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44화 (44/232)

제1장 임무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일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무성패. 다른 이름으로는 묵사패라고 불리는 그것은 이곳에 모인 무영들에게 있어 배신의 낙인이자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십삼 년 전 그날 이곳에서 묵사 주선엽에 의해 열 명의 무영이 즉사했고, 서른 명은 부상을 당했다.

그랬던 그의 상징인 묵사패가 나타났으니 경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그는 정말 죽은 거요?”

담대천호를 향해 묻는 구 호의 목소리가 미미하게 떨려 나왔다.

“ 확실하게 죽었소. 구 호. 그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소. 그곳은 정상적인 몸이라고 해도 살아 나오기 힘든 곳이오. 하물며 심맥이 파열되고, 두 팔과 다리가 잘린 그가 살아 남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안정을 되찾은 듯 담대천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 그럼 그건.....”

구 호는 담대천호 앞에 놓인 묵사패를 가리켰다.

하지만 담대천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또한 묵사패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 이 묵사패에 대해 설명해 줄 사람은 내가 아니고, 민웅철의 소지품을 가져온 구 호요.”

“ 나도 그게 묵사패라는 사실을 지금 알았소이다.”

“ 민웅철의 몸에 있었던 건 확실하오?”

“ 그렇소. 염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들었소.”

“ 누군가가 민웅철의 품속에 묵사패를 집어넣었다는 말인데....”

담대천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깊이 생각할 때 생겨나는 그의 버릇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죽은 무영은 여섯 명, 그둘 중 두 명은 자신이 죽였으니 실제로 살해를 당한 자는 넷이다.

야효를 비롯한 풍천마인은 암기에 죽었고, 철검광자 추소백은 백옥수에, 건곤신패 민웅철은 살수 둘과 동귀어진, 적사진인 용환은 살수의 수법에 당했다. 사인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힘들었다.

“ 짐작 가는 자라도 있소?”

이번엔 삼 호가 물었다.

“ 신주제일검, 묘강독존, 북해어옹을 비롯한 죄수들은 주선엽과 직접 얼굴을 대할 수 있었던 자들이고, 여섯 중 넷은 연우강을 추적하던 자들어었소. 삼 호.”

“ 하지만 추소백은 백옥수에 죽었고, 민웅철과 용환은 살수들에게 죽었소.”

“ 사인이 전부 다르단 말이구려.”

방금 그렇게 생각했던 터라 담대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이 호. 죽었다는 공통점 말고는 어떤 단서도 없는 실정이오.”

“ 공통점은 또 있소. 삼 호.”

“ 어떤 공통점이 있단 말이오?”

“ 죽은 자들이 전부 무영이란 사실이오.”

담대천호의 말에 무영들은 일제히 신음을 내뱉었다.

“ 그 말은 곧 암중의 살인자는 우리 무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이오. 하지만 우린 그에 대해 전혀 모를뿐더러 우리들도 복면을 쓴 채 서로를 속이고 있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삼 호의 입에서 당황한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 먼저 내 말에 대답을 해 주시오.”

담대천호는 자리를 꽉 채운 무영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 복면을 쓰고 무너진 무성으로 오는 이유가 뭐요?”

“ 그건.....”

삼 호는 할말이 없었다. 복면을 쓰고 무성으로 오는 이유. 전대 무영으로부터 무성패를 물려받았고, 대야벌을 세운 이들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을 뿐, 이곳으로 온ㄴ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무영의 일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면 족했다.

“ 우리에겐 대야벌을 세운 무영의 후예라는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없소. 정마 지금 이 상태가 좋소?”

담대천호는 무영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 어떻게 하자는 거요?”

삼 호의 목소리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 좀더 현실적으로 살자는 거요. 우리는 힘을 모으면 당장 대야벌 최고의 세력이 될 수 있소.”

“ 무성을 외부로 드러내자는 말이오?”

“ 그렇소. 하지만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내자는 건 아니오. 최소한 이곳에서만큼은 복면을 벗자는 거요.”

