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전장의 정의란.
쏴아아......!
장대비는 더욱 거칠어져 굳이 어둠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연우강은 다섯 사람의 몸을 뒤져 무성패를 꺼냈다. 그는 무성패의 번호를 확인하고는 하나씩 가루로 만들어 바닥에 뿌렸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십여 장 떨어진 소나무 아래쪽에 있는 그들은 종만리 일행이었다.
“ 믿어지는가?”
강기막을 쳐사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한 다음 종만리는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흐릿하게 보이는 연우강에게 고정 돼 있었다.
종만리는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을 정도의 연륜을 지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둠과 비 때문에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대화만으로 상황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대교수이자 무영인 유백천 일행은 연우강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 철마당 대원들도 전부 당했겠군.”
유청인의 시선이 수곡 입구로 향했다.
빗소리에 섞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으로 짐작컨대 계곡을 나서는 자들은 잠룡 십조가 분명했다.
유청인은 고개를 돌려 진자약을 보았다. 철마당 대원들의 승리를 확신했던 진자약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철마당은 최고였네.”
진자약은 전면을 노려보았다.
비록 떠났다고 하지만 만마림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 만마림에 소속된 철마당 대원들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놈들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 아무튼 우리가 할 일을 저 녀석이 대신 해 준 것 같은데, 어떻게 할 텐가?”
종만리는 진자약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자약의 몸에서는 희뿌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종만리는 쓰게 웃었다.
칠왕 중 가장 성격이 급한 사람이 진자약이고, 불같은 성정을 지녔다고 하여 화마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 그가 참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까지 했다.
“ 돌아가자는 말인가?”
종만리를 쳐다보는 진자약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자넨 저 녀석을 없애고 싶은 모양이군.”
“ 저 녀석을 없애고 싶다는 것보다는 내기를 한 번 더 하고 싶네.”
“ 어떤 내기 말인가?”
문득 흥미가 동했다.
“ 삼 초에 스무 냥 걸겠네.”
“ 저 녀석을 삼 초 만에 없애겠다는 말인가?”
종만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삼 초의 내기를 하자는 말은 연우강을 반드시 없애겠다는 의미였다.
“ 난 본전 생각이 날 뿐이네. 만리.”
진자약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 만우량이 우리에게 원했던 건 유백천 일행의 머리지, 저 녀석의 머리가 아니네. 그리고 저 녀석은 계속 묵사를 지니고 있어야 하네. 자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번엔 내기를 할 수 없네.”
종만리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들은 연우강을 따르다가 묵사를 쫓아오는 무영들을 없애기만 하면 된다. 만우량 또한 그렇게 해달라고 하였다. 연우강이 무영들에게 죽임을 당하면 어쩔 수 없지만, 직접 처리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해서도 안 될 터였다.
“ 정말인가?”
진자약의 얼굴이 굳었다.
“ 나 또한 철무련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철무련 무인들이 당했다면 자네와 같은 심정일 거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네.”
종만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럼 내게서 딴 스무 냥으로 술을 사게.”
“ 내가 딴 돈은 열 냥이네, 자약.” 는다는 것은 곧 비밀이란 의미인 탓이었다.
종만리는 엷게 웃어 보였다.
“ 내기에 걸린 판돈은 스무냥이니까 그걸로 전부 술을 사게.”
“ 허허허! 알았네. 스무 냥에 스무냥을 더해 사십 냥 어치 술을 사겠네. 일단 가세.”
강기막을 푼 종만리는 몸을 돌렸다.
“ 내가 갈까, 아니면 니들이 올래!”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조금 전 싸움이 있던 곳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세 사람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분명 연우강의 목소리고, 그 목적지는 바로 자신들이었다. 세 사람의 고개가 일제히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둠과 더불어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지만 눈에 내공을 집중하면 흐릿하게나마 사물을 확인할 수 있다. 세 사람은 내공을 끌어올려 눈에 집중했다. 연우강은 이편을 보고 있었다.
“ 허허허!”
