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오살
오살의 수장인 천살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한 달 전 대야벌을 떠났고, 보름 전부터는 놈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자신들의 목표는 단 한 명. 연우강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다른 잠룡들과 충돌 없이 은밀하게 처리하려고 하였고, 백 명의 살수를 대동하고 온 이유는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다. 살수들을 풀어 잠룡들의 이목을 흐리게 한 다음 연우강을 처리할 셈이었다.
그런데 기회는 고사하고 놈들 근처로 접근조차 못 하고 있다.
몇 번 접근을 시도했지만 애꿎은 부하들만 희생시켰을 뿐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저자들 때문에 접근을 못한다.
잠룡들과 표사들이 잠든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와서 이상한 동작을 하는 네 명의 노인들.
잠룡들의 호위무사인 그들은 축시부터 인시 초까지 저 짓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저들이 끝나고 나면 다른 호위들이 나와서 비슷한 행동을 한다. 살수들이 활동하는 시간대는 밤인데 그 시간에 놈들이 깨어 있으니 도무지 접근이 불가능하다.
“ 빌어먹을!”
천살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문제는 놈들이 아니라 부하들에게서 먼저 발생하고 있다. 낮에는 놈들을 따라 이동하고, 밤에는 공격 기회를 노리다 보니 부하들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다.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면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실수가 잦아지기 마련이다.
지금 부하들의 상태가 그랬다.
만일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임무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모험을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건데....”
“ 접니다. 대형.”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둘째인 지살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 알아봤느냐?”
“ 와운곡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 어떻더냐?”
“ 구름이 누워 쉬는 곳이라는 이름 그대로입니다. 밤이면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사물 분간이 쉽지 않은 곳입니다.”
“ 그곳에서 승부를 보잔 말이냐?”
“ 당분간 와운곡보다 더 좋은 장소를 찾기 힘듭니다. 그리고 부하들의 상태도 심상치 않습니다.”
“ 알았다. 와운곡으로 이동하라고 일러라.”
“ 알겠습니다. 대형.”
지살은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곧 오살을 비롯한 팔십여 명의 살수들이 소리 없이 그곳을 떠났다.
와운곡은 계곡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분지에 가깝다. 사실 동서로 이백 장, 남북으로 삼백 장에 달하는 크기를 계곡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곡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들어가는 입구와 나가는 출구가 좁고, 계곡을 둘러싼 주변 산들이 급경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불어 계곡의 중앙에는 십여 장 폭의 커다란 호수가 있어, 하룻밤 휴식처로는 나쁘지 않았다. 대운표국 표행이 와운곡에 도착한 것은 저녘 무렵이었다. 일행은 계곡 중앙에 있는 귀호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은 일행은 주변에서 나무를 주워 와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하는 등, 하는 행동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 계곡 형태가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귀곡이라고 부르기도 하오.”
주변을 둘러보는 연우강을 향해 팽운이 설명을 해주었다.
“ 원래 안개가 이렇게 많았던 겁니까?”
“ 와운곡이란 이름이 그래서 생긴 거요. 어떤 자들은 물에서 살아가는 거북이 산에 있어서 안개가 많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오.”
“ 굳이 이곳을 휴식처로 삼는 이유는 거북이 십장생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군요.”
“ 그렇소. 표국이 오랫동안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이곳에서 밤을 보내곤 하오.”
“ 오늘 밤은 쉽지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머물 거요?”
“ 우리 집안도 한때는 무가였소, 연공자.”
“ 무가라면......”
“ 혹시 하북 팽가라고 들어본 적이 있소?”
“ 천하제일도문이라고 하였던 그 가문을 말하는 거요?”
연우강은 놀란 눈으로 팽운을 보았다.
하북팽가라면 도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알려진 가문이다. 하지만 하북팽가는 백 년 전에 몰락하였고, 지금은 전설로만 남았다. 그 가문을 팽운이 언급하였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렇소. 내가 그 하북팽가의 현 가주요.”
팽운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다시 무가로 거듭나고 싶은 거요?”
“ 우리 하북팽가는 지난 백 년 동안 무가가 되고 싶어했소.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오.”