“ 그건.......”

“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게 아니오. 이곳에서 다음 모임을 가질 때 복면을 벗어도 상관없는 무영만 참석하면 되오.”

“ 만일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참이오?”

“ 내 무성패를 내놓을 참이오.”

“ 무성을 떠난단 말이오?”

“ 살 길을 찾겠다는 말이외다.”

“ 살길?”

“ 난 십일 호가 건곤신패 민웅철이란 사실을 그가 죽고 나서 알았소. 그런데 그를 없앤 자는 그의 품속에 묵사패를 집어넣었소. 그게 무슨 뜻이겠소?”

“ 살인자가 우리 무영을 전부 알고 있다는 말이오?”

삼 호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담대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질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호!”

삼 호는 버럭 소리쳤다.

“ 굳이 내 대답이 필요한 상황이오?”

“ 끄응!”

삼 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영들을 살피던 담대천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면 분위기 조성은 됐고, 마지막 쐐기만 박아주면 될 터였다.

“ 다음 모임 때 나는 이곳에서 복면을 벗고 여러분들을 기다릴 거요. 만일 절반 이상 오지 않으면 난 무성패를 놓고 조용히 떠나겠소.”

앞에 놓인 묵사패를 내려다보는 담대천호는 몹시 흡족했다.

야효와 풍천마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 무영들의 죽음과 이번에 나타난 묵사패. 누가 묵사패를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주선엽의 신물인 묵사패로 인해 무영들은 위기감을 느꼈을 테고, 모임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무성의 역사는 새로 쓰여질 것이다.

‘ 누군지 몰라도 넌 실수했다!’

담대천호는 내심 중얼거렸다.

********

담대무궁은 번듯하게 접어진 금색 비단을 펼쳤다.

잠룡강호행의 임무가 들어 있는 이 비단을 받은 건 대야벌을 나서기 전이다. 하지만 그는 풀어보지 않았다.

임무의 경중에 상관없이 가장 빠르게 완수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객잔에 들어와서야 임무가 들어 있는 비단을 풀어보는 이유는 호위를 위해 가문을 떠나온 노중산의 말 때문이었다.

“ 놈이 동쪽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소?”

“ 그렇습니다. 공자.”

“ 정말 북경으로 갈 셈인가?”

담대무궁은 절로 얼굴을 찌푸렸다. 각 조장을 소개하는 날, 녀석은 이지약에게 외상값을 받으러 북경으로 간다고 하였다. 그때는 그냥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녀석이 조원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자 동쪽으로 가서 해야 할 임무를 받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임무가 궁금해졌다.

“ 이건?”

안쪽에서 첩지를 꺼내 펼친 담대무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 천외흑막 괴멸.

천외흑막 막주의 머리를 가져오면 후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 아들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군.”

담대무궁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외흑막은 대막 북부를 장악하고 있는 팔황새의 일파다. 비록 새외귀막에서 떨어져 나왔다고 하지만 오십 명으로 그들을 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도대체 천외흑막을 괴멸시키라는 의도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 왜 그러십니까?”

노중산은 첩지를 흘낏 쳐다보며 물었다.

“ 보게.”

담대무궁은 첩지를 내밀었다.

“ 헐!”

어이가 없는 노중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말이 안 되는 임무였다. 전대 벌주 장만보가 팔황정벌에 나서 그들을 깨트렸다고 하지만, 삼십 년이면 세력을 복구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더불어 몇 년 전에는 새외귀막의 정예인 혈도부대까지 나타나지 않았던가. 비록 누군가에 의해 전멸했다고 하지만 혈도부대가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야벌 수뇌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단 오십 명으로 그런 자들을 없애고 오라니.....

“ 아무래도 조원들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

“ 조원들의 가문을 이용할 참입니까?”

“ 우린 남의 힘을 빌릴 정도로 약하지 않네. 마노. 난 우리 힘으로 이번 일을 처리할 생각이네.”

