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좋은 동행.
놀랐던 것도 잠시 담대민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지금껏 그는 천리지청술을 펼치고 있었고, 담 위로 솟구친 네 명을 제외하곤 어떤 기척도 들려오지 않는다.
대야벌 서열 백 위인 막장과 연우강 그리고 노인 두 명, 저들이 전부라는 뜻이다.
“ 네 아비와 어미는 어디 갔느냐?”
담대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 매년 백만 냥씩 뇌물을 바친 대가가 멸문지화라면 좀 심한 거 아냐?”
연우강은 되물었다.
“ 뇌물을 바치는 걸로 끝났어야 했다. 그 이상을 원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멸문한다.”
“ 우리 가문이 그 이상 뭘 했다는 거지?”
“ 네가 황실의 끄나풀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연우강.”
“ 내가?”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부정해도 소용없다.”
“ 그러니까 담대만승 그 개새끼가 잠룡들을 강호로 내보내고, 무면천군단이라는 개종자들을 시켜서 우리 집을 공격한 이유가 황실 때문이었다는 뜻이구나.”
“ 죽일 놈!”
연우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질 급한 몇몇이 박차고 몸을 날렸다.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린 자는 다섯 명이었다.
“ 클! 싸움을 거는 방법도 참 특이하네.”
혈수참마 남도욱이 낮게 웃으며 몸을 날려오는 자들을 향해 양손을 쭉 내밀었다.
“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모시던 분을 개새끼라고 하면 나라도 참지 못할 겁니다.”
야수마인 지철은 양손을 거칠게 휘두르며 남동욱의 말을 받았다.
붉은색과 푸른색 강기가 몸을 날려오는 무면천군단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손바닥 형태의 붉은 강기는 혈천장이고, 손을 구부리고 있는 형태의 푸른색 강기는 지철의 청랑조였다.
장인 형태의 강기 세 개와 조 모양의 강기 두 개가 차가운 기운을 쏟아내며 무면천군단 다섯 명의 가슴으로 향했다. 무면천군단 무인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다.
카카캉!
섬뜩한 소성과 함께 무면천군단 무인들의 무기가 부러져 나갔다.
“ 헛!”
“ 헉!”
무면천군단 무인들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설마 자신들의 무기가 부러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은 탓이다. 상대방의 실력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공격을 감행한 대가는 참혹했다.
혈천장의 장인과 청랑조의 조가 무면천군단 다섯 명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할퀴었다.
퍽! 퍽퍽퍽! 퍽!
“ 크악!”
“ 아악!”
“ 으아악!”
혈천장에 당한 세 명은 장인 형태의 흔적과 함께 가슴이 함몰됐고, 청랑조에 당한 두 명의 가슴은 맹수의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깊게 파여 있었다. 한순간에 시체로 변한 다섯 명의 신형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 죽일 놈들! 쳐라!”
부하들의 죽음에 분기탱천한 조일관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 차앗!”
“ 타앗!”
기다렸다는 듯 무면천군단 무인들은 몸을 날렸다.
“ 캬캬캬!”
“ 크크크!”
남도욱과 지철의 눈에서 새파란 광채가 쭉 튀어나왔다. 혈천장과 청랑조를 보았으니, 그 무공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놀라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살기를 흘리며 미친 개처럼 돌진해 온다.
극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대야벌이 얼마나 강하다고, 대야벌 무인이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 전부 내 거네, 연 공자!”
“ 자넨 절대 나서지 말게!”
두 사람은 진득한 살기를 쏟아내며 몸을 날려오는 자들을 향해 쌍장을 거칠게 뿌렸다. 혈천장이, 청랑조가, 청랑마권이 사방으로 쏘아지고, 무면천군단 무인들의 몸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피가 비처럼 흩뿌려지고, 갈가리 찢긴 살점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기운상과 방세남 그리고 무면천군단을 도살하고 있는 두 사람을 합쳐, 하늘도 놀라 네 명의 마인이라는 경천사마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남도욱과 지철은 지랄발광이 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 우리도 해야지?”
