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재수없는 사람들
모두들 흩어지고 막장과 경천사마만 연우강 곁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기운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 탓이다. 주변에 누군가가 숨어있지 않으면 그런 기운이 감각에 걸려들 리가 없었다.
“ 넌?”
그런 막장을 향해 연우강이 말을 걸었다.
“ 난 이미 일천독행신을 익혔는데 굳이 내기에 참여할 필요가 없잖아.”
막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주변을 향해 있었다.
“ 여기 있으면 더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거지?”
“ 그것도 있고, 그런데.......”
막장은 말끝을 흐렸다.
“ 너무 막 퍼준다고?”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더라.”
잠룡들에게 일천독행신을 전수해 주겠다고 한 연우강의 말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는 연우강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뭔가를 줄 녀석이 절대 아니었다.
“ 막장!”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말해라!”
“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줄 때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게 뭔지 알아?”
“ 생뚱맞게 뭔 소리냐?”
“ 일단 대답부터 해봐.”
“ 난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 줄 정도로 부자로 살아보지 못했다.”
“ 그럼 지금부터 배워. 앞으론 빌려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돈을 빌려줄 때는 가장 먼저 빌려갈 사람의 한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그걸 먼저 파악해야 해.”
“ 그 한도 내에서만 빌려주라는 거냐?”
“ 맞아. 본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갚는 걸 포기해 버려. 그러고는 난 돈 없으니까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고 강짜를 부려. 그러니까 돈을 빌려줄 때는 이자까지 포함해 받을 수 잇는 만큼만 빌려줘야 해.”
“ 그거하고 잠룡들에게 일천독행신을 전수해 주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지?”
“ 잠룡 십 조 조원들은 대부분 내게 빚을 지고 있어. 장사덕처럼 빚을지지 않은 녀석들은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아.”
“ 돈을 받는다고 하면 포기하거나, 설사 빚을 지고 배운다고 해도 나중에 돈을 갚지 않을 거라는 말이냐?”
“ 바로 그거야, 막장. 그리고 돈 때문에 누구는 배우고 누구는 못 배우는 일이 생기면 위화감이 조성되게 돼. 조직에서 위화감은 조직을 해치는 치명적인 독 같은 거야. 하지만 정당한 내기는 위화감을 줄여주지.”
“ 위화감을 없애는 게 아니고 줄여준다는 거야?”
“ 너 같으면 같은 동료로 출발했는데 누구는 일천독행신을 배우고 누구는 배우지 못하면 기분 좋겠냐?”
“ 기분 더럽겠지.”
“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 그럼 내기는 핑계일 뿐이고 잠룡 십 조 모두에게 일천독행신을 가르쳐주겠다는 거네?”
“ 아냐, 약속은 약속이니까. 살수들의 머리를 가장 많이 가져온 군에만 가르쳐줄 거야.”
“ 조금 전에 말한 위화감은 어쩌고?”
“ 위화감이라는 건 누군가가 없애줄 수 있는 게 아냐. 조직 구성원들 스스로 없애야 해.”
“ 스스로 없앤다는 건.... 자기네들끼리 전수해 주기를 바라는 거냐?”
“ 너도 알겠지만 일천독행신의 대단함은 그 위력보다는 기존의 내공을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힘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잖아.”
“ 그렇지. 마치 무공을 증폭시켜 주는 약을 복용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무공이지.”
막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천독행신이 엄청난 무공이라는 건 일천 초가 간극 없이 이어진다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본인이 지니는 내공과 별개로 보조 내공을 생성해 낸다는 거였다. 보통 두 개의 내공이 한 몸에 존재하게 되면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극단적인 경우엔 주화입마에 들게 되는데 일천독행신은 그런 부작용이 전혀 없다.
더불어 일천독행신을 펼칠 때 나타나는 손동작은 검을 쥐면 검법이 되고, 권을 펼치면 권법이, 장을 펼치면 장법이 된다.
가히 천하제일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무공이었다.
“ 천재라는 녀석들이니까 일천독행신을 몇 번 펼쳐보면 금세 알아차릴 거야.”
