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52화 (52/232)

제 9장 정면돌파가 힘들 때는

사월림 살수 일백, 오살 사망.

사인: 십 조 조원들과 대원표국 표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함.

만마림 철마당 대원 이백, 부당주 잔혹마도 옥천균 사망.

사인: 독에 중독된 상태에서 당함.

군웅보 무인 일백, 보주 만승도 곽자후 사망.

벽력마군 유백천, 천검자 장양락, 암흑마수 낭걸, 천랑마효 인후겸, 섬수 윤효직 사망.익 웃 사인: 장양락의 가슴엔 인후겸의 자모원앙월이 박혀 있고, 뒷목에 검상이 나 있음. 낭걸의 뒷목에 조 형태의 무기에 당한 흔적이 있고, 뇌정 기운을 간직한 도에 머리가 쪼개짐. 유청인은 검에 윤효직은 암기에 당함.

궁왕 종만리, 암왕 유청인, 마왕 진자약 사망.

사인: 진자약은 조 형태의 무기에 당함. 종만리와 유청인은 수공에 당했는데, 치명상 부위는 등임.

결론: 기습, 암습, 독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여 당한 걸로 보임. 상황 대처 능력에 있어서는 십 조가 가장 앞서고 있음.

평점: 십

“ 맙소사!”

보고서를 읽던 우담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읽고 있는 보고서는 각 조의 상황을 파악한 열 장의 보고서 중 하나로 십 조에 대한 사항이 기록돼 있었다.

“ 평점 십을 준 사람은 누군가?”

우담보는 물었다.

평점은 열 명의 평가위원 중 가장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를 뺀 나머지 점수의 평균으로 낸다. 모두가 만점을 주지 않으면 나오기 희박한 점수였던 것이다.

“ 만장일치였습니다.”

“ 평가 위원 전부가 만점을 줬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궁주님.”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전투를 그렇듯 완벽하게 승리로 읶느 조는 십 조를 제외하곤 단 한 조도 없었습니다.”

“ 최고란 말인가?”

“ 소름이 돋을 정돕니다.”

“ 그것도 공통된 생각인가?”

“ 그렇습니다.”

“ 그렇군. 그리고 철마당 무인들이 독에 당했다고 돼 있는데 어떤 독인지는 확인했는가?”

“ 그게.....”

유선은 말끝을 흐렸다.

“ 파악하기 힘든 독이었는가?”

“ 대충은 파악된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아서 보고서에 적지 못했습니다.”

“ 어떤 독인데 그런가?”

“ 지옥청화독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 지옥청화독이라면?”

“ 묘강독존 갈인효의 무공입니다.”

“ 가만, 묘강독존 갈인효라면 .... 설마 지옥에 갇혔던 그 갈인효를 말하는 건가?”  우담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 그렇습니다. 궁주님. 지옥청화독은 화상을 입은 듯한 증상이 남는 게 특징입니다. 그런데 철마당 대원들 대부분의 몸에서 화상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 갈인효는 지옥에 수감된 지 사십 년이 넘었네.”

“ 그래서 확실하지 않다고 한 겁니다. 궁주님.”

“ 좋네. 지옥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보도록 하겠네. 그리고 보고서에 있는 궁왕 일행에 대한 건은 지우도록 하게.”

“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일입니까?”

“ 그 건은 벌주께도 비밀로 해야 하네.”

“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궁주님.”

유선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벌주에게조차 보고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궁왕 일행은 공식적인 일 때문이 아니라 사적인 출타였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자세한 내막은 때가 되면 궁주로부터 듣게 될 터였다.

“ 난 뇌천을 만나고 오겠네.”

우담보는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녀오십시오.”

유선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뇌천 만우량을 만나고 오겠다는 말은 곧 궁왕 일행의 출병이 만우량과 관련이 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 연우강 주변에 있는 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게.”

“ 이미 착수했습니다.”

유선은 밝은 얼굴로 밖으로 나가는 우담보를 향해 소리쳤다.

“ 지옥청화독이라.....”

우담보는 조금 전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율령궁을 나섰다. 한식경 정도 걸어 천상천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만우량 처소를 찾았다. 만우량 또한 보고서를 정리 중이었는지 탁자엔 서류뭉치가 잔뜩 쌓여 있었다.

“ 어서 오시오.”

만우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옮겼다.

