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백수-56화 (56/232)

제 3장 일상

“ 가주님!”

커다란 보자기를 등에 진 사내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네.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부디 몸조심하게.”

연금석은 사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가 떠나보내고 있는 사람은 금릉 연씨 세가 대외 총관 노경준이었다. 오 일 전부터 조금씩 가솔들을 떠나보냈고, 마지막으로 노경준 일가를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 걱정 마십시오. 가주님. 숨어사는 데는 이골이 났으니까요. 그럼 좋은 시절이 오면 그때 뵙겠습니다.”

손을 놓은 노경준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 날 부끄럽게 만들 참인가?”

“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가주님. 가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언감생심 제가 장가라도 갔을 것 같습니까? 가주님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 이러다 밤새겠네. 어여 가.”

노경준을 일으켜 세운 연금석은 등을 떠밀었다.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가주님.”

노경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곤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 휴우, 얼마나 만날 수 있을는지.....”

노경준 일가가 어둠 속으로 잠겨들어 가자 연금석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바보 같은 녀석들. 그깟 상단주가 뭐라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으로 향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을 지나친 연금석은 금릉전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곳에 멈춰 섰다.

돈의 무덤이란 이름을 지닌 삼 층 건물인 금릉전은 연씨 세사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다. 터를 잘 잡았는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중원 최대 상단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두 동생들로 인해 세가 최대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 내 죄지, 내 죄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금릉전 안으로 들어갔다.

“ 이게 무슨 냄새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짐짓 활달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코를 킁킁댔다. 주방에서 소고기를 볶을 때 나는 냄새가 자욱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는 빠르게 걸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에서는 연금석의 부인인 이숙경이 한창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 내가 배고픈 걸 어떻게 알았소?”

연금석은 요리대 근처로 다가가며 물었다.

“ 당신 건 없습니다. 서방님.”

이숙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 내 먹을 게 아니라고? 벌써 다른 놈이 생긴 거요?”

“ 그렇습니다. 서방님. 오늘 멋진 남자가 오기로 했습니다.”

“ 이숙경 부인에게 멋진 남자라고 해봐야 우강이 녀석밖에 없는데....공연히 나 주려고 만들어놓고 우강이 핑계를 대는 거 알고 있소, 부인.”

그는 활짝 웃으며 젓가락을 들고 이숙경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 음! 진짜 맛있네.”

소불고기 한입을 입에 넣은 연금석은 오물오물 씹으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 정말 괜찮아요?”

“ 그렇소, 부인. 젊었을 때 부인이 해준 맛과 똑같소.”

“ 다행이네요. 나이를 먹으면서 간이 짜진 것 같아 걱정이 많았는데.”

이숙경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 정말 녀석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 어제 꿈에 봤으니까 반드시 올 거예요.”

이숙경은 확신하듯 말했다.

“ 설마 그래서, 저녁도 굶은 거요?”

“ 강이만 오는 게 아닙닏. 서방님.”

“ 그럼?”

“ 며느릿감을 데려올 거예요. 며느리와 상견례를 해야 하는데 배가 불러 있으면 실례잖아요.”

“ 끄응! 우리 마누라가 드디어 노망이 나고 말았네.”

“ 노망은 당신이 났죠. 자식이 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비 자격도 없다는 거 몰라요?”   이숙경은 눈을 흘겼다.

“ 대야벌에 우릴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출병시켰다는 사실을 녀석은 모르오, 부인.”

“ 당신은 강일 너무 몰라요.”

“ 그 녀석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시오.”

연금석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 강이가 머리로 글을 쓴다는 것도 모르잖아요.”

“ 머리로 글을 쓴다는 건 무슨 소리요?”

“ 손으로는 글씨를 못 쓰지만 머리로는 당신보다 열 배는 더 잘 써요. 물론, 보통 글이 아니라 전서체지만요.”

“ 설마 녀석이?”

연금석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숙경을 보았다.

“ 당신은 물론이고 아버님께도 말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나예요.”

“ 어, 어느 정도였소?”

연금석은 여전히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 세 살 때 저런 의자를 부술 정도였어요.”

이숙경은 식탁 의자를 가리켰다.

“ 맙소사! 그럼 그 친구보다 더 강했단 말이오?”

“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 끄응! 내가 아비가 맞기는 한 거요?”