종만리의 입에서 어이없어 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녀석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팔십이 넘어가는 자신들을 향해 ‘니들이 올래!’라는 말을 뱉어냈다는 사실이 더 황당했다. 자신들은 무려 삼십여 년 동안 대야벌 백대고수였고 지금은 천상천 천신군에 소속된 원로 중의 원로가 아닌가. 그런데 새파란 애송이에게 ‘니들’이란 말을 들은 것이다.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해도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특히 지금껏 진자약을 말렸던 종만리의 노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아! 맞다. 니들은 걷는 게 불편할 정도로 나이를 처먹었지.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게.”
“ 백 냥으로 하세, 자약.”
종만리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먼. 그럼 백 냥으로 하세.”
진자약은 활짝 웃었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의 눈동자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넘실대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는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걸음을 옮기 때마다 발목까지 푹푹 빠져들어 갔다.
잠시 후, 진자약은 연우강 앞에 섰다.
“ 니들이라고 했느냐?”
진자약은 차갑게 말을 뱉었다.
“ 니들은 너희들이란 말의 사투리고, 너희들이란 말은 주로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이잖아.”
“ 그러니까 네 녀석이 우리 윗사람이란 말이렷다.”
“ 못 들었어?”
“ 뭘 못들었단 말이냐?”
이렇게까지 침착하게 응대하게 될 거라고는 진자약 자신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먼저 반쯤 죽여 놓고 입을 열었을 터인데, 지금은 엄청나게 화가 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응대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변화였다.
“ 내가 정천호였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냐고.”
“ 지금도 정천호란 말이냐?”
“ 그러니까 현재 정천호가 아니라서 네 녀석이 꼬박꼬박 반말을 해도 된다는 말이냐?”
“ 흐흡!”
진자약은 심호흡으로 끓는 노화를 진정시켰다.
“ 숨만 쳐 쉬지 말고 대답을 해, 새꺄.”
“ 이런 쳐 죽일 놈이!”
“ 말을 가려서 하거란, 놈! 정천호면 정오품이고, 정오품 관리는 성에서는 첨사고, 부에서는 동지, 주에서는 최고 직위인 지주보다 높다. 설사 전직 관리라 하더라도 난 대명제국의 관리다. 너 같은 양민이 눈을 치뜨며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신분이 아니란 말이다!”
연우강의 말에 진자약은 할 말을 잃었다.
사실 무인에게 있어 관리는 가능하면 멀리 해야 할 대상이다. 마음만 먹으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게 죽을 수 있지만 훗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한 세력의 수장이거나, 이름이 알려진 무인일수록 황실 관리를 상대함에 있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벌주 또한 도독동지 양성일 장군 어쩌고 하였던 까닭에 놈에게 묵사를 내주지 않았던가.
“ 혀가 날카롭구나. 놈. 하지만 여긴 너와 날 둘뿐이다 설사 네가 죽는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넌 철마당 대원들에게 죽임을 당한 걸로 될 테니까 말이다.”
진자약은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전신이 가공할 기운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쏟아지던 빗줄기가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수증기로 변해 사라졌다.
“ 각오해라 놈.......”
진자약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진자약은 그의 성명절기인 마왕권을 펼치지 못했다. 오른편에서 인기척이 감지된 것이었다. 빗속에서 이편을 주시하고 있는 자들, 그들은 다름 아닌 조금 전 입구에서 나타났던 잠룡들이었다. 연우강과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 잠룡들이 이곳까지 몰려온 모양이었다.
잠룡들까지 전부 없앨 게 아니면 연우강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진자약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 안 되네. 자약.]
바로 그때 귓전으로 종만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빌어먹을!’
진자약은 내심 욕설을 뱉어내며 내공을 풀었다.
“ 자!”
진자약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묵사를 땅 속 깊숙이 꽂았다.
“ 뭘 하자는 것이냐?”
진자약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네게 명분을 주려는 거야.”
“ 명분?”
