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기연이란?
무인이 가져야 하는 덕목 중의 하나가 바로 절제다.
즐거움, 분노, 슬픔, 기쁨 등 희로애락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교육을 받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각 가문에서 대들보로 키워진 잠룡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승천비고 삼층과 사층, 그리고 천무비고가 개방됐음에도 불구하고 잠룡들은 비교적 담담했다.
급하게 비급을 찾는 자도 없었고, 기쁨을 표현하는 자들도 없었다.
잠룡들은 차분한 얼굴로 처음으로 개방한 천무비고를 구경하는 걸로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역시 태연한 얼굴로 비급이 있는 위치가 적힌 상소를 떠올리며 천무비고와 승천비고로 향했다.
대부분의 잠룡들과는 달리 기쁨을 숨기지 못한 자가 있었다. 경공을 펼쳐 승천비고를 향해 내달리는 자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는 자는 남궁철상이었다.
“ 사층 사십구 번 책장 맨 아래 칸이라고?”
그가 이렇듯 흥분한 이유는 바로 비급 때문이다.
사실 남궁철상은 자존심을 접고 천뢰제왕신공을 찾아달라고 한 것은 나날이 달라지는 남궁운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대야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해도 그녀는 일류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비슷한 또래 중엔 상당한 강자로 불릴 수도 있지만, 이곳에 모인 잠룡들은 중원 최고 무골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 앞에서 삼십 년 내공으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랬던 그녀가 최근에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남궁운화를 잘 모르는 다른 사람은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은 남궁세가에서부터 그녀를 보아왔다. 남궁운화는 일 년 전의 그 얼뜨기가 아니었다. 무섭게 성장해 가는 남궁운화를 보면서 어쩌면 가주 자리를 빼앗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그때 남궁세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서찰에는 대야벌에 창궁대연신공과 천뢰제왕신공의 해설서가 있다면서, 창궁대연시공의 구결은 암기해 오고, 천뢰제왕신공을 반드시 익히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 흥!”
남궁철상은 코웃음을 쳤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남궁세가의 최강 무공이고 가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창궁대연신공을 익히고 싶었다.
하지만 창궁대연신공을 익힐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창궁대연신공에 걸려 있는 금제 아닌 금제 때문이다.
다른 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창궁대연신공이었다. 즉, 창궁대연신공을 익힌 자는 다른 무공을 익힐 수 있지만, 다른 무공을 익힌 자는 창궁대연신공을 익힐 수 없다. 만일 다른 무공을 익힌 자가 무리하게 창궁대연신공을 익히게 되면 두 내공이 충돌하여 주화입마에 든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가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바로 창궁대연신공인 것이다. 결국 천뢰제왕신공을 찾아주면 오십만 냥을 지불하겠다고 계약을 했다.
그런데 어젯밤에 비로소 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서찰에는 오십만 냥을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천뢰제왕신공이 있는 위치가 적혀 있었다.
멀리 은행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남궁철상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 아무리 바빠도 계산을 해야지.”
은행나무 앞에 도착했을 때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궁철상은 속도를 늦췄다.
“ 넌?”
남궁철상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은행나무 뒤에서 나온 자는 다름아닌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 설마 사십구 번 맨 아래 칸에 비급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자리를 옮겼단 말이냐?”
“ 어제 너희들이 천무비고 구경 갔을 때 난 이곳에 있었거든.”
“ 그럼.”
“ 계산 먼저 끝내자, 남궁철상.”
연우강은 손을 내밀었다.
“ 비열한 자식.”
남궁철상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연우강을 쏘아보다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 확인하지 않아도 돼?”
주머니를 받아든 연우강이 물었다.
“ 난 남궁철상이다. 연우강.”
“ 난 자기 이름을 대면서 큰소리치는 새끼들의 말을 절대 안 믿어 인마.”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주머니를 열어 전표를 확인했다.
“ 비급이 있는 위치를 말해라.”
남궁철상은 연우강 앞으로 다가가 맥문을 그러쥐었다. 위치를 말하는 순간 연우강의 내부에 진력을 밀어넣어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하게 해버릴 참이었다.
“ 이 손은 놓지 그래.”
“ 나는 연 씨 성을 가진 놈을 절대 믿지 않거든.”
