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삼뇌천자 나추웅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릴 때마다 노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따스한 햇빛을 마음껏 쬐고 싶어 모처럼 나온 산책을 몹쓸 구름이 훼방을 놓은 것이다.
방해하면 혼낸다는 듯한 눈초리로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던 노인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걸어가는 산책로에는 수백 년은 넘었을 법한 수령의 은행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매서운 겨울을 견뎌낸 은행나무들은 푸른 잎을 한껏 뽐냈다.
“ 추운 겨울을 이겨낸 녀석만이 푸른 잎을 자랑할 수 있는 거야. 암.”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은행나무를 쳐다보며 걷던 노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춰 선 곳에는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노인이 산책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는 곳인 듯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노인은 왼편을 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수백 년을 묵었을 법한 건물이 서 있었다. 그 건물의 입구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천무비고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있었다. 금박이 입혀진 편액에서는 화려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 쯧! 달지 말라니까, 유야!”
편액을 쳐다보던 노인은 안쪽을 향해 나직이 소리쳤다.
“ 지금 갑니다. 사부님.”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학창의를 걸친 중년인이 찻잔과 찻주전자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왔다.
“ 그동안 대접이 부실했던 모양이구나.”
찻물을 놓는 중년인을 보며 노인은 말했다.
“ 아닙니다. 사부님. 차는 종류별로 준비를 해두었고, 화로 위에 주전자를 놓아 언제든지 마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 그런데 오늘은 손님이 왜 없는 거냐?”
“ 천무비고를 개방했습니다.”
“ 천무비고는 두 발 후에 개방하는 거 아니었느냐?”
“ 이번엔 빨리 개방한 모양입니다. 아울러 승천비고의 삼층과 사층도 오늘부터 개방했습니다.”
“ 무슨 일이 있는 게냐?”
“ 벌내쟁투 때문인 듯합니다. 사부님.”
“ 벌내쟁투의 후유증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구나.”
“ 그런 것 같습니다. 천마삼경을 얻기 위해 외부로 나간 자들끼리 잦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고 심각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범천담대세가에서 당황한 듯 보입니다.”
“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암살대전을 앞당기면 각 세력은 지금 비축을 위해서도 벌 내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강호 무림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소강상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 어떻게 할 셈이냐?”
“ 암살대전의 장소를 대야벌 외부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 가능할 거라고 보느냐?”
“ 다른 분들도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하였습니다.”
“ 그렇구나. 그나저나 잠룡들은 이번 벌내쟁투를 어떻게 보고 있더냐?”
“ 잠룡대전이라는 쟁투를 거치고 들어온 녀석들이라 그런지 그다지 큰 충격은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생사림이라는 거대 단체가 무너지는 광경을 통해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강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곳이 대야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합니다.”
“ 그래서 천무비고로 몰려갔다는 말이구나.”
“ 천무비고에 있는 무공비급이 이곳에 있는 비급에 비해 더 강할 거라는 인식이 있고, 첫 개방이니까 호기심도 작용했을 겁니다.”
“ 그렇겠지.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 천무비고니까. 그나저나 정유가 고생이 많겠구나.”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 어쩌면 오랜만에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서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 그 녀석은 여전히 오지 않았느냐?”
“ 누구 말입니까?”
“ 검지곡 석상을 박살낸 그 녀석 말이다.”
“ 똥지게 연우강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오지 않았습니다. 만나보고 싶습니까?”
“ 아니다. 인연이란 일부러 만든다고 해서 이어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인위적으로 만들려다 보면 선연보다는 악연이 되기 십상이다.”
“ 그에게 만상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 정말이냐?”
“ 그렇습니다. 사부님.”
“ 신중하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일 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공명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잠룡들의 중심에 서 있다.”
“ 그 때문에 만상을 주려는 겁니다. 사부님.”
“ 나는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거다.”
“ 그에게도 손해나는 건 아닙니다. 무원이 원하는 불괴수호신공이 만상 안에 있습니다.”
“ 과유불급이란 말을 명심하거라.”
노인은 찻잔을 들고 일어났다.
“ 명심하고 있습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 안에서 마시고 싶구나.”
두 사람은 곧 천무비고 안으로 들어갔다.
“ 검지림보다 더 멋진 곳이네.”