“ 보통 무인이라면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도 패 죽일 수 있지만 난 전직 관리니까 이유 없이 패 죽일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날 죽여도 뒤탈이 생기지 않는 명분을 주겠다는 거야.”
“ 어떻게 명분을 주겠다는 말이냐?”
“ 여기 묵사를 기준으로 각자 이십 장씩 물러나는 거야. 그런 다음 묵사를 향해 달려가는 거지.”
“ 그러니까 묵사를 먼저 뽑은 사람이 상대방을 공격한다는 거냐?”
“ 그렇지 일종의 내기라고 할 수 있지.”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약은 묵사를 보았다. 묵사는 손잡이 부분만 남겨두고 땅속 깊숙이 박혀 있었다. 묵사를 쳐다보던 진자약의 시선이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 내기라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 허공섭물로 묵사를 뽑지 않으면 된다는 것 말고는 다른 조건은 없어.”
“ 반드시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말이냐?”
“ 맞아, 할래?”
“ 좋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상황을 증언해 줄 무인들은 얼마든지 있다. 뒤에는 종만리와 유청인이 있고 오른편에는 잠룡들이 있다.
잠룡들 또한 지금 연우강이 한 말을 들었으니 문제 될 게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은 묵사를 사이에 두고 뒤로 물러났다.
[ 지금 뭐 하는 거죠?]
허공에 숨어 있던 몽요가 전음으로 물었다.
[ 어떻게 됐어요?]
[ 철마당 대원들 중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 잘했어요.]
[ 지금 뭐 하냐고 물었잖아요.]
[ 결투닙다. 몽요.]
[ 결투라고요?]
[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는 가장 정당한 방법이 결투잖아요.]
[ 지금 옳고 그름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자는.....]
[ 칠왕의 한 사람입니다.]
[칠왕이면 천상천의 천신군?]”
[ 그렇습니다.]
[ 칠왕이 왜 연 공자를 노리는 거죠?]
[ 화가 나서 그런 겁니다.]
[ 왜 화가 났죠?]
[ 몽요, 전 지금 결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 시킬겁니까?]
[ 아직 이십 장을 물러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할 거죠?]
[ 결투의 미덕은 정당함입니다. 몽요.]
[ 정당함이라고요?]
[ 그렇습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제자리에 섰다. 어느새 이십 장을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 네가 셋까지 세라, 연우강!”
진자약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 하나!”
연우강은 나직이 수를 셌다.
“ 둘!”
둘이라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자약은 잔뜩 긴장했다. 그는 양발에 내공을 집중하고, 허리를 잔뜩 앞으로 내밀었다. 궁신탄영의 신법을 펼치는 자세였다.
‘ 얼마를 날아가야 하나.’
진자약은 내심 고민 중이었다.
이십 장. 한 번 도약으로 십오 장을 날아갈 수 있는 자신에게는 애매한 거리였다. 허공섭물로 묵사를 뽑을 수 있다면 내려선 순간과 동시에 묵사를 뽑아낼 수 있지만, 반드시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에 묵사 바로 앞에 내려서야 한다.
‘ 십장씩 간다!’
“ 셋!”
내심 결심을 굳히고 있는데, 셋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파앗!
진자약은 발과 몸을 동시에 튕겼다. 한껏 휘어졌던 활이 본래 모습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의 신형이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십 장을 나아간 그는 재차 바닥을 튕겼다. 두 번째 도약이 일워진 순간 그는 연우강을 보았다.
“ 헉!”
진자약의 입에서 놀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놀랍게도 연우강은 십 장 지점에서 착지를 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날려 오고 있었다. 만일 놈이 한 번에 이십 장을 나아갈 수 있는 경공을 펼친다면 질 게 뻔했다.
진자약은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슉!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파앗!
바로 그때 연우강이 착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착지를 한다는 것은 속도가 늦어짐을 의미하고 그 짧은 순간이면 반 장 정도를 나아갈 수 있다.
“ 내가 빨랐다, 놈!”
척!
