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피묻은 감과를 먹은 이유
잠룡의 머리를 타고 넘은 남궁필상의 허리춤에서 새파란 광채가 번쩍 빛났다.
그 광채는 곧바로 연우강의 목으로 향했다.
그 순간 연우강의 왼손은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연우강의 왼손이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남궁필상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탁자 위에 내려서자마자 자세를 낮추며 연우강의 목에 검을 댔다.
하지만 그는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그의 검이 연우강의 목에 닿는 순간, 연우강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조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거였다.
“ 움직이지 마라.”
남궁필상은 검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 미친 놈!”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왼손을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푸욱!
사망낭조가 남궁필상의 얼굴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 크아악!”
남궁필상의 입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쥐어뜯는 듯한 고통에 그는 검을 버리고 양손으로 연우강의 왼손을 잡았다. 사망낭조가 파고들어 간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흘러내려 탁자 위로 뚝뚝 떨어졌다.
침묵을 넘어 적막감이 실내를 감쌌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분명 남궁필상의 검이 조금 빨랐고, 검날이 목에 닿게 되면 누구나 손을 멈추게 된다. 특히 무공을 익힌 무인은 감각이 예민하여 검날이 목에 닿았을 때 일반인보다 더 빨리 깨닫게 된다.
상대가 검을 밀거나 당기기만 해도 목이 잘릴 판인데, 그 상황에서 공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런데 연우강은 그 자살행위에 가까운 짓을 거리낌없이 해버린 것이다.
“ 적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 무기를 뽑지 마라. 상대가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무기를 뽑았으면 불능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이놈처럼 된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이 귓전에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철상이 연우강을 보며 물었다.
“ 이놈은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내 목에 검을 들이대고 모욕만 줄 생각이었다. 이놈이 죽임을 당하는 건 나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너희들도 지금과 같은 경우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상대를 깔보고, 하찮은 실력을 비웃기 전에, 먼저 상대를 불능으로 만들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들 또한 이놈처럼 된다.”
연우강은 남궁필상의 얼굴에 박힌 왼손을 사정없이 뽑았다.
털썩!
숨이 끊어진 남궁필상의 동체가 탁자 위로 쓰러졌다. 남궁필상의 얼굴이 조금 전 연우강이 깎아두었던 감과 위로 처박히면서, 사망낭조가 파고들었던 자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감과를 붉게 물들였다.
연우강은 붉게 변한 감과 한쪽을 사망마비로 찍어 올렸다. 잠시 감과를 내려다보다 엎드린 채로 죽어 있는 남궁필상의 등에 피를 닦아냈다.
연우강을 쳐다보던 잠룡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감과에 묻은 피를 닦는 모양새가 마치 먹으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늙은 당나귀.”
감과를 대충 닦아낸 연우강은 이번엔 사망낭조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남궁관수를 불렀다. 멍한 눈으로 연우강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관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내 돈 가져와.”
연우강은 사망마비로 찍었던 감과를 입으로 가져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움찔!
남궁관수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설마 연우강이 피가 묻은 감과를 입으로 가져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너, 넌 남궁세가 총관을 살해했다!”
“ 그래서?”
연우강은 감과 하나를 또 찍어 남궁필상의 등에 대고 피를 닦아냈다.
“ 남궁세가 무인은 목숨에 대한 빚은 반드시 목숨으로 받는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빚이나 갚아. 새꺄! 원래 돈 갚을 능력이 되지 않으면 목숨으로 대신하는 게 이쪽 계통의 불문율이라는 것도 몰라? 남궁필상이 뒈졌으니까 이제 한 냥 갚았어.”
“ 풍뢰단 단주는 듣거라!”
연우강을 노려보던 남궁관수는 밖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태상가주님.”
경천일검 남궁성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 저들은 우리 남궁세가를 불법으로 점거했을 뿐 아니라 남궁세가 총관 고혼검 남궁필상을 살해했다. 당장 놈의 목을 잘라 남궁세가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 지를 보여줘라!”
“ 존명! 풍뢰단 대원들은 저들을 끌어내라!”