“ 대야벌 때문이란 말이군요.”
“ 그렇소. 모든 길은 대야벌로 통하오. 대야벌에 인맥이 없는 자는 무인으로 성공이 불가능하고, 대야벌에 상납을 하지 않으면 무관조차 열 수가 없소.”
“ 무림도 황금기를 구가하던 때가 있었다고 들었소.”
“ 대야벌이 존재하는 한 황금기라 말은 없소이다. 연 공자. 대야벌 벌주가 무림을 풀어주면 황금기가 되는 거고, 그들이 무림을 조이기 시작하면 암흑기가 되오. 벌주의 성정에 따라 그렇게 보일 뿐이오.”
“ 대야벌의 벌주가 무림 황제란 말이네.”
“ 그렇소. 대야벌은 무림 제국이오.”
“ 그런 세상에서 굳이 무가를 세우려는 이유가 뭐요?”
“ 난 무인이면서 인간이기 때문이오.”
“ 내겐 너무 거창한 말 같소. 가주. 난 그냥 백수를 꿈꾸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오.”
“ 어떤 부탁을 하려고 한 말은 아니오. 연 공자가 잠룡들의 조장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오.”
“ 아무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시오.”
연우강은 팽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제일 끝에 위치한 마차로 간 연우강은 마차 문을 두드렸다.
“ 누구세요?”
안에서 팽자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아저씬데 옷 좀 갈아입으려고.”
“ 들어오세요.”
“ 웬일이지? 혹시.....”
마차 문을 열어주자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 흥! 간 때문이 아니니까 넘겨짚지 마세요.”
“ 알았다. 녀석아.”
마차 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궤짝을 내려놓고는 팽자윤을 보았다.
“ 나 옷 갈아입는다니까.”
“ 어린애라고 하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그대로 있겠다는 말?”
“ 속옷 갈아입을 거예요?”
“ 그건 아냐.”
“ 그럼 갈아입으세요.”
“ 자윤이 너 내게 관심 있는 거지?”
연우강은 궤짝 뚜껑을 열고 안쪽에 있는 물건을 꺼내 놓으며 물었다.
“ 흥! 관심은 무슨. 얼굴만 젊었지 속은 늙은 아저씨보다 더하면서.”
“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넌 나보다 더하잖아.”
“ 전 하북팽가의 가주잖아요. 가주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워야 하는 거라고요.”
팽자윤은 연우강이 꺼내놓은 물건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 하지만 이제 열 살이잖아자.”
“ 전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빨리 어른스러워진 거라고요. 그런데 어디 아퍼요?”
팽자윤은 한편에 수북하게 쌓인 약봉지를 보며 물었다.
“ 아프니까 먹겠지. 아픈 데도 없으면서 약을 먹는 사람이 어딨냐?”
물건을 다 꺼낸 연우강은 진식을 해진하고 안쪽 상자의 뚜껑을 열었따. 그러고는 사망묵의를 꺼내 걸쳤다.
“ 정말 아파요?”
팽자윤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은 물론이고 이동하면서도 피곤하다고 쉬는 걸 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 같았다.
“ 약만 꾸준히 먹으면 활동하는 덴 아무런 지장이 없는 병이니까 신경 꺼도 돼.”
“ 그럼 보약이네. 그런데 그건 뭐죠?”
팽자윤은 먹물처럼 새카만 사망묵의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 군에서 입던 군복.”
“또 거짓말한다. 그렇게 생긴 군복이 어딨어요?”
“ 흑랑기에서는 이런 군복을 입었어. 녀석아. 그리고 난 거짓말 같은 건 안 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안쪽의 무기를 꺼내 하나씩 장착했다.
“ 피이! 거짓말 안 하는 거 좋아하.....”
입을 삐죽 내밀던 팽자윤의 눈은 점점 커졌다.
상자 안에서 하염없이 나오는 물건들 때문이었다. 특이하게 생긴 요대가 나오고, 쇠로 만들어진 철립이, 해골이 새겨진 반지가, 팔찌가, 검은 묵주가 차례로 옷에 장착되고 있었다. 그 많은 물건이 나왔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분리돼 있던 그것들이 마치 옷의 일부분처럼 변한다는 것이었다.
