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50화 (50/232)

제 7장 싸움의 기술.

경천사마의 대형인 만겁신마 기운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도에 몸담고 있는 처지라 대야벌 만마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만마림에는 광마당, 혈의당, 백의당, 현의당, 철마당의 다섯 개의 조직이 있는 데 그중의 한 곳이 바로 철마당이다. 즉 철마당은 만마림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조직에 속한 무인 이백 명을 간단하게 요리하는 연우강의 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계곡 입구에 뿌렸던 철질려는 미끼에 불과했다.

처음 철마당 무인들은 습지 바닥에 깔린 철질려에 당황했다. 그러다가 목숨에 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치리게 되자 철질려를 무시했다.

그 상태에서 발목을 절반 이상 잘라버리는 덫에 공격을 받았지만,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덫 또한 철질려처럼 목숨엔 지장이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해 버린 탓이다. 하지만 철마당 대원ㄷ르을 위험에 빠트린 진짜 무기는 습지를 내달릴 때 튀어오른 흙탕물이었다. 갈인효가 덫을 통해 독을 풀어 습지 물은 이미 독수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철질려에 부상당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습지 바닥에 흩어져 있던 철질려와 덫을 피해 계곡 끝까지 간다고 해도 철마당 대원들은 이미 독에 중독된 상태가 된다. 그런 자들을 없애는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놀라운 계략이 아닐 수 없었따.

“ 늙은 쥐 세 마리가 얼쩡거리고 있다던데 혹시 봤소?”

연우강은 궤짝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그들과 저기 오고 있는 자들은 일행이 아닌가?”

기운상은 계곡 입구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섯 명이 계곡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친구라면 떨어져 다닐 이유가 없잖소.”

“ 그럼 그들은 누군가?”

“ 대야벌에 칠왕이라고 있는 데 아시오?”

“ 전대 백대고수였던 자들이라고 들었네.”

“ 그들 중 세 명이오.”

“ 그들까지 없앨 참인가?”

“ 요즘 염랴대왕이 바빠서 못 온다고 합디다.”

“ 그들까지 없애겠다는 말인 것 같은데... 자신은 있는가?”

전에 셋째와 싸우는 모습을 잠깐 보아서 연우강의 실력은 대충 짐작한다. 하지만 상대는 전대 백대고수 세 명에 현 백대 고수 다섯 명이다.

연우강의 말을 들으면 그들까지 전부 없앨 심산이다. 하지만 연우강의 실력으로 그런 자들을 없애는 게 가능한지 문득 의구심이 일었다.

“ 그래서 이 궤짝을 내려놓은 거요, 영감.”

연우강은 궤짝을 가리켰다.

“ 상대가 강한 자들이라서 궤짝을 내려놓았다는 말 같은데 이게 무슨.....”

기운상은 궤짝에 달린 가죽 끝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이건?”

연우강은 당루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쉴 때를 제외하곤 궤짝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래서 겉모습만 육중한 궤짝처럼 생겼을 뿐 옷가지를 넣어 다니는 보자기 이상으로는 생각지 않았다. 거무튀튀한 궤짝의 색 또한 방수를 위해 옻칠을 하곤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별것 아닐 거라고 여겼던 궤짝은 힘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 만녀오금철이오.”

“ 마, 만년오금철이란 말인가?”

“ 그렇소. 영감. 묵사를 만든 재질과 같은 거요. 만들어진 시기도 천오백 년 전 무렵이고.”

천오백 년이라는 연우강의 말에 기운상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 혹시.....”

“ 그놈이 없으면 난 지금보다 두 배나 빨리지오. 영감.”

“ 전에는 이걸 내려놓을 만한 적을 만나지 못했단 말인가?”

기운상의 얼굴이 어떤 기대감으로 인해 잔뜩 상기됐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심호흡을 하며 연우강과 기운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적을 만나지 못한 게 아니라 싸울 이유가 없었소.”

“ 그랬군. 그런데 굳이 지고 다닐 이유라도 있는가?”

“ 그 영감도 평생을 지고 다녔다고 했다는 거 아니오.”

“ 그 영감?”

가슴의 들썩거림이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운상의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 이놈의 주인이자, 묵사였던 사망마제 가립하를 말하는 거요, 영감.”

연우강은 묵사를 툭 치고는 몸을 돌렸다.

“ .....!”

기운상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기대하고 있던 말이다.

그런데 잔뜩 기다렸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벙어리가 된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연우강을 지켜보았다.