“ 그래서?”
“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녀석들이 일천독행신을 다른 군의 대원들과 공유하면 난 오십 명의 부하를 얻게 된다는 거지.”
“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 네가 그들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데 뭘 물어봐, 인마.”
“ 나 같은 그냥 튈 것 같은데?”
“ 그럼 그들도 그렇게 하겠지. 뭐.”
“ 그래도 괜찮아?”
막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연우강을 보았다.
일천독행신을 익힌 잠룡이 도망쳐도 상관없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 내 밑에 있기 싫다고 떠나는 놈을 무슨 수로 잡아.”
“ 일천독행신을 익히고 도망쳐도 상관없다는 거야, 지금?”
“ 아! 그 말을 안 해줬구나.”
“ 무슨 말?”
“ 만일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때는,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버린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거.”
“ 버려?”
“ 가지고 있어봐야 쓰임새도 없고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은 버리는 게 나아.”
“ 그러니까 일천독행신을 버리듯 주겠단 말이야?”
“ 버리는 듯 주는 게 아니고 녀석들 앞에 버릴 거야.”
“ 내게도 그런 거냐?”
“ 난 네 앞에 일천독행신을 버렸고 넌 주웠을 뿐이야.”
“ 갑자기 짜증이 확 오르네.”
막장은 연우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 네가 짜증을 내는 건 길을 가다 돈주머니를 주운 놈이 성질내는 것과 같은 거야, 막장.”
“ 그래도 기분이 나빠. 똥싸고 뒤를 닦지 않은 것처럼 찜찜하고, 그런데 이유가 뭐야?”
“ 무슨 이유?”
“ 굳이 내 성질을 긁어가면서까지 버린다는 표현을 쓴 이유 말이야.”
“ 그게 사실이니까.”
“ 야!”
“ 막장!”
“ 말해, 새캬!”
“ 전에 말했는지 모르지만 돈이 됐든 무공이 됐든 영양이 됐든 내게 요만큼이라도 필요한 거면 절대 남을 주지 않아.”
연우강은 엄지와 검지 끝을 정확히 맞댄 손을 막장 앞으로 내밀었다.
“ 그래서?”
“ 내 손에서 나가는 건 버리는 것밖에 없어. 버린 물건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면 난 은혜를 베푼 사람이 되는 것뿐이야.”
“ 그러니까 잠룡들이 일천독행신을 익히고 나서 떠난다고 해도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을 거라고?”
“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아쉽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왜냐면 나는 일천독행신을 완벽하게 익힌 상태고, 설사 도망친 녀석들이 깊은 산중에 숨어서 무공을 완벽하게 익힌다고 해도 나보다 뛰어날 수는 없거든. 그리고 일천독행신을 익힌 녀석들이 떠나면 난 남아 있는 녀석들 모두에게 일천독행신을 버려버릴 거거든.”
“ 남아 있는 녀석들도 떠나면?”
“ 그때는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을 비급으로 만들어서 강호 전역에 뿌려야지.”
“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은 삼재검법 수준으로 전락하는 거지, 뭐.”
“ 삼재검법?”
“ 개나 소나 다 익히는 아주 흔한 무공이 된다는 뜻이야. 그리고 깊은 산중에 숨어서 죽어라 무공을 익힌 놈들은 어디 가서 일천독행신을 익혔다고 뻐길 수도 없게 되잖아.”
“ 쿡!”
막장은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대야벌의 신비이자 전설이라는 일천독행신을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그런 무공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을 연우강 말고 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역시 연우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웃을 일이 아니네, 막장.”
듣고 있던 기운상이 끼어들었다.
“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막장은 기운상을 보며 물었다.
“ 일천독행신과 일천파류흔은 지난 천오백 년 동안 대야벌의 전설이었고 신비였네. 더불어 지금도 대야벌의 수많은 무인들이 그 무공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고, 그런데 그 무공이 삼재검법처럼 흔해 빠진 무공으로 변한다면 어떻게 디겠는가?”
“ 질문의 요지가 정확하게 뭡니까?”