남궁성인은 대원들을 쳐다보며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풍뢰단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남궁운화가 대야벌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두 귀로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없는 가주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더불어 그녀는 본인뿐만 아니라 창궁대 대원들까지 대야벌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하였다.
문제는 그녀를 따라 대야벌로 들어간 창궁대 대원들이다.
우창준, 나상일, 금전일, 윤택상 등, 잠룡쟁패를 가지고 대야벌로 들어간 자들 중 남궁 성씨를 쓰는 사람은 가주가 유일하다. 즉, 우창준 일행이 대야벌에서 성공하여 남궁세가를 떠난다고 해도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 그들을 위해 남궁운화는 천백 냥이라는 거금을 쓴 것이다.
과연 자신들이 남궁운화 입장이라면 천백만 냥을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을지. 설사 곳간에 수천만 금을 쌓아놓았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아니 백만 냥을 쓰는 것조차도 망설이게 될 것이다. 반면에 스스로 태상장로에 오른 남궁관수는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의 손자에게 삼십만 냥을 보냈다고 하였다.
“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대원들이 움직이지 않자 남궁성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저곳엔 가주가 계시오. 단주.”
부단주인 비룡검 남궁군영은 창궁전의 일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 남궁세가 총관이 죽었다. 남궁군영.”
“ 가주가 계신 자리에서는 가주님의 명령이 우선외이다. 가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때 움직이겠소.”
“ 하극상을 범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단 말이냐?”
남궁군영을 노려보는 남궁성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 단주가 끌어내라는 사람들 중에는 가주님도 있소이다. 단주는 지금 우리에게 하극상을 범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소. 난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소이다.”
남궁군영은 오른편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남궁군영의 돌발적인 행동에 어리둥절해 있던 풍뢰단 무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하나둘 남궁군영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룡 십 조 중 특히 연우강에 대해 살기를 쏟아내던 분위기가 급잔전됐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자 가장 놀란 사람은 남궁관수였다.
“ 각 단주와 대주는 듣거라!”
남궁세가 무인들을 보며 버럭 소리쳤다.
“ 하명하십시오, 태상가주님.”
그러자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검뢰단 단주 전검 남궁운창과 무적대 대주 월광검 남궁순우, 그리고 천풍대 대주 웅풍검 남궁인상이었다. 남궁관수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는 천뢰단 단주인 천광신검 남궁제상이 유일했다.
남궁제상은 담담한 얼굴로 남궁관수를 보았다.
“ 남궁제상 너는 내 명령을 듣지 않겠단 말이냐?”
남궁관수의 시선이 남궁제상에게로 향했다.
“ 이 년 전 우리 남궁세가는 대야벌로부터 잠룡쟁패 하나도 받지 못하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열두 명의 잠룡을 배출한 가문이 됐습니다. 과연 가주께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소생은 궁금하외다. 장로.”
단순히 남궁관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남궁세가 가솔 전부에게 하는 말이었다.
“ 잠룡쟁패를 구입하는 가격으로 천백만 냥을 썼다. 그게 잘한 일아라고 하는 거냐?”
“ 잠룡쟁패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난 가주님을 욕하겠습니다. 하지만 잠룡쟁패는 백만 냥이 아니라 천만 냥을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외다. 그런데 가주님은 자신의 것은 물론이고 가솔들 것까지 열두개를 구했소이다. 더구나 가주님께서 잠룡쟁패를 남궁 성씨를 지닌 직계나 방계 친척들에게 준 게 아니라 다른 성씨를 가진 가솔들에게 주었소이다. 저기 있는 우창준이나 나상일 등은 남궁세가를 떠난다고 해도 우린 잡을 수가 없소이다. 그런 자들에게 단순히 남궁세가 무인이란 이유만으로, 남궁세가를 파산으로 이끌 거금을 썼소이다. 전 죽었다가 깨아난다고 해도 그런 일을 하지 못하오. 그래서, 전 가주님을 존경합니다. 설사 가주님이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고 해도 제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따를 겁니다. 장로, 그리고 이건...”
남궁제상은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 그동안 가주님께 불충했던 죗값입니다.”
휙!
남궁제상은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 허억!”
“ 헉!”