연우강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천무비고로 향하는 길 입구에는 온통 은행나무 천지였다. 장정 몇 명이 둘러싸도 부족할 만큼 덩치 큰 은행나무들은 나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연우강이 보아도 수백 년 수령은 됐을 법했다.
“ 정력도 좋네. 자식들.”
은행나무 아래를 쳐다보던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수백 년은 넘었을 것 같은 은행나무 아래쪽에는 손가락 길이의 은행나무 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작년 가을 떨어진 은행들이 싹을 틔운 모양이었다.
“ 이런 곳에서 백수 짓을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여자가 없네.”
그렇게 주절대며 은행나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일 각 정도 걸어 올라가자 비로소 천무비고란 편액이 걸린 건물이 나왔다. 푸른색 기와를 얹은 천무비고에서는 고풍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천무비고 앞에 발을 디디자마자 곧바로 문을 열었다.
“ 젠장, 난 이놈의 먹물 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진한 묵향이 코를 자극하자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려왔던 것이다.
안쪽을 쳐다보던 연우강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햇빛이 비춰들고 있는 창가에 두 사람이 있다. 의자에 앉은 채 찻잔을 들고 있는 노인과 오십대 중반 쯤 돼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두 사람 중 연우강의 시선을 붙잡은 사람은 노인이었다. 연우강은 노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허옇게 센 머리칼, 턱을 가득 덮은 수염. 그리고 자글자글한 주름은 여느 노인네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편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는 조금 전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구름 사이로 보았던 하늘보다 더 깊었다.
“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후광이 어린 부처님 같습니다. 신유 영감.”
연우강은 두 사람 곁으로 걸어가며 말을 걸었다.
“ 나를 아느냐?”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지난 사 개월 동안 천무비고를 출입했던 잠룡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녀석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잠룡임에도 불구하고 천무비고에 처음 들어온다면, 조금 전 유가 언급했던 연우강밖에 없을 터였다.
“ 남의 집을 찾아갈 때는 집 주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가라고 하였소이다.”
“ 어는 정도나 알고 있느냐?”
“ 비고에는 만물의 기운마저도 살피는 능력을 지닌 여덟 요괴가 살고 있다고 하였소이다. 신유, 천유, 지유, 인유, 정유, 마유, 사유, 환유 라는 이름을 지닌 여덟 요괴를 일컬어 만기팔유라 부르는데, 그들의 수장은 신유라고 불리는 요괴라고 하더군요.”
“ 풋!”
듣고 있던 유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연우강의 말처럼 사부님을 비롯한 만기팔유 분들은 요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면전에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잠룡인 연우강으로부터 그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소문처럼 괴짜라는 말이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 요괴라고 부른단 말이냐?”
신유는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 태어난 지 백 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염라대왕이 데려가지 못한 존재는 요괴 말고는 없다고 알고 있소이다.”
“ 부러운 모양이구나.”
“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시오. 어디 부러워할 게 없어서 늙어 죽지도 못하는 요괴를 부러워한단 말이오. 저는 딱 남자구실을 할 때까지만 살다가 죽을 거외다.”
“ 클클클! 그놈 말을 재미있게 하는구나. 그런데 그건 뭐냐?”
신유는 연우강이 등에 지고 있는 자루로 시선을 주었다. 원래 천무비고는 빈손으로 왔다가 머릿속만 채워나가는 곳이다. 그런데 녀석은 커다란 자루를 하나 등에 지고 있었다.
“ 빈손으로 오기도 뭐해서....”
연우강은 자루를 내려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루 안에서 나온 것은 술 세병이었다.
“ 술이구나.”
“ 절강에서 생산된 오가피주요. 일명 불로장생주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잘못 가져왔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드는데, 영감 생각은 어떻소?”
“ 이왕 요괴라 소문이 났으니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 그럼 제대로 된 뇌물을 가져온 셈이 되는 구려.”
“ 선물이 아니고 뇌물이란 말이냐?”
“ 선물은 안면이 있거나 절친한 사이에 주는 걸 말하는 거요. 영감. 영감과 나는 오늘 처음 보는데 선물을 가져올 리는 없지 않겠소.”
“ 술 세 병을 뇌물로 가져왔다는 말이렷다.”
신유는 흥미로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동안 천무비고를 오가는 잠룡들로부터 녀석에 대한 소문을 많이 접했다. 잠룡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똥지게를 지고, 잠룡들을 상대로 폭리 수준의 장사를 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욕하는 잠룡은 거의 없었다. 괴짜 녀석이 들어왔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대하고 보니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 술이 아니고 불로장생주라는 약이라니까 그러네.”
