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십뢰에 대한 말은......
휙! 휙!
스스스! 스스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빠른 속도로 숲속을 질주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천상천을 떠나온 무면천군단이었다.
“ 정지하라!”
선두에서 달려가던 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척! 척척! 척척!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무면천군단 대원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내려섰다. 그들은 내려서자마자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자세를 낮췄다. 놀랍게도 삼백 명이 동시에 내려섰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척도 나지 않았다.
손을 들었던 사내의 눈동자에 만족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 젠장,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에 불만이 가득 어렸다. 이번 임무 때문이었다.
상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나서긴 했지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임무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대야벌에 불만을 가진 무림세력을 지우는 게 아니다.
금릉 연 씨 세가라는 상계의 거목을 지우는 게 이번 임무였다. 문제는 그 금릉 연씨 세가에 있다. 중원 최강의 상단이지만 그들은 무림문파나 세가가 아니다.
그런 자들을 없애기 위해 삼백 명이나 되는 무면천군단이 출병했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했다.
“ 여기가 어디쯤이냐?”
사내는 딱이 누구라고 지칭하지 않고 주변을 보며 물었다.
“ 하남성 최북단에 위치한 안양 근처입니다.”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직도 하남성이란 말이냐?”
사내의 목소리엔 잔뜩 짜증이 배어 있었다.
“ 이제 절반 왔습니다. 단주님.”
“ 빌어먹을!”
단주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잠시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등에서 자루를 내렸다.
“ 식사를 하고 출발한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이다.
출병을 하게 되면 객잔에 묵을 수도 없고, 술 한잔으로 객고를 풀 수도 없다. 오직 숲으로 이동해야 하는 이런 생활이 짜증스러웠다.
단주는 복면 아래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복면 아래쪽을 잡고 잠시 멈칫하던 그는 사정없이 벗어 젖혔다. 그러자 오관이 선명한 미남형의 얼굴이 나타났다.
월마 담대민.
놀랍게도 그는 범천담대세가의 둘째였다.
하지만 그는 본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에 세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가 사백 년 전 무인인 월마의 진전을 얻어 고수 반열에 오르면서 무면천군단의 단주가 됐다.
‘ 그만둘 때도 됐지.’
담대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대야벌을 떠나오기 전, 아버지란 사람을 만나러 갔다. 출병 인원이 너무 많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만날 수 없었다 대신 만우량으로부터 금릉 연 씨 세가의 풀뿌리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 저도 할만큼 했습니다. 아버지. 이번 일이 끝입니다.’
담대민은 자루에서 육포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반 시진 가량 머문 무면천군단 일행은 다시 동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몸을 날리는 그 시각.
하남 성도인 정주 근처를 지나는 자들이 있었다.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사월림을 떠나온 살수 이백 명이었다. 살수들을 이끌고 있는 자들은 전부 다섯 명이었는데, 그들은 사월림 전대 고수로 현역에서 활동할 때는 오사라는 별호로 불렸던 자들이다. 이미 은퇴한 그들이 살행에 나서게 된 이유는 연우강의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면 사월림이 파산하고 만다는 양도욱의 말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들은 죽은 오살을 키워낸 장본인들, 오살의 사부들이기도 했다.
청부와 복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행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었다.
“ 현의당 녀석들이 반나절 거리 앞에 있다고 했던가?”
가운데 있는 왜소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볼이 쑥 패어 얼굴이 길어 보이는 이자는 오사의 수장인 천사 배철이었다.
“ 그렇다고 들었네.”
바로 옆에 있던 지사 손규산이 대답했다.
“ 오백 명이나 된다는 데 우리 몫이 남으려나 모르겠구먼.”
오살은 자신들이 키워낸 살수 중에서 최고였다.
오살 위에 삼월이 있다고 하지만 내공에서 밀려 이인자가 됐을 뿐, 실전에서는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전부 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사월림에 있을 수가 없었다. 출병을 부탁한 림주 양도욱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 그래서 이리 급하게 쫓아가는 거 아닌가.”
“ 그렇지. 서둘러라!”
지사 손규사는 뒤편을 돌아보며 낮게 소리쳤다.
사월림 살수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그들의 신형은 곧 벌판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삼현이로의 죽음과 일부 수뇌들의 반란 사건으로 인해 잔뜩 침울했던 남궁세가에 반가운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남궁세가 대문 안으로 발을 디딘 자들은 이 년 전 남궁운화와 함께 가문을 떠났던 창궁대 나머지 대원들이었다.