연우강은 허리춤에 있는 묵사를 뽑아 들었다.
“ 검술도 익힌거냐?”
“ 잔챙이들을 상대하는 데 굳이 검술이 필요해?”
“ 그럼?”
“ 이놈만 있으면 되잖아.”
연우강은 묵사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마치 묵사가 두꺼운 갑옷을 걸친 것처럼 두꺼워지고 커졌다.
그의 강기가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 마구 휘두르겠다는 말?”
“ 그럴 수는 없지. 내 발자국을 정확히 밟으면서 따라와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은 아래로 몸을 날려갔다.
휙!
“ 무슨 소리냐?”
막장은 연우강을 따르며 물었다.
“ 내 발자국을 따르다 보면 진기가 알아서 움직일 거야. 그 움직임을 따라 패왕수라권을 펼쳐.”
“ 무슨 소리냐니까!”
막장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면천군단의 비명이 대신했다.
연우강이 바닥을 다지며 나아가면서 묵사를 휘두르기 시작하자, 좌우 측에서 시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빌어먹을 자식.”
막장은 욕설을 뱉어내며 연우강이 나아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일부러 그런 듯 연우강이 지나간 자리엔 깊숙이 파인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막장은 그 발자국을 밟으며 나아갔다.
우르릉!
서너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단전이 울렁이며 진기가 용암처럼 솟구쳐 올랐다. 막장은 깜짝 놀라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무면천군단 무인에게 일검을 허용할 뻔했다.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는 패왕수라천경의 진기와 같으면서도 또 달랐다.
[ 놀라지 마라. 우물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니까.]
연우강의 전음을 귓등으로 흘리며 그는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인 동작이었지만 마침 용암처럼 솟구쳐 올랐던 지닉가 오른팔로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팔 상박과 하박을 겨처 손 끝에 이른 진기는 패왕수라권과 합쳐지더니 화살처럼 튀어나갔다.
퍼억!
“ 크악!”
검을 아래로 내리그으려고 하던 무면천군단 무인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뒤편으로 훨훨 날아갔다.
“ 이건?”
막장은 깜짝 놀랐다.
방금 펼친 패왕수라권은 육 성 정도였다. 그런데 십이 성 전력을 펼칠 때와 비슷한 위력을 냈다.
[ 정신 차려라, 막장. 이 보법은 멈추면 안 된다.]
또다시 연우강의 전음이 들려오자 그는 연우강이 남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몸을 날렸다.
연우강의 말대로였다.
발자국을 따라 몸을 날리자 새로운 히이 단전에 생성됐고, 그 힘은 엄청난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막장은 양팔로 유입된 진기를 외부로 쏟아냈다.
그의 양손이 움직일 때마다 푸른 광채가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맙소사.”
막장은 경악했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연우강이 보여주었던, 그 현상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기존의 패왕수라권에 보법에 의해 형성된 진기가 더해지며 순간적으로 압축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 좋다.”
그는 헤벌쭉 웃으며 더욱 빠르게 연우강의 발자국을 따라 몸을 날렸다.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진기가 양팔로 향하자 막장은 거침없이 휘둘렀다.
적이 존재 유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막장의 머릿속에는 깊숙이 나 있는 연우강의 발자국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발자국을 쫓아가며 양손을 휘둘렀다. 막장의 수준 역시 거의 지랄발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남도욱과 지철이 있는 곳에서, 연우강이 있는 곳에서 그리고 막장이 있는 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 이럴 수가.......”
담대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복면 안쪽의 입을 쩍 벌어져 닫힐 줄을 몰랐다.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무면천군단은 대야벌 최강 세력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개개인의 무공은 물론이고 은신술에서 합격진까지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기량을 갖춘 자들로 편성했고,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런 그들이 저렇듯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이 꿈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더구나 상대는 기껏 네 명.