“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버지, 형님에 비하면 전 아들도 아닙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연우진이 딸을 안고 들어왔다.

“ 누가 널 아들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숙경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 꼭 말을 해야 아는 겁니까. 어머닌 제게 밥 한 번 제대로 해준 적이 없잖습니까?”

“ 네 밥을 왜 내가 해주는데?”

“ 그럼 아들 밥을 어머니가 안 해주면 누가 해줍니까?”

“ 네 마누라는 어쩌고?”

“ 여진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연우진이 볼멘소리를 했다.

“ 장가를 간다는 건 어미가 해주는 밥을 더는 먹을 수 없다는 걸 뜻하는 거야. 그것도 아직 몰랐어?”

“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 잔말 말고 형이나 마중 나가, 녀석아.”

“ 형님이 언제 올 줄 알아서 마중을 나간단 말입니까?”

하지만 말과는 달리 연우진은 딸인 연화를 아버지께 넘겨주며 식당을 나섰다.

“ 올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 그리고 네 형수를 데려온다고 했으니까 옷차림에 신경도 쓰고.”

“ 연락이 왔습니까?”

“ 연락은 무슨 연락, 꿈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맞겠지.”

“ 어머니!”

“ 빨리 나가, 녀석아.”

“ 하여간 작은 아들은 섭섭합니다. 어머니.”

“ 뭐가 섭섭하단 말이냐?”

대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연운상이 연우진을 향해 물었다.

“ 작은 아들도 신경 좀 써달라고 했더니, 장가간 아들은 자식이 아니랍니다.”

“ 맞는 말 했구먼.”

“ 굶는 자식을 먹이는 건 부모의 도립니다. 할아버지.”

“ 장가를 가지 않은 상황이라면 백 번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장가를 간 자식에게 밥을 해주는 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야. 자칫 잘못하면 네 부인을 무시하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거야.”

“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 당연히 그렇지.”

“ 다녀오겠습니다.”

“ 강이 마중 나가는 거냐?”

“ 형님이 형수 되실 분을 데리고 온답니다.”

“ 네 어미가 그러더냐?”

“ 네.”

“ 끌끌끌! 그럼 머잖ㄴ아 나도 손자를 안아볼 수 있겠구나.”

“ 꿈입니다. 할아버지. 그리고 여진이도 할아버지 손녑니다.”

“ 손자는 많을수록 좋다는 말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 아무튼 다녀오겠습니다.”  “ 끌끌끌! 수고하거라.”

연운상은 싱겁게 웃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 어?”

세가를 드나들 때마다 문으로 이용했던 개구멍 앞에 멈춰선 연우강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무릎걸음으로 기어야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던 개구멍은 사라지고, 개구멍이 있던 자리엔 허리 높이의 작은 문이 달려 있었다.

“ 이곳으로 드나들어요?”

몽요는 작은 문을 보며 물었다.

“ 원래는 여기에 개구멍이 있어야 합니다. 몽요.”

“ 개구멍으로 드나들었어요?”

“ 정문으로 다니는 것보다 훨씬 편하거든요. 가솔들을 만날 일도 거의 없고요. 일단 들어가도록 하죠.”

연우강은 문을 밀어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저항 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을 연 연우강은 허리를 잔뜩 구부려 안으로 들어갔다.

“ 훗! 아무튼 연공자는 특이한 사람이에요.”

몽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연우강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개구멍과 문의 기능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만든 건데 어떻습니까?”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연우진이 다가왔다.

“ 네가 만든 거냐?”

연우강이 대뜸 물었다.

“ 굳이 개구멍을 고집하는 형님 취향을 바꾸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크게 문을 만들 수도 없으니 어떡합니까, 이렇게 만들 수밖에요.”

“ 반갑다, 녀석아.”

“ 오랜만입니다. 형님.”

두 사람은 손을 굳게 잡았다.

“ 어떠시냐?”

“ 어머닌 형님 준다고 소불고기 준비하시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자기도 신경 좀 써달라고 투덜대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대전에서 형님 기다리는 중이고요.”

“ 내가 올 걸 어떻게 알고 저녁 준비를 해?”

“ 그게 우리 어머니 불가사의 아닙니까, 형님에 관한 거라면 틀린 법이 없잖습니까. 그나저나.....”

연우강을 밀친 연우진은 몽요 앞으로 걸어갔다.