간발이 차이였다. 먼저 묵사가 꽂힌 곳에 내려선 진자약은 허리를 숙여 묵사 손잡이를 잡아갔다.
척!
바로 그때 바로 앞으로 연우강이 내려섰다.
“ 다리를 잘라주마, 놈!”
진자약은 힘차게 묵사를 뽑아 올렸다.
“ 묵사는 너 가져.”
묵사가 바닥에서 채 빠져나오기도 전에 연우강의 손이 진자약의 얼굴로 향했다.
철컥! 철컥!
진자약의 눈앞에 다가든 순간, 사망낭조가 모습을 드러내고, 섬뜩한 살기를 뿌려대던 사망낭조는 진자약의 얼굴로 향했다.
“ 비, 비겁한!”
진자약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자신은 지금 묵사를 뽑아 드는 중이고, 묵사는 삼분의 이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묵사를 놓고 손을 들어 올린다고 해도 얼굴을 방어하기엔 늦고 만다.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얼굴로 내공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우강의 손가락에 끼워진 사망낭조는 쇠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만년오금철로 이루어진 무기.
급하게 끌어올린 내공으로 사망낭조를 막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푸욱!
다섯 개의 사망낭조가 진자약의 얼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크아악!”
진자약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움켜쥔 묵사가 떨어져 나가고 부르르 떨던 진자약의 신형이 풀썩 쓰러졌다.
“ 비겁한 놈!”
“ 죽일 놈!”
숲에서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종만리와 유청인이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 쿡!”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마라천력으로 진자약의 시체를 띄웠다.
“ 우선 이것부터 먹어라!”
허공으로 떠오른 진자약의 시신을 강하게 쳐냈다. 마라천력과 내공을 동시에 동원하자 진자약의 시신은 섬광처럼 종만리와 유청인을 향해 날아갔다.
[ 기 영감, 준비해!]
그는 진자약의 시체를 따라 몸을 날리며 기운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 무슨 준비 말인가? ]
종만리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기운상이 깜짝 놀라 물었다.
[ 놈들이 물러날 거야. 그때 등판을 향해 한 방씩 갈겨.]
[ 드, 등을 공격하란 말인가? ]
기운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록 마인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나름대로 공명정대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런 자신에게 뒤에서 암습을 가하라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저놈들은 비열하게 협공하고 있잖아. 비열함은 비열함으로 상대해야 하는 거라고.]
“ 허억!”
“ 억!”
진자약의 시신이 화살처럼 쏘아져 오자 종만리와 유청인은 짤막한 신음을 흘리며 속도를 줄였다. 죽었다고 하지만 동료의 시신을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진자약의 시신을 향해 허공섭물을 펼쳤다.
쿠웅!
“ 지옥탄!”
지면을 다지는 발걸음 소리에 이어 묵직한 소리가 연우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그의 양손이 활짝 펴지고, 약간 웅크렸던 가슴이 활짝 펴졌다.
슈아악! 슈악!
그리고,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사망정주가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 맙소사!”
“ 이건!” 종만리와 유청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겨 버릴 것 같은 살기가 전방을 가득 채우고, 그 살기의 바다 속에서 유성들이 쏘아져 나왔다. 진자약의 시신을 안전하게 처리하면서 유성처럼 쏘아져 오는 암기를 막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짧은 순간 종만리와 유청인은 시선을 교환했다.
‘ 복수를 해주겠네. 자약!’
종만리와 유청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진자약의 시신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진자약의 시신을 지지 삼아 뒤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퍼억!
아직 피가 완전하게 빠져나가지 않은 진자약의 시신에서 피와 살점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종만리와 유청인은 목적달성은 했다. 진자약의 시신에서 오는 반발력을 이용하여 뒤편으로 몸을 날렸고, 정면으로 날아오는 암기도 진자약의 시신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음을 놓은 건 찰나에 불과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듯하던 살기가 또다시 자신들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 차앗!”