무릎 높이의 낮은 탁자를 중심으로 네 개의 의자가 빙 둘러져 있었다. 그가 손님을 접대할 때나 생각할 게 있을 때 즐겨하는 자리였다.

“ 차 내오너라.”

우담보를 안내해 온 시비에게 차를 시킨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우담보는 만우량 건너편으로 자리하며 입을 열었다.

“ 궁왕 일행이 죽기라도 한거요?”

만우량은 웃으며 물었다.

“ 그렇습니다.”

우담보가 고개를 끄덕이자 웃고 있던 만우량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 저, 정말이오?”

“ 그렇소. 만 대협. 그들은 마왕 진자약은 조 형태의 무기에 당했고 궁왕과 암왕은 수공에 등을 찔렸소.”

우담보는 오른손을 쫙 펴서 앞으로 쭉 내밀었다.

“ 누가 그들을 해쳤단 말이오?”

만우량은 여전히 노랄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 사인만 나왔을 뿐, 누가 그들을 해쳤는지 알 수 없소이다. 다만 그들의 죽은 자리에서 유백천 일행의 시체가 발견됐소.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철마당 대원들의 시체가 발견됐소이다.”

“ 설마 십 조 잠룡들의 짓이란 말이오?”

“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그렇소이다.”

“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만우량의 얼굴엔 불신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곳에는 철마당 대원 이백 명과, 다섯 명의 백대 고수, 그리고 칠왕 중 세 명이 있었다. 잠룡들 중 최고 실력자를 뽑아서 구성했다고 해도 철마당 대원을 전부 없애는 건 불가능한 데, 하물며 십 조 잠룡들을 오백 명 중 최하위권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만우량이 믿어지지 않는 얼굴을 하는 건 당연했다.

“ 잠룡들은 그럴 능력이 없지만, 그들 주변에 있는 호위들은 가능할지도 모르오.”

“ 무슨 소리요?”

“ 만 대협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연우강은 몇몇 잠룡들에게 암살대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잠룡들에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우담보는 말을 끊었다.

“ 들어오너라.”

만우량이 소리치자 시비가 차를 가지고 왔다.

“ 내려놓고 나가보거라.”

“ 알겠습니다.”

찻주전자와 찻잔을 내려놓은 시비는 공손하게 물러났다.

“ 계속하시오, 우 궁주.”

만우량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 잠룡들에게 호위를 소개시켜 준 적이 있소이다. 그때 연우강은 서른 명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호위들이 검탄을 구사하는 고수들이라고 하였소이다.”

“ 그 정도 인물이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잖소.”

“ 나도 처음엔 녀석이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소.”

“ 거짓말이 아니란 말이오?”

“ 그걸 확인하기 위해 만 대협을 찾아왔소이다.”

“ 날 만나면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 같은데..”

검탄 강기를 구사하는 서른 명의 초특급 고수. 그런 자들이라면 자신보다는 율령궁의 궁주인 우담보가 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우담보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지옥에 죄수들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그걸 알고 싶소이다, 만 대협.”

“ 지옥의 죄수 말이오?”

“ 그렇소.”

“ 설마! 그들에 대한 흔적이라도 나타난 거요?”

“ 지옥청화독공의 흔적이 발견됐소이다.”

“ 지, 지옥청화독공이라고 하였소?”

만우량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뭔가 있군.’

우담보는 내심 침음성을 발했다.

잔뜩 일그러진 만우량의 얼굴로 보건대 철마당 대원들이 중독된 독은 지옥청화독공을 펼쳤을 때 나타는 지옥청화독이 맞는 듯했다.

“ 그렇소. 만 대협. 철마당 대원들이 중독된 그 독은 묘강독존 갈인효의 성명절기인 지옥청화독이었소.”

“ 맙소사!”

만우량은 넋을 잃었다.

지옥 상황은 담대천호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전대 벌주 장만보를 따랐던 두작군 일행 이십삼 명과 사십 여 년 전에 주화입마를 입어 수감된 욱일승, 수천월, 갈인효를 포함하여 스물여섯 명이 살아남았는데 작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 중 갈인효의 무공인 지옥청화독공의 흔적이 철마당 대원의 몸에서 나타났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었다.

“ 우리 율령궁의 천안원 밀정들이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곳이 지옥이오. 만 대협.”

우담보는 설명을 구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 갈인효는 수감된 자들 중 한 명이었소. 작년 가을에 탈출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었던 자고.”

