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46화 (46/232)

제 3장 전수

힘이 집중되는 곳이면 어디나 최고가 되기 위한 권력 암투는 피할 수 없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은 어쩌면 권력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지상 최강의 세력이라고 불리는 대야벌 또한 다르지 않았다.

대야벌의 권력 구도는 크게 친벌주파, 반벌주파, 중도파, 이 셋으로 나누어진다.

야궐을 중심으로 뭉친 묵야련, 사자림, 사해림과 군마련을 중심으로 뭉친 철무련, 만마림, 패천림의 양 세력이 현 벌주를 지지하고 있고, 반벌주파는 황궐을 주심으로 한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 네 단체와 무궐을 중심으로 한 구중련, 녹사련, 낭인림의 네 단체, 총 여덟 곳이다.

그리고 생사림, 봉황림, 사월림, 만독림은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만일 벌내쟁투로 인해 멸망한 생사림이 친벌주파나 반벌주파에 속한 단체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아무튼 생사림의 멸망 자체는 양 세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유명계가 얻었다는 천마삼경은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이차 벌내쟁투라고 불리는 전투가 강호 무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잠룡들의 출타는 양측을 긴장시키기엔 충분한 사건이었다.

잠룡들이 강호로 나가면서 가장 바빠진 곳은 율령궁이었다. 각 처로 나간 잠룡들의 활동을 점검하여 평가 자료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세로 이장, 가로 이 장 반이나 되는 커다란 탁자 앞에 십여 명이 둘러서 있었다. 음양뇌 유선을 비롯한 천안원 정보 담당관들이었다. 그들이 쳐다보고 있는 탁자 위에는 중원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일 번부터 십 번까지 번호가 매겨진 번호표가 각 처에 흩어져 있었다.

“ 무궐의 산하 단체인 화산파 무인들이 일 번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전서구를 담당하는 자가 소리치자 탁자 앞에 있던 한 명이 화산파라고 적힌 작은 명패를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으로 슬쩍 던져놓았다.

“ 사자림 지부인 맹호방 무인들도 일 번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무궐 산하 종남파 무인이 일 번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사해림 지부인 서해방 무인들도 역시 일 번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 무궐 산하 점창파 무인들이 일 번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야궈 지부인 무쌍검문 무인들이 일 번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생사림 소속의 오살과 살수 백여 명이 십 번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십 번은 대운표국 쟁자수로 들어가 하남성으로 이동 중입니다.”

“ 군마련 지부 군웅보 무인들이 십 번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생사림의 삼월이 방금 전 벌을 떠났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 으음!”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던 우담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룡들이 대야벌을 떠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잠잠했는데 대야벌의 각 세력들이 이제야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듯했다.

“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각 조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리냐?”

듣고 있던 우담보가 안쪽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정체를 파악할 만한 단서가 없답니다. 궁주님.”

“ 우리 이목에 걸려들지 않는 세력이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궁주님.”

“ 끄응!”

우담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지금까지 암살대전에 참석한 세력들을 정리한 겁니다. 그리고 밖에 범 궁주와 혁 궁주께서 와 계십니다.”

유선이 보고서를 내밀며 말했다.

“ 수고했네.”

보고서를 받아 든 우담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왔다.

손님을 접대하는 접객실에는 범일승과 혁세군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 잠룡쟁투 때보다는 일감이 훨씬 줄었는데 얼굴이 왜 그렇소?”

차를 마시던 범일승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누가 일감이 줄었다고 한 거요?”

“ 오백 명을 관리하다가 지금은 열 개 조만 관리하면 되니까 당연히 일감이 줄어든 거 아닙니까?”

“ 이걸 보고도 일감이 줄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담보는 가지고 나왔던 보고서를 범일승 앞으로 밀어 놓으며 투덜댔다.

“ 어디 보자.”

보고서를 쳐다보던 범일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고서대로라면 잠룡쟁투 때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 일 조, 이 조, 삼 조, 오 조에 가장 많은 세력들이 몰려 있군요.”

그는 보고서를 혁세군에게 넘기고는 우담보를 보았다.

“ 그렇소. 범 궁주. 그 네 조에 몰려 있는 세력만 해도 서른 두 곳이오. 다른 조들까지 합치며 거의 사십여 개의 세력이 잠룡들을 사이에 놓고 전쟁을 치르게 생겼소.”

우담보의 얼굴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번 잠룡강호행은 만상문을 견제하자는 의도에서 추진됐다. 더불어 명분 축적을 위해 목표도 팔황새로 잡았다. 각 조와 대야벌 내의 세력과 힘을 합쳐 팔황새를 약화시키는 게 이번 잠룡강호행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팔황새의 근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잠룡들끼리 경쟁이 과열양상을 보이며 생각지도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난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우 궁주.”

보고서를 읽고 있던 혁세군이 우담보를 보며 말했다.

“ 무슨 소리요?”