“ 타앗!”두 사람은 양 손을 연거푸 휘둘러 자신들에게로 쏘아져 오는 암기를 쳐내며 그 여력을 이용해 물러났다.
연거푸 손을 쳐내고 있지만 두 사람은 거의 얼이 빠진 상태였다. 진자약의 시신을 훼손하여 목숨을 구했다는 죄책감과, 어둠 속에서 쉬지 않고 날아오는 암기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하였다. 그 상황에서 뒤편까지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엄청나군.’
기운상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전 보았던 세 명은 자신과 싸운다고 해도 수백 초를 싸워야 할 정도로 강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연우강은 간단하게 해치워버린 것이다.
놀라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준비해라.]
기운상은 고개를 돌려 둘째 방세남을 보았다.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연거푸 양손을 쳐내며 물러나고 있었다. 몸을 돌릴 틈도 없는 듯 두 명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는 채였다.
[알았습니다. 대형!] 방세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사람은 은밀하게 종만리와 유청인을 향해 다가갔다.
“ 도대체, 이놈은?”
종만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암기는 어깨에 걸린 활을 꺼낼 틈도 주지 않았다. 더욱 황당한 일은 날아오는 암기를 향해 아무리 장력을 쏘아대도 부서지지 않을뿐더러 튕겨 나갔던 암기들이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이기어검술을 얻은 상태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만리, 자네 생각은 어떤가?”
유청인은 양손을 연거푸 휘둘러대며 소리쳤다.
“ 이기어검술 같다는 말인가?”
“ 이기어검술이 아니라면 살아 움직이는 암기를 설명할 길이 없네.”
“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놈은 이제 이십대 초반이네....”
“ 그럼 이 암기를 어떻게 설명할 텐가?”
휙! 슉!
정신이 분산된 탓이었을까. 느닷없이 암기 두 개가 곡선을 그리며 명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 억!”
“ 헉!”
퍼억! 퍽!
“ 크악!”
“ 커억!”
종만리와 유청인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쭉 튀어나왔다. 하지만 암기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두 개의 암기가 튕겨 나가자 또 다른 암기가 쏘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고통을 다스릴 경황도 없이 양손을 휘둘렀다.
“ 미안하네, 친구들.”
“ 본의가 아니었네.”
바로 그 순간, 창노한 목소리와 함께 섬뜩한 기운이 등으로 파고들었다.
“ 커억!”
“ 크아악!”
이번엔 두 사람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등에는 기운상과 방세남의 손이 깊숙이 파고들어 가 있었다.
“ 이건.....?”
종만리는 경악했다. 설마 뒤쪽에 적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에 양 손을 박아 넣은 사람을 보았다.
“ 난 만겁신마라고 불리는 기운상이라네.”
“ 난 천혈전마 방세남이네.”
“ 겨, 경천사마?”
“ 그렇다네.”
기운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에 진력을 쏟아 넣었다.
“ 크아악!”
종만리는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솟구친 피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기운상이 손을 뽑아내자 바닥으로 추락했다. 종만리에 이어 유청인까지 추락하자 기운상과 방세남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휘리릭!
나직한 소성과 함께 허공에서 맴돌고 있던 암기들이 빗속을 뚫고 연우강을 향해 날아갔다.
“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망정주를 쳐다보던 방세남은 기운상을 보며 물었다.
“ 암기라는 걸 모르고 묻는 게냐?”
“ 암기라는 건 저도 압니다. 대형.”
“ 그럼 어떤 수법이냐고 물어야지.”
“ 끄응! 어떤 수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방세남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 몰라!”
기운상은 고개를 저었다.
“ 대형!”
방세남은 버럭 소리쳤다.
“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지 알면서 모른다고 할까.”
기운상은 어깨를 으쓱하며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기어검술이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 이기어검술은 검 하나를 조절하는 거다.”
“ 이기어검술로도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 경지가 높으면 서너 자루까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연 공자의 암기는 수를 세기도 힘들다. 이기어검술 할아버지를 익힌다고 해도 암기를 그렇게 조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 하지만 연공자는 펼쳤습니다.”