“ 그, 그것들이 다 뭐죠?”
“ 군복의 일부야.”
연우강은 무기를 장착하며 대답했다.
“ 설마, 무, 무기들?”
“ 원래 군인들은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거야.”
“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건 너무 많잖아요.”
“ 그래서 나도 고민 중이야. 이걸 장착할까 말까.”
연우강은 사망낭조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 손가락에 끼우는 건가요?”
“ 응! 반지가 있는 손을 빼고 나머지 손가락에 전부 끼우는 거야. 이렇게.”
연우강은 사망낭조 하나를 끼워서 팽자윤 앞으로 내밀었다.
“ 그러니까 아저씨 말은 밖의 부하들에게도 군복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죠?”
“ 맞아.”
“ 그래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 아닌가요?”
“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인 연우강은 사망낭조를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 그런데 그걸 다 사용할 수 있어요?”
사실 가장 궁금한 것은 연우강이 특이한 군복을 입었다는 게 아니라 그 많은 무기를 다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 일단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잖아.”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손괭이와 낫을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 묵사는 허리 뒤쪽에 눕혀 걸었다.
“ 괜찮네.”
팽자윤은 빙긋 웃었다.
검은 철립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검은색 검을 허리 뒤쪽으로 찬 연우강의 모습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멋있었다.
“ 넌 아빠 옆에 가 있어라.”
연우강은 빼 놓았던 물건을 집어넣고 등에 졌다.
“ 궤짝 아래쪽에 있는 자루는 뭐죠?”
팽자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 궤짝으로 들어가지 않는 물건이야.”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긴장감으로 인해 삼엄했다. 마차를 중심으로 표사들은 안쪽에, 잠료들은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채였지만, 잠룡들의 이목은 전부 주변으로 쏠려 있었다.
연우강이 나오자 잠룡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 어?”
남궁운화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연우강의 몸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은 탓이었다.
“ 군에서 입던 군복이에요. 그보다 어떻습니까?”
연우강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 일다경 전부터 숲이 죽었어요.”
“ 그런 것도 알아요?”
“ 지금 절 무시하는 거죠?”
“ 아닙니다. 항상 그렇게 긴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몸은 괜찮아요?”
연우강은 남궁운화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 움직이기 딱 좋을 정도예요.”
그동안 살수들이 출몰할까 봐 제대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고 일어나면 물먹은 솜처럼 몸이 축축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를 가뿐하게 버티곤 했다.
내심 강해진 내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 원래 아침 운동의 효과가 그렇습니다.”
“ 그런 거였어요?”
“ 그렇다니까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근육은 멀쩡한데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견디기 힘들죠. 그걸 치유하는 게 아침 운동입니다. 아무튼 효과를 봤다니 다행이네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다른 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겻다. 다른 대원ㄷ르의 상태도 남궁운화와 비슷했다.
스스스! 스스슥!
바로 그때 안개를 뚫고 바람이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무기를 뽑아 들고 벌떡 일어났다.
“ 전군 앞으로!”
“ 좌군 이쪽으로!”
“ 우군!”
“ 중군!”
“ 후군!”
잠룡들은 재빨리 본인들의 위치로 자리를 잡았다.
“ 모처럼 만에 몸 좀 풀겠네.”
욱일승은 차갑게 웃으며 선두로 나섰다. 뒤이어 수천월을 비롯한 두작군 일행이 선두로 자리를 잡았다.
진형이 구축되자 연우강은 일행의 선두로 나왔다.
“ 전쟁터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 동료도 믿지 말고, 운도 믿지 마라. 오직 손에 들린 무기와 자기 자신을 믿어라. 강한 자는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마지막에 웃는 자라는 걸 명심해라.”
연우강은 나직이 말하고는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 어?”
“ 응?”
잠룡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연우강은 일 갑자 남짓 내공을 지녔지만, 혈도가 대부분 막혀 있어 내공 운영이 안 되는 자였다. 그가 흑철마신이라는 외공을 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가장 먼저 적진으로 들어가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때만은 아니었다.