노노태세와 남궁운화는 눈물로 상봉을 하였고, 창궁대 대원들 또한 기쁨의 재회를 했다. 이 년 만의 만남은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 꽃을 피워도 끝나지 않았다.
남궁운화와 노노 그리고 창궁대 대원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남궁운화와 노노태세는 거처를 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 아직도 저러고 있군요.”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던 노노태세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정원 한편에서 연우강이 특유의 몸풀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아! 맞다. 깜빡했네. 할머니, 밥은 좀 있다가 먹어야겠어요.”
연우강을 보던 남궁운화는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 가, 가주님.”
노노태세가 깜짝 놀라 남궁운화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정원으로 나간 후였다.
“ 뭐 하려고....”
창가로 걸어간 노노태세는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어?”
노노태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원에 있는 잠룡들은 연우강뿐만이 아니었다.
오른편에서는 잠룡 십 조 대원들이 연우강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몸을 풀고 있어다.
“ 뭐 하는 짓들인지 모르겠네.”
“ 무극지도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하더라.”
제단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극지도?”
노노태세는 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허일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형님이 그렇게 말하더라.”
“ 참, 일삼 오빠를 만났다고 했지. 어떻게 지내셔?”
문득 생각난 듯 노노태세가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허일구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
“ 왜 웃어?”
“ 네가 일삼 오빠라고 하니까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노노태세는 피식 웃었다.
“ 클클클! 아무튼 다들 살아서 만나니까 좋긴 하다.”
“ 설마 우리 관계를 일삼 오빠께 말한 건 아니겠지?”
“ 아직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말해야 하지 않겠냐?”
“ 말하지 마.”
“ 그냥 이렇게 살자고?”
“ 가주님께는 아직 내가 필요해.”
“ 운화는 이제 성인이다. 달리, 자기 인생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고.”
“ 하지만 혼자야.”
“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운화 곁에 머물겠단 말이냐?”
“ 지금은 날 할머니라고 불러, 망통.”
“ 그럼 난 또 기러기가 돼야겠구나.”
“ 네게 항상 미안해. 하지만 난.....”
“ 됐다. 달리. 우리 팔자가 그런 걸 누굴 탓하겠냐. 하지만 지난 일 년 육개월은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
“ 그건 나도 그래.”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 참! 일삼 형민에 대해 물었지?”
허일구는 화제를 돌렸다.
“ 응! 어떻게 지내셔?”
“ 저 녀석에게 무덤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할 모양이더라.”
허일구는 턱으로 연우강을 가리켰다.
“ 저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인 거야?”
“ 아니?”
“ 그런데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는 건 무슨 말이야?”
“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 다만?”
“ 연우강을 주군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 주, 주군?”
“ 응.”
“ 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노노태세는 경악한 얼굴로 허일구를 보았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남궁운화를 호위하고 있는 무인들은 검탄강기를 구사하는 고수들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허일삼도 그런 경지에 올라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그들이 뭐가 아쉬워 연우강을 주군으로 모신단 말인가.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 더 이상은 나도 몰라.”
허일구는 고개를 저었다.
허일구 또한 형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오밀문이나 남궁세가에서는 과거 전력을 문제 삼지 않아도 되니 머물러도 상관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형님은 고개를 저으며 마지막 삶은 연우강과 함께하겠다고 한 것이다.
“ 그런데 저 녀석은......”
노노태세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 운화는 무슨 말 없었어?”
“ 누구? 저 녀석?”
“ 응! 저 녀석이 잠룡 십 조 조장이잖아. 무공 정도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야.”
“ 별말 없었는데? 가만.... 맙소사.”
노노태세의 입이 쩍 벌어졌다.
“ 왜?”
“ 망통!”
“ 말해, 이것아.”
“ 지난 일 년 육개월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밤새도록 했는데 그 이야기 중 절반 이상이 직, 간접적으로 한 사내와 연결돼 있다면?”
“ 좋아하는 거네, 뭐.”
“ 그렇지?”
“ 내 경험상으로는 싫어하거나 아무 생각이 없으면 절대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런데 운화가 그랬어?”
“ 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가주님은 이야기를 시작할 때나 끝날 때 반드시 연우강을 들먹였어.”
노노태세는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열아홉 살이던가?”
“ 응!”
“ 그럼 그럴 나이가 됐네, 뭐.”
“ 나이만 먹었지 가주님은 아직 어린애야, 자식아.”
