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
가족을 떠나보낸 연우강은 일행과 함께 다시 금릉전으로 들어왔다. 안쪽엔 조금 전 술자리를 가졌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연우강은 조부가 앉았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 교랑!”
먹다 남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가며 이철상을 불렀다.
“ 하명하십시오, 광랑.”
“ 전에 말했던 그 진식 말이야.”
“ 전 진식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이철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 불안전한 진식이라고 했던 거 있잖아. 팔괘로 시작하는 꽤나 거창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이철상은 벽으로 걸어갔다.
“ 우린 여길 치우자고.”
연우강은 마시고 있던 술병을 비롯하여 안주를 담았던 접시들을 포개 식당으로 들어갔다.
“ 제가 치울게요.”
남은 음식을 버리고 접시를 설거지통에 넣고 씻으려고 하는데, 몽요가 연우강의 손에서 수세미를 빼앗아 갔다.
“ 은밀막부 가주가 설거지 해본 적이나 있어요?”
“ 군에 있게 되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잖아요.”
“ 맞다. 전쟁터에서 살았다고 했지.”
연우강은 식탁에 엉덩이를 걸친 채 가지고 들어왔던 술병을 흔들어 술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했다. 몇 개를 확인하자 비로소 술이 들어 있는 술병이 나왔다. 그는 곧장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 우강은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몽요는 접시를 씻어 선반으로 올리며 말했다.
“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 뭘요?”
“ 이런 부잣집 업둥이로 들어온 것 자체가 운을 타고난 거라고요.”
“ 하지만 부잣집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전부가 좋은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 그렇죠. 아미 친부모라고 해도 그분들처럼 해주진 못했을 거예요.”
“ 연 공자 성격이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던데요.”
설거지를 끝낸 몽요는 손을 닦고 일어났다.
“ 저도 오늘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 이제 일도 끝났고, 집 좀 구경시켜 주시죠?”
“ 기꺼이.”
연우강은 고개를 숙이며 오른손을 내밀어 먼저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전에서는 이철상이 그림 앞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잠시 지켜보던 연우강은 몽요를 데리고 금릉전을 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이 건물마저도 집어 삼켜버린 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감고 있다가 뜨자 비로소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연우강이 몽요를 처음 데려간 곳은 그의 처소였다.
“ 이곳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도 여기서 보냈어요.”
“ 업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몽요는 의아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지금껏 연우강은 우연히 연 씨 세가로 들어온 운 좋은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말을 한 것이다.
“ 내 친어머니 얼굴을 보여줘요?”
“ 그, 그래요.”
몽요는 여전히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일단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집안으로 들어간 그는 일층 벽에 걸려 있는 유등을 들고 안쪽 깊숙이 들어갔다.
일층 대전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바닥을 향해 발을 가볍게 굴렀다.
푸스스!
가로 세로 반 장 정도 되는 나무판이 가루로 변하면서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 이번에 들어오면 네 번째네요.”
처음엔 어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왔고, 두 번째에는 군에 가기 전에 그리고 세 번째에는 군에 다녀와서다. 물론 그때도 전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 업둥이란 사실이 싫어서 일부러 들어오지 않았던 건가요?”
“ 그런 셈이죠. 이곳은 내가 업둥이란 증거가 있는 곳이니까요.”
처음엔 그랬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게 되자 이번엔 친아들보다 자신을 더 끔찍하게 챙겨주시는 어머니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 유등이 필요 없겠는데요.”
몽요는 안쪽을 가리켰다. 계단 아래쪽에는 문이 또 하나 달려 있었는데 문틈 사이로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명주가 달려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은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몽요의 예상대로 안쪽은 야명주가 빛을 발하고 있어 굳이 유등이 필요 없었다.
“ 이번에 네 번째라는 건 거짓말이죠?”
“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 안쪽에 먼지 한 톨 없잖아요. 몇 년 동안 비워두었으면 먼지가 뿌옇게 내려.... 그분이 청소를 하셨군요.”
문득 연우강의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이라면 백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모양이네요.”
연우강은 북쪽 벽면의 제단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단 위에는 연꽃으로 만들어진 향로가 있고 향로보다 조금 위쪽엔 위패가 놓여 있었다.
연우강은 위패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선망임부주공선엽영가.
선망자모유씨은설영가.
행우강복위.
“ 불교식 위패네요.”
“ 그런가요?”
“ 네, 저기 영가는 불교 용어인데 영혼을 뜻하는 말이에요.”