“ 내가 도망칠까봐 잡고 있다는 말?”
“ 그렇다. 연우강, 어서 말해라.”
남궁철상은 연우강의 맥문을 사정없이 틀어쥐며 윽박질렀다.
“ 사십구 번 아래쪽.”
“ 옮기지 않았단 말이냐?”
“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이유가 없잖아.”
“ 그랬단 말이지.”
남궁철상은 빙그레 웃었다.
“ 우린 손을 잡을 만큼 친하지 않아, 남궁철상. 이젠 그만 놔주는 게 어때?”
“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연우강.”
“ 혹시 그 좋은 생각이라는 게 내 몸에 진력을 밀어 넣고 돈을 되찾아 가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 난 그럴 생각인데, 한 반 년 정도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해줄 참인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암살대전을 통하지 않고 동료 잠룡에게 직접 손을 쓰게 되면 곧바로 쫓겨난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구나.”
“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나 증인이 있어야 하지. 하지만 이곳엔 아무도 없을뿐더러, 네가 쓰러지는 순간에 난 승천비고에 있었다고 하면 된다. 더불어 내가 승천비고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증인은 넘쳐나고.”
“ 담대무궁이 증인을 서줄 거란 말?”
“ 그것뿐만이 아니지. 율령궁의 궁주인 우담보 또한 네게 맺힌 게 많잖아. 아마 조사하는 시늉만 하다가 흐지부지 넘어갈 거야.”
“ 그럼 금릉 연씨 세가는 어떻게 할 거지? 우리 아버지 말아애, 그분도 우담보처럼 흐지부지 넘어갈 거라고 생각 해?”
“ 그건 그때 알아서 하면 되는 거다.”
“ 혹시 백만 냥을 믿는 거야?”
“ 무슨 말이지?”
“ 너희 남궁세가에서 사월림에 준 뇌물을 말하는 거야. 내가 암살대전에서 죽어버리면 반 년 동안 누워 있었던 일에 대해 따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 되잖아.”
“ 으음!”
남궁철상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설마 놈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나도 네가 준 이 돈을 사월림에 뇌물로 줄 참이야. 남궁철상, 나보다 네가 먼저 죽는다는 쪽에 내 전 재산을 걸고 싶은데, 네 생각은?”
연우강은 왼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가볍게 흔들었다.
“ 나, 남궁세가는 청부한 적 없다.”
“ 네가 아니고 남궁세가에 있는 노인네들이 그랬다는 건 나도 아니까 변명할 필요 없어. 다만 난 그 노인네들에게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뿐이야. 아무튼 살아남으려면 넌 빠른 시일에 천뢰제왕신공을 완성해야 할 거야. 이제 그만 놓는 게 어때?”
연우강은 남궁철상의 손으로 시선을 주었다.
“ 그렇다고 해도, 난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연우강.”
남궁철상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연우강의 몸 안으로 전력을 밀어넣을 수가 없었다.
“ 계약서를 보면 우담보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은 해봤어?”
바로 이 말 때문이었다.
“ 무슨 계약서를 말하는 거냐?”
“ 천뢰제왕신공을 찾아주면 오십만 냥을 지불하겠다고 한 계약서 말이다. 거기에 보면 네 이름이 아주 크게 적혀 있잖아. 그리고 그걸 작성한 사람은 네가 아니라 막장이야. 막장은 내 친구고.”
“ 빌어먹을.”
맥문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야장에 파견 나와 있다고 하지만 막장은 천살원 집행사자의 일인이 아닌가. 그가 이번 일에 대해 증언을 하게 되면 오히려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될 터였다.
“ 맞아, 철궁상. 아주 빌어먹을 일이야. 내가 다치면 막장은 화를 낼 테고, 그는 곧바로 계약서를 들고 우담보를 찾아갈 거야. 물론 계약서를 전부 들고 가진 않아. 네 이름이 적힌 계약서 한 장만 딸랑 들고 갈 거라고.
먼저 천살원 원주인 이청문에게 보고를 하고 이청문은 우담보에게 다시 보고를 하게 돼. 원래 일이라는 게 한 사람만 알면 대충 처리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알아버리면 대충 넘길 수가 없어. 우담보는 그 일을 공론화 시키게 되고 그럼 넌..... 손 좀 놔줄래?” 연우강은 다시 남궁철상에게 잡힌 맥문을 턱으로 가리켰다. 남궁철상은 손을 놓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 계약서를 우담보에게 건넬 일은 없을거니까. 마음 푹 놓고 무공에나 정진해.”