현실에서,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후퇴하라! 후퇴하라!”
십여 장 후미에서 조일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대민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몸을 날렸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삼분의 이가 몰살을 당하고 남은 자는 백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전투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다시 오겠다. 연우강. 천상천 무인 전부를 동원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쓸어버리겠다.”
담대민은 이를 부드득 갈며 왔던 길을 따라 몸을 날렸다. 저 앞에는 무면천군단 십여 명이 달려가고 있었다.
담대민은 고개를 돌려 뒤편을 보았다.
연우강 일행은 도망치는 자들을 쫓아 살겁을 자행하고 있었다.
으드득!
남대민은 또다시 이를 갈았다.
그는 건물 처마 밑에 달려 있는 유등이 밝혀주는 길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어느덧 멀리 금릉 연씨 세가의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 억!”
“ 헉!”
앞서가던 부하들의 신음이 들려오자 담대민은 나아가는 속도를 올리며 물었다.
“ 기, 길이 사라졌습니다. 단주님.”
“ 길이 사라져?”
담대민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가 나아가는 사이에 대문을 열었던 무면천군단 무인 몇몇이 담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 맙소사!”
담 위로 올라갔던 자의 입에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휙!
담 앞에 당도한 담대민은 지면을 차고 날아올랐다.
“ 이건?”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트막한 동산과 무릎 높이 정도 자란 말로 가득했던 밭은 사라지고, 시계가 전혀 나오지 않는 안개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담대민은 고개를 돌려 조금 전 달려왔던 길을 보았다. 처마 밑 유등이 그대로고, 그 유등 빛이 비추는 건물과 같이 길은 그대로였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진식이군.”
담대민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진식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연우강을 비롯한 막장의 행동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편으로 도망치는 걸 연우강이나 막장이 모를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이 쫓아오지 않았다는 건 그럴 필요성이 없다는 뜻이었다.
“ 어떻게 할까요?”
무면천군단 무인 한명이 물었다.
담대민은 갈등했다.
금릉 연씨 세가가 넓다고 하지만 자신은 처음 들어왔고 연우강은 어린 시절부터 살아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곳이다. 설사 숨는다고 해도 금새 발각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진식 안으로 무작정 뛰어들 수도 없는 일이었다.
“ 크악!”
“ 아악!”
“ 으아악!”
어둠을 뚫고 메아리처럼 비명이 들려왔다.
담 위에 있던 담대민 일행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금 전 한참 흥분했을 때도 많은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비명이 아니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비명에 깃든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자가 느끼는 불안, 공포, 두려움이 마치 실제 당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 크아악!”
“ 빌어먹을!”
휙!
담 위에 있던 무면천군단 한 명이 욕설을 뱉어내며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 같이 가세.”
뒤이어 다른 무면천군단이 뛰어들고, 그것을 신호탄으로 정문 앞에 있던 무면천군단 전원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담 위에는 담대민 혼자만 남았다.
“ 아아악!”
움찔!
담대민은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비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한 순간에 죽임을 당할 때는 놀란 듯한 비명을 지르고, 약간의 고통이 수반될 때는 놀란 듯한 비명을 지르고, 약간의 고통이 수반될 때는 비명이 조금 길어진다. 그리고 지금처럼 길고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은 반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혼이 조금씩 빠져나갈 때 지르는 비명이다. 즉 짐승에게 팔이나 다리부터 차례로 씹힐 경우에 나오는 비명이라 할 수 있다. 연우강 놈이 무면천군단 무인들을 그렇게 짓이겨 죽이고 있다는 뜻이다.
“ 미친놈을 잘못 건든 셈인가?”
담대민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전쟁터에서 오 년을 보냈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들이 그렇듯, 대충 세월만 보내다가 온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놈은 달랐다.