막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 난 대야벌의 권위에 대해 묻는 거네, 막장.”
“ 권위라고요?”
“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 막장. 지금까지는 네가 천하제일인이고 많은 사람들이 널 추앙했어. 그런데 너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무인 수십 명이 거의 동시에 나타났어. 그럼 지금까지 널 추앙했던 자들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연우강이 물었다.
“ 날 우습게 보겠지.”
“ 그런 걸 일컬어 권위의 추락이라고 하는 거야.”
“ 그러니까 네 말은 대야벌도 그렇게 된다는 거냐?”
“ 물론 경우가 다르니까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야벌에 대한 경외감은 많이 사라지게 될 거야. 그리고 천무비고에 처박혀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여덟 요괴들은 꼭지가 돌아버릴 테고.”
“ 만기팔유는 왜?”
“ 그들이 상천의 후예들이거든.”
“ 정말이냐?”
“ 응!”
“ 그러니까 일천독행신을 버린 이유가, 등을 맡길 수 있는 부하를 얻고, 대야벌의 권위를 추락시켜 벌주를 압박하고, 상천의 후예인 만기팔유를 약올리는 것까지, 전부 세 가지네?”
“ 자식, 이젠 제법 머리도 굴리고, 준비가 착착 돼가는구나.”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 너 때문에 내 머리가 나쁜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젠 머리가 나쁘진 않아, 자식아.”
막장은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 그래도 넌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게 더 어울려, 인마.”
척!
연우강은 막장의 어깨를 불끈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왼편의 무너진 건물 잔해가 있는 곳으로 사정없이 내던졌다. 그곳은 조금 전 잠룡들이 살수를 잡는다며 장력으로 무너뜨린 곳이었다.
“ 나도 그래, 자식아! 타앗!”
막장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허리춤에 있던 철혈전궁도를 뽑아냄과 동시에 전장을 향해 사정없이 휘둘렀다.
번쩍!
주변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강렬한 광채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것은 철혈전궁도법의 마지막 초식인 멸절이었다.
콰콰쾅!
막장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기절하고 말았을 터였다. 철혈전궁도에서 쏟아져 나온 푸른 광채는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새로운 형태의 강기였고, 빛에 닿는 건 모두가 가루로 부서졌다.
과거의 그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광경이었다.
“ 크아악!”
가루로 부서지는 건물 잔해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을 지른 자는 연우강의 머리를 취하기 위해 숨어 있던 오사 중 소사였다.
그는 자신의 성명절기이자 소살에게 전수해 주었던 초혼광살곡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루로 변하고 말았다.
“ 차앗!”
“ 타앗!”
“ 이야압!”
철혈전궁도법의 멸절에 가루로 변해 가는 건물 잔해 속에서 네 명이 솟구쳐 올랐다.
“ 갈!”
“ 건방진 것들!”
“ 잡놈들이 감히 천주님을!”
“ 이런 개잡종들이!”
경천사마 네 명은 살기를 쏟아내며 오사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어디 늙은 놈들이!”
배철의 몸에서도 광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연우강 근처에 있는 늙은이들이 상당한 실력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자신 또한 한때는 천하를 오시하였던 오사의 일인, 피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늙은이의 공격을 흘림과 동시에 은신술을 펼쳐 연우강에게 접근할 기회를 엿볼 셈이었다.
그러나 배철을 비롯한 네 명은 상대를 너무 몰랐다. 더구나 경천사마는 일천독행신을 익혀 과거에 비해 무공이 한 단계 더 높아진 상태가 아닌가.
쩌억! 짝!
“ 크억!”
“ 커억!”
“ 컥!”
“ 으윽!”
기운상의 멸철흑수마황권과 방세남의 전사신마권, 남도욱의 혈천장, 지철의 청랑마권을 받아친 네 명은 피를 토하며 뒤편으로 날아갔다. 단 일 수에 회복 불가능한 내상을 입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조차도 편하게 맞이할 수가 없었다.
파앗!
막장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며 가랑잎처럼 날려 가는 배철 일행을 쫓았다. 번쩍 들어올린 철혈전궁도에서 푸른 광망이 넘실댔다.