“ 무림에 크고 작은 세력들이 너무 많다는 말이오. 우 궁주.”

“ 범 궁주의 말은 대야벌의 각 세력들이 지부를 너무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거요?”

“ 그렇소. 지부의 수가 많은 건 문제가 아닌데, 그 지부의 수로 각 세력의 강약이 결정된다는 게 문제요. 만일 지금처럼 지부의 수가 늘어난다면 무림의 중심은 우리 대야벌이 아니라 강호로 변하고 말 거요.”

“ 그럼 벌주께서는 그 상황을 예견하고 이번 잠룡강호행을 계획했단 말이오?”

“ 그것까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지금 강호 무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나쁘게만 볼 게 아니라는 거요. 우 궁주.”

“ 하지만 지금 전투의 중심에 서 있는 담대무궁이나 사유성은 우리가 지원하는 잠룡이고 그를 돕기 위해 나선 단체들 또한 우리 측 사람들이오.”

“ 반면에 윤허나 이지약은 무궐과 황궐 측에서 지원하는 자들이지요.”

“ 그럼?”

“ 서로 상잔한다고 해도 천상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오. 그들이 줄어들수록 천상천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고, 통치하는 데 편해지오. 나는 그보다 연우강 그놈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는 자들이 더 걱정이오.”

“ 오살과 생사림 살수를 말하는 거요?”

“ 그렇소. 우 궁주. 내가 은밀하게 알아본 바에 의하면 누군가 연우강의 머리에 천만냥을 청부했다고 하오.”

“ 확실하오?”

우담보는 깜짝 놀랐다.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자신도 모르는 사실을 혁세군이 알고 있어서였다.

“ 그렇소. 우 궁주. 신원 미상의 누군가가 연우강을 없애달라고 천만 냥의 청부를 넣었소. 난 그 청부자가 무궐 아니면 황궐이라고 확신하고 있소.”

“ 그들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 챈 거라고 보시오?”

“ 몰랐다면 바보겠지요.”

“ 하지만 이제 와서 왜?”

우담보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우강이 대야벌로 들어온 건 일 년 육 개월 전이다. 지금껏 침묵하다가 이제 와서 청부를 했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똥지게 연우강은 입만 열면 삼 년 있다가 이곳을 나간다고 하였으니까 주시할 필요가 없는 자였소. 하지만 십 조 조장 연우강은 다르오. 더구나 벌주는 연우강에게 묵사까지 쥐어주었소.”

“ 다른 사람이 보기엔 연우강과 벌주 사이에 어떤 교감이 오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란 말이오?”

“ 연우강이 상궐 창설에 동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요.”

“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청부를 넣었단 말이오?”

“ 내 생각은 그렇소.”

“ 혁 궁주의 생각은 어떻소?”

“ 뭘 말이오?”

혁세군이 되물었다.

“ 묵사를 말하는 거요. 난 아무리 머리를 쥐어뜯어도 벌주가 연우강에게 묵사를 쥐어준 이유를 모르겠소.”

“ 자리를 옮깁시다.”

혁세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비밀을 요하는 말인가 보군요.”

“ 그렇소.”

접견실을 나선 세 사람은 정원으로 나왔다.

“ 지금 내가 한 말은 두 분만 알고 계셔야 하오.”

“ 말씀하시오. 혁 궁주.”

우담보와 범일승은 침을 꿀꺽 삼키며 혁세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벌주의 가장 강력한 도전자가 누구인줄 아시오?”

“ 우리 예상을 빗나간 인물이 아니면 물을 리도 없을 테고, 누구요?”

우담보는 물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분의 동생이오.”

“ 십절무적검이란 말이오?”

우담보와 범일승은 깜짝 놀랐다. 예상외의 인물이 나올 줄은 짐작했지만 설마 벌주의 친동생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내 말이 아니고 만우량 군사의 말이오.”

“ 좋소. 계속해 보시오.”

“ 더불어 그는 무영 서열 이 위요.”

“ 맙소사!”

두 사람은 버러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사실 현 벌주가 세 번에 걸쳐 벌주를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무영을 이끌고 있는 담대천호의 공이 막대했다고 하오.”

“ 그가 배신이라도 한 거요?”

우담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자칫 잘못하면 대야벌에서 형제끼리 싸우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현 벌주의 통치에 불만을 자주 표출했다고 하오.”

“ 그럼 묵사를 연우강의 손에 들려 내보낸 건?”

“ 만우량 군사는 십절무적검 담대천호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무영을 제거할 생각인 듯하오.”

“ 벌주와는 상의가 된 일이오?”

“ 만우량 군사 혼자 계획한 일인 것 같소.”

“ 그럼 이들은?”