“ 그래서 모른다고 한 거다.”
“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 일반 상식이 아니라 무공 상식으로도 불가능하다.”
“ 그럼 연 공자는 괴물이군요.”
“ 저런 궤짝을 장난감처럼 들고 다니는 자는 인간보다는 괴물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한다.”
기운상은 남도욱이 메고 있는 궤짝을 가리켰다.
네 사람은 숲을 나와 연우강이 있는 곳으로 갔다. 네 사람이 연우강 근처로 다가가는 순ㄱ간 입구 쪽에서 욱일승 일행과 잠룡들이 걸어 나왔다.
“ 누구죠?”
가장 먼저 연우강 앞으로 다가온 남궁운화가 시체로 변해 있는 장양락 일행을 가리키며 물었다.
“ 그놈 밑에 깔린 놈은 천검자 장양락이고, 위에서 누르는 놈은 천랑마효 인후겸, 저기 있는 놈은 철마당 당주 벽력마군 유백천, 머리가 박살난 놈은 암흑마수 낭걸, 저기 혼자 죽어 있는 놈은 섬수 윤효직입니다. 그리고 저기 남궁 소저가 도착했을 뒈진 늙은 놈은 ...”
“ 칠왕의 일인인 마왕 진자약이다.”
마지막 대답은 이자승이 했다.
“ 아십니까?”
“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자들인데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느냐. 저 안쪽에 있는 자들은 궁왕 종만리와 암왕 유청인이다.”
어느새 숲 속까지 확인한 듯 이자승은 죽은 두 사람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 맙소사!”
“ 세상에!”
잠룡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들이 철마당 대원을 도륙하는 그 시간에 연우강은 백대 고수 다섯 명과 원로고수라고 불리는 칠왕 중 세 명을 혼자 없애버린 것이다.
“ 혼자 해치운 게 아냐. 여기 네 영감이 도와줘서 없앤 거니까 그렇게 놀랄 필ㄹ요 없어.”
연우강은 기운상 일행을 가리켰다.
“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해요, 연 공자.”
수여설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미련 곰탱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 왜 나온거죠?”
“ 모든 일을 힘으로만 해결하려 드니까 나온 말입니다. 싸움은 강력한 힘에 여길 더해야 합니다.”
연우강은 제 머리를 가리켰다.
“ 진자약을 없앤 것처럼?”
“ 맞습니다. 만일 진자약을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다면 난 힘겨운 싸움을 했을 겁니다. 어쩌면 진자약이 아니라 내가 누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진자약이 아니라 바로 납니다. 수 소저를 비롯한 십 조 대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는 만마림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철마당이었지만 우린 단 오십 명으로 그들을 몰살시키고 살아남았습니다. 싸움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수여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은 얼굴로 유백천 일행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잠룡들 전부에게 하는 말이었다.
“ 정당함은 의미가 없단 말입니까?”
잠룡들 중 한 명이 물었다. 그는 교랑으로 불리고 있는 이철상이란 자였다.
“ 목숨이 걸린 전투에서는 비열함이나 비겁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는 어떤 짓을 하건 간에 살아남는 자가 곧 정의다. 나보다 훨씬 강한 자를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놈은 용감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다. 더불어 그런 죽음은 장렬한 전사가 아니고 개죽음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광랑!”
“ 친구나 가족이 관련돼 있을 땐 어떡합니까?”
“ 어떤 놈이 네게 교랑이란 별호를 지어준 거야?”
연우강은 이철상을 보며 버럭 소리쳤다.
“ 광랑께서 지어준 별호입니다.”
“ 정말?”
“ 그렇습니다. 광랑, 제가 진법을 좀 안다고 했을 때 교랑이란 별호를 지어주셨습니다.”
“ 내가 실수했다. 교랑. 넌 앞으로 묵랑이라고 해.”
“ 묵랑이면 검은 이리란 뜻입니까?”
“머릿속에 똥물만 들어찬 이리라는 뜻이다.”