“ 그렇다 치고, 뇌물을 내게 준 이유를 들어보자꾸나.”
“ 약간의 정보를 얻고 싶소이다.”
“ 어떤 정보를 말하는 거냐?”
“ 너무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으면서도 빠른 시간에 익힐 수 있는, 그런 도법이 있는 책장 위치를 알고 싶소이다.”
“ 뇌물은 보통 아쉬운 소리를 할 때 주는 걸로 알고 있다. 연우강.”
“ 버릇없는 말투가 거슬린다는거요?”
“ 잘 아는구나.”
“ 군에 있을 때 정천호였는데 그때 말투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 거니까 영감이 이해해 주시오. 나도 고치고 싶은데 쉽지가 않소이다.”
“ 고치려는 노력은 해보았느냐?”
“ 말투 때문에 아직 불편함을 겪은 적은 없었소이다.”
“ 듣는 나는 불편하구나.”
“ 정천호는 천이백 여명의 부하를 거느리오. 영감. 그 부하들 중에는 환갑이 다된 노인네들도 있었소. 그들이 내 앞에서 어쨌는지 아시오?”
“ 고개도 못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냐?”
“ 고개를 못 드는 건 고사하고 내 그림자도 밟지 못했소.”
“ 지금 넌 정천호가 아니다. 연우강.”
“ 그래서 영감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등한 상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거 아니오.”
“....!”
신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버르장머리 없는 쪽은 어른을 향해 반말을 찍찍 뱉어내는 녀석이 아니라, 정천호를 앞에 두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자신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 내가 정천호였을 때도 그렇게 묻는 놈이 제법 있었소. 그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아시오?”
“ 됐다.”
신유는 연우강의 말을 막기 위해 손을 휘저었다.
“ 죽기 전까지 죽만 처먹었소. 영감. 왜 죽만 먹었는지 아시오? 바로 이것 때문이었소.”
연우강은 불끈 틀어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 됐다고 했잖아, 자식아!”
신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 그렇다고 성질 낼 필요까진 없잖소. 이미 지나간 이야기들인데.”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신유를 보았다.
“ 뇌물 값을 하란 말이냐?”
“ 선물은 몰라도 뇌물엔 공짜가 없소.”
“ 천무비고와 승천비고에 대해 아느냐?”
신유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 골동품으로 가득하다고 들었소이다. 두 비고에 없는 책은 중원에도 없다는 말도 들었고.”
“ 두 비고에는 비급만 있는 게 아니다. 무공 비급은 물론이고 일반 서책, 불교나 도교의 경전, 잡술을 기록한 책 등 중원에 존재했던 모든 책이 보관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요괴 영감들 일은 그 책을 정리하는 거요?”
“ 그렇다. 하지만 우리도 정확하게 몇 권의 책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 정리하는 와중에도 계속 들어온다는 말이네?”
“ 그런 셈이다.”
“ 그렇다고 해도 영감이나 저분은 대충 파악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연우강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유를 턱으로 가리켰다.
“ 물론 무공 비급은 대충 파악하고 있다.”
“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요. 영감.”
“ 도법을 익히고 싶은 게냐?”
“ 도법엔 흥미 없소.”
연우강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도법은 왜 원하는 거냐?”
“ 사내가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물건을 찾는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걸 모르시오?”
“ 두 가지?”
신유는 제자인 유를 보았다. 하지만 유라고 해서 연우강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자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자, 신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여자와 돈 때문이오. 영감.”
“ 여자와 돈?”
“ 얼마 전에 여자와 잠을 잔 적이 있소. 보통 남자와 여자는 잠을 자고 나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말들을 스스럼없이 나누게 되는데, 우리도 그랬소. 그 와중에 여자가 꽤나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소.”
“ 그런데?”
“ 문제는 돈만 많을 뿐, 화려한 과거를 주었던 무공은 대부분 잃었다는 거였소. 그 때문에 부하 녀석들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을 걸 알면서도 지켜보고만 있다고 하였소이다.”
“ 그러니까 그 여자는 네게 몸을 주면서 비급을 가져다 달라고 했단 말이냐?”
“ 남녀관계는 그렇게 지저분한게 아니오, 영감. 잠을 자는 것과 일은 반드시 구분해야 하는 거요.”