“ 동영의 은밀막부 가주이자 잠룡 십 조의 군장이다. 이곳 이름은 몽요고. 원래 이름은 쿠라다 유키다.”

“ 반갑습니다. 백제 소저. 어머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전 연우진입니다.”

연우진은 몽요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 공자 어머니께서 절 알아요?”

몽요는 깜짝 놀라 물었다.

“ 자세한 건 저도 모르비낟. 다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 무슨 소리냐?”

연우강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 어머니께서 백제 소저를 언급하셨습니다. 형님. 그보다 저분들은 소개시켜 주지 않을 겁니까?”

“ 저기 젊은 친구는 교량 이철상이고, 나이 드신 네 분은 경천사마로 불리는 강호 기인들이시다.”

“ 반갑습니다. 전 장가를 갔다는 이유만으로 가문에서 천덕꾸러기로 몰락한 연우진입니다.”

연우진은 다섯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이철상입니다.”

“ 클클클! 반갑네. 황금공자.”

이철상은 포권을 취하고 경천사마 일행은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지요.”

“ 혹시 어머니께 신내린 거냐?”

연우강은 연우진을 따르며 물었다.

“ 형님에 대한 일에만 신이 내렸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 거참!”

연우강은 고개를 갸웃하며 걸었다.

“ 원래 사람이 이렇게 없어요?”

연우강 옆에서 걷고 있던 몽요가 물었다.

주변 건물들을 보면 못 해도 수백 명은 살고 있을 것 같은 데, 마치 절간에 들어온 것처럼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폭풍이 오는 중이라서 다 내보냈습니다. 백제 소저.”

대답은 연우진이 했다.

“ 알고 있었냐?”

연우강은 놀란 얼굴로 연우진을 보았다.

“ 상단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형님이 들어간 야장에 못지않습니다.”

“ 어디로 보낸 거냐?”

“ 세월이 좋아지면 다시 부르기로 하고 일단 숨어 지내라고 했습니다.”

“ 그럼 집엔....?”

“ 우리 식구만 있습니다.”

“ 어디로 갈 참이냐?”

“ 처갓집으로 갈 생각입니다.”

“ 놈들이 시작했다면 거기도 위험하다, 우진아.”

“ 그것도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중원을 완전하게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정말로 파산하고 맙니다.”

“ 각 지점과 연락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형님. 숨어 지낸다고 해도 영업은 계속해야 하고 그들과 연락은 주고받아야 합니다.”

“ 그렇겠지. 알았다. 갈 곳은 내가 강구해 보마.”

“ 우리가 갈 곳이 있습니까?”

“ 이 형님을 믿어.”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금릉전 안으로 들어갔다.

“ 왔느냐?”

연우강이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그의 조부인 연운상이 활짝 웃으며 맞았다.

“ 왔습니다. 할아버지.”

연우강은 연운상 앞에 서자마자 절을 올리려고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 넌 지겹다. 강아.”

연운상은 벌떡 일어나서는 연우강을 지나쳐갔다. 연우강을 지나진 연운상은 몽요 앞에 멈춰 섰다.

“ 이 년 만입니다. 할아버지.”

“ 넌 하나도 안 변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고?”

연운상은 몽요의 위아래를 탐색하듯 살피며 물었다.

“ 쿠라다 유키입니다.”

몽요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 집이 동영이더냐?”

“ 그렇습니다.”

“ 올해 나이는 몇인고?”

“ .... 서른 여섯 살입니다.”

“ 서른여섯이면 딱 좋구나. 그래 혼인은?”

“ 집안 일이 바빠서....”

“ 그러니까 아직 혼자라는 말이렷다.”

“ 그렇습니다.”

“ 할아버지, 나이를 생각하십시오. 올해 구십이십니다.”

“ 나이가 무슨 상관이더냐, 이놈아. 넌 조용히 찌그러져 있거라.”

연운상은 연우강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몽요를 보았다.

“ 저녁은 먹었느냐?”

“ 오다가 육포로....”

“ 에잉! 못난 놈. 저런 걸 남자라고, 가자.”

연운상은 혀를 끌끌 차고는 몽요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 손님들께 인사는 하고 가셔야죠.”

“ 인사는 식사하면서 하면 되잖아. 모시고 오너라.”

연운상은 몽요를 데리고 횅하니 식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 하여간...”