“ 네 눈에는 운화가 오십이 돼도, 어린애로 보일 거다. 아무튼 희한한 녀석이네.”
허일구는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있던 연우강이 보이지 않았다.
“ 아이고, 녀석 들어오려 보다. 나 간...”
“ 세모꼴 눈에 주먹코, 오른쪽이 약간 긴 염소 수염, 키는 오 척 다섯 치. 오른손 손등에 있는 칼자국!”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입구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와, 왔는가?”
허일구는 어색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그가 방금 자리를 뜨려고 했던 것은 연우강에게 받았던 잠룡쟁패 때문이었다.
“ 우린 아직 계산을 끝내지 못한 걸로 아는데, 영감 생각은 어때?”
“ 끄응! 그 그게...”
허일구는 말을 더듬었다. 남궁세가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다섯 개의 잠룡쟁패를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 아주머니는 남궁세가 수뇌들을 불러오시오.”
연우강은 식당으로 가며 말했다.
“ 난 어제 도착해서 누가 수뇌인지 아직 모르네.”
“ 맞아, 그랬지. 어이.”
식당으로 들어선 연우강은 한편에서 요리사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는 중년인을 불렀다. 다.
“ 부르셨습니까?”
사내는 급하게 연우강 앞으로 뛰어왔다.
“ 이름이...”
“ 구야자라고 합니다.”
“ 남궁세가에서 하는 일은?”
“ 소작인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 먹는 걸 주로 관리한다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연 공자.”
“ 운이 좋았군.”
움찔!
구야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그 날 이곳에 왔더라면 남궁필상처럼 죽었을 거라는 말이었다.
“ 당신이 구야자가 아니라 남궁야자였다면 지금이라도 죽였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 아, 알고 있습니다.”
“ 앞으로 단돈 한 냥이라고 해도 남궁세가 밖으로 나가는 돈은 여기 노노태세 아줌마께 보고해.”
“ 아, 알겠습니다.”
“ 그리고 오검인가 하는 그 늙은이들하고 천뢰단 단주를 찾아가서 노노태세가 부른다고 전해.”
구야자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 왜 그런 건가?”
연우강과 구야자의 말을 듣고 있던 노노태세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 뭐가 말입니까?”
연우강은 한편 식탁으로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을 받았다.
그가 앉자, 구석에서 약을 달이던 욱일승이 대접을 들고 왔다.
“ 남궁세가의 모든 명령은 가주님으로부터 나와야 하네. 난 남궁세가의 가솔도 아니고 유모에 불과하네.”
“ 남궁소저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건 가주님과 나만 알고 있는 거네.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부를 일이 없을 거네.”
“ 조직은 사적인 감정으로 다스려지는 게 아닙니다. 아주머니. 가주가 할머니라고 부르면 그때부터는 할머니가 공식적인 호칭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제 남궁세가 가주는 노노태세를 향해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는 오검과 천뢰단 단주는 물론이고 남궁세가 가솔 대부분이 있었습니다.”
“ 다시 유모라고 부르게 하겠네.”
“ 가주를 실없는 사람으로 만들 참입니까?”
“ 이제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남궁세가네. 나 때문에 혼란이 오는 건 원하지 않네.”
노노태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 가주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 자는 남궁세가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아주머니.”
“ 나를 할머리나 부르는 것은 인간적인 정 때문이네. 남궁세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네. 연공자.”
“ 그래서 조직의 수장은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사적인 이야기와 공적인 이야기는 반드시 구분을 해야 하고 설사 사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장소를 가려야 합니다. 노노태세는 이미 가주의 할머니가 됐고, 남궁세가에서 가주와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신분이 돼버렸습니다.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을뿐더러 바꿔서도 안 됩니다.”
“ 그들이 날 인정할 거라고 보는가?”
“ 인정하지 않으면 죽여야지요.”
“ 자네?”
“ 남궁 소저가 본인 스스로 가주라는 인식을 갖지 못하면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궁 소저는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데려간다면 좀더 훈련을 시켜주겠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습니다. 나를 대신해 그 일을 해 줘야 할 사람이 아주머닙니다. 전에 남궁 소저를 데리고 잠룡대전에 참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목숨을 거십시오. 물론 그자들이 오면 내가 경고를 하겠지만, 권위를 세우는 건 전적으로 아주머니와 남궁소저 몫입니다.”
“ 왜 그렇게 남궁세가 일에 신경을 쓰는 건가?”