“ 아니라는 말이냐?”
“ 약간의 수고비만 주면 비급을 주겠다고 했소.”
“ 수고비로 받기로 한 돈이 상당하겠구나.”
“ 그렇소.”
“ 어느 정도냐?”
“ 충격 받기 싫으면 모르는 게 낫소.”
“ 사층으로 올라가기 싫은 모양이구나.”
“ 백만을 받기로 했소.”
“ 백만이면 거의 날강도 수준이구나.”
“ 대야벌에 비하면 난 피라미 수준일 뿐이잖소.”
“ 대야벌이 너보다 더 파렴치하단 말이냐?”
“ 암살대전을 아시오?”
“ 이제 양 비고가 전부 개방됐으니까 조만간 시작되겠구나.”
“ 그럼 그 암살대전으로 대야벌이 벌어들일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 글쎄다, 그건 계산해 본 적이 없구나.”
“ 잠룡이 오백 명이고 호위 비용을 일인당 오십만 냥이라고 하면 총 이억 오천만 냥이오. 영감. 물론 모든 잠룡이 전부호위를 요청하진 않겠지만 설사 그 절반이라고 해도 일억 냥이 넘소. 그렇게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대야벌에서 얼마나 투자했을 것 같소?”
연우강은 신유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대야벌에서 투자한 거라면.....”
“ 바로 이거 하나요. 영감. 이 술 세 병을 살 돈이면 이런 쇳덩어리를 백오십 개도 만들 수 있소.”
연우강은 신유의 말을 자르며 품속에서 잠룡쟁패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 풋! 하하하!”
신유는 크게 웃었다.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다. 대야벌은 잠룡쟁패 하나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일 뿐만 아니라,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세가를 대야벌 산하로 끌어들이게 된다.
녀석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약하다, 연우강.”
신유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술병을 턱으로 가리켰다.
“ 외상 거래라서 그렇소. 영감.”
“ 현찰을 받으면 좀 더 쓸 수 있다는 말이냐?”
“ 불로장생주 세 병 정도는 더 가능할 거요.”
“ 클클클!”
신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 해주는 거요?”
“ 일단 가자꾸나.”
오가피주의 뚜껑을 딴 신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사부님.”
유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신유를 불렀다.
“ 걱정 말거라. 비고의 율법을 어길 생각은 없으니까.”
신유는 손을 휘저으며 위층으로 향했다.
연우강은 자루를 둘러메고 신유를 따랐다.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간 두 사람은 이층과 삼층을 지나 사층까지 곧바로 올라갔다.
찌릿!
사층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연우강은 날카로운 안광이 안에서 쏘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감지하지 못한 척 태연하게 신유를 따랐다.
“ 삼백 년 전 삼뇌천자 나추옹 벌주께서 천무비고와 승천비고를 기연의 장소라고 한 이유를 아느냐?”
“ 검지곡에서 인생을 낭비하는 병신 같은 녀석들 때문이라고 들었소.”
연우강은 좌우를 살피며 대답했다.
오단으로 된 책장의 각 단에는 서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고 그런 책장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중원의 모든 책이 이곳에 있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실제 천무비고와 승천비고는 기연의 장소가 맞다.”
“ 검지곡 석상을 연구할 정도라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무인들일 텐데, 굳이 이곳에 있는 무공까지 욕심낼 이유라도 있소?”
“ 이곳에 있는 무공이 하잘것없단 말이냐?”
“ 설사 여기 있는 무공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미 일정 경지에 오른 무인들에게는 참고 서적 이상의 의미를 찾는다는 건 무리일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오.”
“ 기연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단 말이더냐?”
신유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슬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금껏 많은 무인들이 이곳으로 들어왔지만 이곳에 보관되 있는 무공 비급을 참고용으로 취급하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 내 생각일 뿐이오.”
“ 네 말도 일리가 있다. ㅎ지만 삼뇌천자 그분께서 말하는 기연은 대단한 무공을 일컫는 게 아니다.”
“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오?”
“강한 무공을 지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에서 살아남았던 평범한 무인들의 무공을 보라는 의미였다.”
“ 무공이 아니라 살아남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군.”
“ 그렇다. 그분이 생각한 진정한 강자는 신공을 익힌 무인이 아니라 장수한 무인이었다.”