“ 친아버진 부하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공격으로 돌아가셨고, 친어머닌 절 낳고 다음날 돌아가셨거든요. 두 분 다 객사를 하신 셈이라 어머니께서 불교 식 위패를 모신 모양이네요.”
“ 원래 성이 주 씨에요?”
“ 친부가 주씨니까 그렇겠죠.”
“ 주 씨면 명나라에서는 최고 성인데, 혹시 황족?”
“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 원래 위패에는 성 앞에 본관을 쓰거든요. 그런데 저기는 없잖아요.”
“ 양민이니까 없겠죠.”
“ 양민이라고 해도 성이 있다는 건 본관이 있다는 말이에요. 우강, 본관을 쓰지 않는 경우는 보통 신분을 숨기고 싶을 때 그렇게 하는 거라고요.”
“ 죽은 자의 신분을 숨겨서 뭐 하게요?”
“ 남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곤 해요. 남은 사람은 보통 자식이고요.”
“ 아무튼 갖다 붙이는 데는 이겁니다.”
연우강은 피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뭐, 어때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몽요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제단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향로 옆에 준비돼 있는 향을 조금 집어 향로 안에 집어넣고는 삼매진화로 불을 붙였다.
“ 처음 뵙겠습니다. 아저씨 아주머니! 전 쿠라다 유키고 올해 서른여섯 살입니다. 쓰러져 가는 가문의 가준데 어떻게 하다 보니 우강하고는 친해졌고, 또 잠도 자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생각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부디 극락왕생 하세요.”
몽요는 위패 앞에서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 무슨 인사가 그래요?”
연우강은 어이없는 얼굴로 몽요를 보았다.
“ 두 분은 귀신이잖아요.”
몽요는 배시시 웃었다.
“ 귀신?”
“ 귀신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속여봐야 소용없잖아요. 절이나 하세요.”
“ 쿡!”
연우강은 향을 향로 안에 집어넣고는 제단을 향해 절을 올렸다.
“ 지금보다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절을 마친 그는 위패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내공을 주입했다.
푸스스스!
그의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흘러나오고 위패는 가루로 변해 떨어져 내렸다.
“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몽요는 연우강을 가만히 쳐다보며 물었다.
“ 마땅히 둘 데가 없잖아요. 집을 잃고 떠나는 어머니께 드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간직하는 것도 그렇고요. 서로를 놓아주는 게 좋아요. 그만 올라가요.”
손을 탁탁 턴 연우강은 일층으로 올라왔다.
“ 그런데 아까 우강 아버지가 말했던 도화선이라는 건 뭐죠?”
문득 조금 전 연금석이 떠날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도화선에 불이 붙으면 금릉 연씨 세가는 잿더미로 변한다고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 금릉 연씨 세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확약이 우리 발 밑에 묻혀 있다는 뜻입니다.”
“ 화, 화약이라고요?”
몽요는 경악했다. 설마 금릉 연씨 세가에서 대야벌의 공격에 대비하여 그런 준비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간 쓸개를 빼놓은 채 항상 굽실거리는 삶을 살지만, 정말로 화가 나면 적과 함께 죽을 수 있는 자들이 상인입니다.”
“ 그럼 대야벌은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네요?”
“ 그렇죠.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죠.”
“ 그보다 욕실은 어디죠?”
몽요는 대전을 둘러보며 물었다.
오자마자 저녁을 먹고, 연우강 가족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씻지도 못했던 것이다.
“ 이쪽으로 오십시오. 욕조에 물이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연우강은 몽요를 왼편 끝으로 안내했다.
연우강이 몽요를 안내한 곳에는 허리 높이의 탁자가 놓여 있고, 그 탁자 위에 있는 화병에는 활짝 핀 작약 한 송이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여깁니다.”
연우강은 탁자 옆에 있는 문을 열었다.
“ 와!”
안쪽을 쳐다보던 몽요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유백색 대리석 욕조 안에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은 울창한 수림으로 우거져 있고, 그 수림 사이에서 시원한 바람이 욕실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몸을 돌린 그녀는 욕조 안에 손을 넣고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곧 물 위로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 우강, 갈아입을 옷 있으면 하나만 주세요.”
그녀는 옷을 벗으며 말했다.
“ 몽요가 입을 만한 옷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 옷이 마를 동안에만 입고 있으며 되니까 아무거나 주면 돼요.”