무면천군단 무인들을 잔인하게 죽여 그들이 내뱉는 비명만으로 살아 있는 무면천군단의 전의를 빼앗고 있다.
전쟁을 아는 놈이었다.
“ 아아악! 그 마아아안! 크아악!”
“ 하지만.....”
휙!
“ 나도 만만치 않다, 연우강.”
안개 속으로 뛰어든 담대민의 목소리가 여운처럼 담 주변을 맴돌았다.
“ 미친놈!”
막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따. 연우강 주변에는 걸레처럼 찢겨나간 시체가 즐비했다. 도망치던 자들 중 담을 넘지 못하고 연우강에게 당한 자들이었다.
“ 전쟁은 소꿉장난이 아냐, 죽이지 못하면 죽는 곳이 바로 전쟁이다. 막장. 전쟁터에서 어줍잖은 인정은 사치일 뿐이다.”
“ 그들은 반항할 힘조차 없는 자들,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 줄 수도 있었네.”
연우강의 말에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남도욱이었다. 별호에 마 자를 달았고, 평생 마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연우강처럼 적을 걸레처럼 찢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연우강은 팔을 뜯어내고, 머리를 뜯어내면서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지옥을 뛰쳐나온 야차가 있다면 연우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난 편하게 전쟁을 치르고 싶을 뿐이오, 영감. 자비는 적을 완전하게 박멸한 다음에 그때 베푸는 거요. 적이 단 한 명이라도 살아 있다면 자비는 사치요.”
“ 저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이유가 도망친 자들 때문이란 말인가?”
“ 무공의 고하를 떠나 가장 중요한 건 싸우겠다는 의지, 즉 사기요, 사기가 떨어진 무인보다 사기충천한 병사를 상대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오, 영감.”
“ .....”
남도욱은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진식을 설치했기 때문에 무면천군단 무인들은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무면천군단 무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다는 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시체는 그대로 두시오. 그보다, 다 암기했냐?”
연우강은 막장을 보며 물었다.
“ 맞다. 그걸 물어본다고 해놓고는. 뭐냐, 그건?”
“ 내가 먼저 물었잖아. 인마.”
“ 내가 천재냐?”
“ 진식 안으로 들어간 이철상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주마. 그때까지 무조건 암기해.”
연우강은 금릉전으로 가며 말했다.
“ 그게 뭐냐고 물었잖아.”
“ 이름이 중요해?”
“ 이름을 알면 더 확실하게 동기부여를 할 수 있잖아.”
“ 어쭈! 동기부여란 말도 아네?”
연우강은 놀랍다는 듯이 씩 웃었다.
“ 난 그런 말 좀 쓰면 안되냐?”
“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지. 아무튼 이철상이 나오면 지울테니까 그 전에 전부 암기해.”
“ 동기부여 안 해줄 거야?”
“ 이미 몸으로 알아차리지 않았어?”
“ 물론 엄청난 보법이라는 건 알지. 하지만 보법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을 것 같아.”
“ 많이 늘었어.”
“ 자꾸 헛소리할래?”
“ 네가 젊었을 때 얻고 싶어했던 그거야. 단전에서 불쑥 솟구친 그놈의 움직임은 검법이고.”
“ 그, 그거라고?”
막장은 우뚝 멈췄다.
“ 일천 보를 전부 암기하려면 시간이 부족할지도 몰라, 막장.”
“ 너, 너 이 자식!”
막장은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젊은 시절에 그렇게 얻고자 했던 무공이라면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밖에 없을 터였다. 발자국이 찍힌 장소에 당도한 막장은 곧바로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갔다.
“ 저게 뭔가?”
뒤쳐져온 남도욱이 신중한 얼굴로 나아가고 있는 막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 암기를 날리는 방법.”
“ 무면천군단이 오기 전에 막장 저 친구에게 보여주었던 그걸 말하는 건가?”
“ 맞아, 영감. 기존에 익힌 내공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익혀도 상관없을 거야.”