“ 나추옹 그분의 의도를 알고 따른 무인이 있었소?”
“ 거의 없었다.”
“ 저기 있는 요괴는 어떻소?”
연우강은 안쪽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노인 또한 옆에 있는 신유처럼 수염이 늘어져 있고, 머리는 백발이었다. 노인의 오른편에는 어른 머리 크기의 돌이 놓여 있었는데, 각 면이 마치 예리한 검으로 잘라 놓은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 저 요괴는 천유다. 한때 도법에 미친 적이 있었다.”
“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다는 말?”
“ 그렇다고 보면 된다.”
“ 일단 그것부터 줘보시오.‘
연우강은 신유의 손에 있는 오가피주를 빼앗아 천유 앞으로 걸어갔다.
“ 야! 자식아! 이제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어!”
“ 밑에 가면 두 병이나 있으면서 뭘 그러시오. 난 연우강이오, 영감.”
연우강은 천유 앞에 술병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 난 천유다.”
천유는 붓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연우강 뒤편에 있는 신유에게로 향해 있었다.
[ 뭐냐, 이놈?]
[ 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
놀라운 광경이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전혀 입술을 달싹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전음의 최고 경지인 혜광심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이런 놈이 검지곡 석상을 부셨단 말이냐?]
[ 나도 헷갈렸지.]
[ 헷갈리게도 생겼네.]
천유는 시선을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 이 영감들?’
헷갈리는 시선은 비단 신유뿐만이 아니었다. 연우강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유의 눈빛을 대하자 느닷없이 그 앞에 발가벗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래층에서 감지했던 암경도 그렇고, 지금 천유의 눈빛까지. 단순한 비고지기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영감.”
“ 궁금한 게 있느냐?”
천유는 눈으로 연우강의 전신을 훑으며 물었다.
“ 무원 어르신도 뇌물을 가져왔는지 그걸 알고 싶어.”
“ 그는 뇌물이 아니라 선물을 가져왔다.”
“ 혹시 만족공황증을 앓고 있는 거야?”
“ 만족 공황증?”
“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에서 오는 무력감을 일컬어 만족공황증이라고 해.”
연우강은 확신했다.
신유나 천유의 겉모습은 평범한 노인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한 분양에서 한계를 넘은 자들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그게 무공인지 아니면 학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신유와 천유는 얼렁뚱땅 속일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더불어 무원 영감은 각 비급이 있는 위치를 비밀리에 알아온 것이 아니라 저들에게 양핼르 구하고 적어온 듯했다.
“ 만족공황증 환자는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아니냐?”
“ 아냐, 영감. 난 지금도 정신없이 살고 있어. 이곳에 온 이유 또한 열심히 산 결과물이고.”
“ 무공을 익혔다고 들었다.”
천유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 본의 아니게 풍천영수와 만년지극화령실을 복용했어. 그 바람에 지금은 일 갑자의 공력을 가지게 됐고.”
속일 수 없는 자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은폐하는 게 아니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연우강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사실을 인정하되 축소해 말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잘 안다.
그가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무원과 창노가 너도 모르게 먹였단 말이냐?”
“ 알았더라면 먹지 않았겠지.”
“ 흑철마신을 익히고 있다는 데 맞느냐?”
“ 막장이 비급을 줬어. 묵령철골액은 약사 영감이 만들어 주었고.”
“ 흑철마신을 익히기 위해 검지곡의 석상을 부셨다고 하던데 맞느냐?”
“ 익히기 위해 부순 것이 아니라 비웃는 것 같아서 홧김에 박살내 버린 거야.”
“ 그럼 묵사는 검지곡 석상을 발견한 잘못을 무마하기 위해 범일승에게 줘버린 거더냐?”
“ 굳이 필요 없는 걸 가지고 있을 필욘 없잖아. 그보다 계속 심문할 참이야?”
“ 됐다. 원하는 걸 말해라.”
“ 신유 영감께도 말했지만,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고 속성할 수 있는 도법이 있었으면 좋겠어.”
“ 비급을 가지고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천유는 연우강이 어깨에 메고 있는 자루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는 연우강이 자루를 가져온 이유가 비급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미안하지만 이 안에는 내 밥이 들어 있어. 비급은 이 자루가 아니라 여기에 담아갈 거야.”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툭 쳤다.
“ 아, 암기해서 나갈 생각이라고?”