“ 타앗!”
일 장을 남겨둔 지점에서 막장은 우렁찬 고함과 함께 들어 올렸던 철혈전궁도를 힘차게 내리그었다. 일천독행신을 펼치면서 펼친 멸절은 조금 전보다 더 강했다.
번쩍!
푸스스!
이미 절명해 버린 듯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오사 일행은 가루로 흩어졌다.
“ 엄청나군.”
기운상은 놀란 얼굴로 막장을 보았다.
대야벌 백대고수 백 위에 올라 있는 막장이 저런 엄청난 무공을 보여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신마. 저 녀석은 과거에 비해 얼마나 강해졌는지 본인도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이니까, 하지만 저 정도면 최소한 백대고수 십 위 안쪽으로 놓아도 될 거야.”
“ 그런 겁니까?”
기운상은 문득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가지.”
연우강은 일행과 함께 그의 처소로 돌아왔다.
금릉 연씨 세가로 들어온 살수를 잡아내는 수색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 무렵, 각 군은 살수들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가장 많은 머리를 가져온 군은 거철산이 이끄는 후군이었다.
“ 약속대로 일천독행신은 후군에게 전수해 주겠다. 더불어 일천독행신을 익히는 순간 그 무공은 전적으로 후군 너희들의 거다. 그 무공을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광랑!”
“ 교랑, 넌 저들과 함께 정문으로 가서 진식 안에서 나오는 자들을 처리해. 그리고 시체들을 전부 건물 안으로 집어넣도록 하고.”
“ 알겠습니다. 광랑!”
교랑을 비롯한 잠룡들은 부러운 얼굴로 후군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 막장, 넌 저들에게 일천독행신을 전수해 줘.”
“ 알았다.”
막장은 후군 잠룡들을 데리고 금릉전 밖 공터로 나갔다. 그들을 지켜보던 연우강은 이층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궤짝 앞으로 다가간 그는 뚜껑을 열고 안쪽 상자 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그건 천마삼경의 뒤편에 있던 장보도였다.
장보도를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한편으로 내려놓고는 무기를 해체하며 사망궤 안으로 집어넣었다.
“ 욱 영감, 수 영감, 갈 영감은 올라오시오.”
사망묵의를 집어넣고 난 그는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 왜 그러는가?”
곧 세 사람이 연우강의 방으로 들어왔다.
“ 이것들을 똑같이 모사하시오. 점 하나라도 빼면 큰일 나오.”
연우강은 탁자 위에 있던 장보도를 마라천력으로 들어올려 욱일승에게로 보냈다.
“ 이게 뭔데 그러는가?”
욱일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빛바랜 양피지는 골동품에 대해서 문외한인 자신이 보기에도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였다.
“ 마총으로 들어가는 장보도요.”
“ .......!”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를 못해 세 사람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지, 지금 마총이라고 했는가?”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욱일승이 입을 열었다.
“ 그렇소. 천마삼경 뒤편에 있던 것들이오.”
“ 맙소사.”
욱일승을 비롯한 세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눈앞에 있는 양피지가 마총으로 들어가는 장보도란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생사림을 파멸로 몰아갔던 벌내쟁투, 그 벌내쟁투를 일으킨 사람이 다름 아닌 연우강이었던 것이다.
기절할 노릇이었다.
“ 아직 벌내쟁투는 진행 중이오. 영감. 우선 모사에 자신있는 사람이 그걸 베끼도록 하시오. 힘들면 잠룡 중에 솜씨 좋은 자를 뽑든지.”
“ 이, 이건 내가 하겠네.”
이내 정신을 차린 갈인효가 나섰다.
“ 좋소. 지필묵은 저기에 있소.”
연우강은 왼쪽 벽면에 세워진 서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 알았네.”
갈인효는 연우강이 가리킨 곳으로 가서 지필묵을 준비해 왔다.
“ 갈 영감은 지도를 베끼고, 욱 영감은 내가 부르는 대로 써 주시오.”
“ 알았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갈인효는 세 장의 지도를 베끼기 시작했고, 욱일승은 연우강의 말을 기다렸다.