주변에 있던 천뢰단 무인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말릴 틈도 없이 남궁제상은 자신의 왼팔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잘려나간 왼팔이 툭 떨어져 내렸다.
“ 제상!”
그를 지켜보고 있던 남궁운화는 깜짝 놀라 몸을 날랐다.
“ 맙소사!”
그녀를 지켜보던 남궁오검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흘러나왔다. 창궁전 일층에서 정원으로 달려나갈 때 남궁운화가 보여준 신법 때문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리는 순간 하늘색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잠시 후 시전자의 신형과 함께 사라지는 신법.
그 신법은 창궁대연신공과 더불어 무궐 궐주를 지냈던 창궁무제 남궁우문 전전대가주의 독문신법인 창궁무영신이었다.
물론 창궁무연신의 비급이 남궁세가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가에 남아 있는 비급을 통해 아무리 열심히 익힌다고 해도 방금 가주가 보여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경지까지 이룰 수 없다.
그런데 가주가 완벽한 창궁무영신을 펼친 것이었다.
오검의 대형인 철혼일검 남궁유향은 남궁운화를 지켜보았다. 남궁제상 앞에 선 그녀는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렀다.
탁! 탁탁탁!
“ 대, 대연십삼식!”
남궁유향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남궁제상을 지혈하려 휘두르는 남궁운화의 손놀림은 남궁세가가 보유한 금나수 중의 하나인 대연십삼식이었다. 대연십삼식 또한 창궁무연신처럼 완벽했다.
“ 가, 가주님.”
남궁제상 또한 그녀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감격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바보 같은 짓이에요, 제상.”
“ 아닙니다. 가주님. 저는 비겁한 놈이었습니다.”
남궁제상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 내가 못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제상, 제상은 아무 잘못 없어요. 오히려 내가 미안해요.”
“ 강해지셨군요.”
“ 대야벌에서 기연을 얻었어요. 이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 그랬군요. 정말 잘됐습니다. 가주님. 정말 잘됐습니다.”
제상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전대 가주로부터 남궁운화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없어, 죽음이 겁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남궁운화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가주님!”
남궁제상에 이어 천뢰단 대원 오십 명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남궁오검이 천뢰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궁운화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가자 다급해진 것은 남궁관수였다.
남궁세가를 파산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돈을 썼다는 사실을 빌미로 남궁운화로부터 가주 직위를 박탈하려고 했는데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궁운화는 대야벌에 열두 명의 잠룡을 집어넣은 최초의 가주가 됐고, 남궁 성씨를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구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최고의 가주가 돼버린 것이다.
[ 성인 ]
남궁관수는 풍뢰단의 단주인 경천일검 남궁성인을 향해 다급하게 전음을 보냈다.
[ 말씀하십시오. 태상가주님.]
남궁성인은 남궁관수를 보았다.
[공격하라!]
[ 가주를 공격하란 말입니까?]
남궁성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지금 상황에서 가주를 공격하는 건 활활 타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살아난다는 자신도 없다.
[ 지금 상태가 계속되면 우린 전부 죽는다. 넌 물꼬를 터라,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하겠다.]
[ 공격하는 시늉만 하란 말입니까? ]
[ 그렇다. 성인. 운창과 인상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 알겠습니다. 태상가주님.]
남궁성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불끈 틀어쥐었다.
“ 가주의 임무는 가문을 보존하는 것이오. 그녀가 천백만 냥을 썼다는 것은 곧 가문을 버리는 것과 같소. 난 그런 가주를 모실 수가 없소이다. 남궁운화로부터 가주 직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나를 따라라!”
남궁성인은 남궁운화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 나도 풍뢰단주의 말에 동의하오.”
가장 먼저 남궁인상을 따라나선 사람은 검뢰단 단주 전검 남궁운창이었다.
“ 나도 가주를 믿을 수 없소.”
두 번째로 따라나선 자는 무적대 대주 월광검 남궁순우였다.
“ 저도 따르겠습니다.”
“ 저도 따르겠습니다.”
천풍대 대주 남궁인상에 이어 남궁관수를 따르는 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ㅎ자ㅣ만 그들의 수는 오십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남궁성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부단주가 배신을 했다고 하지만 최소한 절반 정도는 자신들을 따라 나설 걸로 확신했다. 그런데 실제 나선 자들은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오십여 명으로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맥빠진 얼굴로 창궁전으로 시선을 주었다.