“ 무슨 일이냐?”

식당에 있던 연금석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할아버지가 장가를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 쿡!”

연금석은 픽 웃었다.

“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 그럼 울어야 할 상황이냐?”

“ 집이 홀라당 날아갔고, 잘못하면 금릉 연씨 세가의 모든 것을 대야벌에 홀라당 넘기게 생겼는데 웃음이 나온단 말입니까?”

“ 네가 떠나기 전에 사고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 같은데, 아니냐?”

“ 전 조신하게 똥만 펐습니다. 아버지.”

“ 조신하게 똥만 펐다는 녀석이 중원 각처에 수백만 냥이나 되는 외상값을 깔아놓았느냐?” “ 아무튼 이번 일은 제 잘못 아닙니다. 우선 인사나 하십시오. 저분들은 경천사마라는 별호로 불리는 강호기인들입니다.”

연우강은 먼저 경천사마를 소개했다.

“ 이거 죄송합니다. 이 년 만에 본 자식이라 경황이 없어 결례를 범했습니다.”

연금석은 경천사마 일행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허허허! 아닙니다. 연 가주. 모처럼 웃음이 넘치는 가정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난 기운상이라고 합니다.”

만겁신마 기운상은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수백 명에 달하는 가솔을 전부 내보내고, 가족만 몇 명 남은 상태다. 조금 전 연우강의 말에 의하면 저들 또한 중원에서 갈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얼굴에서 어두운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연우강의 동생이라는 연우진도 그렇고, 조부인 연운상, 그리고 녀석의 아버지와 이 와중에 아들이 돌아온다면 식사 준비를 하는 어머니까지.

마치 눈앞에 닥친 불행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놀라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었다.

“ 난 방세남입니다.”

“ 난 남도욱입니다.”

남도욱은 포권을 취하고 난 후 궤짝을 내려놓았다.

“ 처음 뵙소이다. 지철입니다.”

“ 전 조장님을 모시고 있는 이철상입니다. 가주님.”

“ 허허허! 반갑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연금석은 경천사마와 이철상을 안내하여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는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식당으로 들어선 기운상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연우강과 그의 조부, 그리고 나중에 들어온 연우진은 식탁 의자에 앉아 있고, 연우강의 어머니로 보이는 부인은 접시에 음식을 담고, 몽요는 그것들을 식탁에 놓고 있다. 마치 일을 끝내고 돌아온 남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평범한 농가의 일상을 보는 것처럼 식당 분위기는 평온해 보였다.

“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연금석은 빈자리를 가리켰다.

“ 아! 네.”

퍼뜩 정신을 차린 기운상 일행은 연금석이 가리킨 자리로 앉았다.

“ 이건 어디에 놓을까요?”

몽요는 커다란 접시를 든 채로 이숙경에게 물었다. 소고기 야채볶음이 담김 접시였다.

“ 두 개를 놓을 거예요, 몽요.”

“ 알았습니다.”

몽요는 접시를 연우강 앞쪽으로 놓았다. 그녀가 접시를 놓는 사이 이숙경은 다른 접시를 기운상 일행 앞으로 놓자 식사 준비가 끝났다.

“ 계속 앉아 계실 거예요?”

이숙경은 각자의 옆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연금석에게 눈치를 주었다.

“ 나가서 기다리라고?”

“ 식사는 마음이 편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해지잖아요.”

이숙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술이라도 마시면 안 될까?”

“ 그건 나쁘지 않겠네요.”

“ 우진아, 술 내오너라.”

“ 알겠습니다. 아버지.”

연우진이 식당 안쪽으로 술을 가지러 가는 사이 이숙경은 술잔을 꺼내 물로 씻었다.

“ 제가 놓을게요.”

술잔이 놓이고 이숙경과 몽요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잘 먹겠습니다. 어머니.”

연우강은 활달하게 소리치며 젓가락을 들었다.

“ 떠나기 전에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숙경은 빙그레 웃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일행은 식사를 했다.

“ 그런데 여진이 엄마가 안 보이네?”

문득 생각난 듯 연우강은 연우진을 보았다.

“ 고 총관과 함께 절강성으로 갔습니다.”

“ 은신처를 알아보기 위해 간 거냐?”

“ 네.”

연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절강성에서 은밀하게 숨어 있을 만한 곳 있어요?”