“ 전군은 전방으로 이동한다!”
“ 좌군은 좌측으로 이동한다!”
“ 우군은 우측으로 이동한다!”
각 군장들의 외침이 떨어지자 잠룡들은 거리를 벌리며 넓게 포진했다.
“ 전진하라!”
“ 전진하라!”
곧이어 두 번째 명령이 떨어지고 잠룡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꿀꺽! 꿀꺽!
아무리 잠룡대전을 거쳤고, 지난 일년 육 개월 동안 피땀을 흘리며 무공을 익혔다고 하지만, 상대는 다른 곳도 아니고 사월림의 살수들.
잠룡들은 긴장한 얼굴로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차앙! 챙!
툭! 툭툭!
후두둑!
안개 속으로부터 병기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잠룡들은 움찔움찔 떨었다.
스윽! 스윽!
마치 막대기로 물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더불어 암경이 바람처럼 밀려왔다.
“ 차앗!”
“ 타앗!”
잠룡들은 우렁차게 고함을 내질렀다.
쩌엉!
가장 먼저 살수들을 향해 공격을 펼친 사람은 수여설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하고 새하얀 광채가 안개를 뚫었다.
수여설 앞으로 다가오던 살수 한 명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바로 그 순간 살수의 머리 위로 다른 살수가 나타나 수여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수여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히고, 그녀의 왼손 다섯 손가락이 오므려졌다가 펴졌다.
피잉!
마치 화살이 날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다섯 줄기의 지풍이 허공을 갈랐다. 동료의 머리를 타고 넘어 공격을 시도했던 사내가 나직한 비명과 함께 뚝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살수의 입에서는 비명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차앙! 챙! 챙챙챙!
스악! 슥! 슈악!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툭툭!
피 냄새가 주변에 진동하고 안개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살수들의 입에서는 비명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공격했던 잠룡들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상대를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저도 모르게 위축되고 있었다.
챙! 챙챙! 챙!
스악!
툭! 툭툭!
“ 으음!”
“ 빌어먹을!”
잠룡들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잘려나간 몸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을 떨었다.
위축되면 움직임이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잠룡들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며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 놈들은 벙어리다. 신경 쓰지 마라!”
잠룡들의 상황을 눈치 챈 몽요가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리 없이 죽어 가는 살수들의 모습은 두려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 커억!”
“ 크윽!”
급기야 몇몇 잠룡들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 놈들은 두 명씩 조를 이루고 있다. 뒤에서 나오는 자들을 조심해라.”
이번엔 수여설이 고함을 내질렀다.
스스스! 스스스! 스스스!
또다시 미약한 소리가 들려왔다.
“ 휴우!”
몽요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근처에 숨어 있던 자들이 물러가면서 나오는 소리였다.
툭!
툭! 툭툭! 툭툭!
그러한 와중에도 전방에서는 계속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비명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건 살수들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숨을 고르고 긴장을 풀어라. 살수들은 너희들보다 약하다. 단지 실전 경험이 우리보다 약간 많을 뿐이다.”
사기란 참으로 묘했다.
살수들보다 자신들이 더 강하다는 사실은 잠룡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살수의 공격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부상으로 그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했다. 소리 없이 공격해 왔다고, 소리 없이 죽고, 소리 없이 떠난 자들.
어쩌면 잠룡들은 첫 상대로 너무 강한 자를 만났는지도 몰랐다.
단 한 번의 공격을 받았을 뿐이고, 심하게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잠룡들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한식경 정도 흐르자 잠룡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 쯧!”
몽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잠룡들을 살폈다.
‘ 제일 겁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놀랍게도 호흡이 가장 안정돼 있는 사람은 남궁운화였다.
‘ 재를 이용하면 되겠네.’
[ 운화야. ]
[ 네, 언니. ]
[ 아무래도 네가 앞장서야겠다.]
[ 앞장서라는 건 무슨 뜻이죠? ]
[ 잠룡들이 사기가 극도로 떨어졌어. 지금 상태론 전투 자체가 불가능해.]
