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일
후군도독부 도독동지 양성일의 방문은 파격이란 말이 어울렸다. 보통 황실에서 대야벌을 방문할 때는 방문 목적과 체류 일정 등 중요한 몇 가지 사항을 미리 통보하는데 양성일은 그런 절차가 전혀 없이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대야벌로 들어온 것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군을 통수하고 있는 오군도독부 중의 한 곳인 후군도독부의 이인자가 느닷없이 들이닥치자 대야벌 수뇌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손님 맞을 준비를 했지만 그마저도 양성일의 거절로 인해 취소됐다.
다만 수인사가 끝난 후 양성일은 사적인 방문이지만 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벌주를 찾아왔다고 하였다. 사적인 방문이라고 해도 대야벌 수뇌들은 접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가겠다는 양성일을 붙잡고 연회를 열어 그의 대야벌 방문을 환영했다.
그리고 연회 다음날 양성일이 찾은 곳은 황실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황궐과 금황련이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성대한 연회를 벌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야벌의 수뇌들과 하루, 황궐에서 하루, 금황련에서 하루를 합쳐 도합 삼 일을 보낸 양성일이 네 번째 찾은 곳은 야장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연우강의 처소다.
하지만 이번 방문엔 성대한 잔치도, 감미로운 주악도 없었다. 쓰디쓴 화주와 잘게 찢은 육포가 전부였다.
“ 돈 좀 벌었다고 들었는데 이게 뭐냐?”
“ 턱살도 늘어지고, 뱃살도 출렁이는 걸 보면 살 만한 모양입니다.”
“ 원래 도독동지라는 자리가 뇌물이 많이 들어오는 자리 아니냐.”
“ 여럿 죽어나갔겠군요.”
“ 난 조용히 돌려주란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 뇌물의 뇌 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녀석에게 시켰겠지요.”
“ 도독동지는 그것까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
“ 그렇게 사시다간 말년이 불행해질 수도 있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 금릉 연씨 세가 장남인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 그곳도 위태위태합니다.”
“ 그렇게까지 진행된 거냐?”
“ 제가 여기 들어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감히 개독새를 건드릴 생각을 하고.”
“ 전 전장의 개독새일 뿐입니다. 여기선 똥지게에 불과하고요.”
“ 벼령이 똥지게로 바뀐 거냐?”
“ 그렇습니다.”
“ 하하하! 네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반갑다. 녀석아.”
양성일은 연우강의 손을 덥석 쥐었다.
“ 저는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장군님. 아무도 모르게 오시라고 했지. 이렇게 요란스럽게 오라고 한 적 없습니다.”
“ 도독동지를 은밀하게 오라는 놈이 잘못됐다는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은밀하게 할 말이 있으면 네가 움직여야지. 녀석아.”
“ 빌어먹을 자식들이 얼마나 싸대는 줄 아십니까. 얼마나 바쁘면 조수까지 두고 일을 하겠습니까?”
“ 시간이 없단 말이냐?”
“ 반면에 장군님은 시간이 남아도는 분 아닙니까. 당연히 노는 사람이 움직여야지요. 앉으십시오.”
연우강은 자리를 권했다.
“ 그러자꾸나. 그런데 정말로 준비한 건 이게 다냐?”
“ 그럼 뭘 바라셨습니까?”
“ 매월 수만 냥의 거금을 벌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건 헛소문인 게냐?”
“ 이건 접대용입니다. 장군님.”
“ 그럼?”
“ 좋은 건 저 혼자 먹어야지요.”
연우강은 화주 병을 들어 양성일의 술잔을 채웠다.
“ 나쁜 녀석. 이리 줘, 자식아.”
양성일은 연우강의 손에서 병을 낚아채 갔다. 그러고는 연우강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 한잔 하자!”
양성일은 술병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어올렸다.
“ 오랜만입니다. 장군님!”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 반갑다. 연 천호!”
두 사람은 동시에 술잔을 비우고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빈 잔을 다시 채우고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다섯 잔을 비운 후 두 사람은 비로소 찢어 놓은 육포를 입으로 가져갔다. 다섯 잔의 술을 비우고 안주를 잡는 게 북로정벌군의 전통이었던 것이다.
“ 아직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느냐?”
양성일은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 제 꿈은 이 세상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 황금백수 말이냐?”
“ 그렇습니다. 장군님.”
“ 아무튼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너라. 네 자리는 만들어 줄 테니까.”
“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 금릉 연씨 세가를 위해 따로 해줄 것은 없느냐?”
“ 이렇게 와주신 것만 해도 효과는 충분합니다.”
“ 그럴 줄 알았으면 격식을 차려서 요란하게 방문할 걸 그랬구나.”