“ 그럼?”

“ 지옥청화독공의 흔적이라면 십중팔구는 갈인효가 맞을 거요. 우 궁주.”

우담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왜 그러시오?”

“ 작년 여름에 연우강이 지옥으로 들어간 적이 있소이다.”

“ 자세히 말해 보시오.”

“ 그러니까....”

우담보는 연우강을 천옥에 수감했던 일부터 시작하여 그 당시에 일어났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연우강 그 녀석이 지옥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죄수들이 탈출했다는 뜻이구려.”

“ 그렇소이다. 만 대협. 하지만 연우강 그놈에게 무공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몇 번에 걸쳐 확인했소이다.”

“ 칠백 년 전 살수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일살 천류흔의 잠능폐혈대법이라면 무공을 익힌 흔적을 없앨 수 있소.”

“ 하지만 놈은 혈도도 막혀 있었소이다.”

“ 완성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잠능혜혈대법을 완성하면 혈도마저도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하오.”

“ 그러면 욱일승 일행에게 가해진 금제를 풀어준 자가 연우강이란 말이 되는군요.”

“ 지금껏 우리는 연우강에 속았던 거요. 더불어 그놈 곁에는 지옥에 있던 죄수들 전부 포진해 있다고 봐야 하오.”

“ 어떤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자가 안정숙을 택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외다.”

“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곳으로 안정숙만한 곳은 없소.”

“ 문제는 놈이 대야벌에 잠입한 목적이 없다는 겁니다.”

“ 놈이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분명히 있소.”

“ 어떤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단 말이오?”

“ 황실의 끄나풀이오.”

“ 확실합니까?”

우담보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 그렇소. 여러 정황이 놈이 황실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소.”

“ 예를 들면?”

“ 먼저 도독동지 양성일과의 만남도 그렇소. 양성일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대야벌을 방문하였고, 놈을 만나고 갔소. 황궐과 금황련을 방문하긴 했지만 그건 형식적인 방문이었고, 그가 실제 만나고 싶어했던 자는 연우강이었소.”

“ 그걸로는 부족하오.”

“ 놈이 대야벌을 나간 후 가장 먼저 구림세가를 방문한 건 어떻소?”

“ 그건 빚을 받기 위해서라고 들었소이다.”

“ 드러난 목적은 분명 그렇소. 한데, 놈이 구림세가를 떠날 때 이자승이 합류를 했소.”

“ 이자승이면 사십 년 전에 황궐 궐주였던 태황야를 말하는 겁니까?”

“ 그렇소이다. 더불어 그는 지옥에 수감돼 있던 신주제일검 욱일승 일행과 절친한 사이였소.”

“ 연우강 곁에 지옥 죄수들이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 그것뿐만이 아니외다. 연우강이 떠나고 난 다음에 구림세가 구림제독 이연은 금의위 영반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소.”

내면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드러난 정황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였다. 이연이 금의위 영반을 만나 이유는 딸인 이지약과 연우강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진행되는 것 같아 그걸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는데, 만우량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 황실에서 우리 대야벌을 향해 뭔가를 진행 중이란 말입니까? 그 중심에 있는 자가 연우강이고?”

“ 그렇소. 우궁주.”

“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 일단 벌주와 상의를 해봐야겠소. 그보다 연금석의 동생들에 대한 건은 어떻게 됐소?”

“ 범 궁주가 맡고 있는데, 연은석과 연동석은 하겠다고 했답니다. 단 연금석 가족 일행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소이다.”

“ 알았소. 난 일단 벌주께 보고를 하러 가겠소.”

만우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궁왕 일행에 대한 일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우담보는 덩달아 일어나며 물었다.

“ 복수는 무림의 일상이잖소. 검왕 일행에게 몇 마디만 해주면 궁왕 일행을 대신해 연우강을 쫓게 될 것이외다. 나갑시다.”

만우량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다음에 봅시다. 우 궁주.”

“ 그럽시다. 만 대협.”

우담보를 배웅한 만우량은 다시 집무실로 들어와 몇 가지 보고서를 정리하여 천주 집무실로 향했다.

담대만승은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 어서 오게. 뇌천. 오늘은 하루 종일 바쁘구먼.”

담대만승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 방금 우담보 궁주가 보고서를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 새로운 사항이라도 있던가?”