우담보는 들고 나왔던 보고서 맨 아래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대야벌 백대고수 십육 위이자 만마림 철마당주인 벽력마군 유백천과 그의 부하 이백 명, 백대고수 서열 이십일 위 천검자 장양락, 삼십일 위 인후겸, 육십 오 위 섬수 윤효적이 은밀하게 대야벌위 암흑마수 낭걸, 오십 위 천량마효가 나섰다고 돼 있었다.

“ 그들을 무영이라고 보면 되오.”

“ 유백천도 무영이란 말이오?”

철마당 대원을 데리고 나갔다고 해서 하는 말이었다.

“ 십중팔구 그도 무영일 거요.”

혁세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 무영을 없앨 자들은 누구요?”

듣고 있던 범일승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우담보가 말한 다섯 명은 대야벌이 인정한 백대고수들이다. 그들을 대야벌 밖으로 유인했다면 없앨 자들도 있어야 한다. 과연 누구를 보내 그들을 없앨 건지 문득 궁금했다.

“ 궁왕, 암왕, 마왕 세 분이 나서기로 한 모양이오.”

“ 천신군을 동원한다는 말입니까?”

놀람의 연속이었다.

천신군은 과거 백대고수에 속해 있던 자들로 벌주 친위대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열두 명을 일컬어 삼황오제칠왕이라고 부르는데 궁왕, 암왕, 마왕은 칠왕에 속한 자들이었다.

“ 천신군을 동원하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부탁을 했다고 하오.”

“ 하지만.....”

우담보는 말끝을 흐렸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우린 벌주와 한 몸이오. 우 궁주. 벌주에 도전하는 자는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가 막아야 하오. 설사 그자가 벌주의 친동생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소. 현 벌주가 곧 우리의 미래요.”

“ 나도 알고 있소.”

우담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남쪽에서 먹구름이 천천히 여양산맥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 비가 올 모양입니다.”

우담보는 얼른 시선을 내렸다. 그 먹구름이 마치 대야벌의 미래를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 들어갑시다.”

세 사람은 천천히 접견실로 향했다.

*********

백색 바탕에 도가 새겨진 깃발이 수십 대의 마차 지붕 위에서 펄럭였다. 둥글게 진영을 구축한 마차 주변으로는 수십 개의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각 모닥불 주변으로는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느 표국의 표행과 다름없이 보이는 이들은 대운표국 표사들과 쟁자수들로 고용된 연우강 일행이었다.

“ 이건 말도 안돼.”

세안을 마치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몽요가 연우강을 흘겨보며 투덜댔다.

“ 피곤해요?”

“ 어깨가 뻐근하다고요.”

몽요는 어깨를 슬슬 쓰다듬었다.

“ 안마?”

연우강은 양손을 들어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 됐네요.”  몽요는 혀를 쑥 내밀며 불가에 앉았다.

“ 자윤아!”

몽요를 비롯한 여자들이 불가에 자라를 잡고 앉자 연우강은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 네! 아저씨.”

표사 일행이 있는 곳에서 활달한 목소리와 함께 여자아이가 달려왔다. 이제 열 살인 그녀는 표국주의 딸인 팽자윤이었다.

“ 여기 아줌마들 차 좀 준비해 줘.”

“ 알았어요. 아저씨.”

“ 오빠라 부르라고 했잖아!”

“ 오빠는 친한 사이에 보르는 호칭이에요. 아저씨.”

“ 그동안 우리 둘이 꽤 친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 앞으로도 계속 기다려야 할 거예요. 아저씨.”

팽자윤은 혀를 쑥 내밀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이유가 뭐죠?”

웃는 얼굴로 연우강과 팽자윤을 지켜보던 몽요가 물었다.

“ 무슨 이유요?”

“ 우릴 쟁자수로 취직시킨 이유를 말하는 거지 뭐겠어요?”

“ 우리끼리 가는 것보다 표행을 따라가는 게 훨씬 편한 여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 편한 여행이라고요?”

몽요는 황당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자신들은 무거운 등짐을 지고 하루 종일 행군을 하고 있다.

그런데 편한 여행이라니.

“ 우리 등에 표국의 짐이 있을 때는 공격받을 일이 거의 없잖아요.”

“ 공격받을 일이 없다는 건?”

“ 우릴 공격하는 건 곧 대운표국을 공격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게 되면 설사 공격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표국을 공격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죠. 더불어 그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 어?”

“ 아!”

몽요를 비롯한 잠룡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의 말대로라면 잠룡강호행을 시작한 조 중 가장 안전한 조가 바로 십조였다.

“ 언니 차 여기 있어요.”

그때 차를 가지러 갔던 팽자윤이 남궁운화 앞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 고마워.”

남궁운화는 빙긋 웃으며 찻잔을 받았다.

“ 그럼 아저씨 일행은 우리만 따라 다니면 공격받을 일이 없겠네요?”

수여설에게 차를 건넨 팽자윤은 연우강을 향해 몸을 돌렸다.

“ 너도 듣고 있었던 거냐?”

“ 듣긴 뭘 들어요. 가만있어도 들리는데.”