“ 대형!”

천혈전마 방세남이 기운상을 불렀다.

“ 넌 믿어지느냐?”

기운상은 여전히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 그분은 천오백 전에 사라지셨습니다.”

“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 그렇습니다. 대형. 하지만....”

“ 연 공자가 우리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냐?”

“ 거짓말은 자신에게 뭔가 남는 게 있을 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 공자는 그가 가립하 조사의 후예라는 사실을 밝힌다고 해도 도움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렇겠지.”

기운상은 고개를 끄덕였따. 설사 연우강이 가립하 조사의 진전을 이었다고 해도, 흑천 천주였던 분의 제자라는 상징적인 의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 자세한 건 나중에 알아보고, 우선은 늙은 쥐들을 감시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건....”

궤짝을 쳐다보던 방세남의 시선이 셋째인 혈수참마 남도욱에게로 향했다.

“ 설마 저보고 지라는 겁니까?”

“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 낼 모레면 저도 백 살입니다. 형님.”

남도욱은 볼멘소리를 했다.

“ 당루에서 연공자가 봐주지 않았더라면 넌 백살까지 살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이건 가립하 조사님이 직접 만드신 물건이다. 녀석아.”

“ 끄응! 알았습니다. 형님.”

남도욱은 얼굴을 찌푸리며 연우강의 궤짝을 걸머졌다.

“ 완전 미친놈이네.”

궤짝의 무게에 다리가 휘청하자 남도욱은 조금 전 수곡 입구를 향해 투덜댔다.

“ 무겁냐?”

방세남은 남도욱이 걸머진 궤짝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 들었으면서 뭘 묻고 그러쇼, 에잉!”

남도욱은 내공을 끌어올려 중심을 잡았다.

“ 일단 가자.”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기운상은 숲을 따라 이동했다.

잠시 후, 그들의 시야에 세 사람이 잡혔다. 세 사람은 수곡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운상 일행 또한 계곡 입구로 시선을 주었다.

연우강과 다섯 명은 십여 장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었다. 기운상은 내공을 끌어 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하지만 거리가 멀뿐더러 비가 워낙 거세게 쏟아지는 바람에 설사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말소리가 들릴 상황이 아니었다.

일행은 그 자리에 앉아 세 명의 노인과 계곡 입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편 철마당 대원들을 따라온 유백천 일행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연우강을 보고 있었다. 녀석은 분명 잠룡들과 함께 도망쳤다. 그랬던 녀석이 느닷없이 걸어 나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놀란 모양이지?”

“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구나.”

유백천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완 다르네.”

“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는 말이야.”

“ 예상?”

이번엔 천검자 장양락이 입을 열었다.

“ 미련한 물고기는 눈앞에 미끼가 아른거리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덥석 물잖아.”

“ 미끼라고?”

다섯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응! 둥글게 생긴 거였는데 못 봤어?”

연우강은 그들 앞으로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내밀어 보였다.

“ 그, 그럼 묵사패를 민웅철의 품속에 넣은 사람이 너였단 말이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장양락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호를 비롯한 무영들 대부분은 묵사패와 관련이 있는 어떤 자가 연우강 근처에서 맴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연우강이 묵사패의 주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연우강을 잡게 되면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 넌 누구냐?”

장양락이 연우강을 노려보며 물었다.

“ 사초 연우강!”

연우강은 뒤쪽에 걸쳐두었던 묵사를 뽑으며 대답했다.

“ 그게 전부란 말이냐?”

연우강이 묵사를 뽑아 들자 장양락 역시 그의 애병인 천자검을 뽑아 들며 재차 물었다.

“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급하게 굴지 말라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검을 쥔 팔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일천파류혼을 펼치는 기수식이었다.

“ 네 녀석을 잡게 되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는 말이렷다!”

장양락은 연우강을 향해 걸었다.

“ 혼자만 올 거야?”

“ 일 초만 막아내면 네 머릿속에 있는 비밀과 묵사만 회수하고 살려주겠다.”

“ 그럼 선공도 양보하겠다는 말?”

“ 얼마든지 오너라.”

“ 좋지 않은 습관이야, 장양락!”

파앗!

연우강의 오른발이 전방으로 불쑥 튀어나가고 이어 왼발이 따랐다.

우르릉!