“ 이름이.....”
남도욱은 궁금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혼.”
연우강은 시큰둥하게 말하고 금릉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금릉전 담을 넘어 시체들이 날아왔다.
그때까지도 남도욱과 지철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와 지철은 조금 전 연우강의 말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
지난 천오백 년 동안 대야벌의 전설이 됐던 무공.
수많은 무인들이 그 무공을 찾기 위해 대야벌을 샅샅이 뒤졌다고 하였고 심지어 그걸 찾기 위해 일행을 허비한 자들도 있다고 하였다. 두 무공이 워낙 유명하여 대야벌 소속 무인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저 발자국들이 그 무공이란다.
“ 넌 믿어지냐?”
남도욱은 지철을 보며 물었다.
“ 확인해 보면 되잖습니까?”
지철은 연우강이 찍어놓은 발자국으로 몸을 날렸다.
우르릉!
십여 걸음 걷자 곧바로 단전에서 반응이 왔다.
“ 미치겠군.”
지철은 걸음을 멈췄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밀려왔다. 그때 뒤따라온 남도욱이 옆에 섰다.
“ 안 가냐?”
“ 이건 단순한 무공이 아닙니다. 형님.”
“ 일천독행신은 영세오천 중 상천의 최고 무공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막내야.”
“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형님.”
“ 그럼?”
“ 이건 족쇄입니다.”
“ 족쇄?”
남도욱은 의아한 얼굴로 지철을 보았다.
“ 이걸 익히는 순간, 우린 연 공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 형님도 말했지만 이건 상천의 최강 무공입니다. 그런 무공을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전수해 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 연 공자는 익혀도 좋다고 한 것 같은데, 아냐?”
“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것을 익힐지 여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연공자는 지금처럼 어정쩡한 관계가 아닌 좀더 확실한 관계를 요구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좀더 확실한 관계라면 뭘 말하는 거지?”
“ 주종관계를 말합니다.”
“ 그러니까 저걸 익히면 우린 그 녀석의 종이 돼야 한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그를 주군으로 모셔야 합니다.”
“ 지금은 그 녀석과 우린 어떤 관계지?”
남도욱은 지철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그가 가립하 조사님의 제자라는 인연 말고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떠나고 싶은 땐 아무 때나 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 떠나고 싶어?”
“ 아직은 아닙니다.”
“ 앞으로 떠날 계획은 있어?”
“ 그건 모르겠습니다.”
지철은 고개를 저었다.
“ 봐 가면서 결정하겠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그 녀석이 이런 숙제를 낸 거잖아, 자식아.”
“ 전 심각합니다. 형님.”
“ 넌 매사에 심각하잖아.”
“ 하지만 이번 일은 우리 일생이 걸렸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 일생?”
“ 그렇습니다. 형님.”
“ 너 올해 몇 살이지?”
“ 제 나이도 모릅니까?”
“ 네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묻는 거다.”
“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까?”
“ 넌 아흔다섯 살이고 난 아흔아홉이다. 막내야.”
“ 그래서요.”
“ 백 살이 다 돼가는 놈들은 우리 일생이 걸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너와 난 아니 우리 경천사마는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시기가 아니라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정리하는 시기다. 난 녀석과 함께 내 삶을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연 공자의 부하가 되겠다는 말입니까?”
“ 글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 같구나.”
“ 무슨 말입니까?”
“ 친구나 부하나 동료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내가 녀석의 부하가 된다고 해도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지만 설사 어른이 된다고 해도 이익 볼 것도 없잖아. 우린 그냥 좋은 동행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냐 이거지.”
“ 좋은 동행이라고요?”
“ 그렇지. 욱일승이나 수천월 그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난 이걸 익혀볼 참이다.”
남도욱은 지철을 밀어내고는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 좋은 동행이라.....”