“ 하루에 한 권 정도는 가능할 것 같은데?”
“ 허!”
천유는 멍하 얼굴로 신유를 보았다.
[헷갈린다고 했잖아.]
신유 또한 천유와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백여 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무공을 익히기 위해 암기한 자는 있었어도 암기해서 팔아먹겠다는 녀석은 연우강이 처음이었다.
“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영감. 그들과 난 삶의 목표가 다를 뿐이니까.”
“ 너는 돈이 목표란 말이냐?”
이번엔 신유가 물었다.
“ 그렇소.”
“ 하지만 이번 일을 제대로 해내면 돈과 사람을 함께 얻을 것 같은데?”
“ 끔찍한 소리 마시오. 영감. 난 황금백수가 꿈인 사람이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자에게 발목 잡히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단 말이오.”
“ 황금백수?”
“ 영감!”
결국 참다못한 연우강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계속 질문만 해대자 짜증이 솟구친 것이었다.
“ 이놈아! 여기 책임자는 나야, 나!”
“ 뇌물을 먹었으면 일을 해줘야 할 거 아냐! 영감이 조금 전에 마신 술이 얼마짜린 줄 알아? 한 병에 오십 냥이란 말이야. 이 거지 같은 잠룡쟁패를 오십 개나 만들 수 있는 거라고.”
연우강은 또다시 잠룡쟁패를 꺼내 신유 눈앞에 디밀었다.
“ 끄응! 천유, 네가 처리해라.”
“ 따라와라, 이 괴짜야.”
천유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연우강을 데려간 곳은 실내중앙이었다.
“ 여기 오십 번부터 오십 구 번까지가 도법이다.”
천유는 나란히 서 있는 열 개의 책장을 가리켰다.
“ 검법이 있는 곳은?”
“ 검법은 책장 번호가 사십 번에서 사십구 번까지다. 검법도 필요한 게냐?”
“ 아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암기해야 할 도법은 어떤 거지?”
“ 나도 조건이 있다.”
“ 조건?”
“ 일 번 책장 맨 위에 보면 보통 책의 네 배 크기의 커다란 책이 있다. 그걸 가져오너라.”
“ .....!”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천유를 보았다.
“ 난 뇌물을 아직 받지 않았다. 연우강.”
“ 염병할!”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계단 쪽으로 갔다.
잠시 후 그는 가로 세로 각각 두 자 정도 되는 두꺼운 책을 가지고 왔다.
“ 네가 읽어야 할 책이다.”
“ 나보고 이걸 읽으라고?”
연우강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만상이란 제목의 그 책은 크기도 크기지만 얼마나 두꺼운지 두 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라니.
“ 너보다 먼저 뇌물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 무원 어르신이라는 말?”
“ 그렇다. 연우강. 그는 나를 찾아와서는 흑철마신과 어울리는 무공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 흑철마신과 어울리는 무공이라는 건 뭘 말하는 거지?”
“ 외공을 익힌 무인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무공이다.”
“ 호신공이라는 소리네.”
“ 그렇다. 그 안쪽 어딘가에 있는 호신공을 익히고 나면 격공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그러니까 그 무공이 여기에 있단 말?”
“ 그걸 읽다보면 나올 게다.”
“ 이걸 통째 읽으라는 걸 보면 꼭 집어서 가르쳐줄 마음은 없다는 말이네.”
“ 상대방에게 뭔가를 부탁을 해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뇌물이 아니라 공손함이다. 이놈아.”
“ 아냐, 그건 영감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자기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압이나 뇌물이야. 하지만 강압은 상대방에게 지독한 모욕을 준다는 점에서 그다지 권장할 만한 방법은 아냐. 나중에 뒤통수를 맞을 염려가 있거든. 반면에 뇌물은 뒤통수를 맞을 일이 거의 없어. 왜냐면 문제가 생기면 함께 당하게 되거든.”
“ 함께 당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연우강. 힘이 강한 자에게 뇌물을 주었다가 걸리면 준 사람만 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느냐?”
“ 영감, 여기서만 살았지?”
연우강은 책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냐?”
“ 세상에 나가서 살았다면 뇌물과 상납도 구분 못 하는 등신일 리가 없잖아.”
“ 드, 등신이라고?”
천유의 눈초리가 사정없이 치켜 올랐다.