노노태세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 어중간한 일 처리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남궁소저가 가주로서 전권을 휘둘러야 돈을 받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 가주가 잠룡 십 조 대원이라고 알고 있는데....”
듣고 있던 허일구가 얼른 끼어들었다.
남궁세가에 대해 신경을 써주는 모양새가 잘만 하면 잠룡쟁패에 대한 건은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아서였다.
“ 내가 남궁오검과 남궁제상을 부른 이유가 돈 때문이야, 영감. 영감이 대금전장에 집어넣은 돈이 삼백 냥이었으니까 여섯 개에 대한 건 빼줄 게. 그럼 전부 열 네 개고 남궁세가에서 열두 개를 사갔으니까 영감이 가져간 건 두 개가 되는 셈이네?”
“ 어, 얼마를 달란 말인가?”
“ 그건 당사자들이 오면 함께 논의해 보자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약 대접을 입으로 가져갔다.
“ 부르셨습니까?”
그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남궁오검과 천뢰단 단주 남궁제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유향 원로.”
조금 전 남궁세가를 혼란하게 하는 짓은 절대 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던 건 어디로 갔는지 노노태세는 허리를 곧게 펴고는 남궁오로와 남궁제상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무례는 무슨.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저희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철검일흔 남궁유향은 정중하게 말했다.
구야자로부터 노노태세가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주가 가장 어려울 때 옆에서 지켜주었던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노노태세였고, 가주가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남궁세가에서 윗사람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 이해해 주어서 고마워요. 유향 장로. 내가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가주님을 비롯한 창궁대 대원들에게 기연을 가져다주었던 잠룡쟁패 때문이에요.”
“ 구입 비용 말입니까?”
“ 그래요, 여기 연 공자는 허 대협에게 잠룡쟁패를 팔아달라고 맡겼는데, 가주님께서 그걸 전부 산 거예요.”
“ 그렇게 된 거였군요.”
남궁유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노노태세가 자신을 비롯한 장로들을 부른 이유를 알 듯했다. 남궁관수가 죽던 그 날 연우강이 말했던 천이백 만 냥. 그 돈에 대해 상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 제상,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남궁유향은 천뢰단 단주 남궁제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 세가엔 현금이 거의 없습니다. 전 재산을 다 판다고 해도 마련하기 힘듭니다.]
[파산이란 말인가?]
[ 그렇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토태세께 맡기자는 말인가?]
[ 노노태세와 허 대협은 연공자와 친분이 있는 것 같고, 가주는 잠룡 십 조 조원입니다. 맡기는 게 낫겠습니다.]
[알았네. 그렇게 하세.]
전음을 마친 남궁유향은 노노태세를 보았다.
“ 이번 일은 노노태세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
“ 남궁세가 재산을 팔아도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 가주님보다 상관인데 설마 남궁세가를 망하게 하지는 않겠지요. 저희들은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선처를 부탁하겠소, 연공자.”
자리에 일어난 남궁유향 일행은 연우강에게 포권을 취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 후려쳐!]
남궁유향 일행이 나가자 허일구는 노노태세에게 전음을 보냈다.
[ 무슨 소리야?]
[ 가격을 최대한 후려치란 말이다.]
[ 무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 그 돈 중 절반은 내 돈이잖아.]
[ 아! 그렇지.]
노노태세는 한시름 놓았다. 연우강은 잠룡쟁패를 팔아주는 조건으로 허일구에게 절반을 주겠다고 하였으니, 설사 하나에 백만 냥이라고 해도 연우강에게 지불할 금액은 오십만 냥이면 된다.
“ 연공자, 자넨 잠룡 십 조 조장인 걸로 알고 있네. 가주님은 창랑이라고 불리는 군장이고.”
“ 좋지 않은 버릇입니다. 아주머니.”
“ 무슨 말인가?”
“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한 가문이나 조직의 수장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확실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가문은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 친분과 빚을 연관짓지 말라는 건가?”
“ 그렇습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금전관계는 확실해야 하는 겁니다.”
“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노노태세는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참고로 말씀드리면 남궁세가에 오기 전에 하남 신검세가에 들렸습니다. 신검세가는 십 조 조원 중의 한 명인 유성비검 신도영의 집입니다. 이틀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고 나설 때 칠십만 냥의 외상값은 물론이고 경비로 쓰라고 오백 냥을 따로 주었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신검세가는 앞으로 크게 될 겁니다.”
“ 끄응!”
노노태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내가 방법을 가르쳐줄까?]