“ 우리 걱정은 말고 너나 잘해라.”

연금석은 연우강의 시선을 피했다.

“ 누구냐?”

안쪽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기운상이 날카로운 눈으로 밖으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 신경쓰지 마시오, 영감.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들어와.”

연우강은 손을 저으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식당 안으로 검은색 옷을 걸친 노인이 들어왔다. 그는 다름아닌 귀노 염자생이었다.

“ 뭐야 그건?”

연우강은 염자생의 왼팔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의 왼팔이 있던 자리엔 빈 소매만 덜렁거리고 있었다.

“ 사유라 그 계집을 쫓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염자생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 내가 그건 잊어버리라고 했잖아.”

“ 처음엔 그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장주님이 떠나고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 사유라를 쫓았단 말이야?”

“ 그렇습니다.”

“ 결과는 그거고?”

“ 그렇습닏. 엄청난 자들이었습니다.”

“ 그들의 정체는 알아냈어?”

“ 밀천이란 말만 들었습니다.”

“ 쯧! 살아난 것만 해도 천운이었네.”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밀천을 아십니까?”

“ 천오백 년 전 존재했던 영세오천의 한 곳이 밀천이야. 대야벌을 세웠던 자들이기도 하고.”

“ 그럼 제가 엄청난 곳으로 들어간 셈이군요.”

“ 아무튼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앉아.”

“ 오랜만입니다. 가주님.”

염자생은 연금석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염 공, 술 한잔 받으시지요.”

연금석은 웃으며 술잔을 건네주었다.

“ 감사합니다.”

“ 우선 제 제집에 가 계십시오. 아버지.”

“ 네 집이 어딘데?”

연금석은 뚱한 얼굴로 물었다.

“ 아들 집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 그 아들놈은 아비에게 지가 사는 집도 안 가르쳐 주더구나.”

“ 항주에 있다는 건 어머니는 아시는데요.”

“ 네 어미는 네 녀석이 손보다는 머리로 글을 더 잘 쓴다는 것도 오늘 말해 준 사람이다.”

“ 그러게 평소에 잘하셨어야죠. 아무튼 제 집에 가 계십시오. 그곳에서 며칠만 있으면 아버지를 모시고 갈 사람이 올 겁니다.”

“ 어디로 가라는 거냐?”

“ 그건 그 사람에게 들으면 됩니다.”

“ 알았다. 그런데......”

“ 말씀하십시오.”

“ 여긴 어떻게 할 거냐?”

“ 우리 집을 말하는 겁니까?”

“ 그래.”

“ 놈들을 맞을 준비를 해놓은 거 아닙니까.”

“ 그 준비는 네가 올 걸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거다.”

“ 아버지가 생각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래야, 놈들을 속이기도 편하고요.”

“ 놈들이 속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 이곳을 주춧돌까지 날ㄹ버리면 처음엔 의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단이 숙부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그땐 의심을 거둘 겁니다. 아버지가 움직여야 할 때는 그때부터입니다.”

“ 얼마나 걸릴 거라고 보느냐?”

“ 활동 시기가 되면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끄응! 술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아버지. 기왓장까지 전부 똑같은 걸로 해서 다시 지어드릴 테니까요.”

“ 네 돈으로?”

“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벌써 그만 먹는 거냐?”

별로 먹지도 않았는데 연우강이 일어나자 이숙경이 물었다.

“ 귀노에게 줄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먹을 겁니다. 어머니.”

연우강은 귀노에게 눈짓을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 선물이라도 가져오신 겁니까?”

“ 저기 궤짝 들고 따라와.”

연우강은 남도욱이 내려놓은 궤짝을 가리키며 제 거처로 향했다. 그의 거처는 금릉전 뒤편에 위치한 이 층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연우강은 벽에 들린 유등에 불을 밝혔다. 불이 환하게 밝혀지자 주변 전경이 드러났다. 수년 동안 비워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깔끔하게 청소가 돼 있었다.

“ 여기 내려놔.”

연우강은 탁자 위를 가리켰다.

“ 좋은 선물인가 봅니다. 장주님.”

염자생은 웃으며 궤짝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탁자 앞으로 다가간 연우강은 아래쪽에 있던 자루를 옆으로 빼냈다. 그러고는 궤짝을 열었다.