“ 아닙니다. 지금 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규모가 크면 빈수레라며 오해하고 오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더 큰일이 납니다.”
“ 은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란하지도 않는 상태가 상대방에게 더 두려움을 심어준다는 말이냐?”
“ 장군님이 즐겨 사용하던 작전이었습니다.”
“ 북로군은 최강이었다. 연 천호.”
“ 강했기에 그 작전이 통했단 말입니까?”
“ 그렇다.”
“ 저도 최강입니다.”
“ 하지만 혼자다.”
“ 더는 부하들 죽음에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들은 이리였다.”
“ 그래서 더 미안합니다. 최소한 사람으로 죽게는 했어야 했는데, 전 그러지 못했습니다.”
“ 멍청한 놈!”
“ 절 욕하는 건 장군님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 내게서 배웠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 군에 들어가기 전에 전 순진무구한 아이였습니다.”
“ 순진무구?”
“ 천진난만했다는 뜻입니다.”
“ 천진난만?”
양성일은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왜 그러십니까?”
“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고참 열 다섯 명을 죽여 없앴느냐?”
“ 원래는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 그런데?”
“ 물건만 자르고 끝내려고 했는데 녀석들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 죽여 달라고 했다고 죽여?”
“ 죽기가 싫으면 살려달라고 해야지요. 칼을 들고 있는 놈에게 죽여 달라고 하면 죽이는 수밖에 더 있습니까. 아무튼 제 모든 것은 장군님께 배운 거니까 절 욕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 난 방금 네가 말했던 것처럼 턱도 늘어지고 배도 나왔다.”
“ 지금은 변했다는 말입니까?”
“ 그렇다.”
“ 제가 보기엔 장군님은 하나도 변한 게 없습니다.”
“ 그건 네가 몰라서 그렇다.”
“ 아닙니다. 장군님. 변하려면 외모가 아니라 머릿속이 변해야 하는데 장군님은 그대롭니다. 변했다면 정천호 놈이 부른다고 삼 년 굶은 과부처럼 이렇게 뛰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 넌 이놈아 그놈의 입 때문이 망할 거다.”
양성일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로는 어떻게 해볼 녀석이 아니었다.
“ 흐흐흐! 전 이놈의 주둥이 때문에 황실로 못 간다는 겁니다. 장군님.”
연우강은 키들키들 웃으며 잔을 들었다.
“ 내가 더 해줄 일은 없느냐?”
“ 이왕 오신 김에 사람이나 한 명 빼주십시오.”
“ 배달라는 걸 보면 감옥에 있는 모양이구나.”
“ 두보관이라고, 전에 패천림의 림주였던 잡니다. 지금 천옥에 있습니다.”
“ 림주까지 했던 자가 천옥에 갇혔다면 보통 죄를 지은 게 아닌 것 같은데....”
“ 아버진 지옥에 갇혀 있어서 가뜩이나 심란한데, 마누라가 바람을 피웠던 모양입니다.”
“ 지옥에 갇혔ㄲ다면 아들보다 더한 자로구나.”
“ 그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구하지 못해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 그래서 홧김에 몇 명 패 죽였단 말이냐?”
“ 죽은 놈들은 마누라와 바람 핀 놈과 같은 패거리였답니다.”
“ 그들을 패 죽이고 일부러 감옥에 들어갔단 말이구나. 그런다고 제 아비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친군 바보 중의 바보구나.”
“ 생긴 것도 바보처럼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빼내면 두작군은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 알았다. 부탁은 해보겠다만 담대만승이 빼주지 않으면 나도 방법이 없다.”
“ 그는 빼낼 줄 수밖에 없으니까 장군님은 정중하게 부탁만 하시면 됩니다.”
“ 뭐라고 하면 되냐?”
“ 그것까지 제가 가르쳐드려야 합니까?”
“ 됐다. 자식아 그냥 해본 말이다.”
“ 그리고 이거.”
“ 뇌물이냐?”
“ 좀 많아서 인편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인편으로 보내면 정말로 뇌물이라고 할 것 같아서 오시라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 그들은 자식들이 흑랑기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느냐?”
양성일은 안쓰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그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장군님. 이기적이라고 하겠지만 제 편하고자 이러는 겁니다. 아침마다 이명으로 돌려오는 기상나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 아직도 그 소리가 들리느냐?”
“ 얼마 전엔 그쳤다고 좋아했는데, 아니더군요.”
“ 알았다. 전해주도록 하마. 그런데 얼마냐?”
“ 삼백만 정도 됩니다.”
“ 강도짓이라도 한 거냐?”
양성일은 깜짝 놀랐다. 연우강이 잠룡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말은 이곳에 와서 들었다. 그런데 그 금액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 저것들도 전부 파는 것들입니다.”