그때 귓전으로 처음 듣는 목소리가 전음으로 들려왔다. 느닷없는 전음에 깜짝 놀랐던 노노태세의 얼굴이 이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자신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허일삼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삼 오빠?]
그녀는 전음으로 되물었다.
[ 그래, 나다. 그동안 잘 있었느냐?]
[ 이 녀석을 보기 전까지는 아주 좋았어요.]
고향친구란 이래서 좋은 모양이었다. 수십 년 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전혀 거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 잠룡쟁패 가격을 협상 중인 거냐?]
[ 협상은 무슨 협상을 해요. 저 녀석은 말을 꺼낼 기회조차 주지 않는데.]
[ 그 녀석 성격이 원래 그렇다. 다른 면에서는 관대한데 돈 문제만큼은 손톱만큼도 양보하지 않는다.]
[ 그런데 어떻게 절 도와준다는 거죠?]
[ 일단 저녀석에게 말하고 나와라. 난 밖에 있으마.]
[ 알았어요, 오빠.]
“ 가주님과 상의를 해봐야겠, 연 공자.”
“ 시간을 달란 말입니까?”
욱일승이 가져온 차를 마시고 있던 연우강이 물었다.
“ 그렇네. 저녁 때 다시 이야기하세.”
“ 알았습니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식당 밖에는 허일삼이 내려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기분이 어떻소?”
“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네.”
“ 내 덕인 줄 아쇼.”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 그래서, 평생 동안 자넬 쫓아다니며 은혜를 갚을 생각이네.”
“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제자나 잘 키우쇼. 날 따라다니면 그나마 몇 년 남지 않은 수명도 채우지 못하고 뒈질 가능성이 크니까.”
“ 하여간 저놈의 주둥이하고는.....”
허일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식당으로 향했다.
“ 오랜만이네요. 오빠.”
허일삼이 들어가자 노노태세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 쯧! 그 곱던 얼굴이....”
허일삼은 혀를 찼다.
“ 오빠도 마찬가진 걸요. 뭐.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나니까 좋네요.”
노노태세는 빙그레 웃었다.
“ 형님! 예나 지금이나 달리는 내 겁니다. 절대 눈독들이지 마쇼.”
허일구가 허일삼을 쏘아보며 이죽댔다.
“ 아직도 달리만 쫓아다니고 있는 거냐?”
“ 내가 하오밀문 문주가 된 것도 달리 때문이오.”
“ 아무튼 너도 대단하다.”
허일삼은 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어떻게 해야 하죠?”
허일삼이 자리에 앉자 노노태세가 본론을 꺼냈다.
“ 운화가 녀석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느냐?”
“ 대충 눈치는 챘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죠?”
“ 그 녀석이 동정호가 바다라고 우기면 고개를 끄덕일 유일한 사람이 운화다.”
“ 그 정도에요?”
“ 운화가 대야벌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바로 그 녀석이었다. 일구 저 녀석이 널 생각하는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허일삼은 허일구를 가리켰다.
“ 그, 그럼 연 공자는 어때요?”
“ 형님이 보기엔 어떻소?”
노노태세의 물음에 허일삼은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욱일승을 보며 물었다.
“ 그 녀석이 속을 보이는 놈이더냐, 바로 옆에서 지켜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 그럼 모른다는 말이에요?”
“ 하지만 여잔 아주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다.”
“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 조건이 딱 갖춰졌네요.”
노노태세는 얼굴을 찌푸렸다.
“ 무슨 말이냐?”
“ 가장 이상적인 혼인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고, 그렇지 못할 경우엔 남자가 여자를 더 사랑해야 해요.”
“ 여자가 사랑해서 혼인을 하게 되면 불행해지기 쉽단 말이냐?”
“ 그래요. 더구나 사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면 밖으로 나돌게 될 거고, 그런 사내와 혼인을 한 여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 그 정도로 책임감이 없는 녀석은 아니니까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혼인시키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혼인만 시켜 놓으면 녀석의 최고의 남편이 될 거다.”
“ 그 말에 속아 일생을 망친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 그런 반면에 일구 저녀석 같은 사람도 있는 곳이 세상이다.”
“ 좋아요. 그건 그렇다 하고요. 문제는 연 공자를 혼인식장으로 끌고 가는 거잖아요.”
“ 그 일을 해줄 사람은 여기에 없다.”
“ 그럼 어디 있다는 거죠?”
“ 금릉 연씨 세가에 있다.”