“ 어릴 적 입은 잠옷은 남아 있을 겁니다.”
연우강은 유등 거는 자리에 등을 걸어 놓고 욕실을 나갔다.
“ 이런 멋진 곳을 태워버린다니 아쉽긴 하네.”
몽요는 안타까운 얼굴로 욕실 안쪽을 둘러보았다. 상당 기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욕실 안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오른편 벽면에 선반 위에는 팥이나 녹두 등의 곡식을 빻아 만든 조두가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 호호호호!”
그녀는 코웃음을 흘리며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전에 연우강 집 부엌 선반이 떠올랐다. 남자치고는 제법 정리를 잘해두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에 있는 걸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선반 아래쪽에는 커다란 물통이 따로 있고, 물통 옆에는 빨래를 할 수 있는 돌이 놓여 있는데 표면이 울퉁불퉁 솟은 그것 또한 욕조와 마찬가지로 대리석이었다.
몽요는 옷을 벗어 돌 위에 올려놓고 물을 끼얹었다. 그러고는 조두를 듬뿍 뿌려 빡빡 문질러 빨았다.
“ 아무리 무인이라고 하지만 아직....”
줄줄 흘러내리는 구정물을 보며 몽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바가지로 물을 퍼 행군 다음 다시 조두를 뿌려 뿌렸다.
“ 빨래하는 여자가 미치도록 아름다워 보이기는 또 처음이네요.”
뒤에서 연우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몽요는 활짝 웃었다. 그녀는 몸을 자극적으로 틀며 빨래를 했다.
“ 끄응! 요물! 옷은 어렸을 때 입은 잠옷박에 없네요. 여기 두겠습니다.”
“ 전에 했던 약속 오늘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요?”
“ 어떤 약속.....?”
연우강은 눈이 부셔 말을 잇지 못했다. 희미한 유등 아래 드러난 몽요의 몸매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갑자기 가슴이 무섭게 뛰며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갑자기 가슴이 무섭게 뛰며 아래로 피가 쏠렸다.
“ 함께 목욕하기로 했잖아요.”
“ 사마와 이철상이 잠잘 곳을 마련해 주고 와야 합니다. 몽요. 함께 목욕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갈아입을 옷은 여기 두겠습니다.”
연우강은 싱긋 웃으며 잠옷을 한편에 놓았다.
“ 전 어디서 자죠?”
“ 여기 이층이죠. 어디겠습니까?”
“ 우강도?”
연우강을 보는 몽요의 얼굴에 어떤 기대가 어렸다.
“ 이층에 선물 있는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 선물이라고요?”
“ 도로 사망궤 안에 집어넣을까요?”
“ 아니에요. 얼른 씻고 올라가 볼게요.”
몽요는 얼른 욕조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 나갈 때 물 채워놓고 가세요.”
“ 알았어요.”
몽요는 활달하게 소리치며 몸을 씻었다.
“ 어떤 선물일까,.......”
그녀는 조두를 잔뜩 비비며 머리를 감으며 중얼거렸다. 전에 속옷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거래의 일환이었을 뿐 엄밀하게 따지면 선물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로 선물을 받게 될 듯했다.
“ 무기만 아니면 뭐라도 상관없어.”
그녀는 빠르게 손을 놀려 몸을 씻었다.
“ 아니지?”
찬물을 끼얹어 마무리를 하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 어쩌면 함께 잘지도 모르는데 대충 씻고 나갈 수는 없잖아.”
몽요는 배시시 웃으며 다시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허공섭물을 이용하여 선반에 있던 조두를 전부 끌어당긴 그녀는 하나씩 냄새를 맡아보았다.
“ 이게 좋겠네.”
그녀는 장미향이 나는 조두를 골랐다. 곡식가루와 장미가루를 석어 만든 조두였다. 그녀는 조두를 물과 함께 비빈 다음 온몸을 꼼꼼하게 씻었다.
한식경에 걸쳐 목욕을 한 그녀는 욕조 아래쪽에 있는 배수구를 통해 물을 빼고는, 선반 아래쪽 통에 있던 깨끗한 물을 다시 채워넣었다.
연우강이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낸 뒤 그가 두고 간 천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 풋!”
잠옷을 걸친 몽요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얇안 비단으로 지은 잠옷은 장포처럼 걸치게 돼 있었는데, 소매는 반을 잘라낸 것처럼 짧았고, 허리에는 여밀 수 있도록 재질로 만든 허리띠가 달려 있었다.