“ 일랑!”
지금껏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연우강이 우창준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광랑!”
“ 죽여라!”
“ 존명!”
고개를 숙인 우창준은 검을 뽑아 들었다.
“ 창궁대 대원들은 날 따라라!”
그는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며 창궁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죽여라!”
뒤이어 나상일 일행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 어리석은 놈!’
몸을 날려가는 창궁대 대원들을 보며 남궁관수는 슬쩍 미소를 물었다. 이미 주도권은 가주인 남궁운화에게로 넘어갔고,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자신들은 투항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잠룡들 사이에 있던 창궁대 대원들이 전쟁을 택함으로써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준 것이다. 창궁대 대원 열한 명을 죽이고 그 여세를 몰아 가주를 친다면 대역전이 가능할 것이다.
[ 먼저 놈들을 없애라!]
남궁관수는 남궁성인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 감히 창궁대 놈들이!”
남궁성인의 심정 또한 남궁관수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으며 몸을 날려오는 우창준을 향해 마주 나아갔다.
하지만 그는 우창준을 너무 몰랐다. 아니 잠룡들을 너무 몰랐다고 해야 했다.
그가 생각하는 우창준과 창궁대 대원들은 검기 정도를 뿌리는 이류에 불과했다. 이 년 전이고, 대야벌 잠룡이 됐다고 하지만 그들의 실력이 그때보다 많이 향상됐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남궁성인이 수중의 검을 번쩍 치켜들며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강한 바람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과 뇌성과 비가 오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풍운뇌우검법이었다.
“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오.”
우창준은 검에 전 내공을 주입했다.
우르릉!
번쩍!
그의 검에서 뇌성과 같은 검명이 흘러나오고, 뇌전 형태의 푸른 광채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 난 이 년 동안 참았소. 단주. 그리고 난....”
차앙!
푸른 뇌전 기운을 쏟아내던 우창준의 검이 남궁성인의 검을 막아냈다.
휙!
바로 그 순간, 우창준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우창준을 타고 넘은 자는 나상일이었다. 우창준과 마찬가지로 번쩍 들어올려진 나상일의 검은 푸른 뇌전을 머금고 있었다.
“ 혼자가 아니오, 단주!”
나상일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어렵게 처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고,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고집하는 놈은 병신이다.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해야 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연우강에게 들은 말이었다.
자신들보다 더 강한 무인인 남궁성인을 상대하면서 혼자 나서는 바보 같은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전에 사월림 살수들과 전투를 치르며 터득했던 방법으로 남궁성인을 상대했다.
번쩍!
“ 크아악!”
절반으로 잘려나간 남궁성인의 머리와 가슴에서 푸른 광채가 솟구쳐 나왔다.
“ 아악!”
“ 으아악!”
남궁성인의 비명에 이어 검뢰단 단주 전검 남궁운창, 무적대 대주 월광검 남궁순우, 천풍대 대주 웅풍검 남궁인상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 사람 또한 남궁성인과 마찬가지로 이 인 일조의 공격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 죽여라!”
우창준은 남궁성인의 시체를 지나쳐 남궁운화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죽여라!”
나머지 무인들 또한 질풍처럼 내달렸다.
“ 마, 막아라!”
차앙! 창창! 챙챙챙!
“ 크악!”
“ 아악!”
“ 으아악!”
반기를 들었던 자들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잔뜩 위축된 상황에서 남궁성인을 비롯한 수뇌들마저 죽자 반기를 들었던 자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마지막 발악을 해보았지만, 그들은 창궁대 대원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더불어 창궁대 대원들은 잔인했다.
그들은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상대를 도륙했다. 심지어 팔이 잘려 무기를 잃은 자들마저도 목을 잘라버렸다.
[ 일랑!]
[하명하십시오. 광랑!]
상대의 목을 잘라내며 우창준은 연우강의 부름에 답했다.
[ 가서, 남궁철상을 끌고 와라.]
[ 알겠습니다. 광랑.]