지철은 연우강이 들어간 금릉전으로 시선을 주었다.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녀석은 가립하 조사의 제자고, 흑천의 지존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묵사까지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게 더 짜증났다.
물론 녀석이 묵사의 주인이자 가립하 조사의 제자라는 이유를 들어 어떤 요구를 했더라면 진작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어떤 요구를 하여 흑천에 대한 연대감을 강조해 주기를 바랐다.
녀석이 어떤 요구를 하면 잔뜩 거만을 떨며 흑천에 대해 설명도 해주고, 자연스럽게 흑천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따라다녔던 것인데, 녀석은 어떤 요구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천의 최고 무공인 일천독행신을 자신들 앞에 떡하니 내놓은 것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었다.
“ 영감!”
문득 뒤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철은 고개를 돌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막장이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왜 그러는가?”
“ 세상을 별로 오래 살진 않았지만,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놈치고 성공해서 잘사는 꼴을 본 적이 없소.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산다고 그러쇼.”
막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철을 지나쳐 갔다.
“ 빌어먹을 놈!”
지철은 막장을 노려보다가 첫 발자국이 찍힌 곳으로 걸어갔다.
“ 일천보를 전부 암기하려면 대가리 처지도록 해야 하오, 영감.”
“ 좋다, 좋은 동행이다.”
지철은 피식 웃으며 오른발을 힘껏 내딛었다. 세 사람은 미친 듯이 발자국을 따라 몸을 날렸다.
진식을 확인하러 들어간 이철상이 나오기 전까지만 시간을 준다고 하였던 연우강의 말 때문이었다.
다행히 세 명은 이철상이 나오기 전에 일천보를 암기할 수 있었다.
진식 안으로 들어간 이철상이 돌아온 건 새벽, 연우강이 몸풀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연우강은 몸풀기를 멈추고 이철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철상은 전날 점심 무렵에 진식으로 들어갔다. 그랬던 그가 얼굴이 반쪽이 돼 나온 것이다.
“ 누가 보면 여기 있는 놈들을 전부 죽인 사람은 우리가 아니고 너라고 하겠다.”
“ 놈들이 공격해 온 겁니까?”
“ 삼백 명이 왔다가 칠십 명 정도는 진식 안으로 도망쳤다.”
“ 그럼 오늘밤이나 돼야 나오겠군요.”
이철상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 어떻게 된거야?”
연우강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끊임없이 이어진 늪입니다.”
“ 늪이라고?”
“ 그렇습니다. 진식으로 생성된 안개는 단순한 안개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천중수 안에서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 꼴이구나. 진식을 빠져나오는 곳은?” “ 정문이 있는 곳을 통해 나오는 길이 유일합니다.”
“ 진식을 구축했던 곳이 출구란 말이야?”
“ 그렇습니다.”
“ 수고했어. 들어가 쉬어.”
“ 알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이철상은 금릉전 안으로 들어갔다.
“ 잠룡이 저 정도면 무면천군단은 거의 초죽음 상태로 나오겠네?”
근처에서 몸풀기를 하고 있던 막장이 연우강 곁으로 오며 말을 걸었다.
“ 생각보다 일이 편하게 끝날 것 같다.”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철상은 팔괘만상미혼대진을 이렇듯 넓은 장소에 펼친 건 처음이라고 하였다. 진식 안으로 들어간 적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휙! 휙!
바로 그때 금릉전 담을 넘어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시체를 구하기 위해 나갔던 기운상과 방세남이었다.
“ 여자 셋만 간신히 구했네. 그런데 무면천군단이었는가.”
“ 그렇소.”
고개를 끄덕인 연우강은 막장을 보았다.
“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거냐?”
“ 안에 들어가면 옷이 있어, 남자 옷 세 벌과 여자 옷이야.”
“ 가져오라고?”
“ 가져와서 입혀.”
“ 네 가족으로 위장할 셈이냐?”
막장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 그럴 생각이다.”