“ 자윤이 너 몇 살이지?”

“ 올해로 열 살이에요.”

“ 열 살짜리는 나처럼 멋있는 오빠를 만나서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그런 꿈을 꾸어야 어울리는 거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끼어들기엔 넌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드는데?”

“ 헹! 별로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구먼, 뭐. 아저씨와 언니들을 쫓아온다는 그 사람들이 산적으로 위장해서 공격하면 그땐 어떻게 할래요?”

팽자윤은 혀를 쑥 내밀었다.

“ 산적?”

“ 표행을 하다 보면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자들이 산적이라고요, 아저씨.”

“ 자윤아.”

“ 말씀하세요.”

“ 여기 몽요와 수여설 소저는 나보다 나이가 많거든?”

“ 그런데요?”

“ 그런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두 사람에게는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면서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 이유는 뭐냐?”

“ 아저씬 남자잖아요.”

“ 남자?”

“ 남자와 여자는 간 보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몰라요?”

“ 가, 간?”

연우강은 황당한 얼굴로 몽요 일행을 보았다.

“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워요.”

몽요가 웃으며 말했다.

“ 어른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저 정도면 거의 여우 수준입니다. 몽요.”

“ 왠지 연 공자의 어린 시절과 닮았을 것 같은데요?”

“ 난 천진난만한 아이였습니다. 수 소저.”

“ 호호호! 그렇다고 해드릴게요. 그건 그렇고 자윤의 말처럼 산적으로 위장해서 나오면 그땐 어떡할 거죠?”

“ 그럼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잖습니까?”

“ 쉽게 처리한다는 건?”

“ 산적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무공도 어느 정도는 숨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수들의 싸움에서 전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건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죠.”

“ 쉽게 공격하는 것도 힘들고, 전력을 다할 수도 없고, 우린 아주 편하게 여행을 하겠군요.”

“ 그럼 섭섭하겠죠?”

“ 섭섭해요?”

수여설은 뜨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섭섭하냐는 말은 곧 다른 일을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다.

“ 후군장과 중군장은 이쪽으로 와!”

연우강은 장사덕과 거철산을 불렀다.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사람은 어기적거리며 연우강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 이제부터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사월림 살수들의 암습이다.”

연우강은 각 군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 우리 중에 거금을 들여 청부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수여설을 고개를 갸웃했다.

십 조 조원들은 특별히 잘나거나 못난 사람이 없이 고만고만하다. 그 말은 굳이 돈을 들여 청부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연우강은 앞으로 살수들의 암습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니 의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내 머리에 천만 냥이 걸렸습니다.”

“ 처, 천만 냥이라고요?”

일행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얼굴로 연우강 일행을 쳐다보던 욱일승과 이자승은 천만 냥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 야장에서 파악한 건가?”

욱일승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그렇소. 영감. 정확하게 천만 냥에 달하는 청부가 들어왔소.”

“ 네 머리가 천만 냥이라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이자승이 비아냥거렸다.

“ 그건 나도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육 개월 안에 날 죽이면 천만, 일 년 안에 죽이면 이백만 냥, 일 년 육 개월 안에 죽이면 백만 냥이라는 청부가 들어갔고, 양도욱은 그 청부를 수락했다는 겁니다. 영감님.”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녀석아. 네가 청부를 넣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육 개월, 일 년, 일 년 육 개월이라는 기간까지 알고 있단 말이냐? 그리고 만일 육 개월 안에 네 녀석을 없애지 못하면 청부 금액의 두 배인 이천만 냥을 배상해 줘야 하는데 미치지 않았다면 그 청부를 어떻게 받아들이겠냐?”

“ 영감님은 의심하는 습관 좀 버리시오. 내가 뭐가 아쉬워 거짓말을 한단 말입니까?”

“ 그럼 네 목에 천만 냥이 걸렸다는 증거를 대봐.”

“ 청부자가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데 증거가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는 거야. 녀석아. 명색이 정천호까지 지냈다는 녀석이 부하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른단 말이냐?”

“ 증거는 없지만 정황은 있습니다. 영감님.”

“ 어떤 정황 말이냐?”

“ 영감님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대야벌에서는 백대고수 서열 십 위이자 무궐의 이인자인 적사진인 용환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놈을 살해한 수법이 사월림 오살 중 지살의 수법과 완벽하게 같았습니다.”

“ 지살이 시인하지는 않았을 테고.”

“ 물론입니다. 영감님. 지살 본인은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무궐의 궐주인 공손정우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정식으로 공론화 하겠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 하지만 그 사건은 공론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 사월림의 림주가 협상을 시도했단 말이구나.”

“ 양도욱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건 무슨 뜻이지?”

“ 용환이 죽기 며칠 전 사월림의 살수와 용환의 친구가 동귀어진한 일이 일어났거든요.”

“ 용환을 죽인 게 복수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로구나.”