연우강은 벽에 진열돼 있는 물건들을 가리켰다.
“ 넌 황실에 들어오는 것보다 이곳이 더 낫겠다.”
“ 그렇습니다. 장군님. 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저보다 더 똑똑한 놈들이 넘치는 황실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그보다 얼마나 찾았습니까?”
“ 절반 정도는 찾았다. 그런데 이 돈은 어떻게 썼으면 좋겠느냐?”
“ 땅도 사주시고, 서당도 지어주시고, 장군님이 적당히 알아서 해 주십시오.”
“ 알았다. 그렇게 하마. 그건 그렇고.....”
“ 무상 녀석의 일이 걱정되십니까?”
“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황상을 속이는 건 용서가 안 된다. 만일 그 일이 밝혀지는 날이면 나나 너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전부 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 그 건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 어떻게 처리한단 말이냐?”
“ 정 안되면 응천부를 찾아가겠습니다.”
“ 찾아가서는?”
“ 담판을 지어야지요.”
“ 어떻게 담판을 짓는단 말이냐?”
“ 그건 걱정 마시고 진급할 생각이나 하십시오. 황실로 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종일품입니까?”
“ 이 녀석아, 종 일품이면 최고자리야. 위엔 정일품 한 품계밖에 없다는 것도 모르느냐?”
“ 긴장하지 않으시니까 턱살과 뱃살이 늘어지는 거 아닙니까, 육십도 안 된 분이 그게 뭡니까?”
“ 보기 싫은 게냐?”
“ 보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살찐 돼지 같습니다.”
“ 북경에서는 이게 유행인데.”
양성일은 뱃살을 슥슥 쓸었다.
“ 무공 비급 하나 드려요?”
“ 무공 비급은 황실무고에 넘쳐난다. 녀석아.”
“ 다음에 뵐 때는 무사안일에 젖은 도독동지 말고 첨목장군 양성일 장군님을 보고 싶습니다.”
“ 알았다. 노력해 보마. 그만 술이나 마시자.”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화주로 시작했던 술자리는 팔려고 숨겨두었던 고급술까지 전부 나오고 나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양성일은 대야벌 수뇌들과 식사를 한 후 저녁 무렵 남천문을 나섰다. 양성일이 연우강과 독대를 하고 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자들이 많았지만, 과거 전장에서 연우강이 모셨던 장군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관심은 금세 사그라졌다.
그리고 잠룡강호행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과정을 수행하기 위한 조를 편성하는 날이 다가왔다.
훈련장에 모여 있는 잠룡들의 얼굴엔 그동안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눈 아래가 검ㄱ 그늘진 자들은 물론이고 입술이 부르튼 자들까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나가는 잠룡강호행은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시점까지라고 돼 있다.
그 말은 곧 이전까지의 성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마지막 평가는 오직 잠룡강호행으로 한다는 의미였다. 조를 선택하는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벌주의 치하의 말이나 삼궐칠련십림 수뇌들의 격려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오히려 각 조 조장이 단상으로 올라오기만 기다렸다. 조장의 소개가 끝나면 조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오고 열 명의 조장이 단상으로 올라오자 잠룡들은 숨을 죽였다. 더불어 행사를 구경 나온 무인들은 흥미 반 호기심 반의 얼굴로 단상으로 올라온 잠룡들을 주시했다.
가장 먼저 나온 자는 일 조 조장인 담대무궁이었다.
“ 난 일 조 조장인 등천대룡 담대무궁이외다!”
“ 와아!”
그가 올라오자 사오십 명의 잠룡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 일 조는 벌써 채운 모양입니다. 벌주님.”
묵야련 련주 묵연도노 유자웅이 담대만승을 향해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 그런 모양이오.”
공적인 자리라고 하지만 자식이 다른 잠룡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대만승은 흐뭇한 얼굴로 담대무궁을 지켜보았다.
“ 난 일 조 조원이 될 잠룡들에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약속하겠소. 가장 빠르고,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하여 일 조가 아니면 대야벌을 이끌어 갈 사람이 없다는 걸 대야벌 어르신들 앞에 증명해 보이겠소. 나 담대무궁을 믿고 따를 잠룡들은 일 조를 선택하시오!”
“ 와아!”
담대무궁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담대무궁이 물러나고 두 번째로 윤허가 앞으로 나왔다.
“ 난 구룡대군 윤허요!”
“ 와아!”
“ 우와아!”
윤허의 인기는 담대무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얼마나 함성이 요란한지 그는 손을 들어 저지해야 했다. 잠룡들이 함성을 그치자 윤허는 말을 이었다.