“ 들어 봐, 영감.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같지만 상납과 뇌물은 큰 차이가 있어. 뇌물은 한 번에 끝나지만 상납은 한 번 시작하면 쉽게 끝내질 못해. 끝냈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 모르거든.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도 계속 뭔가를 가져다준단 말이야. 그럼 받는 놈이 뭐라고 하는 지 알아? 상납한 놈에게 ‘ 그놈 참 예의 바르네.’ ‘ 그놈 참 공손하네,’ ‘그놈 참 싹수가 있네.’라고 말한단 말이야. 예의 바른 놈, 공손한 놈, 싹수 있는 놈이라는 말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야.”
“ 정말로 그렇게 믿는 거냐?”
천유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 내가 그렇게 믿는 건 중요한 게 아냐, 영감. 중요한 건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거지.”
“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연우강.”
“ 우리 집에서도 매년 백만 냥씩 상납을 하고 있어. 백만 냥이면 엄청난 금액이라는 건 영감도 동의할 거야. 그런데 그런 거금을 받는 대야벌이 우리 가문에 해준 게 뭔지 알아? 바로 상단 창설이야, 영감. 그게 세상이란 말이야.”
연우강은 책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 그건 대야벌의 문제가 아니라 수뇌의 문제다.”
“ 수뇌를 잘 뽑아야 한다는 말?”
“ 그렇다.”
“ 내가 똥지게를 진다는 걸 알고 있어?”
“ 알고 있다.”
“ 화장실 바닥에 있는 분뇨는 천오백 년 됐다는 것도 알아?”
“ 그건 몰랐다.”
“ 원래 똥지게의 작업방식이 절반만 푸는 거였고, 지난 천오백 년 동안 그 방식은 변하지 않았어.”
“ 이번엔 바닥까지 펐다는 말이냐?”
“ 그래, 영감. 그럴ㄴ데 그놈이 얼마나 독하냐면, 대야벌 백대고수 상위권에 있는 자가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였단 말이야. 대야벌 전역에 있는 화장실이 전부 같아.”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천유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대야벌 전역에 있는 화장실이 분뇨가 썩어 분독을 뿜어내는 것처럼 대야벌도 그렇다는 말인 것이다. 더불어 수뇌를 바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 고인 썩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거지. 뭐겠어.”
“ 화장실을 퍼내는 것처럼 할 수 없다는 말이냐?”
“ 내가 뭘 알겠어. 이곳에 들어와서 느낀 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 거야?”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만상이라는 제목의 책을 가리켰다.
“ 앞에서부터 읽어 가면 된다.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천일이 걸리고 열 장씩 읽으면 백 일이 걸릴거다.”
“ 그럼 전부 천 매라는 소리네.”
“ 묵월십이식이란 도법이 있다. 오십 번 책장의 넷째 칸에 있을 거다.”
“ 알았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수고해라.”
천유는 몸을 돌렸다.
“ 영감!”
연우강은 자리로 돌아가는 천유를 불렀다.
“ 말하거라.”
“ 이건 호기심에서 묻는 건데, 혹시 이 책과 영감들이 비고에서 죽치고 사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건 아니다. 다만 검지곡의 석상을 깨트린 놈이 누구이건 만상을 보여주라는 엄명을 받았다.”
“ 어떤 미친놈이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거지?”
“ 삼뇌천자 나추웅 조사시다.”
“ 무치벌주?”
연우강은 뜨악한 얼굴로 말을 뱉었다.
“ 삼백 년 만에 외출한 책이니까 조심스럽게 다뤄라.”
천유는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염병할! 개똥을 밟은 모양이네.”
연우강은 자루 안에서 육포를 꺼내며 투덜댔다.
아무래도 나추웅에 대한 평가를 달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검지곡의 비밀을 풀어내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드러나지 않도록 묻어버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우선은.....”
연우강은 곁눈질로 천유를 살폈다.
천유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그는 다시 자루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주변에 꽂힌 비급과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진 그것은 창노로부터 받은 천뢰제왕신공의 구결이 적힌 비급이었다.
“ 사십구 번 맨 아래 칸.”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조금 전 검법서가 있는 책장을 물었던 이유는 위치를 알기 위해서였지, 검법서가 사십 번 대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검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 그는 사십구 번 책장의 맨 아래 칸에 비급을 대충 던져놓았다.
“ 물면 끝이다. 남궁철상.”
연우강은 천뢰제왕신공을 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