“ 태황야 이자승이 십 조를 따라간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벌주님.”

“ 말해 보게.”

담대만승은 호기심 어린 얼구롤 만우량의 말을 기다렸다.

“ 연우강 옆에 지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 정말인가?”

“ 확실합니다.”

“ 그럼 욱일승 일행의 금제를 풀어준 자가 연우강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만우량은 조금 전 우담보와 나눴던 대화 중 궁왕 일행에 대한 것만 빼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 맹랑한 놈이군.”

담대만승은 픽 웃었다.

아들인 담대무궁이 당하고, 조양궁 궁주 범일승과 율령궁 궁주 우담보 등 녀석에게 당한 자는 한둘이 아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자신에게 묵사마저 교묘한 언변으로 빼앗아가지 않았던가. 그러한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했나 했는데 녀석은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던 것이다.

“ 무공은 어느 정도일 거로 보는가?”

“ 무공은 삼 갑자의 공력을 지녔고, 무적뇌화결을 육 성까지 익혔네. 그 정도면 백대고수 오십 권에 들 수 있는 실력이네, 뇌천.”

“ 그놈이 무공을 펼치는 광경을 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벌주님.”

“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

담대만승은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녀석의 무공 고하가 아니라 황실 문제가 더 급했다.

“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연우강을 제가하여 황실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가지치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연우강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 연우강만 제거하면 황실의 의도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 황실에 인물이 많으니까 그렇진 않을 겁니다. 다만 지금보다는 훨씬 위축될 겁니다. 반면에 우린 운신의 폭이 넓어질 테고요.”

“ 계속 등 뒤에 눈을 달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군.”

“ 차기 벌주로 선출될 때가지 오 년만 참고 견디면 그 후로는 문제없을 겁니다.”

“ 적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처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더구나 황실도 우리가 상궐을 창설하려고 한다는 걸 대강은 알고 있을 테니까, 잔가지를 쳐낸다고 해도 크게 경계하진 않을 겁니다.”

“ 야금야금 황실의 의도를 무력화시키자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어쨌든 중원의 실질적인 주인은 황실입니다. 그들에게 대적한다는 느낌을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런 느낌을 주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황실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전설을 믿지 않았다. 전설이라는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 그들이 포기할 거라고 보는가?”

“ 상궐이 창설되고, 벌주께서 차기 벌주로 됨과 동시에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을 차례로 약화시켜야 합니다. 그럼 황실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황궐을 무슨 수로 약화시킨단 말인가?”

“ 황궐, 금황련, 풍운련, 천추림이 그렇듯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 오백 년 전 벌주였던 조화신옹 이장천 벌주 때문이라고 알고 있을 뿐 자세한 내막은 모르네.”

“ 그 네 세력에서 키워낸 공동 제자가 바로 조화신옹 이장천이었습니다.”

“ 사실인가?”

“ 그렇습니다. 그들 네 세력은 벌주를 배출하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창안된 무공이 범천조화신공이었고, 범천조화신기라는 깃발을 만들어 그곳에 기록했습니다. 더불어 범천조화신공을 완성하고 범천조화신기를 지닌 자에게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맡긴다는 맹세를 하게 됩니다. 그 맹세에 대한 기록도 남겼고요.”

“ 그럼 이장천의 무기였던 여의신창이 범천조하신기였단 말인가?”

“ 조화신옹 이장천은 각고의 노력 끝에 범천조화신공을 완성하고 네 세력의 지원 아래 대야벌 벌주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십 년 동안 벌주 자리에 있었습니다. 만일 범천조화신기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최소한 삼십 년 이상 벌주 자리를 지켰 겁니다.”

“ 그 여의신창이라도 찾았단 말인가?”

“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 여의신창으로 귿르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 굳이 제압할 생각은 없습니다.”

“ 하면?”

“ 여의신창은 여타 지존신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네 세력의 수장들이 충성을 맹세를 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즉, 여의신창을 얻어 범천조화신공을 익히면 네 세력을 다스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얻게 됩니다. 만일 그들이 범천조화신기가 있는 위치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그걸 얻기 위해 상잔한다는 말이군.”

“ 그렇습니다. 벌주님.”

“ 좋네. 그럼 그들은 대충 해결이 됐고, 잔가지는 구체적으로 어딜 말하는 건가?”

“ 범일승 궁주가 추진하고 있던 일이 성과가 있었답니다.”