“ 난 긴말하지 않겠소. 우리 이 조는 임무가 끝나고 남천문으로 들어올 때도 이곳에서 나갔던 인원수가 그대로 들어오게 될 것이오. 나 윤허는 살수들의 암살로부터 이 조를 기키는데 목숨을 걸 것이오!”
“ 와아!”
“ 우와아!”
잠룡들의 호응이 담대무궁보다 훨씬 높자, 조금 전 담대만승이 그랬던 것처럼 무궐 궐주와 구중련 련주를 비롯한 두 세력 소속 무인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 난 무영사룡 율한천이오.”
윤허가 물러나자 차가운 인상의 율한천이 앞으로 나와 자신을 소개했다.
“ 와아!”
“ 와아!”
율한천에 대한 잠룡들의 반응은 담대무궁과 비슷했다.
“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한 말을 여러분도 아실 거요. 하지만 우린 양민이 아니고 무인이오. 무인은 길이 아니면 만들어서 가야 하는 자들이오. 단.....”
율한천은 말을 끊고 잠룡들을 보았다.
잠시 동안 잠룡들을 보던 그는 내공을 실어 강하게 외쳤다.
“ 무인이 만드는 길은, 최고의 자리로 통해 있어야 하오. 최고가 되고 싶은 잠룡은 나를 따르시오!”
“ 우와아!”
“ 와아!”
금방 소개했을 때와는 달리 엄청난 함성이 잠룡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설사 율한천의 조가 아니더라도, 최고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가는 자들이 무인이라는 그의 말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율한천의 뒤를 이은 잠룡은 사 조 조장인 전마 사유성이었다. 그 역시 앞서 자신을 소개했던 자들과 마찬가지로 열화와 같은 성원을 한 몸에 받았다. 더불어 군마련의 련주인 십절무적검 담대천호의 얼굴을 뿌듯하게 해주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섯 번째로 나선 자는 다라밀영 이리파였다. 포달랍궁 출신인 그는 중원에 특별한 연고가 없어 열렬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지만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 난 육 조 조장인 낭혼 북리태우요. 원래 이 자리는 섬전십삼검 남궁철상의 자리였다는 것은 여러분도 아실 거요. 하지만 나 북리태우를 선택한 잠룡들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요. 왜냐하면 나 북리태우의 사전에 패배란 낱말이 없기 때문이오. 승리를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시오.”
“ 멋지다!”
“ 남궁철상보다 훨씬 낫다!”
자신감 넘치는 북리태우의 연설에 잠룡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 어떤 자죠?”
북리태우란 자를 쳐다보고 있던 연우강은 이지약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말투로 봐서는 북쪽 출신인데 특별히 알려진 정보는 없어요.”
“ 무공은 어느 정도죠?”
“ 우리와 비슷해요.”
“ 그동안 뭐 한겁니까?”
“ 알려지지 않은 자와 무공이 비슷하다고 나무라는 거예요?”
이지약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 그럼, 잘했다고 칭찬할 줄 알았어요?”
“ 나름 열심히 했어요. 소기의 목적도 이루었고요.”
“ 그런 사람의 입에서 비슷하다는 말이 나옵니까?”
“ 내 차례니까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요.”
북리태우가 뒤로 물러서자 이지약은 단상 중앙으로 나갔다.
“ 난 이지약이에요.”
나직했지만 내공이 가득 실린 그녀의 목소리는 훈련장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바로 앞에 있던 잠룡들은 물론이고 후미에 있던 무인들도 이지약의 내공에 깜짝 놀랐다.
“ 난 내세울 게 별로 없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데 최선을 다할 거라고 약속은 할 수 있어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 와아!”
“ 우와아!”
조장들 중 유일한 홍일점이면서도 천하절색인 그녀가 내공마저도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잠룡들은 열광적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잠룡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오십 명을 채우는 건 일도 아닐 듯했다.
잠룡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이지약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오자 회색 무복을 걸친 사내가 중앙의 단상으로 걸어갔다.
“ 난 무무대야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나천후요.”
“ 알아요?”
연우강은 이번엔 나천후라고 하였던 사내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지약을 향해 물었다.
“ 이름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 그래요. 그보다 나 어땠어요?”
조금 전 소갯말에 대한 물음이었다.
“ 엉덩이를 좀 많이 맞아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렇게 형편없었어요?”
이지약은 얼굴을 찌푸렸다.
“ 비슷하지 않아요?”
“ 뭐가요?”
“ 저 친구의 기운.”
연우강은 나천후를 턱으로 가리켰다.
“ 누구하고 비슷하다는 거죠?”
“ 사람이 아니고 건물을 말하는 겁니다. 이 소저.”
“ 어떤 건물하고 비슷하다는 건데요?”
“ 승천비고.”