“ 연공자의 부친이란 말이에요?”
“ 부친보다는 녀석의 조부와 어머니를 설득하면 된다. 그들의 부탁이라면 녀석은 절대 거절하지 못한다.”
“ 그렇다고 해도....”
노노태세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남자의 사랑이 더 지극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허일구의 관계가 지금껏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허일구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쉽게 결정 내릴 문제가 아닌 것이다.
“ 운화가 불행해질까 봐 그러는 거냐?”
“ 그래요, 오빠. 저는 남궁세가가 망하는 건 지켜볼 수 있어도 가주님이 불행해지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 조금 전에 녀석에게도 말했지만 나는 물론이고 일승 형님을 비롯한 지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 전부는 죽을 때까지 녀석을 쫓아다닐 생각이다. 그건 걱정 마라!”
“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죠?”
“ 둘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게 해야지.”
“ 가주님을 연 공자에게 딸려 보내라는 거예요?”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 형님께 뺏기고 만다.”
“ 뺏긴다는 건 무슨?”
“ 수여설이 수 형님의 조카손년데, 수 형님도 녀석을 탐내고 있는 눈치다.”
“ 눈치 정도가 아니라 기회만 생기면 방안으로 밀어 넣을 걸?”
듣고 있던 욱일승이 거들었다.
“ 내가 보기엔 별론데...”
노노태세는 고개를 갸웃했다.
“ 아무튼 운화를 딸려 보내는 건 물론이고, 녀석에 진 빚도 한 번에 주면 큰일 나.”
“ 한 번에 줄 돈도 없을 거예요.”
“ 오히려 잘됐네. 한 이십 년에 나눠 갚겠다고 해라.”
“ 그렇게 하자고 할까요?”
“ 녀석은 이자를 달라고 할 거다.”
“ 이자도 주라고요?”
“ 운화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주면 되니까 돈이 많이 들지는 않을 거다. 혼인 때 가져가는 지참금이라고 생각해라.”
“ 일단 가주님과 의논을 해보고 결정을 내릴 게요.”
“ 혼인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연우강을 따라 신강으로 갈 건지 여부하고 돈을 갚는 방법에 대해서만 말해라.”
“ 알았어요.”
노노태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정원에서는 남궁운화를 비롯한 잠룡들이 천천히 손발을 뻗어내는 동작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편에 앉아 있는 연우강에게로 향했다.
그는 인공호숫가에 놓인 정원석에 걸터앉아 뭔가를 읽고 있었다.
“ 억!”
연우강을 쳐다보던 노노태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느닷없이 연우강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그가 앉아 있던 정원석이 풀썩 주저앉아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뿌연 먼지가 그의 엉덩이 쪽에서 피어올랐다. 깔고 앉아 있던 바위가 가루로 변했다는 의미였다.
“ 왜 그러.... 일이 터졌군.”
노노태세 곁으로 다가왔던 허일삼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 저건 쇠처럼 단단하다는 천강석이에요.”
노노태세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연우강이 깔고 앉았던 돌은 전재 가주가 쇠보다 더 단단한 남궁세가를 만들겠다고 구해온 천강석이었다. 그런 천강석을 연우강은 단지 기운만으로 가루로 만들어 버린 거였다.
“ 천강석이 문제가 아니다. 저 녀석이 처음으로 화를 냈다는 게 문제다.”
허일삼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중얼거렸다.
“ 처음이 아니오, 형님. 전에 십뢰를 가지고 자살 놀이를 할 때도 녀석은 화를 냈었소.”
“ 십뢰?”
“ 그 십뢰 때문에 등천대룡 담대무궁과 구룡대군 윤허가 앉은 자리에서 오줌을 지렸소.”
“ 어떻게 했기에 그들이 오줌을 지렸단 말이냐?”
“ 그러니까...”
허일구는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 각 군장들은 이쪽으로 집합해라. 교랑 넌 영감님을 모시고 와라.”
설명이 끝나는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형님 갑시다.”
“ 그러세.”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연우강 곁으로 다가선 순간 근처에 있던 군장들과 교랑 이철상이 이자승과 함께 다가왔다. 노노태세의 말처럼 천강석이라고 하였던 돌은 가루로 변해 있었다.
“ 무슨 일인가?”
욱일승은 연우강의 손에 들린 첩지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연우강이 화를 낸 이유가 첩지 때문인 듯했다.
“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어느 걸 먼저 듣고 싶냐는 말인가요?”