연우강은 금릉전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면천군단 시체들이 있는 곳에 발을 멈춘 그는 손을 꼼꼼하게 살피고 다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 우진이와 비슷한 손을 가진 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 어떤 시체를 찾는가?”
뒤따라온 기운상이 물었다.
“ 첫째는 이십 대와 육십대 이상의 손을 가진 시체를 찾아야 하고, 둘째는 손바닥에 못이 박혀 있으면 안 되오. 그리고 세 번째는 손발톱이 깨끗한 자라야 하오.”
“ 들었느냐?”
기운상은 동생들을 향해 말을 건네고는 시체들을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한식경 정도를 헤매고 다닌 그들은 간신히 연우강이 말한 조건에 합당한 시체 세구를 찾아냈다.
시체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옷을 벗겨내고 막장이 꺼내 놓았던 옷으로 갈아입혔다.
“ 젊은 녀석은 여자아이를 안고 있어야 하고, 젊은 여자는 늙은 여자와 서로 껴안은 상태, 늙은이 둘은 한 명이 다른 한명을 보호하는 형태로 포개면 돼.”
“ 장소는?”
막장이 물었다.
“ 금릉전 일층.”
“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막장은 젊은 청년의 시체와 여자아이를 허공섭물로 들어올려 안으로 들어갔다.
“ 그건 계단 쪽으로 놓으면 돼.”
그렇게 말하고 연우강은 네 구의 시체를 마라천력으로 들어올려 막장을 따랐다. 안으로 들어온 그는 잠시 내부를 둘러보다가 부엌 근처에 여자 시체 두 구를 놓고, 중앙에 남자 시체 두 구를 놓았다. 그러고는 묵사를 뽑아 들고 막장이 있는 계단 쪽으로 갔다.
“ 세워!”
“ 뭐 하려고?”
“ 금의위나 동창을 우습게 보면 안 돼. 그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라도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말아.”
“ 검상을 만들어놓겠다는 거야?”
막장은 여자아이를 안은 상태가 된 시체를 세웠다.
번쩍!
그가 시체를 세우자마자 묵사가 사내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러고는 다시 여자아이의 등을 파고 들어가 머리가 떨어져나간 사내의 몸까지 뚫었다.
막장은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시체를 놓았다.
털썩!
“ 아주 자연스러워.”
바닥으로 쓰러지는 시체를 지켜보던 연우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아이를 잡은 사내의 손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연우강은 여자아이의 시체 등에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끌어올렸다.
쩌엉!
그의 손이 새햐얗게 변하고, 여자아이와 사내의 시체가 얼음으로 변했다. 그런 다음 떨어져 한편에 구르고 있는 사내의 머리는 혈잔수를 펼쳐 가루로 만들어 흔적을 지워버렸다. 계단 쪽 작업을 마친 그는 부엌에서 안고 있는 여자 시체 두 구도 묵사로 찔러 동시에 죽은 흔적을 만든 다음 목을 자르고 백옥수를 펼쳐 시체를 보호하고 혈잔수로는 머리 두 개를 가루로 만들었다.
“ 주도면밀하군.”
지켜보던 기운상은 감탄사를 흘렸다.
지하에는 금릉 연씨 세가를 재로 만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화약이 매설돼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우강은 꼼꼼하게 가족들의 대역을 만들고 있었다.
일 처리 하는 모습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연운상과 연금석의 대역이 될 시체를 정리하는 걸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 그건 무슨 무공인가?”
기운상은 의아했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상식으로는 극양과 극음의 무공을 한 사람이 익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연우강은 극음의 무공으로 시체를 얼리고, 다시 극양의 무공을 펼쳐 잘라놓은 머리를 가루로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선천지기를 내공으로 만들 수 있는 무인은 극음과 극양의 무공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는 걸 모르시오?”
“ 아, 알고 있소. 연 공자. 하, 하지만 그 무공은.....”
