가 아는 여자아이가 있는데 말이오. 이제 열여덟 살이 됐소. 나이는 열여덟인데 십이월 말일에 태어나서 실제 나이는 열일곱 살로 보면 되오.”

“ 그런데?”

“ 그 계집아이는 한때 잘나갔던 가문의 가주요. 그런데 돈이 없는지 그동안 속옷부터 시작해서 여자면 반드시 필요한 세답조차도 전부 외상으로 구입했소. 그 외상값이 오만 냥이오.”

“ 가문에 돈이 없는 모양이구나.”

창노는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그런데 오늘 오십만 냥을 또 외상 장부에 기입을 하고 수결을 했소.”

“ 오십만 냥은 엄청난 거금인데 그 많은 돈으로 살 만한 게 있느냐?”

“ 호위무사요, 영감. 일 갑자 공력을 지녔지만 실제 운용 가능한 공력은 사십 년에 불과하다고 하오.”

“ 나이 열일곱에 사십 년 공력이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 물론 그렇소. 문제는 그녀 가문의 노인네들이 다른 놈을 밀고 있는데, 그놈의 공력은 일 갑자 반이라고 합디다. 지금껏 내게 사 간 물건의 합계가 십만 냥인데 전부 현금으로 계산을 했소.”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창노는 외상 장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런 그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 뭐 하고 싶은 말이 딱히 있는 게 아니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만일 내게 남는 내공이 있다면 기꺼이 그녀에게 퍼부어 줄 텐데 하는 생각이나, 내가 엄청난 무공 고수고 그다지 할 일이 없다면 그녀를 살짝 불러내서 무공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소. 사실 내가 오십 만 냥이라는 헐값에 호위 넷을 붙여줄 생각을 한 건 그녀가 불쌍해서요. 암살대전이 시작되면 그녀 가문에 있는 권력에 미친 노인네들은 청부를 해서라도 그녀를 없애려 들 것 같아서 말이오. 이제 열일곱 살 먹은 어린애가 헤쳐나가기엔 세상이 너무 더럽고 추잡한 것 같소이다. 영감.”

연우강은 창노 앞으로 던졌던 외상장부를 집어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나직한 노랫가락이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가문에 있는 늙은 놈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인면수심이 됐고, 가문을 떠난 늙은 놈은 제 욕심 차리느라 가족도 버리네.

에이 씨부랄! 엿 같은 세상.

돌보지 못할 거면 낳지를 말지.

제 살기 힘들다고 내버리면 도대체 난 어쩌란 말이냐.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라고?

에이 씨부랄! 개 같은 소리!

잘난 놈, 똑똑한 놈은 전부 왕자 공주 대접받고 자란 놈뿐이더라.

이놈은 이래서 안 되고, 저놈은 저래서 안 되고, 그놈은 그래서 안 된다고 하더라.

에이! 씨부랄!

무슨 핑계는 그렇게들 많은지.

푹!

창노의 손가락이 방바닥을 파고들어 갔다.

죄인이라서, 나타나면 오히려 해가 될까 봐, 운화가 약해질까 봐 일부러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녀석은 그게 잘못됐다고 말을 하고 있다.

비급 하나 달랑 던져주고, 손녀딸을 보살핀 것처럼 하고 있는 자신을 비웃고 있다.

“ 창제! 안으로 들어온 무원이 창노를 불렀다.

“ 저놈은 처음 들어왔을 때 제게 두들겨 맞은 것에 대해 이를 갈았던 모양입니다. 아주 멋지게 복수를 했습니다. 녀석은 제 심장에 못을 쑤셔 박았습니다. 형님. 남궁세가 가주가 오만 냥이 없어서 외상 거래를 하고 있답니다. 남구세가의 가주를 남궁세가에서 없애려고 하고 있답니다.”

남궁세가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강해지기 위해 겪는 고난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남궁세가에는 비가 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썩고 있었던 것이었다.

“ 자넨 최선을 다하고 있네. 창제.”

무원은 안타까운 얼굴로 창노를 보았다.

사실 그도 할 말이 없었다. 창노가 비급을 작성할 때 옆에서 도와주기도 했고, 가족을 위해 아직 할 일이 있는 그를 보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창노가 그렇게 생각했던 손녀딸은 이름만 가주였을 뿐, 오만 냥조차 지원받지 못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형님. 그래서 약간만 도와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이미 썩어서 환부를 도려내지 않으면 치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 그렇다고 해도 자네가 나서면 더 힘들어지네.”

“ 굳이 나서지 않아도 도와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녀석이 말한 것처럼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하는 삼 갑자의 내공이 있고, 아무도 모르게 무공을 가르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난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아이를 방치했습니다. 그놈의 대의 때문에 이 지경이 됐으면서 말입니다.”

“ 창제....”

“ 이제라도 시작해야겠습니다. 형님. 내공 전이해 주고, 생사현관을 뚫어, 교육이 끝났을 때 최고의 무인으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창노는 벌떡 일어났다.

무원은 밖으로 나가는 창노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그를 잡거나 말리지 못했다.

연우강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하였다. 제 가족조차 돌보지 못한 자가 대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천하에 뜻을 두면 십 년이면 족할 것을.... 에잉!”

무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잠룡을 상대로 수십 배의 폭리를 취하는 장사를 하면서도 녀석은 욕을 먹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잠룡들은 연우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그건 타고난 장사 수완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기술 때문이다. 정천호로 근무했던 경험 덕분에 녀석은 사람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런 능력에 무공만 받쳐준다면 금상첨화일 터인데, 도무지 그쪽엔 관심을 두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 끄응!”

무원은 신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그때 연우강은 처소에 도착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자들은 천옥에서 만났던 두작군과 적리세우였다. 환영축골공으로 얼굴과 체형을 바꾼 두 사람은 딴 사람이 돼 있었다.