연우강은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남궁철상의 어깨를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 언젠가는 널 죽이고 말겠다. 연우강.”
“ 날 죽일 걱정은 접어두고 살아날 걱정부터 해라. 앞으로 오 일 후에 난 네놈이 준 이 돈으로 사월림에 청부를 할 거니까. 오 일이다. 남궁철상.”
연우강은 남궁철상을 쏘아보다가 몸을 돌렸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직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간다! 가~라!
새카만 이리가 사막을 달린다!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긴다!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부르르!
남궁철상은 몸을 떨었다. 연우강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진득한 살기가 내포돼 있었던 것이다.
“ 오냐, 익혀주마. 천뢰제왕신공을 익혀 반드시 살아남아 이 수모를 갚아주마.”
남궁철상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놈이 청부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젠 다른 방법이 없다. 먼저 천뢰제왕신공을 수습한 다음 세가에 연락을 취해야 할 터였다.
남궁철상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걸음을 옮겼다.
“ 호호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 개자식!”
승천비고 앞으로 가던 남궁철상의 몸에서 살기가 요동쳤다. 십여 장 떨어진 곳 은행나무 아래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먼저 자리를 떴던 연우강과 남궁운화였다.
“ 언젠가는.......”
남궁철상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승천비고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철상은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연우강이 청부에대해 말하는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정말 그렇게 해도 돼요?”
“ 난 거짓말을 못한다고 했잖아요. 일단 그렇게만 햊면 욕실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줄게요.”
“ 정말?”
“ 또 그런다.”
“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천리지청술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궁철상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틀어쥐었다. 그는 한동안 창밖을 노려보다가 위층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승천비고의 일층 관리자인 신유와 유였다.
“ 방금 그 녀석은 어려운 상대를 고른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신유는 창 밖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그런 것 같습니다.”
“ 어떻더냐?”
“ 다른 잠룡에 비해 특별히 뛰어나거나 하는 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분뇨를 푸는 것과 잠룡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 것 말고는 특이한 점도 없고요.”
“ 다른 잠룡에 비해 무공도 떨어지고, 그렇다고 탁월한 면도 보이지 않는 녀석이 잠룡들은 물론이고 범일승이나 우담보를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그리고 무원은 녀석을 차기 야장 장주로 내정한 상태다.”
“ 사부님과 사숙님도 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내가 당하긴 뭘 당해, 녀석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층에서 천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럼 만상 안쪽에 있는 내용을 언급한 건 어떻게 설명하실 참입니까?]
유는 빙그레 웃으며 되물었다.
[ 얼결에 그렇게 된 거야]
[ 사숙께서는 저 친구에게 밀렸습니다.]
[ 난 저 녀석이 마음에 든다.]
[ 이미 늦었습니다. 사숙. 그는 만상을 보는 행운을 얻고, 우린 기회를 얻을 뿐입니다. 인연은 거기까지입니다.]
[ 녀석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을 해보진 않았느냐?]
[ 숨기는 게 너무 많은 자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고 했던 분은 사숙이셨습니다.]
[ 알았다.]
“ 클클클! 그건 나도 인정하마. 저 녀석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기이한 매력을 지녔어.”
한참 혜광심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신유가 끼어들었다.
[ 구공만 강한 놈을 어디에 써?]
“ 구공은 또 뭐냐?”
천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신유는 물었다.
[ 주둥이 신공을 말하는 거다.]
“ 그 구공으로 네 제자도 친구로 만든 모양이구나.”
[ 내가 그 녀석을 한 번 만나볼까?]
“ 몇 년 됐지?”
[ 이십 년이 넘었을걸?]
“ 아서라. 이제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고. 일단 지켜보기나 해라.”
신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 참으로 잘 어울리는 쌍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행나무 아래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젊음은 가만있어도 생동감이 넘치기 마련입니다. 사부님.”
“ 그런 게냐?”
“ 그렇습니다.”
“ 그렇다고 해도 보기는 좋구나.”