더듬거리는 기운상의 목소리는 어떤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흑천의 천오백 년 꿈.
흑천에서 아직 그 꿈을 이룬 무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연우강이 그 꿈을 이루었을 것만 같았다.
“ 가립하 그 영감이 완성했소.”
“ 저, 정말입니까? 정말로 흑풍을 내공을 만들어냈단 말입니까?”
너무 감격한 기운상은 자신이 공대를 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흑풍.
주화입마에 들었을 때 발생하는 미지의 힘을 흑풍이라 하였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을 창안해 온 문파가 바로 흑천이었다. 하지만 흑풍을 완벽하게 내공으로 만든 무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흑풍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곧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다만 비슷하게 접근한 무공이 몇몇 있는데 자신이 익힌 멸천흑수마황권도 그 중의 하나였다.
“ 그렇소. 그 영감이 남긴 흑풍마라천력은 흑풍을 완벽하게 제압할 뿐 아니라 다스리기까지 하오. 흑천의 꿈은 천오백 년 전에 이루어졌소.”
“ 허허! 그분이 돌아왔더라면 우리 흑천이 그렇게 마도로 흐르지 않았을 것을....”
“ 흑풍을 연구하다 보니까 상식을 초월하는 잔인한 무공이 창안됐다는 말이구려.”
“ 그렇습니다. 천주님.”
“ 천주?”
연우강은 기운상을 빤히 쳐다보았다.
“ 흑풍의 주인은 바로 흑천의 천주입니다.”
“ 내가 가립하 그 영감의 후예라는 사실은 진작에 말했소.”
“ 왜 이제야 천주님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 그렇소.”
“ 입에 발린 말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솔직한 말을 원하십니까”
“ 입에 발린 말은 뭐고, 솔직한 말은 뭐요?”
“ 둘 다 듣고 싶다는 말이군요. 그럼 입에 발린 말, 즉 접대용 말을 먼저 하겠습니다.”
기운상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방세남 일행이 달려와 기운상 뒤편으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 천주시여, 저를 비롯한 흑천 무인은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의 길은 길고 험난하였지만, 우리 흑천의 무인들은 천주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천오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 흑천의 무인들은 그 결실을 맺었습니다. 드디어 기다렸던 천주님을 모시게 됐습니다. 신 만겁신마 기운상을 비롯한 흑천의 무인은 천주님을 모시게 된 것을 만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부디 미천한 저희들과 흑천을 이끌어 주십시오.”
“ 나쁘지 않구려. 그럼 이젠 솔직한 말을 들어봅시다.”
“ 꼭 듣고 싶습니까?”
“ 반드시.”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노후를 책임져 주시길 바랍니다.”
“ ......?”
연우강은 멍한 얼굴로 기운상을 보았다.
그런 그를 보며 기운상은 다시 입을 열었다.
“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남은 생활도 책임져 주시고, 우리가 죽었을 때 상주 노릇도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천오백 년 만에 나타난 천주에게 의미만 지우는 것 아니오?”
“ 흑천의 전통입니다.”
“ 부하들을 먹여 살리는 게 흑천의 전통이란 말이오?”
“ 그렇습니다. 천주님. 대신 몸이 움직이는 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도록 하겠습니다.”
“ 한 달에 오십 냥 정도면 되겠소?”
“ 충분합니다. 천주님.”
“ 그럼 그렇게 합시다.”
“ 감사합니다. 천주님.”
“ 그럼 첫 번째 임무를 주겠소.”
“ 하명하십시오. 천주님.”
“ 내일 점심때쯤이면 정문으로 쥐새끼들이 들어올 거요. 그들의 목을 따는 게 첫 번째 임무요.”
“ 시행하겠습니다. 천주님.”
“ 주의할 것은 그놈들 중 담대민이란 놈이 있는 데 그놈은 내 거니까 손대지 말았으면 하오.”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좋소. 일어나시오.”
연우강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