더불어 아랫단은 상당히 짧아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보인다. 아마도 여름 잠옷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몸에 착착 감기는 비단의 촉감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허리를 여민 몽요는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싸서 둥글게 말아 묶은 다음, 목욕 전에 해 두었던 빨래를 탁탁 털어 의자 등받이에 널었다.
“ 선물이라...”
빨래를 전부 넌 몽요는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이층은 단출했다. 왼편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대전 형태의 작은 공간이 있고, 오른편 끝에 문이 나 있었다. 연우강의 침실로 통하는 방문인 모양이었다.
실내를 가로지른 그녀는 곧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물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방안을 살필 겨를도 없이, 창문 아래쪽에 있는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비급으로 보이는 책 십여 권과 도로 보이는 무기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도갑을 흘끔 쳐다보았다.
천오백 년 전에 씌었던 전서체로 환백이란 글이 씌어져 있었다. 아니 소환백과 똑같이 생긴 도라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그런데....
“ 복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년이 선물은 무슨... 지지리 복도 없는 년.”
아마 몇 달 전 같았으면 미쳐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천오백 년 만에 환백을 찾아냄음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으로부터 속옷을 받았을 때보다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탁자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자기 설움이 밀려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흑!”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탁자에 얼굴을 묻고는 펑펑 울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울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금릉전으로 갔던 연우강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그녀는 얼른 눈물을 훔쳐내고는 몸을 일으켜 침상으로 향했다.
“ 평생 선물이라곤 검밖에 받아보지 못한 년이 다른 걸 기대한다는 게 이상한 거지. 쿠라다 유키라는 이름을 버릴 때부터 정해진 인생이었는데.”
실컷 울어서인지 갑자기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침상으로 몸을 뉘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연우강이 들어왔다.
그는 검은 옷을 벗고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 울었어요?”
연우강은 몽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왜 그렇게 생각해요?”
“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
“ 울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연 공자잖아요.”
“ 그런가......참! 선물은 봤어요?”
“ 네, 고마워요. 연공자 덕분에 우리 가문은 은밀막부를 완전하게 장악할 수 있게 됐네요. 환백을 찾아주면 평생 종이 되겠다고 했으니까, 가문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약속을 지키도록 할게요.”
“ 종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몽요, 몽요는 제게 주기로 했던 돈마 주면 됩니다. 그런데 기쁘지 않아요?”
침상에 걸터앉은 연우강은 몽요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기, 기뻐요.”
“ 파라구천일도류도 있는데.”
“ 비, 비급을 제대로 살펴보질 못해서..”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져 몽요는 연우강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시야에 침대 옆 협탁이 눈에 들어왔다. 침상 높이와 같게 만들어진 그것은 방안을 밝히는 유등을 놓는 탁자였다.
“ 혹시 내부를 내부를 투시하는 무공을 익혔어요?”
“ 그런 무공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몽요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대답했다.
“ 그런데 선물을 어떻게 확인한 거죠?”
“ 탁자 위에 두었잖아요. 제가 눈뜬 장님인 줄 아세요?”
“ 탁자 위에 있는 비급하고 환백은 저번에 부탁했던 거잖아요. 부탁했던 걸 선물로 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 그럼?”
“ 거기 유등 아래쪽에 있잖아요.”
몽요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녀는 황망히 눈물을 닦아내고는 유등 아래를 보았다. 연우강의 말처럼 그곳엔 붉은 비단으로 싼 상자 형태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 저, 저게 선물이라고요?”
그녀는 확인하듯 물었다.
“ 열어보세요.”
연우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몽요는 벌떡 일어나 상자를 바짝 끌어와 비단 천을 풀었다. 천 안에서 나온 건 아주 고급스럽게 보이는 상자였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 맙소사!”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상자가 아니었다. 뚜껑은 완전하게 열리는 형태가 아니라 한쪽 끝이 고정된 채 안쪽 면에 동경이 붙어 있다.
상자 안쪽에는 머리빗과 비녀 그리고 여인네들이 얼굴을 꾸밀 때 쓰이는 화장품과 화장도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은 여자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경대였다.
몽요는 떨리는 손으로 빗을 집어 들었다.
살행에 거치적거린다며 머리를 짧게 자른 이후로 빗으로 머리를 빗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손가락으로 쓱쓱 쓸어내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분첩을 비롯한 갖가지 화장품들, 만화은신사영을 펼쳐야 하는 자신에게 냄새를 풍기는 화장품은 치명적인 약점이 됐다.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는, 그게 바로 화장품이었다.