우창준은 곧바로 전장에서 몸을 빼내 담을 넘어 몸을 날려갔다. 우창준이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열 명의 창궁대 대원은 남아 있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 크아악!”
마지막 남았던 자의 비명을 끝으로 잔인한 도살은 마무리됐다. 오십 명을 전부 없앤 창궁대 대원들은 남궁운화 곁으로 자리했다.
“ 자네들이 펼친 무공이 혹시 천뢰제왕신공인가?”
철흔일검 남궁유향이 나상일을 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 대야벌에서 기연을 얻었습니다.”
나상일은 기연을 얻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 그럼 가주님이 익힌 무공은?”
“ 창궁대연신공을 바탕으로 한 창궁대연검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 차, 창궁대연신경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 허허, 이런 홍복이 있나.”
남궁유향은 감격한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남궁운화는 남궁관수를 돌아다보았다.
“ 아직도 본인이 태상가주라고 생각하나요?”
그녀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난 남궁세가를 위해 평생을 바쳤네. 가주. 태상가주라는 직책은 가주 옆에 있는 오검도 인정했고, 나 또한 가주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유지하고 있을 생각이었네. 난 남궁세가에 대해 눈곱만큼도 사심이 없네.”
따르던 자들이 전부 죽임을 당하자, 남궁관수는 고개를 숙였다.
“ 죽일.....”
“ 허!”
“ 저런 자가...”
남궁세가 무인들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대놓고 욕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어차피 너희들도 나와 공범일 뿐이다. 놈들.’
그런 남궁세가 무인들을 남궁관수는 내심 비웃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남궁세가 무인들은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 장로 직위에 있던 자신은 좀더 적극적으로 권력을 탐하였고, 그런 자신을 저들은 묵인했다. 남궁세가 무인들 중 자신에게 돌을 던질 자는 아무도 없었다.
“ 잘못을 시인한단 말인가요?”
“ 그렇네, 가주. 남궁세가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커 잠시 실수를 했네. 날 용서해주게.”
“ 용서해 주시오, 가주.”
남궁관수를 비롯한 다섯 명은 창궁전을 나와 정원으로 간 다음 남궁운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재미있는 놈이지 않습니까? ]
남궁관수를 지켜보던 연우강은 이자승에게 전음을 보냈다.
[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이자승은 연우강을 보았다.
[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남궁세가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영감님.]
[ 가문의 가솔을 처단할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놈은 남궁운화를 거부했습니다. 남궁운화를 공격했던 자들 또한 저놈의 명령을 따랐고요.]
[ 하지만 지금은 잘못했다고 빌고 있다. 더구나 남궁관수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진심으로 참회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자는 함부로 없앨 수 없다. 그리고....]
[ 남궁세가 무인들은 대부분 남궁관수와 공범이란 말입니까? ]
[ 그렇지. 어찌 됐든 남궁관수에게 태상가주란 직함을 만들어준 자들이니까.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해도 저자를 죽일 수 없다.]
[ 그럼 그놈을 데려오라고 한 게 잘한 거군요.]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 어쩔 생각이냐?]
[ 남궁운화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전 아닙니다. 영감님.]
연우강은 전음을 보내며 밖으로 나왔다. 정원으로 내려서 남궁관수와 오 장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휙!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담을 넘어왔다. 조금 전 연우강의 명령을 받고 남궁철상을 데리러 갔던 우창준이었다. 그의 품속에는 수혈이 점혈된 채로 잠이 들어 있는 남궁철상이 안겨 있었다.
“ 여기에 내려놓아라.”
연우강은 발치를 가리켰다.
“ 알겠습니다. 광랑.”
우창준은 남궁철상은 내려놓고 수혈을 풀어주고는 남궁운화가 있는 자리로 옮겨갔다.
“ .......?”
남궁철상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달빛이 너무 좋아 달구경을 나왔다가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몸을 돌렸는데 뜨끔한 느낌과 함께 잠이 들었다.
“ 몸이 많이 나은 모양이네.”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쪽에서 들려오자 남궁철상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너, 넌?”
남궁철상은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바로 옆에 연우강이 서 있었던 것이었다.
“ 나야.”