[ 그러니까 제가 앞서나가서 싸우라는 말이에요? ]
[ 네가 제일 어리잖아. 너 아니면 저들의 사기를 올릴 방법이 없어.]
[ 알았어요. 언니.]
[ 할 수 있겠어? ]
[ 물론이죠. ]
남궁운화는 앞으로 나섰다.
“ 가주님!”
창궁대 소속 창궁사수의 대형 우창준이 그녀를 불렀다. 그는 잠룡쟁패를 받아 대야벌로 들어온 남궁세가 가솔 중 한 명이었다.
“ 대기하세요.”
남궁운화는 나직이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스스스! 스스스! 스스스!
그녀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며 강한 기운이 밀려왔다. 살수들의 이 차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 준비하라!”
몽요는 소리쳤다.
잠룡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전방을 노려보았다.
“ 차앗!”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함성이 남궁운화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창궁검이 하늘로 향하고, 푸른 광채가 쭉 튀어나왔다. 푸른 검강이 튀어나오는 순간 창궁검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창궁대연검법의 일 초인 창궁개운이었다.
허공이 갈라지고 머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잘려나간 살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창궁개운에 죽어간 살수는 두 명이었다. 허공을 수직으로 가른 창궁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이번에는 시체로 변한 살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 초인 창궁만리였다.
“ 타아!”
남궁운화의 입에서 두 번째 외침이 터져 나오고, 그녀의 신형이 삼 장 높이로 솟구쳤다.
사라랑!
그녀의 창궁검에서 검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수십 개의 검 그림자가 그녀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툭! 툭툭! 툭툭툭!
수 조각으로 잘린 살수들의 시체가 사방에서 생겨났다.
“ 저 계집을 먼저 없애라!”
안개 속에서 한껏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난! 창랑이다!”
부드러웠던 지금까지 기세와는 달리 그녀의 몸에서 광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그녀의 검에서 그녀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떨어져 나가며 폭풍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그것은 창궁대연검법의 후식이라고 불리는 창궁만파였다.
조금 전 안개 속에서 터져 나왔던 남궁운화를 없애라고 하였던 명령이 신호탄이었는지도 몰랐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살수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더불어 그들의 몸에서 솟구친 피에 남궁운화의 옷이 붉게 물들었다.
“ 제기랄!”
남궁운화를 지켜보던 잠룡들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이곳에 있는 잠룡들은 남궁운화의 처지를 잘 알고 있다. 가신들에게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는 가주이자, 자신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잠룡. 그런 그녀가 혼자 살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 염병할!”
잠룡들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 간~다! 간~다! 새카만 이라가 벌판을 달린다!”
“ 크아악!”
“ 간~다! 간~다! 새카만 이리가 벌판을 달린다.”
안개를 뚫고 우렁찬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 나도 간다!”
“ 나도 간다!”
“ 간~다! 간~다!”
잠룡들은 발로 바닥을 다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 아악!”
두 번째 비명이 안개 속에서 들려오자 잠룡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 부순다! 부숴라! 우리를 막~는 적군을 부순다!”
잠룡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창! 창창창!
“ 크악!”
“ 아악!”
“ 으아악!”
“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는다!”
“ 남긴다, 남겨라! 흑랑이 나가면 시체만 남는다.”
쿵! 쿵쿵! 쿵! 쿵쿵! 쿵! 쿵쿵!
그들은 발걸음으로 전고 소리를 대신했다.
한 걸음 옮길 때 무기를 휘두르고, 두 걸음 옮기면서 적의 공격을 피했다. 세 걸음 옮기며 동료를 돕고, 네 걸음 옮기며 나려타곤 수법으로 몸을 굴렸다.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잠룡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들의 눈에 핏발이 서고 검을 툴어쥔 주먹은 힘줄이 뿔뚝 돋았다.
“ 달린다! 달려라! 미~친 이리가 적진을 달린다!”
“ 달린다! 달려라! 미친 이리가 적진을 달린다.”
“ 죽인다! 죽여라! 한 놈도 남김없이 씨~를 말려라!”