그런데 그 화장품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 돌아앉아 봐요.”
몽요는 말없이 돌아앉았다.
연우강은 몽요의 머리를 감싼 수건을 풀었다. 그러자 목선에 맞춰 잘린 짧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연우강은 몽요의 손에서 빗을 가져와 천천히 빗겨 내렸다.
“ 머릿결이 아주 고와요.”
“ ......”
눈가에 맺혔던 물방울이 또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 이젠 동생에게 맡기고 몽요의 삶을 살도록 해보세요. 머리도 길고, 화장도 하고..”
“ 멋진 남자도.”
“ 다 빗었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몽요.”
연우강은 빗을 경대 안으로 집어넣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 호호호! 우강은 겁쟁이에요.”
몽요는 경대의 뚜껑을 닫고 협탁 위로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제가 겁쟁이란 말입니까?”
“ 아닌가요?”
몽요는 도발적인 표정으로 여미었던 허리띠를 풀었다. 그러자 잠옷이 풀어헤쳐지며 알몸이 드러났다. 유등에 비친 그녀의 알몸에서는 광채가 나는 듯했다. 그녀는 연우강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연우강의 옷을 벗겨냈다.
“ 제가 책임지라고 할까 봐 잔뜩 겁먹었잖아요.”
“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는 겁니까?”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손끝으로 몽요의 가슴 골을 쓸었다.
“ 그럼 책임질 거예요?”
“ 이십 년을 기다리여 하는데, 그때도 괜찮다면.”
가슴에 머물던 연우강의 손이 겨드랑이로 숨고,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몽요는 무릎을 꿇은 채 엉덩이를 들어 연우강의 옷을 벗겨냈다.
“ 책임 못 진다는 말이 아니라서 기분은 좋네요.”
연우강의 옷을 벗겨낸 몽요는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차갑고 뜨거운 느낌이 동시에 입술을 점령했다. 그녀는 연우강의 혀를 열렬히 맞았다. 등줄기를 타고 배회하는 연우강의 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몽요는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몽요의 얼굴에 어떤 기대가 어렸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가 번쩍 눈을 떴다.
등에서 시작한 느낌이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몽요는 거칠게 연우강의 혀를 탐닉했다. 엉덩이를 움켜쥐었던 왼손이 다시 허리를 더듬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거칠게 뛰는 심장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몽요는 입술을 떼며 몸을 활처럼 뒤로 젖혔다.
“ 가장 갖고 싶었던 거였어요.”
그가 수만 냥에 달하는 보석을 선물해 주었다고 해도 이렇게 기쁘지 않을 테다. 화장품이 가득 든 경대를 선물해 주었다는 건, 그의 말처럼 이제는 여자처럼 살아보라는 말이다. 그런 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고마웠다.
“ 내 삶에서 가장 큰 행우는 당신을 만난 거였어요. 우강.”
몽요는 달뜬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연우강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최고의 남자였다. 아마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연우강 같은 남자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몽요는 신음을 뱉어내며 거칠게 움직였다. 마지막 잎새를 부여잡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그를 탐닉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이어지던 육체의 향연이 멈춘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 이제 약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은데요?”
몽요는 차가운 물수건을 만들어와 연우강의 몸을 닦아주었다.
“ 약은 제 생명숩니다. 건강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그러다가 무공보다 정력이 더 강해지겠네.”
“ 건강이 무공을 쫓아가려면 약을 백년 동안 더 복용해도 안 됩니다.”
“ 피이! 끝까지 건강이래.”
몽요는 눈을 흘겼다.
“ 수건 이리 줘봐요.”
벌떡 몸을 일으킨 연우강은 수건을 빼앗아 들고는 몽요의 등을 닦았다. 등을 다 닦고 나자 몽요는 그 자리에 누웠다.
“ 쩝!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
연우강은 아쉬운 얼굴로 몽요의 나신을 내려다보았다.
“ 호호호!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 정말입니다. 몽요.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좀더 붙잡아둘 생각이었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이죠?”
수건이 겨드랑이 쪽으로 오자 몽요는 나른하게 팔을 들어올렸다.
“ 가족들을 동영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해서요.”
“ 정말?”
몽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중원에서 대야벌의 이목을 피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몽요. 그리고 아버진 계속 상단을 운영해야 하고요.”