담대무궁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 긴 여정이 될 것 같군요.”

노중산은 첩지를 건네며 우려 어린 얼굴로 말했다.

“ 날 믿게. 난 등천대룡 담대무궁이네. 마노 그대는 연우강 그놈의 행적이나 신경 쓰도록 하게.”

담대무궁은 첩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첩지를 보고 있는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북경의 한 객잔에서 쉬고 있는 연우강도 첩지를 보고 있었다. 실내에는 다섯 조장을 비롯한 욱일승 일행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연우강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 신강 북천지옥부 괴멸.

북천지옥부 부주의 머리를 가져오면 후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 미친놈.”

연우강은 픽 웃었다.

“ 누가 미친놈이란 거죠?”

수여설은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담대만승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수 소저.”

“ 벌주?”

“ 담대만승으로 불리는 놈은 벌주밖에 없잖습니까?”

“ 벌주를 그렇게 불러도 돼요?”

“ 눈앞에 없는 데 미친놈 아니라 개새끼면 어떻습니까?”

“ .....!”

수여설은 황당한 얼굴로 몽요를 보았다.

“ 저 사람 말투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 해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세요.”

몽요가 웃으며 말했다.

“ 그런가요?”

수여은 다시 연우강을 보았다.

“ 북천징고부라고 돼 있습니다.”

“ 신강에 있는 그 북천지옥부란 말인가요?”

수여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북천지옥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곳은 신강의 북천지옥부밖에 없고, 그곳은 팔황새의 일파다.

“ 그렇습니다. 수 소저.”

“ 북천지옥부 부주의 머리라도 가져오라고 한 거예요?”

수여설을 웃으며 물었다.

오십 명이 전부인 자신들에게 그런 임무를 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 그렇습니다.”

“ 어?”

수여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수여설럼 빙그레 웃고 있던 다른 이들 또한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 정말이에요?”

수여설은 확인하듯 물었다.

“ 그렇습니다. 수 소저. 주 임무는 북천지옥부 괴멸이고, 그곳 부주의 머리를 가져오면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돼 있습니다.”

“ 어디 봐요.”

수여설은 연우강의 손에서 첩지를 빼앗아갔다.

“ 맙소사!”

첩지를 들여다보던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사실이었다. 첩지에는 방금 연우강이 했던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 나도 좀 봐요.”

이번엔 몽요의 손에 첩지가 들렸다.

그녀 역시 수여설과 다르지 않았다. 할 말을 잃은 듯 몽요는 멍한 얼굴을 했다.

“ 우리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봅니다. 광랑.”

맨 마지막으로 첩지를 본 장사덕이 연우강에게 건네주며 투덜댔다.

“ 걱정 안 돼?”

“ 걱정한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닌데, 사서 고민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장사덕은 씨익 웃었다.

“ 좋은 습관이야. 맞아,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좋아질 것도 없을 땐 그냥 즐기면 되는 거야. 이건 태워버리자고.”

연우강은 촛불 위로 첩지를 가져다 댔다.

“ 어떻게 할 거죠?”

불타는 첩지를 보며 수여설은 물었다.

“ 북해빙궁에서 수 소저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되물었다.

“ 정확하게 뭘 알고 싶은 거죠?”

“ 절정 고수 이삼백 명 가량을 빼올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 현재 생활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집을 떠나 삶에 변화를 줄 필요가 없죠.”

“ 떠밀려 왔다는 말씀입니까?”

“ 그런 셈이에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돌아가면 북해빙궁의 궁주가 될 자신은 있어요?”

“ 지금은 자신 있어요.”

“ 수 영감?”

“ 작은 할아버지 되세요.”

“ 그럼 기연을 얻은 거네.”

“ 덕분에.”

“ 덕분에?”

“ 연 공자가 소개시켜 줬잖아요.”

수여설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 느낌이 별론데......”

연우강은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에 대해 수천월이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언젠가는 알 건데 상관없지.’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수여설을 보았다.