신유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신들이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강과 남궁운화는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따. 주로 말을 하는 사람은 남궁운화였고, 연우강은 듣는 쪽이었다.
“ 노 할아버지하고는 친해요?”
“ 원호 옆 교육실 기억해요?”
“ 연 공자가 퉁퉁 부어 왔던 날?”
“ 날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영감이에요.”
“ 노할아버지가 연 공자를 두들겨 팼다고요?”
“ 그날 이후로 난 그 영감만 보면 도망 다니가 바쁩니다. 사실 욕실을 사용하게 해주는 것도 그 영감 명령이었습니다.”
“ 노할아버지는 좋은 분인데, 내가 이야기해 볼 게요.”
“ 어이쿠! 그럼 내가 더 힘들어집니다. 소저.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니까 공연히 나서지 마십시오.”
“ 정말 괜찮아요?”
“ 그렇다니까 그러네요. 그보다 무공은 어때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남궁운화를 볼 때마다 일신우일신이란 말이 떠오른다. 과연 일 년 전 초라했던 그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아주 좋아요. 마음도 편하고요.”
남궁운화는 활짝 웃었다.
“ 정말 다른 무공을 익힐 생각은 없는 겁니까?”
“ 그렇다니까요.”
남궁운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 생각 잘했어요. 음식도 이것저것 섞어 놓으면 화려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본래의 맛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죠. 하나만 집중하는 게 훨씬 나은 방법입니다.”
문득 남궁운화가 창궁대연신공의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그만 가죠.”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 상관없다니까 그러네요.”
“ 아무래도 천유 할아버지께 야단맞을 것 같은데.”
남궁운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따랐다.
승천비고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곧바로 사층으로 향했다. 팔십여 명의 잠룡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층은 조용했다. 오직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간혹 들려올 뿐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던 연우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물렸다. 남궁철상이 어떻게 하고 있나 보려고 사십구 번 책장을 지나쳤는데, 녀석은 천뢰제왕신공의 비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간혹 머리를 들고 천장을 보는 걸 보면 암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듯했다.
‘ 청부를 넣겠다고 했으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 없겠지.’
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갔다. 연우강이 자리를 잡은 곳은 서쪽 창 아래쪽이었다.
[ 이걸 전부 읽어야 한다는 거예요?]
바닥에 놓인 커다란 책을 발견한 남궁운화는 놀란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연우강은 묵월십이식이란 이름이 적힌 비급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연 공자는 그걸 암기하고요?]
연우강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그것도 돈 때문에 하는 거죠?]
남궁운화는 연우강이 보고 있는 비급의 제목을 보며 물었다. 연우강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 알았어요. 내용을 알려드릴게요.]
책이 너무 커서 남들처럼 무릎에 올려놓고 볼 상황이 되지 않자, 남궁운화는 그 자리에 엎드려 만상을 읽기 시작했다.
‘ 이런 요괴들.....’
남궁운화가 일고 있는 만상을 보던 연우강은 천유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책의 크기는 네 배나 되는데 반해 안쪽의 글자는 보통 책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더불어 그 작은 글귀가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날도 슬쩍 보았지만 글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속옷도 팍팍 밀어주겠습니다. 전부 공짭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비급에 집중했다.
그가 남궁운화를 부려먹을 생각을 한 건 묵월십이식이라는 도법 때문이다. 강한 비급을 골라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묵월십이식의 내용은 방대했다. 다른 책을 보면서 묵월십이식을 암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떠올린 사람이 남궁운화였다.
창노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고 있는 그녀는 굳이 승천비고나 천무비고의 무공이 필요없는 사람이었다.
‘ 그걸 독파하고 나면 그때는 정말로 남궁세가의 진정한 가주가 될 수 있을 거야. 꼬맹이 아가씨.’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묵월십이식으로 시선을 내렸다.
‘ 저런 미친 자식!’
주변을 둘러보는 것처럼 하면서 연우강을 살피러 왔던 천유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마 연우강이 남궁운화에게 만상을 익히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나다!]
잠시 일층을 살피던 그는 신유의 기운을 감지해 내고는 말을 걸었다.
[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 그 미친 놈이 만상을 그 꼬맹이에게 줘버렸다.]
[ 남궁세가의 여식을 말하는 거냐?]
[ 그래.]
[ 네가 보기엔 어떠냐?]