“ 더불어 암살대전의 기간입니다. 대부분의 청부를 받는 곳이 바로 사월림이고요.”

“ 그러니까 네 말은 청부 금액을 높이기 위해 용환을 선택하여 없앤 게 돼버렸단 말이냐?”

“ 보통 그런 경우를 일컬어 일거양득이라고 하지요.”

“ 하지만 지살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 그건 사월림과 지살의 입장일 뿐입니다. 영감님. 사월림이 아무리 항변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은 절대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무궐ㅇ릐 궐주는 더더욱 맗ㄹ 것도 없고요. 결국 양도욱은 그 사건을 덮으려고 했고, 공손정우는 사건을 무마하는 대가로 오백만 냥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딱 맞춰서 천만 냥의 청부가 들어온 겁니다. 영감님 같으면 청부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실팼을 때 파산하는 게 두려워 청부르 거절하겠습니까? 더구나 상대는 이제 일 갑자 남짓 내공을 지녔고, 무공이라고는 흑철마신과 칠보귀둔필사 두 가지밖에 익히지 않은 아주 약한 놈이란 말입니다.”

“ 거절할 이유가 없지.”

“ 그렇게 된 겁니다. 영감님.”

“ 허허허!”

이자승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하게 웃는 그완 다르게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적사진인 용환을 직접 없앴던 몽요였다.

“ 맙소사......”

몽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화장실에서 용환을 없애야 한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 언니!]

그 날 몽요를 보았던 남궁운화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몽요에게 전음을 보냈다.

[ 너도 알아차린 거야?]

몽요는 전음으로 물었다.

[ 청부자가 연 공자인 것 같은데, 맞죠?]

[ 응! 그는 잠룡들이 외부로 나가는 바람에, 벌지 못한 돈을 청부로 벌어들일 모양인가 봐.]

[ 아무래도 사월림이라고 해도 이천만 냥을 준비한다는 건 무리예요. 언니.]

[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 그 돈을 준비하지 못하면 사월림은 파산할 수밖에 없어요]

[ 파산?]

[ 그래요, 언니. 연 공자는 사월림의 단물을 전부 빨아먹고 파산시켜 버릴 참이에요.]

“ 생사림처럼......”

몽요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무슨 말이죠?”

몽요와 남궁운화가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수여설이 물었다.

“ 아, 아니에요.”

퍼뜩 정신을 차린 몽요는 고개를 저었다.

“ 사월림도 생사림처럼 멸망할 거란 말인가요?”

하지만 수여설도 집요했다. 몽요는 뭔가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물었다.

“ 신원 미상의 청부자에게 이천만냥을 배상하지 못하면 파산할 수밖에 없잖아요.”

“ 신원 미상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 조금 전에 우강이 그랬잖아요. 청부자는 이름을 숨기고 청부를 했다고.”

“ 그럼 다시 이쪽이네.”

수여설은 빙긋 웃으며 연우강을 보았다.

“ 약간의 긴장감은 삶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수 소저.”

“ 돈도 벌고요?”

비로소 상황이 이해가 갔다. 자세한 것은 몽요를 붙잡고 물어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청부자는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다.

“ 물론이죠. 그래서 놀이를 해볼 생각입니다.”

“ 어떤 놀이를 말하는 거죠?”

“ 남은 육 개월 동안 살수의 머리를 가장 많이 가져오는 조에게 보법을 전수해 줄 참입니다.”

“ 보법이라면 칠보귀둔필사?”

“ 칠보귀둔필사도 대단한 무공이긴 하지만 내가 내건 보법은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고, 십 조 조원들이 익힌 어떤 무공보다 강합니다.”

“ 그런 무공을 익히고 있어요?”

수여설은 미심쩍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익히고 있는 게 아니고 알고 있습니다.”

“ 또 답답해지기 시작하네.”

수여설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 어이쿠, 이 아줌마 또 폭발한다. 자윤아, 가자.”

연우강은 벌떡 일어나서 팽자윤을 안고 팽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 알아요?”

수여설의 시선이 이번엔 몽요에게로 향했다.

“ 승천비고에서 무공 비급을 암기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요. 거기서 굉장한 보법을 얻은 모양이네요. 그보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내 손에 따라 천천히 숨을 쉬어요.”

몽요는 수여설 앞으로 걸어가서는 오른손 손바닥을 펼쳐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 흐흡!”

수여설은 몽요의 손 움직임에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

“ 그럼 단서라도 줘요?”

몽요의 도움으로 들끓을 뻔했던 마음을 진정한 수여설은 연우강을 보며 빽 소리쳤다.

“ 단서?”

“ 열심히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예요.”

“ 좋습니다. 한 가지만 알려드리죠. 일단 보법은 전부 천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천보라고요?”

수여설은 고개를 갸웃했다.

막연히 천보라는 말만 가지고 어떤 무공을 연상한다는 것은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잠룡들에게도 무리였다.