“ 그런데 백랑이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요?”

“ 백랑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그 호칭을 부를 순 없죠.”

“ 그렇군요.”

수여설은 모호한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그는 특이한 사람이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보이다가도 어쩔 땐 완벽하게 세공된 보석을 보는 듯한다. 좋다 나쁘다는 평가가 불가능한 사람.

지금까지 연우강의 인상을 그랬다.

“ 진천권가는 어때?”

연우강이 거철산을 보며 물었다.

“ 오십 명 정도는 부를 수 있지만 짐만 될 겁니다.”

거철산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 몽요도 별 볼일 없고. 남궁세가는 도와줄 무인이 없고, 저 잡놈은....”

연우강의 시선이 장사덕에게로 향했다.

“ 전 하오밀문 출신입니다. 광랑.”

“ 결국 조장들이 데려올 무인은 한 명도 없다는 소리잖아. 혹시 조원들은 가능할까?”

연우강의 눈이 조장들을 차례로 훑었다.

“ 밥을 축내는 자들밖에 없을 겁니다. 광랑.”

“ 그렇겠지. 쟁쟁한 가문이었다면 똥지게가 조장으로 있는 조로 들어올 생각도 않았겠지.”

“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남궁운화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 왜 그러십니까, 남궁 소저.”

“ 그걸 왜 묻는 건지 그게 궁금해서요.”

남궁운화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궁금하다는 듯 남궁운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벌주가 원하는 겁니다. 남궁 소저.”

“ 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질문을 했던 남궁운화를 비롯한 조장들은 깜짝 놀랐다. 이번 일은 잠룡들에게 내려진 임무고, 임무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완수하느냐에 따라 평가를 한다고 하였다. 그 말은 결국 잠룡들의  힘으로만 해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연우강은 정반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들에게 연우강의 말이 와 닿지 않는 건 당연했다.

“ 외부의 도움이 없이 우리 오십 명으로 북천지옥부를 괴멸시키는 방법 있으면 내놔봐요.”

“ 무슨 수로 북천지옥부를 없앤다는 거죠?”

“ 그러니까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 그럼 평가를 하겠다는 말은 뭐죠?”

“ 외부의 힘을 동원하는 것도 능력으로 보는 겁니다.”

“ 정말요?”

“ 원래 인간이란 족속은 가진 게 많아지면 여기 구조가 달라집니다.”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 쳤다.

“ 어떻게 달라진다는 거죠?”

“ 먼저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보세요. 우리가 대야벌을 떠나 이곳까지 어떻게 왔죠?”

“ 걸어왔죠.”

“ 말을 타고 와도 되고, 마차를 이용해도 되잖아요.”

“ 맞습니다. 남궁 소저. 말을 타면 걷는 것보다 더 편하면서 빠르고, 마차를 타면 말을 타는 것보다 더 안락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죠. 그 셋 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죠?”

“ 그야 마차를 타는 거잖아요.”

“ 바로 그겁니다. 벌주 입장에서 보면 마차가 있는데 굳이 걸어가는 자들은 능력이 없는 자들이 되는 겁니다.”

“ 마차를 타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 능력이 있는 자는 마차를 타고 능력이 없는 자는 걸아가게 되죠.”

“ 마, 말도 안 돼.”

말문이 막힌 듯 남궁운화는 말을 더듬었다.

물론 능력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것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분명 있는데 그런 것까지 전부 무능력하다고 몰아붙이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 물론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안 된다는 걸 그들은 이해하질 못합니다.”

“ 이해하려고 생각을 않는 게 아니고 이해하질 못한다고요?”

“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돈을 많이 벌어 엄청난 부자가 되거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인데, 그들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답니다.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거죠.”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증거를 대봐요?”

“ 네.”

여전히 연우강의 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그럼 남궁소저의 이마에 인 자를 써보세요.”

“ 이마에 인 자를 써보라고요?”