[ 남궁운화 그 아이를 말하는 거냐?]
[ 그래.]
[ 연우강 저놈에게는 아까울 정도로 순수해.]
[ 그럼 됐네.]
[ 무슨 소리냐?]
[ 누가 보아도 결과만 같으면 상관없다는 말이다.]
[ 그렇지. 그리고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은 연우강 그 녀석이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 천유.]
[ 우리가 만상을 통해 뭔가를 얻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단 말이냐?]
[ 그것뿐만 아니라 만상을 완독하면 상당한 기연을 얻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다.]
[ 그 기연을 남궁운화에게 넘긴 거라고?]
[ 그렇지.]
[ 저 자식 미친 거 아냐?]
[ 자신에게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주는 게 싫어서 악착같이 얻으려고 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낫지. 아무튼 나쁜 인연은 아닌 것 같으니까 두고 보자.]
[ 네가 책임져라.]
[ 조사께서 검지곡 석상을 깨트린 자에게 만상을 보여주라고 하였고 우린 그렇게 했. 그거면 족하다.]
[ 알았어, 임마.]
혜광심어를 끊은 천유는 다시 한 번 연우강과 남궁운화를 지켜보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승천비고에서 보낸 연우강이 비고를 나선 건 유지 말이었다. 남궁운화를 비롯한 아는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한 그는 처소를 향해 부리나케 내달렸다.
콰앙!
집에 도착해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곧바로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 바쁜 일이라도 있는가?”
욱일승은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하지만 연우강은 말없이 지필묵을 준비하여 의자에 앉았다.
“ 한 번밖에 안 해봤는데 잘 되려나 몰라.”
연우강은 종이 한 장을 양손으로 잡고 편 다음 붓으로 시선을 주었다. 시선을 받은 붓이 둥실 떠오르더니 먹물 속으로 빠졌다. 그 속에서 빠져나온 붓은 종이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붓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종이 위에는 글귀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 기사네.”
욱일승은 어이없는 얼굴로 연우강의 하는 양을 보았다. 붓을 움직이는 힘은 다름 아닌 마라천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쉴 새 없이 글을 써 내려가던 연우강은 이십 장 정도를 작성하고 나서야 나직한 한숨과 함께 마라천력을 거뒀다.
“ 불가사의다. 불가사의! 어떻게 손을 쓴 것보다 낫냐?”
종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글귀를 보며 욱일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따.
“ 뭔가 그건?”
욱일승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돈이오!”
연우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비급이라는 말인가?”
“ 돈이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나 일 다녀올 테니까 마르면 정리 좀 해놓으시오.”
“ 팔아먹을 셈이구먼.”
팔아먹기 위해 만든 비급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욱일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우강이 승천비고로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웬일인가 했다. 그런데 그 또한 돈 때문이었던 것이다.
“ 길이 아니면 가질 말고, 돈이 아니면 움직이질 마라. 그게 내 인생 철학이오. 영감.”
“ 멋지구먼. 그런데.....”
“ 할 말 있소?”
“ 살수들이 또 따르기 시작했네.”
“ 몇 명이오?”
“ 여섯 명이네.”
“ 적사진인과 건곤신패의 움직임은 어떻소?”
“ 적사진인은 빠진 것 같고 건곤신패 간혹 보이네.”
“ 적사진인은 천마삼경 때문에 빠진 모양이구먼.”
“ 그런 것 같네. 어떻게 할 생각인가?”
“ 날 지켜줄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영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다녀오겠소. 참!”
계단으로 향하던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욱일승을 보았다.
“ 말하게.”
“ 혹시 만상이란 책을 아시오?”
“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가?”
“ 들은 게 아니라 눈으로 직접 봤소.”
“ 만상을 직접 봤다고?”
욱일승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커졌다.
“ 왜 그렇게 놀라는 거요?”
“ 만상을 남긴 분이 무치벌주라고 불리는 삼뇌천자 나추웅 벌주께서 남겼다는 사실은 아는가?”
“ 그말은 들었소.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오?”
“ 만상이 나타났다는 말은 곧 만상지존의 출현을 의미하기 때문이네.”
“ 만상지존?”
연우강은 걸음을 되돌려 탁자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 대야벌 역사에 대해 아는가?”