갈인효를 잠시 쳐다보던 연우강은 입을 열었다.
< 친애하는 지부장께.
귀하에게 좋은 정보를 하나 줄까 하여 이 서찰을 보내게 됐소. 오늘 밤, 금릉 연씨 세가에서 대규모 폭발이 있을 거요. 그 폭발을 제대로 조사하게 되면 특히 금릉전을 세심하게 조사해야 할 거요. 그 조사를 제대로 하게 되면 지부장은 머잖아 꿈에 그리던 북경으로 들어가게 될 거요. 그럼 수고하시오.
참! 이 서찰과 같은 내용이 동창 지부로도 전달됐소.>
“ 이 서찰을 금의위 지부로 보낼 건가?”
욱일승은 다른 종이에 방금 연우강이 불렀던 내용을 적으며 물었다.
“ 출세를 원하는 자들에게 금릉 연씨 세가의 폭발 사건은 엄청난 먹이가 되오. 특히 금릉전 안에서 발견될 시체들은 황실까지 발칵 뒤집어 놓을거요. 그 책임은 담대만승과 옥처인이 져야 할 거요.”
“ 대야벌의 주인인 담대만승이 책임을 진다고 할 수는 없을 테고, 결국엔 혼세신마 옥처인이 모든 걸 뒤집어쓸 수밖에 없겠군.”
“ 내가 노리는 것도 그거요. 영감. 옥처인은 금의위나 동창 둘 중 한 곳에 수감될 거요. 연은석, 연동석과 함께.”
“ 그런데 저건 왜 모사하는 건가?”
욱일승은 갈인효가 베끼고 있는 양피지를 가리켰다.
“ 대야벌에서 우리 연씨 세가를 공격한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주려는 거요.”
“ 금의위나 동창에게 들어가도록 하겠단 말인가?”
“ 그래야 미친 듯이 조사를 할 거 아니오.”
“ 세 장 전부 여기에 둘 거란 말인가?”
“ 그럴 순 없지. 최소한 대야벌이 두 장을 보유한 걸로 해야 금의위나 동창이 방방 뛸 테니까.”
“ 한 장만 두겠단 말이군.”
“ 그렇소. 욱 영감. 그리고 세 사람은 모사한 걸 가지고 마총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오.”
“ 우리보고 그 일을 하란 말인가?”
“ 싫으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고.”
“ 아, 아니네. 우리가 하겠네.”
“ 혹시 안으로 들어가더라도 안쪽에 있는 물건을 만질 생각은 하지 마시오.”
“ 험! 난 무공에 관심이 없네. 연 공자.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도록 하게.”
“ 그래도 천마의 무공이라면 보고 싶을걸?”
“ 그, 그거야....”
“ 그건 챙겨도 좋소. 영감.”
“ 정말인가?”
욱일승은 헤벌쭉 웃었다.
무공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지만 천생 그는 무인이었다. 다른 무공은 몰라도 마도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처남의 무공이 아닌가. 견식할 수 있는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 한 자라도 알아보려면 전서체를 익혀야 할 거요. 영감. 지금 영감의 상황으로는 설사 천마의 비급이 눈앞에 있다고 해도 읽을 수 없소.”
“ 볼 생각없다니까 그러네.”
[ 정말이냐?]
바로 그때 욱일승의 귓전으로 수천월의 전음이 들려왔다.
[ 일단은 그렇게 말해야지. 천마의 무공이 보고 싶다고 애원하기엔 우리 나이가 너무 많다. 천월.]
[ 청승맞아 보인단 말이냐?]
[ 청승이 아니라 주책 맞아 보인다. ]
[ 그래도 볼 거잖아.]
[ 당연히 봐야지. 나가자마자 전서체를 해독할 수 있는 책을 구해보자.]
“ 지금 둘이 전음으로 대화하는 거지?”
“ 무슨 소린가. 잠시 딴 생각을 했을 뿐이네.”
“ 아무튼 나중에 이곳을 나갈 때 그걸 금의위 지부의 동창지부에 전달해 주고 가시오.”