일천독행신을 펼치자 단전이 열리며 흑풍이 무서운 기세로 뛰쳐나왔다. 단전을 뛰쳐나온 흑풍은 연우강의 오른손을 통해 묵사로 들어가고, 곧 묵사 내부를 가득 채웠다.

“ 응?”

장양락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문득 묵사로부터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온 듯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평생을 검과 함께 살아온 검수의 직감이 묵사가 치명적인 무기로 돌변했다고 경고를 해왔다.

그는 급하게 천자검에 내공을 밀어 넣었다.

스악!

바로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묵사가 빠르게 밀려왔다.

“ 흥!”

장양락은 코웃음을 날리며 천자검을 들어올렸다.

“ 한 번의 실수는 곧 죽음이다. 장양락!”

연우강은 차갑게 소리쳤다.

차앙!

“ 억!”

장양락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단지 검이 부딪쳤을 뿐인데,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손목이 얼얼해지면서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연우강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일천독행신과 함께 펼치는 일천파류혼은 일천 번을 쉬지 않고 휘두르는 검법이었다. 어느새 그는 왼발을 뻗어내며 묵사를 휘두르고 있었다. 묵사가 나아가는 방향은 교묘했다. 절묘하게 첫 번째 공격으로 인해 생긴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갔다.

차앙!

장양락은 가까스로 묵사를 막아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조금 전보다 더한 충격이 손목과 팔꿈치를 강타했다. 장양락은 급하게 손목과 팔목으로 내기를 보냈다. 그러고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어느새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차앙!

“ 음!”

장양락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어깨에서도 충격이 느껴졌다. 마치 커다란 망치로 팔을 차례로 친 것 같은 기분과 함께 팔이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쿠웅!

휙!

걸음걸이와 더불어 묵사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방어하는 장양락이 동작도 점점 빨라졌다. 더불어 묵사를 막아낸 회수가 잦아질수록 그가 느끼는 충격의 강도도 세졌다.

“ 이건?”

장양락은 질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묵사에 서린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이 마치 연환 공격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연환공격은 원래 회수를 거듭할수록 위력이 배가되는 공격 방법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은 거의 이 갑자에 육박하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 이 갑자의 내공을 지닌 자에게 연환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삼 갑자의 공력은 있어야만 한다.

연우강이 그런 공력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아니 그것뿐이라면 말도 안 한다. 묵사가 파고들어오는 위치는 하나같이 조금 전 방어하다가 허점이 생긴 곳이고,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막아내는 것 말고는 검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장양락은 공격할 기회를 전혀 잡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설마 이 검법은?’

장양락은 경악했다.

무공 초식을 펼칠 땐 한 초식이 끝나면 숨을 고르게 된다. 숨을 고른다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호흡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기의 흐름을 고른다는 것을 말한다. 즉 다음 초식을 펼치기 전에 끌어올렸던 내기를 단전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새로운 내기를 끌어올려야만 한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과정이지만 초식과 초식 사이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하고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그 간극이 치명적인 허점이 된다.

흔히 무공을 물 흐르는 것처럼 펼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간극을 초소화한 상태를 말한다. 해서 무공을 창안하고자 하는 많은 무인들은 그 간극을 없애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 간극을 완전하게 없앤 무공은 역사상 단 한 가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단 일 초의 초식에 불과하지만 일천 번의 검을 휘둘러야 하는 무공. 아니 일천 초에 달하는 초식을 한 초식으로 집대성한 무공이라고 해야 옳다.

그 무공은 바로 대야벌의 전설로 회자됐던 일천파류혼이다.

그런데 연우강이 펼치는 무공을 보자 그 일천파류혼이 떠올랐다.

“ 마, 말도 안 돼!”

장양락은 부정하듯 소리쳤다.

스악!

장양락의 말을 부정이라도 하듯 묵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장양락은 급하게 천자검을 들어 올렸다.

창!

스악!

창! 창창! 창창창!

물살을 가르는 듯한 소성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그때마다 장양락은 뒤로 물러나야 했다.

“ 컥!”

연속해서 네 번의 공격을 막아낸 장양락의 입에서는 급기야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찌르기로 들어오는 묵사를 쳐내긴 했는데 힘이 부족했던 듯, 왼편 가슴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묵사 끝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쩍 갈라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혈을 할 틈은 물론이고 얼마나 심한 상처가 났는지 살필 여유도 없었다.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또다시 묵사 끝이 뱀처럼 다가들었다.

장양락은 오른편으로 이동하며 묵사를 쳐냈다.

“ 커억!”