“ 어쨌든 듣고 싶습니다. 광랑.”
“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듣고 싶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광랑.”
“ 난 네 부류만 믿는다. 첫째는 가족이고, 둘째는 날 믿고 따르는 부하, 셋째는 동료, 넷째는 친구다. 난 그들을 위해서라면 이걸 떼어줄 수 있다.”
연우강은 다시 제 머리를 가리켰다.
“ 저희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교랑은 또 물었다.
“ 부하와 친구와 동료 중 어떤 건지 그걸 묻는 거냐?”
“ 그렇습니다. 광랑.”
“ 너희들은 아직 빚쟁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목숨 걸고 싸운 게 벌써 두 번입니다. 광랑.”
“ 연우강의 말에 기분 나빠 할 만도 하건만 이철상은 웃으며 말했다.
“ 그 두 배는 싸워야 한다. 내 피를 동료가 먹고, 내가 동료의 피를 마셨을 때 비로소 부하가 되고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된다.”
“ 그렇게 싸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우리가 동료가 될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올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교랑!”
연우강은 웃으며 유백천 일행으 시체를 가리켰다.
“ 계속 올 거란 말입니까?”
“ 물론이다. 너희들이 죽인 자들 중 옥천균이란 자가 있는데 그놈은 만마림 림주 친동생이다.”
“ 정말입니까?”
“ 그렇다. 교랑.”
“ 우린 죽었군.”
“ 맞다. 우린 지옥 입구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함께 가는 자는 내 부하가 되는 거고, 여기서 돌아서는 자는 친구나 동료가 될 것이다. 친구나 동료가 된다고 해서 창피해할 필요 없다. 세월이 지나 다른 장소 다른 모습으로 만난다면 난 기꺼이 그와 술 한 잔 할 것이다.”
“ 목적지가 어딥니까?”
“ 알고 싶나?”
“ 그렇습니다. 광랑.”
“ 신강 북천지옥부다.”
“ 어쩌면 신강에 도착하기 전에 부하가 될 수도 있겠군요.”
이철상은 헤벌쭉 웃었다.
“ 놀랄 줄 알았는데?”
“ 만마림 림주의 친동생을 죽여서 그런지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동료보다 부하가 더 좋아?”
“ 조금 전 광랑께서 가족 다음으로 부하를 언급하시지 않았습니까. 전 두 번째가 되고 싶습니다.”
“ 부하는 내 명령에 복종하는 자를 말한다.”
“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광랑.”
“ 좋다. 그럼 가서 술부터 준비해라.”
“ 마시평의 그 술통 말입니까?”
“ 그렇다. 살인을 하고 난 다음엔 반드시 술을 마셔줘야 한다. 그래야 피냄새를 없앨 수 있다.”
“ 알겠습니다. 광랑. 광랑의 부하가 되고 싶은 놈은 나를 따라와라!”
이철상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마시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철상이 몸을 날리자 다른 잠룡들 또한 우르르 따라 나섰다. 대부분의 잠룡들이 떠나고 연우강 주변엔 각 조 조장만 남았다.
연우강은 남궁운화 일행을 빤히 쳐다보았다.
“ 전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요.”
남궁운화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사실 나도 여기 있는 분들을 부하로 거느리는 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남궁소저.”
“ 왜죠?”
“ 내가 류시은에 대해 말했던가요?”
“ 전에 한 번 들었어요.”
“ 그 녀석이 말하길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하로 거느리는 건 가급적 피하라고 했습니다.”
연우강은 마시평으로 길을 잡으며 말했다.
“ 부담된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남궁 소저. 그리고 부하들하고 때때로 목욕도 함께해야 하는데 남궁 소저와 나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목욕을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부하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인가요?”
“ 아닙니다. 목욕을 함께하고 나면 부하가 아니라 가족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 킥!”
“ 풋!”
듣고 있던 일행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수곡을 나선 일행은 반 시진 후 마시평에 도착했다. 시체로 가득했던 마시평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가 돼 있었다.