“ 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운화의 이마를 쳐다보았다.

“ 별걸 다 시켜.”

남궁운화는 연우강을 ㅎㄹ겨보면서도 손가락으로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썼다.

“ 다음으 수 소저.”

연우강의 시선이 수여설에게로 향했다.

“ 나도 써요?”

“ 일단 써보세요.”

“ 알았어요.”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썼다. 다른 조장들은 흥미로운 얼굴로 수여설이 이마에 인 자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다섯 명은 차례로 자신의 이마에 사람 인 자를 썼다.

“ 다 했어요.”

마지막에 사람 인 자를 쓴 몽요는 궁금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답은 내일 알려줄게요.”

“ 이런 게 어딨어요?”

일행은 맥 빠진 얼굴로 볼멘소리를 했다.

“ 한 사람이 남아서 그래요. 그가 이마에 인 자를 쓰는 걸 봐야 결론이 나니까 내일까지만 참아요.”

“ 에이! 그럼 괜히 썼잖아요.”

일행의 투덜거림에도 연우강의 입에서는 더는 인 자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 이 사람?’

연우강을 쳐다보던 수여설의 눈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분명 벌주가 준 임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고, 십 조는 북천지옥부를 괴멸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십조만으로는 그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조장도 임무에 대한 거겅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자연스럽게 화젤ㄹ 돌려버린 연우강의 언변 때문이었다.

‘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가?’

장단을 맞추어 얼렁뚱땅 넘어가야 할지 아니면 임무에 대한 말을 꺼내야 할지 공연히 망설여졌다.

‘ 일단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 하니까.’

수여설은 마음을 굳히곤 입을 열었다.

“ 이제 어떻게 할 거죠?”

“ 내일 빚 받으러 구림세가에 갈 겁니다.”

“ 빚 받는 거 말고 우리 임무를 말하는 거예요.”

“ 임무?”

“ 네.”

“ 북해빙궁에서 무인을 끌어올 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 그랬죠.”

“ 남궁 소저는 가문의 노인네들이 가주 자리를 박탈할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까 무인을 데려오는 건 불가능하고 나머진 데려온다고 해도 밥만 축낼 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했잖아요.”

“ 그럼?”

“ 그동안 대야벌에 인맥을 만들어 둔 사람 있으면 손!”

하지만 연우강의 물음에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대야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네요.”

연우강은 수여설을 보았다.

“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묻고 있잖아요.”

“ 수 소저는 대야벌 말고 다른 곳에 가 본 적 있어요?”

“ 그건 왜 묻죠?”

“ 일단 대답부터 해보세요.”

“ 다른 사람들은?”

연우강의 시선이 조장들에게로 향했다.

“ 없습니다.”

“ 없어요.”

조장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 다른 친구들은 어떨까?”

“ 그들도 마찬가질 겁니다. 잠룡쟁패가 풀릴 시기에 태어난 자식들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무공 두 가지에 몰두합니다.”

“ 그럼 여행 같은 건 한 번도 못해봤겠네.”

“ 여행이라고요?”

수여설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 나도 못 해봤거든요.”

“ 그, 그러니까 여행을 다니자는 말이에요?”

“ 이런 기회가 흔하게 오는 건 아니잖아요.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 그럼 임무는 어떻게 할 거죠?”

“ 뒤를 받쳐줄 배경도 없고, 힘도 없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럴 땐 그저 방관자가 되어 구경하는 게 최곱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설치다가는 이렇게 되기 딱 좋습니다.”

연우강은 제 목을 천천히 그었다.

“ 조장이잖아요.”

답답한 마음에 수여설은 칭어래듯 볼멘소리를 했다.

“ 임무에 상관없이 살귀를 만들어 준다고 한 게 그 조장이라는 감투 때문입니다.”

“ 살귀를 만들어 준다는 건 무슨 뜻이죠?”

“ 죽지 않도록 해준다는 겁니다.”

“ 죽지 않도록 해준다는 건?”