“ 아무튼 그 천보를 익히게 되면 지금보다 두 배 이상은 강해지니까 그렇게 알면 됩니다.”

“ 알았어요.”

수여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료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에 이어 다른 군장들도 자리를 옮기고 첫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후군의 군장인 거철산과 후군 대원들이 은밀하게 진영을 떠났다.

쿡!

옆구리를 찌르는 손길에 연우강은 고개를 돌렸다. 팽자윤이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왜?”

“ 그거 나도 가르쳐주면 안 돼요?”

“ 우린 아직 간 보는 기간도 지나지 않았다. 자윤아.”

“ 친하지 않아서 안 된다고요?”

팽자윤이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에도 실망감이 배어났다.

“ 자윤아. 무공은 친한 사람에게도 쉽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다.”

보고 있던 팽윤이 연우강을 대신해 대답했다.

“ 피이! 그런 게 어딨어요. 그렇게 중요한 거면 부하들에게 주겠다고 할 리가 없잖아요.”

“ 넌 내 부하가 아니잖아.”

“ 쳇!”

팽자윤은 혀를 쑥 내밀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 허허허! 녀석이 뿔이 난 모양입니다. 연 공자가 이해해주시오.”

“ 괜찮습니다. 그보다 대운표국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 우린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연 공자, 난 오히려 이번 기회를 통해 표사들이 많이 배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입니다.”

연우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숲으로 들어갔던 거철산 일행이 돌아온 건 한 시진 후였다.

“ 아무도 없습니다. 광랑.”

“ 정말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연우강은 거철산을 보며 물었다.

“ 그렇습니다. 광랑!”

“ 환랑!”

툭! 툭!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응?”

거철산을 비롯한 후군 대원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허공에서 떨어진 그것은 사람의 귀였던 것이다.

“ 정찰이 됐든 암살이 됐든 기본은 적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적의 위치를 알아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 그건.....”

거철산은 말끝을 흐렸다.

“ 방어 개념이 아니라 공격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장 편하게 공격할 수 있는 장소와, 공격 받는 자들이 퇴각하기 쉬운 장소를 먼저 찾아야 한다. 무작정 몸을 숨기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능사는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광랑!”

후군 군원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정찰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전방을 살피는 자, 좌측과 우측을 살피는 자, 방금 지나왔던 장소를 살피는 자 그리고 전체를 조율하는 자가 호흡이 완벽하게 일치 돼야만 최고의 효괄를 발휘할 수 있다. 한 명이라도 본인의 임무를 게을리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걸 명심해라.”

“ 명심하겠습니다.”

“ 쉬어라!”

“ 존명” 후군 조원들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 그동안 너희들은 집안 어른을 통해, 또는 교관을 통해 쉬지 않고 생각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정말로 생각을 해야 한다. 동료들과 함께 정찰을 나갔을 때 실수한 건 없는지, 놓친 건 없는지 끊임없이 떠올려보고 다음에 나갔을 때는 절대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 알겠습니다.”

잠룡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 좋다. 오늘 밤 근무는 전군이 서고 나머진 취침해라.”

“ 쉬십시오, 광랑!”

“ 쉬십시오.”

잠룡들은 연우강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자리를 잡고 누웠다. 하지만 잠룡들은 자리를 잡고 누웠지만 잠들지 못했다. 사월림 살수들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는데 잠을 잔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들은 누운 상태로 모든 감각을 집중하여 주변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서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깊은 잠을 잘 새도 없이 깨어나야만 했다. 인시 말이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연우강 때문이었다.

한여름이라 주변이 환해져지만 잠룡들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일부는 운기행공을 하고 일부는 연우강이 하는 특이한 동작을 멍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 그걸 왜 하는 거죠?”

연우강의 동작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사람은 남궁운화였다. 그녀는 대야벌에 들어오기 전 잠룡쟁패를 얻기 위해 연우강을 쫓은 적이 있었기에 연우강이 지금 동작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야벌을 나서고 난 다음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 동작을 하고 있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녀가 묻자, 연우강을 주시하고 있던 잠룡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연우강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특이한 동작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탓이다.

“ 살인을 많이 하게 되면, 몸에 살기가 밴다는 건 알죠?”

“ 알고 있어요.”

“ 살인을 많이 하는 경지를 넘어서면 몸이 아니라 피에도 살기가 밴다는 말은 들어봤어요?”

“ 아뇨.”

“ 그렇게 됩니다. 남궁 소저. 피에 살기가 배는 정도가 아니라 굳은살이 박이는 것처럼 피에 살기가 자리 잡게 되는데 그 상황이 되면 개조차 다가오지 않습니다.”

“ 설마......”

“ 내가 경험자니까 믿으십시오.”

“ 좋아요. 그렇다고 하고요.”