“ 자루 안에 보면 무기 다섯 개가 있어. 그 중에서 표면에 광인이라고 적인 도가 있을 거야.”

연우강은 궤짝 안쪽에 있던 물건을 한편으로 꺼내 놓은 다음 안쪽의 뚜껑을 열고 비급을 꺼냈다.

“ 광인이라면 혹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놈입니까?”

자루 안쪽을 쳐다보던 염자생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 파천육기 아니냐고?”

“ 네!”

염자생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맞을 거야. 천오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거니까.”

“ 맙소사.”

염자생은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파천육기. 수천 년 동안 무림에 회자됐을 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기다. 그 때문에 지금은 파천육기에 대한 전설이 허구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런데 그 전설의 무기가 눈앞에 실제한 거라니.

“ 이건 광인으로 펼치는 도법.”

연우강은 구유잔백일천도라는 제목이 씌어 있는 양피지 비급을 염자생에게 내밀었다.

“ 왜?”

염자생은 비급을 받을 생각도 못하고 연우강을 멍하니 보았다.

“ 무슨 말이 그래?”

“ 왜 제게 주시는 건지 그걸 알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 싫어?”

“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염자생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 뭘 알고 싶은데?”

“ 이건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장주님. 저 같은 놈에게 줄 물건이 아니란 말입니다.”

“ 좋아, 그럼 대답해 봐. 내가 그걸 누구에게 줬으면 좋겠어?”

“ 장주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친분이 유달리 돈독한 사람, 줘도 후회하지 않을 그런 사람에게 줘야....”

“ 그 사람이 귀노야.”

“ 네?”

“ 귀노.”

연우강은 염자생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말씀하십시오.”

“ 방금 귀노도 봤겠찌만 저 안에는 다섯 자루의 무기가 있고, 내 엉덩이에는 묵사가 있단 말이야.”

“ 파천육기가 전부 장주님께 있단 말입니까?”

염자생은 얼이 빠진 얼굴로 물었다.

“ 파천육기뿐만 아니라 묵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비급도 있어. 그런데 말이야....”

“ 그런데요?”

“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것들을 줄 사람이 없더라고. 내 무공이 형편없었더라면 내가 익혔겠지만, 귀노도 알다시피 난 혼자서 혈도부대를 몰살시킬 정도로 강하잖아.”

“ 그래도 익히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 최강의 무공이 있는데 굳이 다른 무공을 익히는 건 시간낭비야. 그럴 시간에 본인이 알고 있는 무공을 더 원숙하게 펼칠 수 있도록 다듬는 게 훨씬 나아, 안 그래?”

“ 그, 그렇습니다. 장주님.”

“ 바로 그거야. 귀노, 파천육기와 다섯 권의 비급을 얻었는데, 슬프게도 선물해 줄 사람이 없더라고. 그래서 저렇게 들고 다니는 거야.”

“ 그렇다고 해도 절 주는 건.....”

느닷없이 찾아온 기연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가 않았다.

“ 이런 바보 같은 녀석..... 안 되겠다. 도로 줘.”

연우강은 제 머리를 툭 치더니 염자생의 손에서 비급을 빼앗아 갔다.

“ 줄 사람이 생각났습니까?”

“ 아냐.”

“ 그럼?”

“ 익힐 지산도 없는 사람에게 이런 비급을 주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 그런 걸 돼지 목에 진주라고 하지?”

“ 그렇다고 줬다가 도로 빼앗아 가는 법이 어딨습니까?”

“ 익힐 자신이 없으면서 구유잔백일천도를 갖겠다는 건 욕심이야, 귀노. 이건 줄 사람을 찾아보던지 아니면 버리도록 하자고.”

“ 익히면 될 것 아닙니까?”

염자생은 연우강의 손에서 다시 비급을 빼앗아 갔다.

“ 익혀낼 자신은 있어?”

“ 익히지 못하면 장주님 앞에서 제 목을 자르겠습니다.”

“ 정말?”

“ 맹세하겠습니다.”

“ 좋아. 그럼 안에서 광인을 꺼내.”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상자 안을 뒤적거렸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가 들려 나왔다.

“ 이것도 받아.”

연우강은 주머니를 염자생에게 주었다.

“ 이건 뭡니까?”

“ 영약 수준은 아니고 복용해서 내공으로 만들면 일이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거야.”