“ 죽인다! 죽여라! 한 놈도 남기없이 씨~를 말려라!”
“ 마셔라! 마셔라! 적군의 피~로 갈증을 식혀라!”
“ 마셔라! 마셔라! 적군의 피~로 갈증을 식혀라!”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죽여! 죽여!”
“ 죽여! 죽여!”
“ 에이! 씨부랄!”
“ 에이! 씨부랄!”
“ 죽여! 죽여!”
“ 죽여! 죽여!”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 에이 씨부랄! 에이 씨부랄!”
쿵쿵! 쿵쿵! 쿵쿵! 쿵쿵!
묘한 일이었다. 연우강을 따라 고함을 내지를 뿐인데, 피가 끓고 온몸에서 힘이 솟는다. 힘을 잔뜩 머금은 발은 땅을 파고들어 가고, 휘두른 무기는 하늘이라도 잘라낼 듯했다. 살수들의 피가 얼굴로 튀어 피범벅이 됐지만, 잠룡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 팽가 무인들은 표물을 지켜라!”
잠룡들과 살수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팽운이 가솔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됐네.”
몽요는 빙그레 웃었다.
남궁운화의 활약은 잠룡들의 자존심을 긁었고, 연우강의 노랫가락은 사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하북팽가 무인들의 참가는 승리를 결정짓는 요소인 것이다.
“ 아무튼!”
몽요는 안개 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 잠룡들에게 투기를 불러일으킨 사람, 그는 저 안개 속에서 살수들과 마주하고 있는 연우강이었다.
푸욱!
섬뜩한 살기를 뿌리는 사망낭조 다섯 개가 살수의 이마로 파고들어 갔다.
하지만 살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 비명을 질렀으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었을 텐데.”
나직하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사망낭조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 크아악!”
인성을 마비시키는 교육도, 살수는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된다는 철칙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얼굴에 다섯 개의 선이 그어진 살수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 전쟁터에선 비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싸우는 놈도 신이 나고 죽는 놈도 마음이 편한 거야. 비명조차 없으면 그곳은 정말 지옥이 된다고.”
연우강은 살수의 얼굴에 박아 넣었던 오른손을 사정없이 뽑았다.
털썩!
이미 숨이 끊어진 살수가 철버덕 쓰러졌다.
“ 왔군.”
막 걸음을 옮기려던 연우강이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마치 어둠이 밀려오는 것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주변이 서늘한 기운으로 들어차 있었다. 살기도 아니고 단지 서늘한 기운.
[ 무슨 일이냐?]
그동안 연우강을 지켜보고 있던 이자승이 전음으로 물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연우강은 전음을 보내며 천천히 감각을 끌어올렸다.
단전을 뛰쳐나온 흑풍에 마라천력을 더하자 주변 전경이 환하게 그려졌다.
‘ 역시 오살인가.’
연우강이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흑풍에 마라천력을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대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자들은 걸려들지 않았다.
‘ 응?’
천천히 숨을 고르던 연우강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는데, 속이 울렁거리며 어질어질했다. 그것은 독살이 펼친 독이었다.
비틀!
“ 프! 캬캬캬캬캬!”
연우강의 몸이 비틀대는 순간, 살기를 가득 머금은 광소가 그의 귀를 강타했다. 두 번째 공격을 펼친 자는 웃음으로 음공을 펼치는 소살이었다.
“ 커억!”
독에 이은 음공에 당한 연우강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윽!
그가 자세를 낮추는 순간, 바로 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벌떡 일어났다. 마치 바닥이 벌떡 일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이자는 셋째인 인살이었다.
싸늘한 기운을 머금은 인살의 검이 연우강을 향해 빛살처럼 나아갔다. 인살은 확신했다. 녀석과 거리는 불과 두 자. 다른 곳으로 찌르고 싶어도 찌를 방법이 없다. 검은 놈의 심장으로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끝났다. 연우강!”
그는 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푸욱!
심장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인살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연우강의 얼굴을 확인했다.
“ 저런!”