“ 알았네. 연공자.”
욱일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찰을 접어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 참! 검왕 그놈들은 어떻게 됐소?”
“ 금릉 연씨 세가 안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확인했네.”
“ 그럼 그놈들도 진식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네?”
“ 그런 것 같네.”
욱일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 피라미를 잡으려고 친 그물에 대어가 걸려든 셈이네.”
“ 팔괘만상미혼진의 위력은 어느 정돈가?”
“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위력은 없소.”
“ 그런데도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 진식으로 무인을 죽이진 못하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천중수 속에서 이틀 정도 달리고 났을 때의 몸 상태가 된다고 하더라고.”
“ 천중수 속에서 이틀을 달리고 나면 내력은 물론이고 체력도 거의 고갈되겠군.”
“ 바로 그거요. 욱 영감. 검왕 일행은 우리를 쫓아온 놈들 중 가장 재수 없게 뒈진 자들로 기록될 거요.”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살아오면서 미치고 팔짝 뛴다고 말하는 놈들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그놈들을 비웃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춰 일을 추진해 가면, 설사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금세 복구할 수 있다. 즉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다.
“ 빌어먹을!”
검왕은 눈앞으로 흐르는 안개를 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한 거라고는 대야벌을 나선 현의당을 따른 것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의당 대원들이 대야벌을 넘자 은밀하게 담을 넘었다. 하지만 현의당 대원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싸움이 어떻게 진행돼 가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면 상황을 봐서 나설 참이었다.
자신들이 자리를 뜰 결심을 하게 된 건 금릉전 근처에서 들려온 비명 때문이다. 한두 번의 비명이었으면 넘어갔을 터인데, 거의 수백 명에 달하는 비명이 들려오자 더는 참지 못하고 금릉전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우르르 도망치는 현의당 무인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 건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 다른 기회를 엿볼 건지 갈등했다.
갈등을 해소시켜 준 것은 ‘당주가 죽었다!’라고 하였던 현의당 대원들의 외침이었다. 천세걸이 죽었다는 외침을 듣자마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무영인 천세걸이 죽었는데 굳이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담을 넘었다.
그런데.....
“ 몸 상태는 어떤가?”
“ 최악이네!”
검왕의 물음에 도왕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내기는 진작에 바닥났고 지금은 육체적인 힘에 의존하여 걷는 중이다. 꾸준히 무공을 익혀왔고, 몸 관리를 게을리 한 적은 없지만, 나이는 벌써 팔십.
체력이 버텨줄 리가 없었다.
만일 지금 순간에 누군가의 공격을 받는다면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당하고 말 터였다.
“ 운기행공을 해보는 건 어떤가?”
“ 적이 그 순간을 노리고 있다면 그땐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되네.”
도왕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 또한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했다. 운기행공을 하다가 기습을 당하느니 힘이 들더라도 움직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 그렇지.”
검왕을 비롯한 네 명은 천천히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다리가 풀려 걷기도 힘든 지경이 됐을 즈음 주변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안개가 엷어져 있었던 것이다. 진식을 빠져나갈 수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 밖에 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네.”
일행 중 가장 신중한 도왕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 그럼 어떻게 하잔 말인가?”
“ 대기가 많이 가벼워졌으니까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도록 하세. 완전한 운기행공은 불가능하겠지만 몸을 지킬 정도로는 회복할 수 있을 거네.”
“ 그렇게 하세.”
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검왕과 도왕은 운기행공을 하는 사이에 권왕과 독왕은 호법을 섰다. 두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주변을 살폈다.
“ 바보 같은 짓이야.”
“ 헉!”
“ 억!”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권왕과 독왕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들은 고개를 홱 돌렸다.
“ 너희들은?”
권왕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일 장 떨어진 곳에서 연우강을 비롯한 잠룡 십 조 무이들이 이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진식은 방금 해제됐어.”
“ 해, 해진됐다고?”
권왕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녀석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방을 가득 채웠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주변 전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은 금릉 연씨 세가 정문 앞이었다.
“ 맞아. 동시에 너희들이 죽을 시간이기도 하지.”