“ 무슨 약이 이렇게 많습니까?”

주머니 안에는 작은 상자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 장사를 하게 되면 저저롤 굴러들어오는 것들이야. 전부 다 복용한다고 해도 이십 년의 공력도 안 돼.”

“ 그거라도 어딥니까?”

염자생은 헤벌쭉 웃으며 주머니를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 어디 보자, 광인이라는 놈은?”

자루 안에서 광인을 꺼내는 염자생은 긴장했다.

광인의 도갑은 검은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붉은색도 아닌 두 색이 미묘하게 뒤섞여 마치 피가 굳기 직전에 나타나는 색처럼 보였다.

그는 천천히 광인을 뽑았다.

스르릉!

“ 헉!”

도신이 절반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진득한 살기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비단 그것뿐만 아니었다. 도면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척!

염자생은 다시 광인을 밀어 넣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광인을 뽑는 게 불가능할 듯했다.

“ 구유잔백일천도를 어느 정도 익혀야 광인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그 정도로 강해?”

“ 뽑아보지 않으셨습니까?”

“ 응!”

“ 이놈은 마병입니다.”

“ 그렇겠지. 천마를 배출한 지천의 지존신물이니까, 아무튼 구유잔백일천도를 익히는 데 집중해.”

연우강은 염자생이 탁자에 놓아둔 비급을 턱으로 가리켰다.

“ 이건 제가 읽을 수 없는 글입니다. 장주님.”

비급의 글이 전서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 전서체는 어머니가 아시니까 해석해 달라고 하면 될 거야.”

“ 전서체를 그분께 배우신 겁니까?”

연우강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글이 전서체라는 사실이 떠올라 물었다.

“ 내가 전서체만 쓰니까 어머님도 배우신 거야. 그리고 시간 나면 그 도갑에 있는 광인이란 글은 지워.”

“ 감사합니다. 장주님.”

염자생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 우리 가족을 지켜달라고 주는 거니까 감격해할 필요 없어.”

“ 걱정 마십시오. 장주님. 그분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모시겠습니다.”

“ 나가자고.”

거처를 나선 두 사람은 금릉전으로 향했다.

“ 허허허! 아가야, 내 잔이 비었다.”

금릉전 입구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연운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신났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 어서 오너라, 염 공. 자네도 이쪽으로 오게.”

연우강과 염자생이 들어서자 연운상은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 어디까지 했느냐?”

연운상은 술을 따르고 있는 몽요를 보며 물었다.

“ 나이 이야길르 하다가 마셨어요.”

“ 맞다. 나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나이란 말이다. 숫자에 불과한 거야.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네가 잘 이끌어 주면 백년 해로는 문제 없을 거야.”

“ 쯧! 도망치는 사람이 맞는지....”

연우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식당으로 향했다.

“ 네가 오니까 아버짐이 기분이 좋은신 모양이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이숙경은 웃으며 연우강을 맞았다. 그녀는 연우강이 앉자마자 데우고 있던 소고기 볶음을 식탁 위로 내려놓고 연우강 건너편에 앉았다.

“ 난 마음에 드는데?”

“ 뭐가요?”

연우강은 젓가락을 들며 어머니를 보았다.

“ 내게 데려온 신붓감 말이지.”

“ 신붓감이라고요?”

“ 그럼 아냐?”

“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세요. 어머니. 몽요는 동영 은밀막부의 가주라고요. 가주가 뭔지 모르세요?”

“ 동영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이냐?”

“ 당연히 그렇죠. 가주가 집안을 떠나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어요. 어머님께는 죄송하지만 전 앞으로도 계속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싶습니다.”

“ 이 에미를 기쁘게 해주려고 하는 말이라면 잘못 골랐다. 난 내가 해준 밥을 네가 맛있게 먹는 것보다 네 자식을 안아보는 게 더 기쁠 것 같구나.”

“ 아무튼 혼인은 멋 훗날 이야기니까 너무 앞서가지 마세요. 공연히 몽요에게 부담도 주지 마시고요.”

“ 알았다. 밥이나 먹어라.”

이숙경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왜 그러세요?”

연우강은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며 물었다.

“ 문득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 뭐가요?”

“ 어쩌면 너처럼 뻔뻔해질 수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는 거다.”

“ 제가 뻔뻔해요?”

“ 그럼 아냐?”