수여설이 말을 받았다.
“ 그렇습니다. 수 소저.”
“ 나쁜 소식을 먼저 듣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은데요.”
“ 저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사월림 살수 이백 명과 만마림의 현의당 오백 명이 출병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더불어 칠왕의 나머지도 출타했다는 소식도 왔고요.”
“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수여설을 비롯한 군장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칠백 명.
물론 전에 나온 자들도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잠룡 십 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나오는 자들 또한 최대한 준비를 할 테고, 전처럼 쉽게 물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 겁나세요?”
“ 겁이 나는 건 아닌데, 예상보다 많은 것 같아서 그래요.”
수여설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그럼 다행이네요.”
“ 그런데 좋은 소식은 뭐죠?”
“ 우리 잠룡 십 조가 평가에서 최고를 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 그런 정보까지도 빼낼 수 있어요?”
“ 야장의 정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것까지는 빼낼 수 없습니다.”
“ 그럼 어떻게 안 거죠?”
“ 칠백 명 때문이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 아!”
수여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맺혔다. 최고 평가가 아니라면 칠백 명이나 되는 엄청난 자들이 몰려올 이유가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 이제 잠룡 십 조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대야벌로 들어가는 겁니다.”
“ 출세가 보장됐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수 소저.”
“ 하지만 칠백 명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 이번엔 노숙하면서 하는 전투는 없을 겁니다.”
“ 성 안에라도 들어가서 싸울 모양이죠?”
“ 그렇습니다. 아주 멋진 장소를 찾아냈습니다. 잠룡 십 조는 이틀 정도 거리를 두고 놈들을 유인해 오기만 하면 됩니다.”
“ 어디까지 유인해가면 되죠?”
수여설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금릉 연씨 세가까지만 유인해 오면 됩니다. 단,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 .....!”
수여설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이들 또한 황당한 얼굴을 했다. 금릉 연씨 세가라니. 그곳은 바로 연우강의 본가가 아닌가.
‘ 가만?’
수여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연우강의 입장에서는 굳이 금릉 연씨 세가를 택해 전투를 치를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연우강의 의지가 아니라 그곳에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 된다.
“ 정말 그곳이 다음 전투를 할 장소예요?”
수여설은 확인하듯 물었다.
“ 그렇습니다. 다음 전투 장소는 우리 집입니다.”
“ 정말로 우리 잠룡 십 조가 최고 평점을 받은 모양이네요.”
“ 물론입니다. 수 소저. 열 개 조 중 우리 십 조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게 확실합니다.”
“ 얼마나 있다가 가면 되죠?”
“ 제가 출발하고 난 오 일 후에 출발하십시오. 적과의 거리는 이틀 정도로 두면 될 겁니다.”
“ 적을 유인해 가는 건 직접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더 어려워요, 연 공자.”
“ 저기 있는 공공수 영감이 도와줄 겁니다.”
연우강은 창궁전 창문을 통해 이편을 쳐다보고 있는 허일구를 턱을 가리켰다.
“ 그건 걱정 말게. 하오밀문의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돕도록 하겠네.”
허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잠룡 십 조는 됐고.”
연우강은 시선을 돌려 이자승을 보았다.
“ 내게도 할 말이 있는 게냐?”
“ 철포가 필요합니다.”
“ 지금 뭐라고 했느냐?”
이자승은 깜짝 놀라 물었다.
“ 철포 오십 문에 포탄은 이천 발 정도가 필요합니다. 영감님.”
“ 철포는 시장에서 살 수 없다는 걸 모르느냐?”
이자승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철포는 장군의 이름을 부여할 정도로 황실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하는 무기다. 그런데 한두 문도 아니고 오십 문이나 구해오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 시장에서 파는 물건 같으면 영감님께 부탁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내가 구할 수 있다는 건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 구림세가의 힘으로 금의위 영반을 설득하고, 제게 남은 빚 삼백오십만 냥으로는 동창 제독을 매수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 약간의 명분만 더하면 오십 문 아니라 오백 문도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너 진심이구나.”
이자승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사실 무림 일에 철포의 등장은 결코 좋은 일이라고 할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황실에서 무림을 핍박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핍박을 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무림인들이 힘을 합쳐 조직적으로 황실에 대항하게 됨녀 득보다 실이 많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황실에서는 무림을 억압하기보다는 잘 구슬려 끌고 가는 방법을 취해왔다.
대야벌 또한 그런 이유로 인해 천오백 년 동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철포로 공격한다는 건 황실이 무림 일에 직접 개입했음을 공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었다.