연우강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왔구나. 놈. 남궁세가는 이미 조부님이 장악했다. 남궁운화 그 계집과 함께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네놈은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깜짝 놀랐던 것도 잠시 남궁철상은 비릿하게 웃었다.
어쩌면 무공을 잃고 나서 판단력이 과거에 비해 흐려진 탓인지도 몰랐다. 느닷없이 수혈을 점혈당해 잠이 들었고, 눈을 뜬 곳에 연우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철상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곳이 가주의 거처인 창궁전이란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뒤편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리는 소리는 남궁세가 무인들이 전부 모여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조부의 명령으로 발동된 창궁령을 듣고 남궁세가 무인들이 전부 모였다면 남궁세가는 이미 조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혀 있다고 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 난 볷하러 왔는데?”
“ 복수?”
“ 전에 네 할아버지인 남궁관수 그놈이 백만 냥을 내 머리에 걸었잖아.”
“ 큭큭큭! 그러니까 살인청부에 대한 복수를 하러 남궁세가까지 왔단 말이냐?”
남궁철상은 키들키들 웃었다.
“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빚지는 거거든. 빚은 가능하면 빨리 닾아버리자는 게 내 신조라서 말이야.”
“ 그래서 어떻게 빚을 갚겠다는 말이냐?”
“ 별 것 아냐. 남궁관수의 인간성을 시험해 볼 참이야.”
“ 남궁관수면 내 할아버지인데....”
남궁철상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 조, 조부님.”
남궁철상의 입에서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놀랄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 벌써 놀라면 내가 섭섭하지.”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연우강의 오른손이 남궁철상의 왼편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 크아악!”
남궁관수를 쳐다보고 있던 남궁철상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남궁철상은 오른손을 들어 왼편 어깨를 더듬었다. 그곳에는 작은 비수가 손잡이만 남겨놓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 네 목숨은 늙은 당나귀에게 달려 있다, 남궁철상.”
말은 남궁철상에게 하고 있지만 연우강의 시선은 남궁관수에게로 향해 있었다.
“ 난 남궁세가 가주께 잘못을 빌었다. 연우강!”
“ 남궁세가 가주하고는 빚 청산이 끝난늦지는 모르지만 나하곤 아니잖아.”
“ 너 하곤 빚이 없다.”
“ 조금 전에 이놈이 하는 말을 들었으면서 오리발을 내밀려고 하네. 넌 금 오만 냥을 사월림에 보내 내 머리를 달라고 했잖아.”
“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넌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똥지에게 불과했다. 똥지게를 없애기 위해 은 백만 냥을 사용한다는 건 바보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물론 그래, 하지만 넌 이놈과 남궁세가 가주를 혼인시킬 생각이었지. 남궁세가 가주 자리를 남궁철상에게 자연스럽게 넘기려는 생각으로 말이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나와 가주가 상당히 친해진ㄴ 것처럼 보였단 말이야. 아마 올해 춘절이었을 거야. 그때 내가 가주에게 선물을 준 적이 있는 데, 선물을 받은 가주는 내게 답례 형식으로 대라금환을 주었지. 그 광경을 남궁철상이 봤어. 이놈은 날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결국 남궁관수 네게 날 없애달라고 전서구를 보냈고, 넌 사월림에 청부를 했지.”
“ 증명이란 과정이 없으면 모함에 불과할 뿐이다, 연우강.”
“ 물론이야, 늙은 당나귀. 난 지금부터 그걸 증명해 보일 거야.”
연우강은 사망마비 하나를 왼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남궁관수를 빤히 쳐다보며 남궁철상의 왼편 어깨에 천천히 박아 넣었다.
“ 크아악!”
남궁철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말해라, 남궁철상. 말하지 않으면 살점을 저며내는 고통을 당하게 될 테고, 말하면 이 고통이 당장 멈추게 될 것이다.”
연우강은 찔러 넣었던 사망마비를 천천히 돌렸다.
“ 크아아악! 그, 그랬소. 조부가 당신을 죽여 달라고 사월림에 청부를 했소.”
“ 쉽군.”
연우강은 사망마비를 꽂아 놓은 채 남궁관수를 보았다.
“ 죽음이 두려워한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다. 연우강.”