인살이 외침에 이자승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 움직이지 마라, 자승!]
이자승이 막 몸을 날리는 순간 욱일승의 전음이 그를 막아섰다.
[ 녀석이 당했다. ]
[ 당한게 아니니까 지켜보기만 해라.]
[ 검에 찔렸는데 당하지 않았단 말이냐?]
[ 녀석은 오살을 전부 찾아내기 위해 연극을 하는 중이다. ]
[ 정말이냐? ]
[ 녀석이 일부러 이곳으로 온 이유가 바로 오살 때문이니까 걱정 말고 지켜보기만 해라.]
[ 알았다.]
이자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인살과 연우강을 지켜보았다.
“ 난 인살이다. 연우강.”
눈빛이 마주치자 인살은 빤히 쳐다보며 속삭였다.
상대의 심장이나 목에 검을 밀어넣고 난 지금을 그는 ‘나른한 휴식’이라고 부르며 죽어 가는 자의 운명을 지켜준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 푸욱!”
“ 숨소리가 거칠구나. 연우강.”
인살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그놈은 단장독에 당했을 때부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시는 겁니까. 저 녀석이 꼼짝도 하지 못한 건 초혼광살곡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왼편과 오른편에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독을 풀었던 독살과 광소를 터뜨렸던 소살이었다.
“ 하하하! 아무튼 천만 냥을 벌었으니 되지 않았느냐?”
인살은 웃으며 다시 연우강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 푸욱!”
다시 연우강의 입에서 마치 살 속으로 검이 파고들어 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인살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소리를 흘렸다.
“ 남길 유언은 없느냐?”
“ 아파.”
연우강은 왼손으로 인살의 검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러자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사망지환이 인살의 얼굴로 향하는 꼴이 되었다.
“ 특이한 반지를 끼고 있구나.”
“ 맞아. 널 저승으로 안내할 반지이기도 해.”
“ 저승?”
인살의 오른편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 천살과 지살은 어디 있지?”
연우강은 대답 대신 물었다.
“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고 싶단 말이냐?”
“ 저 나무.”
연우강은 오른편 이 장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턱으로 가리켰다.
“ 유언을 한 걸로 알겠다. 연우강.”
“ 사망지환이라고 불러.”
“ 무슨......”
연우강을 쳐다보던 인살은 문득 의아했다. 검에 심장을 찔렸으면 죽음의 기운이 얼굴을 잠식해 들어야 한다. 그런데 녀석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숨소리마저도 거칠어지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 설마.....’
인살의 시선이 천천히 연우강의 심장으로 향했다. 정말로 검이 파고들어 갔는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널 죽인 무기가 사망지환이라는 거야. 인살!”
파앗!
인살의 시선이 검으로 향하는 순간, 사망지환이 튀어나갔다. 그리고 오른손에 있던 사망묵혼은 독살을 향해, 머리에 있던 철립은 소살의 목을 향해 날렸다.
“ 컥!”
“ 크윽!”
“ 악!”
세 번의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시체로 변한 세 명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도 전에 연우강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순식간에 십여 장 높이로 솟구친 그는 바로 옆 나무를 향해 가슴을 사정없이 튕겼다.
먼저 그의 목에 감겨 있던 사망묵주가 허공을 갈랐다.
툭툭툭! 툭툭!
“ 맙소사!”
나무 아래쪽에 은신해 있던 천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지금껏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설사 인살이 장님이라고 해도 실패할 수가 없는 거리였다. 더구나 독살이 푼 독에 당했고, 소살의 초혼광살곡에도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살의 검을 피한다는 것은 설사 신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녀석은 인살의 검을 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셋을 없애버렸고, 지금은 자신과 지살이 은신해 있는 나무를 공격하고 있다.
공격 방법도 무식하기 짝이 없다.
적을 찾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아예 은신할 만한 곳을 통째로 없애버리는 공격이다.
놀란 사람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연우강을 지켜보고 있던 이자승의 눈도 더할 수 없이 커져 있었다.