“ 영세오천에서 시작됐다는 건 알고 있소.”
“ 내가 묻고 싶은 건 명나라까지 합치면 다섯 제국의 건국에 막대한 공을 세우고도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유를 아느냐는 거네.”
“ 만일 대야벌 무인들이 황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곳을 나갔다면 대야벌은 진작 무너졌을 거요.”
“ 대야벌을 지키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 권력을 쥔 자들에게는 토사구팽이라는 엄청난 무기가 있잖소. 당장은 관복이 멋있게 보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정계에서 쫓겨날 테고, 그럼 남는 게 없는 장사지.”
“ 물론 그 말도 맞네. 대야벌 무인들은 황제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이곳에 남았기 때문에 지상 최강의 단체가 될 수 있었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네.”
“ 다른 이유도 있단 말이오?”
“ 그렇다네.”
“ 들어봅시다.”
연우강은 흥미로운 얼굴로 욱일승의 말을 기다렸다.
“ 무성과 만상문의 견제 때문이었네.”
“ 무성은 알겠는데 만상문은 또 뭐요?”
“ 만상문이 정확하게 언제 시작됐는지는 나도 모르네. 하지만 무치벌주가 만상문의 문주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네.”
“ 야장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무원이 비급의 위칠르 쉽게 알아왔던 것 때문이었다. 신유나 천유를 보지 못했더라면 무원이 비급 위치를 알아왔다는 일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고 나자 그들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과거엔 한 배를 탄 적이 있기는 했지만 야장이 만상문 소속은 아니라고 알고 있네.”
“ 과거면 언제를 말하는 거요?”
“ 삼뇌천자 그분은 벌주가 될 때 야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네.”
“ 그랬군.”
“ 무슨 말인가?”
“ 그런 게 있소. 그러니까 욱 영감 말은 벌, 무성. 만상문이 상호 견제를 하고 있어서 강호로 나가지 못했단 말이오?”
“ 그동안 황실을 도왔던 세력은 그 세 곳 중의 한 곳이었네. 설사 어느 한 곳이 대야벌을 나간다고 해도 나머지 두 세력은 이곳에 남게 되네.”
“ 나간 놈만 손해란 말이군.”
“ 그런 셈이네.”
“ 쿡!”
연우강은 픽 웃었다.
“ 왜 그러는가?”
“ 갑자기 류사은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렇소.”
“ 류사은은 누군가?”
“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였소.”
“ 그 친구가 뭐라고 했는가?”
“ 검은머리 짐승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참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합디다.”
“ 그러니까 자네 말은 나가고 싶어도 남은 두 세력이 대야벌을 쥐고 흔드는 게 배가 아파서 나가지 않았다는 건가?”
“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거 아니겠소.”
“ 명언이네.”
욱일승은 빙그레 웃었다.
“ 명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요괴들이 만상을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거요, 영감.”
“ 만천하에 공개했다는 건 무슨 말인가?”
“ 오늘 하루 종일 남궁운화가 만상을 읽었소.”
“ 잠룡들도 그 광경을 봤단 말인가?”
“ 팔십 명이나 되는 잠룡들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보지 못했다면 말이 안 되는 상황 아니오. 문제는 그 요괴들이 왜 만상을 드려냈냐 하는 거요. 무려 삼백 년 동안 숨어 있던 자들이 아니오.”
“ 그들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말인가?”
“ 그게 아니라면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겠지. 아무튼 남궁운화에게 줘버린 건 잘한 거네.”
“ 그 요괴들이 만상을 내게 줬었소.”
“ 그, 그러니까 자네에게 준 만상을 남궁운화 처자에게 줘 버렸단 말인가?”
“ 크기는 보통 책의 네 배 크긴데 글자는 절반 크기였소. 그걸 어느 세월에 다 읽는단 말이오? 그것보다는 이걸 암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훨씬 좋다는 거 아니오.”
연우강은 조금 전 자신이 작성한 비급을 턱으로 가리켰다.
“ 만상을 자네에게 줬다는 건, 만상문의 후계자로 자넬 선택했다는 것 같은데....”
“ 후계자?”
“ 그게 아니면 자네에게 만상을 줄 리가 없지 않겠는가?”
“ 내게 준 게 아니오, 영감.”
“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는가?”