“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사람의 기운이 어떻게 건물과 비슷해요.”
“ 그래서 엉덩이를 많이 맞아야 한다는 겁니다.”
“ 난 천리추혼객 하정일이오. 앞서 많은 분들이 좋은 말을 전부 가로채 가서 난 특별히 할 말으 없소. 다만......”
“ 아프게 때릴 건가요?”
“ 손바닥에 침까지 발라가면서 사정없이 후려칠 겁니다.”
“ 그 정도인가요?”
“ 어떤 분이 내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정상 주변은 물론이고 아래쪽까지 전부 살필 수 있다고요.”
“ 무슨 소리죠?”
“ 이 소저는 정상으로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쪽은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내게 엉덩이 맞고 싶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자 이지약은 전음으로 버럭 소리쳤다.
“ 그 사람이 말하길, 정상에서는 전체를 봐야 흐름을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흐름은 찾으려 한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고도 하였습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면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밝히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몸으로 느끼는 느낌 말입니다.”
[ 그럼 방금 그 느낌을 말한 거예요?]
“ 난 세월을 느꼈습니다.”
[ 그래서 승천비고라고 했던 거예요?]
“ 승천비고에서도 세월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연 공자 차례 아닌가요?”
많은 잠룡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향해 있자 이지약은 눈썹을 씰룩했다.
“ 이런, 빠르기도 해라.”
연우강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앙 단상으로 향했다.
“ 반갑소. 여러분. 똥지게 연우강이오.”
연우강은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 반갑소. 연 공자.”
“ 그동안 잘 지냈소?”
지금껏 긴장한 얼굴로 조장들의 말을 기다렸던 것과는 달리 잠룡들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 혹시 내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소?”
“ 묵사를 발견한 현장에 있었다고 하던데 묵사가 어떤 검인지 알고 싶소. 연 공자.”
‘ 얼레? 저 친구?’
일순 연우강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담대만승에게서 묵사를 어떻게 빼앗아가나 몹시 고민스러웠는데 방금 잠룡의 질문으로 인해 해결책이 떠오른 것이었다.
“ 아주 좋은 질문이네. 친구. 하지만 친구는 묵사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네.”
“ 보여주기라도 하겠단 말입니까?”
두 사람의 말투가 느닷없이 반말과 공대로 바뀌었지만 너무 자연스러워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물론이네. 친구.”
“ 어떻게 보여주겠단 말입니까?”
“ 혹시 얼마 전에 다녀간 양성일 도독동지 기억하는가?”
“ 전우였다고 들었습니다.”
“ 전우라고 하긴 그렇고, 아무튼 전장에서 함께 싸운 건 맞네. 그 양반과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꼭지가 홱 돌 때까지 마셔버린 모양이네.”
“ 그때 묵사 이야기가 나온 겁니까?”
“ 아니네.”
“ 그럼?”
“ 술이 깨고 나서 양성일 도독동지께서 느닷없이 묵사에 대해 묻더구먼.”
“ 그분도 묵사에 대해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 나는 기억이 없는데 그 양반이 말하길, 물건은 발견한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지 않느냐며 화를 내더군. 그래서 무공도 없는 녀석이 검을 지니면 뭐 하겠냐고 했네. 그런데 그 말에 더 화를 내면서 대명 제국의 정천호가 묵사 따위도 지니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냐며 큰소리를 쳤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벌주께 말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연우강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잠룡들은 물론이고 후미에 있던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담대만승에게로 향했다.
‘ 이건?’
담대만승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분명 도독동지는 묵사에 대해 언급을 했고 보여주기까지 했다. 묵사를 본 양성일은 명검을 보았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어떻게 찾았느냐며 묻기는 했다.
하지만 곧바로 천옥에 수감 중인 두보관에 대한 말을 꺼냈을 뿐 묵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런데 녀석의 말대로라면 체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니 양성일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금 녀석의 말대로라면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묵사를 연우강에게 주지 않으면 도독동지 양성일의 부탁을 공개적으로 거절한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묵사 때문에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묵사의 신물을 함부로 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담대만승은 고개를 돌려 만우량을 보았다.
[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벌주님.]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는가?]
[ 묵사는 대야벌이 아닌 무성의 지존신물입니다. 그런 물건을 대야벌에서 신성시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연우강에게 줘버리는 게 낫습니다.]
[ 무성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저들에게 보여주자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더불어 묵사가 대야벌 외부로 나가면 보물 쟁탈전까지 벌어질 것입니다. 그럼 무림을 혼란스럽게 하고자 하는 벌주님의 목적도 더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연우강이 주으면 상단 만드는 걸 포기해야 하네.]