이번엔 오른편 가슴이었다.

조금 전 검을 쥔 팔이 그랬던 것처럼 묵사에 의한 상처가 더욱 커진 모양이었다.

“ 뭐 하고 있는 거요?”

결국 장양락은 우두커니 서 있는 유백천 일행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 내가 가겠소, 장 대협!”

먼저 나선 사람은 천랑마효 인후겸이었다.

장양락 정도면 연우강을 충분히 요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껏 지켜보았다. 더불어 물러서는 것도 장양락이 봐주는 걸로 여겼다.

그런데 장양락이 부상을 당한 것이었다.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장양락의 외침이 들려오자, 인후겸은 즉시 몸을 날렸다.

인후겸은 그의 무기인 자모원앙월을 양손에 쥔 채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자모원앙월은 초승달 형태로 생긴 월아 두 개의 등을 교차하여 붙인 듯한 모양이었는데, 짐승의 뿔처럼 튀어나온 부분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연우강!”

인우겸은 연우강을 향해 살기를 쏘아냈다.

의형살인강의 경지엔 오르지 못하여 살기만으로 상대를 죽일 순 없지만, 그가 쏘아낸 살기는 상대방에게 충격을 줄 정도는 된다.

연우강을 떼어내 장양락에게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연우강은 여전히 장양락의 허점을 향해 묵사를 휘두르고, 찔러 넣고 있었다.

“ 오냐, 죽여주마!”

오 장을 날아 바닥에 착지한 그는 전 내공을 용천혈로 흘려보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그의 신형이 빛살처럼 날았다.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지자 그의 신형은 허공에 엎드린 형국이 됐다. 그 상태에서 인후겸은 자모원앙월에 전 내공을 주입했다.

달빛을 머금은 것처럼 자모원앙월에서 은은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광채는 은은했을 뿐이었다. 자모원앙월이 뿌려대는 살기는 더욱 강해졌다.

어느새 연우강과 거리는 반 장 정도 남아 있었다.

연우강은 묵사를 번쩍 치켜든 채였다.

“ 노옴!”

인후겸은 고함을 내지르며 양팔을 쭉 내밀었다.

스윽!

바로 그 순간, 뭔가가 오른팔을 스쳐 지나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물체를 확인하기 위해 눈에 내공을 집중하려는데 검은 물체가 눈앞으로 확 덮쳐왔다.

인후겸은 무의식적으로 자모원앙월의 손잡이를 힘껏 틀어쥐며 밀어 넣었다.

푸욱! 푹!

왼손과 오른손에 있던 자모원앙월의 날 네 개가 살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 커억!”

“ 끝이다. 놈, 넌 우릴......”

인후겸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바로 눈앞에서 고통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삿갓을 쓴 연우강이 아니라 장양락이었던 것이다.

“ 어떻게....”

그는 멍한 얼굴로 장양락을 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등 뒤에서 들려왔다.

“ 상대방이 만들어낸 힘을 이용하는 이런 신법을 요즘은 대나이신법이라고 하더군. 인후겸  넌 날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들어 올리고 있던 묵사를 인후겸의 뒷목을 향해 힘껏 찔러넣었다.

푸욱!

묵사는 인후겸의 목을 뚫고 나와 장양락의 가슴까지 파고들어 갔다.

“ 우리가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

인후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뒷목으로 파고들었던 묵사의 검면이 틀어지면서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 야장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보라도 뽑아낼 수 있는 곳이잖아.”

연우강은 묵사를 사정없이 뽑았다.

철벅!

인후겸과 장양락은 포개진 채로 쓰러졌다.

잠시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연우강은 몸을 돌려 유백천 일행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면 보통은 할 말을 잃는다. 지금 유백천 일행처럼.

그들은 함께 포개져 시체로 변한 장양락과 인후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 상황을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양락은 대야벌 백대고수 서열 이십일 위에 올라 있고, 무영 사십구 호다. 아무리 경황이 없었다고 해도 인후겸의 자모원앙월을 피하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피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는 마치 자살을 하려는 사람처럼 자모원앙월을 향해 몸을 날려 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 계속 그렇게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야?”

그들 앞에 선 연우강이 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유백천은 연우강을 쳐다보았다.

검은 삿갓에 검은 전포, 그리고 묵사. 전신을 검은색으로 도배한 연우강의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이미 일정 경지를 넘어선 무인이라는 의미였다.

“ 그동안 우리가 널 너무 몰랐구나.”