“ 강호 무림은 지금 전쟁터라는 말입니다.”

“ 우와! 돌아버리겠네. 정말.”

연우강을 쏘아보는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 좀! 답답하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결국 그녀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원래 그렇게 성격이 급해요?”

연우강은 수여설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그래요, 급해요. 너무 급해서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고, 손이 나갈 때마다 빙하빙백강이 발출돼요. 빙하빙백강이 발출되면 걸리는 족족 얼음가루로 부서지고, 빙공을 익힌 빙궁 무인이라고 해도 치명상을 입게 돼요. 그래서 이 꼴이 됐다고요.”

수여설은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냈다.

“ 그래서 듣고 싶은 말이 뭡니까?”

쩌엉!

연우강이 또 말을 돌리자 수여설의 손이 새하얗게 변했다.

“ 무공도 없는 나를 치려고?”

“ 후훅! 후훅! 난 지금 돌기 직전이니까 빨리 말해요.”

“ 어이쿠! 이러다 정말 치겠네.”

“ 조장!”

“ 전쟁터에서 죽지 않으려면 적을 죽여야 합니다. 수 소저. 적을 쉬지 않고 죽이다 보면 자신의 피에 살기가 스며들게 됩니다. 피에 살기가 스며들게 되면 지나가던 똥개도 피해 도망가는 데 그 상태를 일컬어 살귀가 됐다고 합니다. 살귀가 됐다는 건 살검의 최고봉을 이루었다는 의미고, 살검을 이룬 자는 임무 나부랭이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 간단하게 말해 줘요.”

“ 간단하게?”

“ 열 자 이하로.”

“ 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연우강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 최강?”

“ 그렇습니다. 수 소저.”

“ 휴유! 그렇게 간단한 걸....”

수여설은 배시시 웃으며 내공을 풀었다.

“ 안도의 숨은 내가 쉬어야지요.”

“ 아무튼 앞으로 나하고 대화할 때는 앞뒤 말은 전부 자르고 요점만 열 자 이내로 해줘요.”

“ 그거 좋은 습관 아닌데.”

“ 고질병이라서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가급적 말을 섞지 않고 살려고 노력해요.”

하여간 여긴 정상인 인간들이 한 명도 없네. 아무튼 그렇게 알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젛애 놓도록 하세요. 일정이 허락하면 가볼 참이니까. 그럼 내일 보자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래층에는 욱일승 일행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 근데 수 소저. 몇 살이오?”

연우강은 수천월을 보며 물었다.

“ 스물 아홉이네.”

“ 원래 성격이 그런 겁니까. 아니면 무공을 익힌 부작용입니까?”

“ 그 성껴에 무공을 익힌 게 신기하네요.”

“ 남에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네.”

“ 나쁜 건 다 갖췄구만.”

연우강은 일행 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 그래도 최고 미녀 아닌가.”

“ 그래서 더 나쁘다는 거요. 영감. 그런데 빙궁에서는 어떤 신분이었소?”

“ 어미가 빙궁 궁주네.”

“ 가정교육이 잘못된 경우구먼.”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 그래도 많이 좋아진 거라고 하더군.”

“ 본인이 그걸 알고 있을 정도면 거의 나았다고 보면 되겠네.”

“ 그런 셈이지. 그런데.....”

“ 영감들부터 풀어보시오.”

“ 청부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이네.”

“ 청부는 사월림만 받는 거요?”

“ 아니네, 거의 모든 세력이 청부를 받고 있네.”

“ 청부와 호위를 동시에 한다는 말이오?”

“ 그렇네.”

“ 우리 쪽은 어떻소?”

“ 자넬 빼면 특별히 청부를 받을 만한 사람은 없네.”

“ 그럼 묵사를 가져온 건 잘한 거라고 봐야겠군.”

“ 청부자가 오지 않을 거 같아서 일부러 묵사를 탈취해 왔단 말인가?”