“ 어느 정도 성과를 말하는 건가?”

“ 죽이 않는 조건이라면 대야벌 산하 상궐의 궐주가 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답니다.”

“ 금릉 연씨 세가를 쳐야 한다는 말이군.”

“ 황실을 압박하고, 우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패입니다. 더구나 암살대전이 진행 중이라 기회도 좋습니다.”

“ 누굴 보낼 참인가?”

“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선느 무면천군단이 적격입니다. 벌주님.”

“ 조용히 처리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니네. 풀뿌리 하나도 남기지 말고 초토화시키라고 하게.”

“ 일종의 경고를 보내자는 말입니까?”

“ 그리고 후환 덩어리를 남기는 건 장만보로 족하네. 뇌천.”

“ 설사 그렇다고 해도 연우강이 남습니다. 벌주님.”

“ 그동안 날 속인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가족을 잃고 미친놈처럼 날뛰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네.”

“ 알겠습니다. 벌주님.”

고개를 숙인 만우량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나이를 먹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지만 젊은 시절 담대만승의 자존심은 한르을 찔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문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조그마한 모욕도 참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시장에서 소매치기로부터 돈주머니를 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날 시장의 건달들은 전부 시체로 발견됐다.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담대만승이었다. 그동안 나이도 먹고 벌주로 재직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느 누구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았던 대야벌 벌주라는 지위에 의해 그 자존심이 상처받을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성정이 연우강으로 인해 다시 드러난 것이었다.

“ 진척 상황은 지체하지 말고 즉시 보고하도록 하게.”

“ 명심하겠습니다. 벌주님.” 아갈 때는 혈마 연수로 살았소.”

고개를 숙인 만우량은 밖으로 나왔다.

‘ 그냥 연우강을 없애는 게 나았을지도......’

밖으로 나온 만우량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 아니군. 벌주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소득이라 할 수 있겠네.“

만우량은 쓰게 웃었다.

만일 동생인 담대천호가 무성의 힘을 바탕으로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친동생이라고 해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잘됐다고 할 수 있었다.

‘ 일단 무영들을 줄이는 작업을 해서 담대천호가 포기하도록 만들 수밖에.“

그는 원로들의 처소인 장생전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삼 일 후 일단의 무리가 대야벌을 나섰다.

대야벌 최북단 북천문을 통해 무면천군단 삼백 명이 남쪽으로 몸을 날렸고, 그들이 떠난 다음날, 검왕, 도왕, 권왕, 독왕의 네 명이 서천문을 통해 대야벌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천상천 무인들이 빠져나간 소식은 곧바로 야장으로 전해졌다.

“ 이 녀석은 정말!”

첩지를 정리하던 무원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사림 살수 이백 명, 남쪽으로 향함.

만마림 현의당 대원 오백 명 남쪽으로 향함.

무면천군단 삼백 명, 북천문을 통해 남쪽으로 향함.

검왕, 도왕, 권왕, 도왕 출타.

최근에 들어온 소식 중, 직, 간접적으로 연우강과 관련된 사안들이었다.

“ 무면천군단은 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심각한 얼굴로 첩지를 내려다보던 창노가 물었다.

무면천군단은 천상천 소속으로, 이번 암살대전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출병했다는 건 암살 대전과는 상관없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봐야 한다.

“ 자네 생각은 어떤가?”

“ 담대무궁의 일 조를 돕기 위해 나섰다고 하면 억측이겠죠?”

“ 일 조를 돕는 자들은 야궐을 비롯하여 여덟 곳의 세력이 있네. 굳이 무면천군단을 출병시킬 이유가 없네. 그리고 그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남쪽이라고 하였네.”

“ 그들도 십 조를 노리고 출병했단 말입니까?”

“ 그랬으면 좋겠네.”

“ 무슨 소립니까?”

“ 최근에 범일승이 우강이의 삼촌들을 만나고 다니다는 정보가 입수됐네.”

“ 그 똥자루 대머리 자식이 우강이 삼촌들을 왜 만난답니까?”

“ 그자가 그들을 만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 범일승이 우강이 삼촌등를 만나고, 무면천군단이 출병했네. 뭐 짚이는 게 없는가?”

“ 둘 사이에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창노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 우리 둘이 아직 야장에서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하구먼.”

무원은 피식 웃었다.

“ 형님!”