유백천은 벽력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암흑마수 낭걸은 오른편으로 이동했고, 섬수 윤효직은 왼편으로 자리를 옮겨 연우강을 품자 형태로 포위했다.

세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이 쏟아지는 빗방울을 밀어 올리며 둥글게 막을 형성했다.

유백천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벽력도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벽력도에 푸른 뇌전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벽력단혼도법.

유백천이 익힌 일 초의 도법으로 무영 칠십일 호의 무공이기도 하다.

척!

전 내공을 벽력도에 밀어 넣은 그는 도를 양손으로 쥐고 오른편 어깨 앞에 수평으로 눕혔다. 연우강을 향하고 있는 도 끝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물결처럼 넘실댔다. 그가 공격 준비를 하는 순간 왼편에 있던 윤효직은 소매 안으로 양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가 섬수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은 비도술 때문이다. 네 자루를 던지면 반드시 죽는다는 그의 비도술은 사투필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는 아직 네 자루를 전부 던져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그가 네 자루를 전부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휘이익!

느닷없이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빗방울이 더욱 거세졌다.

“ 차앗!”

바로 그 순간, 유백천의 신형이 지면을 차며 날았다.

우르릉!

벽력도에서 뇌성이 흘러나오고 도 끝으로 도강이 생성됐다. 그리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광채가 도면에서 터져 나왔다.

유백천이 공격을 시작하자, 윤효직은 숨을 멈췄다.

유백천의 공격에 연우강이 물러나는 순간, 비수를 던질 참이었다. 그는 양손에 전 내공을 집중했다.

파악!

바로 그때 연우강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유백천을 향해 나아가는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묵사를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있었다.

광채를 뿜어내던 유백천의 도가 위쪽으로 방향을 트는 듯하더니 벼락처럼 연우강의 목으로 향했다.

쓰쓰쓰!

푸른 광채를 뿜어내는 유백천의 도에서 섬뜩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차앙!

두 사람의 도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쿠쿠쿵!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치면서 생겨난 반발력은 쏟아지던 빗방울들을 역류시켰다.

“ 타앗!”

연우강의 신형이 물러설 기미를 보이자, 윤효직의 입에서 광포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신형이 전방으로 튀어나가며 소매 안으로 들어가 있던 오른손이 번개처럼 뿌려졌다. 그가 왜 섬수라는 별호로 불리는지 이번 공격으로 인해 증명됐다. 무성, 무흔, 그가 날린 비수는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었다.

파앗!

연우강의 발치에서 빗물과 흙이 튀어 올랐다.

그는 마라천력으로 유백천의 몸을 끌어당김과 동시에 윤효직의 반대편에 있는 낭걸을 향해 몸을 날렸다.

“ 헉!”

유백천은 신음을 삼키며 철판교 수법으로 몸을 뉘었다. 그가 뻣뻣한 통나무처럼 뒤로 눕자마자 윤효직이 뿌린 비수 두 자루가 지나갔다.

“ 빌어먹을!”

유백천은 누운 상태로 고개를 돌려 연우강을 보았다. 조금 전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효직이 비수를 던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벽력도와 묵사가 부딪치는 순간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뒤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벽력도에 어렸던 힘이 쑥 빠져나가며 중심이 앞으로 쓸리고 말았다.

그 순간 미지의 힘이 자신의 몸을 앞으로 끌어당긴 것이었다. 만일 윤효직의 공격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 이얍!”

바로 우렁찬 기합과 함께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리는 낭걸의 모습이 보였다. 전 공력을 끌어올린 듯 그의 양손은 먹물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유백천은 허공에 약간 떠 있던 상체를 이용하여 바닥을 쳤다. 그러고는 땅을 친 반발력을 이용하여 누운 상태 그대로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물고기가 수면을 치면서 나아간다는 경신법의 한가지인 이어타정 수법이었다. 질척한 바닥 때문에 평소보다 속도가 늦긴 했지만 낭걸의 암흑마수를 믿었다.

암흑마수를 전력으로 끌어올리면 낭걸의 손은 도검이 불침하는 금강불괴로 변하고, 그 상태에서는 연우강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연우강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다. 단 한 번의 공격만 막아주면 될 터였다.

유백천이 몸을 날리는 그 순간, 연우강의 묵사는 낭걸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낭걸의 오른손 또한 묵사의 검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앙!