남궁관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늙은 당나귀. 그래서 지금부터는 너와 이놈 사이의 친밀도를 조사해 볼 참이야.”
연우강은 엉덩이 쪽에 걸어두었던 묵사를 뽑아다.
“ .....?”
남궁관수의 얼굴에 언뜻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전 피가 잔뜩 묻은 감과를 시체의 옷에 닦아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 먼저 남궁운현과 남궁자승을 죽여라. 그럼 이놈이 산다.]
연우강은 전음을 보내며 남궁철상의 왼팔을 활짝 폈다.
“ 안 돼!”
남궁관수는 벌떡 일어났다.
[ 난 한 번 이상 말하지 않는다. 늙은 당나귀.]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남궁철상의 왼팔을 향해 묵사를 휘둘렀다.
“ 크아악!”
남궁철상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연우강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잘려나간 남궁철상의 왼팔을 휙 던져버리고는 다시 오른팔을 잡아 늘였다.
“ 하겠다!”
묵사를 번쩍 들어올리는 순간, 남궁관수는 검을 뽑아 들고 뒤편에 앉아 있는 남궁운현과 남궁자승을 향해 휘둘렀다. 남궁세가 최강 무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걸맞게 그의 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검 끝에서 솟구친 검강은 순식간에 남궁운현과 남궁자승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 크악!”
“ 아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멍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운현과 남궁자승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 시간없다. 늙은 당나귀. 이젠 바로 앞에 있는 두 놈이다. 그놈들의 머리를 잘라내면 이 놈이 산다.]
연우강은 묵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 차앗!”
그의 묵사가 남궁철상의 오른팔로 향하는 순간, 남궁관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 크악!”
“ 아악!”
남궁궐과 남궁장익은 죽어가면서도 눈을 감지 못했다.
남궁운현과 남궁자승이 당할 때 어쩌면 다음엔 자신들의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공을 끌어올리고 준비를 하려는 순간, 남궁관수의 검강이 목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두 사람 역시 남궁운현과 남궁자승처럼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수십 년 지기인 남궁관수가 자신들을 향해 검을 휘두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대비도 느슨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남궁관수는 남궁궐과 남궁장익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서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순식간에 네 명의 목을 베어버린 남궁관수는 핏발 선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연우강의 검은 남궁철상의 팔 한 치 위에 멈춰 있었다.
“ 이젠 너다, 남궁관수. 네 목을 햐애 검을 휘두르면 이놈은 산다.”
연우강은 남궁관수가 생각할 틈도 없이 몰아쳤다.
“ 개자식!”
차마 자결은 할 수 없었는지, 남궁관수는 짐승처럼 고함을 지르며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연우강 앞에 멈춰 검을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바로 그때 불쑥 뭔가가 연우강 앞ㅇ르 가로막았다.
그는 다름아닌 손자인 남궁철상이었다.
남궁관수는 급하게 검을 오른편으로 틀었다. 차마 손자의 몸에 대고 검을 찌를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바로 그 순간,
“ 크아악!”
바로 앞에 있던 남궁철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몸을 뚫고 나온 묵사가 남궁관수의 단전마저 파고들어갔다.
“ 커억!”
남궁관수의 입에서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멍한 얼굴로 손자인 남궁철상의 어깨 너머로 연우강을 보았다.
“ 네놈이 자결을 했더라면 이놈은 천수를 누렸을 거야.”
연우강은 차갑게 말하며 손목을 사정없이 비틀ㅇ러 묵사를 뽑았다.
털썩!
두 사람은 나란히 쓰려졌다.
“ 난 최소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거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궁관수를 내려다보던 연우강은 천천히 잠룡들이 있는 창궁전으로 향했다.
잠룡들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삼현이로는 남궁세가에서 가장 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들이 전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광석화처럼 일이 끝나버린 탓이었다.
“ 축제는 끝났다. 일랑은 시체를 치우고 정리하라.”
“ 존명!”
연우강의 말에 우창준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창궁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창궁대 대원들을 비롯한 남궁세가 가솔들은 주변에 널린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 가족장으로 치를 거니까 유향 장로가 준비를 해주세요.”