“ 씨를 뿌린 자가 수확을 거둬야 하는 것처럼, 일에 대한 책임 또한 시작한 자가 져야 하는 겁니다. 영감님이 철포를 구해주지 않으면 직접 황실로 찾아갈 겁니다. 그곳에서 일천문의 철포를 구해 여양산맥 능선에 설치하여 수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을 겁니다.”
“ 황제를 협박이라도 하겠단 말이냐?”
“ 제가 전에 말했을 겁니다. 오십랑은 길을 따라 가는 게 아니고 길을 만들며 간다고요. 황실로 가는 길도 마찬가집니다. 만들고자 하면 길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아무튼 해주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연우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참! 가능하면 철포는 대설산 남쪽 입구에 가져다 놓으십시오.]
[ 대, 대설산이라고?]
이자승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사 개월 정도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 교랑! 사마, 환랑은 나와 함게 먼저 출발한다.”
전음을 마친 연우강은 일행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광랑!”
이철상은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 우리도 준비하겠네, 연 공자.”
이어 경천사마가 뒤를 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남궁운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 그동안 아주 즐거웠습니다. 남궁 소저.”
“ 괜찮겠어요?”
남궁운화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 흑랑기의 광랑은 혼자서 혈도부대 일천 명을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대야벌 전부가 달려온다고 해도 까딱없습니다.”
“ 맞아요. 연 공자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완벽한 사람이죠.”
남궁운화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
연우강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남궁운화를 보았다. 설마 남궁운화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 저기....”
“ 집안이 공격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전혀 걱정하지 않는 연 공자가 너무 부러웠나 봐요. 바쁘실 텐데 제가 추한 꼴을 보였네요. 죄송해요.”
남궁운화는 얼른 몸을 돌렸다.
떠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울 것만 같았다.
그녀는 빠르게 창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삼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 거참!”
연우강은 멀어지는 남궁운화를 멍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 준비 끝났네. 연 공자.”
“ 아! 네, 갑시다.”
연우강은 창궁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운화가 삼층 창가에 나와 있어요. 우강.]
창궁전 대문을 나서는데 옆에 따르던 몽요의 전음이 들려왔다. 연우강은 몸을 돌려 창궁전 삼층으로 시선을 던졌다.
몽요의 말대로 삼층 창가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나보고 어쩌라고?]
[ 아까 그랬잖아요. 씨를 뿌린 사람이 수확을 하는 거라고요.]
[ 나 때문이라고? ]
[ 그럼 연 공자 말고 또 있어요?]
[ 할 말이 있어야 하지.]
[ 좋은 언변 뒀다가 어디에 쓰려고 그래요. 아무튼 아무 말이나 해줘요.]
[ 그 아무 말이 오해를 불러왔다는 거 몰라요?]
[ 훗! 어찌됐든 한 마디는 해주고 가요, 이건 누나로서 명령이에요.]
[ 하여간 여자들은....]
연우강은 나직이 투덜대며 창궁전 삼층 검은 그림자를 향해 혜광심어를 보냈다.
[ 갑각류라고 들어봤어요?]
하지만 남궁운화로부터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 가재나 게 새우처럼 딱딱한 껍질을 두른 녀석들을 갑각류라고 해요. 겉보기에 그 녀석들은 아주 강한 것처럼 보여요. 껍질을 부수는 건 쉽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그 껍질에 부서지는 순간 죽게 됩니다. 그 껍질은 녀석들의 뼈 역할도 하거든요. 그래서 녀석들은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해요. 몸에 따개비도 붙이고, 해초로도 감기도 하죠.]
[ 연 공자가 그 갑각류란 말인가요?]
비로소 남궁운화의 전음이 들려왔다.
[ 그 껍질에 깨질 때를 대비해서 전 십뢰를 가지고 다닙니다. 남궁 소저.]
[ 십뢰가 뭐죠?]
‘ 헉!’
연우강은 비어져 나오려는 신음을 급하게 삼키며 빠르게 걸었다.
“ 왜 그래요?”
몽요가 연우강을 따르며 물었다.
“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몽요.”
점점 빨라지던 걸음이 경공으로 변하고 연우강의 신형은 질풍처럼 내달렸다.
“ 무슨 사고를 쳤다는 거예요?”
“ 십뢰에 대해서 허일구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 십뢰가 뭐죠?”
몽요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이야압!”
연우강의 나아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