“ 어떤 면에서요?”

“ 넌 지금 우릴 몽요 소저에게 맡길 생각이잖아.”

“ 엥?”

연우강은 깜짝 놀란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설마 어머니가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넌 이 이위에 있어.”

이숙경은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 참! 이거요.”

연우강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활짝 편 이숙경의 손바닥 위로 놓았다.

“ 전표네?”

“ 어머니께 처음 드리는 돈이네요.”

“ 얼만데?”

“ 이백만 냥이에요.”

“ 똥지게만 진다고 하더니 돈을 정말 많이 번 모양이구나.”

“ 몽요가 홀대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중에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건 천지 차이입니다. 귀노에게 부탁해서 전부 금으로 바꾸세요. 그리고 아버지 모르게 혼자만 가지고 계시고요.”

“ 딴주머니를 차라는 말이냐?”

“ 딴 주머니 하나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 할 연세가 되셨습니다.”

“ 그런데 정말로 동영까지 가야 할 정도냐?”

“ 사고를 크게 쳐야 할 것 같아서요.”

“ 얼마나 크게 칠 생각인데?”

“ 받은 대로 돌려줄 생각입니다.”

“ 중원에 남아 있다가는 네가 낳은 손자를 안아보지도 못하겠구나.”

“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 이거 먹어라!”

이숙경은 젓가락으로 소고기 중 가장 큰 한 점을 골라 연우강의  입 앞으로 들이밀었다.

“ 힘내서 싸우라는 말입니까?”

“ 이왕 시작했으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해줘야 한다. 아니 눈을 맞출 수조차도 없게 해줘야 해. 연우강의 연 자만 들어도 줄행랑을 놓도록 해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내 꼴통 고집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어머니였네요.”

“ 내가 꼴통이란 말이냐?”

“ 그럼 대야벌을 다시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박살내라는 분이 정상입니까?”

“ 그래서 자신 없다는 말?”

“ 이숙경 여사의 아들인데 자신 없다는 말을 하면 안 되죠.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가 흡족해 하실 정도로 해 놓겠습니다.”

“ 도망치는 걸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 하다가 안 되면 도망치라고요?”

“ 당연히 그래야지. 안 되는 줄 알면서 매달리는 녀석처럼 바보천치는 없다.”

“ 흐흐흐! 역시 내 성격은 어머니를 닮은 게 맞네요.”

연우강은 키들키들 웃으며 젓가락을 놓았다.

“ 음식은 오 일 치를 해두었다. 귀찮다고 굶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먹어.”

“ 알았습니다. 어머니. 일어나시죠.”

연우강은 이숙경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전 쪽 또한 술자리가 파한 듯 일행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이게 전부냐?”

연우진 옆에는 보자기 세 개가 놓여 있었다.

“ 옷가지만 챙겼습니다.”

“ 잘했다. 여행은 돈만 가지고 하는 거야.”

연우강은 보따리 두 개를 걸머졌다. 일행은 금릉전을 나와 연우강이 드나들던 쪽문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 네 침상 옆에 보면 붉은색 실이 하나 있을 거다.”

쪽문 앞에 도착하자 연금석이 나직이 말했다.

“ 도화선입니까?”

“ 거기에 불만 붙이면 연씨 세가는 잿더미로 변하게 될 거다.”

“ 극진한 대접이 되겠군요.”

“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해서 보내는 건 연씨 세가의 전통이다.”

“ 표물을 나를 땐 대운표국을 통하십시오. 아버지.”

“ 대운표국 국주를 잘 아느냐?”

“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 알았다. 고려해 보도록 하마. 그럼 잘 있거라.”

연금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 몽요 처자, 몸조심해.”

“ 아가야, 너도 몸조심하거라.”

“ 형수님, 몸조심하십시오.”

이숙경과 연금석 그리고 연우진은 연우강을 쳐다보지도 않고 몽요에게만 인사를 하고 쪽문을 나섰다.

“ 난 완전 찬밥이네.”

“ 제가 있습니다. 장주님!”

염자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귀노, 부탁해.”

연우강은 보자기를 건네주었다.

“ 걱정 마십시오, 장주님.”

염자생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염자생을 따라 쪽문을 나선 연우강은 멀어지는 가족들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 접대 잘해라!”

멀리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 아주 극진하게 대접해서 정중하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우강은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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