“ 가족장입니까?”
남궁유향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 이미 죽은 자들이에요. 시체에까지 죄를 물을 순 없잖아요.”
“ 알았습니다. 가주님.”
남궁유향은 고개를 숙였다.
정원이 정리되는 상황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창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 어떻게 한 거죠?”
연우강이 창궁전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자 수여설이 낮게 속삭였다.
조금 전 남궁관수 일행이 무릎을 꿇었을 때 수여설은 남궁운화 입장이 돼 어떻게 처리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됐든 남궁관수 일행은 남궁운화의 친척이고 촌수로는 윗사람이다. 더불어 지난 십여 년 동안 실질적으로 남궁세가를 다스려왔다.
만일 검을 뽑아 들고 덤볐더라면 남궁성인 일행처럼 없애버렸을 테지만 그는 교묘하게도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다. 가주 입장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자를 없애라고 명령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자를 옆에 두는 건 더 위험하다.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포탄을 끌어안고 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쫒을 수도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는 자가 바로 남궁관수였다. 그런데 연우강이 나서 남궁운화의 고민을 깔끔하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수여설이 궁금해하는 건 남궁세가 최고 고수라고 알려진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없앴냐 하는 것이었다.
“ 남궁관수가 동료 네 명을 그렇게 쉽게 없앤 이유가 궁금하다는 겁니까?”
“ 그들은 평생지기라고 들었어요.”
“ 하지만 남궁철상보다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죠.”
“ 남궁철상으로 남궁관수를 협박했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고 해도 남궁관수가 그렇듯 쉽게 평생지길르 버린 건 좀 의외구나.”
이번에 입을 연 사람은 이자승이었다.
전혀 망설임이 없었던 남궁관수의 행동 때문이었다. 물론 연우강이 남궁철상의 팔을 잘라내면서 숨쉴 틈조자 주지 않았지만 남궁관수의 행동은 다분히 광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 남궁관수에게 있어 남궁철상은 단순한 손자가 아니었습니다. 영감님.”
“ 단순한 손자가 아니었다면?”
“ 남궁철상은 남궁관수의 꿈이자 야망이었습니다. 그놈이 남궁세가의 가주를 꿈꿀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남궁철상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가 남궁 소저 앞에 무릎을 꿇을 것 또한 남궁철상이 살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너는 손자의 목숨이 아니라 야망을 없애버리겠다고 협박한 거란 말이냐?”
“ 그렇습니다. 영감님.”
“ 남궁관수는 연 공자가 남궁철상을 살려주지 않을 거라는 걸 몰랐을까요?”
듣고 있던 몽요가 물었다.
“ 물론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제 동료를 없애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남궁관수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몽요.”
“ 그를 지지하던 자들의 죽음이 크게 작용했다는 거군요.”
“ 그렇습니다. 협박도 상대방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내야 성공합니다. 어쭙잖은 협박은 오히려 일을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 아무튼 연 공자 옆에 있으면 여러모로 많은 걸 배우게 되네요. 그런데 피가 잔뜩 묻은 감과를 먹은 것도 관련이 있나요?”
몽요는 연우강의 앞에 놓여 있는 감과를 눈으로 가리켰다.
“ ‘나 무서운 놈이야’라고 험악하게 말하는 것보다, 피가 잔뜩 묻은 음식을 먹어주는 게 상대방을 겁주는 덴 훨씬 효과가 큽니다. 기회가 되면 몽요도 한번 해보세요.”
“ 전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해도, 내가 죽인 자의 피가 묻은 음식을 먹진 못할 것 같아요.”
몽요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 또한 그런 기회가 없진 않았다. 적을 암살하고 난 다음에 음식이 든 주머니를 빼낸 적은 있다. 하지만 피가 묻은 음식을 먹은 적은 없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여긴 탓이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방금 자신이 죽인 자의 피가 묻은 음식을 자연스럽게 먹었다. 그의 별호가 미친 이리, 광랑인 이유를 비로소 알 듯했다.
“ 그런 경험은 영원히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몽요.”
연우강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영원히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연우강의 말이 섬뜩한 비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목이 마른 듯, 건배하자는 말도 없었는데 일제 술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