“ 그러니까 중원 밖에 있으면서 중원과 연락을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곳이 필요하다는 말이네요?”
“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봤을 때 중원에 거점을 두고 있는 은밀막부가 최적이었습니다.”
“ 저를 혼자만 데려온 것도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고요?”
“ 네.”
“ 하지만 이곳에서 가족들이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대야벌 수뇌들은 믿지 않을 텐데요?”
그 또한 문제였다. 이곳을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위장하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 연우강 가족들의 시체가 나오지 않는다면 대야벌 수뇌들은 연씨 상단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될 테고, 연금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른 방도를 강구할 것이다. 그렇게 됐을 경우를 가정하고 묻는 말이었다.
“ 화약으로 이곳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 그냥 불을 지르려는 것과 다르다는 건가요?”
“ 화약은 양민들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몽요. 화약이 폭발해 금릉 연씨 세가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하면 가장 먼저 관부에서 조사를 나오게 됩니다. 더구나 금릉 연씨 세가는 보통 가문이 아니잖아요.”
“ 상부에서 조사를 나온다는 말인가요?”
“ 그렇습니다. 최소한 금의위나 동창에서 조사를 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우진의 옷을 걸치고 있는 시체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물론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 좋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 두 숙부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곳으로 오면서 들은 말에 의하면 대야벌 수뇌들이 금릉 연씨 세가를 공격할 생각을 한 건 연은석, 연동석 형제 때문이라고 하였다.
가주인 연금석과 그의 아들 연우진 그리고 태상가주인 연운상이 죽고 나면 금릉 연씨 상단의 상속자는 두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연우강이 있기는 하지만 연은석이나 연동석이 인정하지 않으려 할 테고 대야벌의 힘을 등에 업은 두 숙부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된다.
그들에 대한 처리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 연씨 상단을 워하는 곳은 대야벌만이 아닙니다.”
“ 황실에서도 연씨 상단을 원한단 말인가요?”
“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연씨 상단이 대야벌 휘하로 들어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습니다.”
“ 그럼?”
“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우진이 죽어서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 이곳을 조사하던 관부에서 두 숙부를 연행해 간다는 거예요?”
“ 그랬으면 좋겠는데....”
연우강은 말끝을 흐렸다.
“ 아버지께 말씀드릴 때는 그분들이 황실로 압송돼 간 후에 활동하시라고 했잖아요.”
“ 사실을 말할 수는 없잖습니까?”
“ 황실로 압송되기 전에 죽는단 말이군요.”
“ 업둥인 가족이 될 수 없는 게 맞나 봅니다.”
연우강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 아버지, 형님, 그리고 조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 자는 이미 가족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런 자는 죽어도 싸요.”
“ 그럴까요?”
“ 제 말이 맞아요. 연 공자. 그건 그렇고, 부모님 모시는 일을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겠죠?”
몽요는 화제를 돌렸다.
“ 저 탁자 위에 있는 것들은 부탁의 대가로 준비한 겁니다.”
연우강은 뒤편에 있는 비급과 환백을 가리켰다.
“ 전 저것들을 구해주면 돈을 준다고 했는데요?”
“ 그럼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 바로 우강, 당신.”
몽요는 연우강의 목을 끌어당겼다.
“ 지금은 당신이 필요하다고요.”
그녀는 순식간에 자세를 바꿔 연우강 위로 올라가며 속삭였다.
“ 일회성 대가는 오히려 손해일 텐데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으며 상체를 세워 몽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호호호! 그건 우강의 생각이고요.”
몽요는 교소를 터뜨리며 입술을 축였다.
두 번째 열풍은 더욱 거칠고 강하게 몰아쳤다. 이번을 끝으로 동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몽요는 미친 듯이 연우강을 탐했다.
물수건으로 닦아냈던 몸에 다시 땀방울이 맺히고, 이불까지 홍건하게 젖을 정도로 둘은 서로를 갈구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그녀는 쪽문을 통해 금릉 연씨 세가를 나섰다. 쪽문을 나선 그녀의 어깨에는 천으로 친친 동여맨 환백이 매어져 있었고 환백 아래쪽에서는 비급이 든 보자기가 달랑거렸다.
“ 휴우!”
걸음을 옮기는 몽요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고 금릉 연씨 세가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녀는 소중한 물건을 가진 것처럼 뭔가를 꼭 안고 있었다.
“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우강, 설사 중원을 다시 밟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간직할 게요.”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