“ 내 부하 중에 강호 공적으로 지목되고도 살아남은 무인이 있는데, 나는 그를 귀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귀노가 말하길, 이렇게 하면 피에 박힌 살기를 없앨 수 있다고 하더군요.”

연우강은 전에 막장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 동중정?”

남궁운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 아무것도 아닌 그런 동작이 동중정의 무공 원리를 내포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 알고 있는 무공을 느릿하게 펼치되 중간에 끊으면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내공을 일으켜서도 안 되고요. 귀노 말로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저절로 동작에 힘이 실린다고 하는데, 아직 그런 경험은 없네요.”

“ 무, 무극지경!”

남궁운화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방금 연우강이 말한 것은 일명 무극도라고 불리는 지고한 경지다. 속도를 극복한 정도가 아니라 속도 자체를 조절하는 자들. 흔히 산악 같은 기도나 하늘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무인들은 대부분 무극지경에 오른 고수를 말한다. 하지만 무극지경에 오르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무공이 강해지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경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우강의 입에서 그 무극지경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 중간에 절대로 끊으면 안 된다고요?”

남궁운화는 검을 뽑아 들며 물었다.

“ 난 열한 가지 동작을 반 시진에 걸쳐 합니다.”

“ 바, 반시진 동안 열한 가지 동작밖에 안 한다고요?”

“ 그렇습니다. 남궁소저.”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동작에 몰두했다.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쳐다보던 남궁운화도 곧 창궁대연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수식에서 시작한 창궁대연검법의 육 초식을 전부 펼쳤지만 그녀가 소모한 시간은 반 각이 채 되지 않았다.

남궁운화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단 육 초에 불고하지만 각 초에서 보이는 변식까지 합치면 동작은 백여 가지에 달한다. 자신이 일 초를 펼칠 때 연우강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백여 가지 동작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은 손을 내미는 자세 그대로다.

아직 한 가지 동작도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 난 사 년째 하루도 쉬지 않고 해왔습니다.”

“ 죄, 죄송해요.”

공연히 멋쩍어 남궁운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 무공은 물론이고 돈을 버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사는 것도 마찬가질 겁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노력하는 잡니다. 요행을 이기고, 꼼수를 이기고, 운을 이기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노력이라고 하더군요. 굳이 느리게 펼치려고 하지 마세요. 평소대로 하다 보면 소저 스스로도 느낄 겁니다.”

“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궁대연검법을 펼쳤다. 창궁대연검법을 펼치는 남궁운화는 깜짝 놀랐다. 내공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하게 초식을 펼칠 뿐이다.

그런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더불어 자꾸만 단전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남궁소저.”

“ 아세요?”

“ 단전이 울렁거리는 것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 네.”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 혹시 내공과 초식은 하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 그 말은 내공을 처음 익힐 때 항상 많이 듣는 말이잖아요.”

“ 하지만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몰랐을 겁니다.”

“ 솔직히 그래요.”

남궁운화는 순순히 시인했다. 무공을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내공과 초식은 하나라는 말이다. 즉 초식에 맞는 내공심법을 익혀야 가장 강한 무공을 펼칠 수 있다고 배웠다. 하지만 왜 그런지 제대로 설명을 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내공과 초식은 하나니까 내공심법에 맞는 초식을 익혀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울 뿐이다.

“ 남궁 소저의 단전이 울렁이는 게 증거입니다.”

“ 정말이에요?”

“ 그렇습니다. 지금 펼치고 있는 창궁대연검법을 꾸준히 펼치면 내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창궁대연신공을 운기해서 얻을 수 있는 내공에 비해 축기되는 양이 워낙 미미하고 그런 이유로 인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죠. 아무튼 그 방법으로 무공을 펼쳐보면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얻게 될 겁니다.”

“ 나도 할래요.”

두 번째로 공터로 나온 사람은 팽자윤이었다. 그녀는 제 키 크기의 도를 들고 나와 연우강 앞에 섰다.

“ 나도 해봐야겠어요.”

세 번째로 나선 사람은 수여설이었다.

“ 나도!”

“ 저도 하겠습니다. 조장님.”

“ 저도 해보겠습니다.”

연우강과 남궁운화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잠룡들이 엉더이를 털고 일어나 공터로 나왔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무공을 천천히 펼쳤다. 그들에 이어 표사들까지 나오자 공터는 거의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무인들로 들어찼다.

잠시 어색한 얼굴로 무공을 펼치던 자들이 이내 숙연해지며 집중하기 시작하자 연우강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다.

“ 여기 있네.”

연우강이 다가오자 욱일승은 약 대접을 내밀었다. 연우강은 약 대접을 받아들고 잠룡들을 보았다.

“ 정말로 효과가 있는 거냐?”

두작군은 연우강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 무슨 효과?”

“ 저렇게 하면 무공이 늘어나는지 궁금해서 그런다.”

“ 직접 해보면 되잖아.”

“ 이 나이에 체면이 있지 제자가 보는 앞에서 어떻게 저 짓을 하냐, 자식아.”