[ 범 궁주가 연금석의 동생들과 접촉하고 있는데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 쥐를 잡는데 고양이의 색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담대만승은 연우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좋다. 연우강. 묵사를 네게 주겠다.”
“ 도독동지 양성일 장군도 기뻐할 것입니다. 벌주님.”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 아직 네 소개를 하지 않았다. 연우강.”
“ 꼭 해야 하는 겁니까?”
“ 굳이 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명색이 조장인데 잠룡들에게 포부 정도는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
“ 그래야겠군요.”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눴던 사내를 보았다.
“ 묵사 실물을 보게 됐네, 친구.”
“ 전 십 조로 가겠습니다. 조장.”
“ 그건 내 말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네. 친구.”
연우강은 시선을 들어 잠룡들을 보았다.
“ 전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니까 방금 벌주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 거다. 벌주는 내게 묵사를 하사하기로 하였고, 난 그 묵사를 들고 강호로 나갈 거다. 예쁜 꽃에는 나비와 벌이 꼬이고, 미인 곁에는 사내새끼들이 꼬이고, 보물 옆에는 정신 나간 무인 새끼들이 꼬이게 되는 게 섭리다.
즉 나와 함께 강호로 나가는 십 조는 죽었다고 복창하면 된다는 뜻이다. 더불어 십 조는 임무 수행 같은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살아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는지 그걸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우리 십 조가 살아남아서 남천문을 넘는 순간, 우리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다. 난 십 조를 살귀로 만들어 줄 참이다. 단, 살아남는 자들만 그렇다는 말이다.”
잠룡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잠룡들뿐만이 아니었다. 귀빈석에 있던 수뇌들과 후미에 있던 무인들조차도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가 왜 정천호가 됐는지, 그 어린 나이에 천이백 명의 부하를 거느렸는지 비로소 알 수 있을 듯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잠룡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언변과 반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는 저 모습이 바로 녀석의 진면목이었다.
“ 그리고!”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듯, 연우강은 품속에서 책자를 꺼내 들었다.
잠룡들은 일제히 연우강을 보았다.
“ 이 책자에 보면 그동안 내게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갔던 잠룡들의 이름과 밀린 외상값이 적혀 있다. 이왕 밖으로 나가는 길에 그동안 밀린 외상값도 받을 거니까 각자 집에 연락을 취해두도록 해.
돈이 부족하다거나 시간을 달라고 하면 큰일 난다는 사실을 명심해. 외상값을 준비하지 않으면 나는 며칠이고 그곳에 머물 거야. 그럼 묵사를 노린 자들이 그 집으로 들이닥칠 테고,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온 집안이 몰살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알겠습니다. 조장!”
잔뜩 얼어있다가 느닷없이 외상값 이야기가 나오자 한순간에 마음이 풀린 잠룡들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내질러 버렸다.
“ 좋아,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연우강은 손을 휘 저으며 자리로 들어갔다.
“ 꼭 그 말을 하고 싶어요?”
연우강이 돌아오자 이지약은 웃으며 말을 건넸다.
“ 무슨 말요?”
“ 외상값 말이지 뭐겠어요? 앞부분은 이거였는데 나중에 한 말 때문에 맥이 빠지고 말았어요.”
이지약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웠다가 아래로 꼬꾸라뜨렸다.
“ 묘아 당신이 제일 많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바로 집에 연락해서 돈부터 준비하라고 해!”
연우강은 윽박지르듯 이지약의 얼굴 앞으로 머리를 디밀었다.
“ 호호호! 구림세가도 찾아갈 건가요?”
“ 당연히 그래야지요. 여기서 북경까진 그렇게 멀지도 않는데.”
“ 알았어요. 일단 연락을 해놓기는 할게요.”
“ 그런데 정말로 잠룡들이 오지 않으면 어쩔 거예요?”
그녀는 단상 아래쪽에 나란히 꽂힌 깃발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그럼 혼자 가야지 별 수 있습니까?”
“ 외상값 받으러?”
“ 물론이죠.”
“ 지금부터 잠룡들은 각자가 원하는 조를 선택하라!”
바로 그때 잠룡궁의 궁주 천기만리통 혁세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잠룡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잠룡 중 한 명이 움직이자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 얼레?”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아래쪽을 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십 조 깃발이 꽂힌 쪽으로 제법 많은 무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남궁세가 무인들과 하오밀문 무인들이었다. 팔아달라며 허일구에게 건네준 잠룡쟁패로 남궁세가 무인과 하오밀문 무인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그로선 당연한 의문이었다.
“ 이봐! 내 말 못 들었어? 나랑 함께 다니면 죽는다고.”
연우강은 십 조 깃발 앞으로 모여든 잠룡들을 보며 소리쳤다.