“ 정말로 똥지게를 지는구나.”

분관을 지고 들어오는 연우강을 발견한 두작군은 활짝 웃었다. 이미 듣기는 했지만, 풍마를 비롯한 풍천마인을 한 방에 없애버린 녀석이 정말로 똥을 푸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 이게 생각보다 짭짭해, 영감. 칼을 들고 설치는 것보다 훨씬 건전하고 돈도 많이 벌어. 그래, 햇빛을 보니까 어때?”

분관을 내려놓은 연우강은 계약서 등을 챙겨들고 안으로 향하며 물었다.

“ 햇빛은 좋은데, 여기가 문제더구나.”

두작군은 자신의 배를 툭 쳤다.

“ 그 동네 개들은 씨가 말랐겠네?”

“ 흐흐흐, 어쩔 수 있느냐, 개라도 잡아 배를 채워야지.”

두작군은 싱긋 웃으며 연우강을 따라 들어왔다. 연우강은 찻잔을 두작군과 적리세우 앞으로 내밀었다.

“ 앞으로 어쩔 거요?”

“ 호위 건수가 있다고 하던데 아니냐?”

두작군은 찻잔을 잡아 입으로 가져가며 말을 받았다.

“ 인생 종칠 때까지 호위만 할 참이오?”

“ 네 녀석이 세상에 뜻을 둔다면 멋지게 꿈을 꿔볼 생각은 있지만 다른 놈 밑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다.”

두작군을 비롯한 천옥 죄수 서른 명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이나 적으면 새롭게 시작해 보겠지만, 서른 명 전부 환갑을 넘겼다. 더불어 죄수였으니 무공조차 마음대로 펼치지 못한다.

빌어먹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 속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연우강이 유일하고, 그가 뭔가를 하려 한다면 한번 투혼을 불살라 볼 참이었다.

“ 그래도 노후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오.”

“ 노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도 어떻게 안 되겠냐?”

“ 뭘 말이오?”

“ 일승 형님이나 천월 형님처럼 해주면 안 되겠냐는 거다.”

“ 그러니까 나보고 전부 고용해 달라는 거요?”

“ 넌 돈을 많이 벌잖아. 서른 명 정도를 고용하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 이 콧구멍만 한 집을 유지하기 위해 서른세 명을 고용하라고?”

“ 집이야 크게 지으면 되지 않느냐. 넌 돈만 대면 나머진 우리가 전부 알아서 하마.”

“ 영감, 난 똥지게요. 똥지게가 뭔지 모르쇼?”

“ 똥지게는 대궐 같은 집에서 살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능력만 있으면 대궐보다 더한 집에서도 살 수도 있는 거지.”

“ 그건 건전한 사고방식이긴 한데.....혹시 이런 말 아시오?”

“ 무슨 말 말이냐?”

“ 잘 키운 제자 한 명 열 자식 부럽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들어봤소?”

“ 우리더러 제자를 키우라는 말인가?”

듣고 있던 적리세우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영감들이 이번에 맡아야 할 잠룡들은 여자가 넷이고, 사내가 다섯이오. 여자는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운화, 응천부의 며느리인 소명공주 이지약, 북해빙궁의 수여설, 동영 은밀막부의 몽요, 남자는 신검세가의 신도영, 섬서마가의 마장웅, 만룡전가의 사후린, 광동차가의 차남승, 만금종리가의 종리웅잉오. 여자들은 남궁운화를 제외하면 초극 고수들이고 사내들은 고만고만하오. 그들을 호위할 기간이 일 년 반 정도니까, 그 안에 제자로 만들 수만 있다면 노후 생활은 보장되는 거 아니오.”

“ 그러니까 호위를 하면서 그들을 제자로 만들라는 말인가?”

“ 다 영감들 위해서요.”

“ 자네 돈벌이가 아니고 우릴 위해서라고?”

“ 삼십 년 동안 천옥에서 얻은 것도 많을 텐데, 죽을 때 그것들을 전부 싸들고 갈 필요 없지 않소. 최소한 이름 석자라도 남기려면 제자를 기르는 게 훨씬 낫지.”

“ 작군. 네 생각은 어떠냐?”

적리세우는 두작군을 보며 물었다.

“ 좋은 방법이긴 한데... 자꾸만 저 자식에게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찜찜해.”

두작군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매월 오십 냥씩 줄 테니까 호위 대금은 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일단 겪어보고 괜찮은 놈이다 싶으면 그대부터 제자 만드는 작업을 하면 될 것 아뇨?”

“ 얼마씩 받아먹은 거냐?”

“ 그건 영업 비밀이오. 영감. 나는 방법만 제시했을 뿐이오. 제자를 기르고 기르지 않고는 전적으로 영감들 선택이니까 알아서 하시오. 하지만 이런 기회도 흔하게 오는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할 거요.”

“ 수여설이라는 아이는 내가 맡겠네.”

그때 밖에서 수천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요리는 누가 하고?” 연우강은 밖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 재료가 좀 거지 같아서 그렇지 요린느 나보다 인효가 더 전문가네.”

“ 거지 같다는 건 무슨 뜻이오?”

“ 주로 독물을 요리 재료로 쓴다는 거네.”

“ 독물도 잘만 다루면 보약이 되니까 그건 상관없고, 하지만 영감 월급은 열 냥이오.”

“ 클클클! 알았네, 연공자.”

“ 좋다. 우리도 하겠다.”

수천월이 물꼬를 트자 두작군과 적리세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봇수는 말이오, 꼭 본인 손으로 목을 쳐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오. 영감. 그자들보다 더 멋진 제자를 길러내는 것도 복수를 하는 방법 중의 한 가지란 말이오.”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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