“ 여깁니다. 광랑.”
군 막사 형태로 지어진 마구간 한 곳에서 이철상이 일행을 불렀다. 일행은 이철상이 부르는 막사로 향했다.
밖과 마찬가지로 막사 안도 한편에 쌓여 있던 마른 풀을 깔아 깔끔하게 정리가 돼 있었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자 술통이 돌기 시작했다. 철마당과의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뒀다는 생각 때문인지 잠룡들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 승리를 기뻐하고만 있었서는 안된다. 바둑의 고수는 복기를 통해 실력을 향상시킨다고 하였다.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이리가 될 때까지는 그날 있었던 전투에 대해 복기를 해야 한다. 적과 싸울 때 어떻게 무기를 뻗어냈는지, 옆에 있던 동료와 어떻게 호흡을 맞췄는지 그것들을 생각해 내고, 혹시 실수한 게 있다면 다음부터는 절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 알겠습니다. 광랑!”
잠룡들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들은 곧 술통을 비우며 싸웠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들이 생각에 잠기자 막사 안은 침묵이 흘렀다.
“ 이런 멍청한 녀석들! 복기는 동료들과 함께 하는 거야.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 아, 알겠습니다.”
잠룡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전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엔 사뭇 심각한 형태로 진행되던 복기는 곧 활발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 녀석!”
이자승은 빙그레 웃으며 연우강을 보았다.
정천호였던 관록때문인지 몰라도 녀석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는 천부적이다. 십 조 조원들은 자신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걱정하는 녀석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에 나올 자들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대야벌을 나선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녀석들은 어느새 노련한 무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문득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막사 형태의 마구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일행은 다음날 일찍 길을 나섰다.
“ 관도로 갑니까?”
길 안내자 역할을 하는 장사덕이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지도는 접었냐?”
“ 아직 접지 않았습니다.”
“ 그럼 지금 접어라.”
“ 또 직선입니까?”
“ 직선이 아니고 직진이다. 장사덕.”
“ 좋은 길 놔두고 굳이 산을 고집하는 이유가 뭐냐?”
듣고 있던 이자승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동안 연우강을 따라 다니다가 절벽을 타고 넘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탓이었다.
“ 오십랑은 남들이 닦아놓은 길을 가진 않을 겁니다. 영감님. 오십랑은 길을 만들며 갈 것이고,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길을 만들다 보면 많은 것을 얻게 될 겁니다.”
“ 직진해서 뭘 얻는단 말이냐?”
이자승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 나뭇가지를 가장 쉽게 피하는 방법, 자연적으로 생겨난 구덩이에 빠졌을 때 대처하는 방법. 절벽을 오르는 방법, 숲을 통과하는 방법, 물을 건너는 방법 등 자연을 통해 배우게 되는 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을 전부 익히고 나면 녀석들은 전천후 무인이 돼 있을 겁니다.”
“ .......!”
이자승은 할 말을 잃었다.
단순히 빨리 가기 위해 직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직진하는 방법을 통해 잠룡들을 훈련시키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뭇가지를 쉽게 피하는 방법이란 곧 적의 무기를 피하는 방법을 말하고, 절벽을 오르는 건 지주공을, 물을 건너는 방법은 일위도강이나 등평도수의 신법을, 구덩이에 빠졌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임기응변을, 숲을 통과하는 방법은 은신술을 말한다.
만일 녀석의 말처럼 된다면 잠룡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십 가지의 무공을 익히게 된다.
그것도 싸움에 꼭 필요한 무공들을.
놀라운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 어디까지 길을 만들 참이냐?”
이자승은 다급하게 물었다.
길을 만든다는 건 단순하게 직진하여 간다는 뜻이 아니다. 길이란 미래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 중군은 출발하라!”
지도를 접어 길을 만든 장사덕이 출발 명령을 내렸다.
“ 길은 저들이 결정합니다.”
연우강은 장사덕을 따라 걷는 잠룡들을 가리키며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