“ 상관없습니다. 조장님. 우린 조장님과 함께 모험을 해보겠습니다.”
잠룡들 중 한 명이 자신있는 얼굴로 소리쳤다.
“ 난 외상값도 받으러 다녀야 하는데?”
“ 저희도 외상값을 받는데 거들겠습니다.” “ 외상값은 혼자 받으러 가야지 여럿이 함께 받으러 가면 건달이라고 착각합니다.”
“ 그럼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그래도 이건 초반부터 너무 많은 거 아냐?”
“ 빨리 채워지면 좋지 뭘 그래요.”
몽요가 배시시 웃으며 남궁운화와 함께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들 뒤편으로는 수여설을 비롯한 호위들 소개시켜 주었던 잠룡들이 따르고 있었다.
“ 난 책임 못집니다.”
연우강은 수여설을 보며 말했다.
“ 조장이 책임을 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지죠?”
“ 전쟁터에서는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겁니다. 그런데 자넨 웬일이야?”
거대한 덩치 사내가 다가오자 연우강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윤허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거철산이었다.
“ 저는 안 됩니까?”
“ 안 되는 게 아니라, 윤허 그 친구를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거지.”
“ 그쪽보다는 십 조가 더 마음에 듭니다.”
“ 좋아, 거철산, 일단 들어와.”
“ 저도 있습니다. 조장님.”
눈이 유달리 작아 보이는 사내가 웃으며 다가왔다.
“ 오! 묵사를 얻게 해준 장본인이 왔구먼. 이름이 뭔가?”
“ 별호는 염왕수고 이름은 장사덕입니다.”
“ 장사덕이라면 외상을 한 번도지지 않았던 모양이네?”
“ 그렇습니다. 조장님. 집안이 빈곤해서 비싼 물건을 쓸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 앞으로는 빈곤 걱정 따윈 하지 않아도 된다. 장사덕. 죽지만 않으면 넌 부자가 될 거다.”
연우강은 빙긋 웃으며 단상 아래쪽으로 다리를 늘어뜨리며 걸터 앉았다.
“ 전쟁터에서 죽지만 않으면 장수를 누린다는 것고 같은 말 같습니다. 조장님.”
“ 죽지 않는 걸 장수했다고 하는 거 맞잖아. 그리고 앞으론 광랑이라 불러라.”
“ 사초보단 훨씬 낫습니다. 광랑.”
“ 장사덕 넌 지금 당장 남천문을 나가서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좋은 주루를 통째로 빌려라. 빌린 사람 이름은 야장 장주 무원, 인원 오십 명, 날짜는 내일 저녁이다.”
“ 알았습니다. 광랑.”
“ 장사덕 너는 앞으로 잡랑이다.”
“ 잡랑이라면......”
“ 말 그대로 잡종 이리라는 뜻이다.”
“ 끄응!”
장사덕은 얼굴을 찌푸렸다. 잡종 이리라는 말에서 혓바닥을 내밀고 꼬리를 흔드는 똥개가 떠올랐다.
“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내 느낌이니까.”
“ 다녀오겠습니다. 광랑.”
장사덕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날려 자리를 떴다.
“ 저도 별명을 지어줄 건가요?”
몽요가 생글 웃으며 물었다.
“ 몽요는 환랑!”
“ 그럼 난?”
“ 수여설 당신은 하얀 이리, 백랑.”
“ 난?”
“ 남궁소저는 창랑.”
“ 저도 있습니까?”
“ 거철산 너는 거랑.”
“ 감사합니다. 광랑.”
“ 방금 호명한 다섯 명은 오군의 군장이야. 진형은 마름모꼴 진형을 유지할 거고, 전군은 환랑, 우군은 백랑, 좌군은 창랑, 후군은 권랑, 중군은 잡랑이 맡을 거야. 편의상 전후좌우중으로 나눴지만 급한 상황이 되면 나아가는 쪽이 전군이 된다는 걸 명심해.”
“ 알았어요.”
“ 알겠습니다. 광랑.”
일행은 빙그레 웃으며 소리쳤다.
“ 각 군장은 조원들을 선발하도록. 선발이 끝난 조는 해산해 내일 이곳에 다시 집합하도록 하고, 서로간의 인사도 물론 내일 할 거야.”
“ 알겠습니다. 조장님.”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들어가게요?”
몽요가 조금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 난 작별 인사 할 사람이 많습니다. 몽요. 내일 보자고.”
연우강은 조원들에게 손을 흔들며 야장으로 향했다.
“ 우리가 가장 먼저 해산할 것 같은데요?”
몽요는 대견한 얼굴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보았다.