연우강은 묵사를 뽑아듦과 동시에 권왕 일행을 향해 몸을 날렸다.
“ 감히 잠룡 놈들이.....”
급하다 보면 본인이 처한 상황을 쉽게 잊는다는 말이 맞았다. 권왕은 내력이 고갈됐음은 물론이고 서 있을 힘조차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몸을 날려오는 연우강을 향해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그의 성명절기인 풍뢰마풍권이었다. 하지만 그의 권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연우강의 검을 막아냈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스악!
허공을 가른 묵사가 권왕의 목 앞에 우뚝 멈췄다.
“ 다시 말해 봐라, 권왕.”
연우강은 권왕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 우, 우린 자네들을 해치려고 나온 게 아니라 무영을 없애러 나왔네. 그러니까....”
“ 살려달라고?”
“ 그, 그렇네. 연 공자.”
권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 너도?”
연우강의 시선이 독왕에게로 향했다.
“ 우린 연 공자와 원한을 맺은 적이 없네.”
연우강을 보는 독왕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잔뜩 질려 있었다.
“ 그럼 이제부터 맺자고.”
연우강은 차갑게 웃으며 묵사를 사정없이 당겼다.
“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권왕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 잔인한 놈!”
독왕은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너희들은 유희 삼아 대야벌을 나섰는지 모르지만.....”
푸욱!
방향을 바꾼 묵사가 독왕의 뱃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 커억!”
독왕은 멍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 난 이번 전쟁에 목숨을 걸었어, 새꺄!”
연우강은 묵사를 뽑아냄과 동시에 독왕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 커억!”
두 번째로 독왕의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독왕의 목을 잘라버린 연우강은 곧바로 검왕과 도왕을 향해 다가갔다. 검왕과 도왕은 아직 운기행공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놈이라도 눈을 감고 있는 자를 향해 검을 쉽게 휘두르지 못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아니, 바람이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바람으로 끝나야 했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연우강은 초연한 척 앉아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묵사를 휘둘렀다.
번쩍!
차가운 기운이 밀려오자 두 사람은 급히 눈을 떴다.
“ 개, 개자.... 크악!”
“ 아악!”
죽음을 알리는 비명이 두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두 눈을 부릅뜬 검왕과 도왕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 개자식이 아니고 개독새다, 검왕.”
연우강은 쓰러진 검왕의 옷에 묵사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룡들은 말없이 연우강을 쳐다보았다.
저항 능력을 상실한 자들을 없애는데도 한치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 오늘을 똑똑히 기억해라. 적에게 베푸는 자비는 훗날 날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다. 적이 어떤 상태이건 간에 끝낼 수 있을 때 끝장을 내라. 그래야 두 다리 뻗고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있다.”
“ 알겠습니다. 광랑.”
잠룡 십 조는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 그리고, 시체를 금릉전 근처 건물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바로 떠나라. 너희들이 다시 모일 장소는 사천 대설산 남쪽에 있는 구룡의 구룡객잔이다.”
“ 잠수 타는 겁니까?”
이철상이 물었다.
“ 그렇다. 다음 일을 위해 철저하게 잠수를 타야 한다. 잠룡 십 조는 사천에 들어가지도 않은 걸로 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알겠습니다. 광랑!”
“ 좋다. 시체들을 정리하고 당장 떠나라!”
“ 사천에서 뵙겠습니다. 광랑!”
“ 사천에서 뵙겠습니다.”
잠룡들은 연우강에게 인사를 하고 시체들을 안쪽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 우리만 가요?”
머뭇머뭇하던 남궁운화는 연우강 곁으로 다가섰다.
“ 전 여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남궁 소저.”
“ 그러니까 우리만 간다는 말이네요.”
“ 그렇습니다.”
“ 얼굴도 바꿀 거예요?”
“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 궤짝도 안 들고 가고?”
“ 약만 가지고 갈 겁니다.”
“ 음! 알았어요.”
남궁운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 어째 사고를 칠 것 같은 분위긴데....”
연우강은 안으로 들어가는 남궁운화의 등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