창노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무면천군단이 노리는 대상은 바로 금릉 연씨 세가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 글쎄 그 자식들이 금릉 연씨 세가를 왜 노리느냐는 거 아닙니까?”

“ 연은석, 연동석과 합의를 끝냈으니까 나머진 정리해야 할 거 아닌가?”

“ 설사 연금석이나 연우진이 죽는다고 해도 금릉 연씨 세가의 상속자는 연우강입니다.”

“ 엉?”

무원은 놀란 눈으로 창노를 보았다. 창노가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 머리를 자꾸 써야 노망이 들지 않는 겁니다. 형님.”

“ 그래서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건가?”

“ 형님도 저처럼 부지런히 머리를 굴려 보십시오. 그럼 세상 이치가 한눈에 들어올 겁니다.”

“ 좋네, 그럼 어쩌면 좋겠는가?”

“ 뭘 말입니까?”

“ 무면천군단이 금릉 연씨 세가를 공격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걸 묻는 거네.”

“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 여긴 자네와 나 둘뿐이네.”

“ 그런 건 집주인에게 물어야 하는 겁니다. 형님.”

“ 우강에게 알아서 하라고 하잔 말인가?”

“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 녀석 혼자 처리하라고?”

“ 무면천군단이 쳐들어오는 걸 몰랐으면 모르지만 알고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무면천군단에 대해 말해 주면 녀석이 알아서 할 겁니다.”

“ 무면천군단은 삼백 명이고 십 조 조원들은 호위까지 합친다고 해도 팔십 명 정도네.”

“ 하지만 그 인원으로 철마당 대원 이백, 사월림 살수 백, 군웅보 무인 백 명을 몰살시켰지요.”

“ 무면천군단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 장차 제 손녀사위가 될 녀석입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쳐들어올 때는 삼십육계 주위상이 최곱니다.”

“ 도망치는 걸 권하는 말인가?”

“ 그보다 좋은 방법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 없네.”

무원은 픽 웃으며 첩지를 꺼내 전서를 작성했다.

“ 지금 그 녀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 신검세가에서 외상값 칠십만 냥을 수금하고는 안휘성으로 향하고 있네.”

“ 안휘성이라고요?”

창노의 얼굴이 뜨악하게 변했다. 안휘성이라면 남궁세가가 있는 곳이다. 연우강이 그곳으로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불안한가?”

“ 설마 남궁세가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죠?”

“ 자네 손녀딸도 외상값이 상당한 걸로 알고 있네.”

“ 나중엔 전부 제 녀석 차지가 될 텐데, 외상값을 받는다는 건 좀 심합니다, 형님.”

“ 외상값 받지 말라고 쓸까?”

“ 남궁세가에서 외상값 타령하면 제가 혼낼 거라고 적어주십시오.”

“ 알았네. 하지만 큰 기댄 하지 말게.”

“ 나중에 제 색시가 될 운화의 체면도 생각해주지 않고 기어코 외상값을 받아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반드시 받아낸다는 쪽에 내 전 재산을 걸겠네.”

무원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붓 좀 줘 보십시오.”

“ 왜 그러는가?”

“ 일단 줘 보십시오.”

창노는 붓을 빼앗아 가서는 첩지 아래쪽에 빠르게 휘갈겨 썼다.

창노가 쓰는 글을 쳐다보던 무원은 피식 웃었다.

- 진짜 사내는 마누라 체면을 지켜주는 데 목숨을 거는 자다.

“ 녀석이 운화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군.”

“ 운화가 녀석의 욕조에서 목욕한 횟수가 다섯 번입니다. 사내가 여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였을 때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 운화가 그 욕조에서 목욕을 할 수 있었던 건 자네 부탁 때문 아닌가, 그리고 운화가 목욕할 때 녀석은 일 나간 걸로 알고 있네.”

첩지가 마르자 무원은 둘둘 말아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뚜껑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 집에서 목욕을 시켰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나 같으면 녀석보다는 오히려 녀석의 조부 쪽을 뚫어보겠네.”

“ 엉?”

무원을 따라나섰던 창노가 우뚝 멈춰 섰다.

좋은 방법을 두고 공연히 속을 끓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녀석은 금릉 연씨 세가에 있는 가족을 제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그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알았다. 제녀석 아버지는 몰라도 조부 말이라면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프! 하하하! 넌 끝났다. 이놈아.”

창노는 흡족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