다른 조는 인사를 하느라 조직 구성을 할 생각도 못 하고 있는데 십 조는 이미 조직 구성을 끝내고 해산 준비를 하고 있다. 오 년 동안의 군 생활이 빛을 발하고 있는 듯했다. 그로부터 반시진 후, 조원 배치까지 끝낸 십조는 가장 먼저 훈련장을 떠났다.
한편.
야장으로 돌아온 연우강은 막장을 만나고 있었다.
“ 어느 정도냐?”
“ 따라 나갈 형편이 아니다.”
만일 연우강이 무공을 익힌 사실을 몰랐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연우강을 따라나서는 것보다 남아 무공을 강하게 하는 게 그를 돕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참기로 했다.
“ 머잖아 널 도와줄 사람이 찾아올 거야. 그에게 많은 걸 배워라.”
“ 누가 온다는 거지?”
“ 너와 형수씨의 혼인 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열심히 하고.”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툭 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도 연우강은 무원과 창노를 만나고, 다른 일꾼을 만나 인사를 하느라 바쁘게 다녔다.
그리고 다으 날 저녁 무렵.
사망궤를 걸머진 연우강은 무원 일행의 배웅을 받으며 남천문을 나섰다. 그가 메고 있는 사망궤 위쪽엔 묵사가 놓여 있었고, 아래쪽에 있는 자루 안에는 나머지 파천육기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신주제일검 욱일승, 묘강독존 갈인효, 북해어옹 수천월이 자기 몸보다 더 커 보이는 보자기를 드에 진 채 따르고 있었다.
그런 연우강이 떠나는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무성 서열 이 위이자 군마련 련주인 십절무적검 담대천호였다.
굳이 이곳에 나올 필요가 없는 그는 전마 사유성을 배웅 나온 것처럼 하여 나와 있는 이유는 연우강이 가진 묵사 때문이다.
‘ 형님, 당신은.....’
그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형님인 담대만승에게 묵사를 달라고 몇 번이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더니 결국엔 연우강에게 줘버리고 만 것이다.
‘ 알아서 찾아가라는 말로 받아들이겠소. 형님.’
그는 차가운 눈으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가 지옥의 무성에 도착한 것은 한 시진 후였다. 무성에는 이미 대부분의 무영들이 자리해 있었다.
묵사가 연우강의 손에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전날 회의를 소집해 두었다.
그가 앉자마자 삼 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묵사는 우리 무성의 소유요. 이 호.”
“ 나도 알고 있소. 삼 호. 하지만 지금 당장 묵사를 찾아오는 건 불가능하오.”
“ 벌주 때문이오?”
“ 그렇소. 묵사를 연우강에게 준 사람은 다름아닌 대야벌의 벌주요. 그가 묵사를 건네준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연우강을 없애고 묵사를 찾아오게 되면 우리 행동이 항명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오.”
“ 그럼 어떻게 하잔 말이오?”
“ 일단은 감시만 하고 있어야 하오. 놈이 묵사를 가지고 강호로 나가는 순간 무인들은 벌떼처럼 달려들 거요. 그들과 드잡이를 벌일 때 우리가 나서야 하오.”
“ 알았소.”
“ 지금은 그것보다 민웅철과 용환의 죽음에 대해 토의를 해야 할 때요.”
“ 민웅철의 유품을 정리해서 가져왔소. 이 호.”
구 호가 검집이 비어져 나온 작은 보자가 히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 유품이라도 무성에 안장하잔 말이오?”
“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육신은 이곳에 묻히지 못한다고 해도 무성패가 있으니까 후예를 거둘 수도 있을 거요.”
“ 무성패를 남겼단 말이오?”
담대천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무성패가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지나 간 탓이었다.
“ 그렇소. 이 호.”
구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봅시다!”
담대천호는 구 호의 앞을 보며 손을 들어올렸다.
허공섭물이 발휘되면서 보자기가 둥실 떠올라 담대천호 앞으로 날아왔다.
둥둥! 둥둥! 둥둥!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며 소름이 돋는다.
털썩!
보자기가 탁자 위로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담대천호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옷과 검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검 옆에 둥근 패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앞면은 여느 무성패와 다르지 않았다. 담대천호는 무성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성패를 잡아가는 그의 손이 수전증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렸다. 담대천호를 바라보는 무영들의 눈빛이 의아하게 변했다. 이 호가 저렇듯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기 때문이었다.
와락!
무영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담대천호는 무성패를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뒤집었다.
“ 허억!”
무성패를 쳐다보는 담대천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곧이어 그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 안광이 향한 곳은 무성패 후면 중앙이었다.
일(一)
무성 무영 서열 일 위를 나타내는 숫자.
그것은
“ 주-선-여어업!”
살기가 잔뜩 내포된 포효가 담대천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 4권 끝)
황금백수 5권 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