수천월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늙어서도 건강하게 살려면 열심히 움직여야 하잖소.”

“ 그러니까 잠룡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 함께 잘되면 좋지 뭘 그러쇼, 허 영감!”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허일삼을 보았다.

“ 왜 그런가?”

“ 혹시 허일구라고 아시오?”

“ 자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가?”

허일삼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 하오밀문의 문주라고 하던데?”

“ 아는가?”

“ 전에 나와 동업한 적이 있어서 안면이 있소. 장사덕 그 친구에게 물어보면 일구 영감을 만날 수 있을 거요.”

“ 정말인가?”

“ 대놓고 정체를 밝히진 마시오. 허일삼이란 이름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허일삼은 활짝 웃었다.

“ 그런데 정말로 여행만 할 셈인가?”

듣고 있던 욱일승이 물었다.

“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신강이오, 영감.”

“ 신강으로 가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요?”

“ 아무래도 이번 임무가.....”

욱일승은 말끝을 흐렸다.

“ 이차 팔황정벌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요?”

“ 자네도 그렇게 느꼈는가?”

“ 난 느낌으로 일하는 성격이 아니오, 영감.”

“ 그럼 구림세가를 첫 방문지로 택한 이유가?”

“ 빚도 받고 정보도 얻으면 좋잖소.”

“ 클클클! 일구와 연락을 취하라고 한 이유도 그놈의 정보 때문이구먼.”

허일삼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야장에서도 많은 정보가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두작군이 끼어들었다.

“ 정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근접한 내용일 뿐이야, 영감.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접해야 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 하오밀문이나 야장에서 만든 정보가 바로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다. 녀석아.”

“ 헛소리 그만하고 영감은 표국이나 둘러봐.”

“ 표국은 뭐하려고?”

두작군은 뜨악한 얼굴을 했다.

“ 하남으로 가는 물건 있나 알아보라는 거야.”

“ 표물을 운송하겠단 말이냐?”

“ 표물을 운송하면서 해야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는 거야.”

“ 에라! 이 소금 같은 자식아.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얼만데.....”

“ 나보다 더한 놈은 대야벌 벌주야.”

“ 벌주가 어쨌는데?”

“ 욱 영감 짐작이 맞다면 우린 지금 이차 팔황정벌을 나선 거잖아.”

“ 그런데?”

“ 신강까지 다녀오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일 년은 걸릴거야. 그렇지?”

“ 아무 일 없이 다녀오는 데만 해도 그 정도는 걸리겠지.”

“ 그런데 전쟁 비용이 일 인 당 오십 냥이야.”

“ 넌 오백 냥을 받고도 오십 낭 받았다고 할 놈이잖아.”

호위 비용때문이었다.

남궁운화를 호위하면서 비용이 오십만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에 반해 자신을 비롯한 호위들이 받는 돈은 월 오십 냥에 불과하다. 녀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수십만 냥을 챙겨왔던 것이다.

“ 이제 배에 기름기가 끼니까, 개를 잡아 배를 채울 때가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지?”

연우강은 두작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식아. 그건 왜 들먹이는데?”

두작군은 찔끔한 얼굴로 연우강의 시선을 피했다.

“ 그리고 내가 구림세가에서 받을 돈이 얼만 줄 알아?”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영감이 일 년에 만냥씩 쓴다고 해도 사백 칠십 년을 쓸 수가 있어.”

“ 사, 사백칠십만 냥이라고?”

“ 신강에 다녀오는 여비 같은 건 푼돈이야, 영감.”

“ 정말 사백칠십만 냥이란 말이냐?”

“ 나가서 표국이나 둘러봐.”

“ 자식아! 그렇게 돈이 많은 데 표국을......”

“ 이 영감탱이야!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일은 해야 할 거 아냐! 손에서 일을 놓는 순간 시체가 된다는 말도 몰라?”

연우강이 버럭 소리쳤다.

“ 알았다. 자식아. 큰 소린, 가자. 일삼!”

두작군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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