차가운 쇳소리와 더불어 묵사가 오른편으로 약간 밀렸다. 바로 그때 낭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돌았다. 낭걸이 즐겨 사용하는 공겨 방법이었다.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검을 밀어내게 되면, 상대방은 밀리지 않기 위해 검에 힘을 주고, 오른손을 통해 그 힘을 받아들이면서 몸을 회전한다. 그와 동시에 왼손을 휘두르면 몸의 회전력은 곧 왼손으로 전달돼 상대방의 목을 뜯어내게 되는 것이다.

철컥! 철컥!

절반 정도 몸을 돌렸을 때 귓전으로 금속성이 들려왔다. 낭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마치 접혔던 뭔가를 펼 때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던 것이다.

낭걸은 회전 속도를 배가했다.

몸을 거의 돌린 듯 연우강의 왼팔과 더불어 벽력도와 하나가 돼 가공할 속도로 날아오는 유백천이 보였다.

‘ 끝이다.... 저건?’

빙그레 미소를 지었던 것도 잠시 낭걸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의 시선은 연우강의 왼손에 고정돼 있었다. 방금 스쳐보았을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연우강의 왼손에 검은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손가락에 끼워서 사용하는 조였다.

‘ 검이 전부가 아니라는......’

바짝 긴장하는 순간, 오른손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며 연우강의 왼팔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헉!”

낭걸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녀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감지한 순간, 목 뒤에서 진득한 살기가 감지된 것이었다. 연우강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몸을 회전하여 등 뒤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더불어 밀어내던 오른손이 앞으로 쏠리며 중심이 흐트러졌다. 낭걸은 비틀거리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낭걸의 등은 이미 연우강에게 노출된 후였다.

잔뜩 독이 오른 사망낭조가 낭걸의 뒷목을 파고들어갔다.

푸욱!

왼손을 찔러 넣음과 동시에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낭걸의 신형을 들어 올려 유백천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유백천은 어느새 몸을 일으켜 세우고 도를 들어 올린 상태였다.

‘ 복수는 내가 하겠소. 낭 대협!’

유백천은 이를 악물고 도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낭걸과 연우강을 동시에 잘라버릴 셈이었다. 푸른 광채를 통반한 그의 도가 낭걸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쩌억!

“ 크아악!”

“ 허억!”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낭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자 유백천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아무리 강심장의 소유자라고 해도, 살아 있는 동료를 죽이게 되면 한순간 멈칫거리게 된다.

죽은 줄 알았던 낭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벽력도에 주입했던 내기를 자신도 모르게 거둬들이고 말았다. 그리고 움찔하고 있는 그의 심장을 향해 묵사가 파고들었다.

“ 커억!”

유백천의 입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유백천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너 같은 애송이에게...”

연우강을 노려보던 유백천이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 가라!”

그 순간,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는 유백천의 뒤를 따르고 있던 윤효직이었다.

파악!

연우강은 유백천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간 묵사를 놓음과 동시에 강하게 쳤다. 그 여력을 빌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그는 삼 장 높이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그가 회전하자 사망묵의 표면을 타고 흐르던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튀어나가는 빗물 사이로 푸른 광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연우강의 왼편 허리춤에 있는 사망혈삭이었다.

“ 커억!”

윤효직은 멍한 얼굴로 가슴을 보았다.

마치 연줄처럼 붉은 줄 하나가 심장에서 비어져 나와 있었다.

“ 뭐냐?”

그는 고개를 들어 연우강을 보았다.

“ 네 가슴을 관통한 그것은 뇌섬이라는 무기고 이 줄은 사망혈삭이야.”

“ 통천뇌섬의 그 뇌섬이란 말이냐?”

윤효직은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 뇌섬을 알아?”

“ 암기를 다루는 자들 치고 뇌섬을 모르는 자는 없다. 뇌섬은 금강불괴마저도 박살내는 꿈의 암기다.”

“ 그럼 맞는 모양이네, 네 말이 맞아. 뇌섬 앞에선 금강불괴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보여줄 수 있느냐?”

“ 어렵지 않지.”

연우강은 사망혈삭으로 시선을 주었다. 허리춤의 도르래가 가공할 속도로 돌아가고 윤효직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던 뇌섬이 빠져 나왔다. 연우강은 마라천력으로 뇌섬을 허공에 띄웠다.

“ 큭큭큭! 멋진 놈이군.”

만족스러운 얼굴로 뇌섬을 쳐다보던 윤효직의 신형이 천천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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