문득 과거에 보았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연히 절강성에 갔을 때 해일이 이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광경이 그랬다. 수백 채의 가옥이 차례차례 가루로 변해 가는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오곤 한다. 그런데 나무 위쪽부터 시작하여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은 마치 해일의 움직임 같았다.
‘ 어떻게 할 거냐?’
이자승은 나무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유성처럼 쏟아지는 암기를 피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설사 자신이 나무 아래쪽에 있다고 해도 도망칠 구멍은 없을 듯했다.
‘ 난 정면 공격을 택하겠다. 천살.’
“ 차앗!”
“ 타아!”
이자승의 예상대로 나무에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두 명이 솟구쳐 올랐다. 그들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며 검을 휘둘러 강기막을 형성했다.
콰콰쾅! 쾅쾅!
그들이 구축한 강기막과 사망묵주가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두 사람이 구축한 강기막이 한순간에 종이처럼 얇아졌다.
바로 그 순간.
“ 혼령무!”
나직한 목소리가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유성 폭풍이 천살과 지살을 덮쳤다. 그것들은 연우강의 상체와 하체에 골구로 꽂혀 있던 사망마비였다.
“ 넌?”
천살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청부자.”
퍽퍽퍽! 퍽퍽퍽!
“ 네, 네가 청부를... 크아악!”
“ 아악!”
처절한 비명이 천살과 지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유성처럼 쏟아진 사망마비는 두 사람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나무마저도 갈가리 찢어발겼다. 폭풍처럼 사방을 휩쓴 사망정주와 사망마비는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다시 사망묵의 안으로 장착됐다.
척!
연우강은 아래로 내려섰다.
“ 돌아버리겠군.”
이자승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상식을 초월하는 무공이었다. 심검 고수 정도면 나무를 가루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무기로 나무를 조각조각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암기를 이용하여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모든 암기에 화약을 넣어야 하고 폭발시켜야만 한다. 그런데 연우강이 쏘아보낸 암기는 폭발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다시 회수되기까지 했다.
“ 어떻게 된 거냐?”
연우강 옆으로 다가간 이자승이 물었다.
“ 타고나 능력에 내공이 합쳐지면 천력이 나타나곤 합니다, 영감님.”
“ 마라천력이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영감님.”
“ 그렇다고 해도 그 마라천력을 이용하는 무공은....?”
“ 저 친구 말처럼 염라대왕만 오지 않으면 시간은 많다. 자승아.”
주변의 살수를 정리한 욱일승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그래야겠구나.”
이자승은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안개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 계속 여기 있을 건가?”
욱일승은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적도 없는데 돌아가야지요, 영감님!”
연우강은 이자승을 불렀다.
“ 곧 따라가마.”
이자승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라천력이란 말을 듣자 문득 잊혔던 기억의 편린 하나가 떠오른 탓이었다.
‘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겁니까?’
‘ 들키면 목이 잘릴지도 모르는데 최대한 숨겨야지 별수 있겠소.’
‘ 무공을 익히시면 훨씬 쉽게 숨길 수 있습니다.’
‘ 정말이오?’
‘ 그렇습니다. 저하. 무공에는 허공섭물이라는 게 있는데 마라천력과 비슷합니다.’
‘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려. 알았소. 내 무공을 익혀보도록 하겠소. 무공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요?’
‘ 대야벌로 알고 있습니다.’
‘ 고맙소, 자승.’
“ 주선엽이라고 했는데.....”
오래 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마 서른 살 무려이었을 테다. 북경을 방문하였던 군왕세자를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게 되면서 그가 가진 마라천력이라는 특이한 능력에 대해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주선엽의 아버지 주인문은 황실에서도 잊힌 자였기 때문이다. 어떤 권력도 쥐지 못한 자에게 있어 마라천력 같은 특수한 능력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에 가깝다. 그때 그에게 무공을 익히면 마라천력을 숨길 수 있다고 충고를 해 주었다.
그날 후로는 그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야벌 황궐 궐주가 된 후에야 비로소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마라천력을 무공과 합친 상태였고, 신분 또한 무영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연우강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 어떻게 됐는지......”
“ 자승아!”
아, 알았다. 가마.“
욱일승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자승은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