“ 하지 않을 거면 궁금해할 이유가 없지.”

연우강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 자식 되게 뻐기네.”

두작군의 시선이 욱일승과 이자승에게로 향했다.

“ 나는 그것보다 천보가 무슨 보법인지 그게 더 궁금하다네.”

이자승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 아! 맞다. 저도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형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걸 물어본다고 해놓고는...”

간밤에 두작군은 천보에 대해 생각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천보와 연결 지을 만한 대야벌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일천독행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벽같이 물어본다고 해놓고는 연우강의 무론 강의 때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다.

“ 말해라!”

두작군은 연우강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 뭘?”

“ 뭐긴 녀석아, 천보지.”

“ 알면, 애들 배우는 걸 따라 익히려고?”

“ 그럼 안 되냐?”

“ 영감, 사부란 말이야, 뭔가 신비한 구석이 있어야 하는 거야. 제자들 앞에서 제자들이 배우는 무공을 함께 배우면, 저 녀석들이 제대로 사부로 대접할 것 같아?”

“ 그, 그건.....”

“ 영감하곤 인연이 없으니까, 잊어.”

“ 알았다. 알았으니까 어떤 건지 말이나 해주라.”

“ 꼭 알고 싶어?”

“ 응!”

“ 영감도?”

연우강은 고개를 돌려 욱일승을 보았다.

“ 그렇네. 궁금하긴 하네.”

욱일승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영감. 전에 내가 풍동에서 했던 말 기억해?”

“ 어떤 말을 했는데?”

“ 기연에 대해서 했던 말.”

“ 천오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 있어서 기연을 얻을 조건으로 완벽하다고 했던 말을 말하는 거냐?”

“ 응!”

“ 그럼?”

“ 검지곡 석상도 천오백 년 전에 만들어졌을 걸?”

“ 그, 그래서?”

“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영감도 그곳에서 뭔가를 얻었잖아.”

“ 그, 그러니까 그게 바로 저, 전설이라고?”

두작군의 입이 쩍벌어졌다.

검지곡 석상에서 얻었다면 지난 천오백 년 동안 대야벌에 내려왔던 그 전설밖에 없을 테다. 바로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

“ 아마 그럴 거야.”

“ 그, 그걸 저 녀석들에게 전수하겠다고 한 거냐?”

“ 내게는 필요 없는 거잖아. 필요도 없는 걸 굳이 끼고 있을 필요가 없지. 원래는 돈이나 좀 벌어볼까 했는데 생각을 고쳐먹었어.”

“ 어떻게 고쳐먹었단 말이냐?”

“ 신강에 도착하면 그때 말해줄게.”

“ 야!”

두작군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영감! 청출어람이란 말 뜻 알아?”

“ 너 지금!”

“ 묻는 말에 먼저 대답부터 해, 영감탱이야.”

“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남을 의미하는 말이잖아, 자식아.”

“ 그럼 그 뛰어난 제자를 배출한 스승은 미친 듯이 기쁠까, 아니면 기분 더러울까. 스승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고 가정했을 때.”

“ 뛰어난 제자를 보는 건 스승의 기쁨이야, 녀석아!”

“ 그럼 남궁운화가 영감을 넘어섰을 때 다시 이야기하자고.”

“ 내. 내 기분이 더러울 거라는 말이냐?”

“ 그때 이야기하자니까 왜 그래?”

“ 하여간 너 나쁜 자식.....아이고, 배야. 저것들이 땅을 샀나 왜 갑자기 배가.”

두작군은 아랫배를 틀어쥐고는 자리를 떴다.

“ 나도 갑자기 배가 아프네.”

“ 나도 그렇네.”

“ 아무래도 어젯밤에 과식을 한 것 같구먼.”

두작군을 필두로 지옥에서 나온 무인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엔 이자승 일행만 남았다.

“ 그게 네 방식이냐?”

이자승은 감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 이백 명 가까이 되는 무인들이 네 말 몇 마디에 미쳐버리지 않았느냐?”

“ 저들의 마음을 헤아리면 금세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 쉽지 않다.”

“ 쉽습니다. 영감님.”

“ 특이한 능력이라도 있는 게냐?”

“ 저들 사이로 들어가면 간단합니다. 저들의 입장이 돼보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진자 필요한 건 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군에서 배운 거냐?”

“ 그건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지휘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행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 그렇구나. 그런데....”

이자승은 욱일승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너도 화장실 가고 싶은 게냐?”

욱일승은 웃으며 물었다.

“ 난 저녁에 쉴 때나 갈 참이다.”

“ 그럼 나도 그 시간대에 맞춰야겠구나. 너희 둘도 화장실 보는 시간을 저녘 때로 옮겨라.”

욱일승은 수천월과 갈인효를 보며 말했다.

“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 여하튼 염라대왕 그 자식은 죽도로 맞아야 해.”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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