“ 천유 그 요괴는 만상을 내게 주면서 삼백 년 만에 빛을 봤다고 했소. 삼백 년 만에 빛을 봤다는 건 제본을 하고 나서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말이지 않소.”
“ 그렇지.”
“ 그런데 만상에는 책장을 넘겨본 흔적이 남아 있었소. 그것도 아주 심하게.”
“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 그렇소. 영감. 그들은 날 위해서 준 게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만상을 꺼내놓은 거요.”
“ 그렇다고 해도....”
“ 아쉬워하는 눈치네?”
연우강은 욱일승을 빤히 쳐다보았다.
“ 아쉽다는 것보다는 자네가 기연을 차버린 것 같아서 그런 거네.”
“ 내가 바보같다는 말이오?”
“ 그렇네.” 욱일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유가 연우강에게 만상을 건넨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심심해서 준 것은 결코 아닐 테다.
그런 만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남에게 줘버린 것은 아무래도 성급한 행동 같았다.
“ 기연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아시오?”
“ 어떤 조건이 있단 말인가?”
“ 기연의 첫 번째 조건은 최악의 상황에서 얻어야 한다는 거요. 하지만 난 최악의 상황이 아니오.”
“ 일리가 있구먼.”
“ 일리가 있는 게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거요.”
“ 두 번째 조건은 뭔가?”
“ 두 번째는 들인 노력에 비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오. 그런데 그 만상이란 책은 보통 책의 네 배 크기였을 뿐 아니라 안에 적인 글자는 깨알 수준이었소. 난 선천적으로 글씨가 작은 책은 읽지를 못하오.”
“ 세 번째 조건은 뭔가?”
“ 사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내가 기연 여부를 판단할 때 기준으로 삼는 조건이기도 하오.”
“ 궁금하구먼.”
“ 기연을 남긴 자가 죽고 없어야 한다는 거요. 즉 비급이나 내단 또는 보물 옆에는 반드시 죽은 시체가 있어야 기연이 성립된다는 뜻이오, 영감.”
“ ......?”
“ 욱일승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네?”
“ 우리는 흔히 훌륭한 사부를 만나 무공을 전수 받는 것도 기연이라고 하네.”
“ 무공은 물론이고 내공까지 전부 전수해 주고 깨끗하게 죽으면 그건 기연이지.”
“ 죽지 않으면?”
“ 짐이오.”
“ 짐이라고?”
“ 사부라는 양반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고, 은원도 해결해야 하잖소. 그 정도면 엄청나게 큰 짐 아니오.”
“ 큭! 그래서 만상도 짐이라는 건가?”
욱일승은 픽 웃으며 물었다.
“ 그걸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과 엮이게 되고, 그 요괴들이 뭔가를 해달라고 하면 해줘야 하잖소. 아주 더러운 짐이 되는 거요.”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일 나갈 건가?”
“ 그런데 궁금한 게 있소.”
계단으로 향해 가던 연우강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 말하게.”
“ 방금 영감이 말했던 내용들 말이오.”
“ 그런 내용을 아는 사람이 대야벌에도 별로 없다는 말인가?”
“ 별로 없는 게 아니라 거의 없소. 영감.”
“ 산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산 정상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네. 반면에 산 정상에 있는 자는 정상 주변은 물론이고 산 아래쪽 상황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네.”
“ 산 정상에서 살았단 말이오?”
“ 주화입마에 들지 않았다면 신주제일검 욱일승이란 이름은 대야벌 벌주 목록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거네.”
“ 그랬군. 아무튼 영감은 내 짐이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위로 올라갔다.
“ 녀석.”
욱일승은 빙그레 웃었다.
제 녀석의 짐이라는 말은 곧 죽지 말고 오래 살라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 네 녀석이 대야벌로 들어온 진짜 목적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을 거다. 녀석아.”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대야벌에 들어와 있는 걸로 알았다. 아니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녀석이 보여준 행동은 단순히 시간을 떼우기 위한 소일거리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흐름을 타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아직은 그 흐름의 실체를 잡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가까이서 관찰하면 희미한 윤곽만 보이는.
지금 녀석은 그런 상태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야 녀석이 대야벌로 들어온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끝까지 모를 수도......”
욱일승은 낮게 중얼거리며 연우강이 남기고 간 종이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